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화가?"
"...네... 안녕하세요?"
꾸벅
해가 조금씩 넘어가기 시작한, 슬슬 그늘이 드리워질 무렵에 둘은 공원에서 그렇게 만남을 가졌다.
둘다 교복 차림이었고, 남학생은 벤치에 홀로 앉아 한가로이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여학생을 보자마자 다가와서 그렇게 인사를 했다.
여학생으로선 남자애쪽을 처음에는 이것이 첫 만남이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기억이 있었다.
강희는 캔콜라를 홀짝이면서 숙인 고개를 다시 들추는 남학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기억을 떠올렸다.
"흠.....생각이 나네.. 만화부에 솜씨 좋은 아이가 하나 있댔었지....맞아. 유정이를 보러 갔다가 본 기억이 있어....이름까진 모르겠지만...."
친구 중에 만화부 소속인 한유정때문에, 방과 후에 써클 반 근처에 기웃거린 적이 있다. 학교에서 최강희는 유명인사였다.
얼굴 예쁘고, 몸매 되고, 성격 쾌활하고, 운동 잘하는 등등, 그녀의 장점은 참으로 많았다.
물론 그녀 역시 완벽할수는 없기에, 몇가지 단점은 있었다.
첫째, 동성 친구는 많았지만 이성 친구는 단 한명도 그녀 주위엔 없었다. 남학생들 입장에서야 그녀를 싫어했을리 만무하지만, 그녀로선 남자들한테 이미 충분히 질린 상태였다.
초등학생때부터 잡티 없이 꽃처럼 피어난 얼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쁜 여자 싫어할 남자가 있을리 없다.
초등학생때부터 이미 프러포즈를 받기 시작한 최강희. (유치원생때도 있었다. 본인은 기억 못하지만..)
중학생때부턴 불이 붙기 시작했고, 고등학생인 현 시점에선 말 다한 셈이다.
사물함엔 읽어보지도 않은 팬레터가 터질듯이 항상 꽉차있었다. 보나마나 남학생들의 구애의 내용이 담긴 내용들이었다. 개중엔 진심을 담은 이도 어쩌면 있을지 모르지만, 편지 한통한통 다뒤져가면서 그런 사람을 찾아내는 수고를 할리가 없는 최강희였다.
그녀는 자존심도, 기도 대단히 쎈 여자였다. 그녀는 이미 남자라는 동물의 심리를 상당히 일찍 파악한 사람이었다.
어릴때부터 타인에 비해 뛰어난 여성으로서의 모습. 남자들이 몰려든다면 이것이 이유일 것은 뻔하다.
그것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자신의 육체일뿐인것이다. 그들은 그저 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랑. 처음은 달콤하게 시작하려 할지도, 부드럽게 유혹해서 마음을 접수하려 할지도 모르지만, 그 다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짐승이 되는 것이다. 분명히.
강희는 일체의 남자친구들을 두지 않았다. 최강희를 힘으로 찍어눌러서라도 여자친구로 삼으려 했던 남자들은 적지 않았다. 유도부 주장, 태권도부 주장, 검도부 주장 등등. 사내들의 모임에서도 <주장>이라는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그녀를 힘으로 차지하려 했다가 되려 땅바닥에 얼굴을 메다꽂는 상황이 연출되는것을 아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최강희를 힘으로 누른다는것은 불가능하단걸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50kg 내외의 몸무게를 지닌, 마냥 가녀려 보이기만 하는 여학생이 실제로는 수백kg의 물건을 가볍게 다루는 괴력의 소유자일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리가 없었다.
최강희는 자신을 힘으로 차지하려 하는 자는 항상 섭섭하지 않은 보답을 해주었고, 그런 일이 몇번 반복되고 나자, 남학생들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어쩌겠는가. 한때는 미친듯이 최강희~!!를 외치면서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그녀 이름을 노래부르다시피 하면서 프러포즈를 해댔던 운동계열쪽 써클의 주장들 조차 그녀를 잡겠다고 별러대다가 며칠 뒤에 코뼈에 붕대를 감거나 몸 여기저기에 상처의 흔적들을 지닌걸 보면, 그들 모두 사내로서 어떠한 감, 냄새를 맡은 것이다.
