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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0:33 1,068회 0건
바이러스바이러스

박봉구 / 이춘식 / 김유석



제 17부 천상의 구두



6월은 중순으로 접어들었지만 때 이른 더위는 사람들에게 짐이 됐다. 다들 무거운 봇짐을 등에다 짊어지듯 힘겹게 걷고 있다. 베란다 앞으로 보인 길도 마찬가지다. 몇몇 양산을 든 주부들이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다. 그림자가 짧은 걸 보니 한낮이로군, 어깨를 곧추 펴고 크게 숨을 들이킨다. 힘든 일을 끝마친 표정이다. 맞다. 힘든 일이었다. 프리지아에서 지하주차장으로, 다시 이곳까지 옮겨야 될 일은 고되기만 했다. 그것도 한번에 다 하지 못해 이틀간 몇 차례 나눠야 했다. 축 늘어진 무게는 제법 나갔다. 하지만 수고로움은 달콤한 대가를 주는 법. 힘겹게 높이 오른 새가 좋은 먹이를 얻는 법.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 아니겠는가.



얇은 셔츠를 가슴까지 걷어 올린 춘식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다시 한번 맑은 공기를 들이켰다. 마치 큰일을 준비하는 분위기다. 상큼함, 더위로 부푼 공기지만 폐를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콧구멍을 타고 흐른 공기는 가슴 속의 찌꺼기를 시원하게 걷어갔다. 베란다에 나서기 전까지 머리에 남아 있었던 그 지끈거림은 분명 미경, 그녀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에 배신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자기가 해야 할 이 신선한 일을 부정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참을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모든 걸 다 주겠다고 했는데, 자기는 그딴 거 필요 없다고 분명 애기했는데 왜? 무엇이 두려웠었을까? 모를 일이었지만 미경은 분명 막으려했다.



그녀가 웃음을 띠며 내민 디자인은 만족스러웠다. 원색이며 유채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의 기호를 알았을까 전체적인 검은 톤에 앞부분을 진녹색 반원으로 띠를 둘러치고 세 개의 홈을 뚫어 발가락을 조금 보이게 했다. 앞에서 발등을 따라 구두 윗부분은 가느다란 줄로 마감을 시켰다. 앞코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면서 삼각형의 진파랑 띠를 둘렀다. 굽은 높아 보이지 않았다. 6센티미터다. 딱 좋은 높이다. 볼의 넓이와 치수는 그녀의 크기에 맞춰달라고 했기에 230에 볼 넓이는 8센티였다. 그녀의 발은 손에 쥐면 앞뒤가 조금 남아 보일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볼은 도톰한 게 매력이었다. 발등을 덮은 부위도 많지 않아 발가락을 겨우 가릴 정도였다. 뒷굽 역시 진녹색으로 S자 모양을 주어 뒤에서 보면 녹색의 S자가 굽을 감싸고 있어 보였다. 펌프스. 그가 제일 좋아하는 구두스타일이다. 오픈이나 샌들은 향기를 모아두지 못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편이었다. 검은 펌프스.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수고 했어, 안 부장. 아니 미경이. 역시 센스가 있어. 색감도 좋고 모양도 좋아. 단순하면서도 무게가 있는 이 스타일. 구두는 이렇게 무게가 좀 있어야 균형감이 잘 살지.”

“고마워요, 사장님. 호호.”

미경은 기실 쑥스러웠다. 지금껏 해보지 않은 디자인이라 외국 모델도 베끼고 국내 것도 이것저것 참고하며 만들어 본 거다. 펌프스란 게 워낙 단순하기에 어디 모양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 정도 길이에 이 정도 볼 넓이면 딱 좋지. 물론 미경의 발에 맞췄겠지만........”

춘식은 눈길을 얌전히 한곳으로 모은 다리에 던졌다. 스타킹을 신지 않은 다리는 갈색이 약간 깃든 하얀 피부다. 좋은 느낌이다. 발목을 따라 시선을 더 내리자 청색 백오픈 가죽구두가 순간 흥분을 줬다. 안에 가득 차 있을 여인의 체취가 그리웠다.

“왜 그래요? 사장님. 이상해요. 그러지 말아요. 아이, 싫어요.”

불쑥 내민 손이 자신의 한 발을 잡아들자 미경은 몸을 틀며 싫은 표정을 지었다. 가끔 사장은 충동적으로 발을 끌어 얼굴로 가져가곤 했었다. 더러운 땀 냄새가 역겹지도 않은지 얼굴을 파묻으며 좋아하곤 했다. 지금 또 그러려고 하자 미경은 발을 빼며 피했다. 이런 행동은 자기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매장의 알바아이들에게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정아란 계집애는 일부러 발을 디밀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뻐서 그래. 이렇게 멋진 디자인을 보니 네 발에 뽀뽀를 하고 싶어 미치겠어. 이리 와. 얼른.”

부드러운 음성에 미경은 마지못해 소파에 기대며 두 발을 들었다. 사장은 직접 신발을 벗기는 걸 좋아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야릇한 느낌이었다. 마치 속옷이 벗겨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벗긴 구두의 냄새를 맡은 그의 모습이 꼭 자신의 하체를 애무하는 듯 했다. 이 청색 구두 역시 사장의 선물이다. 물론 매장에서만 신어야 한다는 조건이지만.



춘식은 그녀의 두 발을 오른 손에 받치고 왼 손으로 뒷굽의 띠를 걷어냈다. 분홍빛 뒤꿈치가 반들반들 윤이 흘렀다. 굳은 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매끄러운 발꿈치에서 구두를 벗겨낸 다음 제법 통통한 발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아! 이 편안함. 천상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한 이 포만감. 야릇한 내음까지 그를 흥분시켰다. 구두 속에 담긴 발은 연한 가죽내음을 풍겼다. 거기에 살갗이 간직하고 있는 특유의 향기가 더 해져 바닥이 없는 저 깊은 곳, 아니 높이를 모른 하늘 위로 붕 뜬 느낌이었다.

“미경의 발은 항상 내게 아늑함을 줘서 좋아. 정말이야. 구석구석 내 혀로 핥아주고 싶어. 세포 하나하나의 향기마저 놓치기 싫어. 이 통통 튀는 살집이야말로 세상 그 어느 것하고 바꿀 수가 있겠어? 없을 거야. 앙증맞은 이 발가락 하나하나 다 빨아주고 싶어.”

