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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 선생님 - 2부1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18:56 1,236회 0건
2012-12

“처음 뵙겠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스물다섯이나 됐을까 싶은 청년이 들어왔다. 머리카락을 귀가 덮게 길렀는데 아래로 삐죽거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눈이 컸는데 웃을 때 한쪽 눈을 찡그렸다. 신발을 벗으며 힐끗 눈을 치켜 떠 주희를 올려다 보았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한곳에 집중하여 바라볼 줄 아는 그 눈빛에 잠시 당황했다.
“어떻게 잘 찾아 오셨네요.”
“장로님이 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어요.”
다시 들어보니 목소리가 생글생글했다. 교단에 서서 강의를 하면 학생들이 안졸고 수업을 받을 또렷하고 리듬이 있는 목소리였다.
두사람은 거실에서 낮은 유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앉았다.
“집안 사정은 대충 들었어요. 자세하게 들려 주세요.”
민수는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죽어도 말하기 싫었다. 특히 이렇게 마호가니 테이블이 있고, 영문 전공 서적이 자랑이라도 되는 듯이 거실에 진열되어 있고, 취향에 일관성은 없지만 밀레와 사걀의 모조품이 걸려 있는 이런 곳에서 두평반의 방에 여섯명이 쥐새끼처럼 오글거리고 살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장로에게 대충 얼버무려 놓기를 잘했다. 이제 나이 스물 여섯, 먹을 만큼 먹었다. 성인이고 혼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근데 이제 와서 10년 간의 고아원 시절이 문신처럼 따라다니는 것을 내비둘 수 없었다.
“장로님 말씀대로 얼마 전에 군에서 제대해 보니 집이 사라지고 없었어요. 군에 있으면서 쇠고기 수입업을 하시던 아버지 일이 잘 안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근데 그게 더 나빠져서 집까지 넘어가고 아버지는 캐나다에 출장간 것처럼 해서 잠적해 버렸어요. 엄마도 몰래 따라가구요. 여동생은 뉴질랜드로 선교가는 목사와 급히 결혼해서 떠나버렸어요.”
“참 안됐어요. 그러면서 고아원과 양로원에 자원 봉사를 다니고... ”
“다 장로님이 교회에서 먹여주고 재워준 데에 대해 당연히 할 일이지요.”
주희는 교회와 연결된 봉사단체에 나가 양로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을 때 박 장로를 만났다. 그는 신도 중에 아주 명석한 학생이 있는데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 주었다.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할 정도로 집안이 몰락했다는 말까지 들었다.
민수는 여덟 살 때 서울역에 버려졌다. 그는 부모에게 버려질 정도로 복이 없었지만 하나 다행인 것은 좋은 머리를 타고 났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과외한번 안하고, 명문대에 들어가서 고아원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 공부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제대한 후 본격적으로 외무고시를 공부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욕심이 생기자 고아원 출신임을 숨기고 싶었다. 대학 와서 처음에는 자신을 키워준 성심고아원이 고마워 술을 먹으면 솔직하게 사람들에게 고아원 출신임을 밝혔다.
그러나, 자신의 솔직함에 더 가까워질 줄 알았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는 거리를 두었다.
민수가 언뜻 보여주는 경쟁심과 천박함, 예를 들어 옆테이블 사람들이 파전이나 반건조 오징어같은 안주를 다 안먹고 가면, “이거 아까운데 먹자” 하며 냉큼 가져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넣는 행동, 그리고 부잣집 여자를 동경하면서도 “머리에 똥만 찼다”느니, “인생을 모르는 것들” 하면서 드러나는 증오심이 ‘고아원 출신임’과 연관되어 스스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민수는 한 학기 학비를 벌려고 휴학하고 돌아오자 그들과는 영영 멀어졌다. 그후, 남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친해지기 위한 통과의례인양 너에게만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식으로 밝혔던 고아원 경력을 입 속에서 지웠다. 그러자 거짓말이 그 안을 또아리튼 뱀처럼 들어앉았다.
이 뱀은 참 달콤했다. 아버지가 재벌은 못되도 캐나다나 호주를 제집 드나들 듯 오가는 쇠고기 수입업자라고 한번 거짓말을 하자 어느새 그것이 진짜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고아원 원장의 주선으로 한 교회의 원조를 받아 반지하방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 습기찬 집을 나서는 순간 목에 힘이 들어가고, 걸음걸이가 당당해졌다. 교양수업을 들으며 알게된 꽤 쓸만한 이론도 민수를 도와 주는 것 같았다.
