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45부-
“네, 어서 오세요. 들어오세요.”
“네, 실례 좀 할게요.”
강주와 민희는 영통의 장마담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장마담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민희를 바라보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은 모습을 보곤 기겁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하루가 지나고 나니 푸른빛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니 비록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연적일 수 있지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말할 수 없는 정도인 것이다.
“아유, 어떻게 해. 병원에는 가 본 거야? 응? 자기야......”
“응, 조금 전에 다녀오는 길이야.”
강주를 다정하게 부르는 장마담의 모습에 비록 신세를 지러 온 처지라지만 민희의 눈빛에 표독스런 기운이 스친다. 장마담도 민희의 기운을 느꼈는지 마치 씨앗싸움을 다투는 여자들처럼 잠시 긴장이 흐르기도 하지만 이내 강주의 너스레로 넘어가 버린다.
“자, 바둑아, 이리 와서 좀 기대고 앉아.”
“아유...... 강주씨, 아파 죽겠는데 자꾸 놀리지 마. 이 씨......”
“어머! 참...... 자기는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 사랑하는 사람한테......”
장마담이 먼저 긴장을 풀어 버리려는 듯 민희를 배려해 주는 소리를 하고 소파에 기대어 앉는 민희를 부축해 준다.
“고마워요. 언니......”
장마담은 역시 화류계 십 년의 경륜인지 바로 민희에게서 언니 소리를 받아낸다.
“사람을 어떻게 이 지경을 만들 수가 있어? 강주씨, 차라리 그 박부장 패거리들을 시켜서라도 어떻게 해 버리지. 그냥 두고만 볼 거야?”
“에헤이...... 예쁜 입에서 어떻게 그런 살벌한 소리가 나오나? 매사를 그렇게 처리하면 이 땅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어쨌거나 다 지난 일이니까 잊어버리고 여기서 며칠 푹 쉬면서 몸이나 회복할 수 있도록 네가 잘 좀 도와 줘.”
“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말고...... 밥은 먹고 온 거야? 밥 차려줄까?”
“아니, 나는 시간이 없어서 나가 봐야 하니까 너희들이나 먹어. 나중에 전화할게. 민희 너는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강원장 전화 오면 일절 받지 마. 변호사가 다 알아서 하게 할 거니까......”
“응, 이따가 올 거야?”
“음....... 그때 가 봐서...... 일단 전화 해 줄게......”
“으응...... 조심해.”
오늘은 전 점포 재고조사를 실시하는 날이니 매장을 순회하며 상황을 감독할 필요가 있어 일단 인천 용현동 본사로 향한다.
“아니, 황부장은 왜 안 나갔어요? 본사 직원들 모두 매장 지원 나가라고 했잖아요?”
“아! 네...... 저는 사장님이 들어오라고 하셔서...... 저도 이제 막 들어오는 길입니다.”
“사장님이? 왜요?”
“글쎄요...... 저도 아직 모릅니다. 뭐 긴히 시키실 일이 있는 모양이던데......”
“그래요? 음......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 매장은 본사에서 지원 나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까? 감독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건데......”
“아! 저 말고도 두 명이나 더 있습니다.”
“음...... 그럼 됐습니다. 저기...... 재고 보유 현황 뽑아둔 것 어디 있죠?”
“여기 있습니다.”
“그럼 나는 나가 볼 테니까...... 무슨 변화 있으면 전화를 주셔야 합니다. 사장님 지시라고 해서 황부장님이 오늘처럼 내 시야를 벗어나면 업무 통제가 안 되질 않습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는.....”
이미 며칠 전부터 민희가 회장의 눈 밖에 나고, 그 결과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미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사장도 민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아 나설 수도 있는 일이다. 냄새 나는 일은 맡아서 할 개가 따로 있는 법이고 만약 그렇다면 그 개는 황부장이 될 터이니 미리 단속을 해 둘 일이다.
가까운 매장부터 순회를 시작한다. 이미 점장들은 강주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거리낌 없이 셔터를 들어 올려 매장으로 들어선다.
“아! 이사님, 어서 오십시오.”
“그래, 잘 진행하고 있지요?”
“네, 이미 시작했습니다.”
매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온 강주는 점장을 부른다.
“지금 전부 중단시키고 정량정리부터 다시 하세요. 어제 교육 안 받았습니까?”
“......”
“재고조사를 하고 다시 확인을 해야 하는데 저렇게 정리도 안 된 상태에서 하면 오늘 하루 종일 해도 못 끝냅니다. 다섯 개면 다섯 개, 열 개면 열 개씩 정해진 양대로 정리를 하고 조사를 시작하라고 했을 거 아닙니까?”
“아! 네......”
“얼른 정리부터 다시 하라고 하세요. 그래야 정확하고 더 빨리 끝낼 수 있어요.”
“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사무실로 들어가 재고 현황을 넘겨보며 다음 이동할 점포를 찾는데 전화가 울린다.
“네......”
“오빠......저예요. 보라......”
“응, 그래...... 어디에 있니?”
“저, 집이에요.”
“오늘은 재고조사라서 안 온 거야? 너, 자식 그러면 일당 깎아 버린다. 하하하......”
“아유, 오빠......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왜? 무슨 일 있어?”
“조금 전에 비서실에 있는 후배하고 통화했는데 지금 회사 분위기가 이상하대......”
“그게 무슨 소리야?”
“전에 오빠가 후배 중에 누구 소개시켜 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얘기해 둔 애가 있는데 누가 오빠에 대해서 전무실에 투서를 했다나 봐. 그래서 감사팀이 가동됐다고 하는 것 같던데......”
“뭐야? 그게 누구래? 투서한 사람이......”