남학생들은 진짜 끙끙거리면서 그냥 속으로 애타게 최강희와 사귀고 싶다는 환상에 사로잡힌채 그녀를 선망, 여신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것이다.
그렇다고 최강희가 딱히 남녀차별을 두는 여성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본인이 여성이고, 또 걸핏하면 여자들을 힘으로 눌러버리려는 남자들의 모습을 영 탐탁치 않게 여기는 성격이기에 그녀는 항상 무슨 일이 생기면 여자들의 편이 되어 앞장서 일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여학생이었다.
그런 이유인고로, 최강희는 본인이 다니는 학교는 물론이고 주변의 고등학교, 중학교의 여학생들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선배들조차 최강희와 친하게 지낼수 있다면 그것을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으니 같은 나이의 여자애이거나 1학년 아래의 후배, 그리고 중학생 소녀들에겐 말 다한거였다.
또 하나의 단점은, 운동은 그리 잘하면서도(당연하다) 공부는 영 꽝이라는것. 신은 공평하셔서 최강희에게 발군의 완력과 운동실력을 주셨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도는 주지 않으신것 같다.
정말 최강희는 공부라면 질색을 했다. 등, 하교를 하기는 해도, 그냥 왔다갔다 하는 정도의 의미랄까. 그녀가 학교를 나가는 이유는 친구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친구들 보러 학교를 다닌다는 편이 맞겠다.
하지만 최강희가 일자리가 없어 백조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 모~~든 노력을 무시해도 얼마든지 성공할 만한 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니까.
세계 최강의 완력 이라는 능력이. 덤으로 몸이 근육질도 아닌 우아 그 자체. 진짜 할 일 없는 백조가 아닌, 까마귀들 사이에 있는 고고한 한마리의 백조임에 틀림없지 아니한가.
이처럼 유명한 여학생이, 동성 친구가 적을리가 없었다. 아니, 몽땅 다 동성친구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베스트로 꼽히는 친구가 한유정이었고, 한유정은 친한 친구를 자주 만화부 써클에 데려가는것이다.
만화부로선 싫어하는 기색을 보일 턱이 없었다. 학교에서 최강희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으니 그럴만 했다.
최강희는 운동 계열쪽 친구들이 자꾸 졸라대는 통에 일단 육상부 소속이긴 했지만, 그녀는 만화부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는 편이었다. 방과 후에 교내 운동장보다 만화부 써클 반에 가 있는 경우가 더 허다했다.
그런 그녀를 육상부 담당 선생님께서도 뭐라 할수 없었다. 최강희는 어찌 되먹은게, 운동을 따로 하지 않아도 항상 베스트 컨디션인 인간이었다. 따로 트레이닝이 필요 없는 여자애였던 것이다.
최강희는 내키면 등하교도 자기 꼴리는 대로 하고, 관심있으면 그냥 즉흥적으로도 하고, 싫으면 그자리에서 때려쳐버리기도 하는 둥, 성격이 괴팍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특이한 애였지만, 이 여학생은 학교장이 인정해 주는 여자애라서 누구도 뭐라고 할수가 없었다.
주변 학교들과 공동으로 열리는 단체전에서 단기로든 팀매치로든 무수한 활약상을 안겨주는 애였다. 체육계열의 선생들이 미친듯이 탐내는 여자애가 최강희였다.
최강희가 학교에 기여한 공로가 적잖은 만큼 교장은 그녀가 정말 터무니없는 선을 벗어나지 않는 한 특별대우를 해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거의 어지간한 그녀의 행동은 다 묵인해주는것이다.
강희 역시 진짜 어이없는 일은 저지르지도 않았고.
최강희는 만화를 좋아했다. 애니메이션을 다운받아서 집에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 가면서 보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애들이 빌려온 만화책을 심심치 않게 보는 수준은 되었다.