이론까지는 못되지만 이름하여 ‘피그말리온 효과’인데, 그리스 신화 중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빚은 여자 동상을 진짜 사람처럼 쓰다듬으며 애정을 쏟으니 동상이 진짜 살아있는 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여자가 또한 젊고 늘씬한 미인이었다는 점도 맘에 들었고 더구나 섹스까지 잘햇다는것이다.
마인드 콘트롤! 남이거나 나이거나 자신이 믿는 대로 된다! 이것이 교훈인 것이다. 내가 고아원 출신이라고, 누가 알아챌까 전전긍긍하며 소심하게 사느니 그냥 유복한 집안의 외아들이라고 믿어버리자. 그러면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반지하방에 돌아와서는 김치에 라면을 먹더라도 밖에 나가서 마음가짐만은 당당하고 여유로운 부잣집 외아들이라고 여겨 버리자. 이런 거짓말로 남에게 피해를 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다. 종교인의 쾌활함을 잘 알지 않은가. 어차피 인간은 죽게 되어있다. 하지만 천국이 있다, 사는 동안 좋은 일 많이 하고 성실하게 일하면 천당간다고 믿어 한평생 보람차게 살면 이미 천국에 간 것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죽어 없어질 몸, 하고 비관하고 생업에 손 떼고 낭비나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가보기도 전에 이승이 이미 지옥이다.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이란 무서운 것이다. 천국이 실제 없냐, 있냐는 중요하지 않다.
민수는 주희네 집이 맘에 들었다. 자신이 꿈꿔왔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널찍한 집, 잘 가꾸어진 정원, 항상 처음이라는 듯이 솟아오르는 분수, 깨끗한 거실, 또 정확한 발음에 교양이 풍기는 주희, 복작거리던 고아원과 반지하방과 열 둘이 같이 쓰던 교회의 사택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주희는 이층으로 민수를 데리고 가 그가 살 방을 보여 주었다. 다영이 막내 삼촌이 예전에미국 유학하기 전에 살던 방이었다.
커튼을 새로 달았고, 공부를 많이 할 사람이니 특별히 스텐드와 책상을 새로 마련했다. 원래 있던 책상은 2층 거실로 빼서 휴식을 취할 때 간이 탁자로 쓰도록 했다.
“입주 과외니 다영이가 물어볼 때마다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 아시죠?”
주희는 집안의 주인으로서, 다영이의 엄마로서 확실하게 일처리를 해나가는 자신이 대견스럽고 뿌듯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과외를 받아본 학생은 수학 성적이 평균 20점은 올랐어요.”
“그럼 원래 85점이었던 학생은 어떻게 되게요?”
주희는 딱딱한 분위기를 좀 누그려뜨리기 위해 이런 유치한 농담까지 아끼지 않았다.
“말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화났어요?.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저도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는데 어머님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니 좀 섭섭해서요. 별거 아닙니다.”
주희가 민수의 컴플렉스를 건드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었지만 거짓으로 지탱하고 있는 자존심이라 상대가 자신을 못믿는 눈치가 보이면 발끈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솔직하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주희는 성마른 그의 반응에 종 당황했지만 자존심을 지킬 중 아는 사람의 자기 표현이라고 치부했다.
“아직 페이 얘기는 못들었는데...”
“한 달에 백만원드리겠어요. 괜찮아요?”
백만원이면 민수에게 큰 돈이다. 먹고 자고 씻고 다 빼고 백만원, 등록금 내고 용돈쓰고도 한달에 이삼십만원은 저축 할 수 있을 만한 돈이었다.
하지만 욕심이 생겼다. 이런 돈에 감지덕지하며 “하, 감사합니다.” 하는 노예같은 짓은 하지 말자. 남편이 병원 원장이라고 했다. 자식하나 가르키는 데 돈 아낄리 없다. 수학만 가르치나, 논술과 국어도 좀 봐주고, 또 과학도 좀 봐줘야 하고, 그 값을 하면 된다.
“그것은 좀 적은데요. 집에 붙어 있으면서 학생한테 계속 시달릴텐데, 하루의 반은 이 집에 있는데요.”
“그러면 얼마면 좋겠어요?”
“한 이백은 되야 할 것 같습니다.”
