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정기춘을 보내고 뒤돌아보는 강민우의 시선이 송나희에게 멈추었다. 강민우 또한 다소곳이 서 있는 송나희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부정하지 못한다. 카키색 바지와 점퍼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스포티하고도 신선한 건강미를 느끼게 하는 한편 새삼스럽게 여성스러운 모습을 발견한다. 술기운 탓인가! 마치 오래간만에 만난 연인을 대하는 감정이다.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 강민우가 도로변에 세워놓은 지프차로 다가서며 송나희에게 물었다.
“미스 송은 집이 어딥니까?”
“저는 방이동인데요.”
“아! 그럼, 같이 가다가 내려주면 되겠네.”
“어디신데요?”
“난, 하남! 잘 됐네요.”
“..........!”
강민우가 먼저 운전석에 올라가 시동을 걸고 송나희는 조수석으로 오른다. 지프차에 오르던 그녀가 손을 잘못 짚어 휘청거린다. 강민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 차에 오르게 한다. 그녀가 조수석에 앉으며 밝은 미소를 흘린다. 그들을 태운 지프차가 대로를 질주하며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같은 시간에 강민우의 집은 적막이 내려앉아 있다. 이북이 고향인 진씨 할머니는 문간방에서 잠들어 있다. 집안에는 거실의 작은 전구에서 흐르는 불빛만이 흐르고 있다. 이진아는 삐삐호출기를 들고 불도 켜지 않은 자신의 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금방 온다고 하던 강민우가 돌아오지 않음에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아울러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알지 못할 공포감과 외로움에 휩싸인다.
강민우가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것은 아닌지! 또 다시 괴한들에게 고통스러운 치욕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어둠 속을 응시하는 이진아의 눈빛이 살쾡이처럼 변한다.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녀만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자신을 학대하면서 느끼는 짜릿한 고통은 그녀 자신을 잃어버리게 한다.
거실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으로 그녀의 윤곽만이 보인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서 책상 서랍을 열어 검은 매직을 꺼낸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검은 매직으로 입술에 선이 굵은 하트를 그린다. 그녀에게 나부코의 선율이 환청으로 들려온다. 거울에 비친 이진아의 모습은 어둠 속의 피에로 같다.
그녀는 바라보는 거울 위에 걸린 벽시계의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환각에 젖는다. 입술에 검은 매직의 하트를 그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걸친 옷을 하나씩 벗어 던진다. 그녀는 유령처럼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 걸친 팬티까지 벗는다. 처녀티가 완연한 발가벗은 몸매가 조각처럼 거울 속에 들어난다.
거울 속의 매끈한 허벅지, 잔디처럼 뽀송한 음모, 아담한 젖가슴이 검은 묵화 같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바늘 소리가 뚝딱거리며 심장을 두들긴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매직으로 그녀는 자신의 젖가슴과 배꼽 주위에도 검은 하트를 그린다. 그녀의 귀에는 악령의 속삭임이 들린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고통을 즐겨라! 다른 세상을 느낄 것이니.”
이진아에게 들리는 환청이었다. 하얗게 질린 그녀는 들고 있던 매직을 팽개친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 거울 앞에서 뒷걸음을 한다. 그녀는 침대까지 뒷걸음하여 반듯이 눕는다. 그리고 허벅지 사이를 더듬는다. 천장을 올려다 바라보면서 뽀송하게 돋아난 음모를 쓸어내리고 음부를 쓰다듬는다. 몽롱한 눈빛으로 자신의 음부를 쓰다듬는 촉감을 음미한다.
그녀의 발가벗은 알몸이 꿈틀거리며 뒤틀린다. 언제인가 한번 그녀 스스로 환각 속을 헤매며 경험했던 행위였다. 이진아를 잘 알고 있다는 강민우도 모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속의 환각에 사로잡혀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행위였다. 강민우는 다만 일상생활에 적응해가고 있는 그녀가 대견스러워 친오빠처럼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잠실대교를 건너 운전을 하고 있는 강민우는 조수석의 송나희를 곁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피부의 얼굴이 상큼해보이고 군살 하나 없이 보이는 그녀의 숨은 매력을 느낀다. 송나희가 긴 머리카락을 풀어서 흔들더니 다시 질끈 묶는다. 강민우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이 우아하게도 보인다.
