“음, 그건 일부러 속이려고 한건 아닐 거야... 그건 그냥......
내가 그 사람 안중에 없어서 그래.”
여자는 기어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사람한테 중요한 건 성적인 즐거움이지. 마누라가 아니니까.
그래서 새로 찾은 메조 아가씨에게 마누라가 있다고 얘기하는 걸 까먹었을 거야.”
후우, 담배 연기를 뿜으며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 나도 그렇거든. 내 수캐들이 1순위야. 그래서 가끔은
서운하다가도 괜찮고, 뭐 그래. 아~ 어렵다. 어려워. 나 어려운건 설명 잘 못해.
대충 알아들어주면 좋겠는데? 자기 똘똘하잖아? 오늘 와서 보니 학교도 괜찮은데
다니고 있네....... 공부머리도 좀 있나봐.”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남편을 사랑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 물론 사랑하지.”
“그런데 어떻게 그래요?”
“지금까지 그거 설명하고 있었잖아. 난 사랑보다 성적인 즐거움이 우선이고,
내 남편도 그렇고. 그래서 우린 이렇게 살기로 합의 봤어. 그것뿐이야.”
“.......”
“이젠 이해가 됐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됐지만 마음으론
여전히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뭐 자기가 이해 못해도 할 수 없어. 우리 커플이 예외적인 거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내 남편하고 잘해보라는 거야.”
이게 또 뭔 소리야. 나는 울컥해서 받아쳤다.
“자기 남편하고 잘 해보라니 제정신이세요?”
“어....... 좀 이상했나?”
“엄청 이상해요.”
그 때 종업원이 다가와 여자를 제지했다. 담배를 꺼주든지,
아니면 흡연석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다. 재빨리 물컵에 담배를 던져 넣으며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종업원보고 얼른 가버리라는 노골적인 액션이다.
떨떠름한 표정의 종업원이 카운터로 돌아가자, 여자가 말을 잇는다.
“아~ 답답하다 답답해.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그래. 이렇게 말해보면 어때?
내가 잘해보라고 한 건 사실 내 남편이 아냐.”
“.......그게 대체 무슨 말......”
“남편으로서의 영민씨가 아니라 새디로서의 영민씨랑 잘해보라고 한 거야.”
“.......”
“사실 영민씨 남편으론 영 별로야. 변태적인 성욕구 때문에 평범한 성관계가
안 되는 사람이거든. 마누라랑 한집에서 같이 살지도 못하고.
남편이 바로 사람들이 욕하는 변태성욕자나 성도착자, 뭐 그런 거 아니겠어?
하지만 그건 내가 감수할 부분이고, 자기는 그냥 훌륭한 새디인 영민씨랑
즐기면 된다 이거야. 얼마나 좋아? 나 같으면 막 신나겠다. 책임질 것도 없고.......”
이 아줌만 자기도 새디에 펨돔이면서 남편만 성도착자로 몰고 있네.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대충 무슨 소린지 알 것 같아요.”
여자는 눈에 뜨이게 기뻐했다.
“오케이! 더 이상은 설명 안해도 되지? 근데, 그 날 이후 혹시 남편한테 연락 왔었어?”
“아뇨. 전혀.”
“그렇구나. 역시 내가 오길 잘했네. 우리 남편한테 연락 좀 해봐.”
나는 폭발할 것 같은 심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남편 분하고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요.”
여자의 눈썹이 꿈틀댔다. 단단히 화가 난 줄 알았는데, 곧이어 흘러나온
여자의 목소리는 물기가 어린 처량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부탁이야. 제발.”
“아무리 그러셔도.......”
“자기 나한테 빚 있잖아. 잊었어? 나랑 내기한 거.”
“......그건.......”
“그냥 연락 한 번만 해주면 좋겠어.”
여자의 목소리가 간드러진다.
“응? 모리씨?”
#11
나는 계속 졸라대는 여자를 겨우 설득하여, 직접 전화하진 않고 문자만
보내보는 것으로 합의했다. 여자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이더니
카페를 떠났다. 여자가 나 먹으라고 시킨 것 같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딸기빙수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흥건하게 녹아서 거의 물이 되어 있다.