“싫어, 그러지 말아요. 누가 봐요.”

“누가 본다고 그래. 여기는 미경이와 나 밖에 없는데......., 하하하”

“그래도........애들이라도 들어오면 어떡해요. 이따 나가서 해요, 네?”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칭얼대면서도 발을 빼진 않았다. 자기 발이 예쁘다 하는데 싫어 할 여자가 있겠는가. 그리고 사장과 잘 엮어지면........... 미래는........



“흠........, 이 깊은 향기. 마른 과일, 망고내음 같기도 하고 사과향기 같기도 하고. 뭘까?”

오른 발을 들어 혀를 내민 그는 보드라운 발가락 사이를 핥았다. 길지 않은 발가락이 고만고만하게 내밀었다. 자연색 그대로의 발톱에서 실내의 불빛이 반사되었다. 앞볼의 잔주름을 입술로 따라가다 곱게 굴곡진 발 우물에 머물렀다.

“싫어, 간지러워. 더러운데........”

“아니. 더럽지 않아. 만약 더럽다면 내가 깨끗하게 해주지. 이렇게 샅샅이 핥으며”

“그래도, 아이........”

춘식의 혀는 쉬지 않고 자그마하면서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발을 핥으며 미경을 봤다. 눈은 살포시 감고 있는 게 즐기고 있는 듯 하다. 입술을 약간 벌린 모습이 야릇하다. 루즈를 칠하지 않은 분홍빛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이젠 몰랑한 뒤꿈치의 살집을 깨물었다. 갈색의 뒤꿈치 역시 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깨끗할 뿐 만 아니라 잘 익은 복숭아마냥 과즙이 물씬 베어있다. 그가 좋아하는 걸 알고 일부러 관리를 잘했는지도 모르겠다. 발목을 타고 오른 입술이 종아리로 다가서자 미경은 눈을 흘기며 발을 뺐다. 그때서야 발을 쥔 손을 풀어줬다.



“정말 만드실 거 에요? 쉽지 않을 텐데........ 근데 재질은 뭘로 할 거죠? 스웨이드 아니면 천?”

“다 생각해 두었지.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재질. 하늘의 신만이 가질 수 있는 거지. 뭘까?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죠. 그게 과연 뭘까?”

미경은 궁금한 얼굴로 벗어놓은 구두에 발을 넣었다. 그거마저 춘식에게는 야릇한 흥분을 주었다. 비밀스런 그 무엇이 살짝 드러나다 숨어버린 것. 구두를 장난스레 까닥까닥 하고 있다. 푸른빛이 넘실대는 바다를 가져 주었다. 여름엔 바다에 가고 싶군, 그의 머리에 쏴 밀려온 파도소리가 찼다. 왜 그 소리가 찾아왔었는지 몰랐다. 다만 어금니가 다시 욱신거렸다는 기억이다. 물어뜯고 싶은 충동, 뺨을 어루만지며 미경의 궁금증에 대답을 시작했다.

“있지. 그것은 아름다운 가죽이야. 가죽 그러니까 무슨 동물의 피부가 생각되는데, 그것도 동물이라면 동물이겠지. 그러나 좀 특별한 동물이야. 아름답기 한이 없고 부드럽고 같은 동물에게 열정을 주고 걷고 뛰어다닐 수 있으며 가끔은 뜨거운 숨을 쉬며 애무하고도 하지. 알겠어? 더 설명을 해줄까? 좋아, 말해주지. 그것은 미경이도 가지고 있어. 이 매끄러운 다리, 어디가 매끄러울까? 바로 이 고운 피부 아닐까?”

손이 닿자 뜨악한 표정이다. 설마, 했던 게 사실로 맞아서일까 미경은 다리를 옆으로 돌렸다. 바로 앞에서 노려보는 눈길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어금니가 다시 욱신거렸다.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어. 가치의 재창조란 말을 나는 의미 있게 받아들여. 이 고운 살갗이 언제까지 곱게 있겠어. 세월이 가면 쭈그러지고 없어지지 않을까? 탄력을 잃어버리고 볼품없이 변한다면 얼마나 아깝겠어. 난 그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두로 재창조시킬 거야. 너도 이미 이 창조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어.”



미경이란 이름대신 너라 부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자꾸 뒤로 뺀 그녀는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그런 미경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의 고운 피부를 영원히 작품에 담아 놓는다면........ 그 살갗의 주인공도 기꺼이 기뻐할 거야. 그 구두를 신의 제단에 바치면 세상은 아름다움에 외경심을 갖겠지. 미경인 그렇게 생각 안 해? 대신 이 곳을 네게 줄께. 네 예쁜 발의 탐닉에 대한 나의 대가야. 만약 방해하거나 허튼 짓을 하면 참을 수 없어. 지금 말해”

미경은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자기가 전화로 부른 여자들이 자진해서 피부를 내놓을까,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러면 강제로 납치?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돼요. 그러면 죄악이에요. 경찰이 알면........”

“다시 말해줄까? 악어를 보자. 생김새도 무섭고 이빨도 날카로운 악어지만 그 놈은 자기의 가죽으로 훌륭한 구두와 백을 재창조하지. 송아지는 어떨까? 또, 사슴은 어떨까? 그냥 고기를 인간에게 내어주고 뿔을 자르게 하면 남은 게 무어지? 그 가죽으로 만들어진 구두야말로 그들이 세상에 왔다갔다는 표식이 아니겠어?”

마치 준비를 해 둔 것처럼 말을 이어간 춘식은 어금니의 간지러움을 또 느꼈다. 빨리 구두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이상해졌다. 어떨 때는 속이 녹아드는 것 같기도 했다.



끝내 미경은 동의하지 않았다. 동의를 하지 않은 결과는 뻔했다. 미경 역시 재료 제공자가 되었다. 만들고 나면 그 구두를 미경에게 신겨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여신에게 바칠 구두 이름은 프리지아로 지었다. 아도니스를 짝사랑하다 죽은 요정 프리지아, 그래서 상긋한 향기를 품은 프리지아야말로 제격이었다.