달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던 송나희가 강민우를 의식하고 돌아본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눈웃음을 짓는다. 마주친 그녀의 우수에 찬 눈빛은 강민우가 느끼는 그녀에 대한 이미지였다. 카키색 바지위로 들어나는 몸매. 군더더기 없이 미끈하게 뻗은 그녀의 다리에 시선이 간 강민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혼자 생활하고 있습니까?”
“네........! 선배님 말씀 낮추시라니까. 내가 거북해요.”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네, 그게 편할 거 같아요. 선배님은 가족과 같이 있는 건가요?”
“가족.......!? 살다보면 많은 것을 잃어버리죠. 새로운 가족을 만날 수도 있고.......”
“네!?”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송나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빙그레 웃음을 흘린 강민우가 말꼬리를 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희 씨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와 같은 성이네요.”
“아! 돌아가신 어머님도 송 씨시군요. 그럼 아버님과 같이 계신가요?”
“부모형제를 다 잃고 나한테는 가족이 없습니다.”
“부모 형제를 잃다니요!? 그럼 혼자라는 말예요. 무슨 말인지.......!”
송나희는 더욱 의아스러워 강민우를 빤히 쳐다봤다. 강민우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지프차가 사거리에 접어들었다. 적색 신호등을 받고 강민우가 브레이커를 밟으니 지프차가 출렁하고 멈추어 섰다. 씁쓸한 미소를 흘리는 강민우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쳤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추억이죠........”
“무슨 사고가 있었나요?”
“아버님을 여의고 남아있던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광주 사태가 일어나던 날, 참사를 당해서........”
강민우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 순간의 감정과 상황을 짧은 시간에 간단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세한 사연을 알 수 없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그의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송나희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네.......! 공연한 걸 물어 봤나 봐요.”
“괜찮아요. 모든 사람마다 간직하고 있는 사연이 있잖아요.”
“그럼, 지금은요.......!?”
“외사촌 여동생과 같이! 역시, 나처럼 고아가 되었기에 안타까워서.........”
“아! 왠지, 강 선배님에게 느끼는 분위기는 깊은 사연이 있어 보였더니.......”
“잘은 모르지만, 미스 송도 힘들었던 지난날들이 있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선배님을 처음 만나던 날이 생각나요.”
송나희는 강원도에서 잠복근무하면서 밤을 새워가며 강민우에게 자신의 얘기를 하던 날을 떠 올렸다. 길게 한숨을 들이킨 송나희가 강민우를 힐끔 쳐다봤다. 강민우도 동질감을 느끼는 그녀의 눈빛을 의식하고 마주 쳐다본다. 문득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좌석의 시트 사이에 끼어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보았다.
푸른 신호등이 들어오고 강민우는 지프차를 출발시켰다. 송나희는 머리카락이 시트 사이에 끼인 것도 모르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좌석시트에 낀 송나희의 머리카락에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빼내주어야 하는지 망설인다. 여자의 머리를 만지는 것도 실례일수 있다.
“머리카락이.......!?”
“네.......!?”
송나희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는 줄 알고 머리를 쓰다듬기만 한다. 잠시 길가에 지프차를 세운 강민우의 손길이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다가오는 강민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커지고 당혹스러워한다. 그가 키스를 하려고 다가오는 것으로 느낀 그녀는 가슴이 콩닥거린다. 마주 닿을 듯이 입술이 가까워지고 강민우의 뻗친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려고 한다.
“조금만 머리를 들어 봐요.”
“서, 선배님! 난 아직 준비가.......”
“머리카락이 끼어서.......”
“.........!?”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를 흘리며 눈을 감았던 송나희는 무안하였다. 강민우가 팔을 뻗쳐 좌석시트를 벌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빼내주었다. 호흡을 멈추었던 그녀가 강민우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의 착각에 황당함을 느낀다. 얼굴을 붉힌 그녀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녀는 맥박이 뛰는 가슴을 억누른다.
