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낙엽을 한잎 두잎 떨어트리던 가로수가 헐벗기 시작하고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강민우는 출근을 하려다가 세면장으로 들어가는 이진아의 모습을 보고 멈칫하였다. 한동안 이진아는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고 망설이고 있더니 밤늦도록 입시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그녀의 얼굴빛이 핼쑥해지는 것 같다.
민우는 진아의 열려진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방문 안을 들여다보다가 책상위에 펼쳐놓은 책들이 눈에 띠었다. 방안으로 들어가 펼쳐놓은 책들을 드려다 봤다. 대학 입시에 관한 참고서들이었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이진아의 책꽂이 꽂힌 책들이 강민우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대학입시와는 관련 없는 범죄수사에 관한 소설과 범죄심리학에 관한 서적들이었다.
아직까지도 이진아는 자신이 지망할 대학이나 학과에 대한 희망을 의논한 적이 없었다. 다만 강민우 혼자 생각에 이진아가 경찰대학이라도 지망하려고 하는지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가 이진아의 방에서 나와 거실을 나서는데 세면장 문이 열렸다. 짧은 잠옷 차림으로 세면장에서 나온 이진아가 강민우의 등에 매달리며 어리광을 피운다.
“오빠! 나 어지러워.”
“너무 늦게 잠자지 말고. 내가 사준 영양제 잊지 말고 꼭 먹어.”
“약 먹기 싫은데.......”
“식사도 거르지 말고 꼭 먹고.”
주방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진 씨 할머니가 한마디 덧붙인다.
“식사를 제때에 안 하는걸! 밥이 보약이여. 아가야 와서 얼른 식사해.”
“고자질하는 할매 때문에 미쳐.”
강민우의 목에 팔을 두르고 등에 매달렸던 이진아가 퉁명스런 목소리를 흘린다. 그리고 퉁퉁거리는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해간다. 빙그레 미소를 흘리며 이진아의 뒷모습을 바라본 강민우가 현관문을 나선다. 주방의 식탁 앞에 앉은 이진아는 수저를 들었으나 전혀 식사를 할 의욕이 없었다. 멀어져 가는 강민우의 지프차 엔진소리를 들으며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요즘 와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강민우와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여자는 아니다. 그녀의 성(Gender) 역할을 통해 여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전과는 다른 여자로 변모해가는 그녀 혼자의 감정인지도 모른다. 강민우가 오빠라는 친근감보다는 점차 남자라는 대상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그녀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강민우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그녀를 대하지만, 그녀는 강민우가 세상의 남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남자로 보였다. 간혹 그녀는 강민우가 여자로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예전에는 전혀 그녀 자신도 생각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왕릉에 도착한 강민우가 사무실로 들어가니 여전히 일찍 출근을 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요원은 문경환이었다. 강민우가 들어서자마자 문경환이 다가선다.
“오 국장님이 팀장님을 찾으시던데요. 출근하시면 바로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아! 그래.”
문경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칭찬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강민우를 바라본다. 강민우가 책상위의 전화기를 들고 교환원에게 오민국 국장실을 요청했다. 때가 찌든 회색전화기로 걸려온 전화이기에 문경환은 강민우의 통화 내용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수화기를 들고 기다리던 강민우가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통화를 한다.
“강민우입니다.”
“.........”
“네. 알았습니다.”
“........”
강민우는 몇 마디 하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문경환은 짧은 통화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팀장이 보고 있는데서 실망스런 표정을 할 수는 없었다. 간단한 통화를 끝낸 강민우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없이 사무실을 나간다. 문경환은 자신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궁금하기만 하다.
강민우는 오 국장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국장실에 먼저 와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뒷짐을 짚고 돌아 서있는 오 국장을 제외하고, 세 사람이 타원형 탁자 주위에 앉아 있었다. 대공정보과장 전희재, 강민우도 잘 알고 있는 중정시절에 대공첩보 담당과장이었다. 전 과장은 광주사태 당시 갈색보라매라는 암호를 사용한 정보 책임자였기에 강민우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점프’ 작전 시에 강민우와 같은 팀원이었던 홍성식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의외로 송나희의 모습도 보여서 강민우는 의아스러웠다.
오 국장이 자신 혼자만 호출한 것으로 알았던 강민우는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가하고 멈칫하였다. 탁자에 둘러앉았던 요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요원들이 앉은 탁자위에는 컴퓨터에 연결된 마이크로 환등기가 보였다. 뒷짐을 짚고 있던 오 국장이 돌아서서 강민우에게 손짓을 하였다.
“아! 강 팀장, 와서 앉아.”
“.........!?”
강민우는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고 전희재 과장 옆 자리에 가서 앉았다. 마주보고 앉은 송나희도 호출을 당한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호출을 당한 이유를 모르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이 의지가 강하고 침착해 보이는 각진 얼굴의 오 국장을 향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아! 홍성식 요원 일어나서 인사해. 아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특전사에서 잠시 같이 나하고 일했었고, 지금 정보팀에 있는 유능한 젊은이야.”
“홍성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개받은 홍성식은 여전히 자신이 호출됐는지 모르는 표정이다. 그러나 군인처럼 씩씩하게 일어나 자신을 소개하고 앉았다. 오 국장이 이어서 송나희를 가리킨다.