강희가 만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은 친구 한유정의 역할이 컸다. 유정이가 처음 강희와 친해질때 만화 이야길 하다가 친해졌고, 재미있는 작품들을 많이 소개해 주는 과정에서 한유정의 만화작품 선별코드와 자신의 코드가 얼추 비슷하단걸 깨달으면서 최강희는 그녀와 급속도로 친해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주 왔다갔다 하면서 몇번 본적이 있는 학생이 눈앞에 있는 이 남학생이었다. 확실히 기억이 있었다. 그림솜씨가 뛰어난 남학생이 들어왔다가 한유정이 칭찬을 자주 해대는걸 몇번 들었기도 하고.
근데....이 순하게 생긴 듯, 평범해 보이는 듯한, 여려 보이는 인상 마저 가진 남학생이 TBM 까페의 회원일 줄이야.
"흐응......정말 의외인걸..."
강희는 잠시 생각하다 입술을 열었다.
"1학년...이지 아마"
"네"
"말 놓을께. 괜찮지?"
남학생은 얼른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누난데"
"옆에 앉지"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옆의 빈자리를 권하는 강희였다. 남자애는 얼른 앉았다.
"네에"
탁
옆에 앉은 채 남학생은 고개를 숙이고 자기 손만 보고 있었고, 강희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콜라를 또 한입 홀짝인 후 물었다.
"나도 널 본 기억이 있어. 기억이 얼핏 나네. 이름은 모르지만..."
남자애는 강희가 자신을 본것같다고 하자 엄청 놀랐다. 이런 유명인사의 누나가 자신을 기억해주니까 당황스럽기도, 감격하기도 한 탓이다.
그는 급히 물었다.
"저, 정말요?"
"응. 처음엔 안 떠올랐는데. 만화부 쪽에서 몇번 본 기억이 있네"
"아. 거기서요...누나가 만화부를 들리는걸 저도 본적이 있어요. 유정이 누나때문에 자주 오죠 아마?"
"응. 맞아"
"누나가 설마 제 얼굴을 봤을줄은 몰랐어요"
"난 그냥 뭐....주위를 여러번 둘러보다가 너를 여러번 보았지. 아..음...그냥 뚤레뚤레 교실내를 살피면서 멤버들 얼굴을 그냥 찬찬히 바라볼때가 있거든. 그 과정에서 널 좀 자주 보았어"
"아 네에... 누나를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다 이렇게 만나서 얘기하는건 처음이에요. 보긴 참 많이 보았는데.."
"근데 넌 왜 나를 보면서 이야기를 안하니?"
"넷?!!"
남학생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근 두근
"떨리니까요...으....한살 연상일 뿐인데....왜이러지...마치 어른이랑 있는것 같아..."
눈을 내리깔아서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주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그였다. 음료수를 계속 홀짝였던 입술은 젖어서 연하게 빛났다.
"수줍음이 많은것같네. 누나는 수줍음 잘 타는 사람이 좋드라. 난 잘 안타지만"
화끈...
그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걸 느끼면서 다시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
쓰윽
"헛...왜...그래요?"
갑자기 자신쪽으로 고개를 휙 들이민 누나를 보고 그는 놀라서 말했다. 두근거림이 심해질수록 허둥거림도 심해진다.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그녀는 입을 열었다.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몰라. 이름 뭐야?"
"이..름요?"
"응 이름. 참나..물어봐야 갈켜주냐? 보통 여자한테 남자가 먼저 지이름 말하고 그다음 묻고 그러는거 아냐? 그게 그 뭐야..에티켓이던가...그거에 속할걸? 맞나? 에티켓? 음...암튼간에"
그녀는 잠시 혼자 자문하고 땡그란 눈알을 굴려대다가 그냥 얼렁뚱땅 말을 마쳤다. 그리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정안이요. 진정안"
"진정안? 특이한 이름이네. 정말. 니 눈을 바라보면 진정할수 있니?"