“그건 아직 모르고......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으면 다시 전화 해준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봐야지. 아유, 어떻게 해요? 오빠......”
“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게도 무슨 연락이 있겠지.”
보라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강주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간 건드려 온 여자도 한둘이 아닌데다가 상가 번영회와의 계약도 엄밀히 따진다면 회사에서 파견 나와 있는 소장으로서 당연히 회사를 대표하는 입장이니 회사의 명의로 했어야 할 일인 것을 개인 명의로 처리를 해 문제가 될 소지가 너무나 많으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자칫하면 형사 고발을 당할 수도 있는데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투서를 했는지부터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음...... 민철이니?”
“네, 형님...... 웬 일이세요?”
“혹시 최근에 주차장 코너에 대해서 물어 본 사람들 없었니?”
“아유, 그거야 한 두 사람이 아니니 말 할 것도 없죠? 장사가 잘 되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다 하고 싶어 하는데요.”
“음...... 그래, 알았다.”
누구라도 강주가 책임자인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니 민철이에게는 더 얻을 정보가 없어 할 수 없이 번영회장에게 전화를 넣는다.
“아, 회장님?......”
“아니에요. 소장님..... 저예요.”
회장의 부인이 전화를 받는다.
“으응, 회장은 어다 갔어요?”
“네, 손님이 와서 나갔어요. 소장님에 대해서 뭐 묻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이미 감사팀이 들이닥친 모양이다.
“아, 아...... 별 일 아니에요. 혹시 전에 나하고 번영회하고 계약한 것에 대해서 누가 물어본 사람 없었어요?”
“몰라요. 나는 못 들었는데...... 혹시 총무가 알지 않을까?......”
“그래요. 알았어요. 내가 전화 해 볼게요.”
하기야 공증문서도 총무가 보관하고 있을 테니 그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네, 저 슈퍼 최소장입니다.”
“아, 소장님...... 요즘 무슨 일 있습니까? 지금도 소장님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 그래요? 혹시 계약에 관해서 묻던가요?”
“네, 회사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보여드리긴 했는데......”
“네...... 뭐, 잘 하셨습니다. 그나저나 그 전에는 왔던 사람 없던가요?”
“네, 있었습니다. 그 때도 주차장에다가 왜 저런 시설을 했냐면서 공유면적 확인한다고 해서 이것저것 다 보여줬습니다. 뭐...... 나중에는 이상 없다고 하고 그냥 가기에 별 일 아닌 줄 알고 있었는데......”
“네...... 그랬군요. 잘 알았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네, 네......”
이미 완전히 올무에 걸려들은 모양이다. 더 이상은 손 쓸 방법이 없으니 그저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강주의 손을 전화기로 이끌어간다.
“응, 혜영아......”
“아유...... 그새를 못 참고 전화 하는 것 좀 봐. 그렇게 걱정이 돼? 호호호...... 아유, 민희씨...... 전화 받아 봐.”
“아니, 민희 말고 너한테 물어 볼 게 있어.”
“나한테?...... 뭘?......”
“전에 얘기했던 거...... 옛날에 너 대출 받으려고 했다는 서류 말이야. 그것 좀 찾아 볼 수 있을까?”
“음...... 가서 봐야 아는데...... 왜? 급한 일이야?”
“으응...... 내가 지금 사면초가다. 그거라도 있으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강주는 장마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전화를 끊는다. 더 이상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아 차를 타고 본사로 돌아와 버린다. 황부장은 어디를 갔는지 자리에 보이지도 않지만 지금 거기에는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어찌 됐든 장마담이 서류를 보관하고만 있다면 거래를 통해서 형사고발은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일이야 의왕매장과 영진유통만 돌아보면 될 일이다. 기왕 물은 엎질러진 것이고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편히 생각하기로 한다.
“어어...... 경주씨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머! 이사님...... 인천에 오시면 전화 해 준다고 하고선 한 번도 연락을 안 해 줘요?”
“허허...... 내가 그동안 좀 바빴어. 미안해.”
“치...... 참, 민희는 연락 안 와요?”
“으응?...... 민희씨가 나한테 연락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아유...... 계집애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으응...... 사장님 외부 모임에는 민희가 파트너로 잘 다니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나보고 같이 나가자고 해서...... 아유, 계집애...... 내 전화도 안 받고......”
“그럼 지금 사장님 만나러 온 거야?”
“으응......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는데 달리 갈 데도 없어서 일찍 왔어.”
강주는 넌지시 미경이의 일에 대해서 떠 보기로 한다.
“참, 미경씨는 며칠 전에 한 번 만났다.”
“어머! 그 언니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네...... 바쁘게 왔다 갔다 하더니......”
“뭘 하는데 그렇게 바빠?”
“아유, 몰라요. 언니가 뭘 시켰는지 우리 사무실에서 직원 한 명 빼달라고 하더니 며칠씩 데리고 다니던데......”
데리고 다니는 똘마니들이 사고라도 친 모양이지만 그걸 물어보면 공연히 말이 들어갈 것 같아 속내를 감춘다.
“그래? 미경씨도 변호사 개업하려나? 하하하......”
“그럼, 이사님...... 나, 갈게요. 나중에 봐요.”
“잠깐만...... 아직 시간 있다면서...... 따라와 봐.”
경주의 팔을 이끌어 당직실로 들어간다. 잠시 후 사장을 만날 터이니 민희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해 사전에 어지럽히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강주의 심정은 섹스를 통해서라도 잊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머! 어떻게 하려고?......”
“조용히만 하면 돼. 스릴 있어 좋잖아?”
문을 닫아걸고 돌아보자 엉거주춤 강주를 바라본다.
“아유, 나 지금 점을 보니까 관계하지 말라던데.......”