베란다에서 땀을 식힌 춘식은 1층을 지나 지하실로 들어섰다. 냉방을 했지만 열기가 후끈했다. 미경, 정아까지 해서 모두 여섯 명의 여자들이 한 곳에 묶여있다 누군가 들어서는 기척에 얼굴을 들었다. 바들바들 떠는 여자도 보인다. 가장 어린 알바생 정아다. 이제 대학 1학년인 정아는 무슨 일인가 두리번거리며 사장을 보자 소리를 지른다. 손이 발목에 묶여 움직일 수 없는 여자들은 정아가 소리치자 따라서 비명을 지른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미경은 입을 다물었다. 그날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억센 손이 팔을 잡고 가슴 부위로 강한 통증을 보냈다. 아마 짜릿했던 것 같다. 푸른 불꽃을 본 듯도 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땐 이미 이렇게 묶여 있었다. 여기에 갇힌 지 벌써 사흘은 된 듯 하다. 처음엔 자기 혼자였다 다음엔 삼십대 중반이 둘, 이십대 중후반 둘, 마지막에 정아였다. 모두 처음 들어올 때는 의식을 잃었다 한참 후에 깨어나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서로 말을 할 순 없었다. 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정아는 그냥 제 발로 들어섰던 게 달랐다. 사장을 따라 들어선 게 끝이었다. 옷은 다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외출복 차림의 여자들은 한껏 멋을 부린 기색이다.

“안녕! 푹 쉬었나요. 조금 불편하지요?”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여자들에게 위안을 준 듯 비명소리가 가라앉는다. 손을 앞으로 모아 발목에 끈으로 동여맨 통에 상체가 앞으로 숙여졌다. 미경은 아예 옆으로 몸을 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머리를 들 때마다 불편한 그녀들이다.

“조금 참아요. 곧 편하게 해줄 테니.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타월을 감싸면 한결 편안해질 겁니다. 여러분은 선택이 되셨다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십시오. 저 밖으로 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갈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결코 선택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만이 오직 신에게 선택된 겁니다. 영원히 남을 자랑과 영광이 여러분 곁에 머물 겁니다. 안심하시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나 미경은 뭐라 소리치고 싶었다. 정신 나간 이 짓거리를 걷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에 물린 재갈에서는 힘 빠지는 소리만 나올 뿐이다. 몸을 비틀며 위험신호를 보내지만 다른 여자들은 안심한 표정이다. 어린 정아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본다. 따라 들어서자마자 낚아채곤 이렇게 묶어버린 것이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팔 다리의 자유를 빼앗겼다.

“미경, 넌 제일 마지막을 장식할 것이다. 밖에서가 아니라 여기서 프리지아를 신고 내 앞에서 춤을 추어야 할 거야. 싫다고?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하지. 자, 다들 바로 앉아요. 저기 보이죠? 구석에 있는 파랑 문. 저기가 욕실입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한 분씩 따로 모시겠습니다. 발은 풀어주지만 팔은 조금 더 있다 풀어드리겠습니다. 혹시 서투른 행동을 하면 그땐 책임질 수 없습니다. 여기선 아무리 소리를 쳐도 들을 수 없고, 힘이 장사라도 열수 없습니다. 호의를 베풀 때 받아주시기를.......”

언뜻 봐도 내부는 외부 공간과 완벽하게 구분됐다. 우선 창문이 없었다. 의식을 잃고 들려올 땐 몰랐지만 눈을 떴을 때 느낌이 달랐다. 어딘가 고도에 있다는 불안감이 찾아들었다. 아파트 현관 같은 강한 철문이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주었다. 이곳이 어딘지는 정아만 알고 있을 뿐 다른 여자들은 전혀 몰랐다.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에 마음을 놓을 뿐 눈은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다. 침대가 보이고 의자가 보이고 조금 전 말한 욕실로 가는 작은 통로가 보일 뿐이다. 실내는 그래도 좁아 보이지 않았다. 더운 철인데도 선선한 게 에어컨 시설이 돼 있는 듯 하다.

미경은 춘식이 말을 끝내자 몸을 바로 세우고 그의 얼굴을 노려봤다. 저 친절한 호의 끝엔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이 따라올 텐데 여자들은 그나마 다행이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목욕을 하기 전에 먼저 준비를 해야겠죠? 정아부터 할까, 발목을 풀고 손은, 아직 아니지. 조금 있다 풀어줄 테니까 참아. 내 손을 잡고, 그렇지. 착한 아이는 말을 잘 들어야 해요. 이리로.......여기 의자에 앉아. 편하게........, 말은 하려고 하지 마. 대화가 존재하지 않은 공간이거든. 나와의 대화는 이렇게 하는 거야.”

하얀 피크닉용 의자에 앉히고 양손은 머리 위로 들어올려 천장에 늘어진 긴 줄에 묶었다. 만세 하는 자세다. 의자에서 30센티 되는 앞에 긴 철봉이 의자보다 조금 높게 가로로 놓여있다. 옆으로 무릎을 꿇은 춘식은 두 발을 들어 미리 준비한 듯 익숙하게 거기에 걸쳤다. 종아리가 시작하는 부분, 그러니까 무릎 뒤쪽의 관절 바로 아래 부분을 걸치자 두 다리를 앞으로 뻗은 모습이 되었다. 정아는 반항하지 않았다. 사장은 원래 자기 발을 가끔 쥐기도 하고 키스를 하곤 했기에 그저 그러는 줄 알았다.

발목을 감고 있는 연노란 샌들의 밴드를 손가락에 걸어 벗겨냈다. 발가락에 살짝 걸친 샌들, 스타킹을 신지 않은 맨발과 노란 샌들이 눈을 부시게 했다. 샌들을 벗겨 테이블에 놓았다. 스트랩이 풀려 하늘거렸다. ‘슈어홀릭.’ 갖고 싶은 구두를 보면 소유하고 싶은 구두에 대한 강한 욕망. 춘식도 그렇다. 예전부터 몰래 집어온 여성구두나 잡아들인 여성의 구두에 자위를 한 그였다. 샌들의 하얀 바닥창이 여자의 기름기 흐른 허벅지로 보였다. 하체가 솟구쳤다.