“송나희 요원은 다른 여자요원들과 다르게 간첩작전에도 참가했던 행동요원으로 들어와서 전산요원으로 근무 중이지.”
“송나희입니다.”
송나희 역시 호출당한 이유를 모르는 체 일어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낯선 표정을 하고 앉는다. 오 국장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NTIS A팀을 맡고 있는 강 팀장, 대공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전 과장은 잘 알고들 있을 거야.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긴급한 특별 임무를 맡을 ‘비트’ 팀을 조직하기 위해서야. ‘비트’작전은 NTIS 팀을 위주로 가동하는데 안기부 내에서도 기밀을 유지할 수 있는 유능한 멤버가 필요해. 그래서 여러분들을 호출한 게 되었다.”
“그럼, 각자의 맡은 직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비트’팀원으로 활동하는 겁니까?”
불쑥 홍성식이 조급하게 질문을 했다. 다른 사람도 오 국장의 설명만으로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 국장은 말없이 전희재 과장을 바라본다. 전희재 과장이 오 국장을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지금 소속된 직책에서 ‘비트’ 작전의 업무를 수행하는 겁니다. 오너의 특별 명령에 의해서 ‘비트’ 팀은 우선하여 비밀리에 작전지시를 받고, 각 소속 책임자는 여기 계신 분들의 신분을 보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원들은 그때서야 자신이 호출된 궁금증을 이해하는 표정들이었다. 강민우는 얼마 전에 오 국장의 말을 떠 올렸다. 국방부의 군사기밀을 북한 공작원에게 넘기는 안기부내의 불순세력이 있고, 간첩색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보안유지가 필요한 팀을 조직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전 과장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 있던 오 국장이 입을 열었다.
“국내 정세의 불안을 틈타서 국내에 침투해 있는 북한 공작원들의 움직임이 활동이 치밀해지고 있어. 지금가장 시급한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북한보다 군사력을 높이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서둘렀지. 물론 미국등 강대국들은 우리나라가 핵보유국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비밀리에 진행했던 것이지. 지금은 중단된 상태이지만, 플루토늄을 상당량 제조하여 군이 보유하고 있었어. 그런데 보관하고 있던 플루토늄 10KG과 우리나라가 독자 개발한 K-2소총의 설계 파일이 분실 당했다는 정보를 보내온 국방부의 지원 요청이야. ‘비트’ 팀이 해야 할 업무는 잃어버린 플루토늄과 설계파일을 되찾아야 돼. 지금까지 밝혀진 정보에 의하면 북한 공작원과 내통한 무기 밀매조직이.......”
설명을 하던 오 국장이 뒤로 돌아서서 벽의 상단에 걸린 스크린을 펼쳤다. 그리고 전등 스위치를 눌러 끄더니 책상위에 있는 마이크로환등기의 스위치를 켰다. 어두워진 사무실 안에 환등기의 불빛이 쏟아져 나와 스크린을 비췄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스크린 위에 도시 근교의 지방도로를 배경으로 하는 사진이 나타났다.
검은색 고급 승용차와 코란도 지프차가 나란히 정차되어 있었다. 차량사이에는 검은 안경을 낀 사내와 나이 듬직한 사내가 마주보고 서 있었다. 강민우는 나이든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오 국장이 볼펜형식의 지휘봉을 꺼내 스크린을 가리킨다. 볼펜에서 초록색 레이저 광선이 흘러나와 정확히 검은 안경을 낀 사나이의 이마에 박힌다.
“김도석 중령! 이 사람이 중요 군수물자 관리 책임자이고 플루토늄을 빼낸 사람이다. 김중령과 접선한 이 사람은 중정시절에 마스터로 있던 최태웅으로 밝혀졌는데 추적중이다. 김 중령은 체포되어 조사 중에 자해를 해서 병원으로 이송 중에 사망하였다.”
강민우는 이미 알고 있는 최태웅이 관련되었기에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오 국장이 들고 있는 스위치를 누르니 스크린 위에 다른 사진이 나타났다. 지하 주차장을 배경으로 하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최태웅과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서있는 세 남녀의 사진이었다. 여자 옆에 서 있는 낯익은 남자의 사진을 보고 요원들이 다시 집중하여 확인한다. 현재 안기부에 재직 중인 전산실장 최재인이 분명하였다. 요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짧게 한마디씩 했다.
“어~!?”
“저 사람은 최 실장.......!?”
“전산실장이.......!?”
안기부의 중견 간부가 사건에 개입되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기에 요원들은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강민우는 침착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 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재인 전산실장 얼굴 사진위에 레이저를 비친다.
“우리 조직 내에서 사건에 개입된 인물 중에 한 사람이라고 추정하는 전산실장이다. 무슨 사유로 중정간부였던 최태웅이나 안기부에 재직 중인 최 실장이 음모에 가담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막대한 경제적 대가를 바라고 무기밀매조직에게 포섭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자에 대한 신원정보는 확인된바 없고 추적 중에 있다.”
