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종로 횟집에서 송나희와 식사를 마친 강민우는 잠복근무 중이었다. 쇼윈도의 불빛이 찬란한 거리를 걷는 그는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송나희를 힐끔 쳐다본다. 순한 사슴 같은 표정의 그녀에게 수심이 깃들어 보인다. 강민우는 뒤에서 쫓아오는 남자들에게 신경이 쓰여 그녀가 근심하고 있는 것을 물어 보지 못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그녀를 볼수록 묘한 신비감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 화장도 하지 않고 옷차림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뽀얀 피부의 목선에서 아릿한 슬픔과 정겨움이 동시에 들어나 보인다. 그러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첫사랑에 대한 애증을 느끼고 있는 것 일가, 아니면 안기부 직원이라는 직업에 후회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희씨!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야?”
“아뇨! 다만 ‘비트’ 팀에 선발 된 것이 두려워요.”
“누구나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면 긴장되기도 하지.”
“그럴지도 모르지요. 때로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용기를 가져. 언젠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래야겠지만.......!?”
언짢은 표정으로 말을 흘린 송나희는 힐끔거리며 뒤를 살펴본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식사를 하고 음식점을 나오면서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뒤따르는 것 같아서였다. 그녀가 말을 중단하고 다시 뒤를 돌아보려는데 강민우가 소맷자락을 잡아당긴다.
“뒤 돌아보지 마.”
“민우씨도 느꼈어요?”
“음식점 안에서부터.”
“누구지요?”
“그냥 계속 걸어가.”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를 흘린 강민우는 예리한 눈빛을 하고 슬며시 겨드랑이 밑을 더듬었다. 겨드랑이에 차고 있는 권총자루를 확인하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인파 속에는 그들을 미행하는 사내들이 있었다. 강민우와 송나희가 빠른 걸음을 옮기면 인파속에 몸을 숨긴 사내들도 빠르게 쫓아온다. 강민우는 다시 느슨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을 쫓는 사내들도 보조를 맞추어 따라오고 있었다.
“움직여!”
강민우가 송나희의 손목을 움켜쥐고 도로변의 골목 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인적이 없는 어두운 골목이었다. 골목을 뛰어가 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어귀에서 건물 벽에 그들은 몸을 숨겼다.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사내들의 구둣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벽에 기댄 강민우는 골목 안을 살폈다. 쫓아오고 있는 사내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뒤편에는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건물이 보였다.
송나희는 두려운 눈빛으로 강민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든지 사내들을 대적할 수 있는 강임함이 들어내 보인다. 강민우가 다시 송나희의 손목을 낚아채고 빠른 몸놀림을 한다. 그녀는 뒤편의 공사 중인 건물로 들어서는 강민우를 따라 달려 들어갔다. 어두운 호텔 안으로 들어선 강민우는 프런트의 분수대를 가로 질러 층계를 뛰어 올라가기 시작한다.
송나희도 날렵한 몸놀림으로 강민우를 따라 층계를 올라간다. 층계를 오른 그들은 아직 출입문이 설치되지 않은 공간으로 들어서 귀를 기울인다. 일층 프런트로 들어오는 발자국소리들이 이층까지 울려 퍼진다. 층계를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강민우가 다시 뻥 뚫린 복도를 달려간다. 뒤이어 송나희도 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강민우의 뒤를 따른다.
강민우가 바라보는 복도 끝의 어둠속에서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그림자가 나타난다. 복도 끝에도 층계가 있었던 것이다. 층계를 올라오는 두 개의 그림자였다. 빠르게 다가온 그림자는 사내들의 모습이었다. 사내들은 자신들의 몸이 흉기인양 쏜살같이 달려와 강민우를 향해 공격해 온다.
“당신들 누구야?”
“.........”
사내들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오직 강민우의 목숨을 끊을 태세로 달려든다. 한사내의 주먹이 강민우의 턱밑까지 다가왔다. 강민우는 날렵하게 몸을 비틀며 사내의 손목을 낚아챘다. 강민우는 언제나 상대를 먼저 제압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낚아챈 손목을 비틀어 꺾은 강민우는 사내의 하복부에 있는 급소를 올려 찼다.
마치 나무가 꺾이는 소리가 나며 사내가 나뒹구는 동시에 다른 사내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다가선다. 바람소리를 가르며 내려치는 파이프를 피한 강민우는 벽을 차고 점프를 하며 바닥을 한 바퀴 돌았다. 순간적으로 뒤에서 들리는 소리 방향으로 강민우의 시선이 꽂혔다.
건물 중앙의 층계로 올라온 사내들이 송나희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녀도 한때는 특공무술로 단련된 공격요원이었다. 송나희는 뒤에서 달려드는 사내를 피해 한 걸음 물러섰다가 앞으로 대닫으면서 상대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그리고 한 바퀴 몸을 돌려 다른 사내의 턱을 올려 찼다.
