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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립스틱* - 20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02:38 713회 0건
*검은 립스틱*언덕 아래로 낚싯대를 멘 사람의 밀짚모자가 보였다. 흥에 겨운 노랫가락을 중얼거리며 낚시를 하고 돌아가는 노인이었다. 얼굴을 붉히는 송나희는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자세를 바로 잡는다. 시선이 마주친 그들은 쑥스러운 미소를 흘린다. 노인의 흥에 겨운 노랫가락이 멀어진다.



“오늘 뭐할 거지?”

“집에 가야지요.”



“같이 저녁식사하지?”

“네.......!”



대답을 하는 송나희의 고개가 끄덕인다. 강민우가 그녀의 표정을 살핀다. 그리고 주춤거리며 말을 한다.



“오늘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무슨.........!?”



그녀가 빤히 쳐다본다. 강민우는 다시 남규리의 별장에 갈 생각이다. 최재인의 시크릿 암호 카드를 사용해서 중정에서 넘어온 최태웅에 관한 파일을 검색하려는 것이다. 어쩌면 혼자서도 가능할지 몰라도 전산실을 들어가는 것도 위험부담이 있고, 아무래도 송나희의 도움이 절실했다.



“중정에서 넘어왔던 기밀 파일을 보려고 해.”

“어떻게.......!?”



송나희는 강민우가 알고 싶어 하는 파일을 짐작한다. 강민우의 뼈에 사무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부탁을 받고 파일접근을 시도했지만 접근이 불가능 했었다. 중정에서 넘어온 기밀파일들은 접근 가능한 책임자급의 시크릿 카드가 필요했다. 강민우는 그녀가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오늘 전산실 야근 작업이 있나?”

“요즘은 없어요. 파일에 어떻게 접속하려고요?”

“나희 씨는 전산실에 같이 들어가서 파일 복사만 도와주면 돼.”

“시크릿 암호 카드가 필요한데요?”



“그건 내가 가져다줄게.”

“어떻게요.......!?”

“염려 말고, 기다려 주기만 하면 돼.”

“너무 위험한 일 아닌가요?”



“괜찮아! 염려하지 마. 나희 씨만 도와준다면.......! 도와줄 수 있어?”

“.........네!”

“고마워! 그럼 식사부터 하고.”

“........!”



강민우의 계획이 무엇인지 모르는 송나희는 걱정스러울 뿐이다. 강민우는 송나희를 안심시켜주려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다. 그것은 자신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더니 기어를 넣고 지프차를 발진시킨다. 지프차의 엔진소리에 강변에 한가하게 먹이를 쪼던 오리 때들이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른다.



어둠이 깔린 춘천 호수 옆의 도로로 지프차가 질주하고 있다. 강민우가 운전하고 있는 지프차 조수석에는 송나희가 앉아 있다. 이따금 헤드라이트의 반사하는 불빛에 들어나는 송나희 얼굴이 들어난다.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녹슨 철로 길을 넘어서 달린 지프차는 숲길 옆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강민우는 다시 지프차를 천천히 숲 속으로 몰고 들어간다. 우거진 소나무 숲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될 장소에서 강민우는 지프차의 시동을 끄고 주위를 살핀다. 어둠이 쌓인 숲길 주위는 풀벌레 소리도 사라지고 적막이 내려 앉아 있었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희 씨가 차를 운전해서 석관동 입구에 가서 기다려. 그런 일이 없을 테지만.”

“네. 조심하세요.”



강민우를 바라보는 송나희의 눈빛이 반짝인다. 강민우는 슬며시 그녀를 껴안는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입맞춤을 한다. 뒷좌석에서 작은 배낭을 꺼내든 강민우가 지프에서 내리고, 송나희가 운전석으로 옮겨 앉는다. 그녀는 운전석 유리창의 어두운 숲을 바라본다. 나뭇가지를 헤치며 숲속으로 들어서는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숲에는 적막이 내려앉는다. 그녀의 초조한 마음을 달래듯이 숲속 어디서인가 들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숲 속을 헤쳐 나온 강민우는 별장 입구에서 주위를 살핀다. 별장 앞의 공터에는 검은 색 고급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깨끗하게 세차된 승용차의 본네트가 별빛을 반사하고 있다. 강민우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별장 뒤로 다가간다. 그의 발에 밟힌 낙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낸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아름드리나무로 올라간다. 별장 뒤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그는 배낭에서 망원경을 꺼내 불 켜진 창문 안을 들여다본다.