“지랄, 생 쑈를 하고 자빠졌네. 야! 지 구멍 가지고 하는 오입도 점쟁이 허락 맡고 한다든? 왜? 구청 가서 물어보고 오지? 아니면 네 남편이 주인이냐? 네 남편이 하라면 너도 할 거야?”
서둘러 음순을 열어간다. 거래현장에 사랑이 개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 두 사람은 단지 후일을 도모하는 거래에 섹스의 형식을 빌려온 것뿐이니 거칠 것도 없는 일일 것이다. 강주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닌 듯 경주를 괴롭힌다.
“후욱...... 쑤우우욱......”
“아아아흑...... 아이 참...... 아파...... 천천히 해......”
발코니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문다.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해 정들은 회사에서 이제 정리를 해야 한다니 감회가 어린다. 비록 깔끔한 마무리가 아쉽긴 하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네, 여보세요”
“네, 소장님이시죠? 여기 전무님 실 미쓰조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다. 매도 일찍 맞는 게 편하다고 하니 피할 일도,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 네...... 최강주입니다.”
“지금, 휴가 중이시던데...... 전무님 호출이 있으시거든요. 들어오실 수 있으신가요?”
“네, 그러지요.”
“그러시면 다섯 시에 약속 잡아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세요?”
“네, 알았습니다.”
아직 감사팀이 회사로 복귀도 하지 않았을 시간에 연락이 오는 것을 보니 전화보고를 받은 모양이다. 감사결과에 그만큼 확신이 있다는 얘기인 것이다. 서둘러 차를 몰아가며 장마담에게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으응, 강주씨...... 언니 아까 나갔는데...... 자기 전화 받고......”
“민희야, 왜 그 전화를 네가 받아?”
“나도 옷 사러 밖에 나왔어. 당장 갈아입을 속옷도 없는데...... 내 전화는 전화가 많이 걸려 와서 아예 배터리 빼 버리고 이거 쓰라고 언니가 주던데......”
“어이쿠...... 그래, 알았다.”
“왜? 자기야.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신경 쓰지 마. 다시 전화 해 줄게......”
“으응...... 저녁에 와. 보고 싶어.”
“야, 보챌 걸 보채라. 하하하...... 어제 보고 아침에 헤어졌는데 뭐가 보고 싶어?”
“치...... 남의 집에 얹혀 있으니까 기도 죽고 기분 이상하단 말이야. 자기라도 있으면 좀 날 거 아냐?”
“그래, 나중에 상황 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추락하기 시작했으니 맨땅에 부딪히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그렇게 비서실 정보를 캐려 했건만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모양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터덜거리며 전무실로 향한다. 비서가 강주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 맞는다.
“제가 최강주입니다.”
“네, 기다리십시오.”
비서가 인터폰으로 보고를 하고 이내 들어가라고 신호를 준다.
“전무님, 반갑습니다. 최소장입니다.”
“으음...... 그리 앉아요.”
의외로 부드럽게 강주를 맞아들인다. 자리에서 일어서 소파로 내려앉으며 비서에게 커피를 시킨다.
“자, 최소장...... 차 들어요.”
“네, 네......”
“그래, 확실히 최소장이 수완이 좋더군. 내가 감탄을 했어요. 그 수원 매장이 매출이 좋아진 것이 그냥 좋아진 게 아니더라고......”
“......”
“그래, 어디부터 말을 할까?......”
“이미 소식 듣고 왔습니다. 음...... 처분대로 따르겠습니다.”
“쯧쯧...... 나도 최소장 같은 인재를 이렇게 마주앉게 돼서 마음이 안 좋아요. 그래, 이미 알고 왔다고 하니 그동안의 정을 봐서 형사 고발은 안 하는 것으로 하겠어요. 그 대신 이미 운영진에서 다 알고 있는 일이니 형평상 사직처리는 피하지 못할 거고 내일쯤 직원을 보낼 테니까 번영회와 맺은 계약을 내 앞으로 변경시키도록 하세요. 내 말 알겠습니까?”
“아! 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어쩐지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상가 공유면적의 십 년간의 권리를 탐냈던 것이다. 마땅히 회사로 귀속시켜야 할 권리를 지위를 이용해서 착복하겠다는 것이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강주로서는 그간 받아 두었던 보증금을 한 번에 토해 내야 하는 입장이니 타격이 없지 않지만 의왕매장 진정이에게 부탁하면 안 될 일도 아니니 나름대로 적절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은 셈이다.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전무실을 빠져 나온다. 이미 합의를 했으니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이유도 없다. 전무는 쾌재를 부를 것이고 강주는 정리를 서둘러야 할 일이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허둥지둥 장마담이 들어선다.
“야! 혜영아,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너도 입장 불편할 텐데......”
“뭐야? 벌써 끝나 버린 거예요?”
“으응...... 그래도 다행히 합의는 잘 됐어. 저 인간도 그게 탐나는지 그냥 권리 넘겨주고 옷 벗는 선에서 끝냈어.”
“아유, 자기가 말했던 서류가 집에 있던데 이제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 그만 가자.”
“아유......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잖아. 아깝고...... 저 인간도 순 도둑놈인데......”
“허허허...... 회사 생활이 다 그렇지 뭐, 높은 자리에 있으면 큰 도둑놈이고...... 낮은 자리에 있으면 작은 도둑놈이고......”
“아이, 그러지 말고 한 번 들이대기나 해 봐.”
나름대로 속이 상하는지 투정을 부리는 장마담을 한참 바라보더니 서류를 받아든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후 다시 장마담을 바라본다.
“그럼, 혜영이 너...... 불편해도 얼굴 한 번 비춰줄 수 있어?”
“왜? 어떻게 할 건데?......”