만약 강민우가 정말 입맞춤이라도 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했을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사랑에 배반당하고 다시는 남자에게 정을 주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그녀이다. 그런데 강민우에 대한 감정은 다짐했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차창 밖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이진아는 강민우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다.
“방이동 다 왔는데. 집이 어디죠?”
“아! 저 여기서 내리면 돼요.”
정신이 번쩍 들은 송나희는 지프차 문을 열고 일어선다. 차에서 내린 그녀가 문을 닫으며 강민우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그리고 못다 한 말이 잇는 것처럼 주춤거리며 손을 흔든다. 강민우는 잠시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본다. 손을 흔들고 있는 송나희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준다. 강민우는 골목길의 가로등 밑을 지나 송나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었다.
환청 속에 빠져 있던 이진아는 발가벗은 알몸으로 넋을 잃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문득 정적이 깔린 고요함 속에 멀리서부터 지프차의 둔탁한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벌거벗은 몸에 검은 매직으로 굵게 그려진 하트를 들여다본다.
휴지로 입술에 그려진 검은 하트를 지우다가 전등 스위치를 끄고 벗어던진 옷을 집어 들었다. 발가벗은 상태로 황급히 세면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녀는 물수건으로 몸에 그려진 검은 매직을 문질러 닦아낸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입술에 그려진 검은 하트를 박박 문질러 지운다. 이진아는 들고 들어온 속내의와 반바지, 티셔츠를 차례대로 걸쳐 입고 세면장을 나선다.
그녀는 어두운 거실의 진열장 뒤에 웅크리고 몸을 숨긴다. 지프차의 엔진소리가 집 앞에 와서 머물고 곧 이어 현관문이 열린다. 강민우가 거실로 들어서서 전등 스위치를 켠다. 강민우는 적막이 내려앉은 거실을 한동안 둘러본다. 그는 진열장 틈바구니에 웅크리고 있는 이진아를 발견한다. 그녀는 강민우가 들어왔어도 고개를 파묻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내려다보고 있던 강민우가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또, 여기서 자는 구나!”
“........”
이진아는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다. 강민우는 그녀를 안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녀를 안은 채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는다. 스위치를 누르니 전류 음과 함께 어둠 속에 갇혔던 방안에 전등불빛이 쏟아져 내린다.
강민우가 이진아를 침대위에 눕히려고 하는 순간, 그녀가 그의 가슴을 밀치며 마주하고 우뚝 선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리고 강민우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들긴다.
“뭐야!? 약속도 안 지키고.......”
“미안해. 일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
“싫어! 뭐야.......! 술 냄새. 술 마시느라고 늦었지?”
“기다리다 잠든 줄 알았어. 미안........!”
이진아의 노여움을 풀어 주려고 강민우가 다가가 안으려한다. 그러나 강민우의 손을 뿌리치려다가 넘어진 그녀가 벌렁 누워서 발길질을 한다. 그녀는 다가서는 강민우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씩씩거린다.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자국이 번진다. 강민우가 간신히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인다.
“우리 진아! 기다리기 힘들었구나!”
“미워! 무서워서 혼났단 말이야! 만지지마. 싫어.”
이진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투정을 부리며 악을 쓴다. 강민우는 겨우 이진아를 달래서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어린아이 재우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벽을 향해 누워서 빤히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가 사르르 눈을 감는다.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흘리는 그녀에게 모포를 덮어주고 강민우는 일어섰다. 거울 앞에 떨어진 검은 매직과 휴지를 집어든 강민우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방의 전등 스위치를 내린 그가 이진아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간다.