문자라. 뭐라고 말해야 하지.
녹은 빙수처럼 머릿속도 곤죽이 된 것 같다. 결국 나는 대책 없이 손가락을 놀렸다.
‘잘 지내고 계세요?’
5분 남짓 지나서 답장이 왔다.
‘네. 모리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그날 그렇게 나가신 뒤로 계속 마음이 쓰였습니다.’
상투적인 내 문자에 정중히 대답한다. 마음이 좀 풀리는 것 같다.
‘그 날은 죄송했어요.’
‘아닙니다. 내가 플레이 중에 합의하지 않은 행동을 해서 모리님을
당황하게 한 것 같습니다. 늦었지만 사과드립니다.’
사과를 받으니 기분이 좀 나아지긴 했는데, 이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어쨌든 ‘연락’은 했으니까 약속은 지킨 거겠지? 답장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휙, 하고 연속한 문자가 날아온다.
‘아마 내일쯤 와이프가 모리님을 찾아갈지도 몰라요. 말리고 싶은데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서. 양해 부탁해요. 강하게 말하면 오래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자음 모음을 꾹꾹 찍어 답문을 보냈다.
‘벌써 왔다 가셨어요.’
한동안 문자가 없다. 당황한 것 같다. 물이 다 된 빙수를 스푼으로
휙휙 젓고 있는데 휘익, 하고 문자 소리가 났다.
‘폐를 많이 끼치는군요.’
기분 탓인가? 남자의 한숨 소리도 함께 들리는 듯하다.
마음이 좀 누그러져서 나는 답문을 썼다.
‘그럼... 지금까지 쓴 글은 어떻게 보여드릴까요?’
그렇다. 남자와 나는 공동의 목적이 있었다. 남자의 플을, 메조의 시각에서
관찰하고 글로 옮겨 써 보기. 그걸 위해서 남자는 자신의 소행성 B -612를
기꺼이 공개했던 게 아닌가. 잠시의 텀 뒤에 남자의 문자가 왔다.
‘어디까지 썼나요?’
‘거의 다요. 다듬고 있긴 하지만.......’
‘오늘 볼 수 있나요?’
‘안 돼요. 다 완성한 뒤에 보여드릴게요.’
‘다 완성한 뒤에? 얼마나 더 걸리죠?’
‘잘 모르겠어요.’
거의 실시간으로 날아오던 문자가 뚝 멈췄다. 5분, 아니, 10분인가?
휘익, 남자의 문자가 날아와 핸드폰 액정 위에서 한번 깜빡, 한다.
‘당신. 미켈란젤로군요.’
#12
이 사람은 아무래도 나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문자를 보내 놓으면, 난 궁금해서 당연히 참질 못한다.
결국 나는 전화를 했다. 그리고 여보세요, 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짜고짜 질문부터 했다.
“미켈란젤로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모리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 알죠? 아담과 신이 손가락 맞대고 있는.”
“네. 그런데요?”
“그게 사실 독립된 그림이 아니고,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일부에요.
천장화 전체로 보면 150평이 넘는 대작이죠. 율리우스 2세 교황의 요청으로,
미켈란젤로가 4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렸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나에게,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교황이고, 모리님은 미켈란젤로 같아서요.”
“영민씨가 교황님이시라구요?”
“네. 상황이 꼭 그렇군요. 미켈란젤로는 천장화 작업을 하면서 발판을
아주 크게 만들어 천장을 다 덮어버렸어요. 그리고 자신이 완성하기 전까진
미공개로 작업을 진행하겠다고 했죠. 의뢰자인 교황이 진행상황을
보고 싶어 했는데도 일 년이 넘게 보여주지 않았어요.
결국 교황이 포기하고, 그럼 언제쯤 완성되겠느냐 물었더니
‘그냥 제가 벽화를 끝내는 날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랬죠.
불손한 대답에 교황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나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요?”
“때렸습니다.”
“때려요? 누가요?”
“교황이 미켈란젤로를 몽둥이로 개 패듯 때렸습니다.”
선뜻 상상되지 않는 장면이어서 나는 눈만 크게 뜨고 대답을 못했다.
