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에서 노점 그리고 가게
이글은 먼저 한 여인의 진솔한 고백을 소설화한 것이며 그 분의 친구 분으로부터 받은 메일이며 이 글은 본인의 승낙을 받은 후에 올립니다.
<친구가 글 보고서 한참이나 웃고 울고 난리였답니다.
아주 잘 쓰셨다고 흡족해 하였어요.
어서 글 올려주세요...><-----밑의 글을 이 사연의 주인공 친구 분으로서 먼저 주인공의 양해를 구한 후에 올리다고 했더니 이렇게 쪽지가 왔습니다.
그래 소재 제보자님과 주인공의 승낙으로 보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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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50이 조금 넘은 여자랍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53살 먹은 여자랍니다.
심이 없었다면 지금은 온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정겹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욕심이란 것이 끝이 없어서 더 많이 벌고 싶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먼저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부탁드립니다.
저처럼 노숙자에서 노점상으로 변모하는 어려운 과정을 겪지 않으시려면 먹고 살 정도만 되신다면 지그 그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시라고 말입니다.
저희 가족 한 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답니다.
남편도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먹고 살 정도의 수입을 되었었고 아이들도 다른 집 아이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하며 커 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미래가 너무나도 막연해 보였습니다.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어쩌나, 아이들 대학에 들어가면 그 많은 등록금은 어떻게 조달하나, 또 아이들이 키웠다고 늙어서 아이들에게 의지하여 살 수는 없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 부부의 말년은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이 저로 하여금 돈의 노예로 만들어버렸고 그 노여는 보통 사람들의 말처럼 젊어 고생은 사서한다는 말로 변하였으며 그것은 어떻게 하든지 나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어이 저에게 인간이 막장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었고 그 막장 생활을 하도록 하였으며 고맙게도 우연히 만난 동창생 덕에 전 노숙 생활에서 탈출을 하여 지금은 그보다는 조금 낳은 노점상을 하다가 돈을 조금 벌자 김밥이며 우동 혹은 떡볶이 등을 팔고 있는 분식집을 하고 있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의 이야기를 거의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전개해 보겠습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우리 가정은 정말이지 화목하고 행복한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저의 욕심이 기어이 화를 부르고 만 것입니다.
저희 친정은 아주 부유하였습니다.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던지 돈 아까운줄 몰랐고 그랬기에 제 주변에는 항상 많은 친구들이 따랐답니다.(이게 지금의 저를 있게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뿐만 아니라 무려 35여 년 전의 일이지만 소위 요즘 말로 명품이 아니면 입지 않았고 신지 않았으며 쓰지도 아니하였고 사지도 아니하였으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였다면 얼마나 우리 친정이 부유하였는지 보지 아니하여도 대충 짐작을 할 것입니다.
또 대학을 졸업하고 올린 결혼식은 그야말로 초호화판이었습니다.
많은 하객 때문에 결혼식장은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신혼여행을 다녀왔더니 시가집이나 친정집에서 공통적으로 한 말이었거든요.
이는 우리 친정집이 부유한 탓도 있었지만 남편도 대기업에 근무를 하였고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많은 친구들과 교류도 하였고 동아리 모임에서도 신뢰를 받는 사람이라 많은 하객들을 불러 모으는데 일조를 한 셈이었답니다.
그런 많은 하객들의 축하 속에 결혼을 한 덕인지는 몰라도 우리 부부에게는 저보다 아니 남편보다도 예쁜 공주 둘을 두었답니다.
문제는 남편이 우리 부부의 노후를 염려하여 00에다가 명품에까지는 이르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메이커만 대면 알아 줄만한 옷 가게를 시작한 것이 돈을 모아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가져다준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가온 욕망의 노예였습니다.
장사는 그런대로 잘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욕망이라는 것의 노예가 되어버린 저에게는 그런 돈은 잔돈에 불과하게 보였습니다.
목돈을 잡고 싶었습니다.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겠다, 친정도 부유하겠다, 거기다가 메이커 옷 가게까지 하는 우리였기에 주변 상가들의 우리 부부에 대한 믿음은 엄청났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당시에도 유명한 건설업체이지만 지금도 잘 나가는 건설업체 이름을 대 가며 00건설이 망하면 망하였지 명희네(큰딸아이 이름이 명희) 가게는 망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더욱더 욕망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건 계모임을 만들게 하였고 그리고는 그들은 아녀자이지만 든든한 남편이 뒤에서 받치고 있는 저를 그 계모임의 회장으로 뽑아주었고 그리고 돈 모으기 계를 조직토록 부추겼습니다.
번호계의 경우 좋은 번호는 계주인 제 목이었고 낙찰계 역시 제가 우선이었습니다.
재미가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을 한 것처럼 메이커 옷이라고 하지만 옷가지를 팔아봐야 본전을 빼고 나면 거의 잔돈 수준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지만 돈 모으기 계를 시작하니 목돈이 마구 들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 모으기 계모임에 가입을 하지 못 한 가게 사장이나 저를 아는 사람들이 계속 계를 더 만들기를 원하였고 그러면 계원 수만 차면 전 또 하나의 계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만든 계가 거의 수십 개가 훨씬 넘었습니다.
금액이 적은 것은 몇 백 만원 단위였지만 옷가게 주변의 사장들이 주축인 계는 몇 천 단위로 나갔습니다.
당시에는 겁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게 큰 금액인지 적은 금액인지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하였지만 지금 생각하여 보면 대충 어림짐작으로 하여도 수 백 억 원이 넘는 거대한 금액이었습니다.
1997년 저에게 아니 우리 부부는 물론이고 두 딸과 친정 그리고 시집을 암흑천지로 뒤덮은 IMF가 터진 것입니다.
계라는 것이 한 사람만 펑크가 나면 그 사람과 연계 된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펑크가 나게 되어있는 도미노현상과 같은 결과가 나게 마련이란 것을 처음에 몰랐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 옷 가게만이 아니라 이웃 가게들도 연쇄적으로 쓰러졌으며 계는 풍비박산이 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집을 나갔고 저 역시 빚쟁이들 성화에 견디지 못 하고 딸아이들을 친척 집에(다행히 우리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음) 맡기고 저 역시 아반도주를 하지 않으면 한 되었습니다.
수중에 들은 돈이라고 해 봐야 몇 칠 여관을 전전하면 빈털터리가 될 정도로 작은 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낮선 도시에서 저는 처음으로 노래방 도우미 노릇을 하였습니다.
말이 좋아 노래방 도우미지 취객들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밥은 먹어야 하였고 변변치 못한 싸구려 여관방에서라도 다리를 뻗고 잠은 자야 하였기에 참을 수가 없는 수모 감을 참아 가면서 도우미를 하였습니다.
노래방 도우미를 하면서 배운 것은 저로서는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라고 하였던 고정된 하나의 편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있고 없고 에 따라 남자들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였습니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저게 남편의 부업으로 메이커 옷 가게를 하였다고 하였죠.
그때 일입니다.
