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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본성 - 1부3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01:50 740회 0건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것일까?

멍한 상태로 화면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동수와 내가 한달 전 쯤 이 모텔방에서 나눴던 것이 분명한 대화들이 볼륨을 높힌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서로 부둥켜안고 대화 중간 중간 농도 짙은 키스를 하는 모습......분명 나와 동수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해야하는 모습이 고화질로 모니터화면에 비추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영상이 존재할 수가 있는가? 또 어떻게 최사장의 손에 들어있을 수 있는가?

문득, 수개월 전, 태연하게 날 여자친구라고 소개한 동수가 떠올랐다. 동수가 내 발목을 잡기 위해 찍은 것일까? 그러나 동수가 그동안 날 진심으로 위했던 모습들, 또 최근까지도 언제라도 날 놓아줄 준비가 되있던 것처럼 대했던 모습들 역시 생생하다. 동수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다가 문득 최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의 눈빛이 떠올랐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불편한 시선이 이후에도 한참이나 찝찝했더랬다. 그렇다면 최사장이 어떻게, 왜 갑자기......??

급격한 정신적 혼란을 뚫고 내 눈과 귀로...... 두 남녀가 서로를 갈망하며 껴안고 애무하다 마침내 서로의 옷을 거칠게 벗기는 장면이, 그리고 시시덕거림을 서서히 잠식해가는 격렬한 신음소리가 볼륨을 높인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그것들은, 좀처럼 받아들여지기 힘든 현재의 상황이 지금 바로 내가 처한 현실이라고 쐐기를 박으며, 어제만 해도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 나한테 뭘 어쩌겠어?’하고 외면하려던 최사장의 협박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끔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쿵쾅거리고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애써 잠재우면서 열심히 되뇌었다.

‘이 따위 협박에 넘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나올 수 있어. 정신 차리자, 윤소연.’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이면서 최사장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죠? 이런 짓을 하면...사장님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도끼눈을 뜨고 똑바로 최사장을 노려보면서 날카롭게 쏘아댄 내 목소리는 분명 ‘난 당신에게 그냥 당하고 있지는 않을 거야’ 라는 확실한 의사표명이었다.

이런 동영상을 찍어서 협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범죄다!
그러니 저 인간이 내 약점을 쥐고 어떤 걸 요구해오든, 나는 결코 휘둘리지 않으리라......더러운 최사장의 농간에 나는 결코 놀아나지 않으리라.
내 굳은 결심이 최사장의 눈에도 읽혔는지......갑자기 그가 피씩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소연씨, 그런데 말이에요.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저 방에다가 카메라를 설치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
“정확한 타이밍에 딱 맞춰서, 그것도 소연씨 얼굴과 몸만 적나라하게....나오게 말이야.”

최사장은 그러면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상은 바야흐로...동수의 육봉을 정성스럽게 핥는 내 얼굴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화면 속 동수의 손이 내 턱을 쓸다가 몸을 들어 올려 뒷치기 자세로 바꾸게 했고 곧이어 팬티조차 입지 않은...나의 맨 엉덩이가 카메라의 초점에 잡혔다. 마치 포르노 영상에서나 보던 것처럼...엉덩이 사이로 조개속살은 물론 그 위에 자리 잡은 항문까지 드러났다.

나는 더 이상 화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물밀 듯 밀려오는 수치심에 손끝이 덜덜 떨렸다. 마치 최사장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화면 속의 농도짙은 행위들은 나의 몸짓과 반응에만 초점이 맞춰져있었던 것을...한사코 부정하고 싶은 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저것을 찍은 사람은......필시 소연씨가 엉덩이를 어느 쪽으로 돌릴 지까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일테지.”

최사장의 목소리는 마치 퀴즈문제 푸는 것을 도와주듯 태연자약했다.