구두에 고정시킨 밴드로 얇은 자국이 나 있는 발. 그 자국을 따라 손가락을 놀렸다. 눌린 자국은 연한갈색의 발등과 달리 붉은 색을 띠고 있다. 통통한 발등과 다르게 발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그러나 너무 긴 발가락은 좋아하지 않은 그다. 얼마나 싫었으면 긴 발가락을 볼 때마다 닭목을 치듯 쳐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을까. 춘식은 철봉에 걸친 한 발을 들어 예쁜 굴곡을 감상했다. ‘역시 네발은 탐스러워. 강인해 보이면서도 이렇게 보드랍다니. 약간 진한 갈색의 발등, 삶은 계란의 잘 익은 흰자위를 만질 때의 느낌. 몰랑몰랑한 이 발꿈치. 깨물고 싶군. 넌 발바닥도 은은한 분홍빛을 띠고 있지, 아마. 키스할 때마다 입술에 닿은 네 발바닥은 정말 황홀했다는 기억이야.’



철봉에 올려진 정아의 두 발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리는 춘식을 미경과 정아는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 멍하니 앉아 있는 넷은 엉뚱한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사실 그럴 것이다. 미경이나 정아도 처음엔 정말 당황스러웠다. 처음 면접 보던 날인가, 구두를 벗어라 할 때는 몰랐지만 가끔 탈의실에서 나온 그를 보거나 매장에서도 발과 다리를 뚫어져라 보곤 했다. 그러다 노래방인가에서는 내놓고 다리를 쓰다듬고 발에 입을 맞췄다. 당혹스러움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정아, 미경만이 아니라 다른 아르바이트 여학생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단 것도 알고 있었다. 미경은 오히려 춘식과 가까워져서 한 편으로는 애무를 즐기기도 했었다.

“사람에게는 냄새가 있지.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지식의 향기, 입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향기, 겨드랑이의 집착의 향기, 젖가슴에서 품어져 나온 성장의 향기, 여기 이곳에 숨어 있는 번식 생존의 향기”

정아는 벌어진 치마를 들치자 잠시 허리를 비틀었다.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 검은자위가 많은 그녀의 눈은 사슴 같았다. 약간 동그란 얼굴에다 동그란 눈이 그녀를 아주 어려 보이게 했다.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웃는 그는 손을 빼내 샌들이 벗겨진 발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하루의 시작이나 피곤한 그 하루를 끝낼 때 맡아지는 수고로움의 향기. 바로 이 향기겠지. 누구는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하지만 진정한 여인의 향기를 맡아보지 못한 어리석은 놈들의 헛소리지. 하루 종일 갑갑한 구두 속에서 꿈틀대던 발가락이며 몸을 지탱해준 발바닥과 발꿈치. 아! 너의 향기는 내 폐를 살아 숨쉬게 해줘. 깊숙한 이 내음”

곱게 패인 발우물에 코를 대고 깊숙이 들이킨다. 진한 살 내음, 아마 사슴가죽일거다. 어린 사슴의 땀내음이 폐를 채웠다. 음미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 행동으로 옮긴 춘식은 발을 바닥에 내리고 손을 묶은 끈을 잡아당겼다. 천장으로 올라갈수록 몸이 일으켜져 거의 서있는 자세가 되었다. 불안을 느낀 정아는 몸을 뒤채며 비명을 질렀다.

“겁먹을 필요 없어. 옷을 입고서 목욕을 할 순 없는 거잖아. 그렇지? 이런 거추장스러운 옷은 벗어버려. 자, 편하게 숨을 고르게 쉬며....... 내게 맡겨.”

웃옷과 속옷까지 벗겨냈다. 젊은 여자의 몸은 공처럼 탄력이 느껴졌다. 거치적거린 부분은 준비해 준 면도칼로 잘라버렸다. 숨김없이 홀딱 벗겨진 정아는 곤혹스러웠다. 치부를 숨기려고 다리를 꽈 숨겼지만 젖가슴은 그대로 드러났다.

“미지근한 물로 목욕을 하면 기분이 한결 좋아질 거야. 절대 다른 생각을 할 필요 없어, 테이크 잇 이지. 알지? 아, 그전에 이걸 좀 마셔야 돼. 회복제니까 금방 기분이 풀릴 거야. 자, 입을 벌려, 그렇지. 꿀꺽 삼키면 돼”

조금 짭짤한 맛. 작은 병을 입에 대고 마시기 쉽게 기울였다. 서너 모금 마시자 빈병이 됐다. 치켜진 손을 내려 묶인 곳을 풀어줄 듯 하다 이번엔 뒤로 돌려 잽싸게 묶었다. 힘이 너무 세서 저항할 겨를도 없이 손이 등으로 돌려져 묶여졌다. 그 통에 두 하얀 젖가슴이 앞으로 내민 듯 쑥 불거졌다. 발은 묶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저기 미경이까지 다 한 다음 우리 목욕을 하자구. 알았지? 자, 이리로 와. 욕실로 안내해줄 테니. 혹시 용변을 보고 싶으면 여기 용변기 보이지? 누구 볼 사람 없으니까 여기서 해. 아, 뒤처리. 그건 이따 목욕을 하면서 함께 씻어내자고.”

욕실은 널찍했다.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갖가지 목욕용품이 즐비했다. 넓은 통은 10여 명이 동시에 들어가도 남아보였다. 변기는 반대편에 놓여 있었다. 그렇잖아도 용변을 보고 싶은 그녀는 춘식이 나가자마자 발가벗은 몸으로 용변기에 앉았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지만 소변을 마친 그녀는 욕탕에 들어가지 않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뒤로 묶인 탓에 팔목이 아프고 무엇보다 수치스러움이 싫었다. 발가벗기다니.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게 이렇게 부끄럽다는 걸 처음 안 듯 얼굴이 빨개졌다. 10여 분이 지나자 서른 중반의 여인이 같은 꼴로 들어섰다.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좌변기에 급히 용무를 본 여인은 눈을 피하며 한쪽으로 가 앉았다. 풍만한 몸매가 하얀빛을 띄고 있어 한 눈에도 미모임을 알 수 있었지만 매장에서 봤다는 기억이 들었다. 그때도 사장은 여인의 발을 만지며 고급 구두를 신겨주었었다. 그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왜 이럴까? 문득 정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별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을 돌렸다. 우선 아랫배가 더부룩한 게 견디기 힘들었다. 뽀글뽀글 끓어오른 기운이 분출구를 찾았다. 그렇다고 여자가 저기 있는데 용변을 어떻게 해. 여인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찡그리며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다리를 모아 참던 정아는 끝내 엉금엉금 기어 좌변기에 엉덩이를 걸쳤다. 손이 뒤로 묶여 있어 불편했지만 용변을 볼 수는 있었다. 다음이 문제였다. 일어섰지만 뒤처리는 할 수 없었다.



