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모니터 화면이 정지된 상태가 되고 흥미를 잃은 감청요원들은 하품을 하며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실에서 연락한 정보는 확인 할 수는 있었다. 물건의 운반책이 매일스포츠신문 사진기자라는 것과, 물건을 인수받는 북한 공작원의 수뇌가 리상철 대좌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대창과 앨리스 킴이 대금을 받으면 하와이로 도피 할 생각이라는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이십 여분 가량 지났을까, 모니터 화면에 다시 앨리스 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앨리스 킴을 따라 들어온 남자의 모습을 보고 강민우가 긴장을 했다. 오랫동안 행방을 찾아다니던 최태웅이 아닌가! 다소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예전보다 살집이 올라 기름진 얼굴에 고급스러운 양복을 걸친 최태웅이 확실하였다.
최태웅은 예전보다 체중도 많이 늘어 보였다. 육중한 체구로 객실을 둘러본 최태웅이 소파에 가서 앉았다. 습관적인지 앨리스 킴이 싱크대를 향한다.
“이모부! 커피 드실래요? 아니면 몸에도 안 좋은데 녹차를 드시던지.”
“녹차를 마시지.”
싱크대 앞을 오락가락하던 앨리스 킴이 찻잔을 들고 와서 최태웅이 앉아있는 소파 앞의 탁자위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탁자를 마주하고 앉는다. 그리고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한다. 모니터를 하고 있던 요원이 도청장비의 볼륨을 높였다.
“능구렁이 같은 주대창이 완전히 나를 믿기 시작했어요.”
“수고 했다. 선미한테 안 넘어갈 남자가 있나.”
“그런데, 이모부! 아무래도 내일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물건 인수하고 대금을 줄 상대가 리성철이래요. 북한 공작원들이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잖아요. 그리고 KCIA(안기부) 요원들도 이곳에 와 있는 모양이던데요.”
“음, 그래!? 어차피 주대창을 없애려면 경식이가 있어야 돼. KCIA의 시선은 경식이가 따돌릴 거야. 현장은 경식이한테 맡기고 미선인 가방만 챙겨서 나한테 와.”
“이모부는 공항에서 기다리실 거죠?”
“음, 항공권도 내가 찾아서 갖고 있을게. 지금 오사카에 있는 경식이한테 다시 전화를 할게.”
최태웅이 소파 옆의 탁자에 놓인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교환원의 응답을 기다린다. 그들이 하는 대화와 모니터에 나타나는 장면들은 도청을 하고 있는 요원들에 의해 녹화되고 있었다.
강민우는 앨리스 킴이 오빠라고 말하는 경식이라는 인물이 남경식임을 직감했다. 교환원이 나왔는지 최태웅이 일본어로 말을 했다.
“오사카 06-1857-6635, 오네가이시마스!”
기다리라는 교환원의 멘트를 듣고 최태웅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앨리스 킴은 핸드백을 열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최태웅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뽀얀 담배연기가 여인의 머리채처럼 피워 올라갔다. 잠시 후 전화기의 벨 소리가 울렸다. 최태웅이 헛기침을 하면서 수화기를 집어 들더니 침착하게 통화를 했다.
“아키토 냐!? 나, 이모부다.”
“........”
“음, 그래. 다른 게 아니고, 내일 물건 인계하고 대금을 받을 상대가 리상철이라는구나. 그러니까 준비를 단단히 해라.”
“.........”
“그리고, 난 선미하고 홍콩으로 가서 GIS로 송금할 테니 뒷수습 잘 해라.”
“.........”
“그래! 건투를 빈다.”
핸드백 속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고치던 앨리스 킴이 주위를 살핀다. 통화를 끝낸 최태웅에게 가깝게 상체를 굽힌다. 핸드백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최태웅에게 건네주며 귓속말을 한다. 도청 요원들이 최태웅이 건네받는 물건을 클로즈업 시켰다. 원형마크가 있는 열쇠였다.
그들의 귓속말은 작은 목소리여서 들리지 않았다. 도청을 하는 요원들이 볼륨을 높여도 무슨 말인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열쇠를 받아든 최태웅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다시 화장을 고치기 시작한 앨리스 킴의 등 뒤로 가서 서성거리는 최태웅은 무슨 생각인지 골똘히 한다. 마치 준비해온 일들을 재점검하는 모습이었다. 서성거리던 발걸음을 멈춘다.
“다른 문제는 없지!? 아마 없을 거야! 이번에는 특별히 신경 써야 돼.”
“가시게요?”
“아니 내 방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다녀 올 곳이 있어.”
“저도 조금 있다가 나갈 거예요.”
화장을 고치던 앨리스 킴이 핸드백을 내려놓고 일어선다. 최태웅은 기나긴 여정을 지나온 사람처럼 기지개를 켜 보인다. 아니 모든 준비가 완벽하다는 표정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객실 문을 나선다. 앨리스 킴이 문까지 따라 나가 최태웅을 배웅한다.