주희는 두배나 높게 부른 그가 허황되다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평가할 줄 아는 당당함이 믿음직스러웠다. 박장로는 ‘멕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주념버리할 용돈이나 쥐어주라’고 했지만 학비를 생각해서 백 만원을 부른 것이었다.
민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자신이 좀 부끄러웠다. 밍크코트 하나 산다고 5백만원은 그 자리에서 눈깜짝 않고 카드를 긁어버리는데 딸을 가르치는 선생을 박대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다영이가 좀 들떠서 감당하기 힘들거예요. 그대신 가끔 다영이 동생 소영이도 물어보는것만 한번씩 알려주시구요. 무엇보다 다영이가 좋은 대학 보내주면 보너스로 차 한대 뽑아드릴게요. 괜찮아요?”
“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번 열심히 가르쳐보겠습니다.”
민수는 도대체 이 여자가 어떻게 생겨먹은 여잔가,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여잔가 싶으면서도, 그런 호탕한 씀씀이에 역시 잘사는 집이라 다르구나 하는 감탄이 일었다.
자신과 전연 다른 사람이라 고아원 출신임을 밝혀도 그저 신기해하며 ‘그 시절 얘기’를 해보라면 순진하게 귀를 기울일 여자같았다.
“제가 한가지 당부드리는 것은, 이건 딸가진 엄마로서 드리는 부탁이예요. 이제 다영이도 여자로서 다 컸고, 또 호기심도 많은 사춘기예요. 다영이와 불미스런 일이 안생기도록 조심했으면 해요. 또 더 어린 소영이도 있고 하니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민수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불미스런 일은 뭐고 부탁은 뭐냐고 따지고 싶었다. 민수는 고아원 시절에는 그곳을 떠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나와서는 생계걱정을 하느라 바빴으므로 여자와 사궈본다, 어떻게 한번 손을 잡아 본다, 연애를 한다 같은 것은 남의 얘기로 알고 살고 있었다.
민수는 ‘설익은 총각’이었고, 군에서 고참들이 야한 얘기 좀 해보라고 하면, ‘잘 모르겠습니다’고 정직하게 말해 갈굼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친 오빠처럼 지내면 된다는 말씀이지요?”
“제 말이 바로 그 말이예요. 다영이가 말 안듣고 까불면 참지 말고 혼내주기도 하구요”
“잘 알겠습니다. 그런 거야 제가 아주 잘합니다. 동생들 혼내주는 데는 뭐...”
하마터면 고아원 시절 얘기가 나올 뻔 했다. 누나들에게 겁탈(?)당한 어린시절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고1때부터 민수는 여섯명이 같이 쓰는 방에서 제일 연장자라 싸움이 벌어지면 원장이 알기 전에 뜯어말려 눈물 찔끔나게 혼내주고, 또 안되면 기합도 주곤 했다. 모여 살다보면 이런 역할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얼마 후 다영이가 학원에서 돌아왔다. 다영이는 지금까지 자신을 거쳐간 과외 선생에게 처음에 대하듯이 그에게 눈길도 안주고 방안에 들어가 버렸다.
‘싸가지 없군.’
민수는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과연 내가 저 애를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고3이라 학생으로 봤는데, 학생티는 안나고 성숙한 여인이 장난감같은 교복을 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말 안들을 때 과연 혼내 줄 수나 있을까?
곧바로 이어서 둘째딸 소영이가 들어왔다. 누군가하는 의아심으로 민수를 바라보자 주희는 소영에게 다영이언니 과외 선생님이다라고 말했고 소영이는 고개를 까박 숙이고는 조용히 제방으로 사라졌다.
민수는 ‘그래도 둘째딸이 큰딸보다는 훨씬 낳군’ 하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3일 후부터 그는 주희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판조는 사실 아내 주희가 남자 선생을 입주 과외로 두자고 했을 때 극구 반대했다. 주희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싫다는 거예요. 다영이 교육은 내가 다 맡기로 했잖아요.”
“글쎄, 남자 선생을 집안에 끌어드리는게 불편하단 말이요.”
“당신, 다영이가 캐나다가서 왜 그렇게 영어 실력이 는 줄 알잖아요. 학원시간 끝나면 끝나버리는 공부가 아니라 24시간 영어와 접하니 그렇게 늘잖아요. 수학도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아요.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항상 옆에 물어볼 사람이 있고, 또 딱 시간을 지켜 지도해줄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제 몇달도 않남았어요.”