“이거 상무가 좋아할만 한 일이거든...... 자기도 진급을 목 타게 기다려 왔을 텐데...... 이사회에서 터뜨리면 대박이잖아? 다만 진위여부를 가려야 할 필요가 생기면 필연적으로 네가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장마담은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뭐, 상관없어. 나야 화류계 인생인데...... 상무도 내 손님으로 만들어 버리지 뭐...... 호호호......”
“정말이지? 그럼 가자.”
강주는 장마담과 함께 상무실을 찾아가 면담을 신청한다. 상무실 비서는 익히 강주를 알고 있으니 바로 연결을 시켜주고 이내 상무와 마주앉는다.
“그래, 최소장. 나도 얘기는 들었어. 거...... 잘 좀 하지 그랬어? 허허허......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신가?”
이미 퇴사시키기로 결정 된 사안이니 더 이상 나무라지도 않고 웃음으로 때우는 인상이다. 강주는 서류를 내밀고 장마담은 상무에게 인사를 한다.
“어머! 상무님, 저 모르시겠어요? 저 장비서예요. 장혜영이라고요.”
“으응?...... 자, 장비서?...... 아니?......”
“호호......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 서류나 한 번 보세요. 상무님이 좋아하실 내용인데......”
오래 전 자신을 곤란하게 하고 사라진 장비서가 강주와 함께 나타나니 상무는 몹시 당황한 모양이다. 황급히 서류를 흩어보고는 질문을 한다.
“이, 이게 무슨 서류지?”
“그게 그 당시 상무님을 곤경에 빠뜨린 대가로 전무님이 저에게 송금해 주신 증거자료예요. 그거면 상무님께 상당히 유용하실 텐데요?”
“으음......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호호...... 저 강주씨하고 동업하고 있어요. 우리 친구예요.”
장마담은 지난번 강주가 박부장에게 소개한 대로 동업자라고 소개를 하고 지갑을 열어 상무에게 명함을 내민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겠어?”
“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해 주세요. 전무님......”
장마담은 당돌하게 상무에게 전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도발적으로 웃어 보인다. 확실히 극한상황에서는 여자들이 훨씬 대범한 모습을 연출한다.
“으음...... 사람 참......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건 하나도 안 변했구먼......”
“이사회에 바로 조치하실 수 있잖아요? 그럼 그 원인이 뭔지도 조사할 거고 그럼 그 당시 땅값을 튀긴 것도 다 나타날 거 아니에요? 제가 다 증언해 드릴게요.”
“정말 그렇게까지 할 수 있겠어? 도대체 두 사람 어떤 사이야? 내가 술을 한 잔 하러 가더라도 최소장한테 실수해서는 안 될 거 아니야?”
“어머! 그럼 그렇게 해 주시는 거예요? 호호호...... 우리 애인이에요. 호호호......”
“그것 봐, 내가 눈치가 있는데 최소장한테 다리 부러질 뻔 했잖아? 하하하......”
“아! 이거 감사합니다.”
“그래, 일단 한 번 해 보자고...... 그 대신 철저하게 끝까지 가야 하니까 각오하고 밀어붙여야 돼.”
“아유, 알았다니까요. 그럼 이만 가 봐도 되겠지요? 가요. 강주씨......”
“으응,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내가 따로 연락 줌세. 자넨 그저 모른 척 하고 있어.”
“네, 그나저나 한 가지만 더 여쭙고 가겠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누가 투서를 한 건지 궁금한데......”
“음...... 좋아, 알려주지. 그 대신 현명하게 처신해야 하네.”
상무는 테이블의 메모수첩을 넘기더니 이름을 불러준다.
“이미경이란 사람인데 신원은 확실한 사람이야. 그래서 조사에 착수했고......”
“왜? 자기 아는 사람이야?”
“으응...... 아, 알았습니다. 심려 끼치는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무서운 일이다. 이제는 뭔가 눈앞이 환하게 열리는 기분이다. 강주는 십 년간의 권리를 빼앗기는 것이 억울한 것보다 자기를 음해한 사람이 더욱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황부장의 아내 미경이가 그 장본인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자기를 내사 했다는 것이니 아파트의 소유권을 가져오기 이전의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보복의 차원도 아니니 필경 회장의 지시였을 것이다. 회장이 자신에게 나쁜 감정이 있을 리도 없으니 자기 회사에 붙들어 두기 위한 포석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을 가려 쓰되 곤란한 처지로 몰고 가 헤어나지 못하게 해 두고 다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은혜를 입히자는 수작이라니 그 가증스러움에 기가 막힐 뿐이다. 이제 회장도 회장이지만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지 미경이에 대한 감정이 더욱 나빠진다.
“크......”
“아유, 가게에 가서 마시자니까 꼭 소주를 사다 마셔요. 집에 안주도 없는데......”
“그냥 계란 프라이나 한 장 부쳐와.”
“나, 지금 가게 나가봐야 하는데 민희씨가 좀 해줘.”
“그래요, 언니...... 내가 해 줄 게 얼른 나가봐요.”
“그리고 두 사람 나 없다고 너무 친한 척 하기 없기...... 호호호......”
“아유, 참..... 언니는?......”
“허허...... 참, 너희들 그 사이 많이 친해졌다? 아까는 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던데......”
“어머! 우리가 언제......”
“정말 미쳤나 봐......”
“혜영아, 가게에 요즘 박부장 똘마니들 와 있니?”
“으응, 그 애들은 아주 점잖아서 맘에 들어.”
“푸훗, 그래? 나중에 나도 가게에 갈 테니까 밤 열 시쯤 만나자고 말 좀 해 둬.”
“응, 알았어. 그럼 이따가 같이 나와. 술이나 한 잔 해야지. 민희씨 환영파티...... 호호호......”