CCTV 모니터 화면에는 최태웅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앨리스 킴만이 남았다. 그녀는 다시 소파에 앉아 고치던 화장을 마무리한다. 찻잔을 싱크대로 옮겨놓은 그녀는 한가해 보였다. 하품을 하기도 하고, 침대 옆의 옷장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리고 팬티만 걸친 몸을 들어내 보인다. 주대창에게 안겼던 알몸을 거울 속에 비추어 본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몸이 무기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호기심으로 모니터를 주시하던 요원들이 지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의 몸매도 오랜 시간 보고 있으면, 남자의 호기심에서 멀어지는 모양이다.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강민우는 최태웅과 앨리스 킴의 대화한 말 중에 궁금한 점이 있었다. 모니터를 하고 있는 일본주재 안기부 요원에게 물었다.
“아키토가 누굽니까?”
“아!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쿠사나기의 도쿄지부 행동대장입니다.”
“GIS는 뭐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최태웅의 룸도 도청장치가 되어 있습니까?”
“아뇨! 최태웅이 별도로 룸을 예약했는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알아볼까요?”
“그래 줬으면 좋겠습니다.”
강민우의 부탁을 받은 요원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요원의 말대로라면 남경식은 일본으로 건너와서 야쿠자 조직에 들어간 것이다. 요원이 정보를 알아보려고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강민우는 무전기로 상황실과 연락을 취했다.
물건을 인수받는 북한 공작원의 수뇌가 리상철 대좌이고, 주대창은 물품 대금을 받으면 앨리스 킴과 하와이로 도피 할 생각이지만, 앨리스 킴과 최태웅. 그리고 남경식의 음모라는 정보들을 보고했다.
전화 통화를 하던 요원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강민우를 향해 돌아앉았다.
“최태웅의 룸은 VIP층인 1205호실이랍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강민우는 최태웅의 동태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강민우는 출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를 바라본 송나희도 뒤를 따라 나섰다. 힐끔 그녀를 바라본 강민우가 망설였다. 혼자서 움직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모니터에서 야릇한 장면을 보고 있던 낯선 남자요원들 사이에서 그녀 혼자 있기가 불편해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그녀를 만류하지 않고 출입문을 나섰다. 그의 뒤를 따라서 출입문을 닫고 나선 송나희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려고요?”
“바람도 쏘일 겸 최태웅의 동태를 살피려고.”
출입문 앞에서 강민우는 문에 붙은 805호라고 적힌 객실 번호를 바라본다. 최태웅의 룸으로 가려면 4층을 더 올라가야한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서 내린 강민우는 기역자로 꺾인 복도를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아서려던 강민우가 재빨리 송나희를 잡아당기며 벽에 몸을 숨겼다.
길게 이어진 중앙 복도에 중간에 두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제자리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으로 보아 룸 안에 있는 사람을 경호하는 사내들 같았다. 강민우는 마주 보이는 객실 룸의 번호를 획인 했다. 1201, 1202, 1203....... 차례대로 확인해보니 1205호실을 경호하는 사내들이었다.
강민우는 송나희에게 앞쪽 사내를 맡으라는 수신호를 했다. 강민우의 의도를 알아챈 송나희는 긴장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이 복도 끝으로 등을 돌리는 순간, 강민우가 바람처럼 내달렸다. 앞쪽 사내의 등을 가격하는 동시에 뒤쪽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내의 명치 끝을 올려 찼다.
“핫~!”
“허 억~!”
사내들이 거의 동시에 외마디를 질렀다. 갑작스럽게 등을 가격당한 사내는 엎어질 듯이 몇 걸음 앞으로 뒤뚱거렸다. 별안간 급습을 당한 사내는 분통이 터져 강민우를 향해 돌진하였다. 강민우는 명치끝을 맞고 비틀거리는 사내의 가슴을 발을 뻗어 돌려차기를 하는 순간이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사내가 강민우의 등을 향해 돌진했다.
“요이, 코로스.......!”
일본말을 내 뱉은 사내는 양발로 강민우를 걷어차려다가 뒤쪽에서 활시위를 떠난 호살처럼 빠르게 다가오는 암영을 느꼈다. 공격과 수비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는 기로였다. 사내의 뒤쪽에서 공격해 온 사람은 송나희이었다. 사내의 목을 낚아채려던 그녀는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를 비웃듯이 벽 쪽으로 피한 사내가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파고드는 단검을 피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단검이 허공을 찌르자, 사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굴욕감을 느꼈다. 여자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는 굴욕감이었다.
“요이........!”
사내는 빠르게 단검을 송나희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다가서던 그녀가 멈추면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사내의 속임수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는 옆차기로 그녀의 허리를 겨냥하였다. 사내의 발끝이 그녀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직접적인 가격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몸을 비틀어 사내의 발끝을 피하고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당황할 사이도 없이 사내는 그녀의 무릎에 가슴을 가격당하고 벌렁 나자빠졌다.
“핫! 이, 이마이마시이.......!”