오 국장이 들고 있는 단추를 눌렀다. 사진이 사라지고 메모 쪽지를 촬영한 화면이 나타났다. 오 국장이 스크린에 나타난 메모위에 레이저를 밝혀 원을 그어 강조했다. 요원들은 제각기 꾸겨진 쪽지에 휘갈겨 쓴 메모 내용을 소리 없이 읽고 있었다.
[11-11 Seiko Matsuda. Tokyo. Nam Gi Chun]
“이것은 최태웅이 묶고 있던 호텔 휴지통에서 발견된 쪽지다. 문서 정보실에서 해석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들의 인기 젊은 여가수 마츠다세이코가 동경에서 공연하는 날을 말한다. 남기춘은 인명이고 역시 신원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주일대사관의 정보원으로부터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오 국장이 다시 손에든 스위치를 눌렀다. 스크린에서 메모지가 사라지고 최태웅, 최재인 실장과 같이 촬영되었던 여자와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이는 정장을 한 남자의 다정한 모습이었다.
“추적중인 여자와 있는 이 남자는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주대창이다. 정보에 의하면 추적중인 여자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주대창 서기관을 만났고, 두 사람 사이는 적절한 관계가 아니라는 정보이다. 두 사람은 같이 마츠다세이코 공연관람권을 예매했다. 아마도 여자는 공연 전에 일본으로 건너 갈 것으로 추측되고, 북한 공작원과 접선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주대창 서기관은 우리 측에서 언제라도 체포할 수 있도록 감시중인데, 플루토늄과 K-2소총의 설계 파일을 추적중인 여자가 운반하는지 확실치 않다.”
“지금 경찰과 다른 정보기관도 작전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전희재 과장의 질문에 오 국장이 설명을 멈추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바라본다. 그리고 이제 얘기를 하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과 세관에서는 모든 공항과 항만을 검색중이니 여자를 추적하여 일본으로 가야한다. 그들이 부산까지 장거리를 움직이리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내일부터 ‘비트’ 팀은 조를 짜서 인천 항만과 공항, 그리고 투숙 가능한 숙박업 위치를 수색 잠복한다. 지금 시점에서 추적중인 접선자들이 눈치 채고 은신해버릴 가능성이 높아 최 실장을 추궁할 수도 없다. 아직 여자와 남기춘의 신원도 밝히지 못한 상황이기에 더욱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돼야 한다.”
“제가 압니다.”
오 국장의 설명 도중에 강민우가 나섰다. 오 국장과 요원들의 시선이 강민우를 향했다. 그들 중에 홍성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강민우는 한 걸음 다가서는 오 국장을 바라봤다.
“저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한 가족.......!?”
오 국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강민우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강민우가 탁자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긴장한 요원들의 시선이 강민우의 입을 향했다.
“최태웅은 최 실장의 형이고, 남기춘은 중앙정보부 시절에 근무했던 남경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오 국장이나 요원들은 뜻밖의 말에 적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오 국장이 강민우에게 물었다.
“남기춘이 중정의 요원이었던 남경식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럼 최태웅과도 관계가 있나?”
“네. 최태웅은 남기춘의 이모부입니다. 여자는 미국계 한국인 2세로서 본명은 남선미, 남기춘과는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입니다. 이년 전에 국방부의 신형헬기프로젝트 비리 사건과 관련되었던 국제 로비스트 앨리스 킴이기도 합니다.
“아! 맞아!”
강민우가 설명을 듣고 있던 홍성식이 손바닥을 두들겼다. 홍성식은 강민우와 같이 ‘점프’ 작전 당시를 기억해 낸 것이다. 노란 눈을 가진 혼혈아 앨리스 킴!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두들긴 홍성식은 무안해서 좌중을 둘러봤다. 이맛살을 찡그린 오 국장이 심중한 표정을 짓는다.
“강 팀장은 그 정보를 어떻게 알았지?”
“사실은........! 제가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사건이 있어서, 시경에 가까운 친구에게 정보를 듣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하여튼 그건 나중에 별도로 듣기로 하고. 여기까지 우리가 해야 할 업무에 대해서 설명 했다. 내일은 조별로 작전 지시를 받고 움직이도록. 질문 사항 있나?”
“.........!?”
요원들은 말없이 각자의 표정을 살폈다. 너무 어마어마한 중대 사건이었기에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자신의 설명이면 충분하다고 오 국장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 국장의 시선이 전희재 과장에게 향했다.
“전 과장!”
“네.”
브리핑실내에 불이 환하게 켜지고 스크린을 비추던 환등기가 꺼졌다. 전 과장은 사전에 지시를 받은 듯 일어나서 탁자 밑에 있는 봉함된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탁자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봉함을 뜯었다. 상자 속에서 나온 것은 소형 통신장비였다. 전 과장이 통신장비를 요원들에게 지급하면서 설명을 했다.
“비트 팀에게 지급되는 개인장비 중 하나입니다. CIA 요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신형 휴대용 통신장비로서 TRS-9 햄 무전기입니다. 주파수를 맞추면 일반 전화와도 통신이 가능하고, 단축버튼을 사용하면 바로 비트 상황실이나 요원들 간의 연락이 되는데.........”