쇠파이프를 피한 강민우가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다가서는 사내의 등을 차고 넘어섰다. 발길에 차여 균형을 잃은 사내는 강민우에게 목덜미를 붙잡혔다. 강민우는 사내의 목을 팔로 감고 힘을 주었다. 숨을 쉬지 못하고 사내는 컥컥 거리며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강민우가 사내의 머리를 잡고 돌리니 신음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사내를 쓰러트린 강민우가 뒤돌아보았다. 송나희도 한 사내를 쓰러트리고 다른 사내를 상대하고 있었다. 강민우가 뒤돌아보는 순간 사내에게 잡힌 그녀의 몸이 벽에 처박히고 있었다. 입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송나희에게 사내가 다가선다. 그녀에게 다가서던 사내가 강민우의 이단 발차기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간 공간을 가르는 총소리와 함께 총알이 강민우의 귀밑을 스쳐 지나갔다.
강민우가 재빨리 송나희의 손목을 당겨 비어있는 사무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어둠 속의 층계 모서리에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다시 총알이 날아와 벽에 틀어박혔다. 총알이 박힌 벽에서 먼지가 일어나고 깨진 시멘트가 바닥에 떨어진다. 강민우는 겨드랑이에 찬 권총을 뽑아 들었다.
층계모서리에 몸을 숨긴 그림자와 강민우의 권총에서 불이 뿜어져 나간다. 총성은 빈공간의 건물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쓰러졌다가 다시 달려드는 사내가 송나희의 발끝에 채여 벽을 받고 쓰러진다. 강민우가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던 층계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상대가 총알에 적중 당한 것을 강민우가 추측했다. 잠시 총성이 멈추고 층계를 뛰어 내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강민우는 번개처럼 층계를 향해 달려갔다. 층계를 내려온 강민우의 시야에 프런트의 분수대를 뛰어넘어가는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림자를 향해 강민우는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분수대를 뛰어 넘던 그림자가 권총을 떨어트리고 비틀거리며 쓸어졌다. 강민우가 빠른 걸음으로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다리와 팔에 총알을 맞고 쓰러진 그림자의 사내는 떨어트린 권총을 잡으려고 버둥거렸다. 층계를 내려온 송나희도 다가왔다. 사내를 내려다보던 강민우가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넌 정기춘.......!? 왜, 너지?”
“어차피 안기부를 그만, 그만 두려고 했다. 아무 말도 묻지, 묻지 마라.”
고통으로 일그러진 정기춘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표정이었다. 송나희는 너무나 황당한 사실에 넋을 잃은 표정이다. 강민우는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으나 너무나 잘못된 현실을 느끼며 한 숨을 내쉬었다. 총소리를 듣고 경찰과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강민우가 햄 무전기를 들고 ‘비트’ 상황실의 단축 버튼을 눌렀다. 담당 요원이 전희재 과장을 바꾸어 주었다.
“비트 하나, 무슨 일인가?”
“송나희 요원과 근무 중에 피습을 당했습니다.”
“피습.......!?”
“네. 상대는 모두 다섯 명, 처치했습니다만........”
벌어진 상황을 보고한 강민우가 이맛살을 찡그리며 전 과장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놈들 중에 전산실의 정기춘이 가담됐는데, 어떡할까요?”
“근처의 스타호텔에 잠복해 있는 C팀을 보내서 모두 상황실로 이송하도록 할 것이다.”
상황 보고를 끝내는 강민우에게 경찰이 다가섰다. 그를 대신해서 송나희가 경찰에게 신분증을 내보였다.
“석관동 수사요원입니다. 사람들을 물려주십시오.”
“아! 네.”
다가섰던 경찰이 경례를 하고 돌아서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호각을 불며 외쳤다.
“다들 돌아가시고, 모두들 물러서십시오.”
곧이어 잠복해 있던 안기부 요원들이 몰려 왔다. 현장에 쓰러졌던 사내들과 정기춘은 요원들에게 체포되었고 응급조치를 받기위해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강민우가 송나희의 입가에 흘린 피를 닦아주려고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손수건을 받아든 송나희는 가늘게 떨리는 눈빛으로 강민우를 바라본다.
날이 밝고 송나희와 강민우는 종로에 있는 호텔주변에 잠복하고 있었다. 호텔 프런트를 살피던 강민우가 호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송나희도 뒤따라 호텔 입구를 나섰다. 앨리스 킴이 투숙했던 호텔 주변에는 ‘비트’ 팀원들이 요소마다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다.
호텔 입구 옆의 화단에 다가선 강민우는 예리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조금은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송나희가 화단을 바라보는 강민우에게 다가섰다. 그녀를 힐끗 쳐다본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 아름다운 꽃이여!”
“크 큭~! 지금 계절에 무슨 꽃이 있어요.”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송나희는 웃음을 흘렸다. 강민우는 장난스러운 소년처럼 짓궂은 표정을 한다. 송나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하면서 익살스럽게 노랫가락을 흘렸다.
“꽃 중에 꽃........”
“무궁화 꽃노래를 하는 거예요?”
“아니,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
“화단에 꽃이 안 보이는데.......!? 그게 무슨 꽃인데요?”
“내 옆에 있잖아.”
“네.......!?”
강민우의 말에 송나희는 어리둥절했다. 아무리 보아도 화단에는 헐벗은 나무뿐이고 꽃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친 강민우가 얼굴을 묽히며 빙그레 웃었다. 그때서야 송나희는 강민우의 농담석인 말뜻을 알아채고 얼굴을 붉힌다.