저야 간혹 시켜먹었지만 제가 데리고 있던 종업원들이 먹는 점심을 전문적으로 배달을 해 주는 식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편이 부업삼아 처음 메이커 옷 가게를 개업을 했을 때만 하여도 그 식당은 부부가 함께 운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 하여 그 부부의 남편이 밥을 배달하러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는 그만 사고로 죽어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사건이었죠.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아줌마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를 모시고는 다시 식당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은 저녁이면 간단한 안주로 술도 팔았지만 그 아줌마의 남편이 살았을 때는 주변 상가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러 가지 아니하고 상가에서 아르바이트 내지는 일반 종업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퇴근을 하면서 간단하게 한 잔 들이키고 지나가는 정도의 식당이었는데 그 아줌마의 남편이 죽고 장례를 치르고 영업을 재개하자 상가 사장 급들의 남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지 뭡니까,
하루는 점심을 시켰는데 그 식당 주인아줌마가 직접 배달을 왔기에 장사가 잘 되어서 좋겠다고 하였더니 아줌마는 되레 한숨만 푹푹 쉬기에 사유를 물었더니 술을 마시러 와서는 추군 대며 수작을 부리려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하여도 저는 그 아줌마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노래방 도우미로 가자 저에게도 그 아줌마가 말 한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 뭡니까.
더구나 저의 경우 남편이 죽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골키퍼가 문을 지키고 있어도 골이 들어가는 판국에 앞에서 지키지 않은 골대에 공을 넣기는 식은 죽을 먹기보다도 쉽다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노래방 도우미지 이건 노래방 손님들의 노리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손님들이 마구 가슴이며 엉덩이를 주무른다고 거칠게 반항을 하다가 주인의 귀에 그 사실이 알려지기만 하는 날에는 그나마도 하지 못 하고 굶어야 하는 일이 발생을 하였거든요.
저의 경우 노래방으로 스스로 찾아가 도우미를 하겠다고 하였더니 노래방 사장이 처음에는 아주 의아해 하였죠.
이유가 뭐냐고요?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명품이 아니면 입지 않았고 신지 않았으며 쓰지도 아니하였고 사지도 아니하였으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였기에 비록 빚쟁이들을 피하여 야반도주를 한 신세였지만 당분간 옷이나 신발들과 기타 장신구들을 살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챙겨 온 것들 역시 명품들이었고 그런 명품 옷과 신발로 치장 하고는 노래방 도우미를 하겠다고 찾아 갔으니 의아해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딱한 제 처지를 눈물로 하소연하며 사정하자 노래방 사장은 자기 가게에 오는 손님들도 수준이 높은 편이라며 일을 하라 하며 휴대폰을 하나 장만하고(있었지만 빚쟁이들의 성화에 거의 끈 상태였고 노래방 사장에게는 없다고 했음) 전화번호만 주면 손님이 도우미를 찾으면 즉시 전화를 하겠다며 받고 5분 내로 도착을 해야 한다기에 전 그 번호를 해지하고 가지고 있던 장신구 하나를 팔아서 다른 번호를 받았고 그리고 딸애들에게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일렀고 그 번호를 노래방 사장에게 주고는 멀리 덜어져 있던 곳에 잡아두었던 여관에서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짐을 가지고는 노래방 인근의 여관에 장기 투숙을 하기로 하고 옮겼습니다.
첫 노래방 도우미를 부른 손님들의 방으로 들어가자 손님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의 눈 그 자체였습니다.
40대 초반에 명품 옷으로 치장한 저를 보는 50대 정도의 남자들은 저를 가만있게 하지를 아니하였습니다.
한 곡 한 곡마다 저 매번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출 줄도 모르는 춤을 추어야만 하였습니다.
아니 춤만 추었다면 양반이었겠죠.
두 손으로 엉덩이를 쥐어 잡고 당기며 춤을 추는 것은 예사였고 허리를 감은 척 하고는 손을 등 뒤로 돌려 젖가슴을 터치하는 정도도 양반 축에 들었습니다.
끝 무렵에는 아예 제 손을 당겨 비록 바지 위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좆을 잡게 하고 춤을 추면서 귓불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데는 뺨이라도 갈기고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수치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 정도에서 끝이었다면 그도 양방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음악이 끝이 날 무렵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이차 운운 하며 얼마면 되느냐고 묻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노래방 사장이 단골이 되면 이차를 가도 되지만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이차에 응하게 되면 사람을 사람 같이 보지 않는 수가 있다는 투로 사전에 저에게 말하였고 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당하게 남편을 둔 몸이었기에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품에 돈을 받고 안긴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아니하였기에 극도로 몸조심을 하였답니다.
하지만 한 남자의 집요한 극성스런 일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노래방 방문과 그리고 항상 저를 불러서 데리고 놀자 저의 뚫리지 않을 것만 같은 마음은 서서히 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남자가 저를 부르지 않은 날이면 조바심으로 나타나서 안절부절 못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틀을 연달아 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삼일 째 그 남자가 다시 저를 불렀습니다.
마치 죽은 남편이(남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다시 살아 온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그건 그 남자가(처음 그 노래방에 친구들과 온 후로는 혼자 왔음)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며 나를 보듬고 노래를 부르자 지난 일주일 동안 그 남자가 제 엉덩이를 당겨 하체를 딱 붙이고 춤을 춘 반면 이틀이나 오지 않다가 온 그 날은 제가 그 남자의 엉덩이를 잡고 당겨 하체를 밀착을 시킨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차 어때?”그 남자 입에서는 마치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내 귀에 입을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습니다.
“몰라요 바보”전 얼굴을 붉히며 그 남자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제 양 볼을 두 손으로 잡았고 그리고 뜨거운 키스를 하였으며 그 남자의 혀가 제 입안으로 들어오자 전 게걸스럽게 그 남자의 혀를 빨았으며 나로부터 거부반응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 혀를 빨고 있음은 자기를 거절하지 않는다고 판단을 하였던지 그 남자는 저를 보듬을 체 소파로 가서 앉히고는 제 젖가슴을 주무르며 치마 안으로 손을 넣고 팬티 위로 보지둔덕을 주무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말이지 남편과 잠자리는 그리 원만하질 못 하였습니다.
가게를 시작하고 남편은 대기업의 직원으로서 낮이면 업무에 시달렸고 퇴근하기 무섭게 가게로 와서는 그날의 영업 실적을 체크하기 바빴고 저 역시 낮이면 가게 일도 가게 일이었지만 돈 모으는 계 조직 관리에 많은 신경을 쓰다 보니 집으로 오면 밥을 먹기 무섭게 남편이 먼저 잠이 들었고 그리고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가서는 남편의 이불을 덮어주고 그 옆에 쓸어져 자는 것이 우리 부부의 일과였으니 어디 무드가 있는 잠자리를 기대하기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다가 계가 펑크가 나고 가게며 집이 빚쟁이들에게 빼앗기게 되자 남편이 먼저 잠적을 하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가게를 시작하고는 변변한 잠자리 한 번 하지도 못 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 역시 야반도주를 한 후 잠자리와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하였지 남자하고의 잠자리 생각을 할 기회도 없었을 뿐 생각을 할 여유조차도 없었던 것인데 그런 저에게 잠자리의 포근함과 운우의 꿈을 일깨우게 한 것입니다.
“아~흑 그만 해요 어서 나가요”그 남자의 입에서 입을 때고 제 스스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리지도 아니하였던 그림이 내 눈에 스크린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도 실상은 남편이 아닌 외간남자의 손을 잡았지만 스쳐지나가는 스크린에서는 미안하게도 남편의 얼굴이었고 몸이었지만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후후후 이틀 안 보았더니 완전히 달라졌는걸!”그 남자가 웃으며 일어섰습니다.