통신장비는 휴태하기도 편하게 소형이고 사용하기도 복잡하지 않았다. 요원들은 전 과장의 설명을 들으며 지급받은 통신장비 사용법을 익혔다.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오 국장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가서들 일 보도록 해. 이 작전에 대해서는 외부뿐만 아니라, 안기부 내의 누구에게도 정보를 흘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 하도록. 다음부터 작전회의 장소는 다른 곳으로 준비해서 알려 줄 것이다. 강 팀장은 남아 있고.”
“........!”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요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선 홍성식이 강민우 곁을 지나치며 고개를 꾸벅여 인사를 했다. ‘점프’ 작전 이후로 서로 다른 직책과 팀에서 근무를 했기에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강민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홍성식으로서는 같은 팀이 된다는 것이 영광스러웠다.
“선배님! 반갑습니다.”
“음.......!”
요원들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오 국장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강민우는 심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묵묵히 팔짱을 끼고 서있던 오 국장이 인터폰을 누르더니 녹차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타원형 탁자를 벗어나 소파에 가서 앉으며 강민우를 부른다.
“이리 와서 앉게.”
강민우가 오 국장이 앉은 옆자리의 소파에 가서 앉았다. 출입구와는 다른 방향의 문이 열리며 여자 요원이 쟁반에 받쳐 든 녹차를 들고 들어왔다. 탁자위에 녹차를 내려놓은 여자요원이 가볍게 인사를 나갔다. 갈증을 느끼는지 오 국장이 덥석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차 한 잔 들어! 그래,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사건이 뭐야?”
“광주사태 당시에 저는 중정의 NDSS의 요원이었고 휴가 중이었습니다.”
“자네의 신상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어.”
“5월 18일 하룻밤 사이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습니다.........”
오 국장은 강민우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어서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강민우는 광주사태 당시에 자신이 겪었던 참혹한 광경들을 떠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다소 격분하는 어조로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쏟아 놓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최태웅 일당을 추적하여 알게 된 정보들을 오 국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강민우는 이진아의 신상에 관한 것은 물론 흑사회 조직원들에 대한 감정은 들어내지 않았다. 묵묵히 듣고만 있는 오 국장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였다. 강민우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오 국장은 강민우의 등을 토닥이며 격려를 했다.
같은 시간에 전산실의 최재인 실장은 안기부 내의 은밀한 사무실 안에 있었다. 최 실장은 마주하고 있는 책상 너머의 남자를 향해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회전의자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은 등을 돌리고 있어 머리와 어깨만이 보일 뿐이다. 다만 최 실장을 압도하는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야?”
“네. 제가 접속하지 않은 날, 저의 암호카드로 접근했던 사실을 알게 되어 녹화된 CCTV 를 확인한 것입니다.”
“멍청이 같은 인간! 자신의 카드가 도용당한 것도 몰랐단 말이야? 심장을 떼어가도 모르겠구먼!”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엠에스티에게 추적당하고 있고, 안기부도 비밀리에 조사 중인 걸 몰라? 자칫하면 당신 신분도 노출 당할 거야! 어떻게든 사고로 위장하던지 해서 없애 버려야 돼.”
“그럼, 더 위험하지 않을 가요?”
“지금까지 작전 중에 요원 한 두 명 사라지는 것을 신경 쓰는 것 봤어?”
“알았습니다.”
최 실장도 MST, 즉 국방부가 잃어버린 군사기밀들을 추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나 정보계통 조직에서는 간첩 색출작전중이기에 더욱 중요한 실수라는 것에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 실장은 어떻게 하든지 실수를 모면할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최 실장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섰다.
오 국장과 개인 면담을 하고 나온 강민우는 휴게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착잡하고 술이라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 중에 홍성식과 송나희의 모습도 보였다. 송나희는 같은 전산실에 근무하고 있는 유서연과 창가를 향해 나란히 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드는 강민우 옆으로 홍성식이 다가왔다.
“선배님, 그동안 자주 보지 못했는데, NTIS에서 근무 하셨군요.”
“음, 자네는?”
“자네 본지도 오랜만이군.”
“그러게요. 같이 근무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누구나 목숨 걸고 일하는 직업에 종사할 뿐이지.”
어디선가 호출기 신호가 울렸다. 홍성식이 옆구리에 찬 호출기를 확인한다. 그리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강민우에게 말한다.
“현장에서 호출이네요. 이제 자주 뵙겠네요.”
“음, 그래.”
강민우는 말없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홍성식이 휴게실을 나가고 이어서 창가에 섰던 송나희와 유서연이 돌아서더니 휴게실 문 쪽으로 향해 걸어간다. 강민우와 그녀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서연이 멈칫하면서 강민우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휴게실을 나갔다. 강민우가 주춤거리는 송나희에게 다가섰다.
“저녁때 약속 있어요?”
“약속은.......!? 없어요.”
직장과 집 사이만을 오가는 생활만을 반복하고 있는 송나희이었다. 그녀는 약속이라는 말이 당치도 않다는 눈빛을 한다. 강민우는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무언지 근심스러워 하고 있다고 느꼈다. 혹시 그녀가 ‘비트’작전의 팀원이 된 것을 탐탁지 않거나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고 강민우는 생각했다.
“저녁식사 같이 할래요?”
“네.”
“회는 어때?”
“좋아요.”
“그럼 저번에 만났던 종로 횟집에서 기다릴게.”
“네.”