“그래.”
“네, 어서 오세요. 들어오세요.”
“네, 실례 좀 할게요.”
강주와 민희는 영통의 장마담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장마담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민희를 바라보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은 모습을 보곤 기겁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하루가 지나고 나니 푸른빛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니 비록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연적일 수 있지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말할 수 없는 정도인 것이다.
“아유, 어떻게 해. 병원에는 가 본 거야? 응? 자기야......”
“응, 조금 전에 다녀오는 길이야.”
강주를 다정하게 부르는 장마담의 모습에 비록 신세를 지러 온 처지라지만 민희의 눈빛에 표독스런 기운이 스친다. 장마담도 민희의 기운을 느꼈는지 마치 씨앗싸움을 다투는 여자들처럼 잠시 긴장이 흐르기도 하지만 이내 강주의 너스레로 넘어가 버린다.
“자, 바둑아, 이리 와서 좀 기대고 앉아.”
“아유...... 강주씨, 아파 죽겠는데 자꾸 놀리지 마. 이 씨......”
“어머! 참...... 자기는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 사랑하는 사람한테......”
장마담이 먼저 긴장을 풀어 버리려는 듯 민희를 배려해 주는 소리를 하고 소파에 기대어 앉는 민희를 부축해 준다.
“고마워요. 언니......”
장마담은 역시 화류계 십 년의 경륜인지 바로 민희에게서 언니 소리를 받아낸다.
“사람을 어떻게 이 지경을 만들 수가 있어? 강주씨, 차라리 그 박부장 패거리들을 시켜서라도 어떻게 해 버리지. 그냥 두고만 볼 거야?”
“에헤이...... 예쁜 입에서 어떻게 그런 살벌한 소리가 나오나? 매사를 그렇게 처리하면 이 땅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어쨌거나 다 지난 일이니까 잊어버리고 여기서 며칠 푹 쉬면서 몸이나 회복할 수 있도록 네가 잘 좀 도와 줘.”
“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말고...... 밥은 먹고 온 거야? 밥 차려줄까?”
“아니, 나는 시간이 없어서 나가 봐야 하니까 너희들이나 먹어. 나중에 전화할게. 민희 너는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강원장 전화 오면 일절 받지 마. 변호사가 다 알아서 하게 할 거니까......”
“응, 이따가 올 거야?”
“음....... 그때 가 봐서...... 일단 전화 해 줄게......”
“으응...... 조심해.”
오늘은 전 점포 재고조사를 실시하는 날이니 매장을 순회하며 상황을 감독할 필요가 있어 일단 인천 용현동 본사로 향한다.
“아니, 황부장은 왜 안 나갔어요? 본사 직원들 모두 매장 지원 나가라고 했잖아요?”
“아! 네...... 저는 사장님이 들어오라고 하셔서...... 저도 이제 막 들어오는 길입니다.”
“사장님이? 왜요?”
“글쎄요...... 저도 아직 모릅니다. 뭐 긴히 시키실 일이 있는 모양이던데......”
“그래요? 음......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 매장은 본사에서 지원 나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까? 감독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건데......”
“아! 저 말고도 두 명이나 더 있습니다.”
“음...... 그럼 됐습니다. 저기...... 재고 보유 현황 뽑아둔 것 어디 있죠?”
“여기 있습니다.”
“그럼 나는 나가 볼 테니까...... 무슨 변화 있으면 전화를 주셔야 합니다. 사장님 지시라고 해서 황부장님이 오늘처럼 내 시야를 벗어나면 업무 통제가 안 되질 않습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는.....”
이미 며칠 전부터 민희가 회장의 눈 밖에 나고, 그 결과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미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사장도 민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아 나설 수도 있는 일이다. 냄새 나는 일은 맡아서 할 개가 따로 있는 법이고 만약 그렇다면 그 개는 황부장이 될 터이니 미리 단속을 해 둘 일이다.
가까운 매장부터 순회를 시작한다. 이미 점장들은 강주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거리낌 없이 셔터를 들어 올려 매장으로 들어선다.
“아! 이사님, 어서 오십시오.”
“그래, 잘 진행하고 있지요?”
“네, 이미 시작했습니다.”
매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온 강주는 점장을 부른다.
“지금 전부 중단시키고 정량정리부터 다시 하세요. 어제 교육 안 받았습니까?”
“......”
“재고조사를 하고 다시 확인을 해야 하는데 저렇게 정리도 안 된 상태에서 하면 오늘 하루 종일 해도 못 끝냅니다. 다섯 개면 다섯 개, 열 개면 열 개씩 정해진 양대로 정리를 하고 조사를 시작하라고 했을 거 아닙니까?”
“아! 네......”
“얼른 정리부터 다시 하라고 하세요. 그래야 정확하고 더 빨리 끝낼 수 있어요.”
“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사무실로 들어가 재고 현황을 넘겨보며 다음 이동할 점포를 찾는데 전화가 울린다.
“네......”
“오빠......저예요. 보라......”
“응, 그래...... 어디에 있니?”
“저, 집이에요.”
“오늘은 재고조사라서 안 온 거야? 너, 자식 그러면 일당 깎아 버린다. 하하하......”
“아유, 오빠......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왜? 무슨 일 있어?”
“조금 전에 비서실에 있는 후배하고 통화했는데 지금 회사 분위기가 이상하대......”
“그게 무슨 소리야?”
“전에 오빠가 후배 중에 누구 소개시켜 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얘기해 둔 애가 있는데 누가 오빠에 대해서 전무실에 투서를 했다나 봐. 그래서 감사팀이 가동됐다고 하는 것 같던데......”
“뭐야? 그게 누구래? 투서한 사람이......”