“놀리는 거죠? 민우씨도 그런 농담해요?”
“정말인데.”
“피 잇~! 어울리지 않아요.”
“하하~! 정말인데, 몰라주는군.”
얼굴을 붉힌 송나희는 강민우에게 눈을 하얗게 흘겼다. 강민우가 갖고 있는 호출기의 착신 신호음이 들렸다. 작전지시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송나희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호출기의 액정 화면을 들여다 본 강민우가 망설였다. 이진아에게서 걸려온 메시지로 빨리 전화를 해달라는 문자와 전화번호였다.
요즘 들어 자주 집을 비우는 강민우였다. 아침에도 이진아의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집을 나왔었다. 강민우는 휴대용 무전기를 이용해 이진아가 보내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진아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오빠! 어디야?”
“왜? 근무 중인데!”
“나, 어떡해? 지금 친구하고 참고서 사려고 동대문에 와 있는데, 신용카드를 잊어 버렸어.”
“에이~! 조심하지.”
“아침에 말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그냥 나갔잖아. 어떡하지........!?”
“음! 그러면 보신각 앞으로 올래?”
“알았어. 금방 갈게.”
강민우는 호텔 옆에 보이는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송나희도 강민우를 따라 은행 안으로 들어섰다. 은행 여직원에게 다가간 강민우는 신용카드 분실 신고를 하고 다시 발급받았다. 은행을 나와서 보신각 앞에서 이진아를 기다리는 강민우의 곁에서 송나희도 서서 있었다. 친구와 함께 지하철 입구를 나서는 이진아의 모습이 보였다.
달음박질을 하여 달려온 이진아가 해맑은 표정으로 가쁜 숨을 내쉰다. 그리고 서슴없이 강민우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린다. 그뿐 만 아니라, 강민우의 뺨과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뒤쳐져서 바라보고 있던 송나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민우가 분명히 고아가 된 외사촌 여동생을 데리고 있다고 했다.
누가 봐도 외사촌 여동생이라고 생각하기는 도가 지나친 스킨십이었다. 송나희는 뜻밖의 광경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어린아이도 아니고 숙성한 여고생의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송나희에게 강민우가 이진아를 데리고 다가왔다. 그리고 서로를 소개 했다.
“진아야! 인사해. 오빠하고 같이 근무하는 언니야.”
“이진아예요.”
“아........! 그러니!? 반갑다. 나, 송나희 언니야. 앞으로 자주 보게 되면 좋겠다.”
“내가 언닐 왜 자주 봐요?”
이진아의 당돌한 말에 송나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진아와 송나희의 마주친 눈빛에서 순간적으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강민우에게 스킨십을 하던 발랄한 모습과는 달리 송나희를 바라보는 이진아의 눈빛이 싸늘해진다.
이진아는 한 번도 강민우가 여자와 나란히 있는 광경을 본적이 없었다. 그녀 자신이 강민우에게는 단 하나의 여동생이고, 여자인줄로만 알았다. 그렇다고 오빠를 남자라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처음 보는 여자의 모습에 질투심이 일어났다. 자신보다 나이는 들었으나, 청순한 미모와 날렵한 몸매를 지닌 송나희에게 적개심을 느꼈다. 오빠와 같이 근무한다는 그녀에게 공연히 질투를 느꼈다.
송나희는 처음부터 이진아의 스킨십이 얹잖아 보였어도 강민우를 생각해서 너그럽게 받아 주려고 했었다. 생각보다 남다르게 예쁜 미모를 지닌 이진아가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라보는 눈빛은 독살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공격적인 말투를 듣고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강민우를 봐서라도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진아의 말을 곰곰이 삭이다가 미소를 띠어 보였다.
“아! 진아가 정말 예뻐서 하는 말이야.”
미소를 띠는 송나희의 말에 이진아는 역습을 당한 것처럼 분해서 날카롭게 노려본다. 강민우는 이진아의 돌발적인 말투에 익숙해 있었다. 이진아와 송나희를 번갈아 바라보던 강민우가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느끼고 이진아의 앞을 막고 나섰다. 그리고 새로 발급한 신용카드를 이진아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자! 진아야! 얼른 가서 참고서 구입해. 카드 잊어버리지 말고.”
카드를 받아든 이진아가 뽀로통한 모습으로 돌아섰다. 강민우가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려는 이진아를 붙잡았다.
“언니한테 인사하고 가야지.”
“안녕히 계세요.”
주춤거리던 이진아는 마지못해 송나희를 향해 돌아선다. 그러나 눈도 마주치지 않고 머리를 꾸벅거리고는 지하철 입구를 향해 뛰어간다.
순간 송나희는 오래전에 강민우의 어머니도 자신과 같은 송씨 성이라고 했었던 기억을 떠 올렸다. 그런데 외사촌 동생이 자신의 이름을 이진아라고 했다. 어머니와 성씨가 다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어머니 여자 형제의 딸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나희는 공연한 오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강민우를 바라본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이진아에 대한 질투가 아닌가하고 얼굴을 붉히면서도 마음속에는 묘한 응어리가 남아 있었다. 난처해진 강민우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혼자 자라다 보니 버릇이 없어서.”