삼일 후 민수는 교회에서 짐을 싸들고 주희 집으로 들어왔다.
마침 일요일이라 온 가족이 모여 있었다. 판조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 런닝 머신 위에서 되는 대로 달리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헉헉대며 거실 바닥으로 내려와 주저 앉았다. 그때 민수가 리어카에다 짐을 싣고 정원으로 들어왔다.
꽤 무거운 책 보따리를 양 어깨에 지고 들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자 판조는 위압감을 느꼈다.
‘귀찮게 되었군. 이 녀석 못 가르치기만 해봐라.’
판조는 괜한 적대감이 생겼지만, 인간 관계 좋은 그는 이런 속마음을 숨기고도 사람을 대할 줄 알았다.
“아, 다영이를 가르치기로 했다는 선생님이군요!”
짐을 들고 있던 민수는 호탕하게 보이려고 억지로 웃으며 다가오는 판조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줄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어깨에 들려 있던 책 보따리를 거실에 던지고는 악수를 받았다.
그때, 주희가 추리닝 바지 바람으로 방에서 나왔다. 남색 바지에 하얀 면 티를 입었다. 이마에 하얀 띠를 맸는데 하얀 이마가 띠와 잘 어울렸다.
“선생님 짐 옮기시는데 좀 도와드려라.”
주희가 리어카에서 옷짐을 들고 나무 계단을 올라오며 말했다.
“나, 운동 나갈래. 정태랑 같이 뛰기로 했어.”
다영이는 짐짓 민수를 무시하는 체 했지만, ‘한 집에서 살 사람’이라는 정도는 의식하고 있었다. 면티가 땀에 젖어 등짝에 짝 달라붙었는데, 불퉁거리는 몸이 곧이곧대로 드러났다.
‘데리고 운동은 같이 할 수 잇겠군.’
엄마가 짐을 나르니 다영이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왠 손수레예요?”
다영이는 낡은 리어카가 신기해 민수에게 물었다.
“교회가 여기서 가깝잖아. 차를 빌릴 수도 없고.”
“이것 구하기가 더 힘들겠네요. 호호.”
“그럼 우리 소영이가 다니는 교회인가요?..”
“아니..난 소영이는 잘 모르고 저기 왕릉 뒤쪽의 교인이 200명쯤되는 자그마한 감리교회야”
민수의 수학적인 답변에 누가 그렇게 자세히 물어보았나? 벌쭉해진 다영이는
“이거 제대로 굴러가나”
사실 그 리어카는 근처 초등학교에서 수위아저씨가 안보는 틈을 타서 몰래 빌려온 것이었다. 그는 은밀히 뭔가를 해내는 데는 수완이 있었다.
“태워줄까?”
민수는 다영이랑 어떻게든 가까워져야 했으므로 이런 제안을 했다.
“정말이요?”
짐을 다 나르고 나서 주희의 걱정을 뒤로 하고 그들은 리어카를 끌고 정원을 나갔다. 집 밖에서 바로 울타리가 쳐진 울창한 숲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죽은 왕의 무덤이었다. 민수는 앞에서 노예처럼 끌고, 다영이는 수레가 흔들리는 것을 즐기며 “달려! 달려!”하고 소리쳤다.
이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던 주희는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그들이 너무 허물없어지면 다영이가 긴장하며 배우기 힘들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주희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는 존경과 훈계가 바탕이 되어야 학습 효과가 높다고 믿고 있었다.
“다영아!”
앞쪽에서 한 남자가 소리쳤다.
“정태야!”
다영이는 길가에서 손을 흔들며 서 있는 정태에게 쏙 다가가더니 민수는 이내 잊어버렸다. 정태는 요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얼굴은 얍사름하고 삐쭉거리는 머리모양에 키는 후리후리했다.
민수는 유행과는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남자를 보면 ‘여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팔짱을 끼더니 서로 몸이 간지러운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민수가 얼핏 그들의 대화를 들으니 ‘웬 리어카? 전원일기?’ 하며 뭐라고 하다가 뛰면서, ‘과외 선생님... 집에 살기로... 촌스러워...’ 하고 웃으며 멀어졌다.
민수는 집에 돌아와 거실 안에 있는 런닝 머신 위에 올라가 보았다.
‘그냥 밖에서 뛰면 되지. 집안에다 이런 요상한 것을 설치해 놓고. 하여튼 돈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쓰게 된단 말이야.’
