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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8:59 1,097회 0건
“다음에 또 봐.”
“응.”
처음과는 달리 정혜가 다음이란 말을 입에 담았다. 나도 정혜와의 다음이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키스를 나누고 난 정혜의 집에서 나왔다.
정혜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번호를 확인하니 승희한테 또 전화가 왔다.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지금 어디에요?』
“나 지금 집에 가는 길인데.”
『저 지금 오빠 집 앞에 있어요.』
“나 집에 가는데 오래 걸려. 그냥 돌아가.”
여기서 집까지 걸어가면 한 시간은 걸릴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 금방이지만, 걸어갈 생각이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승희도 지쳐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 갈 거예요. 기다릴 거예요.』
“나 진짜 늦어.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걸.”
『기다릴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승희가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날씨가 특히 추웠다. 난 집까지 걸어가기로 완전히 마음을 먹었다. 설마 이 추위에 한 시간이나 기다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난 정말로 한 시간이나 걸려서야 집 근처에 도달했다. 걸으면서 너무 추워서 솔직히 후회했지만, 나도 승희 못지않은 고집쟁이다. 그러나 괜한 고집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춥다. 특히 발이 시리다. 얼른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야겠다. 이 모퉁이를 돌면 우리 집이다.
모퉁이를 돌자 우리 집 대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도 보였다. 승희가 서 있었다. 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자기 말을 끝까지 지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야 지금 이 추운 날씨에 뭐 하는 거야!”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정말 고집쟁이다.
“안 추워?”
“추워요.”
담담한 말투였지만, 정말 추워보였다. 작은 몸을 벌벌 떨고 있다. 또 한숨을 쉬었다. 얘만 보면 한숨이 나온다. 지난 여름에서 가을까지 지원한 회사마다 불합격통보를 받았을 때도 이렇게 한숨을 쉬진 않았던 것 같다. 난 목도리를 벗어 승희의 목에 둘러주었다.
“그러다 감기 걸려 바보야.”
“저 바보 아니에요.”
완전히 바보다.
“일단 자리라도 옮기자, 너 얼어 죽겠다.”
나와 승희는 근처의 카페에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후끈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우린 자리르 잡고 앉았다. 적당하게 따뜻하다. 오늘 밖이 춥긴 춥구나. 카페에 들어와 커피를 시켰다. 승희는 얼른 따뜻한 걸 마셔야 할 것 같다.
“저 추워서 그런데, 빨리 좀 갖다줄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카페 직원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아직도 덜덜 떨고 있는 승희가 안쓰럽다. 입술이 보라색이다. 더 오래 있었으면 저체온증 때문에 큰 사고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질렸다.
“오빠는 참 친절하네요.”
승희가 말했다. 아직도 추워서 몸을 벌벌 떨고 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말했다. 어쩐지 화가 났다.
“너 미쳤어?”
“안 미쳤어요.”
“근데 그렇게 벌벌 떨면서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잔 거야. 내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기다린다고 말했으니까요.”
승희는 단숨에 내 말문을 막아버렸다. 그냥 고집쟁이도 아니고 왕고집쟁이다. 세상에 이 녀석의 고집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거다. 난 한숨을 쉬었다.
“약속보다 몸이 더 중요한 거야.”
“알아요. 저도 조금만 더 있었으면 돌아갔을 거예요.”
한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 또 한숨이 나왔다. 정말 지는 걸 싫어하는 애다.
“혜미는 아직도 연락이 안 돼?”
“네.”
처음으로 혜미에 대해 물었다.
“오빠가 연락하면 받을 거예요.”
“야, 난.”
“여기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두 개 나왔습니다.”
승희에 말에 대답하려는데 주문했던 메뉴가 나왔다. 정말 빨리 갖다 줬다.
“감사합니다. 야, 얼른 마셔. 그래야 좀 따뜻해지지.”
“네.”