망원경 안에는 주방을 겸한 거실이 들어나 보았다. 강민우가 예상한데로 가운을 걸친 최재인 실장의 모습이 보인다. 최 실장 옆에는 속살이 들어나 보이는 네글리제를 걸친 남규리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의 앞에 놓인 탁자에는 안주와 양주병이 보인다. 양주병을 초점으로 줌렌즈를 확대시켰다. 발렌타인 30년산! 양주병의 마개가 열려 있다. 탁자 위에 놓인 유리잔에는 마시고 남은 양주 찌꺼기가 보였다.



망원경의 초점을 최 실장과 남규리의 얼굴을 향한다. 눈동자가 풀린 것으로 보아 그들이 양주를 마신지 꽤 시간이 흐른 것으로 강민우는 짐작했다. 그들은 무슨 말인가 주고받으며 웃음을 흘린다. 그들은 제법 취했는지 얼굴이 조금 붉어진 상태이다. 남규리가 최 실장의 빈 잔에 양주를 따른다. 양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켠 최 실장이 그녀를 껴안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걸친 네글리제를 끌어내린다. 매끈하게 들어난 농익은 젖가슴을 최 실장이 움켜쥔다. 그녀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남자의 손길에 젖가슴을 맡기고 있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선다. 거실의 불빛이 꺼지고 망원경으로 보이던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다. 왼쪽 창문의 전등불이 켜진다. 전등불이 밝혀진 곳은 침실이었고, 그들의 모습이 들어났다. 침대에 벌렁 눕는 최 실장 옆으로 남규리가 눕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최 실장이 그녀의 어깨 밑으로 걸친 네글리제를 벗겨낸다. 네글리제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남규리의 발가벗은 알몸이 들어났다.



허벅지 사이에 수북한 음모와 여자의 비역이 그대로 들어나 보였다.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손바닥으로 더듬던 최 실장이 일어난다.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 내려다보더니 다시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걸친 가운을 벗고 그녀의 알몸을 덮어 누른다. 최 실장의 뒷모습으로 가려서 여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벌어진 허벅지로 남자의 흉물스러운 남성이 사라지는 광경이 보였다.



최 실장의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하지만 반듯이 누워있는 그녀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잠시 안간힘을 쓰던 최 실장도 맥없이 옆으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망원경 안을 주시하던 강민우는 나뭇가지위에서 편한 자세를 취한다. 그들은 강민우가 미리 페노바르비탈과 프로포폴을 주입한 양주를 마신 것이다. 수면제와 마취제 성분이 완전히 작용될 시간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이십 여분이 지났을까,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강민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뭇가지 끝으로 옮겼다. 나뭇가지 끝을 잡고 매달려 반동을 주어 흔들고는 사뿐히 별장 지붕위에 내려섰다. 하루 전에 침입했던 지붕의 기와를 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지붕 밑으로 살졌다.



불이 꺼진 거실에서 강민우는 랜턴을 켜들고 주위를 살핀다. 그는 최 실장의 소지품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소파 옆의 탁자 위에 놓인 가죽 가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탁자로 다가가서 가죽가방을 들고 자크를 얼었다. 은행 통장과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아뿔싸! 아무리 가방 안을 뒤져도 그가 찾는 시크릿 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많이 경과되었고 송나희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시크릿 암호카드가 없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최 실장이 중요한 카드를 다른 곳에 두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가죽가방을 제자리에 두고 조심스럽게 침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불빛이 새나오는 침실문의 손잡이를 잡고 살며시 돌린다.



불이 켜진 침실 안에는 벌거벗은 남녀가 정신을 잃고 침대위에 쓰러져 있다. 강민우는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흉물스러운 남성을 축 늘어트리고 누워있는 남자와 허벅지를 들어 내놓고 쓰러져 있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본다. 조심스럽게 옷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옷장 문을 하나씩 열고 뒤적여 본다. 남자의 양복 상의가 눈에 뜨인다. 양복상의 호주머니들을 뒤져보다가 손에 잡힌 지갑을 꺼냈다. 지갑 속에는 최 실장의 신분증과 은행카드들이 있었다. 그리고 강민우가 찾는 시크릿 카드도 있었다. 시크릿 카드를 빼든 강민우는 빠른 걸음으로 침실 문을 나선다.