송나희는 빈틈을 주지 않고 뒤로 자빠지는 사내의 머리를 다시 매섭게 걷어찼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사내를 확인한 그녀가 강민우를 돌아보았다. 강민우는 머리로 벽을 받고 쓰러진 사내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머리에 피를 흘리는 사내는 1205호실 문 앞으로 강민우에 의해 끌려오며 분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나따와 도나따데스까?”
“오네가이시마스, 히라꾸 몽!”
사내의 멱살을 치켜 올린 강민우는 무표정하게 알고 있는 일본단어를 내뱉었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소음기를 끼고 사내의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사내는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단연코 문을 열지 않을 표정이었다.
“아노.......! 나, 나이 카기.”
“잔 넨 데스네.......!”
열쇠가 없다는 사내의 말에 강민우는 사정없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금속성 소리와 함께 권총에서 발사된 탄알이 사내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하 악~!”
사내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동시에 피가 튀어 사내의 바지를 적시고 흘렀다. 고통스러움에 하얗게 질린 사내가 벌벌 떨었다. 사내는 무자비하게 권총을 발사하는 상대가 두려웠다.
“쿠야시! 와, 와까리마시타........”
사내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릎을 꿇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1205호실 객실 문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그때 송나희는 사내에게 걷어차인 허리의 통증을 느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객실 문틈의 벽에 몸을 의지하면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바로 옆의 객실인 1206호실 문이 열리며 총을 들고 나오는 사내들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민우씨! 놈들이.......!”
그녀가 말을 꺼낼 사이도 없이 총성이 들려왔다. 공기를 가르고 날아든 탄알이 강민우의 머리 옆을 스치고 벽에 틀어박혔다. 1205호실 옆의 열려진 객실 문 뒤에서 날아온 총알이었다. 강민우와 송나희도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삽시간에 호텔 12층은 요란한 총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놈들이 몇 명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강민우는 객실 문을 열어주었던 사내의 목을 움켜쥐고 비틀었다. 목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는 바닥에 뒹굴었다. 이어서 1205호실의 문이 열어 젖혀지고 또 다른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내의 이마 중앙을 겨냥한 강민우의 총구에서 불꽃이 튀어나갔다. 머리가 관통된 사내는 비명소리도 없이 볏 짚단처럼 쓸어졌다.
객실 문을 사이에 두고 옆의 객실의 사내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송나희를 바라본 강민우는 객실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가운 차림으로 침대위에 누웠던 최태웅이 기겁을 하여 일어나고 있었다. 강민우는 사격 연습을 하듯이 최태웅의 오른쪽 허벅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스프링처럼 반사적으로 최태웅이 침대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최태웅으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어서 하얗게 질렸다. 피가 솟구치는 허벅지를 끌어안은 최태웅은 그래도 중앙정보부를 거쳤고 급박하고 다양한 사태의 경험을 겪어서 노련하였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권총을 발사한 상대를 바라봤다.
“아나따와 도나따데스까?”
“한국말로 해!”
강민우는 일어나 앉은 최태웅을 걷어차며 차가운 목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걷어차여서 쓰러지는 최태웅의 가슴을 밟고 섰다. 그러나 최태웅은 여전히 이성을 잃지 않고 강민우를 노려본다.
“당신 누구야? 왜 이러는 거지. 돈이 필요한 거야?”
강민우는 최태웅의 말에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무전기를 빼들었다. 객실 입구에서는 송나희가 문틈 사이로 몸을 숨기면서 권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무전기의 버튼을 눌러 상황실을 호출하였다. 전류 음과 함께 흘러나오는 요원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비트 원이다. 12층 긴급사태, 지원바람. 상대는 총을 소지한 다수인원. 12층 지원바람.”
강민우는 무전기를 뒤 주머니에 찔러 넣고 최태웅의 이마에 총구를 겨냥하였다. 아무리 산전수전을 겪은 최태웅일지라도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이! 방아쇠를 당겨라. 하지만 이유는 알고 싶다.”
“광주사태 당시를 기억하지?”
“이 시대를 겪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
“누구나 안다고!? 흑사회를 동원해서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은 것도 누구나 알고 있을까? 내 어머니와 여동생이 비명에 살해당한 것도? 어린 소녀를 윤간하여 고통 속에 살게 하는 것도?”
“뭐, 뭐라고!? 흑사회가 동원된 것을 아는 당신 누구야? 어떻게 알지?”
“난 국가를 위해서 일하다가, 너 같은 국가 조직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
“그, 그렇다면 당신도 중정 출신......!? 흑사회를 동원한 것은 국가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게네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몰라. 단지 선동당한 군중들을 진압하기 위한 수단이었어.”
“국가 안보를 위해서 그랬다고.......!? 네 놈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고!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는 것도 모르는 버러지만도 못한 놈! 선동당한 군중.......!?”