“여동생을 여자로 사랑하세요?”
송나희는 발끈해서 질문을 해놓고 이내 후회한다.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온 것이다. 같은 여자로서 질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격지심이 들어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민우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아니에요. 그냥 해본 말.......”
되묻고 있는 강민우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 내심 뜨끔 하였다. 조금의 핏방울도 섞이지 않는 이진아를 외사촌 동생이라고 송나희를 속였기 때문이었다. 어색한 표정을 지은 강민우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복했던 호텔을 향해 걸어가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섰다. 강민우가 슬며시 송나희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을 잡힌 손에서 온기를 느낀 그녀가 눈을 흘기며 강민우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횡단보도를 건너 송나희와 나란히 걷고 있는 강민우의 휴대 장비에서 호출음이 울렸다. 강민우가 멈추어 서서 무전기의 통화 버튼을 누른다. 작전지시가 떨어 질 것을 예상하는 송나희도 걸음을 멈추어 섰다.
“비트 원입니다.”
“비트팀 전원, 상황실로 집합하여 대기바람.”
“비트 원 접수.”
통화를 끝낸 강민우는 지프차를 주차 시킨 시경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는 송나희는 강민우의 뒤를 따라 뛰었다. 시경 옆의 주차장에서 송나희를 태운 강민우가 지프차를 운전하여 중앙청을 향해 질주하더니 로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사라진다.
안기부내의 ‘비트’ 작전 상황실. 대형 스크린과 통신장비들이 있는 사무실내에는 타원형 탁자를 둘러싸고 요원들이 앉아 있었다. 상황실에는 ‘비트’ 팀의 요원들 외에도 다른 부서에서 선발되어 온 전산요원들도 있었다. 전산요원 중에는 송나희와 같이 근무하던 유서연의 모습도 보였다. 상황실 문이 열리고 오 국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요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오 국장이 상황실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탁자의 중앙에 있는 의자에 착석하더니 요원들을 둘러본다.
“음, 강 팀장과 송나희 요원이 테러를 당했고, 가담한 전산실의 정기춘을 체포했다. 정기춘을 심문한 결과 세부사항이 밝혀진 것은 없다. 최재인 실장에게 경제적인 대가를 조건으로 단순 포섭된 것이라고 판단이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 경계망을 뚫고 앨리스 킴이 국내를 빠져 나갔다는 정보다. 전 과장! 주일 대사관 정보원에게 들어온 정보는 없나?”
“오사카에 출장 중이던 주대창 서기관이 조총련계 인사를 만나고, 도쿄로 출발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앨리스 킴과 만나기 위해서 움직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총련계 인사에 대해서는 신원을 확인 중이니 바로 정보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오 국장의 불쑥 묻는 질문에 전 과장이 들어온 정보를 보고 했다. 전 과장의 정보보고를 듣는 오 국장이 잠시 생각을 한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던 오 국장이 전 과장에게 질문을 한다.
“마츠다세이코의 공연날짜가 삼일 남았나?”
“네.”
“하필이면 왜 그들이 마츠다세이코의 공연장소를 택했을까?”
“.........!?”
혼잣말처럼 흘리는 오 국장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각자의 머릿속에서 똑같은 의문을 떠 올릴 뿐이다. 모두 해답이 없어 답답하기는 마찬 가지였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전 과장이 자신이 추측하는 의문점을 넋두리처럼 흘린다.
“공연과 관계있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요원들과 마찬가지로 강민우도 의문에 대한 해답을 추측하고 있었다. 탁자에 양 팔꿈치를 의지한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질문한다.
“혹시 마츠다세이코 공연에 우리나라에서 참가하는 연예인은 없습니까?”
“이미 알아 봤는데, 일본 스케줄이 잡힌 연예인은 없었습니다.”
전 과장이 당연히 알아봤다는 자신감으로 말했다. 다시 강민우가 질문을 했다.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이를테면 협찬 기업이라든지, 미츠다세이코 공연 지원을 위한 장비를 소유하고 출국하는 기술진 같은........”
강민우가 자신의 소견을 끝내기도 전에 오 국장이 전 과장에게 지시를 했다.
“그래! 전 과장이 협찬이나 지원을 위해 출국하는 업체를 알아보도록 하고 다른 정보가 있나 다시 살펴보도록 해.”
“네.”
“그리고, 일본 경찰에게도 협조 연락을 하고.”
“이미 주일 대사관서 연락을 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전 과장이 오 국장에게 지시를 받은 내용을 수첩에 메모를 했다. 이어서 오 국장이 요원들을 향해 말했다.
“내일 ‘비트’ 팀 선발대가 우선 일본으로 가서 현지 정보원과 작전을 준비하고, NTIS 2개 팀을 지원하도록 보낼 테니 착오 없도록 준비해야한다. 어떻게든지 잃어버린 플루토늄과 K-2소총의 설계 파일을 되찾아 와야 한다.”
“네!”