지프차 안에서 기다리는 송나희는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강민우가 어떻게 시크릿 카드를 가져 올 수 있는지 모른다. 다만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예감에 긴장할 뿐이다. 간혹 숲속에서 튀어나오는 다람쥐의 움직이는 소리에도 예민해져서 흠칫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지프차를 몰고 석관동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무슨 일이 어떤 사태인지도 모르지만 과연 강민우를 홀로 두고 가야할는지도 결단이 서지 않는다.



여차하면 지프차의 시동을 걸려고 송나희는 열쇠를 움켜쥐고 있었다. 다람쥐가 튀어 달아나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고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긴장을 하고 어둠속을 바라보는데 나뭇가지를 헤치고 그림자가 나타난다. 뚫어지게 응시하던 송나희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빠르게 지프차의 운전석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는 강민우였다.



송나희가 조수석으로 옮겨 앉고 지프차에 올라탄 강민우가 시동을 걸었다. 둔탁한 엔진소리와 함께 소나무 숲에 가려져 있던 강민우의 지프차가 숲길로 나온다. 그리고 대로를 향해 질주한다. 긴장했던 흔적이 역력한 강민우가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송나희를 힐끗 쳐다본다.



“오래 기다렸지?”

“네. 카드는요?”

“........!”



강민우는 말없이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호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낸다. 송나희에게 카드를 건네주며 빤히 바라본다. 시크릿 카드가 확실한가를 확인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최 실장의 시크릿 카드임을 확인하고 송나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지프차는 대로 위를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 최 실장의 카드를 구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묻고 싶었다. 강민우는 가속페달을 힘껏 밟으며 그녀를 힐끔 바라봤다.



“이곳이 최 실장이 내연녀 남규리와 만나는 별장이야.”

“아~!”



간단한 강민우의 설명이지만, 송나희는 대충 짐작을 한다. 한편으로는 강민우가 어떻게 남규리의 별장을 알아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았다. 오가는 차량도 없는 대로를 달린 지프차는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왕릉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야간경비를 서는 경비원들이 그들을 막아섰다가 신분증을 확인하고 길을 열어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위를 살핀다. 별빛이 흐르는 잔디가 깔린 주변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전산실 입구에서 송나희는 출입통제 인식기에 자신의 신분카드를 입력하여 확인시켰다.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그들은 전사실의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산실 안은 마이크로의 불빛들만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강민우가 랜턴을 켜들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전산실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송나희가 최재인 실장의 책상위에 놓인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빠른 손가락 놀림으로 파일을 검색한다. 중앙정보부의 파일을 열고 최재웅의 신원파일을 요구하니 접근 불가와 함께 암호카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뜬다.



강민우는 좌판을 두드리는 송나희 옆에 가깝게 다가서서 모니터를 주시한다. 모니터 화면 불빛에 두 사람 의 얼굴이 닿을 정도로 들어나 보였다. 송나희는 강민우에게서 받은 시크릿 카드를 책상위에 놓인 입력기에 넣었다. 최재웅의 사진과 함께 개인신상정보와 활동 내역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최재웅의 개인신상정보와 활동내역에 관해서는 강민우도 이미 대부분알고 있는 사항들이었다. 그런데 하단 부분에 깜박이는 적색의 문자들이 보였다.



‘광주사태 진압작전; 독단 행동. 요주의. 징계’

‘안개작전 완료; 사조직과 안국동 투입.’



강민우는 광주사태에서 흑사회 조직원들을 이용한 것은 최태웅의 과잉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강민우도 중앙정보부에 재직 중이었지만 안개작전이라는 것은 처음 들어본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 그리고 이진아를 보살피느라 정신은 없었다.



“남경식에 대한 자료를 봐야겠어.”

“네.”



송나희는 빠른 손놀림으로 좌판을 두드린다. 모니터 화면이 바뀌고 남경식의 사진과 개인신상정보, 그리고 활동내역이 나왔다. 하지만 남경식의 자료 화면에도 최태웅과 같은 광주사태에 대한 징계와 안개작전에 대한 문구가 있었다. 강민우는 안개작전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개작전이 뭐지!? 알 수 있나?”

“확인해볼게요.”



송나희가 다시 좌판을 두드린다. 모니터 화면에 접근 경고 메시지와 함께 중앙정보부 시절에 있었던 작전명들이 나열되어 나타났다. 마우스를 움직여 나열된 작전명들을 훑어 내려갔다. 모니터 화면이 여러 번 바뀌고 거의 마지막 하단부분에 안개작전이라는 작전명이 나왔다. 작전명을 확인하니 안개작전에 대한 작전내역이 모니터 화면에 나타났다.