상대를 설득하듯이 최태웅은 어쩔 수 없었다는 이론을 늘어놓았다. 불꽃이 튀듯이 눈빛이 이글거리는 강민우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이 최태웅의 왼쪽 허벅지에 관통되었다. 강민우의 발밑에 깔린 최태웅은 비명을 내질렀다. 선혈이 낭자해진 양 다리를 버둥거리며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런 악마 같은 놈. 이럴 수가.......!”
“난 성질이 급해. 목숨이라도 붙어 있으려면 말해! 당시에 내 지시를 받았던 흑사회 조직원들이 있는 곳을.”
“나, 난 몰라. 그 놈들과 인연을 끊었으니까.”
“모른다고?”
강민우가 다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구에서 탄알이 발사되지는 않았다. 놀이 쇠의 ‘쩔꺽!’ 소리와 함께 최태웅은 기겁을 하여 눈동자를 크게 뜨고 바들바들 떨었다.
객실 밖에서는 더욱 요란한 총성이 들려왔다. 강민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상황실 요원들과 놈들의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출입구에서 놈들에게 권총을 난사하던 송나희가 강민우에게 다가왔다. 강민우는 천천히 탄창을 갈아 끼웠다.
“운이 좋은 건가! 몇 초를 더 살 수 있겠지만.”
혼잣말처럼 내뱉은 강민우가 노리쇠를 후퇴시키고 최태웅에게 총구를 겨냥하였다. 최태웅은 자신의 이마를 겨냥하는 총구를 바라보며 두 손을 내저었다.
“제발! 쏘, 쏘지 마. 보스였던 곽춘호가 있는 곳은 알아. 곽춘호가 다른 놈들을 알고 있을 거야.”
“어디.......!?”
“얼마 전에 군산에서 목장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
“군산, 어디?”
“그 이상은 나도 몰라. 정말야.”
정말 살고 싶은지 간절한 눈빛으로 최태웅은 애원을 하였다. 강민우는 최태웅으로부터 흑사회에 관한 정보를 끝까지 캐내고 싶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알아낸다는 것은 무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객실 밖에서 요란하게 들리던 총성이 멈추었다. 요원들에 의해 최태웅의 수하들이 모두 제압당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실 요원들이 객실로 몰려 들어왔다. 강민우는 권총을 겨드랑이에 집어넣고 돌아섰다. 그의 머릿속에는 흑사회 조직원들을 찾는 방법만이 떠 올리고 있었다.
송나희는 강민우의 행동을 낱낱이 보고 있었다. 강민우의 평소 인상은 인간미 넘치고 매너가 넘치는 호남 형이었다. 작전 중에 예민해지는 표정과 눈빛을 볼 수는 있었지만, 그토록 차갑고도 냉혹한 그의 모습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그만큼, 그가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원한에 사무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추위를 느끼는 날씨에 하늘에는 구름이 약간 끼어있었다. 빗방울이라도 떨어질 날씨였다. 도쿄스타디움 주변은 날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츠다세이코의 공연을 관람하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마츠다세이코는 일본인들이 열광할 만큼 최고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플래카드와 애드벌룬들이 공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주차장은 이미 더 이상 차량들이 진입할 수도 없었다.
전광판이 돌아가고 있는 시계탑 밑에서 강민우는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스타디움 앞에서 큰 도로변까지 입장을 하려는 관람객들이 꼬리를 물고 줄을 지어 있었다. 많은 인파 속에서도 강민우는 점 하나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한 시선을 보낸다. 그의 곁에 있는 송나희와 홍성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많은 인파 속에 묻혀있는 안기부와 ‘비트’ 팀 요원들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안기부의 요청을 받은 일본 경찰들도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스타디움 입구로 검은색 리무진이 들어오고 인파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공연의 주이공인 여가수 마츠다세이코가 들어오고 있었다. 몰려드는 팬들을 저지하는 경찰들의 호각소리와 경호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츠다세이코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십대의 마츠다세이코는 선정적인 몸매가 들어나는 셔츠와 핫팬티를 걸치고 얼굴을 덮을 만큼 커다란 검은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팬들의 아우성속에 경호원에 둘러싸인 마츠다세이코는 빠른 걸음으로 스타디움 안으로 사라졌다.
강민우의 시선은 바쁘게 움직였다. 요원들이 귀에 착용하고 있는 레시버로 스타디움 입구에 앨리스 킴이 나타났다는 전 과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강민우와 홍성식이 스타디움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송나희도 그들 뒤를 따라 뛰었다. 입구에는 입장하려는 관람객들로 혼잡하였다. 그들은 인파 속을 헤집고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갔다.