태양이 뜨거운 열기로 대지를 달구기 시작하는 여름의 일요일 오후다. 거실에 소파에 앉았던 강민우는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젖힌다.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열어젖힌 창문의 커튼을 흔든다. 흔들리는 커튼을 묶은 그는 다시 소파로 가서 앉는다. 현관문을 열리고 이진아가 땀방울을 흘리며 거실로 들어온다. 뒤뜰에서 태권도 수련을 하고 들어온 이진아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오디오의 스위치를 누른다. 오디오에서는 오페라 나부코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이진아가 소파로 다가와 탁자 위를 내려다본다. 탁자위에는 강민우가 습관처럼 정리하는 노트와 수첩이 놓여있다. 최태웅 일당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노트와 수첩을 정리하면 다시 컴퓨터 파일에 저장하는 것이 그의 습관 된 일상생활이다. 세면장으로 들어가는 이진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강민우는 정리된 노트와 수첩을 들고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강민우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스위치를 켠다. 그는 컴퓨터가 부팅되기를 기다렸다가 노트와 수첩에 정리된 정보를 입력한다. 샤워를 하고나온 이진아가 안방으로 들어온다. 등 뒤에서 컴퓨터 파일을 작성하는 것을 들여다보는 이진아가 강민우의 목덜미를 팔로 감싸고 매달린다.
“파일 암호 가르쳐줘!”
“암호........!?”
강민우는 이진아에게서 흘러나오는 싱그러운 비누 냄새와 함께 풋풋한 처녀의 체취를 느낀다. 강민우는 만약을 대비하여 비밀번호를 부여한 파일로 변경 저장했었다. 그녀가 최태웅 일당에 관한 정보에 관심이 있는 것을 강민우도 잘 안다.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시작하였지만 가격이 비쌌다. 강민우는 이진아에게 컴퓨터를 구입해주었다.
이진아의 방에도 그녀의 컴퓨터가 있다. 그녀는 강민우가 작성하고 있는 최태웅 일당에 관한 정보를 자신의 컴퓨터에 기록 저장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그녀가 제 나름대로 요점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강민우의 파일을 검색하려다가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다. 강민우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매달린 이진아가 다시 응석을 한다.
“가르쳐 달라고!”
“JIN 80518!”
강민우는 그녀가 알아도 될 것이고, 어쩌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가르쳐준다. 비밀번호는 광주사태가 일어난 날이고 그녀를 만난 날이기도 하다. 짓궂은 개구쟁이처럼 강민우의 양쪽 귀를 붙잡고 흔들던 그녀가 방을 나갔다. 파일을 검색하던 강민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용이 있다. 사건이 있던 날, 지하실에서 최태웅과 남경식의 대화한 내용이었다.----------------
“미스 송은 집이 어딥니까?”
“저는 방이동인데요.”
“아! 그럼, 같이 가다가 내려주면 되겠네.”
“어디신데요?”
“난, 하남! 잘 됐네요.”
“..........!”
강민우가 먼저 운전석에 올라가 시동을 걸고 송나희는 조수석으로 오른다. 지프차에 오르던 그녀가 손을 잘못 짚어 휘청거린다. 강민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 차에 오르게 한다. 그녀가 조수석에 앉으며 밝은 미소를 흘린다. 그들을 태운 지프차가 대로를 질주하며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같은 시간에 강민우의 집은 적막이 내려앉아 있다. 이북이 고향인 진씨 할머니는 문간방에서 잠들어 있다. 집안에는 거실의 작은 전구에서 흐르는 불빛만이 흐르고 있다. 이진아는 삐삐호출기를 들고 불도 켜지 않은 자신의 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금방 온다고 하던 강민우가 돌아오지 않음에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아울러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알지 못할 공포감과 외로움에 휩싸인다.
강민우가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것은 아닌지! 또 다시 괴한들에게 고통스러운 치욕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어둠 속을 응시하는 이진아의 눈빛이 살쾡이처럼 변한다.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녀만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자신을 학대하면서 느끼는 짜릿한 고통은 그녀 자신을 잃어버리게 한다.
거실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으로 그녀의 윤곽만이 보인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서 책상 서랍을 열어 검은 매직을 꺼낸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검은 매직으로 입술에 선이 굵은 하트를 그린다. 그녀에게 나부코의 선율이 환청으로 들려온다. 거울에 비친 이진아의 모습은 어둠 속의 피에로 같다.