고개를 끄덕여 보인 송나희는 휴게실 문을 나선다. 강민우는 휴게실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들고 있는 커피를 단 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도 휴게실을 나와서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긴다.-------
민우는 진아의 열려진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방문 안을 들여다보다가 책상위에 펼쳐놓은 책들이 눈에 띠었다. 방안으로 들어가 펼쳐놓은 책들을 드려다 봤다. 대학 입시에 관한 참고서들이었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이진아의 책꽂이 꽂힌 책들이 강민우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대학입시와는 관련 없는 범죄수사에 관한 소설과 범죄심리학에 관한 서적들이었다.
아직까지도 이진아는 자신이 지망할 대학이나 학과에 대한 희망을 의논한 적이 없었다. 다만 강민우 혼자 생각에 이진아가 경찰대학이라도 지망하려고 하는지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가 이진아의 방에서 나와 거실을 나서는데 세면장 문이 열렸다. 짧은 잠옷 차림으로 세면장에서 나온 이진아가 강민우의 등에 매달리며 어리광을 피운다.
“오빠! 나 어지러워.”
“너무 늦게 잠자지 말고. 내가 사준 영양제 잊지 말고 꼭 먹어.”
“약 먹기 싫은데.......”
“식사도 거르지 말고 꼭 먹고.”
주방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진 씨 할머니가 한마디 덧붙인다.
“식사를 제때에 안 하는걸! 밥이 보약이여. 아가야 와서 얼른 식사해.”
“고자질하는 할매 때문에 미쳐.”
강민우의 목에 팔을 두르고 등에 매달렸던 이진아가 퉁명스런 목소리를 흘린다. 그리고 퉁퉁거리는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해간다. 빙그레 미소를 흘리며 이진아의 뒷모습을 바라본 강민우가 현관문을 나선다. 주방의 식탁 앞에 앉은 이진아는 수저를 들었으나 전혀 식사를 할 의욕이 없었다. 멀어져 가는 강민우의 지프차 엔진소리를 들으며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요즘 와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강민우와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여자는 아니다. 그녀의 성(Gender) 역할을 통해 여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전과는 다른 여자로 변모해가는 그녀 혼자의 감정인지도 모른다. 강민우가 오빠라는 친근감보다는 점차 남자라는 대상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그녀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강민우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그녀를 대하지만, 그녀는 강민우가 세상의 남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남자로 보였다. 간혹 그녀는 강민우가 여자로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예전에는 전혀 그녀 자신도 생각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왕릉에 도착한 강민우가 사무실로 들어가니 여전히 일찍 출근을 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요원은 문경환이었다. 강민우가 들어서자마자 문경환이 다가선다.
“오 국장님이 팀장님을 찾으시던데요. 출근하시면 바로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아! 그래.”
문경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칭찬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강민우를 바라본다. 강민우가 책상위의 전화기를 들고 교환원에게 오민국 국장실을 요청했다. 때가 찌든 회색전화기로 걸려온 전화이기에 문경환은 강민우의 통화 내용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수화기를 들고 기다리던 강민우가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통화를 한다.
“강민우입니다.”
“.........”
“네. 알았습니다.”
“........”
강민우는 몇 마디 하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문경환은 짧은 통화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팀장이 보고 있는데서 실망스런 표정을 할 수는 없었다. 간단한 통화를 끝낸 강민우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없이 사무실을 나간다. 문경환은 자신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궁금하기만 하다.
강민우는 오 국장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국장실에 먼저 와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뒷짐을 짚고 돌아 서있는 오 국장을 제외하고, 세 사람이 타원형 탁자 주위에 앉아 있었다. 대공정보과장 전희재, 강민우도 잘 알고 있는 중정시절에 대공첩보 담당과장이었다. 전 과장은 광주사태 당시 갈색보라매라는 암호를 사용한 정보 책임자였기에 강민우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점프’ 작전 시에 강민우와 같은 팀원이었던 홍성식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의외로 송나희의 모습도 보여서 강민우는 의아스러웠다.
오 국장이 자신 혼자만 호출한 것으로 알았던 강민우는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가하고 멈칫하였다. 탁자에 둘러앉았던 요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요원들이 앉은 탁자위에는 컴퓨터에 연결된 마이크로 환등기가 보였다. 뒷짐을 짚고 있던 오 국장이 돌아서서 강민우에게 손짓을 하였다.
“아! 강 팀장, 와서 앉아.”
“.........!?”
강민우는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고 전희재 과장 옆 자리에 가서 앉았다. 마주보고 앉은 송나희도 호출을 당한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호출을 당한 이유를 모르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이 의지가 강하고 침착해 보이는 각진 얼굴의 오 국장을 향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아! 홍성식 요원 일어나서 인사해. 아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특전사에서 잠시 같이 나하고 일했었고, 지금 정보팀에 있는 유능한 젊은이야.”
“홍성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개받은 홍성식은 여전히 자신이 호출됐는지 모르는 표정이다. 그러나 군인처럼 씩씩하게 일어나 자신을 소개하고 앉았다. 오 국장이 이어서 송나희를 가리킨다.
“송나희 요원은 다른 여자요원들과 다르게 간첩작전에도 참가했던 행동요원으로 들어와서 전산요원으로 근무 중이지.”