스타디움 안도 혼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욱이나 관람객들 중에는 가면을 착용한 사람들도 많아서 특정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강민우의 시선이 스타디움 옆 복도에 가득 메운 사람들을 향했다. 기자완장을 두른 매스컴의 기자들, 그리고 촬영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멘 사진기자들의 모습도 많았다. 그러나 앨리스 킴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복도를 살피던 강민우가 스타디움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층 스타디움 공연장으로 들어서니 헤아릴 수 없는 관람객들이 일층과 이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손에든 야광 풍선을 흔들기도 하고 목청을 높여 마츠다세이코를 외치고 있었다. 심장을 울리는 베이스의 전주 음악과 함께 화려한 영상 디자인이 무대 위에 펼쳐졌다.-------
이십 여분 가량 지났을까, 모니터 화면에 다시 앨리스 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앨리스 킴을 따라 들어온 남자의 모습을 보고 강민우가 긴장을 했다. 오랫동안 행방을 찾아다니던 최태웅이 아닌가! 다소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예전보다 살집이 올라 기름진 얼굴에 고급스러운 양복을 걸친 최태웅이 확실하였다.
최태웅은 예전보다 체중도 많이 늘어 보였다. 육중한 체구로 객실을 둘러본 최태웅이 소파에 가서 앉았다. 습관적인지 앨리스 킴이 싱크대를 향한다.
“이모부! 커피 드실래요? 아니면 몸에도 안 좋은데 녹차를 드시던지.”
“녹차를 마시지.”
싱크대 앞을 오락가락하던 앨리스 킴이 찻잔을 들고 와서 최태웅이 앉아있는 소파 앞의 탁자위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탁자를 마주하고 앉는다. 그리고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한다. 모니터를 하고 있던 요원이 도청장비의 볼륨을 높였다.
“능구렁이 같은 주대창이 완전히 나를 믿기 시작했어요.”
“수고 했다. 선미한테 안 넘어갈 남자가 있나.”
“그런데, 이모부! 아무래도 내일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물건 인수하고 대금을 줄 상대가 리성철이래요. 북한 공작원들이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잖아요. 그리고 KCIA(안기부) 요원들도 이곳에 와 있는 모양이던데요.”
“음, 그래!? 어차피 주대창을 없애려면 경식이가 있어야 돼. KCIA의 시선은 경식이가 따돌릴 거야. 현장은 경식이한테 맡기고 미선인 가방만 챙겨서 나한테 와.”
“이모부는 공항에서 기다리실 거죠?”
“음, 항공권도 내가 찾아서 갖고 있을게. 지금 오사카에 있는 경식이한테 다시 전화를 할게.”
최태웅이 소파 옆의 탁자에 놓인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교환원의 응답을 기다린다. 그들이 하는 대화와 모니터에 나타나는 장면들은 도청을 하고 있는 요원들에 의해 녹화되고 있었다.
강민우는 앨리스 킴이 오빠라고 말하는 경식이라는 인물이 남경식임을 직감했다. 교환원이 나왔는지 최태웅이 일본어로 말을 했다.
“오사카 06-1857-6635, 오네가이시마스!”
기다리라는 교환원의 멘트를 듣고 최태웅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앨리스 킴은 핸드백을 열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최태웅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뽀얀 담배연기가 여인의 머리채처럼 피워 올라갔다. 잠시 후 전화기의 벨 소리가 울렸다. 최태웅이 헛기침을 하면서 수화기를 집어 들더니 침착하게 통화를 했다.
“아키토 냐!? 나, 이모부다.”
“........”
“음, 그래. 다른 게 아니고, 내일 물건 인계하고 대금을 받을 상대가 리상철이라는구나. 그러니까 준비를 단단히 해라.”
“.........”
“그리고, 난 선미하고 홍콩으로 가서 GIS로 송금할 테니 뒷수습 잘 해라.”
“.........”
“그래! 건투를 빈다.”
핸드백 속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고치던 앨리스 킴이 주위를 살핀다. 통화를 끝낸 최태웅에게 가깝게 상체를 굽힌다. 핸드백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최태웅에게 건네주며 귓속말을 한다. 도청 요원들이 최태웅이 건네받는 물건을 클로즈업 시켰다. 원형마크가 있는 열쇠였다.
그들의 귓속말은 작은 목소리여서 들리지 않았다. 도청을 하는 요원들이 볼륨을 높여도 무슨 말인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열쇠를 받아든 최태웅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다시 화장을 고치기 시작한 앨리스 킴의 등 뒤로 가서 서성거리는 최태웅은 무슨 생각인지 골똘히 한다. 마치 준비해온 일들을 재점검하는 모습이었다. 서성거리던 발걸음을 멈춘다.
“다른 문제는 없지!? 아마 없을 거야! 이번에는 특별히 신경 써야 돼.”
“가시게요?”
“아니 내 방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다녀 올 곳이 있어.”
“저도 조금 있다가 나갈 거예요.”
화장을 고치던 앨리스 킴이 핸드백을 내려놓고 일어선다. 최태웅은 기나긴 여정을 지나온 사람처럼 기지개를 켜 보인다. 아니 모든 준비가 완벽하다는 표정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객실 문을 나선다. 앨리스 킴이 문까지 따라 나가 최태웅을 배웅한다.