그녀는 바라보는 거울 위에 걸린 벽시계의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환각에 젖는다. 입술에 검은 매직의 하트를 그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걸친 옷을 하나씩 벗어 던진다. 그녀는 유령처럼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 걸친 팬티까지 벗는다. 처녀티가 완연한 발가벗은 몸매가 조각처럼 거울 속에 들어난다.
거울 속의 매끈한 허벅지, 잔디처럼 뽀송한 음모, 아담한 젖가슴이 검은 묵화 같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바늘 소리가 뚝딱거리며 심장을 두들긴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매직으로 그녀는 자신의 젖가슴과 배꼽 주위에도 검은 하트를 그린다. 그녀의 귀에는 악령의 속삭임이 들린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고통을 즐겨라! 다른 세상을 느낄 것이니.”
이진아에게 들리는 환청이었다. 하얗게 질린 그녀는 들고 있던 매직을 팽개친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 거울 앞에서 뒷걸음을 한다. 그녀는 침대까지 뒷걸음하여 반듯이 눕는다. 그리고 허벅지 사이를 더듬는다. 천장을 올려다 바라보면서 뽀송하게 돋아난 음모를 쓸어내리고 음부를 쓰다듬는다. 몽롱한 눈빛으로 자신의 음부를 쓰다듬는 촉감을 음미한다.
그녀의 발가벗은 알몸이 꿈틀거리며 뒤틀린다. 언제인가 한번 그녀 스스로 환각 속을 헤매며 경험했던 행위였다. 이진아를 잘 알고 있다는 강민우도 모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속의 환각에 사로잡혀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행위였다. 강민우는 다만 일상생활에 적응해가고 있는 그녀가 대견스러워 친오빠처럼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잠실대교를 건너 운전을 하고 있는 강민우는 조수석의 송나희를 곁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피부의 얼굴이 상큼해보이고 군살 하나 없이 보이는 그녀의 숨은 매력을 느낀다. 송나희가 긴 머리카락을 풀어서 흔들더니 다시 질끈 묶는다. 강민우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이 우아하게도 보인다.
달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던 송나희가 강민우를 의식하고 돌아본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눈웃음을 짓는다. 마주친 그녀의 우수에 찬 눈빛은 강민우가 느끼는 그녀에 대한 이미지였다. 카키색 바지위로 들어나는 몸매. 군더더기 없이 미끈하게 뻗은 그녀의 다리에 시선이 간 강민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혼자 생활하고 있습니까?”
“네........! 선배님 말씀 낮추시라니까. 내가 거북해요.”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네, 그게 편할 거 같아요. 선배님은 가족과 같이 있는 건가요?”
“가족.......!? 살다보면 많은 것을 잃어버리죠. 새로운 가족을 만날 수도 있고.......”
“네!?”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송나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빙그레 웃음을 흘린 강민우가 말꼬리를 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희 씨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와 같은 성이네요.”
“아! 돌아가신 어머님도 송 씨시군요. 그럼 아버님과 같이 계신가요?”
“부모형제를 다 잃고 나한테는 가족이 없습니다.”
“부모 형제를 잃다니요!? 그럼 혼자라는 말예요. 무슨 말인지.......!”
송나희는 더욱 의아스러워 강민우를 빤히 쳐다봤다. 강민우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지프차가 사거리에 접어들었다. 적색 신호등을 받고 강민우가 브레이커를 밟으니 지프차가 출렁하고 멈추어 섰다. 씁쓸한 미소를 흘리는 강민우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쳤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추억이죠........”
“무슨 사고가 있었나요?”
“아버님을 여의고 남아있던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광주 사태가 일어나던 날, 참사를 당해서........”
강민우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 순간의 감정과 상황을 짧은 시간에 간단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세한 사연을 알 수 없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그의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송나희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네.......! 공연한 걸 물어 봤나 봐요.”
“괜찮아요. 모든 사람마다 간직하고 있는 사연이 있잖아요.”
“그럼, 지금은요.......!?”
“외사촌 여동생과 같이! 역시, 나처럼 고아가 되었기에 안타까워서.........”
