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
"....응? 그래서 나보고....한마디로 지금.........삐끼...를 해달란 말야?"
"아...아니....삐끼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강희야. 응?"
"우이씨...사람 모으는게 삐끼지 뭐 삐끼 뜻이 따로 있니? 그래?"
"아..음....우......"
"....암튼 안돼...안돼...아무리 생각해도 못해. 절대 안돼!!"
만화부 동아리에 놀러왔다가 난데없이 부탁, 아니 거의 애원조로 매달리다시피 하는 친구 유정이 때문에, 무엇 하나 별로 어렵게 생각하는것도 없는 거침없는 성격의 대명사, 강희 조차도 지금 한창 애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유정이가 이렇게 강희에게 애걸복걸, 애원조이다시피 하면서, 우는 소리 해대면서 설득을 하고 나서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방과 후였고, 곧 문화제 시즌이 다가오는 터라서, 수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각 써클 모임의 학생들은 저마다의 동아리에서 문화제 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기간이었다.
만화부 역시 초비상이 걸린 상황. 학업도 열중해가면서 저마다의 실력을 펼쳐낸 작품에 손도 봐가면서 시간을 나름 활용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법이다.
각자의 개성을 제각기 펼쳐 가면서 그려낸 그림 작품 전시를 관련하여, 구조 배치도도 계산해야 하고, 목록표를 짜서 학생들을 확 몰아쥘 뛰어난 애니메이션 작품도 선별, 상영해야 하며, 타로 카드점을 보기 위한 소형 막장도 만들어야 하는 등, 지금은 정말로, 무진~~장 바쁠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만화부란 것이, 이 학교에서 역사가 그렇~게 오래 되진 않은, 그냥 평범한 써클 중의 하나인지라, 학교 설립 이래, 그 명맥을 같이 하게 된, 유구한 전통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셈틀부 라던지 방송부 라던지 하는 곳에 비해선 인지도가 많이 딸리는 실정이었다.
전통 있고, 힘 있는 써클모임일수록 교단 내에서 자체적으로 밀어주는 것이 더 무게가 많이 실릴 것임은 자명한 일. 만화부로서는 교 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었다.
교 입장에서 볼때의 만화부란, 니네가 좋아서 만들었으니 니네 알아서 해. 최~소한의 것은 챙겨주지 정도의 입장이었기에 자연 이 써클에 들어온 개개인의 힘이나 능력이 많이 발휘되지 않는 한 뻗어나가기가 힘든 모임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러자면, 교단에 뭔가 크게 어필을 할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 반드시!! 교내는 물론이고 타 학교 학생들, 더 넓게는 인근 주민들까지 남녀노소도 흥미를 가지고 많이 몰려들게끔 하여 만화부 라는 하나의 써클을 주목받게 하여, 교단 역시 이쪽에 시선, 이목을 집중시켜야 할 만한 필요성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럼 교단에서도 본 학교의 한 문화적 장르 동아리로서, 인근 학교 학생들이나 시민들에게 크게 어필, 많은 주목을 받게끔 해준 만화부 동아리에 자연 무게를 실어주지 않을 리가 없다.
팬시 상품도 많이 만들고, 그림 전시전도 보러 오고, 뭐 이러저러한, 만화부가 할수 있는 나름 방법으로 그렇게 어필 할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
문제는!! 근처 중고등학교들도 다~~문화제 시기는 비슷하기 때문에 각 학교의 축제 아무데나 가도 되는 시민들, 학생들로선 자연 선택의 기로가 다양, 자유로울 수밖에 없고, 또, 으레 만화부 라는 특성상 누구나 다 하기 때문이다. 전시회니 애니메이션 상영이니, 타로카드점이니 하는 것들은.
다 거기서 거긴데, 아~~무데나 간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보는 사람들 입장에선 그냥
(가까운데 가면 되지 뭐. 멀게 귀찮게시리....)
이정도이니까. 누구나 당연 그렇게 생각할거고.
그래~~서 이번에 만화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써클 현 회장이며 실세인 한유정이!!
침을 정말 꼴깍 삼키고 식은 땀을 흘려가면서 내린 결론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최강희를 끌어들일 결심을 한 것이다.
유정에겐 나름 계산된 것이 있었다. 최강희는 주변 모두가 인정하는 이 고등학교의 퀸카이자, 인근 학교 학생들에게까지 명성이 자자한 여자애다.
그 보이쉬한 성격 하며, 야성미같은 매력, 연하, 동갑내기 학생들은 물론이고 고 3 선배들에게까지 그 존재감을 크게 어필하는, 그리고 누군가가 만들어내 수천명이 가입해 있는 비공식 팬까페까지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학생들 사이의 초 아이돌!!
그리고 최강희를 아는 사람은 인근 시민들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특히 3,40대 직장 아저씨들 중에 강희의 얼굴을 아는 아저씨들이라도 몇몇 모이면 가장 많이 나왔던 말이 <삼삼하다> 는 말이 무수히 언급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이런 친구를 뒀다 뭐하나. 이럴때 적극 활용해야지!!
"강희가 도와만 준다면....입소문만 미리 내놓으면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몰릴 거야....그래...강희한테....허락을 구해야 해!!"
이건 현 서클 회장으로서 특단의 조치이자, 최후의 결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교단에선 만화부 동아리의 존재 자체를 별로 신경도 안쓴다. 이 기회에 진짜!! 어필해야 한다! 뭔가 보여줘야 한다!!
그럴려면!!!
유정은 당시에 떠올렸던 아이디어를 다시 한번 강희를 애잔하게 보면서 애원조를 가득 담은 음성으로 말했다. 두 손으로 친구의 한쪽 손까지 꼬옥 잡아가면서.
"응응? 강희야~~제에~~발? 응? 나 봐서라도 응?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제에발....."
"으윽......으으......아...안되는데 진짜....."
최강희는 자신의 손을 꼬옥 잡아가면서 진짜 애걸복걸하다시피 하는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를 곁눈질로 슬쩍 보곤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아무리 그래도!! 코스튬이 말이 되냔 말이야~!!"
그랬다.
한유정은 독한 결심을 한 것이다. 교단과의 한판 승부를 위해 띄운 초~~강수!!
그건 바로.... 최강희에게 코스튬을 시키려는 것이었다. 즉, 만화나 게임 속의 예쁘거나 아름다운 여자 캐릭터의 의상을 입혀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몰리게 할려는 셈이었던 것이다.
강희가 입어만 준다면 이건 뭐 사람들이 몰릴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입소문을 빠르게 안탈리가 없다.
최강희가 코스튬을 했다는 것 자체가 주변 일대 모든 이들의 귀며 눈을 벌어지게 할만한 일인 것이다.
딴건 다~~필요없었다. 최강희가 했다는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만이 진실.
그녀가 아마 옷 한번만 입고 교앞 입구에만 서있어도, 입고 교내를 돌아다니며 만화부좀 들려볼래요? 하고 한번만!! 설령 건성으로 말할지라도 그녀를 짝사랑하는 교내 남학생들이며 인근 남학생들은 말할것도 없고 최강희를 동경,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여학생들 역시 언급할 필요 자체가 없는 일이다.
그정도로 최강희는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애였다.
문제는.....하기만 하면...초 대박인데!! 사람은 확실히!!장담코 끌어모을수 있는데!! 역시 가장 큰 문제는...강희가 그런 의상을 입는다는것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다.
강희는 친구의 애잔한 눈길을 인상쓰며 바라보다 다시 말했다.
"야! 진짜 이건 아닌거 같아! 그...나도 코스튬이란거 티비랑 축제때 본적은 있는데 완전 그거....무슨...진짜 만화니까 그렇게 멋있고 예쁘게 표현되지...순...뻐~얼겋고 새~~파랗고, 그런 색깔 알록달록한 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입냐? 아마 내가 그런거 입고 돌아다니면 다들 비웃을지도 몰라. 하도 웃겨서!"
강희가 염려하면서 다시 절대로 안된다고 할듯한 기색을 비치자 유정은 또 애걸복걸모드.
"아...아니야~ 넌 진짜..왜 그리 걱정이 많은거야? 그냥 너니까. 너~니까 상관없어. 진짜로!! 넌 입기만 하면 돼. 사람? 안불러도 돼. 그냥 입고 요 앞, 그림전시장 될 반 입구 앞에 서있기만 해도 돼. 진짜로!! 아, 아냐. 서있기 힘들겠지? 의자 갔다줄까? 그...그래!! 앉아만 있어. 응? 앉아만이라도 있어줘. 제...제발 강희야 으앙...."
".....으으.......윽...."
강희는 진짜 이제 거의 눈물까지 글썽이며 어깨를 들썩대는 자신의 절친을 바라보며 신음성을 흘렸다. 그녀의 입술 깨무는 빈도가 조금씩 잦아졌다.
"아..아이씨...진짜...별걸 다 부탁하고 그래 진짜....난처..하게시리.....우...."
유정은 자신의 친구 중에서도 정말 친한, 아주 편하고, 고마운 친구. 그 친구가 지금 이렇게 죽자 살자, 교단에 뭔가 보여주기 위해 자기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자기가 싫어할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
강희가 난감함을 표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대며 친구 등을 토닥여줘가면서 의자에 멀거니 앉아있는데 그때 만화부 동아리의 멤버 학생들이 남녀, 학년 할것 없이 강희에게 몰려들었다. 그 중엔 정안이도 끼어있었다.
"?"
강희는 친구 등을 두드려주다가 주위에 몰려든 채 자신에게 염원을 가득 담고 있는 수십명의 학생들, 그리고 그렇게 모여 있는 애들 중에서 가장 앞서 자신에게 다가와 있는 남자애, 정안을 시선에 담고 의아한 빛을 띄었다. 그러다....감을 느꼈다.
"으윽...이건...."
부탁, 애원, 소망을 가득 담은 눈동자들. 절실한 감정들이 가득 모여 뭉쳐서 자신에게 파도처럼 다가와, 자신에게 바위인양 철썩대면서 가슴을 흔들어댔다.
터턱
누가 먼저랄것도 없었다. 다들 하나된 마음으로 무릎을, 신발들이 많이 왔다갔다 해서 더러워져 있는 교실내 바닥에 무릎들을 꿇었다. 거침없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희 누나, 부탁해요!!"
"저 진짜, 만화부 서러움 받는거 싫어요...."
"언니...도와 주세요...."
"제발요....누나가 쪼금만 도와 주시면 되요...."
"...어떻게 안될까요?"
"....아으으........제...젠장....자..잘못 걸렸어....."
강희 조차도 이젠 견디기가 힘들었다. 친구가, 후배가, 동기가, 선배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후...후우...진짜 낯이 다 화끈거려...."
강희는 입술을 꽈악 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정안이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치켜들더니 그녀를 바라보면서 간절히 말했다.
"강희 누나.....누나....."
"..............."
".............."
그렇게 몇 초나 지났을까....
강희는 갑자기 왁- 하고 천장을 보면서 소리질렀다.
"으아악~~ 그래!! 내가 졌어!! 졌다구!!"
다들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유정이도. 눈물이 얼굴에 맺힌채 놀라움의 표정을 가득 담고.
"우와아아~~!!!"
만화부 써클 반에 갑자기 유리창이 깨져라 고함, 함성이 울려퍼진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뭘 입으면 되는데?"
강희는 이제 체념했는지, 답지 않게 풀죽은 목소리로 교실 바닥, 정확히는 흰 운동화를 신고 있는 자신의 발등을 내려다보면서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물었다.
유정이는 너무나 기분이 좋은지 잠시 심호흡을 후아후아 해대다가 강희의 손을 꼭 잡아주더니 말했다.
"응, 니가 좀 보이쉬한 매력도 있고, 암튼, 넌 알지 모르겠는데, 나랑, 또 주위 여자애들, 남학생들이 보는 너에 대한 생각은, 강인한 여자, 멋있는 여자! 그런 이미지거든?"
"...근데?"
"그래서~ 내가 생각한건! 응....춘 리야"
"...춘...리?"
"응!! 춘 리!!"
유정이는 신나는지 악센트까지 딱딱 줘가면서 그렇게 말했다. 강희가 입겠다고 한 마당이니 기분이 날라갈듯한것이다.
강희는 물었다.
"춘 리라면.....스트리트 파이터의 그 춘리? "
"응응, 춘 리가 거기서 나오는 캐릭 말고 또 있나? 그 춘 리 맞아"
"...춘 리의 코스튬 의상을 하란 말이야?"
"응, 그거 입으면 돼. 의상은 내가 이미 다 손써놨어. 넌 ok 싸인지령만 내림 돼"
강희는 춘 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그 한가지에 생각이 미치자, 강희의 억양이 또 올라가기 시작했다.
"야!!"
"?"
어리둥절한 시선을 담은채 자신을 보는 유정에게 강희는 총알같이 말을 쏟아뱉었다.
"춘 리는 스타킹 신잖아?~!!"
"어..응...근데?"
"너~!! 내 베스트 프렌드란 녀석이 내 취향 몰라서 그래?!!"
강희는 진짜 질겁하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유정이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그걸 듣자 유정도 퍼뜩 미치는 게 있어 아...하고 신음성을 흘렸고 강희를 좀 많이 아는 만화부 내의 여자애들도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소수의...강희의 광적인 추종자인 남학생 녀석들도 미미하게 고개를 까딱거렸고.
최강희가 학교에서 유~~명한 것 중에 특이한 한가지가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최강희는......스타킹을 절대로 신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강희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중에서, 그녀를 항상 관심있게,몰래 몰래 사모하면서, 동경하면서 줄곧 바라봐온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그것을 알아낸 것이다.
그 누구도, 최강희가 스타킹을 신는 것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최강희는, 항상 발목 양말만을 신거나, 아니면 설령 맨발에 운동화 차림으로 오는 일은 있어도, 절~~대로 스타킹은 신지 않았다. 그녀가 단 한번이라도 스타킹을 신은 것을 그 누구도 목격한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유정 역시 그것을 모를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좀전까지 너무 흥분해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만 자기 친구의 기호를 깜박한 것이다.