CCTV 모니터 화면에는 최태웅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앨리스 킴만이 남았다. 그녀는 다시 소파에 앉아 고치던 화장을 마무리한다. 찻잔을 싱크대로 옮겨놓은 그녀는 한가해 보였다. 하품을 하기도 하고, 침대 옆의 옷장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리고 팬티만 걸친 몸을 들어내 보인다. 주대창에게 안겼던 알몸을 거울 속에 비추어 본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몸이 무기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호기심으로 모니터를 주시하던 요원들이 지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의 몸매도 오랜 시간 보고 있으면, 남자의 호기심에서 멀어지는 모양이다.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강민우는 최태웅과 앨리스 킴의 대화한 말 중에 궁금한 점이 있었다. 모니터를 하고 있는 일본주재 안기부 요원에게 물었다.
“아키토가 누굽니까?”
“아!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쿠사나기의 도쿄지부 행동대장입니다.”
“GIS는 뭐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최태웅의 룸도 도청장치가 되어 있습니까?”
“아뇨! 최태웅이 별도로 룸을 예약했는지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알아볼까요?”
“그래 줬으면 좋겠습니다.”
강민우의 부탁을 받은 요원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요원의 말대로라면 남경식은 일본으로 건너와서 야쿠자 조직에 들어간 것이다. 요원이 정보를 알아보려고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강민우는 무전기로 상황실과 연락을 취했다.
물건을 인수받는 북한 공작원의 수뇌가 리상철 대좌이고, 주대창은 물품 대금을 받으면 앨리스 킴과 하와이로 도피 할 생각이지만, 앨리스 킴과 최태웅. 그리고 남경식의 음모라는 정보들을 보고했다.
전화 통화를 하던 요원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강민우를 향해 돌아앉았다.
“최태웅의 룸은 VIP층인 1205호실이랍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강민우는 최태웅의 동태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강민우는 출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를 바라본 송나희도 뒤를 따라 나섰다. 힐끔 그녀를 바라본 강민우가 망설였다. 혼자서 움직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모니터에서 야릇한 장면을 보고 있던 낯선 남자요원들 사이에서 그녀 혼자 있기가 불편해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그녀를 만류하지 않고 출입문을 나섰다. 그의 뒤를 따라서 출입문을 닫고 나선 송나희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가려고요?”
“바람도 쏘일 겸 최태웅의 동태를 살피려고.”
출입문 앞에서 강민우는 문에 붙은 805호라고 적힌 객실 번호를 바라본다. 최태웅의 룸으로 가려면 4층을 더 올라가야한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서 내린 강민우는 기역자로 꺾인 복도를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아서려던 강민우가 재빨리 송나희를 잡아당기며 벽에 몸을 숨겼다.
길게 이어진 중앙 복도에 중간에 두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제자리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으로 보아 룸 안에 있는 사람을 경호하는 사내들 같았다. 강민우는 마주 보이는 객실 룸의 번호를 획인 했다. 1201, 1202, 1203....... 차례대로 확인해보니 1205호실을 경호하는 사내들이었다.
강민우는 송나희에게 앞쪽 사내를 맡으라는 수신호를 했다. 강민우의 의도를 알아챈 송나희는 긴장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이 복도 끝으로 등을 돌리는 순간, 강민우가 바람처럼 내달렸다. 앞쪽 사내의 등을 가격하는 동시에 뒤쪽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내의 명치 끝을 올려 찼다.
“핫~!”
“허 억~!”
사내들이 거의 동시에 외마디를 질렀다. 갑작스럽게 등을 가격당한 사내는 엎어질 듯이 몇 걸음 앞으로 뒤뚱거렸다. 별안간 급습을 당한 사내는 분통이 터져 강민우를 향해 돌진하였다. 강민우는 명치끝을 맞고 비틀거리는 사내의 가슴을 발을 뻗어 돌려차기를 하는 순간이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사내가 강민우의 등을 향해 돌진했다.
“요이, 코로스.......!”
일본말을 내 뱉은 사내는 양발로 강민우를 걷어차려다가 뒤쪽에서 활시위를 떠난 호살처럼 빠르게 다가오는 암영을 느꼈다. 공격과 수비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는 기로였다. 사내의 뒤쪽에서 공격해 온 사람은 송나희이었다. 사내의 목을 낚아채려던 그녀는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를 비웃듯이 벽 쪽으로 피한 사내가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파고드는 단검을 피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단검이 허공을 찌르자, 사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굴욕감을 느꼈다. 여자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는 굴욕감이었다.
“요이........!”
사내는 빠르게 단검을 송나희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 다가서던 그녀가 멈추면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사내의 속임수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는 옆차기로 그녀의 허리를 겨냥하였다. 사내의 발끝이 그녀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직접적인 가격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몸을 비틀어 사내의 발끝을 피하고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당황할 사이도 없이 사내는 그녀의 무릎에 가슴을 가격당하고 벌렁 나자빠졌다.
“핫! 이, 이마이마시이.......!”
송나희는 빈틈을 주지 않고 뒤로 자빠지는 사내의 머리를 다시 매섭게 걷어찼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사내를 확인한 그녀가 강민우를 돌아보았다. 강민우는 머리로 벽을 받고 쓰러진 사내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머리에 피를 흘리는 사내는 1205호실 문 앞으로 강민우에 의해 끌려오며 분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나따와 도나따데스까?”