“몰라 바보”다시 한 번 더 얼굴을 붉히며 그 남자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먼저 방에서 나왔고 노래방 사장에게서 돈을 받고 밖으로 나와서 기다렸더니 그 남자가 나왔고 그리고 저는 그 남자에게 팔짱을 끼고는 그 남자가 가는 곳으로 발을 옮겼고 우리 둘이 도착을 한 곳은 바로 제가 묵고 있던 여관방이었으며 사전에 여관주인과 맺은 약속대로 그 남자가 여관비를 지불하고 제의 방으로 갔습니다.(두 시간 타임에 15,000원인데 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제가 장기로 임대를 한 방이지만 여관 주인이 나와 대동한 남자에게 돈을 받고 그 중에 10,000은 제 목이고 나머지는 여관 주인이 가지기로 하였음, 물론 옷가지가 든 내 짐은 침대 밑에 숨겨둠)
“씻고”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자가 막무가내로 보듬더니 침대로 넘어뜨리자 가심을 밀치며 말하자
“그럴 여유 난 없어 먼저 한 번 하고 씻어도 안 늦어”그 남자가 다시 막무가내로 옷을 벗겼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실 제 마음도 그 남자의 마음처럼 급하였거든요.
“에잇!”그 남자는 하의만 완전하게 알몸이 되자마자 좆을 제 보지에 쑤셔 박았습니다.
“아~흑 더 깊이”저도 모르게 그 남자의 제 젖가슴을 짚은 팔목을 잡고 신음하며 소리치자
“아니 남편하고 안 한지 오래 됐어?”상체를 들고 밑을 보며 물었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고 외면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남편하고 잠자리를 한 것이 임 몇 년 전의 일임을 떠올렸습니다.
“후후후 이거 거의 아다 수준 아냐? 횡재도 이런 횡재가 웬일이라니?”좆을 보지에서 빼더니 다시 강하게 박으며 감탄하였습니다.
“............”그 까닭을 아는 저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으로 얼굴만 붉혀야 하였습니다.
“이차도 안 간 모양이지?”펌프질을 하며 물었습니다.
“아~흑 그래요 어서 하기나 해요”저도 모르게 도리질이 쳐 졌습니다.
“후후후 강 부장님 말이 맞았어, 물건 좋아 보인다고 후후후”그 남자가 펌프질을 하며 말하였습니다.
그 남자가 처음 온 것은 내가 노래방 도우미를 하기 시작한지 보름이 지난 후였고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 남자는 자기 회사 사무실 직원들하고 회식을 하고 이차로 온 곳이 내가 도우미를 하는 노래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다가 안 넘어 오자 저를 조갑증이 나도록 만들고서는 남편이 아닌 외간남자에게 최초로 돈을 받아가며 가랑이를 벌리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한 번 돈을 받아가며 외간남자의 몸에 의하여 더렵혀지자 그 다음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돈만 된다면 그가 누구이던지 간에 가랑이를 벌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건 바로 그 남자의 간교한 술수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욕심을 몇 번 풀더니 자기와 같이 왔었던 강 부장이란 사람에게 저를 밀었고 이미 남편 아닌 외간남자의 남편과 느낌이 전혀 다르고 또 돈까지 벌게 해 주었기에 난 강 부장이란 사람은 물론이고 첫 외간남자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이외 다른 남자들에게도 가랑이를 거침없이 벌려주는 그런 더러운 인간으로 변모를 해 있었습니다.
이게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전 노래방에 나가질 아니하였습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습니다.
몸을 팔아 벌어 놓은 돈이 있었기에 장기 여관방에서 기거는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이 떨어지면 전 길바닥으로 나 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찾은 것이 식당의 서빙 일이었습니다.
서빙을 받고만 살아왔던 저가 나락으로 떨어져 남의 서빙을 해 주는 여자가 된 것입니다.
낮 창피하여 길게 하지를 못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찾은 일터가 결혼식장 뷔페를 만드는 주방의 허드렛일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겠다, 친정도 부유하겠다, 거기다가 메이커 옷 가게까지 하는 여자였기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살아왔던 저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만 일을 하였기에 이틀 벌어서 일주일 살기에 부족하여 주중에는 가사도우미를 하며 벌었습니다.
또 아기 돌보는 일도 함께 병행을 하였습니다.
험한 일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만신창의 몸을 가진 사십대 여인이 을을 할 곳을 찾기란 정말이지 어려웠습니다.
결국 전 노숙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노숙자!
그도 여자 노숙자!
같은 노숙자들이 저를 넘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를 지켜줄 방패막이가 필요하였습니다.
한 주먹 하는 남자에게 붙으면 다른 남자 노숙자들이 넘보지 않는 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어쩔 수가 없이 주먹을 꽤나 쓰는 남자 노숙자의 물받이가 되어야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일을 하는 날이면 일당을 받아와서 저와 또 하나의 여자에게(같은 노숙자 신새였기에 질투를 내지 아니하였음) 밥도 사주고 또 돈이 여유가 상기면 역 부근의 허름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기꺼이 물받이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도 일말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란한 모습으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던 저는 그래도 고등학교 동창들과 자주는 아니었지만 간혹은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저에게 봉고차를 한 대 사 주었습니다.
저를 시용불량자로 만들어버린 거액의 계모임에 다행히 고등학교 동창들은 전혀 들지 아니하였기에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이 저를 좋게 보도록 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약감의 장시 밑천도 함께 주었습니다.
전 봉고차에 가스에 가스레인지도 장만하고 떡볶이를 만드는 스텐레이스 통과 또 어묵을 넣어서 끓이는 스텐레이스 통도 마련하였고 컵이며 잡동사니들을 구입하여 노점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쉽게만 생각하였던 노점상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길에서 하지만 인근 주먹들이 자리 값을 요구를 하지 않나 걸핏하면 구청에서 나와 단속을 하지 않나 정밀이지 어려웠습니다.
구청의 단속이야 차라 기동력이 있었기에 도망이나 가면 되지만 주먹들의 자리 값은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시 방패막이가 필요하였습니다.
주먹들 중에 그나마 아주 인상이 좋아 보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다른 주먹들은 공갈 협박으로 일관하였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공갈 협박을 하는 주먹들을 나무라며 저를 편들어주었습니다.
정에 약한 것이 여자가 아닌가요?
저보다 나이도 적었지만 저는 그만 그 남자에게 남모르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말았습니다.
가정이 없던 그는 밤늦게까지 봉고차의 제 옆이나 아니면 운전석 혹은 조수석에서 앉아있거나 졸다가도 백미러를 통하여 주먹들이 오기라도 하는 것이 보이기만 하면 내려와서는 그들을 상대하였습니다.
그렇게 저를 돌보아주기를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저는 제가 묵고 있던 허름한 저의 달 셋방인 숙소로 데리고 왔고 그리고 전 그 남자의 여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상이야 좋았지만 거의 놈팡이나 다름이 없었던 40대 초반의 그는 그날 이후로 저의 숙소에서 같이 기거하는 아니 동거하는 사이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남편과 사이에서는 그다지 섹스에 대한 좋은 느낌을 받지 못 하다가 노래방 도우미를 하면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마구 번갈아 가며 식스를 하면서 얻은 섹스의 즐거움을 다시 그 남자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장사 준비를 하여 길거리로 같이 나섰다가는 거의 자정이 되어서 숙소로 와서는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도 없이 끌어안고 키스를 하면서 상애의 옷을 벗기며 서로를 갈구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섹스에 굶주린 한 쌍의 동물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랬기에 밥을 거를지언정 섹스는 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생리를 하는 중이라도 콘돔을 끼고 하였고 그도 아니면 후장섹스를 하였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갖가지 형태로 저에게 진정한 섹스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즐겁게 생활을 하자 수입도 좋았습니다.