승희도 춥긴 추웠는지 얼른 커피를 집어 그 온기를 만끽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다.
“윽, 써요.”
승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 시럽 넣어.”
“네.”
내가 건네준 시럽을 뜯어 넣어 스푼으로 젓는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셔본다. 역시 쓴지 얼굴을 찌푸린다. 웃으면서 내 몫의 시럽을 넘겨주었다. 승희가 내 시럽을 넣고 또 스푼으로 저었다. 한 모금을 마시더니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승희가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왜 웃어요? 제가 못 마시니까 웃겨요? 맞아요. 저 어린애 입맛이에요. 달게 안 하면 커피는 못 마셔요.”
승희가 조금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별로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부끄러워한다. 이 녀석이 부끄러워해야 할 건 이 추위에 멍청하게 한 시간이나 밖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메리카노를 고르길래 쓴 커피를 좋아하는 줄 알았지.”
“원래 저 커피 같은 거 안 좋아해요. 녹차라떼 같은 거 아니면 못 먹어요. 근데 지금 분위기에 녹차라떼보단 아메리카노가 나은 것 같아서 시켰는데 역시 못 먹겠네요.”
결국 쿡쿡, 하고 웃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모습에 승희가 날 노려본다. 그러나 곧 시선을 거두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오빠한테 화내러 왔는데 화도 못 내겠네요.”
“왜 화를 내는데?”
“제 말을 안 들으니까요.”
말을 안 듣는다고 화를 내다니, 횡포다. 말 안 듣는다고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도 있긴 하지만.
“승희야.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난 혜미한테 못 가.”
“왜요?”
“헤어졌으니까.”
“하지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줘.”
“제 말도 들어줘요!”
승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내 말을 먼저 들어. 분명히 말하겠는데, 난 혜미랑 이미 끝났어. 지금 내가 찾아가도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 결국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차라리 혜미를 돕는 거야. 너 같으면 시작할 마음도 없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어?”
승희가 내 말에 입을 다물었다. 내 말에 대항할 만한 말을 찾지 못 한 것 같다. 내 말이 타당하니까. 그러나 용납하기 힘든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나를 노려본다. 어떻게든 반박할 말을 찾고 싶겠지만, 지금만큼은 내가 옳다.
“그래도……. 포기 못 해요. 나 내일도 다시 올 거예요.”
정말 왕고집이다. 아마 내가 집에서 나오지 않으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지.
승희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난 한숨을 쉬었다. 내가 계산해야 되잖아.





다음날. 승희가 오지 않았다. 하루쯤은 안 오는 날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에 방학이니까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승희에게 신경을 쓰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일 오던 녀석이 안 오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안 그런 척 나를 속이는 게 내 특기다.
그래도 역시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난 요즘 시간이 아주 많았으니까. 취직자리는 최종결과만 기다리고 있고, 붙을 수 있을 거란 확신 가까운 마음이 있다. 학교는 올해로써 4학년 2학기를 마쳤다. 내년에 졸업식에만 참석하면 끝이다. 최근 몇 년간 중 가장 마음이 편한 시기다. 20살을 넘기고 나서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뭔가에 쫓기는 기분이 들어 영어단어장이라도 들고 있어야 다소 안심이 되었다. 특히 올해초부터 말까지는 가장 열렬히 공부하고 취직을 준비했다. 내년이면 졸업이라는 생각에 불안감과 초조감에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근래 들어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이런 행복감에는 정혜의 존재도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관계는 나도 모르는 사이 깊어졌다. 나라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 정혜라는 여자의 이름이 차지하는 비중이 경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어느덧 그렇게 되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아주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남아 돌고 있다는 건데, 그러다 보니 잡생각이 많아졌다. 나와 정혜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고, 정혜에게 언제 다시 연락하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리도 내가 또 하고 있는 생각은 역시 승희에 대한 것이다. 매일 찾아온다고 하던 승희가 이미 저녁 7시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야 안 올 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했을 테지만 그 고집쟁이가 아무 이유 없이 안 나타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그냥 안 오는 건가.”