“그런데 말이야......아무리 봐도 엉덩이가 하~~얀게...보기보다 훨씬 더 탐스러운데~? 처음 봤을 때부터 동수가 취향 하나는 확실하다 생각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

짜아아악-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었다.
나는 최사장의 얼굴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동수가 이런 짓을 꾸몄을 리가 없다고, 분명 최사장 혼자 꾸며놓고 동수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이리라고, 그렇게 마음 속으로 동수를 옹호했다.

내가 다시 만난 동수는 분명 예전과 달랐다. 그는 최선을 다해 나를 배려했고 나에게 잘해주고자 애써왔음을......나는 만날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비록 남자친구인 지훈을 두고서......동수와의 비밀스런 만남을 마지못한 것으로 치부하면서도, 나는 분명 그동안 동수에게서 또 다른 위안을 얻어왔고 그를 마음 한 켠에 담아왔던 것이었다. 비록 동수란 존재로 인해 지훈과의 결혼을 망설여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그렇다고 최사장이 동수를 저질적으로 모함하는 것은 용납지 못할 일이었다.

내게 뺨을 맞은 최사장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왼쪽 손으로 붉어진 왼쪽 뺨을 어루만지는 최사장의 표정은 여전히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이런 행동...나중에 후회하게 될텐데...?”
“동수는...동수는 이런 짓을 꾸밀 애가 아니에요. 더군다나 나한테는 더욱더...그러니 괜히 엄한 사람 끌어들이지 말아요.”

내 말에 최사장은 놀랍다는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웃었다.

“오! 소연씨가 동수를 그렇게나 아끼고 있었나? 난 미처 몰랐는데......그럼 혹시 어제 같이 지훈이와 결혼을 약속했다 말하는 순간에도, 속으론 동수를 생각하고 있었나? 전화통화 하던걸 들어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던데.”
“나, 난 지훈씨 뿐이에요! 동수랑은 정말 아무 사이도......”

나는 동수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최사장이 틀어논 영상을 바로 앞에 두고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소연씨, 동수랑 그렇게 붙어먹고선...뒤로는 결혼을 몰래 준비한다길래...얼마나 잘난 남잘 잡았나 궁금했는데...내가 아는 사람, 그것도 지훈이였다니, 어제 난 정말 놀랐다고....”
“......”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어깨를 으쓱 들었다가 놓는 최사장의 말에......나는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동수랑은 즐길 수 있을 때 까지 계속 즐기고, 결혼은 조건 좋은 지훈이와 한다? 그런건가, 소연씨?”

그는 내 안에 애써 숨기려했던 죄책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내가 동수의 마음을 알면서도 끝내 외면했던 것에 대한...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지훈을 속여왔다는 것에 대한.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대응하려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나왔다.

“...그래서 원하는게 뭐에요? 지금 나랑 지훈씨랑 결혼하는걸 막기라도 하겠단 건가요?....”
“후후후...소연씨는 지훈이하고의 결혼, 포기할 수 있나?”
“......?”
“소연씨는 어쨌든 동수를 버리고 지훈이을 택한 거잖아요? 그런 지훈이를 쉽게 포기할 수 있냐고.”
“지금 나한테 이러는게......포기하라고 하는 게 아니면 뭔데요???!”

내 물음에...최사장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꼭...그런 것은 아닌데......아무리 그래도 남의 중대한 결혼계획을 내가 망칠 수야 있나, 그렇게 한다고 나한테 좋을 게 뭐라고?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크큭”

그는 불편할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 그럼 나한테 도대체 왜이러는 거에요?”
“지금까지 지훈을 두고도 동수하고 만나온걸보면 소연씨, 꽤 즐길 줄 아는 여자같아서 말이지......근데 사실 말야, 즐기는게 뭐 나쁜 건가?? 그렇지 않아요? 사실 난 별로 나쁘다고 생각 안해.”

좀 전까지만 해도 날 심판하고 죄를 물을 것처럼 굴던 그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날 옹호해주고 싶어지기라도 한 듯 말투를 바꾸더니, 한 손으로 내 턱을 살짝 치켜세웠다.