요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했다. 지시를 마친 오 국장이 잠시 무슨 생각인가를 하더니 전 과장을 불러서 같이 상황실을 나갔다. ‘비트’ 팀 요원들도 상황실을 나왔다. 상황실에는 대형 모니터와 개인 컴퓨터의 모니터를 주시하며 현업을 하고 있는 전산요원만 남아 있었다.-------------
강민우는 그녀를 볼수록 묘한 신비감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 화장도 하지 않고 옷차림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뽀얀 피부의 목선에서 아릿한 슬픔과 정겨움이 동시에 들어나 보인다. 그러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첫사랑에 대한 애증을 느끼고 있는 것 일가, 아니면 안기부 직원이라는 직업에 후회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희씨!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야?”
“아뇨! 다만 ‘비트’ 팀에 선발 된 것이 두려워요.”
“누구나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면 긴장되기도 하지.”
“그럴지도 모르지요. 때로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용기를 가져. 언젠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래야겠지만.......!?”
언짢은 표정으로 말을 흘린 송나희는 힐끔거리며 뒤를 살펴본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식사를 하고 음식점을 나오면서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뒤따르는 것 같아서였다. 그녀가 말을 중단하고 다시 뒤를 돌아보려는데 강민우가 소맷자락을 잡아당긴다.
“뒤 돌아보지 마.”
“민우씨도 느꼈어요?”
“음식점 안에서부터.”
“누구지요?”
“그냥 계속 걸어가.”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를 흘린 강민우는 예리한 눈빛을 하고 슬며시 겨드랑이 밑을 더듬었다. 겨드랑이에 차고 있는 권총자루를 확인하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인파 속에는 그들을 미행하는 사내들이 있었다. 강민우와 송나희가 빠른 걸음을 옮기면 인파속에 몸을 숨긴 사내들도 빠르게 쫓아온다. 강민우는 다시 느슨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을 쫓는 사내들도 보조를 맞추어 따라오고 있었다.
“움직여!”
강민우가 송나희의 손목을 움켜쥐고 도로변의 골목 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인적이 없는 어두운 골목이었다. 골목을 뛰어가 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어귀에서 건물 벽에 그들은 몸을 숨겼다.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사내들의 구둣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벽에 기댄 강민우는 골목 안을 살폈다. 쫓아오고 있는 사내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뒤편에는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건물이 보였다.
송나희는 두려운 눈빛으로 강민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든지 사내들을 대적할 수 있는 강임함이 들어내 보인다. 강민우가 다시 송나희의 손목을 낚아채고 빠른 몸놀림을 한다. 그녀는 뒤편의 공사 중인 건물로 들어서는 강민우를 따라 달려 들어갔다. 어두운 호텔 안으로 들어선 강민우는 프런트의 분수대를 가로 질러 층계를 뛰어 올라가기 시작한다.
송나희도 날렵한 몸놀림으로 강민우를 따라 층계를 올라간다. 층계를 오른 그들은 아직 출입문이 설치되지 않은 공간으로 들어서 귀를 기울인다. 일층 프런트로 들어오는 발자국소리들이 이층까지 울려 퍼진다. 층계를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강민우가 다시 뻥 뚫린 복도를 달려간다. 뒤이어 송나희도 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강민우의 뒤를 따른다.
강민우가 바라보는 복도 끝의 어둠속에서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그림자가 나타난다. 복도 끝에도 층계가 있었던 것이다. 층계를 올라오는 두 개의 그림자였다. 빠르게 다가온 그림자는 사내들의 모습이었다. 사내들은 자신들의 몸이 흉기인양 쏜살같이 달려와 강민우를 향해 공격해 온다.
“당신들 누구야?”
“.........”
사내들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오직 강민우의 목숨을 끊을 태세로 달려든다. 한사내의 주먹이 강민우의 턱밑까지 다가왔다. 강민우는 날렵하게 몸을 비틀며 사내의 손목을 낚아챘다. 강민우는 언제나 상대를 먼저 제압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낚아챈 손목을 비틀어 꺾은 강민우는 사내의 하복부에 있는 급소를 올려 찼다.
마치 나무가 꺾이는 소리가 나며 사내가 나뒹구는 동시에 다른 사내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다가선다. 바람소리를 가르며 내려치는 파이프를 피한 강민우는 벽을 차고 점프를 하며 바닥을 한 바퀴 돌았다. 순간적으로 뒤에서 들리는 소리 방향으로 강민우의 시선이 꽂혔다.
건물 중앙의 층계로 올라온 사내들이 송나희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녀도 한때는 특공무술로 단련된 공격요원이었다. 송나희는 뒤에서 달려드는 사내를 피해 한 걸음 물러섰다가 앞으로 대닫으면서 상대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그리고 한 바퀴 몸을 돌려 다른 사내의 턱을 올려 찼다.
쇠파이프를 피한 강민우가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다가서는 사내의 등을 차고 넘어섰다. 발길에 차여 균형을 잃은 사내는 강민우에게 목덜미를 붙잡혔다. 강민우는 사내의 목을 팔로 감고 힘을 주었다. 숨을 쉬지 못하고 사내는 컥컥 거리며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러나 이내 강민우가 사내의 머리를 잡고 돌리니 신음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사내를 쓰러트린 강민우가 뒤돌아보았다. 송나희도 한 사내를 쓰러트리고 다른 사내를 상대하고 있었다. 강민우가 뒤돌아보는 순간 사내에게 잡힌 그녀의 몸이 벽에 처박히고 있었다. 입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송나희에게 사내가 다가선다. 그녀에게 다가서던 사내가 강민우의 이단 발차기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간 공간을 가르는 총소리와 함께 총알이 강민우의 귀밑을 스쳐 지나갔다.