남자도 대답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던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뒤로 열 받은 미켈란젤로가 다른 도시로 잠시 도망가긴 합니다만,
결국 돌아와서 그림을 마쳤죠. 다 완성된 뒤에나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언제 완성되는지도 안 알려주는 모리님을 보니 이 일화가 생각나는군요.”
“저는 프로 글쟁이도 아닌데, 미켈란젤로에 비교하시니 민망하네요.”
“미켈란젤로도 프로 화가가 아니었어요. 조각가였지요.”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써 볼게요.”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하기도 했지만,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기도 했다. 늘 그래 왔다. 침묵 뒤에 튀어나오는
남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했던 것 같다.
“회초리가 모리님 글 쓰는 데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 이번에는 예상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렇다.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언젠가는 나에게도 손을 내밀 줄을. 이 남자는 자신의 눈에 들어온
메조를 그냥 내버려둘 정도로 욕심 없는 사람이 아니다. 맛나 보이는 건
무엇이든 물어뜯는 육식동물이자, 야수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구애는 상상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부부섭의 얼굴과, 방금 전까지 내 앞에 있었던 여자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간다.
“......하지만 영민씨 소행성은 만원이잖아요.”
소행성? 남자가 입 안에서 단어를 한 번 굴려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자신의 아파트 동 수와 호수가 소설 [어린왕자]의 소행성 명과 일치한다는
데서 온 농담임을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이런 점마저, 너무 좋다.
좋다고? 내가 지금 좋다고 했나?
“아뇨. 지금은 텅 비어 있어요. 여우와 장미 모두 떠났으니까. 소행성엔 어린왕자 뿐입니다.”
“그 부부는.......”
“계약 종료죠. 임신했으니까요. 애초에 그렇게 계약이 되어 있었어요.
일주일이 좀 넘었군요. 내보낸 지.”
그럼, 언제 내 소행성으로 오겠어요? 목소리도 없이 남자가 묻는다.
내가 대답하기 전엔 결코 다른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긴 침묵 뒤에, 내가 말했다.
“다음 주 수요일 어떠세요?”
========================================
야한 내용이 없어서 어떠실지^^;
내용 전개상 필요한지라...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해용 헤헤
내가 그 사람 안중에 없어서 그래.”
여자는 기어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사람한테 중요한 건 성적인 즐거움이지. 마누라가 아니니까.
그래서 새로 찾은 메조 아가씨에게 마누라가 있다고 얘기하는 걸 까먹었을 거야.”
후우, 담배 연기를 뿜으며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 나도 그렇거든. 내 수캐들이 1순위야. 그래서 가끔은
서운하다가도 괜찮고, 뭐 그래. 아~ 어렵다. 어려워. 나 어려운건 설명 잘 못해.
대충 알아들어주면 좋겠는데? 자기 똘똘하잖아? 오늘 와서 보니 학교도 괜찮은데
다니고 있네....... 공부머리도 좀 있나봐.”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남편을 사랑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 물론 사랑하지.”
“그런데 어떻게 그래요?”
“지금까지 그거 설명하고 있었잖아. 난 사랑보다 성적인 즐거움이 우선이고,
내 남편도 그렇고. 그래서 우린 이렇게 살기로 합의 봤어. 그것뿐이야.”
“.......”
“이젠 이해가 됐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됐지만 마음으론
여전히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뭐 자기가 이해 못해도 할 수 없어. 우리 커플이 예외적인 거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내 남편하고 잘해보라는 거야.”
이게 또 뭔 소리야. 나는 울컥해서 받아쳤다.
“자기 남편하고 잘 해보라니 제정신이세요?”
“어....... 좀 이상했나?”
“엄청 이상해요.”
그 때 종업원이 다가와 여자를 제지했다. 담배를 꺼주든지,
아니면 흡연석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다. 재빨리 물컵에 담배를 던져 넣으며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종업원보고 얼른 가버리라는 노골적인 액션이다.
떨떠름한 표정의 종업원이 카운터로 돌아가자, 여자가 말을 잇는다.
“아~ 답답하다 답답해.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그래. 이렇게 말해보면 어때?
내가 잘해보라고 한 건 사실 내 남편이 아냐.”