사실 유정은, 적어도 유정만큼은 강희가 왜 그리도 스타킹을 신지 않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최강희는 스타킹 재질에 일종의 알레르기성 반응...비슷한 것이 있었다.
스타킹을 만드는 재질의 주가 되는 나일론, 그 나일론이란것에 최강희는 굉~장히 민감한 여자애였다.
스타킹을 신은 채 있으면 괜시리 발가락 사이도, 발바닥도, 이상하리만치 근질근질, 가려움증 비슷한 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증세를 보일때 발에 뭐가 난다는 것은 아니었다.
최강희가 분명, M 성향이고, 간지럼을 좋아하는 여자애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최강희가 즐기는 간지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스타킹을 신고 있을때 느껴지는 그 근질거림은, 일종의 벌레가, 무수한 벌레가 사박사박 발가락 사이사이나 발바닥 가운데며 아치, 뒷꿈치를 기어다니는듯한, 소름이 돋는 듯한 간지럼인 것이다.
강희는 화~끈한, 맹렬한 간지럼을 좋아하지, 결코 그런걸 좋아하진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간지럼과는 정의, 기준이 틀린 셈이다. 더구나 스타킹을 신고 있는 시간 내내 그런 느낌인데, 무슨....발에 자학 할일이 있는것도 아닌 그녀가 7시간이 넘게 학교에서 그걸 신어가면서 소름을 즐길리가 없었다.
그리고, 최강희는 스타킹을 착용한 상태에선 발 간지럼을 훨씬 잘 탔다. 이 사실은 현재까진 강희 본인과 친구 유정이만이 아는 사실이다. 유정이가 스타킹을 절대 안 신는 자신의 친구가 왜 그러는지 이유가 궁금해 꼬치꼬치 캐묻자 결국 두손놓은 강희가 다 불었기에 알고 있는것이다.
나일론 재질에 하도 민감한 여자애라서, 초중생때 몇번 신어보고 질겁한 이후로 그녀는 절대로 스타킹을 신지 않았다.
그런데....강희가 코스프레 해야 할 춘 리 라는 캐릭터는 확실히 차이나 드레스에 스타킹, 그리고 롱 부츠를 신은 여자캐릭터였다. 그래서 강희가 질겁한 것이다.
"아..안돼...딴 걸로 해. 춘 리는 안돼"
"하...하지만...그...고객몰이 할때 팬시 관련이나 귀여운 상품 쪽으로 쫌...아동 고객을 노리고 있어서 그래....그런 이유도 있어서 춘리를 선택한거야..."
"...무슨 소리야?"
요약된 말만 듣고는 강희가 좀 알아듣기 힘들어 인상을 쓰자 유정은 한숨을 쉬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요새 인근 문방구에서 자체적으로 오락기들을 두세대씩 두고 아이들 상대로 수입을 올리나본데, 내가 돌아다니다 우연찮게 알게 된건데, 스트리트 파이터를 설치해놓은 곳이 많더라구. 쫌 옛날 기종이었어. 근데 넌 알지 모르겠는데 춘 리 라는 캐릭터가 스트리트 파이터 초반 기종에선 유일한 여자 캐릭터였거든. 지금은 캡콤에 수많은 여자 캐릭터들이 나왔지만, 원조 여 히로인을 뽑으라면 단연코 춘 리, 그녀가 뽑혀. 암튼... 유일한 여자 캐릭터라서 그런가 아이들이 좋아하면서 많이 고르는 편이더라구. 그, 그리고 춘리가 승리하고 나면 막 폴짝폴짝 뛰면서 귀엽게 승리 포즈 취하고 애교부리는 식이거든? 그런걸 또 아이들이 좋아하더라....난 아동들도 노리고 있어서...굳이 니가 춘 리를 해주길 바란거야 강희야. 춘 리 복장을 선택한 건 이런 이유였어......춘리는 매우 강한 이미지의 여자캐릭터라 너하고도 잘 맞는듯했고.."
꽤나 길게 중얼대면서 낮게 말하는 유정의 말을 쭈욱 듣고 있다가 강희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좌우로 도리질을 치면서 어쩔수 없다는 듯, 춘 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애써 하면서 혹시나 하고 물었다.
"보통 게임 캐릭터는 두세가지 복장이 더 있지 아마? 춘 리의 딴 복장은 뭐니?"
유정은 놀랍다는 시선을 그녀에게 던지더니 물었다.
"춘...춘 리의 다른 복장은....전신 타이즈...인데...입을래?"
"됐네요!!!"
강희가 씨근거리면서 집으로 휑~ 하니 가버렸지만, 유정의 입에는 살짝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녀는 강희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넌 또 내 부탁을 들어주었네 강희야....넌 참..강해보이는척 하지만 알고 보면 너무 순진하고 착한 애야..바보같다고 여겨질때도 있을정도로..고마워..."
유정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홀로 앉아 있는데, 실 내 책상 한 구석에서 자기 그림 작품에 몰두하던 정안이가 어느새 쓰윽 다가와 유정이의 옆에 앉더니 은근슬쩍 물었다.
"저 누나"
"응?"
"그.. 강희 누나가 아까 스타킹 이야기 나왔을 때 왜 그런 거에요?"
"응? 스타킹? 아...그거?"
"네"
애써 별 관심 아니라는듯,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식으로 물어보는 정안. 그는 별 티를 겉으론 안냈지만 속으론 두근두근 해대고 있었다.
강희 누나와 스타킹!! 왠지 모르게 스타킹에 당황하는 눈치의 강희 누나!! 뭔가 엄청난 흥미를 유발시키지 않는가 말이다.
그가 그냥 심심해서 물어본 듯한 스스럼없는 반응을 보이자, 유정도 별 뜻 없이 가볍게 말해줬다.
"아 응. 강희는 스타킹을 절대 안신어. 알고 있는 학생들은 알지. 누가 입소문을 슬쩍 내서. 유명한 이야기인데?"
"네에..."
"음..그렇구나...왜 그러지?"
정안은 내친 김에 진짜 역시 또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그의 주특기 중 하나가 은근 슬쩍, 아무것도 아닌 척하면서 상대를 편안하게 유도해 내면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보는 고도의 말빨이었다.
"왜 그럴까요?"
유정은 나중에 강희한테 한번 크게 혼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비밀이라면서 말해준 건데, 하도 정안이가 편안하게 묻자 그녀역시 아무렇지도 않는 느낌으로 술술 말해버린 것이다. 물론 그 둘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작업에 열중하느라 듣지 못했다.
"아 응. 강희는 스타킹을 신고 있으면 괜시리 간지럼을 잘 탄다드라 발에 말이야. 훨씬 민감해진대"
"!!!!"
"아...그렇군요"
정안은 속으로 쿵떡쿵떡 뛰는 가슴을 안정시키려 하면서 끝까지 아무렇지 않은 신색을 유지한채 다시 자기 자리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별생각없이 바라보던 유정은 그때서야 퍼뜩 생각이 미쳐 혼자 낮게 탄식했다.
"아...강희가 비밀이랬는데....스타킹...."
그녀는 자기 실수가 맘에 안들어 입술을 꽉 물으면서 정안의 뒷모습을 보았다. 정안의 뒷모습에선, 그냥 자기 작품에 열중하는 한 사람의 모습만이 비쳐질 뿐이었다.
"자자~ 빨리 광고지 뿌려!! 최대한 몰래~~멀리~~너~~c게 뿌려 알았어? 강희 모르게 해야 해?"
용의주도한 유정은, 강희가 알면 또 길길이 날뛸 만한 일이었기에, 그녀 모르게 일을 처리할 속셈으로 만화부 멤버 학생들에게 언질을 하면서 작업의 신호탄을 쐈다.
광고지의 내용은 대략,
으로 맺음. 문화제가 시작되는 일시와 장소. 시작시간부터 종결시간까지를 우측 하단에 정확히 기재한 광고지였다. 문방구에서 대량으로 복사해서, 수십장정도였는데 이제 이것을 인근 학교 내 또는 시내 전봇대, 가로등에 뿌려주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물론. 강희가 되도록 반드시 모르게!!
"좋아좋아, 다들 출동~!!"
문화제 시작이 일주일도 채 안 남은 시점인지라, 다들 필사적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미친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화제 시작 이틀 전날의 새벽.
TBM에는 퀸이 접속해 있었다. 특별회원인 그녀. 역시나 또 혼자였다. 그녀는 특정인을 제외하곤, 누가 접속하는걸 보는 즉시 꺼버리는지라, 그녀와 대화는 커녕, 접속을 하고 있는 것 자체를 보는 이들조차 거의 없었다.
퀸은 여전히 강희, 티렉스에 대해 무한한 관심을 보이면서 그녀의 이미지 파일, 기재글을 살피면서 입술을 혀로 적셔가며 핥았고, 또 이것저것 정보망을 동원해 알아낸 바, 최강희의 추종자 모임인 최강희 러버 팬까페 모임에도 가입해서 동시접속을 한 상태였다. 퀸은 이미 신청서를 작성하여 정회원인 상태였는데, 순전히 강희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가입한 상태였다.
타닥 타닥
열심히 클릭해가면서 강희를 몰래 찍은 교내에서의 사진이나, 그녀를 찍어낸 파파라치동영상을 보는 퀸.
"와아...정말 이쁜 아이네, 흐흥...이름도 멋지고. 이런 아이는 보통 보이쉬하지 않나? 쿨~~하고 말이야 후후. 아유 참 귀엽게 생겼네 정말"
연신 감탄을 하면서 이것저것 정보들을 들추는 퀸. 그때 그녀가 있는 방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
끼익
들어온 사람은 아직 고등학생 티를 보이는, 나름 매력을 발산하는 귀엽고 앳된 이미지를 풍기는 여자애였다. 그녀의 손에는 주스가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여자애의 복장은 투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이벤트때나 활용되는, 또는 이미지클럽에서 쓰임새있을법한 고양이 귀 리본을 착용하고 있었다.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드실 것을 가져왔습니다"
"응, 침대에 내려놓고 잠깐 내 옆에 와 앉아"
여자애는 눈동자에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마치 명령만을 수행하는 기계같은 움직임으로 퀸이 시킨 대로 했다. 퀸이 앉은 의자 옆에 의자가 하나 더 있었기에 그녀는 퀸의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얼굴엔 부끄럽다는 표정조차 단 한점도 어려 있지 않았다.
퀸은 컴퓨터 모니터에 클로즈업된 강희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생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예쁘지? 귀엽지 않니?"
"네. 아주 예쁩니다. 같은 여자가 봐도요"
"응, 이 애 누군지 알어?"
"네. 최강희라는 이름의 여학생입니다. 여기서 좀 떨어진 시에서 사는 학생인데, 그쪽 일대의 제나이또래 학생들에겐 남학생들에게도, 여학생들에게도 상당히 유명한 여학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넌 어떻게 알았어?"
"친구 중의 한명이 그쪽에서 사는데 그 친구가 이 여학생 팬까페 회원이거든요. 저한테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준적이 있습니다"
"아 응 그렇구나. 암튼 정말 예뻐. 조만간에 가지고 싶어. 너무너무~"
"여왕님께서 마음만 먹으신다면 얼마든지..."
퀸은 여자애의 대답을 듣곤 양 손뼉을 짝 소리가 나게 치면서 좋아라했다.
"와~ 정말? 도와줄래? 니가 도와주면 아주 쉬울거야!! 저 아일 가지기가 말이야~"
여자애는 또 무표정으로 말했다.
"저뿐 아니라 여왕님을 도울 사람은 많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여왕님의 것, 여왕님의 종, 여왕님의 뜻대로 하시길"
퀸은 기분이 좋은지 혼자 생글생글거리다가 여자애에게 말했다.
"바닥에 누워. 그리고 종아리를 의자에 올려놓을래? 너의 발을 며칠동안 음미 안했더니 입맛이 당기네 매우"
"알겠습니다"
여자애는 전혀 주저 않고 그녀가 시킨 대로 했다. 바닥에 몸을 일자로 눕히곤 두 종아리만 다리를 모아 의자에 올려 놓곤 그렇게 대기에 들어간 것이다.
퀸은 만족스레 명령을 수행한 그녀를 보고 있다가 침대에 올려져 있던 오렌지 쥬스를 쪼금씩 쪼금씩 여자애의 발가락 사이랑 발바닥에 흘리기 시작했다.
주륵.. 주륵....
"아..음..."
여자애는 차가운 액체가 발에 닿자 흠칫흠칫 댔지만, 여왕이 하는 일에 감히 반항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이 묵묵히 견디면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퀸은 쥬스를 붓는 것을 그만두곤 잠시 입맛을 쩝쩝댔다가 여자애의 발가락 쪽에 혀를 내밀기 시작했다.
스륵...
엄지와 검지 발가락의 사이에 그녀의 혀가 녹아들듯,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여자애는 으음 하고 신음성을 흘렸다. 간지러운지 발가락을 꿈틀 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퀸이 채근하듯 조그맣게 말했다. 작게 말했지만 왠지 모르게 위엄이 서려 있었다.
"가만 있어~!!"
"으음..네에"
여자애는 눈을 더 꼬옥 감고는 입술까지 살짝 깨물어가면서 간지럼에 대한 자신의 반응 정도를 줄이려 애쓰기 시작했다.
여자애의 신음 소리와, 발가락들의 미미한 떨림을 눈으로, 입으로 즐기면서 퀸은 정말 기대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난 여자애한테 예쁘고 귀여운 옷을 입히길 참 좋아하는데..후훗~ 문화제가 열린댔지? 정말 기대되는걸? 응? 우후~"
문화제 당일.
와글와글
북적북적
"....제...젠장....되게 쪽팔리네..."