마치 내가 승희를 기다리는 것 같잖아. 절대 아니다. 그저 오지 않는 이유가, 또는 오지 못 하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물론 승희는 예쁘다. 인정하겠다. 작은 체구에 귀여운 얼굴. 동안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은 탐스럽다. 쌍꺼풀이 진 동그랗고 큰 눈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작은 코. 입은 작지만 입술은 적당히 도톰하고 혈기가 돌아 붉게 윤이 난다. 피부는 하얗고 혈색이 좋다. 괜히 우리 과 얼짱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보다보면 정말 인형 같은 느낌이 드는 미소녀다. 외모 수준만 비교하면 정혜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 미녀가 매일 얼굴을 비추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찾아오는 이유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남자의 뻔한 흑심을 품고 그 애를 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 있게 말하건대, 난 아주 건전한 마음으로 승희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오늘 정말 무슨 일이 있나. 사고라도 난 걸까. 아니면 그냥 추워서 안 왔을 수도 있다. 자기가 하던 일이 문득 바보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역시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도 않으니 궁금하다. 내가 연락을 하자니 우습다. “매일 온다더니 왜 안 와?”하고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잖아.
8시가 되었을 때 승희에게 연락이 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우와, 오빠 진짜 빨리 받았네요.』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전화라 얼굴이 안 보여서 다행이다.
“시끄럽고. 너 오늘은 안 오는 거야?
『왜요, 기다렸어요?』
“그래, 기다렸다.”
『오빤 참 솔직해서 좋아요.』
나만큼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오늘은 안 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잠시 망설였지만, 기다린 게 맞아서 그냥 말했다.
『저 지금 오빠 집 앞에 와 있어요.』
“와 있다고? 오늘은 왜 이리 늦었어?”
『낮잠 자다가요.』
“알겠어. 일단 나갈게.”
전화를 끊고 나갈 준비를 했다. 딱히 준비랄 것도 없었다. 점퍼만 걸치면 끝이다.
“어디 가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던 엄마가 집을 나서는 날 발견하고 물었다.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아는 후배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고 집에서 나왔다. 마당을 걸어 집 대문을 열었다. 승희가 보였다. 과연 어두운 저녁에도 분간이 가능한 빛나는 외모다.
“야, 너 뭐야?”
승희를 보고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도저히 따뜻한 인사말이 나올 수 없었다. 승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몸을 덜덜 떨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정도로 추운 날이 아니다. 게다가 표정은 아주 괴로워 보였다. 명백히 아픈 사람의 얼굴이다. 그런 얼굴로 서 있으니 말이 곱게 나올 수가 없었다.
“오빠 너무 차가워요.”
“지금 그게 문제냐? 너 완전히 환자구만.”
“감기에 걸리긴 했는데 참을 만해요.”
완전히 다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참을 만하다니.
“됐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
“싫어요.”
승희는 싫은 게 너무 많다. 특히 내가 하는 제안은 다 싫어하는 것 같다.
“택시 잡아줄게.”
“안 가요.”
손을 잡아끌고 큰길로 나가려고 하는데 승희가 내 손을 뿌리쳤다. 난 한숨을 쉬며 승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기침을 하며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죄책감이 들었다. 나 때문이다. 어제 내가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감기에 걸린 것이다.
“그보다 오빠 혜미 만나러 갈 거예요?”
감기로 콜록거리고, 얼굴은 새빨갛고,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듯 추위에 떨고 있으면서 하는 말이 이거라니. 내가 완전히 졌다. 패배를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알았어. 혜미 보고 올게. 그러면 됐지?”
한숨이 나왔다.
“야, 근데 뭔가 기대하지는 마라. 다시 시작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한……, 승희야? 야!”