강민우가 재빨리 송나희의 손목을 당겨 비어있는 사무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어둠 속의 층계 모서리에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다시 총알이 날아와 벽에 틀어박혔다. 총알이 박힌 벽에서 먼지가 일어나고 깨진 시멘트가 바닥에 떨어진다. 강민우는 겨드랑이에 찬 권총을 뽑아 들었다.
층계모서리에 몸을 숨긴 그림자와 강민우의 권총에서 불이 뿜어져 나간다. 총성은 빈공간의 건물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쓰러졌다가 다시 달려드는 사내가 송나희의 발끝에 채여 벽을 받고 쓰러진다. 강민우가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던 층계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상대가 총알에 적중 당한 것을 강민우가 추측했다. 잠시 총성이 멈추고 층계를 뛰어 내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강민우는 번개처럼 층계를 향해 달려갔다. 층계를 내려온 강민우의 시야에 프런트의 분수대를 뛰어넘어가는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림자를 향해 강민우는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분수대를 뛰어 넘던 그림자가 권총을 떨어트리고 비틀거리며 쓸어졌다. 강민우가 빠른 걸음으로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다리와 팔에 총알을 맞고 쓰러진 그림자의 사내는 떨어트린 권총을 잡으려고 버둥거렸다. 층계를 내려온 송나희도 다가왔다. 사내를 내려다보던 강민우가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넌 정기춘.......!? 왜, 너지?”
“어차피 안기부를 그만, 그만 두려고 했다. 아무 말도 묻지, 묻지 마라.”
고통으로 일그러진 정기춘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표정이었다. 송나희는 너무나 황당한 사실에 넋을 잃은 표정이다. 강민우는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으나 너무나 잘못된 현실을 느끼며 한 숨을 내쉬었다. 총소리를 듣고 경찰과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강민우가 햄 무전기를 들고 ‘비트’ 상황실의 단축 버튼을 눌렀다. 담당 요원이 전희재 과장을 바꾸어 주었다.
“비트 하나, 무슨 일인가?”
“송나희 요원과 근무 중에 피습을 당했습니다.”
“피습.......!?”
“네. 상대는 모두 다섯 명, 처치했습니다만........”
벌어진 상황을 보고한 강민우가 이맛살을 찡그리며 전 과장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놈들 중에 전산실의 정기춘이 가담됐는데, 어떡할까요?”
“근처의 스타호텔에 잠복해 있는 C팀을 보내서 모두 상황실로 이송하도록 할 것이다.”
상황 보고를 끝내는 강민우에게 경찰이 다가섰다. 그를 대신해서 송나희가 경찰에게 신분증을 내보였다.
“석관동 수사요원입니다. 사람들을 물려주십시오.”
“아! 네.”
다가섰던 경찰이 경례를 하고 돌아서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호각을 불며 외쳤다.
“다들 돌아가시고, 모두들 물러서십시오.”
곧이어 잠복해 있던 안기부 요원들이 몰려 왔다. 현장에 쓰러졌던 사내들과 정기춘은 요원들에게 체포되었고 응급조치를 받기위해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강민우가 송나희의 입가에 흘린 피를 닦아주려고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손수건을 받아든 송나희는 가늘게 떨리는 눈빛으로 강민우를 바라본다.
날이 밝고 송나희와 강민우는 종로에 있는 호텔주변에 잠복하고 있었다. 호텔 프런트를 살피던 강민우가 호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송나희도 뒤따라 호텔 입구를 나섰다. 앨리스 킴이 투숙했던 호텔 주변에는 ‘비트’ 팀원들이 요소마다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다.
호텔 입구 옆의 화단에 다가선 강민우는 예리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조금은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송나희가 화단을 바라보는 강민우에게 다가섰다. 그녀를 힐끗 쳐다본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 아름다운 꽃이여!”
“크 큭~! 지금 계절에 무슨 꽃이 있어요.”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송나희는 웃음을 흘렸다. 강민우는 장난스러운 소년처럼 짓궂은 표정을 한다. 송나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하면서 익살스럽게 노랫가락을 흘렸다.
“꽃 중에 꽃........”
“무궁화 꽃노래를 하는 거예요?”
“아니,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
“화단에 꽃이 안 보이는데.......!? 그게 무슨 꽃인데요?”
“내 옆에 있잖아.”
“네.......!?”
강민우의 말에 송나희는 어리둥절했다. 아무리 보아도 화단에는 헐벗은 나무뿐이고 꽃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친 강민우가 얼굴을 묽히며 빙그레 웃었다. 그때서야 송나희는 강민우의 농담석인 말뜻을 알아채고 얼굴을 붉힌다.
“놀리는 거죠? 민우씨도 그런 농담해요?”
“정말인데.”