“.......그게 대체 무슨 말......”
“남편으로서의 영민씨가 아니라 새디로서의 영민씨랑 잘해보라고 한 거야.”
“.......”
“사실 영민씨 남편으론 영 별로야. 변태적인 성욕구 때문에 평범한 성관계가
안 되는 사람이거든. 마누라랑 한집에서 같이 살지도 못하고.
남편이 바로 사람들이 욕하는 변태성욕자나 성도착자, 뭐 그런 거 아니겠어?
하지만 그건 내가 감수할 부분이고, 자기는 그냥 훌륭한 새디인 영민씨랑
즐기면 된다 이거야. 얼마나 좋아? 나 같으면 막 신나겠다. 책임질 것도 없고.......”
이 아줌만 자기도 새디에 펨돔이면서 남편만 성도착자로 몰고 있네.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대충 무슨 소린지 알 것 같아요.”
여자는 눈에 뜨이게 기뻐했다.
“오케이! 더 이상은 설명 안해도 되지? 근데, 그 날 이후 혹시 남편한테 연락 왔었어?”
“아뇨. 전혀.”
“그렇구나. 역시 내가 오길 잘했네. 우리 남편한테 연락 좀 해봐.”
나는 폭발할 것 같은 심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남편 분하고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요.”
여자의 눈썹이 꿈틀댔다. 단단히 화가 난 줄 알았는데, 곧이어 흘러나온
여자의 목소리는 물기가 어린 처량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부탁이야. 제발.”
“아무리 그러셔도.......”
“자기 나한테 빚 있잖아. 잊었어? 나랑 내기한 거.”
“......그건.......”
“그냥 연락 한 번만 해주면 좋겠어.”
여자의 목소리가 간드러진다.
“응? 모리씨?”
#11
나는 계속 졸라대는 여자를 겨우 설득하여, 직접 전화하진 않고 문자만
보내보는 것으로 합의했다. 여자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이더니
카페를 떠났다. 여자가 나 먹으라고 시킨 것 같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딸기빙수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흥건하게 녹아서 거의 물이 되어 있다.
문자라. 뭐라고 말해야 하지.
녹은 빙수처럼 머릿속도 곤죽이 된 것 같다. 결국 나는 대책 없이 손가락을 놀렸다.
‘잘 지내고 계세요?’
5분 남짓 지나서 답장이 왔다.
‘네. 모리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그날 그렇게 나가신 뒤로 계속 마음이 쓰였습니다.’
상투적인 내 문자에 정중히 대답한다. 마음이 좀 풀리는 것 같다.
‘그 날은 죄송했어요.’
‘아닙니다. 내가 플레이 중에 합의하지 않은 행동을 해서 모리님을
당황하게 한 것 같습니다. 늦었지만 사과드립니다.’
사과를 받으니 기분이 좀 나아지긴 했는데, 이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어쨌든 ‘연락’은 했으니까 약속은 지킨 거겠지? 답장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휙, 하고 연속한 문자가 날아온다.
‘아마 내일쯤 와이프가 모리님을 찾아갈지도 몰라요. 말리고 싶은데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서. 양해 부탁해요. 강하게 말하면 오래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자음 모음을 꾹꾹 찍어 답문을 보냈다.
‘벌써 왔다 가셨어요.’
한동안 문자가 없다. 당황한 것 같다. 물이 다 된 빙수를 스푼으로
휙휙 젓고 있는데 휘익, 하고 문자 소리가 났다.
‘폐를 많이 끼치는군요.’
기분 탓인가? 남자의 한숨 소리도 함께 들리는 듯하다.
마음이 좀 누그러져서 나는 답문을 썼다.
‘그럼... 지금까지 쓴 글은 어떻게 보여드릴까요?’
그렇다. 남자와 나는 공동의 목적이 있었다. 남자의 플을, 메조의 시각에서
관찰하고 글로 옮겨 써 보기. 그걸 위해서 남자는 자신의 소행성 B -612를
기꺼이 공개했던 게 아닌가. 잠시의 텀 뒤에 남자의 문자가 왔다.
‘어디까지 썼나요?’