“내말은, 이왕 즐기는 거, 나하고도 좀 즐기자는 거지. 소연씨, 보면 볼수록 내 스타일이란 말야...”

......분노와 수치심이 몰려왔다.
태어나서 한번도...내게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남자는 없었다

그러고보니 동수의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눈빛이 영 찜찜했더랬다.
어차피 두 번 볼 사이 아니라 여겨 잊고 있었는데......

내 머릿속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동수와의 잠자리 영상을 몰래 찍히고 그걸로 협박을 당하고 있는 그 이면에는, 그러니까 동수의 복수심이나 집착도 아니고 지훈을 속인 데에 대한 징벌도 아닌, 다만 그걸 이용해 나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보고 싶다는 최사장의 더럽고 추잡한 욕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되자, 순간 두려움도 죄책감도 사그러들어 나는 당당하게 최사장이 내 손목을 잡으려는 것을 세차게 뿌리칠 수 있었다.

“이런이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잘 들어요..지훈씨하고의 결혼을 가지고 날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에요. 사장님같은 사람한테 고작 이깐 일로 놀아나느니, 차라리 지훈씨하고 결혼 안하고 말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쾅!!!

말을 마치자마자 모텔 방을 뛰쳐나온 나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탔다.
방을 나오기 전 그의 얼굴에 한층 사악한 미소가 서렸던 것은 애써 고개를 흔들어 지웠다.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모텔에서 멀리 떨어진 큰 길로 나와서 간신히 숨을 골랐다.

너무나 한순간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
최사장이 지훈씨와 아는 사이인데다...동수와의 섹스 영상....그리고 최사장의 협박까지......

비록 최사장의 앞에서 한 치도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고 나오긴 했으나, 나는 갑작스럽게 닥친 근 이틀간의 일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최사장이......동수와 내가 모텔에서 그러고 있는 영상을 가지고 있는걸까?
나는 동수를 믿으면서도, 또 곰곰이 생각해보면 동수를 통하지 않고는 최사장이 그런 영상을 지닐 수 있는게 불가능해보였기에 괴로웠다.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동수가 준 핸드폰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핸드폰에 하나밖에 저장되어있지 않은 전화번호가 최근통화목록에 줄줄이 떠 있었다.
그동안 동수와 나와의 사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멍하니 길거리를 정처 없이 왔다 갔다 하다가 동수의 집 근처로 향했다.
그 앞에 가서도 통화버튼을 누를까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두려웠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기본 통화음이 몇 번 울리고 나서 동수가 전화를 받았다.
할 얘기가 있다고 근처 까페에서 만나자고 하였더니 순순히 나오겠다고 하였다.

조금 뒤 나타난 동수는 약간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봐도 내게 앙심을 품고 최사장과 더러운 계획을 꾸민 얼굴이 아니었다.

“...늦은 시간에 왠일이야? 이제 나 안 만날거라며...”
“동수야...나 오늘 너네 회사 사장님 만났어.”

그렇게 말하고 동수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는데...그는 도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사장님...?”
“응. 동수야, 너 아니지...? 너가 그런거....아니라고 해. 응?”
“무슨 말이야???뭐가 아니란거야......제대로 말해봐~~”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 동수의 눈동자는 점점 커져갔다. 말을 마치고 난 뒤 몹시 어두워진 동수의 낯빛은 역시 이 일이 그가 꾸민짓이 아니란 걸 말해주는 듯 했다. 나는 용기를 얻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동수야...난 너가 나한테 이런 짓을 꾸밀리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한테 바로 연락한거고..."
"소연아......"
"어이가 없어서 참나, 너네 사장이 뭐랬는줄 알아? 마치 내가 널...“

나는 그 순간, ‘마치 내가 널 가지고 놀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하더라고, 그래서 너가 복수심에 그런 영상을 찍었다고 하더라’ 하고 얘기하려다가 주춤했다. 그리고 말을 바꿔서, 최사장에게는 어제 부탁한 대로 얘기는 잘 한거냐고 물었다. 동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건 오늘 아침에 사실대로 다 얘기했어......”
“첨부터 내가 여자친구가 아니었다고 했어?”
“......그랬다니깐.”
“......정말 너가 찍은 거 아니란 거지?”
“아니래두?!!”