방금 벗겨낸 앞뒤 오픈 구두를 든 춘식은 맵시 좋게 빠진 선을 손으로 느꼈다. 앞코에서 뒷굽까지 매끈한 라인이다. 굽이 3센티 정도의 높이라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마치 조각품 같았다. 뒷부분에 얼굴을 대니 조금 전의 그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래, 이런 따뜻함이 좋아. 너무 뜨거운 것은 좋지 않지. 부드러우며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 느낌, 짜릿한 기분,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왜 모르고 더럽다고만 할까?’



노란 샌들 옆에 분홍 토어오픈 구두를 가지런히 놓고 의자에 앉아 자기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스물 중반의, 원피스차림의 늘씬한 여자 옆에 앉았다. 치마 아래로 드러난 허벅지가 튼실하다. 이번에는 철봉에 걸쳐진 무릎 부분이 앞과는 달리 줄로 묶였다. 발목을 풀어주자 반항을 심하게 한 여자였다. 재갈 물린 입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을 피하려 했었다. 우악스런 몸집의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던 여자는 팔목을 붙잡힌 채 끌려왔다. 의자에 앉히자마자 손을 높이 들어 천장에 고정시키고 다리까지 철봉에 묶어버렸다. 춘식은 이빨이 또 욱신거렸다. 물어뜯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 자칫하면 이 여자의 다리고 가슴이고 잘근잘근 씹을 뻔 했다. 아직도 여인은 풀색 원피스에 얼굴을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별 수 없어. 정 그렇다면 약간의 폭력을 써 줄까? 아니 지금은 그럴 수 없지. 준비가 아직 안 됐거든. 넌 가장 혹독한 가죽을 내어줄 것 같군. 분노가 표피와 진피까지 잔뜩 베인 재료, 흐흐흐.”

그때서야 다른 여인들 역시 놀란 얼굴을 지었다. 지금 말한 가죽이라든지 표피라든지 하는 게 무얼 뜻 한지 그때서야 알아차린 것이다. 몇몇은 훌쩍거린 얼굴이다. 미경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러나 얌전히만 있으면 새롭게 탄생시켜줄 테니까 알아서 해. 내 이 좋은 느낌을 방해하면........”

목을 따겠다는 말은 삼켰다.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천상의 향기를 줄 여자들이 아닌가. 그런 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이젠 구두를 벗자. 내가 벗겨줄 테니 바둥거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자꾸 그러면 혼내준다.”

목소리에 호의가 사라지자 그때서야 여자는 비명을 삼키고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거운 음성은 남자의 얼굴을 화난 짐승처럼 만들었다. 건장한 어깨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꼭 황소 같았다.

“음........, 역시 향기가 좋아. 이 내음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새나온 깊은 향기, 거기에 말랑말랑한 이 발. 깨물어주고 싶군. 아니 핥아 줄까?”

쑥색 하얀 힐을 벗기자 커피색 발이 드러났다. 발은 스타킹 때문인지 진한 커피향이 느껴졌다. 보드라운 감촉을 손바닥에 쥐며 종아리와 복숭아 뼈, 발등을 주물렀다. 쥘 때마다 손안에 가득 찬 살의 탄력이 좋았다. 춘식은 쳐지거나 주름이 많은 발은 싫어했다. 꽉 찬 살이 터질 듯 쌓여 있는 발이 좋았다. 너무 발선이 길거나 볼이 좁은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제일 싫은 것은 뒤꿈치의 굳게 박힌 살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칼로 도려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커피색 얇은 스타킹을 둘둘 말아 벗겨내자 역시 굳은살 하나 없는 매끄러운 발이었다. 크기는 240 정도. 조금 큰 편이지만 여자의 키가 커서인지 괜찮아 보였다. 아마 이 여자는 모델이 꿈이었다고 했던가? 얼굴은 그리 예쁘진 않지만 몸매는 뛰어났다. 몸매도 몸매지만 하체가 길고 다리가 일품이었다. 첫눈에 찍은 춘식이다.

“모델이 되고 싶다고? 내가 모델로 만들어주지. 영원히 남을 그런 모델 말이야. 훗날 사람들은 아름다운 모습에 칭송을 할 걸. 흐흐흐.”

손이 발에 닿자 흠칫 놀라 비틀었다. 그 모습이 더 자극적인지 춘식은 반바지에 손을 넣어 아래를 주물럭거렸다. 무엇을 만진지 눈치 챈 여자는 또 숨 막힌 비명을 질러댔다. 탱탱한 발바닥에 입을 맞추고 발가락을 빨았다. 엄지를 입에 넣고 쪽, 쪽, 맛난 걸 빨아먹는 소리를 냈다. 진한 살 내음이 코를 메웠다. 침에 묻은 여인의 체취를 아낌없이 빨아들였다. 살색 페디큐어 발톱이 입 속에서 꿈틀댔다. 엄지부터 차례차례 빤 그는 발가락 바로 밑, 도톰한 살을 혀로 핥았다. 따뜻함이 물씬 느껴졌다. 발꿈치를 만지작거리다 천장의 줄을 끌어당겼다. 쭈욱, 올려진 여자는 철봉에 다리를 묶인 채 허공에 뜬 것처럼 됐다. 어깨가 아프고 특히 무릎께가 더 아팠다. 물 밖으로 튄 송사리가 파닥파닥 한 것처럼 몸을 뒤틀었다. 쑥색원피스는 무력하게 뜯겨져 나갔다. 아까와는 다르게 거칠게 옷을 벗겨냈다. 금새 드러난 하얀 속옷. 커다란 가슴과 둔부를 가리고 있는 레이스 달린 속옷까지 벗겨내자 분을 못 참았던지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발가벗긴 몸으로 매달린다는 것,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리를 풀어주고 손을 풀어 준 그는 등 뒤로 꺾고 다시 묶을 뿐, 은밀한 부위에는 손가락하나 대지 않았다. 남자는 처음 말 한 것처럼 욕을 보이진 않을 모양이었다. 강제로 욕을 당한다는 건, 그녀에 있어서는 치욕이었다. 그것은 정말 두 번 다시 당하기 싫었다. 사랑이 없는 일방적 육체의 겁탈은 고통에 가까웠다. 학교를 마치고 모델 세계를 꿈꾸던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무슨 미인대회인가 했는데 자주 가는 미용실에서 한번 권하기에 준비를 한 적이 있었다. 누구를 소개시켜준다 해놓고는 다짜고짜 덮쳤다. 처녀는 그 날 이후 사라졌다. 아주 고통만 남겨놓고........

