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숙취로 어질거리는 머릴 싸잡고 1층 로비로 들어서니 삼삼오오 모여있던 일본인들이 일제히 그들 힐끗거리며 맹렬히 쑥떡거린다.
그 쑥덕임속에 간간히 당수의 뭔가를 날리는 몸짓이 어재의 일이 소문이 퍼진듯...
아무래도 이곳에선 터프가이로 찍혀버릴듯...

그러거나말거나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도 쌩쌩한 노장(?) 박대리의 뒤를 따라 자판기를 향하는데, 찬호의 손에 누군가 가만히 차가운 캔커피를 쥐어준다.
누구? 고갤돌려보니 어제 눈길을 마주쳐오던 나가세의 얼굴이 코앞이다.
엇~하며 놀라 쳐다보니 영어로 뭐라뭐라 그러는데, 창졸간이라 뭐라는지 알아듣질 못했다.

"물론, 당근 말밥입니다. 꼭 그 나갈테니 걱정마세요"

찬호의 어깰 움켜쥐며 눈으론 레이저를 내쏘고 입으론 브레쓰를 내뿜는듯한 박대리의 대답을 뒤로하고
나가세는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사라진다.

"뭐라그런거에요?"

"이따 퇴근후 우리 셋하고 저녁 같이 먹잔다, 이놈아~"

마구 발광하는 박대리의 헤드락을 가볍게 벗어나며 찬호는 이게 또 뭔일이라냐...싶지만, 아무래도 자기때문은 아니고 돈많고 키크고 잘생긴 박대리때문은 아닐까 싶어서 그냥 덤덤히 지나갔다.

꺼꾸로 매달려도 시계는 돌아간다고, 지루한 연수실의 또 하루가 지나고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박대리의 등뒤로 후광이라도 뻗치는듯 점차 기세가 살아오르기 시작한다.

"역시...귀공자계의 카사노바다...이건가?"

그렇다. 한국내에서도 돈에 쪼들려 시장바닥에서 고갈비에 밥 두그릇, 소주 두병으로 때우는 찬호와는 다르게 하룻밤에도 수백만원을 뿌리는 박대리는 일본에서 그 강력한 환율의 열세와 살인적 물가를 간단히 무시하고 일본 화류계로 진출할 결심을 하고 3개월짜리 연수에 지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밥값은 이놈이 쏘것지"

그러나 남자에게 쓸 돈은 없다는 박대리의 신조...
찬호는 박대리가 안쏘면 "저녁식사는 구내식당"이란 캐치프레이드로 항복을 받아내고, 로비로 향했다.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가을의 따가운 햇살이 로비에 비스듬히 쏟아지고, 그 속에 뒤돌아보는 나가세의 긴 생머리가 살짝 감기는 모습은 정말 한폭의 그림과도 같아 찬호의 가슴을 쿵~하고 울렸다.
아이보리 드레스 셔츠와 검은색 프레아스커트가 나가세의 몸을 따라 감기며 돌아서는데, 또 그모습이 마치 황금빛 햇살 속의 순결한 여신과도 같아 또 한번 찬호의 맘속을 후려쳤다.
싱그러운 나가세의 웃음을 바라보느라 다른 두 명의 여자가 더 있는 것도, 박대리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도 느끼지못하고 그저 몽롱한 그 무언가에 사로잡혀 따라갈뿐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넓직한 실내에 피아노의 선율이 흐르는 유럽풍의 레스토랑이다.
찬호는 머리털나고 이런 곳은 처음이라 뭘 어떻게해야 될지를 몰라 한숨만 내쉬고있다.
찬홀 가만히 살펴보던 나가세가 그에게 몸을 기울여 가만히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는데, 그 머리에서 피어오르는 상큼한 샴푸향이 찬호의 가슴을 뛰게하고, 몸을 기울일때 셔츠 사이로 보이는 레이쓰와 뽀얀 살결은 정신을 혼미시킨다.
더구나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써주는 나가세를 보며 찬호의 마음도 그녀를 향해 열려만 간다.

1차, 2차를 끝내고 자연스럽게 짝을 이뤄 각자 헤어지자 찬호는 당황스러워졌다.
아는 곳도 없는 낯선 땅, 땅랄땅랑한 지갑사정, 그리고 아리따운 여인...일천한 경험... ㅡ.,ㅡb
당황해하는 그의 손안으로 서늘한 누군가의 손길이 들어와 깍지를 끼고 그를 끌어당긴다.
그녀를 바라보니 침착함 속에서도 일렁이는 열기가 눈속에 살아있어, 알수없는 기분이 되어 그녀가 이끄는데로 따가가게 된 찬호.
낯선 일본 전철을 이리저리 갈아타고 어딘지도 모를 곳에 도착하니 빌라들이 쭉 늘어선 모양의 주택가다.
엇~하고 주춤주춤거리며 나가세의 뒤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니, 대략 12평쯤 되보이는 일본풍의 원룸형.
거실은 다다미와 고마츠 겸용으로 쓸 수있을 것같은 티테이블과 가지런한 방석들, 그 너머로 작은 베란다와 왼쪽엔 주방, 화장실, 그리고 침실이 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처음 들어와보는 찬호가 마루에 앉아 두리번 거리다가 주방에 차를 준비하는 낙세를 보고 갑자기 이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싶어서 정신을 집중했다.

나가세가 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
그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제 정신이 든 찬호는 더 이상 어리벙벙해지면 이 천금같은 기회를 날릴 뿐인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찬호가 벌떡 몸을 일으키고 나가세를 향해 다가가자 뭔가를 느낀듯 그녀도 고개를 돌려 어깨넘어로 그를 뜨겁게 쳐다본다.
그리고 둘은 강렬하게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