그녀는 장난스레 물으면서 정안의 눈을 들여다보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정안은 약간 오버하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세상을 바르게 보고 살라는 뜻으로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정. 안. 이라구요"
"흐음...그렇구나아~"
그녀는 수긍하곤 고개를 까닥거렸다. 정안은 약간 볼멘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누나는 힘이 그렇게 쎄니까 최. 강. 희 인가요? 세계 최~강이라서?"
"니가 내가 힘쎈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반문하는 그녀에게 정안은 한숨을 한번 쉬곤 말했다.
"TBM 까페에서 티렉스가 왜 유명한지에 대한 이유 중 하나잖아요!! 누나하고 얽힌 유명한 일들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들었어요~!!누나한테도 들었고.."
"아 그렇군. 참 너 TBM 회원이지. 아 맞다. 그래서 만났지 우리? 후후~~"
"...건망증이 심한걸요 누나?"
"잔말이 많아!! 흐흥. 그건 그렇다 치고. 정안이라고 했지? 진정안?"
"네에..."
"그래 정안아...."
쓰윽
"왜...왜또 고개를 가까이 들이대요...창피하게스리..."
정안은 여기가 공원인 것을 떠올리곤 주위의 이목이 신경쓰워 사방을 얼른 쓱 훑었다. 웬일로 오늘은 인기척이 별로 없었다. 조용하기만 했다. 교복을 입고 있는 남녀 둘을 신경쓰거나 관심두는 듯해 보이는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런 그의 턱을 강희는 오른손으로 휙 잡아챘다. 자연히 정안의 고개는 그녀에게 붙들렸고, 반사적으로 눈동자가 그녀에게 놀라운 시선을 던졌다.
"흣!!"
토끼눈을 띄면서 두근대는 심장소리를 내며 당황한 표정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는 1살 연하의 귀여운 남자애를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그녀는 느긋하게 물었다.
"자아~ 그럼 이제부터 들어보실까~? 응? 후훗~나를 구속할수 있다고 자신했었지~"
"............."
"후후~ 만약 실망시키면? 학교에서 누나한테 말걸면 안돼? 알았~지?"
기대감 어린 눈길을 상대에게 쏘아주면서 흥분적인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최강희였다.
"...네... 안녕하세요?"
꾸벅
해가 조금씩 넘어가기 시작한, 슬슬 그늘이 드리워질 무렵에 둘은 공원에서 그렇게 만남을 가졌다.
둘다 교복 차림이었고, 남학생은 벤치에 홀로 앉아 한가로이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여학생을 보자마자 다가와서 그렇게 인사를 했다.
여학생으로선 남자애쪽을 처음에는 이것이 첫 만남이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기억이 있었다.
강희는 캔콜라를 홀짝이면서 숙인 고개를 다시 들추는 남학생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기억을 떠올렸다.
"흠.....생각이 나네.. 만화부에 솜씨 좋은 아이가 하나 있댔었지....맞아. 유정이를 보러 갔다가 본 기억이 있어....이름까진 모르겠지만...."
친구 중에 만화부 소속인 한유정때문에, 방과 후에 써클 반 근처에 기웃거린 적이 있다. 학교에서 최강희는 유명인사였다.
얼굴 예쁘고, 몸매 되고, 성격 쾌활하고, 운동 잘하는 등등, 그녀의 장점은 참으로 많았다.
물론 그녀 역시 완벽할수는 없기에, 몇가지 단점은 있었다.
첫째, 동성 친구는 많았지만 이성 친구는 단 한명도 그녀 주위엔 없었다. 남학생들 입장에서야 그녀를 싫어했을리 만무하지만, 그녀로선 남자들한테 이미 충분히 질린 상태였다.
초등학생때부터 잡티 없이 꽃처럼 피어난 얼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쁜 여자 싫어할 남자가 있을리 없다.
초등학생때부터 이미 프러포즈를 받기 시작한 최강희. (유치원생때도 있었다. 본인은 기억 못하지만..)
중학생때부턴 불이 붙기 시작했고, 고등학생인 현 시점에선 말 다한 셈이다.