송나희의 옆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강민우의 눈빛이 반짝인다. 안개작전은 다름이 아니라,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해의 가을에 실시한 작전이었다. 저명인사 3명이 사망하였기에 한동안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든 살해되었던, 안국동 사건을 강민우도 알고 있었다. 안개작전을 지시 책임자는 단지 ‘GIS’라는 이니셜만 적혀 있었고, 작전요원들의 명단과 작전상황이 적혀 있었다. 저명인사들을 테러한 것은 사전에 계획된 작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장지휘자는 최태웅이고, 작전에 투입된 명단에는 사진과 함께 간단한 신상정보가 적혀있었다. 명단에는 남경식의 이름도 있었고 별도의 표시가 되 있는 이름들이 보였다. 강민우는 이름들 중에 곽춘호라는 이름을 주시하였다. 민한해운의 민한구가 말했던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흑사회 조직원들임을 알 수 있었다.



곽춘호를 비롯해서 김철호, 주승균, 허문한, 박종규, 황충식의 근접 사진과 간단한 신상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강민우가 찾고자 했던 흑사회 조직원들이었다. 얼굴에 깊은 흉터자국, 찢어진 눈매. 곱슬머리, 주먹코, 텁수룩한 수염에 절단된 손가락, 안대를 한 애꾸눈 등 이진아를 집단으로 유린하던 조직원들의 인상착의가 떠올렸다. 긴장한 표정으로 강민우는 예민하게 전산실 안을 살폈다.



“빨리 파일을 복사해야겠어.”

“네.”



초조한 마음으로 송나희가 디스켓을 넣고 파일을 복사하기 시작했다. 10%, 15%, 20%.......파일을 복사하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파일 복사가 끝낸 디스켓을 강민우에게 건네준 송나희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닫고 전원스위치를 눌러 껐다. 책상을 원상태로 정리해놓고 그들은 전산실장실을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전산실을 빠져 나온 그들은 건물 입구에서 주위를 살핀다. 건물 경비를 하고 있는 경비원이 건물 모퉁이를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주차장을 향해 달린다. 그들이 올라탄 지프차가 광릉을 벗어나고 있었다.



한 시간이 되지 않아서 강민우의 지프차는 춘천 호수 옆으로 뻗친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송나희를 태운 지프차를 숲속에 세워놓은 강민우는 다시 별장으로 잠입한다. 그리고 여전히 두 남녀가 발가벗고 있는 침실로 들어간다. 강민우가 최재인의 시크릿 암호카드를 제자리에 넣어두고 별장을 나오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별장의 창문으로 눈부신 햇살에 들어온다. 깊은 잠에 빠졌던 최재인은 눈을 떴으나 머리가 띵하고 몸이 무거웠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정확하게 아침 다섯 시에 기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시침이 일곱 시를 넘고 있다. 옆을 보니 발가벗은 남규리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최재인은 양주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아니면 육체관계를 강렬하게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밝은 햇살에 여자의 음부가 들어난 알몸을 보니 묘한 충동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역겨운 생각도 들었다. 침대 모포를 끌어당겨 그녀의 알몸을 덮어준다. 출근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킨다.



최재인이 샤워를 하고 나와서도 남규리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침대 위의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최재인이 옷을 걸쳐 입고 별장을 나선다. 아침 서리가 내려앉은 승용차의 운전석으로 올라앉아 시동을 건다.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나간 최재인의 승용차가 좁은 숲길로 들어가 사라진다.



강민우는 지프차를 몰고 서울시경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기밀 파일의 안개작전을 살피다가 문득 친분이 두터운 시경의 조병문 경감이 생각난 것이다. 조 경감은 안국동 사건 수사에 직접 참여했었고, 어떤 압력에 의해서인지 좌천까지 당했었다. 그래서인지 안국동 사건 해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강민우는 조 경감으로 부터 사건에 대한 내막을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만나자고 했다.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한 서울 시경에 인접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아직 음식점 안에는 조 경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강민우는 외진 방으로 들어가서 기다렸다. 조금 앉아 기다리니 수염도 깍지 못한 조병문 경감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웬일이야!? 밥을 산다고 하니........!”

“모처럼 시간이 나서. 요즘도 바빠?”