동수의 강한 부정에, 나는 안심이 되면서 역시 동수에게 연락을 하길 잘했다 싶었다.
나는 그를 믿었고, 그가 최사장과 한패가 아니란 사실이 정말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영상을 찍은 게 동수가 아니라면, 동수도 이 일의 피해자나 마찬가지였다.
자기도 모르게 동영상을 찍혀서 협박에 이용되고 있으니, 분명 그도 화가 날 것이었다.

“그럼 대체 그 영상은 어디서 난 거래니? 너네사장 진짜 미친거 아냐? 이제 도대체 어쩌면 좋지?”
“그...글쎄...”
“경찰에 신고하면 우리가 만나온걸 지훈씨도 다 알게 되는걸까? 비밀리에 수사해달라고 할순 없을까? 동수야 네 생각은 어때?"

그 시점에서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동수 뿐이었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알릴 수 없었고...지훈은 더더욱 안될 일이었다.
그렇다보니 한순간에 동수만이 유일한 내 편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가 당연히 날 적극적으로 도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동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말들을 내뱉었다.

“......자,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휴......우리 사장님이......정말 너에게 그런 협박을...했단 말이야?” 미, 믿기지가 않는데 난.“

하......나는 기가 막힌 나머지 언성이 높아졌다.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없는 말을 지어내서 한다는거야?!!”
“아니, 물론 그건 아니겠지만...그래도...그러실 분이 아닌데......”
“뭐야 동수 너......지금...내말을 안 믿는 거니?!”
“안 믿는다기보다는......아무튼 내가 사장님한테 다시 한번 잘 말해볼게...”
“너가 뭐라고하려고......??”
“그냥......뭔가 좀 오해가 있는걸지도 몰라...”
“무슨 오해??알아듣게 얘기해봐”
“휴, 암튼 내가 잘 얘기해볼게......너무 염려말아......”

그렇게 동수는 우물쭈물 얼버무리더니 갑자기 그만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떠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어이없음과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동수 너......지금 뭐야 대체...내 말을 다 듣고도 어떻게,,,,,,’

분명......동수가 날 협박하기위해 최사장과 같이 작당한건 아닌데.
그는 나에게 새삼 집착이나 복수심 따위는 없는 게 확실한데.

그러니 어찌보면 동수를 때 아닌 한밤중에 불러낸 원래의 목적은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나는 동수에게......왜 그런 불미스러운 영상이 나돌고 있는데도, 또 그것을 최사장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도, 또 그걸로 날 협박하고 있는데도, 나와 같이 분개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이럴 때는 같이 화를 내어주어야 맞는 것이었다. 이럴 때는 제 일처럼 나서서 날 보호해주어야 맞는 것이었다.

새삼 동수에게 서운했다.
헤어져도 항상 내 편일 것 같았던 동수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의 태도는 마치 어제부로 완전히 헤어진 나보다는, 이제 자기가 일하는 회사의 사장님 편에 서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내 입으로 원래부터 우린 사귀는 사이도 뭣도 아니었음을 강하게 주장해놓고서 우리가 ‘어제 헤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참 모순적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앞에 비어있는 자리가......마치 동수가 ‘우린 네 말대로 아무 사이도 아니었었고 지금도 그렇잖아’ 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또 나는 지훈씨를 만나기 전, 동수와 처음 사귀었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생각 없이 사고만 치고 늘 자기 좋을 데로 밖에 생각할 줄 모르던 동수의 뒷감당을 하느라 매일 다투던 때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다시 만난 동수의 변한 모습,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는 진짜 ‘남자’로서 내 옆에 있어주었던 순간들이 오버랩 되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만약 동수를 다시 만났 것이 지훈씨를 알기 전이었다면, 아니 애초에 처음 사귈 때부터 동수가 내게 그리 해주었다면....!!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시리 이 모든 사단을 진작부터 내게 잘해주지 못한 동수의 탓으로 돌려보기도 하였다.