“아! 왠지, 강 선배님에게 느끼는 분위기는 깊은 사연이 있어 보였더니.......”
“잘은 모르지만, 미스 송도 힘들었던 지난날들이 있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선배님을 처음 만나던 날이 생각나요.”
송나희는 강원도에서 잠복근무하면서 밤을 새워가며 강민우에게 자신의 얘기를 하던 날을 떠 올렸다. 길게 한숨을 들이킨 송나희가 강민우를 힐끔 쳐다봤다. 강민우도 동질감을 느끼는 그녀의 눈빛을 의식하고 마주 쳐다본다. 문득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좌석의 시트 사이에 끼어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보았다.
푸른 신호등이 들어오고 강민우는 지프차를 출발시켰다. 송나희는 머리카락이 시트 사이에 끼인 것도 모르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좌석시트에 낀 송나희의 머리카락에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빼내주어야 하는지 망설인다. 여자의 머리를 만지는 것도 실례일수 있다.
“머리카락이.......!?”
“네.......!?”
송나희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는 줄 알고 머리를 쓰다듬기만 한다. 잠시 길가에 지프차를 세운 강민우의 손길이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다가오는 강민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커지고 당혹스러워한다. 그가 키스를 하려고 다가오는 것으로 느낀 그녀는 가슴이 콩닥거린다. 마주 닿을 듯이 입술이 가까워지고 강민우의 뻗친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려고 한다.
“조금만 머리를 들어 봐요.”
“서, 선배님! 난 아직 준비가.......”
“머리카락이 끼어서.......”
“.........!?”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를 흘리며 눈을 감았던 송나희는 무안하였다. 강민우가 팔을 뻗쳐 좌석시트를 벌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빼내주었다. 호흡을 멈추었던 그녀가 강민우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의 착각에 황당함을 느낀다. 얼굴을 붉힌 그녀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녀는 맥박이 뛰는 가슴을 억누른다.
만약 강민우가 정말 입맞춤이라도 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했을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사랑에 배반당하고 다시는 남자에게 정을 주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그녀이다. 그런데 강민우에 대한 감정은 다짐했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차창 밖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이진아는 강민우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다.
“방이동 다 왔는데. 집이 어디죠?”
“아! 저 여기서 내리면 돼요.”
정신이 번쩍 들은 송나희는 지프차 문을 열고 일어선다. 차에서 내린 그녀가 문을 닫으며 강민우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그리고 못다 한 말이 잇는 것처럼 주춤거리며 손을 흔든다. 강민우는 잠시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본다. 손을 흔들고 있는 송나희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준다. 강민우는 골목길의 가로등 밑을 지나 송나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었다.
환청 속에 빠져 있던 이진아는 발가벗은 알몸으로 넋을 잃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문득 정적이 깔린 고요함 속에 멀리서부터 지프차의 둔탁한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벌거벗은 몸에 검은 매직으로 굵게 그려진 하트를 들여다본다.
휴지로 입술에 그려진 검은 하트를 지우다가 전등 스위치를 끄고 벗어던진 옷을 집어 들었다. 발가벗은 상태로 황급히 세면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녀는 물수건으로 몸에 그려진 검은 매직을 문질러 닦아낸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입술에 그려진 검은 하트를 박박 문질러 지운다. 이진아는 들고 들어온 속내의와 반바지, 티셔츠를 차례대로 걸쳐 입고 세면장을 나선다.
그녀는 어두운 거실의 진열장 뒤에 웅크리고 몸을 숨긴다. 지프차의 엔진소리가 집 앞에 와서 머물고 곧 이어 현관문이 열린다. 강민우가 거실로 들어서서 전등 스위치를 켠다. 강민우는 적막이 내려앉은 거실을 한동안 둘러본다. 그는 진열장 틈바구니에 웅크리고 있는 이진아를 발견한다. 그녀는 강민우가 들어왔어도 고개를 파묻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내려다보고 있던 강민우가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또, 여기서 자는 구나!”
“........”
이진아는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다. 강민우는 그녀를 안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녀를 안은 채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는다. 스위치를 누르니 전류 음과 함께 어둠 속에 갇혔던 방안에 전등불빛이 쏟아져 내린다.