“그건 아직 모르고......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으면 다시 전화 해준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봐야지. 아유, 어떻게 해요? 오빠......”
“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게도 무슨 연락이 있겠지.”
보라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강주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간 건드려 온 여자도 한둘이 아닌데다가 상가 번영회와의 계약도 엄밀히 따진다면 회사에서 파견 나와 있는 소장으로서 당연히 회사를 대표하는 입장이니 회사의 명의로 했어야 할 일인 것을 개인 명의로 처리를 해 문제가 될 소지가 너무나 많으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자칫하면 형사 고발을 당할 수도 있는데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투서를 했는지부터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음...... 민철이니?”
“네, 형님...... 웬 일이세요?”
“혹시 최근에 주차장 코너에 대해서 물어 본 사람들 없었니?”
“아유, 그거야 한 두 사람이 아니니 말 할 것도 없죠? 장사가 잘 되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다 하고 싶어 하는데요.”
“음...... 그래, 알았다.”
누구라도 강주가 책임자인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니 민철이에게는 더 얻을 정보가 없어 할 수 없이 번영회장에게 전화를 넣는다.
“아, 회장님?......”
“아니에요. 소장님..... 저예요.”
회장의 부인이 전화를 받는다.
“으응, 회장은 어다 갔어요?”
“네, 손님이 와서 나갔어요. 소장님에 대해서 뭐 묻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이미 감사팀이 들이닥친 모양이다.
“아, 아...... 별 일 아니에요. 혹시 전에 나하고 번영회하고 계약한 것에 대해서 누가 물어본 사람 없었어요?”
“몰라요. 나는 못 들었는데...... 혹시 총무가 알지 않을까?......”
“그래요. 알았어요. 내가 전화 해 볼게요.”
하기야 공증문서도 총무가 보관하고 있을 테니 그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네, 저 슈퍼 최소장입니다.”
“아, 소장님...... 요즘 무슨 일 있습니까? 지금도 소장님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 그래요? 혹시 계약에 관해서 묻던가요?”
“네, 회사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보여드리긴 했는데......”
“네...... 뭐, 잘 하셨습니다. 그나저나 그 전에는 왔던 사람 없던가요?”
“네, 있었습니다. 그 때도 주차장에다가 왜 저런 시설을 했냐면서 공유면적 확인한다고 해서 이것저것 다 보여줬습니다. 뭐...... 나중에는 이상 없다고 하고 그냥 가기에 별 일 아닌 줄 알고 있었는데......”
“네...... 그랬군요. 잘 알았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네, 네......”
이미 완전히 올무에 걸려들은 모양이다. 더 이상은 손 쓸 방법이 없으니 그저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강주의 손을 전화기로 이끌어간다.
“응, 혜영아......”
“아유...... 그새를 못 참고 전화 하는 것 좀 봐. 그렇게 걱정이 돼? 호호호...... 아유, 민희씨...... 전화 받아 봐.”
“아니, 민희 말고 너한테 물어 볼 게 있어.”
“나한테?...... 뭘?......”
“전에 얘기했던 거...... 옛날에 너 대출 받으려고 했다는 서류 말이야. 그것 좀 찾아 볼 수 있을까?”
“음...... 가서 봐야 아는데...... 왜? 급한 일이야?”
“으응...... 내가 지금 사면초가다. 그거라도 있으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강주는 장마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전화를 끊는다. 더 이상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아 차를 타고 본사로 돌아와 버린다. 황부장은 어디를 갔는지 자리에 보이지도 않지만 지금 거기에는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어찌 됐든 장마담이 서류를 보관하고만 있다면 거래를 통해서 형사고발은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일이야 의왕매장과 영진유통만 돌아보면 될 일이다. 기왕 물은 엎질러진 것이고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편히 생각하기로 한다.
“어어...... 경주씨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머! 이사님...... 인천에 오시면 전화 해 준다고 하고선 한 번도 연락을 안 해 줘요?”
“허허...... 내가 그동안 좀 바빴어. 미안해.”
“치...... 참, 민희는 연락 안 와요?”
“으응?...... 민희씨가 나한테 연락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아유...... 계집애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으응...... 사장님 외부 모임에는 민희가 파트너로 잘 다니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나보고 같이 나가자고 해서...... 아유, 계집애...... 내 전화도 안 받고......”
“그럼 지금 사장님 만나러 온 거야?”
“으응......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는데 달리 갈 데도 없어서 일찍 왔어.”
강주는 넌지시 미경이의 일에 대해서 떠 보기로 한다.
“참, 미경씨는 며칠 전에 한 번 만났다.”
“어머! 그 언니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네...... 바쁘게 왔다 갔다 하더니......”
“뭘 하는데 그렇게 바빠?”
“아유, 몰라요. 언니가 뭘 시켰는지 우리 사무실에서 직원 한 명 빼달라고 하더니 며칠씩 데리고 다니던데......”
데리고 다니는 똘마니들이 사고라도 친 모양이지만 그걸 물어보면 공연히 말이 들어갈 것 같아 속내를 감춘다.
“그래? 미경씨도 변호사 개업하려나? 하하하......”
“그럼, 이사님...... 나, 갈게요. 나중에 봐요.”
“잠깐만...... 아직 시간 있다면서...... 따라와 봐.”
경주의 팔을 이끌어 당직실로 들어간다. 잠시 후 사장을 만날 터이니 민희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해 사전에 어지럽히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강주의 심정은 섹스를 통해서라도 잊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머! 어떻게 하려고?......”
“조용히만 하면 돼. 스릴 있어 좋잖아?”
문을 닫아걸고 돌아보자 엉거주춤 강주를 바라본다.
“아유, 나 지금 점을 보니까 관계하지 말라던데.......”