한 번하고 난 다음 날보다 두 번을 한 다음 날의 장사가 더 잘되었습니다.
그건 결국 피곤하더라도 더 많은 섹스를 하도록 만들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하였습니다.
사실 비밀이지만 남편 말고 외간 남자하고 즐긴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노래방 도우미 노릇을 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르게 말입니다.
노래방 도우미 노릇을 하며 외간남자의 몸을 제 몸으로 받아들인 경우는 남자에게 돈을 받고 하였기에 바꾸어 말하면 몸을 돈으로 판 것이지만 예전에 외간남자하고 간혹 즐긴 경우는 제가 남자를 샀었기에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죠.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겠다, 친정도 부유하겠다, 거기다가 메이커 옷 가게까지 하는 여자였기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살아왔기에 저는 금전적으로 아주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피부미용실에 자주 들렀습니다.
그 피부 미용실은 두피나 얼굴을 주로 하는 곳아 아니라 전신 피부미용실이었습니다.
피부미용실로 들어서면 옷을 벗고 타월로 몸을 감고 눕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탤런트 저리가라고 할 정도의 미모와 키를 자랑하는 여자 피부 관리사가 들어와 마사지를 먼저 해 줍니다.
그러다가 여자 피부관리사가 나가면 이어 남자 피부관리사가 들어옵니다.
본격적인 마사지는 그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삽입까지는 아니지만 미치도록 만들어버리죠.
남자 피부관리사가 나가고 일어나면 엉덩이 밑은 온통 제 보지에서 쏟아져 나온 물로 엉망이 되어있죠.
정히 참을 수가 없다면 남자 피부관리사가 나가기 전에 남자 피부관리사에게 이차 여부를 묻죠.
남자 피부관리사가 오케이 사인이 나면 전화번호를 받고 그리고 인근의 모텔이나 여관에 방을 잡고 전화를 걸면 남자 피부관리사가 방으로 들어오고 그럼 다시 남자 피부관리사의 마사지와 함께 보지구멍에 좆을 삽입하는 빠구리가 시작이 되는데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분 모를 것입니다.
장담합니다.
섹스의 맛을 모르는 불감증 환자라도 남자 피부관리사의 마사지와 그리고 이어서 바로 시작이 되는 빠구리로 불감증이 치료가 되지 않는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입니다.
당시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친구들을 데리고 같이 간 경우도 종종 있었답니다.
그때 같이 간 친구들 중에 어느 한 친구라고 얼굴이 벌게지지 않은 친구들은 없었으니 말입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남편과 섹스가 원만하지 못 하였다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남편과의 섹스는 말 그대로 업무적인 섹스처럼 밋밋한 섹스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주 형식적이고도 마치 의무방어전 같은 분위기였다고나 할까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쩜 남편은 더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다른 면이 있다면 저의 경우 피부 관리실로 찾아가 남자 피부관리사에게 거의 초죽음에 이를 정도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마시지를 받고도 부족하여 남자 피부관리사를 이차로 불러내어 빠구리까지 한 반면 남편은 지금 생각하여도 아주 미안하지만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업무에 시달리고도 부족하여 회사의 업무가 마치자마자 옷 가게로 와서는 매상 정리며 종업원 관리까지 하다 보니 몸의 피로는 만신창이가 되어서 저와 섹스를 할 힘도 없이 되어버리기 일수였을 것입니다.
그 부분만 생각하면 지금도 남편에게 미안함은 말로도 다 하지 못 할 정도랍니다.
그럼 이제 지금 동거하고 있는 남자와 남편을 비교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비교를 해 보렵니다.
전 앞에서 밝혔듯이 53살이고 남편은 저보다 4살이 많아 57살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소녀경을 아시나요?
소녀경은 중국의고전적인 성의 학서 황제내경 중 소녀경 내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그 황제내경은 중국의 전설적인 황제인 헌원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녀경 내편만은 수나라 때의 의관 양상선에 의해 기초가 짜여 졌고 그의 의술을 이어받은 손사막에 의해 당나라 때에야 천금방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소녀경을 들먹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소녀경에서 보면 황제가 어린 소녀들만 빠구리 상대로 이상하게 여긴 신하가 그 연유를 묻습니다.
황제는 바로 답합니다.
나이 일흔의 노인이 십 팔세의 처녀와 배꼽을 맞추면 십 팔세 소녀의 정기를 받게 되어 젊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황제 나이는 일흔이지만 십 팔세 소녀와 배꼽을 맞추면 황제 나이와 소녀 나이의 중간 정도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즉 사십 사세의 나이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소녀경에 나온 이야기란 것입니다.
그럼 이를 남편과 지금 동거하고 있는 남자 사이로 비교를 해 보겠습니다.
소녀경의 이야기대로 한다면 제가 남편하고 관계를 가질 때에 제 육신의 힘은 불행하게도 지금의 제 나이보다도 많은 55세의 근력으로 관계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제 사십대 중반인 동거남과 비교를 한다면 동거남 나이 46살로서 제 나이와 소녀경 이야기대로 대입을 하게 되면 무려 3.5년이나 젊은 근력을 가지고 동거남과 관계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저처럼 53세의 여자라면 어느 남자를 선택하겠습니까?
물론 테크닉이나 요령도 중요하겠지만 가능하다면 젊은 남자를 선택하지 않을까요?
그랬습니다.
저와 동거하고 있는 남자는 남편과 달리 절 날마다 오르가즘의 세계로 끌고 간답니다.
남편이 과다한 업무 때문에 힘을 전혀 쓰지 못 하던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보고 싶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하여도 딸아이들을 통하여 남편 소식을 간혹 듣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3년 넘게 전 남편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 하고 있답니다.
한국에 살기라도 하는지........
아님 어디서 새우 잡이 어선에 타고 있지나 않은지 그도 아니면 원양어선에라도 타고 고생을 하지 않는지............
만나도 이제 함께 살기 힘들어진 사이이지만 그래도 딸이라는 아이들이 있고 또한 호적상 분명하게 부부인만큼 도덕적이나 법적으로는 남남이 될 수가 없는 사이이기에 외간남자와 동거를 하면서도 가끔은 생각이 난답니다.
하지만 저라는 년 정말이지 더러운 년입니다.
금방까지도 동거남 밑에 깔려서 호들갑을 떨었고 그리고 뒤치기로 후장까지 파헤친 년이 한 손으로는 키보드를 누르면서도 또 다른 손으로는 얼마 전에 싸준 동거남의 좆 물이 듬뿍 들어있고 흘러내리는 그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입술에 바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머머! 씻으러 갔던 동거남이 언제 들어왔는지 제 등 뒤에서 제가 쓴 글을 보고 있다말고 좆을 제 몸에 대고 비벼대고 있네요.