"아냐아냐. 그리 생각마. 다 널보러 온거라니까? 응? 손이라도 흔들어주는게 어때? 다들 환호할거야? 어쩜 까무러치는 남자 녀석들도 있을지도..응? 해봐?"
"무슨..!! 지금 서있기만 해도 목이 다 뻣뻣해...."
한유정의 아이디어는 완전 메가톤급 직격탄이었다. 최강희를 안다는 교내 학생들, 주변 중고등학교부터 시작해서, 그놈의 오락기 때문에 춘 리 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그리고 또 춘 리를 플레이하길 좋아하는 초등학생들까지 몰려든 것이다. 지금 이곳은 학교 내 운동장의 가운데, 운동장 내에서도 노른자에 위치한 지점이었다. 이 위치를 차지한 것도 순전히 최강희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업적!!
최강희가 춘 리의 코스튬을 한다고 하자, 선생님들이 침을 꼴깍 삼키고, 교장선생이 언성을 높여가면서 만화부에 적극 협찬이 들어간것이었다!!
항상 전년에도, 전전년에도, 그 언제라도 교내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쥐고 있는 써클들이 차리한 자리였건만...단 한 명의 여학생이 만화부에 가세함으로서 이정도의 힘을 실어준 것이다.
워낙 엄청난 인파가 만화부 쪽에 몰린지라 다른 부 중에선 난처해진 곳이 한두곳이 아니었고, 명당을 빼앗기고 사람들마저 빼앗긴 방송부나 셈틀부 멤버들은 아예 울상까지 지을 정도였지만, 최강희가 나섰다니까 그녀를 흠모, 동경하는 멤버들이 넘쳐나는 학교인 이상 누구 한명 그녀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그랬다는데 어떻게 울분을 터뜨린단 말인가.
정말이지 경이로운 인기 아닌가. 그녀를 보기 위해, 인근의 초,중,고등학생은 말할것도 없고, 20~40, 많게는 50정도의 나이를 지니신 분들까지 몸소 걸음을 하셨다. 춘 리 코스튬을 한 강희를 보기 위해서 말이다. 진짜 스타가 따로 없었다.
팬시 판매랑 기타 소품 등의 판매는 운동장 쪽에서, 그림 전시와 타로카드점, 애니메이션 상영은 한 교실반에서 하는 양동팀으로 나뉘어진 문화제. 만화부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항상 괜찮다 싶은 교실 반 하나도 얻기 힘들었으니까.
입술을 삐죽이고 창피해하면서 볼까지 살짝 붉힌 춘 리 복장의 강희는 그야말로 프리티 걸이었다. 어제부터 강희의 자취집에 찾아가 손수 가져온 의상, 복장을 다 입혀보고 머리단장과 롱 부츠까지 신겨본 유정. 동아리 멤버 중에 강희를 까무러치다시피 동경하는 후배 여자애들 둘까지 같이 와 셋이서 완전 강희를 꽃단장 해줬다. 그리고 나온 모습은....그야말로 완벽한 춘 리의 재현!!
이보다 더 완벽한 코스튬은 없다!!
강희를 보고 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는데, 세 사람이 찾아오기 몇 시간 전에 강희를 다시 한번 다독이고, 달래려고 유정 혼자 따로 왔었는데, 그때 스타킹을 두고 이야기가 한번 더 나왔었다.
"정 느낌이 그리 이상하면, 춘 리의 부츠가 상당히 길거든? 되게 롱부츠야. 그니깐 발목 쪽은 잘라버려도 돼 강희야. 어차피 종아리까지만 보이면 되니까"
유정의 제안에 고개를 저으면서 질색한건 강희 본인이었다.
"그게 뭐냐? 신을거면 다 신어야지... 됐어. 차라리 이 기회에 오랜만에 한번 신어볼래"
유정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강희는 마음을 굳혔는지 별 스스럼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응, 몇 년 안 신었으니 체질이 좀 바뀌었을지 누가 알아? 이젠 근질거림이 별로 없을지도...."
"그..그래 한번 신어봐"
강희는 정말 몇년만에 춘 리 복장을 하기 위해 스타킹을 신어봤다.
스르륵
발가락부터 들어가서 아치와 뒷꿈치, 발목을 지나 종아리와 허벅지까지 쭈르륵 올리고 난 후에 강희는 침대에 앉아서 발가락 끝을 위아래로 까딱거려봤다.
까닥 까닥
"으음...음..."
"어..어때?"
유정이가 강희의 움직이는 발가락들에 시선을 주면서 묻자 강희가 좀 더 느껴보다 대답했다.
"아 음...근질거림은 이젠 별루 없는 것 같다. 사라졌나봐"
"지..진짜?"
"응. 근데 간지럼은 훨씬 잘 탈거 같아. 왠지 발바닥이랑 발가락쪽이 미끌미끌하단 느낌이야. 비누칠된 느낌?"
"어어...암튼 이젠 막 벌레 기어다닌다던지 그런 느낌은 없다는거지?"
"응. 그런거 같네"
결국 강희는 스타킹을 신어도 발쪽 피부가 더 민감해지는 것 같다는 것 외엔 별 반응이 없는 듯하자 춘 리를 하기로 마침내 최종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춘 리의 복장을 문화제 당일날 교내 그림전시장 개시가 되기 전에 다시 한번 완벽하게 의상을 마친 후에 춘 리 복장으로 나타난 강희를 보고 보인 학생들의 뇌리에 스친 생각은...
"초...초대박 예감~!!"
이었던 것이다....그리고 결과는.....확실했다....
"에휴에휴....내가 뭘 하고 있는거람?"
강희는 잠시 바람을 좀 맞고 싶어 팬하고 종이 들고 싸인해달라고 들닥같이 붙어대는 여자아이들과 헬렐레 거리며 쳐다보는 남학생들을 간신히 물리고 나서 도망치다시피 교내 뒤편쪽에 있는 등나무들이 놓이고 정자 모양으로 지어진 목각 건축의 뜰에 들어가 엉덩이를 내려놓고 있었다.
"아..아으...춘 리가 실존인물이면 이런 걸 신고 어떻게 싸운대? 발 갑갑해 죽겠네...."
춘 리의 의상 중 하나인 흰색 롱 부츠를 내려다 보면서 강희는 자기 발의 후끈대는 갑갑함의 표현을 내뱉었다. 그때...
슬금슬금
"응?"
강희는 어느새 자신을 따라 여기까지 몰려든 이들이 있는 걸 보고 인상이 슬쩍 찌푸려지려 했으나....
"아이들이네. 초등학생?"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한창 뛰놀것 같은 모습이 물씬 풍기는, 머리엔 LA 다저스의 글씨가 새겨진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남자 아이, 그 애의 친구들로 보이는 남자애들 둘과 마냥 귀여운 여자 아이 하나. 도합 네명의 아이들.
아기자기한 느낌을 풍기는 콩알같은 시선들이 한껏 기대감과 선망 어린 느낌을 그대로 생생히 그대로 담은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역시 때묻지 않은게 좋아. 아유 쪼그만 것들이. 참 귀엽게도 생겼네. 올망졸망한 맛이 있다니깐? 후훗~"
강희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순수하고 깨끗한 곳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함. 그것이 조그마한 사람들의, 어린 아이들의 매력이 아닐까.
"그래서 동심이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흐뭇한 미소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다저스 모자를 쓴 개구장이 스타일의 남자아이가 친구들을 이끌고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말했다.
"누...누나"
"으응?"
강희는 배시시 웃으면서 아이의 말을 기다렸다.
"누..누나..진짜 멋있어요. 진짜요.."
그러면서 아이는 친구들에게 동의를 구하려는 듯 그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그..그렇지?"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더니 합창하듯, 이구동성으로 앞다퉈 외쳤다. 마치 누가 보면 입으로 싸움이라도 할 기세처럼.
"마...맞아요. 진짜 멋있어요. 짱 예쁘구요!!"
"최고에요!!"
"언니 좋아요..."
여자아이의 손에는 유정이네 부가 만든, 강희를 염두에 두고 만든 춘 리 팬시상품이 들려 있었다. 귀엽게 그려진 춘 리의 모습이 코팅된채 안에 담겨 있었다.
아이들의 순수한 경탄에 즐거운 듯, 그리고 낯간지러운 듯 강희는 깔깔 웃더니 말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
아이들은 또 합창했다.
"네~!!"
그렇게 잠시 재미있는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다저스가 나섰다. 녀석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는 듯 물었다.
"누..누나!!"
"응?"
다시 사랑스런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봐주며 강희는 기대감어린 표정으로 생각했다.
"또 무얼 물어볼려는걸까? 이 호기심덩어리들이?"
하고...
그리고 받은 질문은....
"백열각 보여줘요!!!"
"....뭐?"
강희는 순간 디잉 하고 머리가 울리면서 고개가 우측으로 살짝 꺾어지는 느낌이었다. 강희의 그런 태도는 아랑곳 않고 아이들은 또 열을 올렸다.
"맞아맞아 보여줘요 백열각!!"
"천열각두요!! 필살~기!!"
"기공장 날려줘요~ 보여주세요~~~"
"................."
강희는 잠시 왁왁 흥분해대는 아이들을 멍-히 보고 있다가 이마를 한번 짚더니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저...배..백열각이 뭐니?....천열각은 또 뭐야? 그리고....기공장?.....장풍이니 그거?"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 떠듬거리며 묻는 강희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은 또 입을 열었다.
"백열각 있자나요. 누나가 가장 많이 쓰는거!! 얍얍 얍~ 하면서!! 막 발 와다다 날리구요"
"맞아요 그거!! 혼다 백열손이랑 붙으면 누가 이기는지도 묻고 싶었어요~"
"천열각 누나 필살기잖아요 막 다리 무진장 마구마구 날리고~ 백열각 막 곱한거 같은거요"
"기공장 누나 손모으면 되잖아요? 얍! 하구요"
".........아아.... 백열각은 좀 알겠네. 나머진 뭔소린지....암튼...아하하...그걸 보여달라구?"
강희는 서글픈 웃음을 지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순수한거......좋은거구나....."
그렇게 한 코스튬 여학생과 순진한 아이들 넷이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으레 그렇듯 방해꾼이 또 나타났다.
"앗~ 여다!! 크흐흐~~야~~ 찾았다~~"
"어? 여었어? 와!! 진짜네. 흐하하~"
자칭 최강희 광팬들. 광적인 집착까지 보이는, 머릿속엔 그것만 들은, 이미 강희한테 몇번 혼쭐이 났는데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그것도 인근의 다른 타 학교의 머저리 남학생 녀석들 세명이 강희를 기어코 발견해내곤 접근 중이었다.
보나마나 또 사귀어주라!! 니가 그리 잘났냐!! 하면서 마구마구 매달릴 놈들이다.
"이런 씨....저것들은 또 왜...."
강희는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싫은 기색을 완연히 드러냈지만, 남자 녀석들은 머리가 돌인건지 뭔지, 그냥 으흐흐 웃으면서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세 놈중의 한놈이, 강희의 옷차림새를 보더니 흐헤헤 혼자 육갑을 하면서 말했다.
"흐흐~ 누나~ 사귀자~~"
"누나!! 짱짱~~와하하~~진짜 열라 이쁘다~~"
"크하하~~"
세 녀석을 보면서 강희는 간단히 한마디 읊었다.
"미~~친새끼들...."
멍....
남학생 녀석들이야 이미 반응을 예상했지만, 꼬마 아이들은 순간 눈들이 동그래지면서 멍-한 표정들이 되었다. 잘 뜻은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저건 절대 좋은 말은 아니라고 부모님들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근데 왠걸, 좋아하는 여자 캐릭터가 무시무시한, 무서운 말을 하질 않는가.
"으응..으엥...."
여자애 한명이 울먹거릴 듯하자 강희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한달음에 달려갔다.
후다닥
타박
강희는 주저 없이 무릎을 굽히곤 여자애 이마에 뽀뽀도 해주고 머리도 쓸어주고 하면서 쩔쩔맸다.
"아...아냐 얘. 꼬마야? 무서워하지마. 언니가 그냥...아하하~~ 그냥 웃자고...웃자고 한 소리야~~ 꺄하하하~~하하..."
강희는 식은땀까지 다 흘려가면서 여자애를 위시한 남자 꼬매애들 모두를 다독여줬다. 그러면서 속으로 자신에게 외쳤다.
"아윳!! 이 멍청이 최강희!! 아이들 앞에서 뭔입방정이얏!!"
그렇게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는데 남학생 녀석들이 역시 바보들의 각본대로 놀기 시작했다.
"어이 얘들아, 이제 그만 집에 가라. 아님 운동장에나 가던지. 우린 이 누나랑 찐~~하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거든? 응?"
"크크 맞아. 어린 것들은 만화나 보면서 놀아라. 훠이훠이..빨리 집에 가. 안그럼 호랑이가 잡아간다?"
아이들은 덩치큰 고등학교 형, 오빠들이 무섭게 엄포놓으면서 막 윽박지를 듯하자 울상이 되었다.
까드득
강희가 이빨을 한번 속으로 거칠게 간 후에 녀석들을 한번 차갑게 노려봐준 후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서 여자아이의 얼굴에 묻은 눈물자욱을 지워주면서 배시시 웃어주곤 상냥하게 말했다.
"울지마아~ 언니가 잘못했어. 대신에 멋진거 보여줄께"
"머..멋진거요?"
여자아이가 기대감을 가지고 좋아라 해대고 아이의 친구들 역시, 특히 다저스가 한껏 눈을 크게 치뜨면서 두근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강희는 약간 오버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말했다.
"그러~엄, 이 언니가 장풍...이 아니고 기공장? 그건 좀..오늘 힘들어서 못하겠구. 백열각은 보여줄께. 항상 하는거거든? 응? 후훗. 그러니 울지 마. 알았지?"