회복제란 걸 마시게 한 뒤 욕실로 끌고 갔다. 이미 둘이 주저앉아 있는 욕실은 매스꺼운 냄새로 가득했다. 욱, 토할 정도로 속이 뒤집혔다.

“이런 일을 봤으면 물을 내려야지, 예쁜 숙녀분들께서 이렇게 하면 어떡해? 아항, 손이 묶여서 그랬다고. 그러면 이렇게 입으로 내리면 돼지. 안 그래?”

입으로 손잡이를 물고 내리자 쏴아, 쓸려 내려갔다. 수치심에 얼굴이 빨개진 정아는 고개를 숙이고 벽을 봤다. 서른 중반의 여자는 밑이 찝찝한지 자꾸 엉덩이를 달싹 거렸다. 이상하게 배가 더부룩하고 속이 끓었다. 벌써 대여섯 번이나 변기를 찾았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속에 든 냄새가 천박한 것들을 다 쏟아버려. 맑은 몸과 마음을 만들려면 추악한 것들은 다 버려야해. 너도 마찬가지.”

그가 마시게 한 약은 관장약이었다. 작업을 하기 전에 내장의 모든 것들을 빼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성스런 자리에 더러운 것을 풍긴다면, 그건 너무 싫었다. 모든 것을 뿜어버린 뒤 깨끗한 육체만 남아야 했다.

스물 중반, 건강한 몸매가 아주 매력적인 여자를 의자에 앉혔다. 다행히 반항 같은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결혼을?”

“.......”

작은 천이 입에 물려 있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경험이 없는 것보단 남자를 아는 여자의 살갗이 훨씬 좋지. 흰 눈의 순결함이 좋다고들 하지만 그건 값싼 포장에 불과해. 눈이 녹으며 촉촉하게 젖은 잔디가 드러날 때 오히려 더 매력적이지. 이런, 피부가 가무잡잡한 게 더욱 마음에 드는구먼.”

여인의 살갗은 햇볕에 잘 그을려서인지 구리 빛을 띠었다. 결혼 초년인 이 여인 역시 프리지아를 자주 찾았다. 잘 사는 집의 여자답게 명품을 즐겨 찾았다 춘식의 손길에 걸려 든 것이다. 전화는 저기에 앉아 있는 저 여직원이 했었는데, 지금 후회한 들 늦었다. 프리지아에 잠깐만 들려 새로 나온 상품을 한번 신어달란 부탁이었다. 게다가 품평을 해주면 사례까지 해준다고 하니 좋아라, 나간 거다. 돈보다는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사실 기분이 좋았다. 너무 아름다운 다리를 가지고 있기에 꼭 한번만 신어달란 부탁은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구두는 여름용 샌들이었다. 발바닥만 보호하는 밑창에 긴 스트랩이 발목을 감은, 언뜻 봐도 멋진 샌들이었다. 신발을 신고 포즈를 취하려 할 때 뭔가 목을 무는 듯 따끔했다. 그때 저 여직원이 나갈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피로가 심한 발은 퉁퉁 붇기 마련이지. 그런 발은 발갛게 물들어 보기 안쓰럽지만 삶의 냄새가 있어 좋고, 이렇게 피로가 풀려 나긋나긋한 발도 좋아.”

발꿈치를 들어 얼굴에 묻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미경은 할 말을 잃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묶인 채 두 다리를 걸치고 발을 희롱당하고 있는 하얀 정장의 여인. 황금빛 펌프스는 이미 벗겨졌다. 얇은 흰 스타킹까지 벗겨내자 자기가 봐도 갈색의 잘 빠진 다리다. 마른 체형이 아닌 여인이었다. 종아리가 아름다운 선을 만들었다. 허벅지에서 내려진 선은 종아리를 따라 발목까지 예쁘게 뻗어있다. 철봉에 걸친 두 발 역시 크지 않다. 말끔한 발은 발가락까지 예뻤다.

“점박이 페디큐어가 귀엽군. 다섯 발가락이 정답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데......, ”

발가락은 굵지도 가늘지도 않았다. 가지런히 놓인 발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이자 손으로 쥐고 들었다. 곱게 패인 발바닥의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그으며 발등과 연결된 아주 연한 피부를 만지작거렸다. 파란 실핏줄이 도드라진 그곳에 이를 내밀어 벗겨낼 듯 몇 번이고 물었다. 그 통에 놀란 여인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놀랄 만 하다. 발을 입에 물고 손가락으로 만지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갑자기 이빨을 들이대니 가슴이 철렁 했다. 그렇잖아도 남자는 무서웠고 이곳 역시 위험하게 느꼈었다. ‘읍, 읍’ 재갈 물린 얼굴을 도리질했지만 손힘이 대단했다. 빼낸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역시 옷을 벗겼다. 하얀 정장은 볼 품 없는 천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주인을 잃은 옷은 발로 걷어채어 구석으로 날아갔다. 검정 속옷까지 훌러덩 벗겨진 여자를 욕실로 끌고 가자 미경은 자기 차례라는 걸 알고는 그친 눈물을 또 흘렸다.



미경까지 걸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벗긴 춘식은 욕실로 끌고 왔다. 모두 손은 뒤로 묶였다. 일으켜 세우고 호스로 뿌렸다. 뒤로 돌려 엉덩이를 보이게 한 후 둔부의 갈라진 틈에 대고 세게 뿌리자 더럽고 찝찔한 것들이 떨어져 나갔다.