“송나희입니다.”
송나희 역시 호출당한 이유를 모르는 체 일어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낯선 표정을 하고 앉는다. 오 국장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NTIS A팀을 맡고 있는 강 팀장, 대공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전 과장은 잘 알고들 있을 거야.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긴급한 특별 임무를 맡을 ‘비트’ 팀을 조직하기 위해서야. ‘비트’작전은 NTIS 팀을 위주로 가동하는데 안기부 내에서도 기밀을 유지할 수 있는 유능한 멤버가 필요해. 그래서 여러분들을 호출한 게 되었다.”
“그럼, 각자의 맡은 직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비트’팀원으로 활동하는 겁니까?”
불쑥 홍성식이 조급하게 질문을 했다. 다른 사람도 오 국장의 설명만으로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 국장은 말없이 전희재 과장을 바라본다. 전희재 과장이 오 국장을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지금 소속된 직책에서 ‘비트’ 작전의 업무를 수행하는 겁니다. 오너의 특별 명령에 의해서 ‘비트’ 팀은 우선하여 비밀리에 작전지시를 받고, 각 소속 책임자는 여기 계신 분들의 신분을 보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원들은 그때서야 자신이 호출된 궁금증을 이해하는 표정들이었다. 강민우는 얼마 전에 오 국장의 말을 떠 올렸다. 국방부의 군사기밀을 북한 공작원에게 넘기는 안기부내의 불순세력이 있고, 간첩색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보안유지가 필요한 팀을 조직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전 과장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 있던 오 국장이 입을 열었다.
“국내 정세의 불안을 틈타서 국내에 침투해 있는 북한 공작원들의 움직임이 활동이 치밀해지고 있어. 지금가장 시급한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북한보다 군사력을 높이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서둘렀지. 물론 미국등 강대국들은 우리나라가 핵보유국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비밀리에 진행했던 것이지. 지금은 중단된 상태이지만, 플루토늄을 상당량 제조하여 군이 보유하고 있었어. 그런데 보관하고 있던 플루토늄 10KG과 우리나라가 독자 개발한 K-2소총의 설계 파일이 분실 당했다는 정보를 보내온 국방부의 지원 요청이야. ‘비트’ 팀이 해야 할 업무는 잃어버린 플루토늄과 설계파일을 되찾아야 돼. 지금까지 밝혀진 정보에 의하면 북한 공작원과 내통한 무기 밀매조직이.......”
설명을 하던 오 국장이 뒤로 돌아서서 벽의 상단에 걸린 스크린을 펼쳤다. 그리고 전등 스위치를 눌러 끄더니 책상위에 있는 마이크로환등기의 스위치를 켰다. 어두워진 사무실 안에 환등기의 불빛이 쏟아져 나와 스크린을 비췄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스크린 위에 도시 근교의 지방도로를 배경으로 하는 사진이 나타났다.
검은색 고급 승용차와 코란도 지프차가 나란히 정차되어 있었다. 차량사이에는 검은 안경을 낀 사내와 나이 듬직한 사내가 마주보고 서 있었다. 강민우는 나이든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오 국장이 볼펜형식의 지휘봉을 꺼내 스크린을 가리킨다. 볼펜에서 초록색 레이저 광선이 흘러나와 정확히 검은 안경을 낀 사나이의 이마에 박힌다.
“김도석 중령! 이 사람이 중요 군수물자 관리 책임자이고 플루토늄을 빼낸 사람이다. 김중령과 접선한 이 사람은 중정시절에 마스터로 있던 최태웅으로 밝혀졌는데 추적중이다. 김 중령은 체포되어 조사 중에 자해를 해서 병원으로 이송 중에 사망하였다.”
강민우는 이미 알고 있는 최태웅이 관련되었기에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오 국장이 들고 있는 스위치를 누르니 스크린 위에 다른 사진이 나타났다. 지하 주차장을 배경으로 하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최태웅과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서있는 세 남녀의 사진이었다. 여자 옆에 서 있는 낯익은 남자의 사진을 보고 요원들이 다시 집중하여 확인한다. 현재 안기부에 재직 중인 전산실장 최재인이 분명하였다. 요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짧게 한마디씩 했다.
“어~!?”
“저 사람은 최 실장.......!?”
“전산실장이.......!?”
안기부의 중견 간부가 사건에 개입되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기에 요원들은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강민우는 침착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 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재인 전산실장 얼굴 사진위에 레이저를 비친다.
“우리 조직 내에서 사건에 개입된 인물 중에 한 사람이라고 추정하는 전산실장이다. 무슨 사유로 중정간부였던 최태웅이나 안기부에 재직 중인 최 실장이 음모에 가담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막대한 경제적 대가를 바라고 무기밀매조직에게 포섭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자에 대한 신원정보는 확인된바 없고 추적 중에 있다.”
오 국장이 들고 있는 단추를 눌렀다. 사진이 사라지고 메모 쪽지를 촬영한 화면이 나타났다. 오 국장이 스크린에 나타난 메모위에 레이저를 밝혀 원을 그어 강조했다. 요원들은 제각기 꾸겨진 쪽지에 휘갈겨 쓴 메모 내용을 소리 없이 읽고 있었다.