‘거의 다요. 다듬고 있긴 하지만.......’
‘오늘 볼 수 있나요?’
‘안 돼요. 다 완성한 뒤에 보여드릴게요.’
‘다 완성한 뒤에? 얼마나 더 걸리죠?’
‘잘 모르겠어요.’
거의 실시간으로 날아오던 문자가 뚝 멈췄다. 5분, 아니, 10분인가?
휘익, 남자의 문자가 날아와 핸드폰 액정 위에서 한번 깜빡, 한다.
‘당신. 미켈란젤로군요.’
#12
이 사람은 아무래도 나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문자를 보내 놓으면, 난 궁금해서 당연히 참질 못한다.
결국 나는 전화를 했다. 그리고 여보세요, 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짜고짜 질문부터 했다.
“미켈란젤로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모리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 알죠? 아담과 신이 손가락 맞대고 있는.”
“네. 그런데요?”
“그게 사실 독립된 그림이 아니고,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일부에요.
천장화 전체로 보면 150평이 넘는 대작이죠. 율리우스 2세 교황의 요청으로,
미켈란젤로가 4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렸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나에게,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교황이고, 모리님은 미켈란젤로 같아서요.”
“영민씨가 교황님이시라구요?”
“네. 상황이 꼭 그렇군요. 미켈란젤로는 천장화 작업을 하면서 발판을
아주 크게 만들어 천장을 다 덮어버렸어요. 그리고 자신이 완성하기 전까진
미공개로 작업을 진행하겠다고 했죠. 의뢰자인 교황이 진행상황을
보고 싶어 했는데도 일 년이 넘게 보여주지 않았어요.
결국 교황이 포기하고, 그럼 언제쯤 완성되겠느냐 물었더니
‘그냥 제가 벽화를 끝내는 날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랬죠.
불손한 대답에 교황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나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요?”
“때렸습니다.”
“때려요? 누가요?”
“교황이 미켈란젤로를 몽둥이로 개 패듯 때렸습니다.”
선뜻 상상되지 않는 장면이어서 나는 눈만 크게 뜨고 대답을 못했다.
남자도 대답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던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뒤로 열 받은 미켈란젤로가 다른 도시로 잠시 도망가긴 합니다만,
결국 돌아와서 그림을 마쳤죠. 다 완성된 뒤에나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언제 완성되는지도 안 알려주는 모리님을 보니 이 일화가 생각나는군요.”
“저는 프로 글쟁이도 아닌데, 미켈란젤로에 비교하시니 민망하네요.”
“미켈란젤로도 프로 화가가 아니었어요. 조각가였지요.”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써 볼게요.”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하기도 했지만,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기도 했다. 늘 그래 왔다. 침묵 뒤에 튀어나오는
남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했던 것 같다.
“회초리가 모리님 글 쓰는 데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 이번에는 예상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렇다.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언젠가는 나에게도 손을 내밀 줄을. 이 남자는 자신의 눈에 들어온
메조를 그냥 내버려둘 정도로 욕심 없는 사람이 아니다. 맛나 보이는 건
무엇이든 물어뜯는 육식동물이자, 야수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구애는 상상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부부섭의 얼굴과, 방금 전까지 내 앞에 있었던 여자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간다.
“......하지만 영민씨 소행성은 만원이잖아요.”
소행성? 남자가 입 안에서 단어를 한 번 굴려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자신의 아파트 동 수와 호수가 소설 [어린왕자]의 소행성 명과 일치한다는
데서 온 농담임을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이런 점마저, 너무 좋다.
좋다고? 내가 지금 좋다고 했나?
“아뇨. 지금은 텅 비어 있어요. 여우와 장미 모두 떠났으니까. 소행성엔 어린왕자 뿐입니다.”
“그 부부는.......”
“계약 종료죠. 임신했으니까요. 애초에 그렇게 계약이 되어 있었어요.
일주일이 좀 넘었군요. 내보낸 지.”
그럼, 언제 내 소행성으로 오겠어요? 목소리도 없이 남자가 묻는다.
내가 대답하기 전엔 결코 다른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긴 침묵 뒤에, 내가 말했다.
“다음 주 수요일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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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내용이 없어서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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