"네에~"
아이들의 합창이 한번 울리고 그때쯤 이번엔 뒤쪽에 있던 녀석들 셋이서 멍-한 표정이 되는 것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강희는 여자아이와 남자애들을 한번 쓱 둘러본 후 윙크를 해주곤, 아이들쪽에서는 그녀의 등이 보이게끔 위치를 바꿨다.
그러고 나자 변하는 표정이란....
"으윽..."
"....디졌다..."
남자 녀석들 셋다 직감했다. 오늘...잘못 걸렸다.
쿠아아
강희의 왼 다리가 45도쯤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오른다리가 힘있게 올라간 후에 선보인 기술. 그것은 전설의!!!
"이야아~~압. 백열가~~악~~!!!"
번쩍
그다음엔 뭐가 뭔지 빛이 타오르는 듯했고, 뭔가가 퍼버버벅 하는 소리가 엄청나게 아이들의 귓전을 울리기 시작했다.
투타타타타~~~
"아다다다다다~~~~~~얍얍얍 으랏X아아아아~~아드드드드~~아아아아~~~야아압 이야앗~~~~"
파파박 파박 투파파파파파파~~~
1분 뒤..
털썩
털썩
털썩
교내 등나무쪽 일대에, 왠 넝마덩어리 세개가 차곡차곡 섞이다시피 된채, 쥐어짜진 걸레같은 모습으로 너덜하게 되어져 위치해져 있었다.
녀석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게거품을 물고 눈들이 까뒤집어진 상황. 그래도 몸 생각을 쪼~끔(?)은 한 강희는 녀석들 뼈가 어떻게 되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 내일 일어나면 아마 근육통때문에 죽어날 각오를 해야 할걸?"
차라리...안 깨어난게 좋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지도...
스윽
강희는 다시 몸을 빙글 하고 아이들 쪽으로 돌린 후 오른 다리를 여전히 든 채로 외쳤다.
"얍얍 얍~ 아~~아앗!!"
"............."
"............"
"............"
"............"
.....;;;;;;;;
"...? 별루...였나?"
강희가 쪼금 창피해하면서 얼굴이 붉게 물들려 할때...
"우와아~~~~~짱이야~~~~"
아이들은 저마다 손뼉을 잡고 강강술래라도 할셈인양 빙글빙글 돌기시작했다. 강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휴...맘에 든것 같네"
강희는 계속 몸을 돌리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또 생각했다.
"어릴때가 좋은거야......"
"누나, 빠이~ 담에 또봐요?"
"그땐 기공장 보여줘요?"
"꼭이요~~"
"그래에~~ 잘 가라 요녀석들아~~"
강희는 손을 살짝씩 흔들어줘가면서 애들머리를 다 쓰다듬어주고는 모두 돌려보냈다. 강희는 선연한 하늘을 한번 바라보았다 휴 한번 하고 숨을 쉬어준 후 몸을 일으켰다.
"자..그럼...다시 가보실까?"
강희가 그렇게 발자국을 몇걸음 떼었을 떼였다.
흠칫
"!!"
오싹...하다고 해야 할까. 강희는 그런 느낌을 순간 받았다. 마치......날카로운....그리고 차가운....뱀같은 차디찬 시선, 왠지 자신을 노리는 듯한 어떠한 것에 대한 느낌. 그런 일종의 감을 강희는 받았다.
그래서 강희는 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그녀는...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한명의 검정색 일색의 정장을 입은 여자를 한명 보게 되었다.
"...서른? 마흔?....나이를 짐작하기가 힘들어..."
첫인상이 그랬다. 여자는 분명 상당히 나이가 있어 보였는데, 20대가 가질수 있는 젊음의 매력이 아닌, 그런 것이 아닌, 완숙미를 뽐내는 몸매, 하지만 얼굴만으론 통 짐작을 하기가 힘든 인물이 서 있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숏 컷의 머리를 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매력이 있었다.
도도하고, 왠지 모를 위엄이 있어 보이는, 만인을 발밑에 둘것 같은 스타일의..
이것은 마치...
"여왕?"
강희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첫인상이 이리도 강렬한 여자라니. 최근에 공원에서 보았던 아수라 말고는 자신에게 이정도의 존재감, 이미지를 비춰낸 사람이 여자 중에선 없었다. 정안이는 남자니까 논외고.
"언제 다가온거야? 참 조용한 사람인걸?"
강희는 꽤 잘 듣고, 잘 보고, 잘 느끼는, 오성이 발달된 여자애였다. 근데 이 여자가 언제 자신의 뒤를 점했는지는 막연한 감도 잘 안잡혔다. 참으로 조용한, 차가운 느낌을 풍기는 여자였다. 그런 이미지의 여자가, 은은한 미소를 띈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강희는 먼저 운을 뗐다.
"아...안녕하세요? 교내 축제를 보러 오셨나요?"
여자는 살짝 미소를 지어주곤 대답을 했다. 입을 열었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품위있어 보이는 동작이라 느껴졌다.
"그런 것도 있고...더 큰 목적은 따로 있었어요"
"그러..세요? 어떤...아 죄송합니다. 초면인데 실례를 했네요"
"아뇨. 실례라니...과연.....수고한 보람이 있네. 학생은 참으로 예쁘군요. 부러워요. 젊음의 매력이 풀풀 풍기네요"
".....감사합니다"
강희는 칭찬을 들었는데도 왠지 기분이 기이하여 짤막하게 감사말만 전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계속 흠칫거렸다.
"대체 왜이러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약간 주춤대며 강희가 상대를 보고있자, 시선을 받는 여자가 또 생긋 웃어주곤 말했다.
"난 오늘 그냥 찾는것, 원하는것을 보고 느끼고 하려 왔을 뿐이에요. 문화제? 이건 그냥...즐거움의 시작 정도의 재미로 여겨도 썩 괜찮겠다 싶네요. 아가씨, 그 코스튬, 참으로 잘 어울려요. 정말로요"
"아아...네에..."
강희는 또 고맙다고 하기도 머뭇거려져서 짧게 대답했다. 여자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이상한 말을 남기면서 사라져갔다.
"오늘은 이쯤 해서 갈래요. 일단 궁금증은 다 풀었어요. 보고, 느꼈으니까. 만족스러워요. 아주 좋군요. 우리, 인연있음 또 봐요. 내 생각인데, 아가씨하고는 조만간에 만날수 있을거 같네요. 후후~ 내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강희는 점점 멀어져 가면서 이상한 코멘트를 남기는 여자가 정말 궁금했지만, 그냥 그렇게 멀어져 가는 저 여자를 마땅히 잡을 만한 명분도 없고 해서 말없이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얜 어딜 간거야? 사람들이 널 찾으려 하니까 다 흩어져버리잖아...응? 강희야...."
입술을 깨물면서 조바심을 내는 유정. 아직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미 상품들도 상당히 많이 팔렸고 선전 중이었다. 그때...
쓰윽
"어라?"
갑자기 뭔가 주변이 조금 어두워졌다 싶을 정도로 기이한 느낌을 유정은 받았다. 그리고 자신 앞에, 언제 소리없이 다가왔는지 한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서있었다.
"와..아름답다"
예쁘니 귀엽니 할만할 때를 아득히 지난, 나이는 상당히 보이지만 여성스러운 모습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 여성상을 지닌 검정색 일색의 정장 차림의 인물이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유정은 활짝 웃어주곤 물었다. 지금 상당수 멤버들이 애니메이션 상영과 그림전시회와 관련하여 교실반쪽으로 이동한 직후라 회장인 자신이 여길 단독으로 맡고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자는 살짝 미소띈채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최강희 학생을 아나요 학생?"
사적인 질문이 날아올지는 몰랐기에 잠깐 놀랐으나 유정이는 다시 웃어주면서 말했다.
"네, 친구에요. 아주머닌 누구세요?"
여자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곤 한번 또 물었다.
"강희 학생과 많이 친한가요?"
"네? 아...네. 그앤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적어도 가장 친한 동성친구에요. 암튼..뭘 도와드릴까요"
유정이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여자는 생긋 웃어주곤 샌드백을 들고 있던 오른손을 왼손에 바꿔 들고는 맨손이 된 오른 손, 정확히는 검지 손가락으로 유정의 이마에 난데 없이 짚었다.
틱
"..어?"
유정은 갑자기 온 여자손님이 자신의 이마를 짚자 "왜 그러세요?" 하고 반문하려 했지만 상대는 틈을 주지 않았다.
"니가....날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안되겠니? 응? 내 부탁인데말이야~ 응? 후훗...."
".........."
유정은 갑자기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눈동자의 색깔이 탁해져 있었고, 뭔가 넋이 놓여진 표정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잡고 있는것은 상대방 여인의 눈동자. 그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마력이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응? 아무리 강희랑 친하다지만...설마 내 부탁을 거절하진 않겠지? 그렇지?"
"....네"
유정은 홀린 듯이, 자기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리 대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진채로 시간이 흘렀고, 그런 그 두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그 무수한 운동장의 인파 속에서도 단 한명도 없었다....
그림 전시전실.
강희는 전시관까지 이동 중에 별의별 여학생들을 다만났다. 중학생들도 있고, 고등학생도 보였지만, 나이의 위아래 차와는 관계없이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소리는...
"까악~~언니!! 너무 예뻐요~~!!"
"싸인 해줘요~ 제발요~네?"
"거절 안하실거죠? 언니 진짜 좋아해요~"
등등... 도대체 몇십명짼지....
"휴우...힘들어..."
강희는 여자들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내치고 하는 성격이 못되는지라 부득부득 애써가면서 즉석에서 자기 이름을 평범히 새겨넣은, 어찌 보면 여자완 어울리지 않게 무뚝뚝하게 여겨질만한 글씨체로 싸인을 해줬지만, 여자애들은 또 지들끼리 왁왁거리면서 무뚝뚝한것도 멋있느니, 그게 저언니의 또다른 매력이니 뭐니를 해대가며 완전 난리법석이었다.
"헤유...."
강희가 애써 전시관에 가는 이유는 그 유명한 진정안의 그림 솜씨를 보기 위해서였다. 정안이의 그림 솜씨는 만화부에 들어왔을때부터 주변 인물이 인정하고 두각을 나타낼정도로 정형화 쪽에 뛰어난 애라서, 과연 얼마나 잘 그렸나 보려고 온 것이다. 정안이가 자기 작품에 애쓰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그를 방해하기 싫어 일부러 그와 작업하는 곳엔 근처에도 안갔던 강희다.
쓰윽
강희가 전시관에 들어서자 또 사람들의 시선이 다 집중되고 꺅꺅거리는 여자애들, 숨을 삼키는 남자애들 등등, 강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정안을 찾았다. 정안은 한창 사람들에게 그림 전시전내의 안내 역할같은 일을 하는 듯했는데 무지 바빠 보였다.
강희가 다가가자 정안은 잠시 숨을 돌리더니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아 누나. 왔어요?"
"응"
"어디 갔다 온거에요? 누나를 찾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뒤돌아보세요. 다들 누나를 보고 있어요 흐흐. 짜식들. 예쁜건 알아가지고."
"...입닫고...그린건 뭐냐?"
"네?"
"보자구. 뭐그렸냐구"
정안은 강희가 직접 와서 자기 그림을 보러 왔다고 말하자 너무 좋아해대는 기색을 보이면서 가장 가쪽에 놓인, 실내의 벽면을 가득 메운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가 쪽에 놓여서 시작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하게끔 해주는 정형화 그림. 테마 <뱀> 을 선보였다.
정안이와 같이 가서 그가 그린 그림을 본 강희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야...잘 그리네?"
정말 상당한, 과연 소문날만한 솜씨, 남다른 표현력. 대단했다. 훌륭하다 칭찬받을만했다. 유정이가 차기 회장으로 점찍고 있는것도 정안이었다.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정말 남달랐으니까.
하지만 강희는 생각과는 달리 일부러 겉으론 무뚝뚝하게 말했다.
"흥, 징그럽게 뱀이 뭐냐?"
정안은 내심 강희의 평가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듣자 섭섭한지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뱀이 왜요? 어때서요.."
"뱀은 싫어. 차가워. 차갑다구..."
강희는 정안이가 그려 넣은, 무수한 뱀들의 그림을 보면서 아까 그 여자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마치 뱀처럼...차가운 느낌을 주었던 그 여자를.
"소름끼쳐...차가워...."
그런 생각이 자꾸 미치자 저도 모르게 그런 심리가 섞여져서 더 시니컬한 식으로 말투를 내뱉은 것이다. 정안은 정말 섭섭한지 입술을 삐죽댔다. 강희도 그때쯤 핫 하고 정신이 들자 정안의 등을 탁 치면서 한마디 해줬다.
"임마! 농담이야. 짜~식. 잘 그리는데? 계속 두고보겠어"
"저..정말요? 그렇죠? 잘그렸죠?"
"그래그래, 잘그렸다 이녀석아. 암튼, 난 좀 찬찬히 둘러보련다. 상영회도, 전시도 못봤어. 관객몰이한다고말이지"
"저런, 그럼 안되죠. 어서어서 둘러보세요. 후후"
"응. 나 간다"
조금씩 멀어져가는 강희. 스타킹을 신고 있는 그녀의 예쁜 종아리를 보면서 정안은 생각했다.
"조만간 꼭!! 스타킹 신은 누나 발을 간질여볼거야. 그땐 또~ 이히힛, 발목을 잡아야지...도망 못 가게 해놓고..간지럽히는거야~ 누나의 쩔쩔매는 모습이란 정말이지.아. 상상만 해도..."
정안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는 강희는 돌아다니면서 시선에는 그림 전시전 작품들을 담고 있었지만 속에선 내내 그 여자의 한마디가 뇌리를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이라....조만간...무슨 뜻이었을까....."
그런 강희를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한유정이었다. 유정의 눈동자는 왠지 평소의 강희를 보는것과는 다른, 사뭇 틀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응? 그래서 나보고....한마디로 지금.........삐끼...를 해달란 말야?"