“다리 벌려. 넓게 벌려야 거기가 씻어지지. 그나저나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은 다 뿜어냈겠지.”

사실 기진맥진한 여자들이다. 쉼 없이 찾아든 복통은 서너 차례 이상 좌변기를 깔고 앉아야 했다. 이틀 간 먹지 못한 속이었어도 계속 찾아야 할 정도였으니 힘이 빠져 서 있기도 어려웠다. 손을 풀어주고 도망을 가라해도 그럴 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한참을 뿌린 후 욕탕으로 밀어 넣었다. 둔부를 흔들며 김이 모락모락 난 탕으로 들어선 모습이 마치 안개 깔린 호수의 연꽃 같았다. 고향의 연꽃은 맑은 향기를 멀리서부터 풍겼다. 그 향기를 맡을 때마다 알게 모르게 춘식은 흥분을 했다는 기억이다. 독하지 않은 연꽃 향기는 오히려 은은한 것이 마음을 끌었다. 그때부터 어떤 향기를 ?았을까? 향기를 ?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갑자기 솟구쳤다. 여성의 발에 대한 집착은 춘식을 한 없이 몰고 갔다. 그래? 봉구 그 놈을 만날 때부터야.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었어. 아냐, 아냐, 그 전에도 그랬던 것 같아. 춘식은 머리를 흔들며 대신 천상의 구두를 떠올렸다. 단아하면서도 멋진 그 구두에 어떤 피부가 어울릴지 떨리는 감이 찾아 들었다.



그 시간, 서울의 작은 카페에 있는 봉구. 느슨한 옷차림이지만 눈매는 날카롭다. 차가운 기가 흐른다. 혼자가 아니다. 맞은편, 반 목사가 빙그레 웃고 있다. 눈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캡슐에 고정하면서........ 빨간 캡슐은 조금 큰 알약 같았고 또 하나 파란 캡슐은 그보다 컸다. 꼭 예전 구전설화에 나오는 빨간 병, 파란 병 같다. 빨간 병은 화염이 치솟을 것이다.

“이것이요. 당신이 원하는 것. 이것만 있으면 한 도시 아니 한 국가를 파멸시켜버릴 것이 분명하오. 한번 뿌려볼까?”

“아니, 아니. 지금은 아냐. 그건 그렇고 어째 자넨 더 강해 보이는 군. 무섭기도 하고. 갈수록 더 그런 것 같아.”

“하하하, 그게 뭐 중요한 겁니까? 전보다 잠식하는 시간이 빨라졌다 뿐이지.”

잠식이란 단어를 쓴 봉구에게 긍정의 끄덕임을 보내며

“얼마나 빨라졌는지 궁금하군.”

“궁금증을 풀어드릴까?”

하대도 아니고 올림도 아닌 어정쩡한 말을 하지만 반 목사는 받아들이고 있다.

“저기 저 여자. 아주 멋진 차림에 거만한 얼굴로 웃고 있는 저 여자. 지금 당장 저 여자를 여기로 기어오게 해 당신 거기를 빨게 해줄까? 하하하. 아주 재미있겠는데, 재밌겠어. 하하하”

“아, 됐네. 이런 대명천지에 내가 망신당하겠네, 그것보단 다른 사람, 아니 이리 불러다 그냥 앉혀보면 어떻겠나? 그 정도면 될 것 같은데”

“하하하, 그래요. 그럼 잘 보세요. 저기 청 스커트에 다리가 날씬한 여자. 이곳에 잘 어울린 차림인데........, 얼굴도 괜찮아 보이고. 장난 좀 쳐볼까?”

반 목사는 호기심이 생겼다. 몇 번이고 확인한 사실이지만 그때는 밀폐된 공간이었고 여긴 열린 공간이다. 손님도 여럿이고 이렇게 창문도 있는데, 여자가 소리라도 지르며 도망칠지도 모른 것이다. 속으론 그렇지 않기를 바라며 여자에게 시선을 맞췄다. 여자 역시 둘이다. 친구로 보인 여자 역시 멋을 잔뜩 부린 차림이다. 값 비싼 옷으로 돌돌 만 여자 둘은 다른 사람의 눈길을 즐겁게 받고 있는 듯 했다. 자기들과 눈이 마주칠 자리가 아니다. 옆모습만 보였다. 전과는 다른 상황임에 분명했지만 반 목사는 눈을 의심했다. 청 스커트 차림의 여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맞은 편 친구에게 뭐라는 말도 없이 몸을 이쪽으로 향한 것이 아닌가. 우연? 은 아니다. 처음 찡그린 얼굴이 곧 화사한 미소로 변했다. 혹시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 봉구를 봤지만 틀림없었다. 봉구는 그녀를 향해 모든 힘을 모으고 있었다. 날카로운 신경의 바람이 느껴진 듯 했다. 보이지 않는 줄이 지금 그녀의 신경을 돌돌 말아 이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처음의 비틀거린 몸짓은 10초도 지나지 않아 자연스러워졌다.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며 자기 발로 테이블 가까이 왔다.

“나 알아?”

“...........”

“몰라?”

“네”

“너는 누구지?”

“전......... 양, 소, 영. 나이는.......”

“필요 없어. 지금은 누구지?”

“.................”

“머리가 아파?”

“아, 니, 요”

로봇. 아님 자동응답기. 기계적인 목소리로 하나하나 끊어내듯 대답을 한 여자다. 눈이 뭔가에 씌운 듯 하다. 풀어진 모양이 마약중독자가 새로운 마약을 애타게 찾는 것 같기도 하다.

“친군가?”

“네”

“친구도 부를까? 이리”

“네”

“아니 저 친군 기다리게 해놓았어. 네가 가기 전엔 떠나지 않을 거야. 갈 수 없단 말이 맞겠지”

“네”

“너를 자세히 보고 싶은데 괜찮겠어?”

“네”

“그럼 손을 내리고 쭉 허리를 펴. 나를 보며. 다리는 좀 벌리고”

소영이라고 이름을 댄 스커트는 망설이지도 않고 다리를 벌리며 섰다. 의자에 앉아서 봐도 키가 늘씬한 게 글래머였다. 얼굴도 수준급, 그러니까 잡지 화보 따위는 충분히 장식할 만 했다. 주위 다른 손님들이 뭔 일인가 관심을 보이며 머리를 돌렸다.