사물함엔 읽어보지도 않은 팬레터가 터질듯이 항상 꽉차있었다. 보나마나 남학생들의 구애의 내용이 담긴 내용들이었다. 개중엔 진심을 담은 이도 어쩌면 있을지 모르지만, 편지 한통한통 다뒤져가면서 그런 사람을 찾아내는 수고를 할리가 없는 최강희였다.
그녀는 자존심도, 기도 대단히 쎈 여자였다. 그녀는 이미 남자라는 동물의 심리를 상당히 일찍 파악한 사람이었다.
어릴때부터 타인에 비해 뛰어난 여성으로서의 모습. 남자들이 몰려든다면 이것이 이유일 것은 뻔하다.
그것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자신의 육체일뿐인것이다. 그들은 그저 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랑. 처음은 달콤하게 시작하려 할지도, 부드럽게 유혹해서 마음을 접수하려 할지도 모르지만, 그 다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짐승이 되는 것이다. 분명히.
강희는 일체의 남자친구들을 두지 않았다. 최강희를 힘으로 찍어눌러서라도 여자친구로 삼으려 했던 남자들은 적지 않았다. 유도부 주장, 태권도부 주장, 검도부 주장 등등. 사내들의 모임에서도 <주장>이라는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그녀를 힘으로 차지하려 했다가 되려 땅바닥에 얼굴을 메다꽂는 상황이 연출되는것을 아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최강희를 힘으로 누른다는것은 불가능하단걸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50kg 내외의 몸무게를 지닌, 마냥 가녀려 보이기만 하는 여학생이 실제로는 수백kg의 물건을 가볍게 다루는 괴력의 소유자일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리가 없었다.
최강희는 자신을 힘으로 차지하려 하는 자는 항상 섭섭하지 않은 보답을 해주었고, 그런 일이 몇번 반복되고 나자, 남학생들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어쩌겠는가. 한때는 미친듯이 최강희~!!를 외치면서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그녀 이름을 노래부르다시피 하면서 프러포즈를 해댔던 운동계열쪽 써클의 주장들 조차 그녀를 잡겠다고 별러대다가 며칠 뒤에 코뼈에 붕대를 감거나 몸 여기저기에 상처의 흔적들을 지닌걸 보면, 그들 모두 사내로서 어떠한 감, 냄새를 맡은 것이다.
남학생들은 진짜 끙끙거리면서 그냥 속으로 애타게 최강희와 사귀고 싶다는 환상에 사로잡힌채 그녀를 선망, 여신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것이다.
그렇다고 최강희가 딱히 남녀차별을 두는 여성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본인이 여성이고, 또 걸핏하면 여자들을 힘으로 눌러버리려는 남자들의 모습을 영 탐탁치 않게 여기는 성격이기에 그녀는 항상 무슨 일이 생기면 여자들의 편이 되어 앞장서 일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여학생이었다.
그런 이유인고로, 최강희는 본인이 다니는 학교는 물론이고 주변의 고등학교, 중학교의 여학생들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선배들조차 최강희와 친하게 지낼수 있다면 그것을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으니 같은 나이의 여자애이거나 1학년 아래의 후배, 그리고 중학생 소녀들에겐 말 다한거였다.
또 하나의 단점은, 운동은 그리 잘하면서도(당연하다) 공부는 영 꽝이라는것. 신은 공평하셔서 최강희에게 발군의 완력과 운동실력을 주셨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도는 주지 않으신것 같다.
정말 최강희는 공부라면 질색을 했다. 등, 하교를 하기는 해도, 그냥 왔다갔다 하는 정도의 의미랄까. 그녀가 학교를 나가는 이유는 친구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친구들 보러 학교를 다닌다는 편이 맞겠다.
하지만 최강희가 일자리가 없어 백조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 모~~든 노력을 무시해도 얼마든지 성공할 만한 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니까.
세계 최강의 완력 이라는 능력이. 덤으로 몸이 근육질도 아닌 우아 그 자체. 진짜 할 일 없는 백조가 아닌, 까마귀들 사이에 있는 고고한 한마리의 백조임에 틀림없지 아니한가.