"아...아니....삐끼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강희야. 응?"
"우이씨...사람 모으는게 삐끼지 뭐 삐끼 뜻이 따로 있니? 그래?"
"아..음....우......"
"....암튼 안돼...안돼...아무리 생각해도 못해. 절대 안돼!!"
만화부 동아리에 놀러왔다가 난데없이 부탁, 아니 거의 애원조로 매달리다시피 하는 친구 유정이 때문에, 무엇 하나 별로 어렵게 생각하는것도 없는 거침없는 성격의 대명사, 강희 조차도 지금 한창 애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유정이가 이렇게 강희에게 애걸복걸, 애원조이다시피 하면서, 우는 소리 해대면서 설득을 하고 나서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방과 후였고, 곧 문화제 시즌이 다가오는 터라서, 수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각 써클 모임의 학생들은 저마다의 동아리에서 문화제 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기간이었다.
만화부 역시 초비상이 걸린 상황. 학업도 열중해가면서 저마다의 실력을 펼쳐낸 작품에 손도 봐가면서 시간을 나름 활용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법이다.
각자의 개성을 제각기 펼쳐 가면서 그려낸 그림 작품 전시를 관련하여, 구조 배치도도 계산해야 하고, 목록표를 짜서 학생들을 확 몰아쥘 뛰어난 애니메이션 작품도 선별, 상영해야 하며, 타로 카드점을 보기 위한 소형 막장도 만들어야 하는 등, 지금은 정말로, 무진~~장 바쁠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만화부란 것이, 이 학교에서 역사가 그렇~게 오래 되진 않은, 그냥 평범한 써클 중의 하나인지라, 학교 설립 이래, 그 명맥을 같이 하게 된, 유구한 전통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셈틀부 라던지 방송부 라던지 하는 곳에 비해선 인지도가 많이 딸리는 실정이었다.
전통 있고, 힘 있는 써클모임일수록 교단 내에서 자체적으로 밀어주는 것이 더 무게가 많이 실릴 것임은 자명한 일. 만화부로서는 교 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었다.
교 입장에서 볼때의 만화부란, 니네가 좋아서 만들었으니 니네 알아서 해. 최~소한의 것은 챙겨주지 정도의 입장이었기에 자연 이 써클에 들어온 개개인의 힘이나 능력이 많이 발휘되지 않는 한 뻗어나가기가 힘든 모임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러자면, 교단에 뭔가 크게 어필을 할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 반드시!! 교내는 물론이고 타 학교 학생들, 더 넓게는 인근 주민들까지 남녀노소도 흥미를 가지고 많이 몰려들게끔 하여 만화부 라는 하나의 써클을 주목받게 하여, 교단 역시 이쪽에 시선, 이목을 집중시켜야 할 만한 필요성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럼 교단에서도 본 학교의 한 문화적 장르 동아리로서, 인근 학교 학생들이나 시민들에게 크게 어필, 많은 주목을 받게끔 해준 만화부 동아리에 자연 무게를 실어주지 않을 리가 없다.
팬시 상품도 많이 만들고, 그림 전시전도 보러 오고, 뭐 이러저러한, 만화부가 할수 있는 나름 방법으로 그렇게 어필 할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
문제는!! 근처 중고등학교들도 다~~문화제 시기는 비슷하기 때문에 각 학교의 축제 아무데나 가도 되는 시민들, 학생들로선 자연 선택의 기로가 다양, 자유로울 수밖에 없고, 또, 으레 만화부 라는 특성상 누구나 다 하기 때문이다. 전시회니 애니메이션 상영이니, 타로카드점이니 하는 것들은.
다 거기서 거긴데, 아~~무데나 간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보는 사람들 입장에선 그냥
(가까운데 가면 되지 뭐. 멀게 귀찮게시리....)
이정도이니까. 누구나 당연 그렇게 생각할거고.
그래~~서 이번에 만화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써클 현 회장이며 실세인 한유정이!!
침을 정말 꼴깍 삼키고 식은 땀을 흘려가면서 내린 결론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최강희를 끌어들일 결심을 한 것이다.
유정에겐 나름 계산된 것이 있었다. 최강희는 주변 모두가 인정하는 이 고등학교의 퀸카이자, 인근 학교 학생들에게까지 명성이 자자한 여자애다.
그 보이쉬한 성격 하며, 야성미같은 매력, 연하, 동갑내기 학생들은 물론이고 고 3 선배들에게까지 그 존재감을 크게 어필하는, 그리고 누군가가 만들어내 수천명이 가입해 있는 비공식 팬까페까지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학생들 사이의 초 아이돌!!
그리고 최강희를 아는 사람은 인근 시민들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특히 3,40대 직장 아저씨들 중에 강희의 얼굴을 아는 아저씨들이라도 몇몇 모이면 가장 많이 나왔던 말이 <삼삼하다> 는 말이 무수히 언급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이런 친구를 뒀다 뭐하나. 이럴때 적극 활용해야지!!
"강희가 도와만 준다면....입소문만 미리 내놓으면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몰릴 거야....그래...강희한테....허락을 구해야 해!!"
이건 현 서클 회장으로서 특단의 조치이자, 최후의 결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교단에선 만화부 동아리의 존재 자체를 별로 신경도 안쓴다. 이 기회에 진짜!! 어필해야 한다! 뭔가 보여줘야 한다!!
그럴려면!!!
유정은 당시에 떠올렸던 아이디어를 다시 한번 강희를 애잔하게 보면서 애원조를 가득 담은 음성으로 말했다. 두 손으로 친구의 한쪽 손까지 꼬옥 잡아가면서.
"응응? 강희야~~제에~~발? 응? 나 봐서라도 응?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제에발....."
"으윽......으으......아...안되는데 진짜....."
최강희는 자신의 손을 꼬옥 잡아가면서 진짜 애걸복걸하다시피 하는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를 곁눈질로 슬쩍 보곤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아무리 그래도!! 코스튬이 말이 되냔 말이야~!!"
그랬다.
한유정은 독한 결심을 한 것이다. 교단과의 한판 승부를 위해 띄운 초~~강수!!
그건 바로.... 최강희에게 코스튬을 시키려는 것이었다. 즉, 만화나 게임 속의 예쁘거나 아름다운 여자 캐릭터의 의상을 입혀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몰리게 할려는 셈이었던 것이다.
강희가 입어만 준다면 이건 뭐 사람들이 몰릴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입소문을 빠르게 안탈리가 없다.
최강희가 코스튬을 했다는 것 자체가 주변 일대 모든 이들의 귀며 눈을 벌어지게 할만한 일인 것이다.
딴건 다~~필요없었다. 최강희가 했다는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만이 진실.
그녀가 아마 옷 한번만 입고 교앞 입구에만 서있어도, 입고 교내를 돌아다니며 만화부좀 들려볼래요? 하고 한번만!! 설령 건성으로 말할지라도 그녀를 짝사랑하는 교내 남학생들이며 인근 남학생들은 말할것도 없고 최강희를 동경,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여학생들 역시 언급할 필요 자체가 없는 일이다.
그정도로 최강희는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애였다.
문제는.....하기만 하면...초 대박인데!! 사람은 확실히!!장담코 끌어모을수 있는데!! 역시 가장 큰 문제는...강희가 그런 의상을 입는다는것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다.
강희는 친구의 애잔한 눈길을 인상쓰며 바라보다 다시 말했다.
"야! 진짜 이건 아닌거 같아! 그...나도 코스튬이란거 티비랑 축제때 본적은 있는데 완전 그거....무슨...진짜 만화니까 그렇게 멋있고 예쁘게 표현되지...순...뻐~얼겋고 새~~파랗고, 그런 색깔 알록달록한 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입냐? 아마 내가 그런거 입고 돌아다니면 다들 비웃을지도 몰라. 하도 웃겨서!"
강희가 염려하면서 다시 절대로 안된다고 할듯한 기색을 비치자 유정은 또 애걸복걸모드.
"아...아니야~ 넌 진짜..왜 그리 걱정이 많은거야? 그냥 너니까. 너~니까 상관없어. 진짜로!! 넌 입기만 하면 돼. 사람? 안불러도 돼. 그냥 입고 요 앞, 그림전시장 될 반 입구 앞에 서있기만 해도 돼. 진짜로!! 아, 아냐. 서있기 힘들겠지? 의자 갔다줄까? 그...그래!! 앉아만 있어. 응? 앉아만이라도 있어줘. 제...제발 강희야 으앙...."
".....으으.......윽...."
강희는 진짜 이제 거의 눈물까지 글썽이며 어깨를 들썩대는 자신의 절친을 바라보며 신음성을 흘렸다. 그녀의 입술 깨무는 빈도가 조금씩 잦아졌다.
"아..아이씨...진짜...별걸 다 부탁하고 그래 진짜....난처..하게시리.....우...."
유정은 자신의 친구 중에서도 정말 친한, 아주 편하고, 고마운 친구. 그 친구가 지금 이렇게 죽자 살자, 교단에 뭔가 보여주기 위해 자기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자기가 싫어할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
강희가 난감함을 표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대며 친구 등을 토닥여줘가면서 의자에 멀거니 앉아있는데 그때 만화부 동아리의 멤버 학생들이 남녀, 학년 할것 없이 강희에게 몰려들었다. 그 중엔 정안이도 끼어있었다.
"?"
강희는 친구 등을 두드려주다가 주위에 몰려든 채 자신에게 염원을 가득 담고 있는 수십명의 학생들, 그리고 그렇게 모여 있는 애들 중에서 가장 앞서 자신에게 다가와 있는 남자애, 정안을 시선에 담고 의아한 빛을 띄었다. 그러다....감을 느꼈다.
"으윽...이건...."
부탁, 애원, 소망을 가득 담은 눈동자들. 절실한 감정들이 가득 모여 뭉쳐서 자신에게 파도처럼 다가와, 자신에게 바위인양 철썩대면서 가슴을 흔들어댔다.
터턱
누가 먼저랄것도 없었다. 다들 하나된 마음으로 무릎을, 신발들이 많이 왔다갔다 해서 더러워져 있는 교실내 바닥에 무릎들을 꿇었다. 거침없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희 누나, 부탁해요!!"
"저 진짜, 만화부 서러움 받는거 싫어요...."
"언니...도와 주세요...."
"제발요....누나가 쪼금만 도와 주시면 되요...."
"...어떻게 안될까요?"
"....아으으........제...젠장....자..잘못 걸렸어....."
강희 조차도 이젠 견디기가 힘들었다. 친구가, 후배가, 동기가, 선배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후...후우...진짜 낯이 다 화끈거려...."
강희는 입술을 꽈악 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정안이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치켜들더니 그녀를 바라보면서 간절히 말했다.
"강희 누나.....누나....."
"..............."
".............."
그렇게 몇 초나 지났을까....
강희는 갑자기 왁- 하고 천장을 보면서 소리질렀다.
"으아악~~ 그래!! 내가 졌어!! 졌다구!!"
다들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유정이도. 눈물이 얼굴에 맺힌채 놀라움의 표정을 가득 담고.
"우와아아~~!!!"
만화부 써클 반에 갑자기 유리창이 깨져라 고함, 함성이 울려퍼진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뭘 입으면 되는데?"
강희는 이제 체념했는지, 답지 않게 풀죽은 목소리로 교실 바닥, 정확히는 흰 운동화를 신고 있는 자신의 발등을 내려다보면서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물었다.
유정이는 너무나 기분이 좋은지 잠시 심호흡을 후아후아 해대다가 강희의 손을 꼭 잡아주더니 말했다.
"응, 니가 좀 보이쉬한 매력도 있고, 암튼, 넌 알지 모르겠는데, 나랑, 또 주위 여자애들, 남학생들이 보는 너에 대한 생각은, 강인한 여자, 멋있는 여자! 그런 이미지거든?"
"...근데?"
"그래서~ 내가 생각한건! 응....춘 리야"
"...춘...리?"
"응!! 춘 리!!"
유정이는 신나는지 악센트까지 딱딱 줘가면서 그렇게 말했다. 강희가 입겠다고 한 마당이니 기분이 날라갈듯한것이다.
강희는 물었다.
"춘 리라면.....스트리트 파이터의 그 춘리? "
"응응, 춘 리가 거기서 나오는 캐릭 말고 또 있나? 그 춘 리 맞아"
"...춘 리의 코스튬 의상을 하란 말이야?"
"응, 그거 입으면 돼. 의상은 내가 이미 다 손써놨어. 넌 ok 싸인지령만 내림 돼"
강희는 춘 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그 한가지에 생각이 미치자, 강희의 억양이 또 올라가기 시작했다.
"야!!"
"?"
어리둥절한 시선을 담은채 자신을 보는 유정에게 강희는 총알같이 말을 쏟아뱉었다.
"춘 리는 스타킹 신잖아?~!!"
"어..응...근데?"
"너~!! 내 베스트 프렌드란 녀석이 내 취향 몰라서 그래?!!"
강희는 진짜 질겁하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유정이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그걸 듣자 유정도 퍼뜩 미치는 게 있어 아...하고 신음성을 흘렸고 강희를 좀 많이 아는 만화부 내의 여자애들도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소수의...강희의 광적인 추종자인 남학생 녀석들도 미미하게 고개를 까딱거렸고.
최강희가 학교에서 유~~명한 것 중에 특이한 한가지가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최강희는......스타킹을 절대로 신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강희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중에서, 그녀를 항상 관심있게,몰래 몰래 사모하면서, 동경하면서 줄곧 바라봐온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그것을 알아낸 것이다.
그 누구도, 최강희가 스타킹을 신는 것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최강희는, 항상 발목 양말만을 신거나, 아니면 설령 맨발에 운동화 차림으로 오는 일은 있어도, 절~~대로 스타킹은 신지 않았다. 그녀가 단 한번이라도 스타킹을 신은 것을 그 누구도 목격한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유정 역시 그것을 모를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좀전까지 너무 흥분해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만 자기 친구의 기호를 깜박한 것이다.