“항상 그렇지 뭐. 사회가 경찰 편하게 놔두나!”

“경찰이 한가해야, 행복한 사회가 될 텐데.”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종업원에게 식사주문을 했다. 강민우는 조병문의 근황을 물어보며 눈치를 살폈다. 여담을 하고 있는 사이에 조업원이 불판위에 고기를 올려놓는다. 식사와 반찬들을 내려놓은 종업원이 방문을 닫고 나갔다. 강민우는 슬며시 조 경감을 바라본다.



“술 한 잔 할래?”

“아니, 식사하고 현장 나가야 돼.”



조 경감은 배가 고팠던지 수저를 들고 허겁지겁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불판위에 익어가는 고기를 뒤집으며 강민우가 슬며시 물어봤다.



“요즘도 안국동 사건을 조사 중인가?”

“시간만 나면 틈틈이, 꼭 밝히고 말거야.”



“증거가 될만한 단서는 있어?”

“그 당시 말이야. 경계근무를 하는 경찰 병력은 사건 현장과는 엉뚱한 곳에 있었어. 그리고 또 사건이 터졌어도 이상하게 경찰 병력은 움직이지 않았어. 여러 가지 미심쩍은 단서들이

많은데.......! 그런데, 그 사건은 갑자기 물어?”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싶은 건데, 그 사건에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서.”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도 중정직원이 개입되었다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어.”

“뭔데.......!?”

“사건 현장에 떨어진 사진 한 장을 발견했는데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



“지금 갖고 있어?”

“음.......! 자네니까, 보여주지.”



조 경감이 안쪽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지갑을 꺼내들었다. 지갑 속에 빛바랜 사진을 꺼내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사진을 집어 들고 보는 강민우가 눈빛이 예민해진다. 세 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있었다.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강민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빛바랜 사진이지만, 틀림없이 강민우가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최재웅과 남경식, 그리고 지금의 안기부 전산실장 최재인이 분명했다. 더욱 강민우를 놀라게 하는 것은 세 남자 옆에 나란히 있는 이국적인 마스크를 지닌 여자의 모습이다. 강민우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군수물자에 관한 ‘점프’ 작전을 수행 할 당시 관련되었던 여자 로비스트였다. 미국계 한국인 2세인 로비스트이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어떻게.......!?”

“왜! 아는 사람들이야?”

“응! 두 사람은 중정 요원이었고, 한사람은 현재 안기부 책임자........! 그런데 이 여자는 국방부 비리 의혹에 관련되었던 로비스트인데.......”

“아! 그래!? 남자들 신상정보는 나도 알지만, 여자는 이름이 남선미라는 것밖에 몰라.”



“남선미.......!? 내가 수사 작전에 직접 참여해서 잘 알아. 미국계 2세 혼혈아, 다른 이름이 있는데 뭐더라.......! 아, 앨리스 킴이 확실해.”

“앨리스 킴이라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 남선미가 남경식의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인 사실은 알고 있었어.”



“이 여자가 남경식의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이라고.......!?”

“음, 남경식의 부친은 영관급 육군 장교로 육이오 사변 전선에서 전사했지. 그 후에 남경식의 모친은 한동안 미군을 상대하는 직업여성 생활을 했었어. 그리고 미군을 만나 딸을 낳게 되고 국제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건너갔지.”



“그럼,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가 있나?”

“최재웅은 남경식의 이모부이고, 최재인은 최재웅의 동생이야.”

“이럴 수가........!”



강민우는 새로운 사실에 경악했다. 더욱 놀란 것은 최재인 전산실장이 최태웅의 동생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앨리스 킴과 그들의 관계를 알게 되고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무슨 음모인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사진 내가 좀 당분간 보관하면 안 되나?”

“음.......!? 대신, 그러면.......! 좋은 정보 있으면 줘야 돼?”

“알았어.”

“내가 시간이 없는데, 식사하고 다음에 술 한 잔 하자!”



“그래! 다음에 멋지게 술 살게.”

“하하~! 고마워.”

“고맙긴, 내가 고맙지.”



사진속의 인물들에 대한 관계를 알고 나니 강민우는 십년 묵은 체증이 소화되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조 경감이 바쁘게 서둘러 자리를 일어났다. 조 경감과 헤어져 왕릉으로 지프차를 운전하고 가는 강민우는 안개속의 미로가 들어나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내서 고통을 되돌려 주는 길은 험하고도 긴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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