“앉아”

네, 란 말 외엔 모른 여자처럼 대답을 하며 끌어다 준 의자에 앉았다.

“반 목사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하하. 거기를 만져주라고 할까요, 아니면”

“아니, 아니. 됐네. 자넨 더 무서워졌다는 사실, 인정 하네”

“그래가지고 되겠어요?”

장난기 오른 얼굴로 봉구는 여자의 뺨을 만지며 계속 시켰다.

“혀!”

여자는 입을 조금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몸매가 날씬해서인지 분홍빛 혀도 척 감겨 보였다.

“이!”

다음엔 혀를 넣고 이를 보여줬다. 고른 치아가 하얗다.

“음....... 다음엔 뭐를 볼까? 거기를”

손가락이 하복부를 가리키자 여자는 부끄럼 없이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오리려 민망한 반 목사는 얼른 그를 제지했다.

“그만. 다른 데 가서 자네나 하고, 알았으니 그만 하게”

“하하하. 난 심심해서 더 하고 싶은데........, 좋아요. 그럼 이번엔 몰래”

목소리를 낮춘 봉구는 여자의 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머리를 끄덕인 여자는 스커트를 허벅지 아래로 내리고 대신 스커트 한쪽으로 손을 넣었다.

“이번엔 뭔가?”

“별 것 아닙니다. 얘, 향기 좀 맡겠다고 했더니 이러 네요”

향기란 게 다른 게 아닌 여자의 치부였다. 스커트 안에 손을 넣은 여자는 10초도 지나지 않아 가늘고 흰 검지를 봉구 코에 댔다.

“향기는 별로군. 너 걸레?”

“네”

“솔직해서 좋군. 가 봐. 여기를 돌아서는 순간 넌 모든 걸 잊는다. 알았지?”

마지막 대답 역시 네, 로 끝났다. 호기심에 반 목사는 계속 그 여자를 ?았다. 친구가 먼저 흠칫하더니 소영이란 여자를 보고는 뭐라 떠들었다. 그리고 자기들을 한번도 보지 않고 예전의 그 도도함으로 돌아갔다.



‘향기? 바로 이런 향기였을까?’ 춘식은 여섯 나신을 분부시게 바라봤다. 욕탕에 잠긴 나신이 분홍빛으로 물들자 정말 연꽃이 피어난 듯 했다. 손이 묶여 있어 불편했지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좋아하는 얼굴이다. 손을 풀어주었으면 했지만 남자는 한 여자 한 여자 끌어내 바디샴푸를 골고루 칠했다. 계곡을 건들 땐 깜짝 놀란 얼굴이었지만 남자 손에 그냥 맡기고 물로 씻어낼 때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어 보였다.

분홍빛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는 여인들을 다시 아까 그 자리로 끌어온 춘식은 일렬로 세워놓고 간이침대를 가리켰다. 의자는 이미 치워지고 구두가 놓인 테이블 앞으로 침대가 옮겨져 있다. 침대는 흔히 보는 익숙한 침대가 아니라 널찍하게 나무로 짠 침대다. 길이는 길지 않았지만 폭은 넓었다. 이번엔 또, 뭘? 하는 눈길들이다. 빨리 보내주었으면 하는 호소가 깃든 눈, 그러나 호소는 여지없이 깨지고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 말한 대로 여기 초대된 여러분들은 신성한 재료를 주어야 합니다. 아름답고 탄력 있고 팽팽한 피부는 분명 천상의 구두를 만들어 낼 겁니다.”

그때서야 비명은 더 커지고 발걸음을 뒤로 뺐다. 지금 듣고 있는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 표정이다. 눈물을 뿌리다 털퍼덕, 주저앉기도 했다. 아득한 미경은 스르르 몸이 무너졌다.

“그러기 전에 조금 더 준비를 해야 하니 자, 한 분씩 이리로.......”

맨 처음 팔목을 잡힌 여자는 제일 거칠게 반항한, 스물 중반의 늘씬한 여자다. 기력을 잃었는지 끄는 대로 침대에 누웠다. 묶인 손이 눌려 아파하는 얼굴이다. 침대 길이는 자로 미리 잰 것처럼 키에 딱 맞았다. 목 부분은 눕자마자 올가미로 고정됐다. 머리 부분은 움직일 수 없었고 발목과 손까지 침대의 고리 같은 것에 묶이자 허리와 다리, 손도 꼼짝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구두를 만들기 위핸 겉창과 안창이 필요해. 외부의 딱딱한 물질이나 흙, 시멘트, 콘크리트 따위로부터 보드라운 발을 보호하기 위해선 질기고 단단한 겉창이 있어야지. 그 겉창과 직접 맞닿은 발을 부드럽게 해주기 위한 안창도 필요하거든. 거기에 모양 좋은 띠를 만들거나 단단한 굽을 만들기 위한 질긴 가죽도 있어야 돼.”

건장한, 웃통을 걷어붙인 젊은 사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숨을 막히게 했다. 침대에 묶으면서 재갈은 풀어줬지만 지친 여자들은 힘없이 눈동자를 굴리고만 있다. 지금 이 사람이 무엇을 하려는지 미경은 물론 다른 여자들도 눈치 챘다. 그러나 어떻게? 심한 복통의 끝은 무기력증이 되었으며 공포심은 심장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나마 비명을 지른 스물 중반의 몸매 좋은 여자. 아직도 힘이 남았는지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더 크게 외칠 수 있게 해주지. 너부터 여기까진 겉창감이고 너와 넌 안창감이야. 미경인........”

침대에 묶이진 않았다. 창백해진 얼굴의 눈이 찢어지게 커졌다. 설마.........., 사람의 피부를........., 믿을 수 없었다. 쪼그려 앉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 소중한 보물처럼 의자에 앉혔다. 발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줬다.

“안심해. 미경은 제일 마지막, 프리지아를 신을 주인공이거든. 여기 얌전히 앉아 있어.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요정이 바로 너야.”

막을 수 없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진 넓적한 가죽막대가 바람을 가르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천상의 구두, 프리지아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깃들어 있어야 돼. 기쁨과 고통, 슬픔, 즐거움이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되는 법. 넌 고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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