어쩜 오늘 밤 잠을 자기 힘들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끝
이글은 먼저 한 여인의 진솔한 고백을 소설화한 것이며 그 분의 친구 분으로부터 받은 메일이며 이 글은 본인의 승낙을 받은 후에 올립니다.
<친구가 글 보고서 한참이나 웃고 울고 난리였답니다.
아주 잘 쓰셨다고 흡족해 하였어요.
어서 글 올려주세요...><-----밑의 글을 이 사연의 주인공 친구 분으로서 먼저 주인공의 양해를 구한 후에 올리다고 했더니 이렇게 쪽지가 왔습니다.
그래 소재 제보자님과 주인공의 승낙으로 보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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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50이 조금 넘은 여자랍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53살 먹은 여자랍니다.
심이 없었다면 지금은 온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정겹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욕심이란 것이 끝이 없어서 더 많이 벌고 싶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먼저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부탁드립니다.
저처럼 노숙자에서 노점상으로 변모하는 어려운 과정을 겪지 않으시려면 먹고 살 정도만 되신다면 지그 그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시라고 말입니다.
저희 가족 한 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답니다.
남편도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먹고 살 정도의 수입을 되었었고 아이들도 다른 집 아이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하며 커 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미래가 너무나도 막연해 보였습니다.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어쩌나, 아이들 대학에 들어가면 그 많은 등록금은 어떻게 조달하나, 또 아이들이 키웠다고 늙어서 아이들에게 의지하여 살 수는 없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 부부의 말년은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이 저로 하여금 돈의 노예로 만들어버렸고 그 노여는 보통 사람들의 말처럼 젊어 고생은 사서한다는 말로 변하였으며 그것은 어떻게 하든지 나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어이 저에게 인간이 막장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었고 그 막장 생활을 하도록 하였으며 고맙게도 우연히 만난 동창생 덕에 전 노숙 생활에서 탈출을 하여 지금은 그보다는 조금 낳은 노점상을 하다가 돈을 조금 벌자 김밥이며 우동 혹은 떡볶이 등을 팔고 있는 분식집을 하고 있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의 이야기를 거의 꾸밈없이 적나라하게 전개해 보겠습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우리 가정은 정말이지 화목하고 행복한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저의 욕심이 기어이 화를 부르고 만 것입니다.
저희 친정은 아주 부유하였습니다.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던지 돈 아까운줄 몰랐고 그랬기에 제 주변에는 항상 많은 친구들이 따랐답니다.(이게 지금의 저를 있게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뿐만 아니라 무려 35여 년 전의 일이지만 소위 요즘 말로 명품이 아니면 입지 않았고 신지 않았으며 쓰지도 아니하였고 사지도 아니하였으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였다면 얼마나 우리 친정이 부유하였는지 보지 아니하여도 대충 짐작을 할 것입니다.
또 대학을 졸업하고 올린 결혼식은 그야말로 초호화판이었습니다.
많은 하객 때문에 결혼식장은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신혼여행을 다녀왔더니 시가집이나 친정집에서 공통적으로 한 말이었거든요.
이는 우리 친정집이 부유한 탓도 있었지만 남편도 대기업에 근무를 하였고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많은 친구들과 교류도 하였고 동아리 모임에서도 신뢰를 받는 사람이라 많은 하객들을 불러 모으는데 일조를 한 셈이었답니다.
그런 많은 하객들의 축하 속에 결혼을 한 덕인지는 몰라도 우리 부부에게는 저보다 아니 남편보다도 예쁜 공주 둘을 두었답니다.
문제는 남편이 우리 부부의 노후를 염려하여 00에다가 명품에까지는 이르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메이커만 대면 알아 줄만한 옷 가게를 시작한 것이 돈을 모아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가져다준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가온 욕망의 노예였습니다.
장사는 그런대로 잘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욕망이라는 것의 노예가 되어버린 저에게는 그런 돈은 잔돈에 불과하게 보였습니다.
목돈을 잡고 싶었습니다.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겠다, 친정도 부유하겠다, 거기다가 메이커 옷 가게까지 하는 우리였기에 주변 상가들의 우리 부부에 대한 믿음은 엄청났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당시에도 유명한 건설업체이지만 지금도 잘 나가는 건설업체 이름을 대 가며 00건설이 망하면 망하였지 명희네(큰딸아이 이름이 명희) 가게는 망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더욱더 욕망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건 계모임을 만들게 하였고 그리고는 그들은 아녀자이지만 든든한 남편이 뒤에서 받치고 있는 저를 그 계모임의 회장으로 뽑아주었고 그리고 돈 모으기 계를 조직토록 부추겼습니다.
번호계의 경우 좋은 번호는 계주인 제 목이었고 낙찰계 역시 제가 우선이었습니다.
재미가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을 한 것처럼 메이커 옷이라고 하지만 옷가지를 팔아봐야 본전을 빼고 나면 거의 잔돈 수준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지만 돈 모으기 계를 시작하니 목돈이 마구 들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 모으기 계모임에 가입을 하지 못 한 가게 사장이나 저를 아는 사람들이 계속 계를 더 만들기를 원하였고 그러면 계원 수만 차면 전 또 하나의 계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만든 계가 거의 수십 개가 훨씬 넘었습니다.
금액이 적은 것은 몇 백 만원 단위였지만 옷가게 주변의 사장들이 주축인 계는 몇 천 단위로 나갔습니다.
당시에는 겁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게 큰 금액인지 적은 금액인지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하였지만 지금 생각하여 보면 대충 어림짐작으로 하여도 수 백 억 원이 넘는 거대한 금액이었습니다.
1997년 저에게 아니 우리 부부는 물론이고 두 딸과 친정 그리고 시집을 암흑천지로 뒤덮은 IMF가 터진 것입니다.
계라는 것이 한 사람만 펑크가 나면 그 사람과 연계 된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펑크가 나게 되어있는 도미노현상과 같은 결과가 나게 마련이란 것을 처음에 몰랐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 옷 가게만이 아니라 이웃 가게들도 연쇄적으로 쓰러졌으며 계는 풍비박산이 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집을 나갔고 저 역시 빚쟁이들 성화에 견디지 못 하고 딸아이들을 친척 집에(다행히 우리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음) 맡기고 저 역시 아반도주를 하지 않으면 한 되었습니다.
수중에 들은 돈이라고 해 봐야 몇 칠 여관을 전전하면 빈털터리가 될 정도로 작은 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낮선 도시에서 저는 처음으로 노래방 도우미 노릇을 하였습니다.
말이 좋아 노래방 도우미지 취객들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밥은 먹어야 하였고 변변치 못한 싸구려 여관방에서라도 다리를 뻗고 잠은 자야 하였기에 참을 수가 없는 수모 감을 참아 가면서 도우미를 하였습니다.
노래방 도우미를 하면서 배운 것은 저로서는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라고 하였던 고정된 하나의 편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있고 없고 에 따라 남자들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였습니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저게 남편의 부업으로 메이커 옷 가게를 하였다고 하였죠.
그때 일입니다.