한동안 멍하니 까페에 앉아있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데, 이번에는 모텔에서 보았던 영상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날 괴롭혔다. 불쾌한 최사장의 눈빛과 그 끈적끈적한 시선이 아직도 내 알몸에 고정되어 날 훑어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내 가장 은밀한 곳까지 남김없이 찍어댄 영상이었다. 그 자리에 몇 분 함께 있지도 않았으니, 내 눈에 미처 담지 못한 더 심한 장면도 분명 있을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왠지 최사장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영상을 돌려보고 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동수에게 안겨 신음하는 모습을......

그러다가, 혹시 최사장이 그 영상을 다른 이에게 보여준다면......혹시 지훈이 그것을 본다면......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서있던 내 몸을 간신히 지탱해주던 손잡이를 잡은 손이 수치심으로 인해 힘이 풀려버렸다. 중심을 못 잡은 내 몸은 비틀거리며 내 앞의 의자에 앉는 사람에게로 몸이 쏠렸다.

"어어...!!"

뒤에 있던 누군가가 다급히 내 어깨를 잡아줄 때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앗 죄송합니다."

앞에 앉아있던 여자는 별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날 힐끔 보더니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려버렸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지금 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도는...이 적나라한 포르노 같은 영상이 혹시라도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보여지게 된다면....하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그런 상황을 떠올리자마자 가슴이 마구 뛰면서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만큼 온 몸이 쪼여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 최대한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머릿속에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는 끔찍한 상상을 애써 떨쳐내려 노력하면서 손잡이를 붙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렇게 혼자 뒤죽박죽되어 혼란한 감정 속에 파묻혀 있느라, 그날 밤은 ‘그렇다면 문제의 영상은 도대체 무슨 수로 찍혔단 말인가?’하는 의문에까지 미처 다가서지 못한 채 지나갔다.


******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다.

최사장 앞에서 큰소리로 쏘아대고 심지어 뺨까지 때리고 나왔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짱은 다 어디로 가고 마음은 더욱더 큰 불안감에 휩싸였다.

나는 동수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야속했으면서도, ‘사장님께 잘 말해보겠다’던 그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 동수에게 몇 번이나 연락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또한 최사장으로부터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동수는 본래 일이 잘 해결되었다면 질세라 바로 연락을 줄 타입이었기에 아무런 연락도 없는 것이 불안감을 더욱 크게 하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동수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갑작스런 내 결혼소식에 낙심했을 터인데, 얘기가 잘 안 풀렸으면 또 모를까 저희 사장님과 잘 얘기를 끝내 별일 없을 마당이라면, 되려 내게 쪼르르 연락하는 게 껄끄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아무 근거도 없는, 순전히 나 혼자만의 추측이고 희망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식의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아무 예고도 소식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기 위한 일종의 방패막이로 삼아야만 불안감을 조금은 잠재울 수 있었다.

마침 한동안 지훈씨 또한 바빠서 서로 간단한 통화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훈씨의 바쁜 스케줄과 야근 같은 것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혹시 최사장이 나의 태도를 괘씸히 여긴 나머지 지훈씨에게 벌써 모든 것을 폭로한 것은 아닐까...혹시 그래서 날 피하는 것은 아닐까...노심초사 하게 되었다.

불안한 와중에도 상견례 날짜는 다가오고 이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마치 유리 위를 걷는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그러다 지훈씨와의 데이트약속이 잡힌 것이 바로 상견례 하루 전날인 토요일이었다.