이처럼 유명한 여학생이, 동성 친구가 적을리가 없었다. 아니, 몽땅 다 동성친구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베스트로 꼽히는 친구가 한유정이었고, 한유정은 친한 친구를 자주 만화부 써클에 데려가는것이다.
만화부로선 싫어하는 기색을 보일 턱이 없었다. 학교에서 최강희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으니 그럴만 했다.
최강희는 운동 계열쪽 친구들이 자꾸 졸라대는 통에 일단 육상부 소속이긴 했지만, 그녀는 만화부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는 편이었다. 방과 후에 교내 운동장보다 만화부 써클 반에 가 있는 경우가 더 허다했다.
그런 그녀를 육상부 담당 선생님께서도 뭐라 할수 없었다. 최강희는 어찌 되먹은게, 운동을 따로 하지 않아도 항상 베스트 컨디션인 인간이었다. 따로 트레이닝이 필요 없는 여자애였던 것이다.
최강희는 내키면 등하교도 자기 꼴리는 대로 하고, 관심있으면 그냥 즉흥적으로도 하고, 싫으면 그자리에서 때려쳐버리기도 하는 둥, 성격이 괴팍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특이한 애였지만, 이 여학생은 학교장이 인정해 주는 여자애라서 누구도 뭐라고 할수가 없었다.
주변 학교들과 공동으로 열리는 단체전에서 단기로든 팀매치로든 무수한 활약상을 안겨주는 애였다. 체육계열의 선생들이 미친듯이 탐내는 여자애가 최강희였다.
최강희가 학교에 기여한 공로가 적잖은 만큼 교장은 그녀가 정말 터무니없는 선을 벗어나지 않는 한 특별대우를 해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거의 어지간한 그녀의 행동은 다 묵인해주는것이다.
강희 역시 진짜 어이없는 일은 저지르지도 않았고.
최강희는 만화를 좋아했다. 애니메이션을 다운받아서 집에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 가면서 보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애들이 빌려온 만화책을 심심치 않게 보는 수준은 되었다.
강희가 만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은 친구 한유정의 역할이 컸다. 유정이가 처음 강희와 친해질때 만화 이야길 하다가 친해졌고, 재미있는 작품들을 많이 소개해 주는 과정에서 한유정의 만화작품 선별코드와 자신의 코드가 얼추 비슷하단걸 깨달으면서 최강희는 그녀와 급속도로 친해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주 왔다갔다 하면서 몇번 본적이 있는 학생이 눈앞에 있는 이 남학생이었다. 확실히 기억이 있었다. 그림솜씨가 뛰어난 남학생이 들어왔다가 한유정이 칭찬을 자주 해대는걸 몇번 들었기도 하고.
근데....이 순하게 생긴 듯, 평범해 보이는 듯한, 여려 보이는 인상 마저 가진 남학생이 TBM 까페의 회원일 줄이야.
"흐응......정말 의외인걸..."
강희는 잠시 생각하다 입술을 열었다.
"1학년...이지 아마"
"네"
"말 놓을께. 괜찮지?"
남학생은 얼른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누난데"
"옆에 앉지"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옆의 빈자리를 권하는 강희였다. 남자애는 얼른 앉았다.
"네에"
탁
옆에 앉은 채 남학생은 고개를 숙이고 자기 손만 보고 있었고, 강희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콜라를 또 한입 홀짝인 후 물었다.
"나도 널 본 기억이 있어. 기억이 얼핏 나네. 이름은 모르지만..."
남자애는 강희가 자신을 본것같다고 하자 엄청 놀랐다. 이런 유명인사의 누나가 자신을 기억해주니까 당황스럽기도, 감격하기도 한 탓이다.
그는 급히 물었다.
"저, 정말요?"
"응. 처음엔 안 떠올랐는데. 만화부 쪽에서 몇번 본 기억이 있네"
"아. 거기서요...누나가 만화부를 들리는걸 저도 본적이 있어요. 유정이 누나때문에 자주 오죠 아마?"