저야 간혹 시켜먹었지만 제가 데리고 있던 종업원들이 먹는 점심을 전문적으로 배달을 해 주는 식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편이 부업삼아 처음 메이커 옷 가게를 개업을 했을 때만 하여도 그 식당은 부부가 함께 운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 하여 그 부부의 남편이 밥을 배달하러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는 그만 사고로 죽어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사건이었죠.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아줌마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삼우제를 모시고는 다시 식당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은 저녁이면 간단한 안주로 술도 팔았지만 그 아줌마의 남편이 살았을 때는 주변 상가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러 가지 아니하고 상가에서 아르바이트 내지는 일반 종업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퇴근을 하면서 간단하게 한 잔 들이키고 지나가는 정도의 식당이었는데 그 아줌마의 남편이 죽고 장례를 치르고 영업을 재개하자 상가 사장 급들의 남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지 뭡니까,
하루는 점심을 시켰는데 그 식당 주인아줌마가 직접 배달을 왔기에 장사가 잘 되어서 좋겠다고 하였더니 아줌마는 되레 한숨만 푹푹 쉬기에 사유를 물었더니 술을 마시러 와서는 추군 대며 수작을 부리려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하여도 저는 그 아줌마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노래방 도우미로 가자 저에게도 그 아줌마가 말 한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 뭡니까.
더구나 저의 경우 남편이 죽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골키퍼가 문을 지키고 있어도 골이 들어가는 판국에 앞에서 지키지 않은 골대에 공을 넣기는 식은 죽을 먹기보다도 쉽다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노래방 도우미지 이건 노래방 손님들의 노리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손님들이 마구 가슴이며 엉덩이를 주무른다고 거칠게 반항을 하다가 주인의 귀에 그 사실이 알려지기만 하는 날에는 그나마도 하지 못 하고 굶어야 하는 일이 발생을 하였거든요.
저의 경우 노래방으로 스스로 찾아가 도우미를 하겠다고 하였더니 노래방 사장이 처음에는 아주 의아해 하였죠.
이유가 뭐냐고요?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명품이 아니면 입지 않았고 신지 않았으며 쓰지도 아니하였고 사지도 아니하였으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였기에 비록 빚쟁이들을 피하여 야반도주를 한 신세였지만 당분간 옷이나 신발들과 기타 장신구들을 살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챙겨 온 것들 역시 명품들이었고 그런 명품 옷과 신발로 치장 하고는 노래방 도우미를 하겠다고 찾아 갔으니 의아해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딱한 제 처지를 눈물로 하소연하며 사정하자 노래방 사장은 자기 가게에 오는 손님들도 수준이 높은 편이라며 일을 하라 하며 휴대폰을 하나 장만하고(있었지만 빚쟁이들의 성화에 거의 끈 상태였고 노래방 사장에게는 없다고 했음) 전화번호만 주면 손님이 도우미를 찾으면 즉시 전화를 하겠다며 받고 5분 내로 도착을 해야 한다기에 전 그 번호를 해지하고 가지고 있던 장신구 하나를 팔아서 다른 번호를 받았고 그리고 딸애들에게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일렀고 그 번호를 노래방 사장에게 주고는 멀리 덜어져 있던 곳에 잡아두었던 여관에서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짐을 가지고는 노래방 인근의 여관에 장기 투숙을 하기로 하고 옮겼습니다.
첫 노래방 도우미를 부른 손님들의 방으로 들어가자 손님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의 눈 그 자체였습니다.
40대 초반에 명품 옷으로 치장한 저를 보는 50대 정도의 남자들은 저를 가만있게 하지를 아니하였습니다.
한 곡 한 곡마다 저 매번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출 줄도 모르는 춤을 추어야만 하였습니다.
아니 춤만 추었다면 양반이었겠죠.
두 손으로 엉덩이를 쥐어 잡고 당기며 춤을 추는 것은 예사였고 허리를 감은 척 하고는 손을 등 뒤로 돌려 젖가슴을 터치하는 정도도 양반 축에 들었습니다.
끝 무렵에는 아예 제 손을 당겨 비록 바지 위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좆을 잡게 하고 춤을 추면서 귓불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데는 뺨이라도 갈기고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수치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 정도에서 끝이었다면 그도 양방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음악이 끝이 날 무렵에는 아예 노골적으로 이차 운운 하며 얼마면 되느냐고 묻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노래방 사장이 단골이 되면 이차를 가도 되지만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이차에 응하게 되면 사람을 사람 같이 보지 않는 수가 있다는 투로 사전에 저에게 말하였고 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당하게 남편을 둔 몸이었기에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품에 돈을 받고 안긴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아니하였기에 극도로 몸조심을 하였답니다.
하지만 한 남자의 집요한 극성스런 일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노래방 방문과 그리고 항상 저를 불러서 데리고 놀자 저의 뚫리지 않을 것만 같은 마음은 서서히 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남자가 저를 부르지 않은 날이면 조바심으로 나타나서 안절부절 못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틀을 연달아 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삼일 째 그 남자가 다시 저를 불렀습니다.
마치 죽은 남편이(남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다시 살아 온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그건 그 남자가(처음 그 노래방에 친구들과 온 후로는 혼자 왔음)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며 나를 보듬고 노래를 부르자 지난 일주일 동안 그 남자가 제 엉덩이를 당겨 하체를 딱 붙이고 춤을 춘 반면 이틀이나 오지 않다가 온 그 날은 제가 그 남자의 엉덩이를 잡고 당겨 하체를 밀착을 시킨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차 어때?”그 남자 입에서는 마치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내 귀에 입을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습니다.
“몰라요 바보”전 얼굴을 붉히며 그 남자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제 양 볼을 두 손으로 잡았고 그리고 뜨거운 키스를 하였으며 그 남자의 혀가 제 입안으로 들어오자 전 게걸스럽게 그 남자의 혀를 빨았으며 나로부터 거부반응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 혀를 빨고 있음은 자기를 거절하지 않는다고 판단을 하였던지 그 남자는 저를 보듬을 체 소파로 가서 앉히고는 제 젖가슴을 주무르며 치마 안으로 손을 넣고 팬티 위로 보지둔덕을 주무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말이지 남편과 잠자리는 그리 원만하질 못 하였습니다.
가게를 시작하고 남편은 대기업의 직원으로서 낮이면 업무에 시달렸고 퇴근하기 무섭게 가게로 와서는 그날의 영업 실적을 체크하기 바빴고 저 역시 낮이면 가게 일도 가게 일이었지만 돈 모으는 계 조직 관리에 많은 신경을 쓰다 보니 집으로 오면 밥을 먹기 무섭게 남편이 먼저 잠이 들었고 그리고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가서는 남편의 이불을 덮어주고 그 옆에 쓸어져 자는 것이 우리 부부의 일과였으니 어디 무드가 있는 잠자리를 기대하기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다가 계가 펑크가 나고 가게며 집이 빚쟁이들에게 빼앗기게 되자 남편이 먼저 잠적을 하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가게를 시작하고는 변변한 잠자리 한 번 하지도 못 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 역시 야반도주를 한 후 잠자리와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하였지 남자하고의 잠자리 생각을 할 기회도 없었을 뿐 생각을 할 여유조차도 없었던 것인데 그런 저에게 잠자리의 포근함과 운우의 꿈을 일깨우게 한 것입니다.
“아~흑 그만 해요 어서 나가요”그 남자의 입에서 입을 때고 제 스스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리지도 아니하였던 그림이 내 눈에 스크린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도 실상은 남편이 아닌 외간남자의 손을 잡았지만 스쳐지나가는 스크린에서는 미안하게도 남편의 얼굴이었고 몸이었지만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후후후 이틀 안 보았더니 완전히 달라졌는걸!”그 남자가 웃으며 일어섰습니다.