사실 유정은, 적어도 유정만큼은 강희가 왜 그리도 스타킹을 신지 않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최강희는 스타킹 재질에 일종의 알레르기성 반응...비슷한 것이 있었다.
스타킹을 만드는 재질의 주가 되는 나일론, 그 나일론이란것에 최강희는 굉~장히 민감한 여자애였다.
스타킹을 신은 채 있으면 괜시리 발가락 사이도, 발바닥도, 이상하리만치 근질근질, 가려움증 비슷한 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증세를 보일때 발에 뭐가 난다는 것은 아니었다.
최강희가 분명, M 성향이고, 간지럼을 좋아하는 여자애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최강희가 즐기는 간지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스타킹을 신고 있을때 느껴지는 그 근질거림은, 일종의 벌레가, 무수한 벌레가 사박사박 발가락 사이사이나 발바닥 가운데며 아치, 뒷꿈치를 기어다니는듯한, 소름이 돋는 듯한 간지럼인 것이다.
강희는 화~끈한, 맹렬한 간지럼을 좋아하지, 결코 그런걸 좋아하진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간지럼과는 정의, 기준이 틀린 셈이다. 더구나 스타킹을 신고 있는 시간 내내 그런 느낌인데, 무슨....발에 자학 할일이 있는것도 아닌 그녀가 7시간이 넘게 학교에서 그걸 신어가면서 소름을 즐길리가 없었다.
그리고, 최강희는 스타킹을 착용한 상태에선 발 간지럼을 훨씬 잘 탔다. 이 사실은 현재까진 강희 본인과 친구 유정이만이 아는 사실이다. 유정이가 스타킹을 절대 안 신는 자신의 친구가 왜 그러는지 이유가 궁금해 꼬치꼬치 캐묻자 결국 두손놓은 강희가 다 불었기에 알고 있는것이다.
나일론 재질에 하도 민감한 여자애라서, 초중생때 몇번 신어보고 질겁한 이후로 그녀는 절대로 스타킹을 신지 않았다.
그런데....강희가 코스프레 해야 할 춘 리 라는 캐릭터는 확실히 차이나 드레스에 스타킹, 그리고 롱 부츠를 신은 여자캐릭터였다. 그래서 강희가 질겁한 것이다.
"아..안돼...딴 걸로 해. 춘 리는 안돼"
"하...하지만...그...고객몰이 할때 팬시 관련이나 귀여운 상품 쪽으로 쫌...아동 고객을 노리고 있어서 그래....그런 이유도 있어서 춘리를 선택한거야..."
"...무슨 소리야?"
요약된 말만 듣고는 강희가 좀 알아듣기 힘들어 인상을 쓰자 유정은 한숨을 쉬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요새 인근 문방구에서 자체적으로 오락기들을 두세대씩 두고 아이들 상대로 수입을 올리나본데, 내가 돌아다니다 우연찮게 알게 된건데, 스트리트 파이터를 설치해놓은 곳이 많더라구. 쫌 옛날 기종이었어. 근데 넌 알지 모르겠는데 춘 리 라는 캐릭터가 스트리트 파이터 초반 기종에선 유일한 여자 캐릭터였거든. 지금은 캡콤에 수많은 여자 캐릭터들이 나왔지만, 원조 여 히로인을 뽑으라면 단연코 춘 리, 그녀가 뽑혀. 암튼... 유일한 여자 캐릭터라서 그런가 아이들이 좋아하면서 많이 고르는 편이더라구. 그, 그리고 춘리가 승리하고 나면 막 폴짝폴짝 뛰면서 귀엽게 승리 포즈 취하고 애교부리는 식이거든? 그런걸 또 아이들이 좋아하더라....난 아동들도 노리고 있어서...굳이 니가 춘 리를 해주길 바란거야 강희야. 춘 리 복장을 선택한 건 이런 이유였어......춘리는 매우 강한 이미지의 여자캐릭터라 너하고도 잘 맞는듯했고.."
꽤나 길게 중얼대면서 낮게 말하는 유정의 말을 쭈욱 듣고 있다가 강희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좌우로 도리질을 치면서 어쩔수 없다는 듯, 춘 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애써 하면서 혹시나 하고 물었다.
"보통 게임 캐릭터는 두세가지 복장이 더 있지 아마? 춘 리의 딴 복장은 뭐니?"
유정은 놀랍다는 시선을 그녀에게 던지더니 물었다.
"춘...춘 리의 다른 복장은....전신 타이즈...인데...입을래?"
"됐네요!!!"
강희가 씨근거리면서 집으로 휑~ 하니 가버렸지만, 유정의 입에는 살짝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녀는 강희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넌 또 내 부탁을 들어주었네 강희야....넌 참..강해보이는척 하지만 알고 보면 너무 순진하고 착한 애야..바보같다고 여겨질때도 있을정도로..고마워..."
유정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홀로 앉아 있는데, 실 내 책상 한 구석에서 자기 그림 작품에 몰두하던 정안이가 어느새 쓰윽 다가와 유정이의 옆에 앉더니 은근슬쩍 물었다.
"저 누나"
"응?"
"그.. 강희 누나가 아까 스타킹 이야기 나왔을 때 왜 그런 거에요?"
"응? 스타킹? 아...그거?"
"네"
애써 별 관심 아니라는듯,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식으로 물어보는 정안. 그는 별 티를 겉으론 안냈지만 속으론 두근두근 해대고 있었다.
강희 누나와 스타킹!! 왠지 모르게 스타킹에 당황하는 눈치의 강희 누나!! 뭔가 엄청난 흥미를 유발시키지 않는가 말이다.
그가 그냥 심심해서 물어본 듯한 스스럼없는 반응을 보이자, 유정도 별 뜻 없이 가볍게 말해줬다.
"아 응. 강희는 스타킹을 절대 안신어. 알고 있는 학생들은 알지. 누가 입소문을 슬쩍 내서. 유명한 이야기인데?"
"네에..."
"음..그렇구나...왜 그러지?"
정안은 내친 김에 진짜 역시 또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그의 주특기 중 하나가 은근 슬쩍, 아무것도 아닌 척하면서 상대를 편안하게 유도해 내면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보는 고도의 말빨이었다.
"왜 그럴까요?"
유정은 나중에 강희한테 한번 크게 혼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비밀이라면서 말해준 건데, 하도 정안이가 편안하게 묻자 그녀역시 아무렇지도 않는 느낌으로 술술 말해버린 것이다. 물론 그 둘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작업에 열중하느라 듣지 못했다.
"아 응. 강희는 스타킹을 신고 있으면 괜시리 간지럼을 잘 탄다드라 발에 말이야. 훨씬 민감해진대"
"!!!!"
"아...그렇군요"
정안은 속으로 쿵떡쿵떡 뛰는 가슴을 안정시키려 하면서 끝까지 아무렇지 않은 신색을 유지한채 다시 자기 자리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별생각없이 바라보던 유정은 그때서야 퍼뜩 생각이 미쳐 혼자 낮게 탄식했다.
"아...강희가 비밀이랬는데....스타킹...."
그녀는 자기 실수가 맘에 안들어 입술을 꽉 물으면서 정안의 뒷모습을 보았다. 정안의 뒷모습에선, 그냥 자기 작품에 열중하는 한 사람의 모습만이 비쳐질 뿐이었다.
"자자~ 빨리 광고지 뿌려!! 최대한 몰래~~멀리~~너~~c게 뿌려 알았어? 강희 모르게 해야 해?"
용의주도한 유정은, 강희가 알면 또 길길이 날뛸 만한 일이었기에, 그녀 모르게 일을 처리할 속셈으로 만화부 멤버 학생들에게 언질을 하면서 작업의 신호탄을 쐈다.
광고지의 내용은 대략,
으로 맺음. 문화제가 시작되는 일시와 장소. 시작시간부터 종결시간까지를 우측 하단에 정확히 기재한 광고지였다. 문방구에서 대량으로 복사해서, 수십장정도였는데 이제 이것을 인근 학교 내 또는 시내 전봇대, 가로등에 뿌려주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물론. 강희가 되도록 반드시 모르게!!
"좋아좋아, 다들 출동~!!"
문화제 시작이 일주일도 채 안 남은 시점인지라, 다들 필사적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미친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화제 시작 이틀 전날의 새벽.
TBM에는 퀸이 접속해 있었다. 특별회원인 그녀. 역시나 또 혼자였다. 그녀는 특정인을 제외하곤, 누가 접속하는걸 보는 즉시 꺼버리는지라, 그녀와 대화는 커녕, 접속을 하고 있는 것 자체를 보는 이들조차 거의 없었다.
퀸은 여전히 강희, 티렉스에 대해 무한한 관심을 보이면서 그녀의 이미지 파일, 기재글을 살피면서 입술을 혀로 적셔가며 핥았고, 또 이것저것 정보망을 동원해 알아낸 바, 최강희의 추종자 모임인 최강희 러버 팬까페 모임에도 가입해서 동시접속을 한 상태였다. 퀸은 이미 신청서를 작성하여 정회원인 상태였는데, 순전히 강희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가입한 상태였다.
타닥 타닥
열심히 클릭해가면서 강희를 몰래 찍은 교내에서의 사진이나, 그녀를 찍어낸 파파라치동영상을 보는 퀸.
"와아...정말 이쁜 아이네, 흐흥...이름도 멋지고. 이런 아이는 보통 보이쉬하지 않나? 쿨~~하고 말이야 후후. 아유 참 귀엽게 생겼네 정말"
연신 감탄을 하면서 이것저것 정보들을 들추는 퀸. 그때 그녀가 있는 방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
끼익
들어온 사람은 아직 고등학생 티를 보이는, 나름 매력을 발산하는 귀엽고 앳된 이미지를 풍기는 여자애였다. 그녀의 손에는 주스가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여자애의 복장은 투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이벤트때나 활용되는, 또는 이미지클럽에서 쓰임새있을법한 고양이 귀 리본을 착용하고 있었다.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드실 것을 가져왔습니다"
"응, 침대에 내려놓고 잠깐 내 옆에 와 앉아"
여자애는 눈동자에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마치 명령만을 수행하는 기계같은 움직임으로 퀸이 시킨 대로 했다. 퀸이 앉은 의자 옆에 의자가 하나 더 있었기에 그녀는 퀸의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얼굴엔 부끄럽다는 표정조차 단 한점도 어려 있지 않았다.
퀸은 컴퓨터 모니터에 클로즈업된 강희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생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예쁘지? 귀엽지 않니?"
"네. 아주 예쁩니다. 같은 여자가 봐도요"
"응, 이 애 누군지 알어?"
"네. 최강희라는 이름의 여학생입니다. 여기서 좀 떨어진 시에서 사는 학생인데, 그쪽 일대의 제나이또래 학생들에겐 남학생들에게도, 여학생들에게도 상당히 유명한 여학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넌 어떻게 알았어?"
"친구 중의 한명이 그쪽에서 사는데 그 친구가 이 여학생 팬까페 회원이거든요. 저한테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준적이 있습니다"
"아 응 그렇구나. 암튼 정말 예뻐. 조만간에 가지고 싶어. 너무너무~"
"여왕님께서 마음만 먹으신다면 얼마든지..."
퀸은 여자애의 대답을 듣곤 양 손뼉을 짝 소리가 나게 치면서 좋아라했다.
"와~ 정말? 도와줄래? 니가 도와주면 아주 쉬울거야!! 저 아일 가지기가 말이야~"
여자애는 또 무표정으로 말했다.
"저뿐 아니라 여왕님을 도울 사람은 많습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여왕님의 것, 여왕님의 종, 여왕님의 뜻대로 하시길"
퀸은 기분이 좋은지 혼자 생글생글거리다가 여자애에게 말했다.
"바닥에 누워. 그리고 종아리를 의자에 올려놓을래? 너의 발을 며칠동안 음미 안했더니 입맛이 당기네 매우"
"알겠습니다"
여자애는 전혀 주저 않고 그녀가 시킨 대로 했다. 바닥에 몸을 일자로 눕히곤 두 종아리만 다리를 모아 의자에 올려 놓곤 그렇게 대기에 들어간 것이다.
퀸은 만족스레 명령을 수행한 그녀를 보고 있다가 침대에 올려져 있던 오렌지 쥬스를 쪼금씩 쪼금씩 여자애의 발가락 사이랑 발바닥에 흘리기 시작했다.
주륵.. 주륵....
"아..음..."
여자애는 차가운 액체가 발에 닿자 흠칫흠칫 댔지만, 여왕이 하는 일에 감히 반항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이 묵묵히 견디면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퀸은 쥬스를 붓는 것을 그만두곤 잠시 입맛을 쩝쩝댔다가 여자애의 발가락 쪽에 혀를 내밀기 시작했다.
스륵...
엄지와 검지 발가락의 사이에 그녀의 혀가 녹아들듯,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여자애는 으음 하고 신음성을 흘렸다. 간지러운지 발가락을 꿈틀 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퀸이 채근하듯 조그맣게 말했다. 작게 말했지만 왠지 모르게 위엄이 서려 있었다.
"가만 있어~!!"
"으음..네에"
여자애는 눈을 더 꼬옥 감고는 입술까지 살짝 깨물어가면서 간지럼에 대한 자신의 반응 정도를 줄이려 애쓰기 시작했다.
여자애의 신음 소리와, 발가락들의 미미한 떨림을 눈으로, 입으로 즐기면서 퀸은 정말 기대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난 여자애한테 예쁘고 귀여운 옷을 입히길 참 좋아하는데..후훗~ 문화제가 열린댔지? 정말 기대되는걸? 응? 우후~"
문화제 당일.
와글와글
북적북적
"....제...젠장....되게 쪽팔리네..."