[11-11 Seiko Matsuda. Tokyo. Nam Gi Chun]
“이것은 최태웅이 묶고 있던 호텔 휴지통에서 발견된 쪽지다. 문서 정보실에서 해석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들의 인기 젊은 여가수 마츠다세이코가 동경에서 공연하는 날을 말한다. 남기춘은 인명이고 역시 신원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주일대사관의 정보원으로부터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오 국장이 다시 손에든 스위치를 눌렀다. 스크린에서 메모지가 사라지고 최태웅, 최재인 실장과 같이 촬영되었던 여자와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이는 정장을 한 남자의 다정한 모습이었다.
“추적중인 여자와 있는 이 남자는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주대창이다. 정보에 의하면 추적중인 여자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주대창 서기관을 만났고, 두 사람 사이는 적절한 관계가 아니라는 정보이다. 두 사람은 같이 마츠다세이코 공연관람권을 예매했다. 아마도 여자는 공연 전에 일본으로 건너 갈 것으로 추측되고, 북한 공작원과 접선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주대창 서기관은 우리 측에서 언제라도 체포할 수 있도록 감시중인데, 플루토늄과 K-2소총의 설계 파일을 추적중인 여자가 운반하는지 확실치 않다.”
“지금 경찰과 다른 정보기관도 작전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전희재 과장의 질문에 오 국장이 설명을 멈추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바라본다. 그리고 이제 얘기를 하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과 세관에서는 모든 공항과 항만을 검색중이니 여자를 추적하여 일본으로 가야한다. 그들이 부산까지 장거리를 움직이리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내일부터 ‘비트’ 팀은 조를 짜서 인천 항만과 공항, 그리고 투숙 가능한 숙박업 위치를 수색 잠복한다. 지금 시점에서 추적중인 접선자들이 눈치 채고 은신해버릴 가능성이 높아 최 실장을 추궁할 수도 없다. 아직 여자와 남기춘의 신원도 밝히지 못한 상황이기에 더욱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돼야 한다.”
“제가 압니다.”
오 국장의 설명 도중에 강민우가 나섰다. 오 국장과 요원들의 시선이 강민우를 향했다. 그들 중에 홍성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다. 강민우는 한 걸음 다가서는 오 국장을 바라봤다.
“저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한 가족.......!?”
오 국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강민우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강민우가 탁자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긴장한 요원들의 시선이 강민우의 입을 향했다.
“최태웅은 최 실장의 형이고, 남기춘은 중앙정보부 시절에 근무했던 남경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오 국장이나 요원들은 뜻밖의 말에 적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오 국장이 강민우에게 물었다.
“남기춘이 중정의 요원이었던 남경식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럼 최태웅과도 관계가 있나?”
“네. 최태웅은 남기춘의 이모부입니다. 여자는 미국계 한국인 2세로서 본명은 남선미, 남기춘과는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입니다. 이년 전에 국방부의 신형헬기프로젝트 비리 사건과 관련되었던 국제 로비스트 앨리스 킴이기도 합니다.
“아! 맞아!”
강민우가 설명을 듣고 있던 홍성식이 손바닥을 두들겼다. 홍성식은 강민우와 같이 ‘점프’ 작전 당시를 기억해 낸 것이다. 노란 눈을 가진 혼혈아 앨리스 킴!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두들긴 홍성식은 무안해서 좌중을 둘러봤다. 이맛살을 찡그린 오 국장이 심중한 표정을 짓는다.
“강 팀장은 그 정보를 어떻게 알았지?”
“사실은........! 제가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사건이 있어서, 시경에 가까운 친구에게 정보를 듣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하여튼 그건 나중에 별도로 듣기로 하고. 여기까지 우리가 해야 할 업무에 대해서 설명 했다. 내일은 조별로 작전 지시를 받고 움직이도록. 질문 사항 있나?”
“.........!?”
요원들은 말없이 각자의 표정을 살폈다. 너무 어마어마한 중대 사건이었기에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자신의 설명이면 충분하다고 오 국장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 국장의 시선이 전희재 과장에게 향했다.
“전 과장!”
“네.”
브리핑실내에 불이 환하게 켜지고 스크린을 비추던 환등기가 꺼졌다. 전 과장은 사전에 지시를 받은 듯 일어나서 탁자 밑에 있는 봉함된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탁자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봉함을 뜯었다. 상자 속에서 나온 것은 소형 통신장비였다. 전 과장이 통신장비를 요원들에게 지급하면서 설명을 했다.
“비트 팀에게 지급되는 개인장비 중 하나입니다. CIA 요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신형 휴대용 통신장비로서 TRS-9 햄 무전기입니다. 주파수를 맞추면 일반 전화와도 통신이 가능하고, 단축버튼을 사용하면 바로 비트 상황실이나 요원들 간의 연락이 되는데.........”
통신장비는 휴태하기도 편하게 소형이고 사용하기도 복잡하지 않았다. 요원들은 전 과장의 설명을 들으며 지급받은 통신장비 사용법을 익혔다.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오 국장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가서들 일 보도록 해. 이 작전에 대해서는 외부뿐만 아니라, 안기부 내의 누구에게도 정보를 흘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 하도록. 다음부터 작전회의 장소는 다른 곳으로 준비해서 알려 줄 것이다. 강 팀장은 남아 있고.”