“몰라 바보”다시 한 번 더 얼굴을 붉히며 그 남자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먼저 방에서 나왔고 노래방 사장에게서 돈을 받고 밖으로 나와서 기다렸더니 그 남자가 나왔고 그리고 저는 그 남자에게 팔짱을 끼고는 그 남자가 가는 곳으로 발을 옮겼고 우리 둘이 도착을 한 곳은 바로 제가 묵고 있던 여관방이었으며 사전에 여관주인과 맺은 약속대로 그 남자가 여관비를 지불하고 제의 방으로 갔습니다.(두 시간 타임에 15,000원인데 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제가 장기로 임대를 한 방이지만 여관 주인이 나와 대동한 남자에게 돈을 받고 그 중에 10,000은 제 목이고 나머지는 여관 주인이 가지기로 하였음, 물론 옷가지가 든 내 짐은 침대 밑에 숨겨둠)
“씻고”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자가 막무가내로 보듬더니 침대로 넘어뜨리자 가심을 밀치며 말하자
“그럴 여유 난 없어 먼저 한 번 하고 씻어도 안 늦어”그 남자가 다시 막무가내로 옷을 벗겼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실 제 마음도 그 남자의 마음처럼 급하였거든요.
“에잇!”그 남자는 하의만 완전하게 알몸이 되자마자 좆을 제 보지에 쑤셔 박았습니다.
“아~흑 더 깊이”저도 모르게 그 남자의 제 젖가슴을 짚은 팔목을 잡고 신음하며 소리치자
“아니 남편하고 안 한지 오래 됐어?”상체를 들고 밑을 보며 물었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고 외면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남편하고 잠자리를 한 것이 임 몇 년 전의 일임을 떠올렸습니다.
“후후후 이거 거의 아다 수준 아냐? 횡재도 이런 횡재가 웬일이라니?”좆을 보지에서 빼더니 다시 강하게 박으며 감탄하였습니다.
“............”그 까닭을 아는 저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으로 얼굴만 붉혀야 하였습니다.
“이차도 안 간 모양이지?”펌프질을 하며 물었습니다.
“아~흑 그래요 어서 하기나 해요”저도 모르게 도리질이 쳐 졌습니다.
“후후후 강 부장님 말이 맞았어, 물건 좋아 보인다고 후후후”그 남자가 펌프질을 하며 말하였습니다.
그 남자가 처음 온 것은 내가 노래방 도우미를 하기 시작한지 보름이 지난 후였고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 남자는 자기 회사 사무실 직원들하고 회식을 하고 이차로 온 곳이 내가 도우미를 하는 노래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다가 안 넘어 오자 저를 조갑증이 나도록 만들고서는 남편이 아닌 외간남자에게 최초로 돈을 받아가며 가랑이를 벌리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한 번 돈을 받아가며 외간남자의 몸에 의하여 더렵혀지자 그 다음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돈만 된다면 그가 누구이던지 간에 가랑이를 벌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건 바로 그 남자의 간교한 술수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욕심을 몇 번 풀더니 자기와 같이 왔었던 강 부장이란 사람에게 저를 밀었고 이미 남편 아닌 외간남자의 남편과 느낌이 전혀 다르고 또 돈까지 벌게 해 주었기에 난 강 부장이란 사람은 물론이고 첫 외간남자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이외 다른 남자들에게도 가랑이를 거침없이 벌려주는 그런 더러운 인간으로 변모를 해 있었습니다.
이게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전 노래방에 나가질 아니하였습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습니다.
몸을 팔아 벌어 놓은 돈이 있었기에 장기 여관방에서 기거는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이 떨어지면 전 길바닥으로 나 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찾은 것이 식당의 서빙 일이었습니다.
서빙을 받고만 살아왔던 저가 나락으로 떨어져 남의 서빙을 해 주는 여자가 된 것입니다.
낮 창피하여 길게 하지를 못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찾은 일터가 결혼식장 뷔페를 만드는 주방의 허드렛일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겠다, 친정도 부유하겠다, 거기다가 메이커 옷 가게까지 하는 여자였기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살아왔던 저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만 일을 하였기에 이틀 벌어서 일주일 살기에 부족하여 주중에는 가사도우미를 하며 벌었습니다.
또 아기 돌보는 일도 함께 병행을 하였습니다.
험한 일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만신창의 몸을 가진 사십대 여인이 을을 할 곳을 찾기란 정말이지 어려웠습니다.
결국 전 노숙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노숙자!
그도 여자 노숙자!
같은 노숙자들이 저를 넘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를 지켜줄 방패막이가 필요하였습니다.
한 주먹 하는 남자에게 붙으면 다른 남자 노숙자들이 넘보지 않는 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어쩔 수가 없이 주먹을 꽤나 쓰는 남자 노숙자의 물받이가 되어야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일을 하는 날이면 일당을 받아와서 저와 또 하나의 여자에게(같은 노숙자 신새였기에 질투를 내지 아니하였음) 밥도 사주고 또 돈이 여유가 상기면 역 부근의 허름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기꺼이 물받이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도 일말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란한 모습으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던 저는 그래도 고등학교 동창들과 자주는 아니었지만 간혹은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저에게 봉고차를 한 대 사 주었습니다.
저를 시용불량자로 만들어버린 거액의 계모임에 다행히 고등학교 동창들은 전혀 들지 아니하였기에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이 저를 좋게 보도록 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약감의 장시 밑천도 함께 주었습니다.
전 봉고차에 가스에 가스레인지도 장만하고 떡볶이를 만드는 스텐레이스 통과 또 어묵을 넣어서 끓이는 스텐레이스 통도 마련하였고 컵이며 잡동사니들을 구입하여 노점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쉽게만 생각하였던 노점상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길에서 하지만 인근 주먹들이 자리 값을 요구를 하지 않나 걸핏하면 구청에서 나와 단속을 하지 않나 정밀이지 어려웠습니다.
구청의 단속이야 차라 기동력이 있었기에 도망이나 가면 되지만 주먹들의 자리 값은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시 방패막이가 필요하였습니다.
주먹들 중에 그나마 아주 인상이 좋아 보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다른 주먹들은 공갈 협박으로 일관하였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공갈 협박을 하는 주먹들을 나무라며 저를 편들어주었습니다.
정에 약한 것이 여자가 아닌가요?
저보다 나이도 적었지만 저는 그만 그 남자에게 남모르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말았습니다.
가정이 없던 그는 밤늦게까지 봉고차의 제 옆이나 아니면 운전석 혹은 조수석에서 앉아있거나 졸다가도 백미러를 통하여 주먹들이 오기라도 하는 것이 보이기만 하면 내려와서는 그들을 상대하였습니다.
그렇게 저를 돌보아주기를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저는 제가 묵고 있던 허름한 저의 달 셋방인 숙소로 데리고 왔고 그리고 전 그 남자의 여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상이야 좋았지만 거의 놈팡이나 다름이 없었던 40대 초반의 그는 그날 이후로 저의 숙소에서 같이 기거하는 아니 동거하는 사이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남편과 사이에서는 그다지 섹스에 대한 좋은 느낌을 받지 못 하다가 노래방 도우미를 하면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마구 번갈아 가며 식스를 하면서 얻은 섹스의 즐거움을 다시 그 남자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장사 준비를 하여 길거리로 같이 나섰다가는 거의 자정이 되어서 숙소로 와서는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도 없이 끌어안고 키스를 하면서 상애의 옷을 벗기며 서로를 갈구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섹스에 굶주린 한 쌍의 동물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랬기에 밥을 거를지언정 섹스는 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생리를 하는 중이라도 콘돔을 끼고 하였고 그도 아니면 후장섹스를 하였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갖가지 형태로 저에게 진정한 섹스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즐겁게 생활을 하자 수입도 좋았습니다.