“오네가이시마스, 히라꾸 몽!”
사내의 멱살을 치켜 올린 강민우는 무표정하게 알고 있는 일본단어를 내뱉었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소음기를 끼고 사내의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사내는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단연코 문을 열지 않을 표정이었다.
“아노.......! 나, 나이 카기.”
“잔 넨 데스네.......!”
열쇠가 없다는 사내의 말에 강민우는 사정없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금속성 소리와 함께 권총에서 발사된 탄알이 사내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하 악~!”
사내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동시에 피가 튀어 사내의 바지를 적시고 흘렀다. 고통스러움에 하얗게 질린 사내가 벌벌 떨었다. 사내는 무자비하게 권총을 발사하는 상대가 두려웠다.
“쿠야시! 와, 와까리마시타........”
사내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릎을 꿇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1205호실 객실 문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그때 송나희는 사내에게 걷어차인 허리의 통증을 느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객실 문틈의 벽에 몸을 의지하면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바로 옆의 객실인 1206호실 문이 열리며 총을 들고 나오는 사내들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민우씨! 놈들이.......!”
그녀가 말을 꺼낼 사이도 없이 총성이 들려왔다. 공기를 가르고 날아든 탄알이 강민우의 머리 옆을 스치고 벽에 틀어박혔다. 1205호실 옆의 열려진 객실 문 뒤에서 날아온 총알이었다. 강민우와 송나희도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삽시간에 호텔 12층은 요란한 총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놈들이 몇 명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강민우는 객실 문을 열어주었던 사내의 목을 움켜쥐고 비틀었다. 목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는 바닥에 뒹굴었다. 이어서 1205호실의 문이 열어 젖혀지고 또 다른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내의 이마 중앙을 겨냥한 강민우의 총구에서 불꽃이 튀어나갔다. 머리가 관통된 사내는 비명소리도 없이 볏 짚단처럼 쓸어졌다.
객실 문을 사이에 두고 옆의 객실의 사내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송나희를 바라본 강민우는 객실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가운 차림으로 침대위에 누웠던 최태웅이 기겁을 하여 일어나고 있었다. 강민우는 사격 연습을 하듯이 최태웅의 오른쪽 허벅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스프링처럼 반사적으로 최태웅이 침대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최태웅으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어서 하얗게 질렸다. 피가 솟구치는 허벅지를 끌어안은 최태웅은 그래도 중앙정보부를 거쳤고 급박하고 다양한 사태의 경험을 겪어서 노련하였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권총을 발사한 상대를 바라봤다.
“아나따와 도나따데스까?”
“한국말로 해!”
강민우는 일어나 앉은 최태웅을 걷어차며 차가운 목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걷어차여서 쓰러지는 최태웅의 가슴을 밟고 섰다. 그러나 최태웅은 여전히 이성을 잃지 않고 강민우를 노려본다.
“당신 누구야? 왜 이러는 거지. 돈이 필요한 거야?”
강민우는 최태웅의 말에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무전기를 빼들었다. 객실 입구에서는 송나희가 문틈 사이로 몸을 숨기면서 권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강민우는 무전기의 버튼을 눌러 상황실을 호출하였다. 전류 음과 함께 흘러나오는 요원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비트 원이다. 12층 긴급사태, 지원바람. 상대는 총을 소지한 다수인원. 12층 지원바람.”
강민우는 무전기를 뒤 주머니에 찔러 넣고 최태웅의 이마에 총구를 겨냥하였다. 아무리 산전수전을 겪은 최태웅일지라도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이! 방아쇠를 당겨라. 하지만 이유는 알고 싶다.”
“광주사태 당시를 기억하지?”
“이 시대를 겪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
“누구나 안다고!? 흑사회를 동원해서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은 것도 누구나 알고 있을까? 내 어머니와 여동생이 비명에 살해당한 것도? 어린 소녀를 윤간하여 고통 속에 살게 하는 것도?”
“뭐, 뭐라고!? 흑사회가 동원된 것을 아는 당신 누구야? 어떻게 알지?”
“난 국가를 위해서 일하다가, 너 같은 국가 조직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
“그, 그렇다면 당신도 중정 출신......!? 흑사회를 동원한 것은 국가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게네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몰라. 단지 선동당한 군중들을 진압하기 위한 수단이었어.”
“국가 안보를 위해서 그랬다고.......!? 네 놈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고!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는 것도 모르는 버러지만도 못한 놈! 선동당한 군중.......!?”
상대를 설득하듯이 최태웅은 어쩔 수 없었다는 이론을 늘어놓았다. 불꽃이 튀듯이 눈빛이 이글거리는 강민우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이 최태웅의 왼쪽 허벅지에 관통되었다. 강민우의 발밑에 깔린 최태웅은 비명을 내질렀다. 선혈이 낭자해진 양 다리를 버둥거리며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런 악마 같은 놈. 이럴 수가.......!”