강민우가 이진아를 침대위에 눕히려고 하는 순간, 그녀가 그의 가슴을 밀치며 마주하고 우뚝 선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리고 강민우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들긴다.
“뭐야!? 약속도 안 지키고.......”
“미안해. 일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
“싫어! 뭐야.......! 술 냄새. 술 마시느라고 늦었지?”
“기다리다 잠든 줄 알았어. 미안........!”
이진아의 노여움을 풀어 주려고 강민우가 다가가 안으려한다. 그러나 강민우의 손을 뿌리치려다가 넘어진 그녀가 벌렁 누워서 발길질을 한다. 그녀는 다가서는 강민우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씩씩거린다.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자국이 번진다. 강민우가 간신히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인다.
“우리 진아! 기다리기 힘들었구나!”
“미워! 무서워서 혼났단 말이야! 만지지마. 싫어.”
이진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투정을 부리며 악을 쓴다. 강민우는 겨우 이진아를 달래서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어린아이 재우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벽을 향해 누워서 빤히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가 사르르 눈을 감는다.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흘리는 그녀에게 모포를 덮어주고 강민우는 일어섰다. 거울 앞에 떨어진 검은 매직과 휴지를 집어든 강민우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방의 전등 스위치를 내린 그가 이진아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간다.
태양이 뜨거운 열기로 대지를 달구기 시작하는 여름의 일요일 오후다. 거실에 소파에 앉았던 강민우는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젖힌다.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열어젖힌 창문의 커튼을 흔든다. 흔들리는 커튼을 묶은 그는 다시 소파로 가서 앉는다. 현관문을 열리고 이진아가 땀방울을 흘리며 거실로 들어온다. 뒤뜰에서 태권도 수련을 하고 들어온 이진아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오디오의 스위치를 누른다. 오디오에서는 오페라 나부코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이진아가 소파로 다가와 탁자 위를 내려다본다. 탁자위에는 강민우가 습관처럼 정리하는 노트와 수첩이 놓여있다. 최태웅 일당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노트와 수첩을 정리하면 다시 컴퓨터 파일에 저장하는 것이 그의 습관 된 일상생활이다. 세면장으로 들어가는 이진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강민우는 정리된 노트와 수첩을 들고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강민우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스위치를 켠다. 그는 컴퓨터가 부팅되기를 기다렸다가 노트와 수첩에 정리된 정보를 입력한다. 샤워를 하고나온 이진아가 안방으로 들어온다. 등 뒤에서 컴퓨터 파일을 작성하는 것을 들여다보는 이진아가 강민우의 목덜미를 팔로 감싸고 매달린다.
“파일 암호 가르쳐줘!”
“암호........!?”
강민우는 이진아에게서 흘러나오는 싱그러운 비누 냄새와 함께 풋풋한 처녀의 체취를 느낀다. 강민우는 만약을 대비하여 비밀번호를 부여한 파일로 변경 저장했었다. 그녀가 최태웅 일당에 관한 정보에 관심이 있는 것을 강민우도 잘 안다.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시작하였지만 가격이 비쌌다. 강민우는 이진아에게 컴퓨터를 구입해주었다.
이진아의 방에도 그녀의 컴퓨터가 있다. 그녀는 강민우가 작성하고 있는 최태웅 일당에 관한 정보를 자신의 컴퓨터에 기록 저장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그녀가 제 나름대로 요점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강민우의 파일을 검색하려다가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다. 강민우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매달린 이진아가 다시 응석을 한다.
“가르쳐 달라고!”
“JIN 80518!”
강민우는 그녀가 알아도 될 것이고, 어쩌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가르쳐준다. 비밀번호는 광주사태가 일어난 날이고 그녀를 만난 날이기도 하다. 짓궂은 개구쟁이처럼 강민우의 양쪽 귀를 붙잡고 흔들던 그녀가 방을 나갔다. 파일을 검색하던 강민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용이 있다. 사건이 있던 날, 지하실에서 최태웅과 남경식의 대화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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