“........!”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요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선 홍성식이 강민우 곁을 지나치며 고개를 꾸벅여 인사를 했다. ‘점프’ 작전 이후로 서로 다른 직책과 팀에서 근무를 했기에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강민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홍성식으로서는 같은 팀이 된다는 것이 영광스러웠다.
“선배님! 반갑습니다.”
“음.......!”
요원들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오 국장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강민우는 심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묵묵히 팔짱을 끼고 서있던 오 국장이 인터폰을 누르더니 녹차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타원형 탁자를 벗어나 소파에 가서 앉으며 강민우를 부른다.
“이리 와서 앉게.”
강민우가 오 국장이 앉은 옆자리의 소파에 가서 앉았다. 출입구와는 다른 방향의 문이 열리며 여자 요원이 쟁반에 받쳐 든 녹차를 들고 들어왔다. 탁자위에 녹차를 내려놓은 여자요원이 가볍게 인사를 나갔다. 갈증을 느끼는지 오 국장이 덥석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차 한 잔 들어! 그래,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사건이 뭐야?”
“광주사태 당시에 저는 중정의 NDSS의 요원이었고 휴가 중이었습니다.”
“자네의 신상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어.”
“5월 18일 하룻밤 사이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습니다.........”
오 국장은 강민우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어서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강민우는 광주사태 당시에 자신이 겪었던 참혹한 광경들을 떠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다소 격분하는 어조로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쏟아 놓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최태웅 일당을 추적하여 알게 된 정보들을 오 국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강민우는 이진아의 신상에 관한 것은 물론 흑사회 조직원들에 대한 감정은 들어내지 않았다. 묵묵히 듣고만 있는 오 국장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였다. 강민우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오 국장은 강민우의 등을 토닥이며 격려를 했다.
같은 시간에 전산실의 최재인 실장은 안기부 내의 은밀한 사무실 안에 있었다. 최 실장은 마주하고 있는 책상 너머의 남자를 향해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회전의자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은 등을 돌리고 있어 머리와 어깨만이 보일 뿐이다. 다만 최 실장을 압도하는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야?”
“네. 제가 접속하지 않은 날, 저의 암호카드로 접근했던 사실을 알게 되어 녹화된 CCTV 를 확인한 것입니다.”
“멍청이 같은 인간! 자신의 카드가 도용당한 것도 몰랐단 말이야? 심장을 떼어가도 모르겠구먼!”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엠에스티에게 추적당하고 있고, 안기부도 비밀리에 조사 중인 걸 몰라? 자칫하면 당신 신분도 노출 당할 거야! 어떻게든 사고로 위장하던지 해서 없애 버려야 돼.”
“그럼, 더 위험하지 않을 가요?”
“지금까지 작전 중에 요원 한 두 명 사라지는 것을 신경 쓰는 것 봤어?”
“알았습니다.”
최 실장도 MST, 즉 국방부가 잃어버린 군사기밀들을 추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나 정보계통 조직에서는 간첩 색출작전중이기에 더욱 중요한 실수라는 것에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 실장은 어떻게 하든지 실수를 모면할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최 실장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섰다.
오 국장과 개인 면담을 하고 나온 강민우는 휴게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착잡하고 술이라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 중에 홍성식과 송나희의 모습도 보였다. 송나희는 같은 전산실에 근무하고 있는 유서연과 창가를 향해 나란히 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드는 강민우 옆으로 홍성식이 다가왔다.
“선배님, 그동안 자주 보지 못했는데, NTIS에서 근무 하셨군요.”
“음, 자네는?”
“자네 본지도 오랜만이군.”
“그러게요. 같이 근무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누구나 목숨 걸고 일하는 직업에 종사할 뿐이지.”
어디선가 호출기 신호가 울렸다. 홍성식이 옆구리에 찬 호출기를 확인한다. 그리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강민우에게 말한다.
“현장에서 호출이네요. 이제 자주 뵙겠네요.”
“음, 그래.”
강민우는 말없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홍성식이 휴게실을 나가고 이어서 창가에 섰던 송나희와 유서연이 돌아서더니 휴게실 문 쪽으로 향해 걸어간다. 강민우와 그녀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유서연이 멈칫하면서 강민우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휴게실을 나갔다. 강민우가 주춤거리는 송나희에게 다가섰다.
“저녁때 약속 있어요?”
“약속은.......!? 없어요.”
직장과 집 사이만을 오가는 생활만을 반복하고 있는 송나희이었다. 그녀는 약속이라는 말이 당치도 않다는 눈빛을 한다. 강민우는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무언지 근심스러워 하고 있다고 느꼈다. 혹시 그녀가 ‘비트’작전의 팀원이 된 것을 탐탁지 않거나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고 강민우는 생각했다.
“저녁식사 같이 할래요?”
“네.”
“회는 어때?”
“좋아요.”
“그럼 저번에 만났던 종로 횟집에서 기다릴게.”
“네.”
고개를 끄덕여 보인 송나희는 휴게실 문을 나선다. 강민우는 휴게실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들고 있는 커피를 단 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도 휴게실을 나와서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긴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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