"아냐아냐. 그리 생각마. 다 널보러 온거라니까? 응? 손이라도 흔들어주는게 어때? 다들 환호할거야? 어쩜 까무러치는 남자 녀석들도 있을지도..응? 해봐?"
"무슨..!! 지금 서있기만 해도 목이 다 뻣뻣해...."
한유정의 아이디어는 완전 메가톤급 직격탄이었다. 최강희를 안다는 교내 학생들, 주변 중고등학교부터 시작해서, 그놈의 오락기 때문에 춘 리 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그리고 또 춘 리를 플레이하길 좋아하는 초등학생들까지 몰려든 것이다. 지금 이곳은 학교 내 운동장의 가운데, 운동장 내에서도 노른자에 위치한 지점이었다. 이 위치를 차지한 것도 순전히 최강희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업적!!
최강희가 춘 리의 코스튬을 한다고 하자, 선생님들이 침을 꼴깍 삼키고, 교장선생이 언성을 높여가면서 만화부에 적극 협찬이 들어간것이었다!!
항상 전년에도, 전전년에도, 그 언제라도 교내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쥐고 있는 써클들이 차리한 자리였건만...단 한 명의 여학생이 만화부에 가세함으로서 이정도의 힘을 실어준 것이다.
워낙 엄청난 인파가 만화부 쪽에 몰린지라 다른 부 중에선 난처해진 곳이 한두곳이 아니었고, 명당을 빼앗기고 사람들마저 빼앗긴 방송부나 셈틀부 멤버들은 아예 울상까지 지을 정도였지만, 최강희가 나섰다니까 그녀를 흠모, 동경하는 멤버들이 넘쳐나는 학교인 이상 누구 한명 그녀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그랬다는데 어떻게 울분을 터뜨린단 말인가.
정말이지 경이로운 인기 아닌가. 그녀를 보기 위해, 인근의 초,중,고등학생은 말할것도 없고, 20~40, 많게는 50정도의 나이를 지니신 분들까지 몸소 걸음을 하셨다. 춘 리 코스튬을 한 강희를 보기 위해서 말이다. 진짜 스타가 따로 없었다.
팬시 판매랑 기타 소품 등의 판매는 운동장 쪽에서, 그림 전시와 타로카드점, 애니메이션 상영은 한 교실반에서 하는 양동팀으로 나뉘어진 문화제. 만화부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항상 괜찮다 싶은 교실 반 하나도 얻기 힘들었으니까.
입술을 삐죽이고 창피해하면서 볼까지 살짝 붉힌 춘 리 복장의 강희는 그야말로 프리티 걸이었다. 어제부터 강희의 자취집에 찾아가 손수 가져온 의상, 복장을 다 입혀보고 머리단장과 롱 부츠까지 신겨본 유정. 동아리 멤버 중에 강희를 까무러치다시피 동경하는 후배 여자애들 둘까지 같이 와 셋이서 완전 강희를 꽃단장 해줬다. 그리고 나온 모습은....그야말로 완벽한 춘 리의 재현!!
이보다 더 완벽한 코스튬은 없다!!
강희를 보고 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는데, 세 사람이 찾아오기 몇 시간 전에 강희를 다시 한번 다독이고, 달래려고 유정 혼자 따로 왔었는데, 그때 스타킹을 두고 이야기가 한번 더 나왔었다.
"정 느낌이 그리 이상하면, 춘 리의 부츠가 상당히 길거든? 되게 롱부츠야. 그니깐 발목 쪽은 잘라버려도 돼 강희야. 어차피 종아리까지만 보이면 되니까"
유정의 제안에 고개를 저으면서 질색한건 강희 본인이었다.
"그게 뭐냐? 신을거면 다 신어야지... 됐어. 차라리 이 기회에 오랜만에 한번 신어볼래"
유정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강희는 마음을 굳혔는지 별 스스럼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응, 몇 년 안 신었으니 체질이 좀 바뀌었을지 누가 알아? 이젠 근질거림이 별로 없을지도...."
"그..그래 한번 신어봐"
강희는 정말 몇년만에 춘 리 복장을 하기 위해 스타킹을 신어봤다.
스르륵
발가락부터 들어가서 아치와 뒷꿈치, 발목을 지나 종아리와 허벅지까지 쭈르륵 올리고 난 후에 강희는 침대에 앉아서 발가락 끝을 위아래로 까딱거려봤다.
까닥 까닥
"으음...음..."
"어..어때?"
유정이가 강희의 움직이는 발가락들에 시선을 주면서 묻자 강희가 좀 더 느껴보다 대답했다.
"아 음...근질거림은 이젠 별루 없는 것 같다. 사라졌나봐"
"지..진짜?"
"응. 근데 간지럼은 훨씬 잘 탈거 같아. 왠지 발바닥이랑 발가락쪽이 미끌미끌하단 느낌이야. 비누칠된 느낌?"
"어어...암튼 이젠 막 벌레 기어다닌다던지 그런 느낌은 없다는거지?"
"응. 그런거 같네"
결국 강희는 스타킹을 신어도 발쪽 피부가 더 민감해지는 것 같다는 것 외엔 별 반응이 없는 듯하자 춘 리를 하기로 마침내 최종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춘 리의 복장을 문화제 당일날 교내 그림전시장 개시가 되기 전에 다시 한번 완벽하게 의상을 마친 후에 춘 리 복장으로 나타난 강희를 보고 보인 학생들의 뇌리에 스친 생각은...
"초...초대박 예감~!!"
이었던 것이다....그리고 결과는.....확실했다....
"에휴에휴....내가 뭘 하고 있는거람?"
강희는 잠시 바람을 좀 맞고 싶어 팬하고 종이 들고 싸인해달라고 들닥같이 붙어대는 여자아이들과 헬렐레 거리며 쳐다보는 남학생들을 간신히 물리고 나서 도망치다시피 교내 뒤편쪽에 있는 등나무들이 놓이고 정자 모양으로 지어진 목각 건축의 뜰에 들어가 엉덩이를 내려놓고 있었다.
"아..아으...춘 리가 실존인물이면 이런 걸 신고 어떻게 싸운대? 발 갑갑해 죽겠네...."
춘 리의 의상 중 하나인 흰색 롱 부츠를 내려다 보면서 강희는 자기 발의 후끈대는 갑갑함의 표현을 내뱉었다. 그때...
슬금슬금
"응?"
강희는 어느새 자신을 따라 여기까지 몰려든 이들이 있는 걸 보고 인상이 슬쩍 찌푸려지려 했으나....
"아이들이네. 초등학생?"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한창 뛰놀것 같은 모습이 물씬 풍기는, 머리엔 LA 다저스의 글씨가 새겨진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남자 아이, 그 애의 친구들로 보이는 남자애들 둘과 마냥 귀여운 여자 아이 하나. 도합 네명의 아이들.
아기자기한 느낌을 풍기는 콩알같은 시선들이 한껏 기대감과 선망 어린 느낌을 그대로 생생히 그대로 담은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역시 때묻지 않은게 좋아. 아유 쪼그만 것들이. 참 귀엽게도 생겼네. 올망졸망한 맛이 있다니깐? 후훗~"
강희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순수하고 깨끗한 곳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함. 그것이 조그마한 사람들의, 어린 아이들의 매력이 아닐까.
"그래서 동심이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흐뭇한 미소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다저스 모자를 쓴 개구장이 스타일의 남자아이가 친구들을 이끌고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말했다.
"누...누나"
"으응?"
강희는 배시시 웃으면서 아이의 말을 기다렸다.
"누..누나..진짜 멋있어요. 진짜요.."
그러면서 아이는 친구들에게 동의를 구하려는 듯 그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그..그렇지?"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더니 합창하듯, 이구동성으로 앞다퉈 외쳤다. 마치 누가 보면 입으로 싸움이라도 할 기세처럼.
"마...맞아요. 진짜 멋있어요. 짱 예쁘구요!!"
"최고에요!!"
"언니 좋아요..."
여자아이의 손에는 유정이네 부가 만든, 강희를 염두에 두고 만든 춘 리 팬시상품이 들려 있었다. 귀엽게 그려진 춘 리의 모습이 코팅된채 안에 담겨 있었다.
아이들의 순수한 경탄에 즐거운 듯, 그리고 낯간지러운 듯 강희는 깔깔 웃더니 말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
아이들은 또 합창했다.
"네~!!"
그렇게 잠시 재미있는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다저스가 나섰다. 녀석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는 듯 물었다.
"누..누나!!"
"응?"
다시 사랑스런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봐주며 강희는 기대감어린 표정으로 생각했다.
"또 무얼 물어볼려는걸까? 이 호기심덩어리들이?"
하고...
그리고 받은 질문은....
"백열각 보여줘요!!!"
"....뭐?"
강희는 순간 디잉 하고 머리가 울리면서 고개가 우측으로 살짝 꺾어지는 느낌이었다. 강희의 그런 태도는 아랑곳 않고 아이들은 또 열을 올렸다.
"맞아맞아 보여줘요 백열각!!"
"천열각두요!! 필살~기!!"
"기공장 날려줘요~ 보여주세요~~~"
"................."
강희는 잠시 왁왁 흥분해대는 아이들을 멍-히 보고 있다가 이마를 한번 짚더니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저...배..백열각이 뭐니?....천열각은 또 뭐야? 그리고....기공장?.....장풍이니 그거?"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 떠듬거리며 묻는 강희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은 또 입을 열었다.
"백열각 있자나요. 누나가 가장 많이 쓰는거!! 얍얍 얍~ 하면서!! 막 발 와다다 날리구요"
"맞아요 그거!! 혼다 백열손이랑 붙으면 누가 이기는지도 묻고 싶었어요~"
"천열각 누나 필살기잖아요 막 다리 무진장 마구마구 날리고~ 백열각 막 곱한거 같은거요"
"기공장 누나 손모으면 되잖아요? 얍! 하구요"
".........아아.... 백열각은 좀 알겠네. 나머진 뭔소린지....암튼...아하하...그걸 보여달라구?"
강희는 서글픈 웃음을 지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순수한거......좋은거구나....."
그렇게 한 코스튬 여학생과 순진한 아이들 넷이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으레 그렇듯 방해꾼이 또 나타났다.
"앗~ 여다!! 크흐흐~~야~~ 찾았다~~"
"어? 여었어? 와!! 진짜네. 흐하하~"
자칭 최강희 광팬들. 광적인 집착까지 보이는, 머릿속엔 그것만 들은, 이미 강희한테 몇번 혼쭐이 났는데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그것도 인근의 다른 타 학교의 머저리 남학생 녀석들 세명이 강희를 기어코 발견해내곤 접근 중이었다.
보나마나 또 사귀어주라!! 니가 그리 잘났냐!! 하면서 마구마구 매달릴 놈들이다.
"이런 씨....저것들은 또 왜...."
강희는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싫은 기색을 완연히 드러냈지만, 남자 녀석들은 머리가 돌인건지 뭔지, 그냥 으흐흐 웃으면서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세 놈중의 한놈이, 강희의 옷차림새를 보더니 흐헤헤 혼자 육갑을 하면서 말했다.
"흐흐~ 누나~ 사귀자~~"
"누나!! 짱짱~~와하하~~진짜 열라 이쁘다~~"
"크하하~~"
세 녀석을 보면서 강희는 간단히 한마디 읊었다.
"미~~친새끼들...."
멍....
남학생 녀석들이야 이미 반응을 예상했지만, 꼬마 아이들은 순간 눈들이 동그래지면서 멍-한 표정들이 되었다. 잘 뜻은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저건 절대 좋은 말은 아니라고 부모님들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근데 왠걸, 좋아하는 여자 캐릭터가 무시무시한, 무서운 말을 하질 않는가.
"으응..으엥...."
여자애 한명이 울먹거릴 듯하자 강희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한달음에 달려갔다.
후다닥
타박
강희는 주저 없이 무릎을 굽히곤 여자애 이마에 뽀뽀도 해주고 머리도 쓸어주고 하면서 쩔쩔맸다.
"아...아냐 얘. 꼬마야? 무서워하지마. 언니가 그냥...아하하~~ 그냥 웃자고...웃자고 한 소리야~~ 꺄하하하~~하하..."
강희는 식은땀까지 다 흘려가면서 여자애를 위시한 남자 꼬매애들 모두를 다독여줬다. 그러면서 속으로 자신에게 외쳤다.
"아윳!! 이 멍청이 최강희!! 아이들 앞에서 뭔입방정이얏!!"
그렇게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는데 남학생 녀석들이 역시 바보들의 각본대로 놀기 시작했다.
"어이 얘들아, 이제 그만 집에 가라. 아님 운동장에나 가던지. 우린 이 누나랑 찐~~하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거든? 응?"
"크크 맞아. 어린 것들은 만화나 보면서 놀아라. 훠이훠이..빨리 집에 가. 안그럼 호랑이가 잡아간다?"
아이들은 덩치큰 고등학교 형, 오빠들이 무섭게 엄포놓으면서 막 윽박지를 듯하자 울상이 되었다.
까드득
강희가 이빨을 한번 속으로 거칠게 간 후에 녀석들을 한번 차갑게 노려봐준 후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서 여자아이의 얼굴에 묻은 눈물자욱을 지워주면서 배시시 웃어주곤 상냥하게 말했다.
"울지마아~ 언니가 잘못했어. 대신에 멋진거 보여줄께"
"머..멋진거요?"
여자아이가 기대감을 가지고 좋아라 해대고 아이의 친구들 역시, 특히 다저스가 한껏 눈을 크게 치뜨면서 두근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강희는 약간 오버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말했다.
"그러~엄, 이 언니가 장풍...이 아니고 기공장? 그건 좀..오늘 힘들어서 못하겠구. 백열각은 보여줄께. 항상 하는거거든? 응? 후훗. 그러니 울지 마. 알았지?"