“난 성질이 급해. 목숨이라도 붙어 있으려면 말해! 당시에 내 지시를 받았던 흑사회 조직원들이 있는 곳을.”
“나, 난 몰라. 그 놈들과 인연을 끊었으니까.”
“모른다고?”
강민우가 다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구에서 탄알이 발사되지는 않았다. 놀이 쇠의 ‘쩔꺽!’ 소리와 함께 최태웅은 기겁을 하여 눈동자를 크게 뜨고 바들바들 떨었다.
객실 밖에서는 더욱 요란한 총성이 들려왔다. 강민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상황실 요원들과 놈들의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출입구에서 놈들에게 권총을 난사하던 송나희가 강민우에게 다가왔다. 강민우는 천천히 탄창을 갈아 끼웠다.
“운이 좋은 건가! 몇 초를 더 살 수 있겠지만.”
혼잣말처럼 내뱉은 강민우가 노리쇠를 후퇴시키고 최태웅에게 총구를 겨냥하였다. 최태웅은 자신의 이마를 겨냥하는 총구를 바라보며 두 손을 내저었다.
“제발! 쏘, 쏘지 마. 보스였던 곽춘호가 있는 곳은 알아. 곽춘호가 다른 놈들을 알고 있을 거야.”
“어디.......!?”
“얼마 전에 군산에서 목장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
“군산, 어디?”
“그 이상은 나도 몰라. 정말야.”
정말 살고 싶은지 간절한 눈빛으로 최태웅은 애원을 하였다. 강민우는 최태웅으로부터 흑사회에 관한 정보를 끝까지 캐내고 싶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알아낸다는 것은 무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객실 밖에서 요란하게 들리던 총성이 멈추었다. 요원들에 의해 최태웅의 수하들이 모두 제압당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실 요원들이 객실로 몰려 들어왔다. 강민우는 권총을 겨드랑이에 집어넣고 돌아섰다. 그의 머릿속에는 흑사회 조직원들을 찾는 방법만이 떠 올리고 있었다.
송나희는 강민우의 행동을 낱낱이 보고 있었다. 강민우의 평소 인상은 인간미 넘치고 매너가 넘치는 호남 형이었다. 작전 중에 예민해지는 표정과 눈빛을 볼 수는 있었지만, 그토록 차갑고도 냉혹한 그의 모습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그만큼, 그가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원한에 사무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추위를 느끼는 날씨에 하늘에는 구름이 약간 끼어있었다. 빗방울이라도 떨어질 날씨였다. 도쿄스타디움 주변은 날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츠다세이코의 공연을 관람하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마츠다세이코는 일본인들이 열광할 만큼 최고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플래카드와 애드벌룬들이 공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주차장은 이미 더 이상 차량들이 진입할 수도 없었다.
전광판이 돌아가고 있는 시계탑 밑에서 강민우는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스타디움 앞에서 큰 도로변까지 입장을 하려는 관람객들이 꼬리를 물고 줄을 지어 있었다. 많은 인파 속에서도 강민우는 점 하나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한 시선을 보낸다. 그의 곁에 있는 송나희와 홍성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많은 인파 속에 묻혀있는 안기부와 ‘비트’ 팀 요원들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안기부의 요청을 받은 일본 경찰들도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스타디움 입구로 검은색 리무진이 들어오고 인파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공연의 주이공인 여가수 마츠다세이코가 들어오고 있었다. 몰려드는 팬들을 저지하는 경찰들의 호각소리와 경호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츠다세이코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십대의 마츠다세이코는 선정적인 몸매가 들어나는 셔츠와 핫팬티를 걸치고 얼굴을 덮을 만큼 커다란 검은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팬들의 아우성속에 경호원에 둘러싸인 마츠다세이코는 빠른 걸음으로 스타디움 안으로 사라졌다.
강민우의 시선은 바쁘게 움직였다. 요원들이 귀에 착용하고 있는 레시버로 스타디움 입구에 앨리스 킴이 나타났다는 전 과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강민우와 홍성식이 스타디움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송나희도 그들 뒤를 따라 뛰었다. 입구에는 입장하려는 관람객들로 혼잡하였다. 그들은 인파 속을 헤집고 스타디움 안으로 들어갔다.
스타디움 안도 혼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욱이나 관람객들 중에는 가면을 착용한 사람들도 많아서 특정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강민우의 시선이 스타디움 옆 복도에 가득 메운 사람들을 향했다. 기자완장을 두른 매스컴의 기자들, 그리고 촬영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멘 사진기자들의 모습도 많았다. 그러나 앨리스 킴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복도를 살피던 강민우가 스타디움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층 스타디움 공연장으로 들어서니 헤아릴 수 없는 관람객들이 일층과 이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손에든 야광 풍선을 흔들기도 하고 목청을 높여 마츠다세이코를 외치고 있었다. 심장을 울리는 베이스의 전주 음악과 함께 화려한 영상 디자인이 무대 위에 펼쳐졌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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