"응. 맞아"
"누나가 설마 제 얼굴을 봤을줄은 몰랐어요"
"난 그냥 뭐....주위를 여러번 둘러보다가 너를 여러번 보았지. 아..음...그냥 뚤레뚤레 교실내를 살피면서 멤버들 얼굴을 그냥 찬찬히 바라볼때가 있거든. 그 과정에서 널 좀 자주 보았어"
"아 네에... 누나를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다 이렇게 만나서 얘기하는건 처음이에요. 보긴 참 많이 보았는데.."
"근데 넌 왜 나를 보면서 이야기를 안하니?"
"넷?!!"
남학생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근 두근
"떨리니까요...으....한살 연상일 뿐인데....왜이러지...마치 어른이랑 있는것 같아..."
눈을 내리깔아서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주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그였다. 음료수를 계속 홀짝였던 입술은 젖어서 연하게 빛났다.
"수줍음이 많은것같네. 누나는 수줍음 잘 타는 사람이 좋드라. 난 잘 안타지만"
화끈...
그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걸 느끼면서 다시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
쓰윽
"헛...왜...그래요?"
갑자기 자신쪽으로 고개를 휙 들이민 누나를 보고 그는 놀라서 말했다. 두근거림이 심해질수록 허둥거림도 심해진다.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그녀는 입을 열었다.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몰라. 이름 뭐야?"
"이..름요?"
"응 이름. 참나..물어봐야 갈켜주냐? 보통 여자한테 남자가 먼저 지이름 말하고 그다음 묻고 그러는거 아냐? 그게 그 뭐야..에티켓이던가...그거에 속할걸? 맞나? 에티켓? 음...암튼간에"
그녀는 잠시 혼자 자문하고 땡그란 눈알을 굴려대다가 그냥 얼렁뚱땅 말을 마쳤다. 그리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정안이요. 진정안"
"진정안? 특이한 이름이네. 정말. 니 눈을 바라보면 진정할수 있니?"
그녀는 장난스레 물으면서 정안의 눈을 들여다보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정안은 약간 오버하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세상을 바르게 보고 살라는 뜻으로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정. 안. 이라구요"
"흐음...그렇구나아~"
그녀는 수긍하곤 고개를 까닥거렸다. 정안은 약간 볼멘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누나는 힘이 그렇게 쎄니까 최. 강. 희 인가요? 세계 최~강이라서?"
"니가 내가 힘쎈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반문하는 그녀에게 정안은 한숨을 한번 쉬곤 말했다.
"TBM 까페에서 티렉스가 왜 유명한지에 대한 이유 중 하나잖아요!! 누나하고 얽힌 유명한 일들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들었어요~!!누나한테도 들었고.."
"아 그렇군. 참 너 TBM 회원이지. 아 맞다. 그래서 만났지 우리? 후후~~"
"...건망증이 심한걸요 누나?"
"잔말이 많아!! 흐흥. 그건 그렇다 치고. 정안이라고 했지? 진정안?"
"네에..."
"그래 정안아...."
쓰윽
"왜...왜또 고개를 가까이 들이대요...창피하게스리..."
정안은 여기가 공원인 것을 떠올리곤 주위의 이목이 신경쓰워 사방을 얼른 쓱 훑었다. 웬일로 오늘은 인기척이 별로 없었다. 조용하기만 했다. 교복을 입고 있는 남녀 둘을 신경쓰거나 관심두는 듯해 보이는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런 그의 턱을 강희는 오른손으로 휙 잡아챘다. 자연히 정안의 고개는 그녀에게 붙들렸고, 반사적으로 눈동자가 그녀에게 놀라운 시선을 던졌다.
"흣!!"
토끼눈을 띄면서 두근대는 심장소리를 내며 당황한 표정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는 1살 연하의 귀여운 남자애를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그녀는 느긋하게 물었다.
"자아~ 그럼 이제부터 들어보실까~? 응? 후훗~나를 구속할수 있다고 자신했었지~"
"............."
"후후~ 만약 실망시키면? 학교에서 누나한테 말걸면 안돼? 알았~지?"
기대감 어린 눈길을 상대에게 쏘아주면서 흥분적인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최강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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