“피 잇~! 어울리지 않아요.”
“하하~! 정말인데, 몰라주는군.”
얼굴을 붉힌 송나희는 강민우에게 눈을 하얗게 흘겼다. 강민우가 갖고 있는 호출기의 착신 신호음이 들렸다. 작전지시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송나희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호출기의 액정 화면을 들여다 본 강민우가 망설였다. 이진아에게서 걸려온 메시지로 빨리 전화를 해달라는 문자와 전화번호였다.
요즘 들어 자주 집을 비우는 강민우였다. 아침에도 이진아의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집을 나왔었다. 강민우는 휴대용 무전기를 이용해 이진아가 보내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진아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오빠! 어디야?”
“왜? 근무 중인데!”
“나, 어떡해? 지금 친구하고 참고서 사려고 동대문에 와 있는데, 신용카드를 잊어 버렸어.”
“에이~! 조심하지.”
“아침에 말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그냥 나갔잖아. 어떡하지........!?”
“음! 그러면 보신각 앞으로 올래?”
“알았어. 금방 갈게.”
강민우는 호텔 옆에 보이는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송나희도 강민우를 따라 은행 안으로 들어섰다. 은행 여직원에게 다가간 강민우는 신용카드 분실 신고를 하고 다시 발급받았다. 은행을 나와서 보신각 앞에서 이진아를 기다리는 강민우의 곁에서 송나희도 서서 있었다. 친구와 함께 지하철 입구를 나서는 이진아의 모습이 보였다.
달음박질을 하여 달려온 이진아가 해맑은 표정으로 가쁜 숨을 내쉰다. 그리고 서슴없이 강민우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린다. 그뿐 만 아니라, 강민우의 뺨과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뒤쳐져서 바라보고 있던 송나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민우가 분명히 고아가 된 외사촌 여동생을 데리고 있다고 했다.
누가 봐도 외사촌 여동생이라고 생각하기는 도가 지나친 스킨십이었다. 송나희는 뜻밖의 광경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어린아이도 아니고 숙성한 여고생의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송나희에게 강민우가 이진아를 데리고 다가왔다. 그리고 서로를 소개 했다.
“진아야! 인사해. 오빠하고 같이 근무하는 언니야.”
“이진아예요.”
“아........! 그러니!? 반갑다. 나, 송나희 언니야. 앞으로 자주 보게 되면 좋겠다.”
“내가 언닐 왜 자주 봐요?”
이진아의 당돌한 말에 송나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진아와 송나희의 마주친 눈빛에서 순간적으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강민우에게 스킨십을 하던 발랄한 모습과는 달리 송나희를 바라보는 이진아의 눈빛이 싸늘해진다.
이진아는 한 번도 강민우가 여자와 나란히 있는 광경을 본적이 없었다. 그녀 자신이 강민우에게는 단 하나의 여동생이고, 여자인줄로만 알았다. 그렇다고 오빠를 남자라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처음 보는 여자의 모습에 질투심이 일어났다. 자신보다 나이는 들었으나, 청순한 미모와 날렵한 몸매를 지닌 송나희에게 적개심을 느꼈다. 오빠와 같이 근무한다는 그녀에게 공연히 질투를 느꼈다.
송나희는 처음부터 이진아의 스킨십이 얹잖아 보였어도 강민우를 생각해서 너그럽게 받아 주려고 했었다. 생각보다 남다르게 예쁜 미모를 지닌 이진아가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라보는 눈빛은 독살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공격적인 말투를 듣고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강민우를 봐서라도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진아의 말을 곰곰이 삭이다가 미소를 띠어 보였다.
“아! 진아가 정말 예뻐서 하는 말이야.”
미소를 띠는 송나희의 말에 이진아는 역습을 당한 것처럼 분해서 날카롭게 노려본다. 강민우는 이진아의 돌발적인 말투에 익숙해 있었다. 이진아와 송나희를 번갈아 바라보던 강민우가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느끼고 이진아의 앞을 막고 나섰다. 그리고 새로 발급한 신용카드를 이진아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자! 진아야! 얼른 가서 참고서 구입해. 카드 잊어버리지 말고.”
카드를 받아든 이진아가 뽀로통한 모습으로 돌아섰다. 강민우가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려는 이진아를 붙잡았다.
“언니한테 인사하고 가야지.”
“안녕히 계세요.”
주춤거리던 이진아는 마지못해 송나희를 향해 돌아선다. 그러나 눈도 마주치지 않고 머리를 꾸벅거리고는 지하철 입구를 향해 뛰어간다.
순간 송나희는 오래전에 강민우의 어머니도 자신과 같은 송씨 성이라고 했었던 기억을 떠 올렸다. 그런데 외사촌 동생이 자신의 이름을 이진아라고 했다. 어머니와 성씨가 다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어머니 여자 형제의 딸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나희는 공연한 오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강민우를 바라본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이진아에 대한 질투가 아닌가하고 얼굴을 붉히면서도 마음속에는 묘한 응어리가 남아 있었다. 난처해진 강민우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혼자 자라다 보니 버릇이 없어서.”
“여동생을 여자로 사랑하세요?”