“지랄, 생 쑈를 하고 자빠졌네. 야! 지 구멍 가지고 하는 오입도 점쟁이 허락 맡고 한다든? 왜? 구청 가서 물어보고 오지? 아니면 네 남편이 주인이냐? 네 남편이 하라면 너도 할 거야?”
서둘러 음순을 열어간다. 거래현장에 사랑이 개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 두 사람은 단지 후일을 도모하는 거래에 섹스의 형식을 빌려온 것뿐이니 거칠 것도 없는 일일 것이다. 강주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닌 듯 경주를 괴롭힌다.
“후욱...... 쑤우우욱......”
“아아아흑...... 아이 참...... 아파...... 천천히 해......”
발코니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문다.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해 정들은 회사에서 이제 정리를 해야 한다니 감회가 어린다. 비록 깔끔한 마무리가 아쉽긴 하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네, 여보세요”
“네, 소장님이시죠? 여기 전무님 실 미쓰조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다. 매도 일찍 맞는 게 편하다고 하니 피할 일도,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 네...... 최강주입니다.”
“지금, 휴가 중이시던데...... 전무님 호출이 있으시거든요. 들어오실 수 있으신가요?”
“네, 그러지요.”
“그러시면 다섯 시에 약속 잡아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세요?”
“네, 알았습니다.”
아직 감사팀이 회사로 복귀도 하지 않았을 시간에 연락이 오는 것을 보니 전화보고를 받은 모양이다. 감사결과에 그만큼 확신이 있다는 얘기인 것이다. 서둘러 차를 몰아가며 장마담에게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으응, 강주씨...... 언니 아까 나갔는데...... 자기 전화 받고......”
“민희야, 왜 그 전화를 네가 받아?”
“나도 옷 사러 밖에 나왔어. 당장 갈아입을 속옷도 없는데...... 내 전화는 전화가 많이 걸려 와서 아예 배터리 빼 버리고 이거 쓰라고 언니가 주던데......”
“어이쿠...... 그래, 알았다.”
“왜? 자기야.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신경 쓰지 마. 다시 전화 해 줄게......”
“으응...... 저녁에 와. 보고 싶어.”
“야, 보챌 걸 보채라. 하하하...... 어제 보고 아침에 헤어졌는데 뭐가 보고 싶어?”
“치...... 남의 집에 얹혀 있으니까 기도 죽고 기분 이상하단 말이야. 자기라도 있으면 좀 날 거 아냐?”
“그래, 나중에 상황 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추락하기 시작했으니 맨땅에 부딪히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그렇게 비서실 정보를 캐려 했건만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모양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터덜거리며 전무실로 향한다. 비서가 강주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 맞는다.
“제가 최강주입니다.”
“네, 기다리십시오.”
비서가 인터폰으로 보고를 하고 이내 들어가라고 신호를 준다.
“전무님, 반갑습니다. 최소장입니다.”
“으음...... 그리 앉아요.”
의외로 부드럽게 강주를 맞아들인다. 자리에서 일어서 소파로 내려앉으며 비서에게 커피를 시킨다.
“자, 최소장...... 차 들어요.”
“네, 네......”
“그래, 확실히 최소장이 수완이 좋더군. 내가 감탄을 했어요. 그 수원 매장이 매출이 좋아진 것이 그냥 좋아진 게 아니더라고......”
“......”
“그래, 어디부터 말을 할까?......”
“이미 소식 듣고 왔습니다. 음...... 처분대로 따르겠습니다.”
“쯧쯧...... 나도 최소장 같은 인재를 이렇게 마주앉게 돼서 마음이 안 좋아요. 그래, 이미 알고 왔다고 하니 그동안의 정을 봐서 형사 고발은 안 하는 것으로 하겠어요. 그 대신 이미 운영진에서 다 알고 있는 일이니 형평상 사직처리는 피하지 못할 거고 내일쯤 직원을 보낼 테니까 번영회와 맺은 계약을 내 앞으로 변경시키도록 하세요. 내 말 알겠습니까?”
“아! 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어쩐지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상가 공유면적의 십 년간의 권리를 탐냈던 것이다. 마땅히 회사로 귀속시켜야 할 권리를 지위를 이용해서 착복하겠다는 것이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강주로서는 그간 받아 두었던 보증금을 한 번에 토해 내야 하는 입장이니 타격이 없지 않지만 의왕매장 진정이에게 부탁하면 안 될 일도 아니니 나름대로 적절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은 셈이다.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전무실을 빠져 나온다. 이미 합의를 했으니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이유도 없다. 전무는 쾌재를 부를 것이고 강주는 정리를 서둘러야 할 일이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허둥지둥 장마담이 들어선다.
“야! 혜영아,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너도 입장 불편할 텐데......”
“뭐야? 벌써 끝나 버린 거예요?”
“으응...... 그래도 다행히 합의는 잘 됐어. 저 인간도 그게 탐나는지 그냥 권리 넘겨주고 옷 벗는 선에서 끝냈어.”
“아유, 자기가 말했던 서류가 집에 있던데 이제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 그만 가자.”
“아유......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잖아. 아깝고...... 저 인간도 순 도둑놈인데......”
“허허허...... 회사 생활이 다 그렇지 뭐, 높은 자리에 있으면 큰 도둑놈이고...... 낮은 자리에 있으면 작은 도둑놈이고......”
“아이, 그러지 말고 한 번 들이대기나 해 봐.”
나름대로 속이 상하는지 투정을 부리는 장마담을 한참 바라보더니 서류를 받아든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후 다시 장마담을 바라본다.
“그럼, 혜영이 너...... 불편해도 얼굴 한 번 비춰줄 수 있어?”
“왜? 어떻게 할 건데?......”