나는 평소보다 더욱 꼼꼼하게 옷차림과 화장을 살폈다. 짙은 녹색의 원피스는 힙부터 항아리모양으로 떨어지는 라인으로 몸매의 굴곡을 살리면서도 단아한 이미지를 연출해주었고 허리부분에 살짝 잡힌 셔링이 여성스운 느낌을 보태주었다. 원피스와 어울리는 은은한 펄감의 클러치백를 고른 후 구두는 심플한 하이힐을 신고 거울 앞에 섰다.

"음...이정도면 됐어."

마지막으로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매만지고 집을 나섰다.
지훈씨는 평소처럼 우리 집 근처 골목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괜찮을거야.‘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지훈씨의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지훈씨, 잘 지냈어요?"
"어휴...이게 얼마만이에요..소연씨 보고 싶어서 혼났네~~"

차문을 열고 조수석에 미끄러지듯 앉으며 내가 건넨 인사에 지훈씨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로 날 맞이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백을 무릎위에 놓고 차문을 닫았다.
내가 편하게 자리 잡고 앉자 바로 차는 출발했다.

"우리 스트레스도 풀겸, 양평에 드라이브나 하러 갈래요?
"양평이요?"
"네에~ 오늘 보고 내일 상견례하고 나면 또 바빠서 주중에는 못 볼것 같아요~~그러니까 시간 될때 신나게 달려보자고요."

지훈씨는 두 손을 운전대에 얹은 채로 내 쪽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늘 웃고 있는 그이기에 별거 아니게 느껴질 그의 미소가 어느 때보다도 나의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 주는 듯 했다. 나도 환한 미소로 답하며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엄습해오는 불안함을 더욱 떼어놓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요즘 회사 업무가 정말 많은 가봐요. 지훈씨 요즘처럼 내리 야근하는거 첨봐요."
"아아...카드사가 요새 다 힘들잖아요. 수익 맞추려니까 부수적인 업무가 더 많아졌어요. 그렇다고 이전에 하던 것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보니...일이 더 많아지게 됐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아직 우리 회사가 업계 1위니까 걱정할거 없어요!"
"회사보다도 지훈씨 건강때문에 그러죠 난..."
"우와...소연씨가 내 걱정해준다면야 난 매일 야근하고싶은데요~~"

지훈씨는 또다시 싱글벙글이었다.

그의 익숙한 웃는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며칠 전의 일 때문 일까, 갑자기 지훈씨가 정말 화가 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1년이 넘게 만나오면서 단 한번도 지훈이 화를 내는 걸 본적이 없는것 같았다.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던 부분이었다.

평소 지훈의 태도나 생활방식은 빈틈이 없고 깔끔했지만, 그렇다고 강박적인 완벽주의도 아니어서 되려 언제나 여유롭고 느긋한 모습이었다. 한편으론, 회사에서의 업무처리에 관하여 가끔 지나가는 얘기로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의외로 냉철하고 엄격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같은데......그런 면은 워낙 부드러운 말투와 매너로 인해 묻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훈씨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와 최사장의 협박이 오버랩 되면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지훈씨는 화내본 적 있어요?"
"네?"
"에에, 그러니깐, 난 한번도 지훈씨가 화내는 걸 본적이 없어서요."
"하하하~ 소연씨한테 화날 일이 있어야 말이죠~~"
"내가...지훈씨를 한번도 화나게 한적이 없어요?"
"음...아직까지는요?"

"아직까지는"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뭐야...그럼...앞으로는 어떨지 모른다는거네요?"

나는 재밌는 농담하듯 크게 소리내려고 했지만 도둑이 제발저리는 마냥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날 놀리기라도 하듯 지훈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소연씨 갑자기 왜 그래요,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뭔데요, 말해봐요~~!나 엔간해선 화 잘 안나요~~하핫"
"아, 아니요~ 잘못은 무슨~~~호호~~지훈씨가 늘 웃기만 하니까~궁금해서 물어본거에요. 내가 그리도 좋은가 해서요!"