승희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얼른 다가가 몸을 잡았다.
“승희야! 승희야!”
내 앞에서 누군가 의식을 잃는 것을 본 것은 난생 처음이다.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아주 당황했다. 몇 번이고 승희를 불렀지만 응답이 없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아주 다행히도, 택시가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얼른 잡았다.
“병원으로 가주세요!”
무슨 병원인지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몇 분 후 병원에 도착했다. 오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서 거스름돈도 받지 않았다. 오천 원이었는지 만 원이었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사람을 업고 병원에 들어오니 몇몇 간호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승희를 응급실로 옮겼다. 다행히 서류 절차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었다. 응급실까지는 내가 업고 갔다. 응급실 침대에 승희를 누였다. 곧 의사가 손에 차트를 들고 나타났다.
“얘가 감기에 걸렸는데 갑자기 쓰러졌거든요?”
“가족이세요?”
“아니요. 아는 후배인데요.”
“애인이요?”
“아뇨 그냥 아는 후배요.”
“무슨 사이요?”
“아 그냥 아는 후배라고!”
이 의사 왜 이래?
“쉽게 말하면 그냥 잠든 겁니다.”
의사는 승희의 상태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난 의사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상은 없는 거예요?”
“주사 맞고 푹 자면 나을 겁니다. 근데 이런 몸 상태로 데이트를 한 겁니까?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너무하시네.”
“아, 애인 아니라니깐!”
“일어나면 수분보충도 시켜줘요. 차가운 물 말고 따뜻한 물로요.”
그렇게 의사는 자기 할 말을 다 하고 사라졌다.
잠시 후 간호사가 한 명 나타나 승희에게 링겔을 놔줬다. 누군가 링겔 맞는 모습은 처음 본다. 살면서 그 흔한 감기조차 몇 번 걸려본 적이 없었다. 가장 심하게 다쳐본 건 횡단보도 앞에 있는 기둥(볼라드)에 정강이를 부딪쳐서 한 달간 멍이 빠지지 않았던 것 정도다. 그때 진짜 아팠다. 일주일은 걸을 때마다 정강이가 시큰거리기도 했다. 아파서 병원을 간 적보다 예방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간 일이 더 많다. 가족도 모두 건강해서 병원 신세를 진 일이 없다. 내가 아는 사람이 병실에 누워 있는 것 자체도 낯설다.
승희의 핸드폰으로 승희네 가족에게 전화했다. 조금 전까지는 정신이 없었다. 정신이 돌아오니 가족에게 전화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역시 단축번호 1번은 엄마구나.
『여보세요.』
“저, 승희 어머니인가요?”
『그런데요?』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딸 전화로 낯선 남자 목소리가 들리니 경계할 만도 하다.
“저 승희 아는 선배인데, 승희가 지금 쓰려져서 병원에 있거든요?”
『네? 승희가 병원에요!』
갑자기 높아진 목소리에 수화기를 멀리 떨어뜨렸다. 귀가 아프다.
“네 지금 XX병원 응급실이에요. 큰일 난 건 아니에요.”
『당장 갈게요!』
“네에.”
통화가 끝났다. 당장 온다고 했는데 얼마나 걸릴까. 승희네 집이 여기서 얼마나 먼지는 몰라도, 30분 정도면 되지 않을까. 승희가 같은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어디 사는지는 모른다. 최근에 이상할 정도로 자주 만났을 뿐이지, 그 전에는 대화도 별로 나누지 않던 사이다. 당연히 승희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정보밖에 모른다. 같은 동네에 살지 않았다면 어떤 지역에서 사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 집에 가도 되지 않을까. 가족도 곧 올 테니 걱정할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가족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 마주치면 어쩌다 승희를 응급실로 데리고 왔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찔리는 곳이 있다 보니 아주 거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막상 집에 가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대로 승희를 놔두고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희가 응급실에 실려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냥 집에 가기엔 너무 미안하다.