“이거 상무가 좋아할만 한 일이거든...... 자기도 진급을 목 타게 기다려 왔을 텐데...... 이사회에서 터뜨리면 대박이잖아? 다만 진위여부를 가려야 할 필요가 생기면 필연적으로 네가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장마담은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뭐, 상관없어. 나야 화류계 인생인데...... 상무도 내 손님으로 만들어 버리지 뭐...... 호호호......”
“정말이지? 그럼 가자.”
강주는 장마담과 함께 상무실을 찾아가 면담을 신청한다. 상무실 비서는 익히 강주를 알고 있으니 바로 연결을 시켜주고 이내 상무와 마주앉는다.
“그래, 최소장. 나도 얘기는 들었어. 거...... 잘 좀 하지 그랬어? 허허허......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신가?”
이미 퇴사시키기로 결정 된 사안이니 더 이상 나무라지도 않고 웃음으로 때우는 인상이다. 강주는 서류를 내밀고 장마담은 상무에게 인사를 한다.
“어머! 상무님, 저 모르시겠어요? 저 장비서예요. 장혜영이라고요.”
“으응?...... 자, 장비서?...... 아니?......”
“호호......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 서류나 한 번 보세요. 상무님이 좋아하실 내용인데......”
오래 전 자신을 곤란하게 하고 사라진 장비서가 강주와 함께 나타나니 상무는 몹시 당황한 모양이다. 황급히 서류를 흩어보고는 질문을 한다.
“이, 이게 무슨 서류지?”
“그게 그 당시 상무님을 곤경에 빠뜨린 대가로 전무님이 저에게 송금해 주신 증거자료예요. 그거면 상무님께 상당히 유용하실 텐데요?”
“으음......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호호...... 저 강주씨하고 동업하고 있어요. 우리 친구예요.”
장마담은 지난번 강주가 박부장에게 소개한 대로 동업자라고 소개를 하고 지갑을 열어 상무에게 명함을 내민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겠어?”
“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해 주세요. 전무님......”
장마담은 당돌하게 상무에게 전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도발적으로 웃어 보인다. 확실히 극한상황에서는 여자들이 훨씬 대범한 모습을 연출한다.
“으음...... 사람 참......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건 하나도 안 변했구먼......”
“이사회에 바로 조치하실 수 있잖아요? 그럼 그 원인이 뭔지도 조사할 거고 그럼 그 당시 땅값을 튀긴 것도 다 나타날 거 아니에요? 제가 다 증언해 드릴게요.”
“정말 그렇게까지 할 수 있겠어? 도대체 두 사람 어떤 사이야? 내가 술을 한 잔 하러 가더라도 최소장한테 실수해서는 안 될 거 아니야?”
“어머! 그럼 그렇게 해 주시는 거예요? 호호호...... 우리 애인이에요. 호호호......”
“그것 봐, 내가 눈치가 있는데 최소장한테 다리 부러질 뻔 했잖아? 하하하......”
“아! 이거 감사합니다.”
“그래, 일단 한 번 해 보자고...... 그 대신 철저하게 끝까지 가야 하니까 각오하고 밀어붙여야 돼.”
“아유, 알았다니까요. 그럼 이만 가 봐도 되겠지요? 가요. 강주씨......”
“으응,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내가 따로 연락 줌세. 자넨 그저 모른 척 하고 있어.”
“네, 그나저나 한 가지만 더 여쭙고 가겠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누가 투서를 한 건지 궁금한데......”
“음...... 좋아, 알려주지. 그 대신 현명하게 처신해야 하네.”
상무는 테이블의 메모수첩을 넘기더니 이름을 불러준다.
“이미경이란 사람인데 신원은 확실한 사람이야. 그래서 조사에 착수했고......”
“왜? 자기 아는 사람이야?”
“으응...... 아, 알았습니다. 심려 끼치는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무서운 일이다. 이제는 뭔가 눈앞이 환하게 열리는 기분이다. 강주는 십 년간의 권리를 빼앗기는 것이 억울한 것보다 자기를 음해한 사람이 더욱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황부장의 아내 미경이가 그 장본인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자기를 내사 했다는 것이니 아파트의 소유권을 가져오기 이전의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보복의 차원도 아니니 필경 회장의 지시였을 것이다. 회장이 자신에게 나쁜 감정이 있을 리도 없으니 자기 회사에 붙들어 두기 위한 포석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을 가려 쓰되 곤란한 처지로 몰고 가 헤어나지 못하게 해 두고 다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은혜를 입히자는 수작이라니 그 가증스러움에 기가 막힐 뿐이다. 이제 회장도 회장이지만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지 미경이에 대한 감정이 더욱 나빠진다.
“크......”
“아유, 가게에 가서 마시자니까 꼭 소주를 사다 마셔요. 집에 안주도 없는데......”
“그냥 계란 프라이나 한 장 부쳐와.”
“나, 지금 가게 나가봐야 하는데 민희씨가 좀 해줘.”
“그래요, 언니...... 내가 해 줄 게 얼른 나가봐요.”
“그리고 두 사람 나 없다고 너무 친한 척 하기 없기...... 호호호......”
“아유, 참..... 언니는?......”
“허허...... 참, 너희들 그 사이 많이 친해졌다? 아까는 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던데......”
“어머! 우리가 언제......”
“정말 미쳤나 봐......”
“혜영아, 가게에 요즘 박부장 똘마니들 와 있니?”
“으응, 그 애들은 아주 점잖아서 맘에 들어.”
“푸훗, 그래? 나중에 나도 가게에 갈 테니까 밤 열 시쯤 만나자고 말 좀 해 둬.”
“응, 알았어. 그럼 이따가 같이 나와. 술이나 한 잔 해야지. 민희씨 환영파티...... 호호호......”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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