지훈은 피식 웃으면서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정말 왠만하면 화같은 거 잘 안나요. 화가 나는게 무섭기도 하고요. 나도 솔직히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

어쩐지 자꾸 지훈씨의 반응이 신경 쓰이는 것은 분명 최사장 때문에 내 신경이 예민해져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나는 안되겠다 싶어 더이상 그 사건과 관련된 생각은 안하기로 마음먹고 드라이브를 즐기기 위해 노력했다.

남한강을 따라 달리는 차 안에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가만히 쐬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한시간 반 가량을 달려 우리는 목적지인 두물머리에 도착했다.

초여름이라 그런지 걷기에는 아주 적당한 날씨였다. 세미원, 소원쉼터, 물안개쉼터, 갈대쉼터의 방향을 알려주는 갈림판앞에서 잠시 어느쪽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소원쉼터 쪽을 향해 슬슬 걸어가기로 하였다.

두물머리 소원쉼터는 두물과 사람들의 꿈, 희망의 의미를 담은 쉼터라고 하였다. 터의 가운데에는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하여 소원나무라 불리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우뚝히 서있었고 그 옆에는 "소원들어주는 나무"라고 새겨진 커타란 바위 위와 그 주변에 크고 작은 자갈돌들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돌을 올려놓고 소원을 빌면 되는 모양이었다.

"지훈씨, 우리 여기서 소원 빌고 가요."

소원나무 앞에서 나는 동수가 최사장하고의 일을 잘 마무리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부디 지훈씨를 놓치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마음 속으로 빌었다.

“지훈씨는 무슨 소원 빌었어요?”
“......소연씨는요?”

씨익 웃으며 되묻는 지훈의 말에 나는 뜨끔하여 입을 다물었다가, 내가 먼저 물어보았지않냐고 받아넘기려 했다.

“원래 소원 빌은 것은 입 밖으로 내면 안된대요...소연씨도 나도 말로 꺼내버리면 안 이루어질지도 모르니깐, 우리 서로 비밀로 하는 것은 어때요.”
“그, 그래요......”

그렇게 지훈씨와 평상시처럼 데이트를 즐기고 있으려니, 지난 며칠간의 걱정이 괜한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그런 내 행복은 역시나 유리같은 것이었다.
언제든 최사장의 손에 산산히 부서질 수 있는......

우리는 한동안 근처를 산책하다가 잠시 쉴 겸 수밀원이라는 까페에 들리기로 했다.
미술관을 겸하고 있는 까페 내부는 매우 아늑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간단한 음료를 주문시켜놓고 지훈씨가 화장실에 간사이 나는 내부 인테리어를 감상하면서 앉아있었다. 벽을 장식해놓은 여러 미술작품들에 잠시 정신이 팔려있었던것 같기도 했다.

"띠리링"

알림 소리에 테이블을 보니 지훈씨가 두고간 핸드폰에 메시지가 온듯했다. 나는 딱히 신경쓰지 않고 시선을 거두려는데 다른 곳에서도 "띠리링"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내 핸드폰이었다.

뭐지? 하고 폰을 켜서 문자를 확인했다.

[내가 지훈이 폰에 뭘 좀 보냈는데 말야...]

발신자는 모르는 번호였으나 누군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란 이런 것이었던가. 나는 재빠르게 지훈씨의 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DD모텔에서 나랑 하.룻.밤. ㅇ ㅓ ㄸ ㅐ]

겉보기에는 흔한 스팸문자였다. 클릭을 눌렀더니 얼굴이 모자이크처리된 여자의 나체 사진이 폰의 화면을 가득 메웠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면서 얼른 문자를 삭제했다. 심장이 쿵쾅거려왔다. 그것은 분명 모텔에서 보았던 영상의 캡쳐사진이었다. 모자이크 처리된 여자의 얼굴은 누가보아도 내 얼굴이었다.

지훈의 폰을 제자리에 다시 두는 내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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