송나희는 발끈해서 질문을 해놓고 이내 후회한다.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온 것이다. 같은 여자로서 질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격지심이 들어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민우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아니에요. 그냥 해본 말.......”
되묻고 있는 강민우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 내심 뜨끔 하였다. 조금의 핏방울도 섞이지 않는 이진아를 외사촌 동생이라고 송나희를 속였기 때문이었다. 어색한 표정을 지은 강민우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복했던 호텔을 향해 걸어가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섰다. 강민우가 슬며시 송나희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을 잡힌 손에서 온기를 느낀 그녀가 눈을 흘기며 강민우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횡단보도를 건너 송나희와 나란히 걷고 있는 강민우의 휴대 장비에서 호출음이 울렸다. 강민우가 멈추어 서서 무전기의 통화 버튼을 누른다. 작전지시가 떨어 질 것을 예상하는 송나희도 걸음을 멈추어 섰다.
“비트 원입니다.”
“비트팀 전원, 상황실로 집합하여 대기바람.”
“비트 원 접수.”
통화를 끝낸 강민우는 지프차를 주차 시킨 시경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는 송나희는 강민우의 뒤를 따라 뛰었다. 시경 옆의 주차장에서 송나희를 태운 강민우가 지프차를 운전하여 중앙청을 향해 질주하더니 로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사라진다.
안기부내의 ‘비트’ 작전 상황실. 대형 스크린과 통신장비들이 있는 사무실내에는 타원형 탁자를 둘러싸고 요원들이 앉아 있었다. 상황실에는 ‘비트’ 팀의 요원들 외에도 다른 부서에서 선발되어 온 전산요원들도 있었다. 전산요원 중에는 송나희와 같이 근무하던 유서연의 모습도 보였다. 상황실 문이 열리고 오 국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요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오 국장이 상황실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탁자의 중앙에 있는 의자에 착석하더니 요원들을 둘러본다.
“음, 강 팀장과 송나희 요원이 테러를 당했고, 가담한 전산실의 정기춘을 체포했다. 정기춘을 심문한 결과 세부사항이 밝혀진 것은 없다. 최재인 실장에게 경제적인 대가를 조건으로 단순 포섭된 것이라고 판단이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 경계망을 뚫고 앨리스 킴이 국내를 빠져 나갔다는 정보다. 전 과장! 주일 대사관 정보원에게 들어온 정보는 없나?”
“오사카에 출장 중이던 주대창 서기관이 조총련계 인사를 만나고, 도쿄로 출발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앨리스 킴과 만나기 위해서 움직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총련계 인사에 대해서는 신원을 확인 중이니 바로 정보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오 국장의 불쑥 묻는 질문에 전 과장이 들어온 정보를 보고 했다. 전 과장의 정보보고를 듣는 오 국장이 잠시 생각을 한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던 오 국장이 전 과장에게 질문을 한다.
“마츠다세이코의 공연날짜가 삼일 남았나?”
“네.”
“하필이면 왜 그들이 마츠다세이코의 공연장소를 택했을까?”
“.........!?”
혼잣말처럼 흘리는 오 국장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각자의 머릿속에서 똑같은 의문을 떠 올릴 뿐이다. 모두 해답이 없어 답답하기는 마찬 가지였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전 과장이 자신이 추측하는 의문점을 넋두리처럼 흘린다.
“공연과 관계있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요원들과 마찬가지로 강민우도 의문에 대한 해답을 추측하고 있었다. 탁자에 양 팔꿈치를 의지한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질문한다.
“혹시 마츠다세이코 공연에 우리나라에서 참가하는 연예인은 없습니까?”
“이미 알아 봤는데, 일본 스케줄이 잡힌 연예인은 없었습니다.”
전 과장이 당연히 알아봤다는 자신감으로 말했다. 다시 강민우가 질문을 했다.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이를테면 협찬 기업이라든지, 미츠다세이코 공연 지원을 위한 장비를 소유하고 출국하는 기술진 같은........”
강민우가 자신의 소견을 끝내기도 전에 오 국장이 전 과장에게 지시를 했다.
“그래! 전 과장이 협찬이나 지원을 위해 출국하는 업체를 알아보도록 하고 다른 정보가 있나 다시 살펴보도록 해.”
“네.”
“그리고, 일본 경찰에게도 협조 연락을 하고.”
“이미 주일 대사관서 연락을 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전 과장이 오 국장에게 지시를 받은 내용을 수첩에 메모를 했다. 이어서 오 국장이 요원들을 향해 말했다.
“내일 ‘비트’ 팀 선발대가 우선 일본으로 가서 현지 정보원과 작전을 준비하고, NTIS 2개 팀을 지원하도록 보낼 테니 착오 없도록 준비해야한다. 어떻게든지 잃어버린 플루토늄과 K-2소총의 설계 파일을 되찾아 와야 한다.”
“네!”
요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했다. 지시를 마친 오 국장이 잠시 무슨 생각인가를 하더니 전 과장을 불러서 같이 상황실을 나갔다. ‘비트’ 팀 요원들도 상황실을 나왔다. 상황실에는 대형 모니터와 개인 컴퓨터의 모니터를 주시하며 현업을 하고 있는 전산요원만 남아 있었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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