"네에~"
아이들의 합창이 한번 울리고 그때쯤 이번엔 뒤쪽에 있던 녀석들 셋이서 멍-한 표정이 되는 것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강희는 여자아이와 남자애들을 한번 쓱 둘러본 후 윙크를 해주곤, 아이들쪽에서는 그녀의 등이 보이게끔 위치를 바꿨다.
그러고 나자 변하는 표정이란....
"으윽..."
"....디졌다..."
남자 녀석들 셋다 직감했다. 오늘...잘못 걸렸다.
쿠아아
강희의 왼 다리가 45도쯤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오른다리가 힘있게 올라간 후에 선보인 기술. 그것은 전설의!!!
"이야아~~압. 백열가~~악~~!!!"
번쩍
그다음엔 뭐가 뭔지 빛이 타오르는 듯했고, 뭔가가 퍼버버벅 하는 소리가 엄청나게 아이들의 귓전을 울리기 시작했다.
투타타타타~~~
"아다다다다다~~~~~~얍얍얍 으랏X아아아아~~아드드드드~~아아아아~~~야아압 이야앗~~~~"
파파박 파박 투파파파파파파~~~
1분 뒤..
털썩
털썩
털썩
교내 등나무쪽 일대에, 왠 넝마덩어리 세개가 차곡차곡 섞이다시피 된채, 쥐어짜진 걸레같은 모습으로 너덜하게 되어져 위치해져 있었다.
녀석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게거품을 물고 눈들이 까뒤집어진 상황. 그래도 몸 생각을 쪼~끔(?)은 한 강희는 녀석들 뼈가 어떻게 되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 내일 일어나면 아마 근육통때문에 죽어날 각오를 해야 할걸?"
차라리...안 깨어난게 좋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지도...
스윽
강희는 다시 몸을 빙글 하고 아이들 쪽으로 돌린 후 오른 다리를 여전히 든 채로 외쳤다.
"얍얍 얍~ 아~~아앗!!"
"............."
"............"
"............"
"............"
.....;;;;;;;;
"...? 별루...였나?"
강희가 쪼금 창피해하면서 얼굴이 붉게 물들려 할때...
"우와아~~~~~짱이야~~~~"
아이들은 저마다 손뼉을 잡고 강강술래라도 할셈인양 빙글빙글 돌기시작했다. 강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휴...맘에 든것 같네"
강희는 계속 몸을 돌리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또 생각했다.
"어릴때가 좋은거야......"
"누나, 빠이~ 담에 또봐요?"
"그땐 기공장 보여줘요?"
"꼭이요~~"
"그래에~~ 잘 가라 요녀석들아~~"
강희는 손을 살짝씩 흔들어줘가면서 애들머리를 다 쓰다듬어주고는 모두 돌려보냈다. 강희는 선연한 하늘을 한번 바라보았다 휴 한번 하고 숨을 쉬어준 후 몸을 일으켰다.
"자..그럼...다시 가보실까?"
강희가 그렇게 발자국을 몇걸음 떼었을 떼였다.
흠칫
"!!"
오싹...하다고 해야 할까. 강희는 그런 느낌을 순간 받았다. 마치......날카로운....그리고 차가운....뱀같은 차디찬 시선, 왠지 자신을 노리는 듯한 어떠한 것에 대한 느낌. 그런 일종의 감을 강희는 받았다.
그래서 강희는 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그녀는...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한명의 검정색 일색의 정장을 입은 여자를 한명 보게 되었다.
"...서른? 마흔?....나이를 짐작하기가 힘들어..."
첫인상이 그랬다. 여자는 분명 상당히 나이가 있어 보였는데, 20대가 가질수 있는 젊음의 매력이 아닌, 그런 것이 아닌, 완숙미를 뽐내는 몸매, 하지만 얼굴만으론 통 짐작을 하기가 힘든 인물이 서 있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숏 컷의 머리를 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매력이 있었다.
도도하고, 왠지 모를 위엄이 있어 보이는, 만인을 발밑에 둘것 같은 스타일의..
이것은 마치...
"여왕?"
강희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첫인상이 이리도 강렬한 여자라니. 최근에 공원에서 보았던 아수라 말고는 자신에게 이정도의 존재감, 이미지를 비춰낸 사람이 여자 중에선 없었다. 정안이는 남자니까 논외고.
"언제 다가온거야? 참 조용한 사람인걸?"
강희는 꽤 잘 듣고, 잘 보고, 잘 느끼는, 오성이 발달된 여자애였다. 근데 이 여자가 언제 자신의 뒤를 점했는지는 막연한 감도 잘 안잡혔다. 참으로 조용한, 차가운 느낌을 풍기는 여자였다. 그런 이미지의 여자가, 은은한 미소를 띈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강희는 먼저 운을 뗐다.
"아...안녕하세요? 교내 축제를 보러 오셨나요?"
여자는 살짝 미소를 지어주곤 대답을 했다. 입을 열었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품위있어 보이는 동작이라 느껴졌다.
"그런 것도 있고...더 큰 목적은 따로 있었어요"
"그러..세요? 어떤...아 죄송합니다. 초면인데 실례를 했네요"
"아뇨. 실례라니...과연.....수고한 보람이 있네. 학생은 참으로 예쁘군요. 부러워요. 젊음의 매력이 풀풀 풍기네요"
".....감사합니다"
강희는 칭찬을 들었는데도 왠지 기분이 기이하여 짤막하게 감사말만 전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계속 흠칫거렸다.
"대체 왜이러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약간 주춤대며 강희가 상대를 보고있자, 시선을 받는 여자가 또 생긋 웃어주곤 말했다.
"난 오늘 그냥 찾는것, 원하는것을 보고 느끼고 하려 왔을 뿐이에요. 문화제? 이건 그냥...즐거움의 시작 정도의 재미로 여겨도 썩 괜찮겠다 싶네요. 아가씨, 그 코스튬, 참으로 잘 어울려요. 정말로요"
"아아...네에..."
강희는 또 고맙다고 하기도 머뭇거려져서 짧게 대답했다. 여자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이상한 말을 남기면서 사라져갔다.
"오늘은 이쯤 해서 갈래요. 일단 궁금증은 다 풀었어요. 보고, 느꼈으니까. 만족스러워요. 아주 좋군요. 우리, 인연있음 또 봐요. 내 생각인데, 아가씨하고는 조만간에 만날수 있을거 같네요. 후후~ 내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강희는 점점 멀어져 가면서 이상한 코멘트를 남기는 여자가 정말 궁금했지만, 그냥 그렇게 멀어져 가는 저 여자를 마땅히 잡을 만한 명분도 없고 해서 말없이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얜 어딜 간거야? 사람들이 널 찾으려 하니까 다 흩어져버리잖아...응? 강희야...."
입술을 깨물면서 조바심을 내는 유정. 아직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미 상품들도 상당히 많이 팔렸고 선전 중이었다. 그때...
쓰윽
"어라?"
갑자기 뭔가 주변이 조금 어두워졌다 싶을 정도로 기이한 느낌을 유정은 받았다. 그리고 자신 앞에, 언제 소리없이 다가왔는지 한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서있었다.
"와..아름답다"
예쁘니 귀엽니 할만할 때를 아득히 지난, 나이는 상당히 보이지만 여성스러운 모습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 여성상을 지닌 검정색 일색의 정장 차림의 인물이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유정은 활짝 웃어주곤 물었다. 지금 상당수 멤버들이 애니메이션 상영과 그림전시회와 관련하여 교실반쪽으로 이동한 직후라 회장인 자신이 여길 단독으로 맡고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자는 살짝 미소띈채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최강희 학생을 아나요 학생?"
사적인 질문이 날아올지는 몰랐기에 잠깐 놀랐으나 유정이는 다시 웃어주면서 말했다.
"네, 친구에요. 아주머닌 누구세요?"
여자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곤 한번 또 물었다.
"강희 학생과 많이 친한가요?"
"네? 아...네. 그앤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적어도 가장 친한 동성친구에요. 암튼..뭘 도와드릴까요"
유정이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여자는 생긋 웃어주곤 샌드백을 들고 있던 오른손을 왼손에 바꿔 들고는 맨손이 된 오른 손, 정확히는 검지 손가락으로 유정의 이마에 난데 없이 짚었다.
틱
"..어?"
유정은 갑자기 온 여자손님이 자신의 이마를 짚자 "왜 그러세요?" 하고 반문하려 했지만 상대는 틈을 주지 않았다.
"니가....날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안되겠니? 응? 내 부탁인데말이야~ 응? 후훗...."
".........."
유정은 갑자기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눈동자의 색깔이 탁해져 있었고, 뭔가 넋이 놓여진 표정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잡고 있는것은 상대방 여인의 눈동자. 그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마력이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응? 아무리 강희랑 친하다지만...설마 내 부탁을 거절하진 않겠지? 그렇지?"
"....네"
유정은 홀린 듯이, 자기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리 대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진채로 시간이 흘렀고, 그런 그 두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그 무수한 운동장의 인파 속에서도 단 한명도 없었다....
그림 전시전실.
강희는 전시관까지 이동 중에 별의별 여학생들을 다만났다. 중학생들도 있고, 고등학생도 보였지만, 나이의 위아래 차와는 관계없이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소리는...
"까악~~언니!! 너무 예뻐요~~!!"
"싸인 해줘요~ 제발요~네?"
"거절 안하실거죠? 언니 진짜 좋아해요~"
등등... 도대체 몇십명짼지....
"휴우...힘들어..."
강희는 여자들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내치고 하는 성격이 못되는지라 부득부득 애써가면서 즉석에서 자기 이름을 평범히 새겨넣은, 어찌 보면 여자완 어울리지 않게 무뚝뚝하게 여겨질만한 글씨체로 싸인을 해줬지만, 여자애들은 또 지들끼리 왁왁거리면서 무뚝뚝한것도 멋있느니, 그게 저언니의 또다른 매력이니 뭐니를 해대가며 완전 난리법석이었다.
"헤유...."
강희가 애써 전시관에 가는 이유는 그 유명한 진정안의 그림 솜씨를 보기 위해서였다. 정안이의 그림 솜씨는 만화부에 들어왔을때부터 주변 인물이 인정하고 두각을 나타낼정도로 정형화 쪽에 뛰어난 애라서, 과연 얼마나 잘 그렸나 보려고 온 것이다. 정안이가 자기 작품에 애쓰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그를 방해하기 싫어 일부러 그와 작업하는 곳엔 근처에도 안갔던 강희다.
쓰윽
강희가 전시관에 들어서자 또 사람들의 시선이 다 집중되고 꺅꺅거리는 여자애들, 숨을 삼키는 남자애들 등등, 강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정안을 찾았다. 정안은 한창 사람들에게 그림 전시전내의 안내 역할같은 일을 하는 듯했는데 무지 바빠 보였다.
강희가 다가가자 정안은 잠시 숨을 돌리더니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아 누나. 왔어요?"
"응"
"어디 갔다 온거에요? 누나를 찾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뒤돌아보세요. 다들 누나를 보고 있어요 흐흐. 짜식들. 예쁜건 알아가지고."
"...입닫고...그린건 뭐냐?"
"네?"
"보자구. 뭐그렸냐구"
정안은 강희가 직접 와서 자기 그림을 보러 왔다고 말하자 너무 좋아해대는 기색을 보이면서 가장 가쪽에 놓인, 실내의 벽면을 가득 메운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가 쪽에 놓여서 시작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하게끔 해주는 정형화 그림. 테마 <뱀> 을 선보였다.
정안이와 같이 가서 그가 그린 그림을 본 강희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야...잘 그리네?"
정말 상당한, 과연 소문날만한 솜씨, 남다른 표현력. 대단했다. 훌륭하다 칭찬받을만했다. 유정이가 차기 회장으로 점찍고 있는것도 정안이었다.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정말 남달랐으니까.
하지만 강희는 생각과는 달리 일부러 겉으론 무뚝뚝하게 말했다.
"흥, 징그럽게 뱀이 뭐냐?"
정안은 내심 강희의 평가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듣자 섭섭한지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뱀이 왜요? 어때서요.."
"뱀은 싫어. 차가워. 차갑다구..."
강희는 정안이가 그려 넣은, 무수한 뱀들의 그림을 보면서 아까 그 여자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마치 뱀처럼...차가운 느낌을 주었던 그 여자를.
"소름끼쳐...차가워...."
그런 생각이 자꾸 미치자 저도 모르게 그런 심리가 섞여져서 더 시니컬한 식으로 말투를 내뱉은 것이다. 정안은 정말 섭섭한지 입술을 삐죽댔다. 강희도 그때쯤 핫 하고 정신이 들자 정안의 등을 탁 치면서 한마디 해줬다.
"임마! 농담이야. 짜~식. 잘 그리는데? 계속 두고보겠어"
"저..정말요? 그렇죠? 잘그렸죠?"
"그래그래, 잘그렸다 이녀석아. 암튼, 난 좀 찬찬히 둘러보련다. 상영회도, 전시도 못봤어. 관객몰이한다고말이지"
"저런, 그럼 안되죠. 어서어서 둘러보세요. 후후"
"응. 나 간다"
조금씩 멀어져가는 강희. 스타킹을 신고 있는 그녀의 예쁜 종아리를 보면서 정안은 생각했다.
"조만간 꼭!! 스타킹 신은 누나 발을 간질여볼거야. 그땐 또~ 이히힛, 발목을 잡아야지...도망 못 가게 해놓고..간지럽히는거야~ 누나의 쩔쩔매는 모습이란 정말이지.아. 상상만 해도..."
정안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는 강희는 돌아다니면서 시선에는 그림 전시전 작품들을 담고 있었지만 속에선 내내 그 여자의 한마디가 뇌리를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이라....조만간...무슨 뜻이었을까....."
그런 강희를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한유정이었다. 유정의 눈동자는 왠지 평소의 강희를 보는것과는 다른, 사뭇 틀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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