고민은 계속 되었고 시간은 흘렀다. 이젠 차라리 승희네 가족이 얼른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 아직 10분밖에 안 됐구나. 시간이 너무 안 간다.
어영부영 20분이 지났다. 승희네 가족은 아직 오지 않았다. 승희가 깨어났다. 승희의 눈이 주변을 훑는다. 낯선 천장이 보이니 당황스러울 거다.
“병원이야.”
승희가 움찔하며 나를 쳐다본다. 많이 놀랐나보다.
“네가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왔어.”
“…….”
“뭐?”
승희가 입을 열어 무언가 중얼거렸다.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승희에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귀를 기울였다.
“목말라요.”
고맙다는 말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기대는 했다. 적어도 물 달라는 말을 할 거라는 생각은 생각은 못 했다.
“여기.”
난 주머니에서 생수를 꺼냈다. 조금 전에 집에 가려고 했지만 자판기를 발견하는 바람에 결국 물을 뽑아 돌아왔다. 뚜껑을 열어주었다. 승희가 몸을 살짝 일으켜 물을 받았다.
“원래 따뜻한 물 마시라고 했는데, 따뜻한 물은 못 구했어. 그러니까 바로 삼키지 말고 입으로 데워.”
주머니에 넣고 체온으로 조금이라도 데워 놨다. 승희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물을 벌컥벌컥 삼킨다. 그러다 사례가 들려 기침을 한다.
“바보야. 바로 삼키지 말라니까.”
무슨 말 안 듣는 남자애 같다. 그냥 고집이 센 게 아니라 시키는 대로 하는 걸 거부하는 걸까. 청개구리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몸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근데 오빠 저 응급실 처음 와봐요.”
“나도 처음이야.”
승희가 주변을 신기한 듯이 둘러보고 있다. 누구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자각이 없는 건가. 응급실을 둘러보던 승희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이 “아!”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근데 오빠, 아까 분명히 혜미 만나러 간다고 했던 거 맞죠?”
한숨이 나왔다. 감기 때문에 쓰러져 병원에 와 있는 상태에서 하는 말이 이런 것밖에 없는 건가.
“맞죠?”
“그래, 맞다.”
“그럼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가요.”
승희가 이야기를 착착 진행했다. 말려들 뻔했다.
“무슨 내일이야. 너 방금 기절했다가 깨어났거든?”
“저 멀쩡해요.”
아직도 그렇게 나른한 얼굴로 말해봤자 전혀 믿을 수가 없다. 벌써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도 신기하다.
“안 멀쩡한 거 아니까 고집 부리지 마.”
“그래 놓고 안 갈 거죠?”
승희가 불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원래 전생을 믿지 않았었는데, 이제부터 믿고 싶다. 내가 전생에 승희를 많이 괴롭혀서 그 죄가 지금 생에 돌아온 게 아닐까.
“갈 거야. 나 좀 믿어줘. 기간을 조금 유보하자는 거야.”
“유보요? 얼마나요?”
“네가 감기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승희가 내 말에 반박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네가 얼마나 몸 상태가 안 좋은지 잘 알고 있네.”
“윽.”
승희가 찔끔해서 물러섰다. 감기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요즘처럼 영양섭취가 용이한 시대에 감기로 쓰러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애써 멀쩡한 척 하고 있지만 지금 승희의 몸 상태는 보기보다 좋지 않을 거다.
“네 말대로 혜미 만나러 갈 테니까. 대신 너 몸 다 나으면 그때 가자. 이것만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
승희는 내 말에 반박하고 싶은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다시 입을 닫았다.
“알겠어요. 감기 다 나으면 그때 가요.”
승희가 결국 패배선언을 했다.
“오빠 진짜 고집쟁이네요.”
승희한테 고집쟁이라는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다.
“너만 하겠냐.”
나도 지지 않고 승희의 말에 대답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참지 않고 그냥 웃었다. 승희도 웃었다.