한 번하고 난 다음 날보다 두 번을 한 다음 날의 장사가 더 잘되었습니다.
그건 결국 피곤하더라도 더 많은 섹스를 하도록 만들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하였습니다.
사실 비밀이지만 남편 말고 외간 남자하고 즐긴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노래방 도우미 노릇을 하는 경우와는 전혀 다르게 말입니다.
노래방 도우미 노릇을 하며 외간남자의 몸을 제 몸으로 받아들인 경우는 남자에게 돈을 받고 하였기에 바꾸어 말하면 몸을 돈으로 판 것이지만 예전에 외간남자하고 간혹 즐긴 경우는 제가 남자를 샀었기에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죠.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겠다, 친정도 부유하겠다, 거기다가 메이커 옷 가게까지 하는 여자였기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살아왔기에 저는 금전적으로 아주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피부미용실에 자주 들렀습니다.
그 피부 미용실은 두피나 얼굴을 주로 하는 곳아 아니라 전신 피부미용실이었습니다.
피부미용실로 들어서면 옷을 벗고 타월로 몸을 감고 눕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탤런트 저리가라고 할 정도의 미모와 키를 자랑하는 여자 피부 관리사가 들어와 마사지를 먼저 해 줍니다.
그러다가 여자 피부관리사가 나가면 이어 남자 피부관리사가 들어옵니다.
본격적인 마사지는 그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삽입까지는 아니지만 미치도록 만들어버리죠.
남자 피부관리사가 나가고 일어나면 엉덩이 밑은 온통 제 보지에서 쏟아져 나온 물로 엉망이 되어있죠.
정히 참을 수가 없다면 남자 피부관리사가 나가기 전에 남자 피부관리사에게 이차 여부를 묻죠.
남자 피부관리사가 오케이 사인이 나면 전화번호를 받고 그리고 인근의 모텔이나 여관에 방을 잡고 전화를 걸면 남자 피부관리사가 방으로 들어오고 그럼 다시 남자 피부관리사의 마사지와 함께 보지구멍에 좆을 삽입하는 빠구리가 시작이 되는데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분 모를 것입니다.
장담합니다.
섹스의 맛을 모르는 불감증 환자라도 남자 피부관리사의 마사지와 그리고 이어서 바로 시작이 되는 빠구리로 불감증이 치료가 되지 않는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입니다.
당시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친구들을 데리고 같이 간 경우도 종종 있었답니다.
그때 같이 간 친구들 중에 어느 한 친구라고 얼굴이 벌게지지 않은 친구들은 없었으니 말입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남편과 섹스가 원만하지 못 하였다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남편과의 섹스는 말 그대로 업무적인 섹스처럼 밋밋한 섹스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주 형식적이고도 마치 의무방어전 같은 분위기였다고나 할까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쩜 남편은 더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다른 면이 있다면 저의 경우 피부 관리실로 찾아가 남자 피부관리사에게 거의 초죽음에 이를 정도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마시지를 받고도 부족하여 남자 피부관리사를 이차로 불러내어 빠구리까지 한 반면 남편은 지금 생각하여도 아주 미안하지만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업무에 시달리고도 부족하여 회사의 업무가 마치자마자 옷 가게로 와서는 매상 정리며 종업원 관리까지 하다 보니 몸의 피로는 만신창이가 되어서 저와 섹스를 할 힘도 없이 되어버리기 일수였을 것입니다.
그 부분만 생각하면 지금도 남편에게 미안함은 말로도 다 하지 못 할 정도랍니다.
그럼 이제 지금 동거하고 있는 남자와 남편을 비교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비교를 해 보렵니다.
전 앞에서 밝혔듯이 53살이고 남편은 저보다 4살이 많아 57살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소녀경을 아시나요?
소녀경은 중국의고전적인 성의 학서 황제내경 중 소녀경 내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그 황제내경은 중국의 전설적인 황제인 헌원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녀경 내편만은 수나라 때의 의관 양상선에 의해 기초가 짜여 졌고 그의 의술을 이어받은 손사막에 의해 당나라 때에야 천금방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소녀경을 들먹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소녀경에서 보면 황제가 어린 소녀들만 빠구리 상대로 이상하게 여긴 신하가 그 연유를 묻습니다.
황제는 바로 답합니다.
나이 일흔의 노인이 십 팔세의 처녀와 배꼽을 맞추면 십 팔세 소녀의 정기를 받게 되어 젊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황제 나이는 일흔이지만 십 팔세 소녀와 배꼽을 맞추면 황제 나이와 소녀 나이의 중간 정도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즉 사십 사세의 나이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소녀경에 나온 이야기란 것입니다.
그럼 이를 남편과 지금 동거하고 있는 남자 사이로 비교를 해 보겠습니다.
소녀경의 이야기대로 한다면 제가 남편하고 관계를 가질 때에 제 육신의 힘은 불행하게도 지금의 제 나이보다도 많은 55세의 근력으로 관계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제 사십대 중반인 동거남과 비교를 한다면 동거남 나이 46살로서 제 나이와 소녀경 이야기대로 대입을 하게 되면 무려 3.5년이나 젊은 근력을 가지고 동거남과 관계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저처럼 53세의 여자라면 어느 남자를 선택하겠습니까?
물론 테크닉이나 요령도 중요하겠지만 가능하다면 젊은 남자를 선택하지 않을까요?
그랬습니다.
저와 동거하고 있는 남자는 남편과 달리 절 날마다 오르가즘의 세계로 끌고 간답니다.
남편이 과다한 업무 때문에 힘을 전혀 쓰지 못 하던 것과는 달리 말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보고 싶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하여도 딸아이들을 통하여 남편 소식을 간혹 듣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3년 넘게 전 남편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 하고 있답니다.
한국에 살기라도 하는지........
아님 어디서 새우 잡이 어선에 타고 있지나 않은지 그도 아니면 원양어선에라도 타고 고생을 하지 않는지............
만나도 이제 함께 살기 힘들어진 사이이지만 그래도 딸이라는 아이들이 있고 또한 호적상 분명하게 부부인만큼 도덕적이나 법적으로는 남남이 될 수가 없는 사이이기에 외간남자와 동거를 하면서도 가끔은 생각이 난답니다.
하지만 저라는 년 정말이지 더러운 년입니다.
금방까지도 동거남 밑에 깔려서 호들갑을 떨었고 그리고 뒤치기로 후장까지 파헤친 년이 한 손으로는 키보드를 누르면서도 또 다른 손으로는 얼마 전에 싸준 동거남의 좆 물이 듬뿍 들어있고 흘러내리는 그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입술에 바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머머! 씻으러 갔던 동거남이 언제 들어왔는지 제 등 뒤에서 제가 쓴 글을 보고 있다말고 좆을 제 몸에 대고 비벼대고 있네요.
어쩜 오늘 밤 잠을 자기 힘들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끝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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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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