“승희야!”
그때 승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승희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웬 중년 여성이 서 있다. 승희네 어머니인 것 같다.
“엄마.”
“그러게 내가 밖에 나가지 말라니까!”
승희네 어머니가 울상이 되어 승희를 나무랐다. 그 다음 승희를 끌어안았다. 난 옆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다. 이거 참 여기 있어야 할지 그냥 가야 할지 모르겠다. 잠시 후 승희 어머니가 승희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나한테 전화한 남자 누구니?”
“접니다.”
“어마!”
승희 어머니가 놀랐다.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가 들리니 놀랄 만도 하다.
“안녕하세요.”
“예에,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승희 어머니도 고개를 숙였다. 승희 어머니가 나를 관찰한다. 노골적이진 않다. 주의하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나의 전신을 훑는다. 그 시선은 낯선 남자를 향한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해한다. 내가 승희네 어머니 입장이었으면, 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전 김세화라고 합니다. 승희랑 같은 학교 같은 과 2년 선배고요.”
“네.”
승희 어머니가 잠자코 내 소개를 듣는다. 그러나 여전히 시선은 차갑다. 이해는 간다. 딸이 웬 놈팡이를 만나다가 쓰러진 상황인데 고운 시선을 보낼 리가 없다.
“저기, 죄송합니다.”
“오빠, 왜 그래요?”
난 일단 고개를 숙였다. 내가 거의 90도로 허리를 꺾으니 승희가 놀라서 말했다.
“승희가 이렇게 아픈 줄 몰랐습니다.”
고개를 드니 승희 어머니도 조금 당황한 표정이다. 난 머리를 최대한 회전시키며 다음에 할 말을 만들어내고 있다. 일단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긴 했는데 이다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취업상담 때문에 승희랑 만났다가 이런 일이 생겼어요.”
“취업상담이요?”
그럴 듯한 거짓말을 했다.
“네. 제가 이번에 XX에 취직했거든요. 그래서 승희가 저한테 취업준비요령 같은 걸 물어보기로 했거든요.
나랑 2년 후배인 승희도 마찬가지로 취업을 준비 중이다. 내가 생각해도 괜찮은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아아, 그래요?”
승희 어머니의 경계심이 풀렸다. 아직 취직이 된 건 아니지만, 때로는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 증거로 승희 어머니의 시선이 호의로 가득 차 있다. 역시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곳에 취직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 최종결과가 제대로 나오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약속을 잡았던 건데, 설마 승희가 쓰러질 정도 아픈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에요. 오빠. 제가 괜히 억지 부린 거잖아요. 이제 시간도 없는데.”
승희가 내 거짓말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이런 거짓말까지 했는데 내년에 승희와 함께 취업준비를 하고 있으면 기분이 참 묘할 것 같다.
“XX에 다닌다고요?”
“아, 아직 다니는 건 아니고요. 이번에 막 붙어서 내년부터 입사합니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이번에 결과만 제대로 나오면 내년부터 견습사원으로 입사할 수 있다.
“그러시구나.”
승희 어머니는 나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기 시작했다. 나이와 이름. 키. 가족관계까지 묻는다. 무슨 품평을 받는 기분이다. 그래도 나쁜 분위기는 아니다.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은 조금 찔리지만, 이제 결과가 나올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 배수진을 쳤다고 생각하련다.
승희 어머니와 대화를 끝내고 병원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10시가 넘었다. 겨우 빠져나온 시간이 10시다. 승희가 도중에 피곤해서 잠이 들지 않았으면 아직도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집에 도착하니 거의 11시가 되었다. 별로 한 것도 없었는데 몸은 피곤했나보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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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만에 올리는 주제에 분량이 이것밖에 안 되서 죄송합니다..

이제 대략 일주일 간격으로 글이 올라올 겁니다

평일에 많이 바빠져서 주말에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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