민수는 시간 정해서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산에 좀 올라다니거나, 군대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축구를 해본 적은 있었다. 그나마 고참이 되자 그냥 내무실에서 뒹굴었다. 억지로 하는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축구를 좋아하지만 군대 축구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판조도 그렇고, 다영이도 그렇고, 이쪽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운동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몸에 관심을 많이 쏟는다고 해야할까. 돈많고 시간 많아지면 자연스레 자기 몸 가꾸기에 투자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커다란 월척의 탁본을 보니 아마도 낚시도 하러 다니는 모양이다.
민수와는 격이 다른 이런 모습들이 민수에게는 생소했다.
‘다영이나, 소영이나, 엄마나 다 생글생글하고 예쁘고 귀티가 나는 이유가 있었군’
민수는 어서 이런 상류층 분위기에 적응하고, 어서 고시에 합격해 이런 가정을 한번 일궈보리라 하는 야망이 더 구체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짐을 다 정리해가는데, 주희가 차를 들고 올라왔다.
“쉬었다 해요.”
찻잔을 건넸다.
“아, 고맙습니다. 무슨 차예요? 향기가 좋은데.”
민수는 붉은 색을 띠고 떨떠름한 냄새가 나는 차를 받으며 의례적으로 물었다.
“블랙티예요. 홍차라고... 지난 번 영국가서 사왔어요.”
그는 홍차하면 근대 역사에도 잘 나와있듯이 중국이 생각나는데 주희의 말을 듣고 있으니 마치 홍차의 원산지가 영국같았다. 영국놈들이 중국에 아편팔아먹고 홍차를 사갔구나, 그리고 블랙티라고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구구나, 하는 비틀어진 생각이 일었다.
“처음에는 좀 썼는데 이십년 가까이 먹다보니 끊을 수가 없어요. 영국의 우중충한 날씨가 생각날 때면 이 차를 마셔요.”
민수는 꿈에 젖어 이국의 풍경을 상기하는 주희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홍차 하나 가지고 자기는 아편이나 떫은 맛을 떠올리는데, 먼 먼나라와 어떤 추억을 떠올리는 그녀가 마치 철모르고 순수한 소녀 같았다.
“영국에 가보셨어요?”
“가봤죠. 영국, 프랑스, 두바이, 모스크바, 네델란드, 카이로... 제가 항공사에서 일할 때요.”
주희네 아버지는 지방의 큰 항구도시에서 백화점을 열고 있다.
주희는 어렸을 때부터 진열대 앞에서 유니폼을 입고 서 있는 여직원 언니들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나도 크면 저렇게 될래 하고 말하면 아버지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암, 우리 딸 저렇게 예쁘게 커야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특히 보석과 가구 등 수입품목 진열대에 있는 언니는 영어와 일본어를 잘해 더 멋있어 보였다. 주희는 항구 도시에서 들어왔다가 어디론가로 떠나는 배와, 아버지와 가까운 외국인들을 보면서 먼 이국을 동경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타협을 본 게 항공사 스튜디어스였다.
아버지는 디자인같은 것을 전공해서 외국으로 유학보내고 싶어했지만, 그당시 스튜디어스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선망되던 직종이라 주희의 고집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스튜디어스하다가 외국에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사업가와 눈이 맞으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며 눈감아 주었다.
“책이 다 두껍네요. 무슨 공부를 하세요?”
주희는 박장로에게 대충 민수에 대한 얘기를 들었지만 모른 채하고 다시 물었다. 주희는 민수가 길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사근사근하고, 상처를 받은 듯이 조용한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거만한 목소리는 질색이었다.
“외무고시를 공부합니다. 외교관이 되어서 탄자니아나 라이베리아 같은 데 가서 축구팀을 만들고 싶어요.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게요. 그게 제 꿈이예요.”
아프리카! 주희에게는 낯설지만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그 광활한 초원은 잘 알고 있다. 주희는 민수의 그런 순수한 열정을 듣고 ‘참 젊구나. 젊은이는 이래야 돼’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양로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주희는 전세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겠구나 하고 추측만 해보았는데 민수의 포부를 듣고 눈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민수는 다영이와 이층을 쓰기로 했다. 주희와 판조는 다영이의 방을 아래층으로 옮기려했으나 어리숙한 민수를 보고, 또 옆방에는 소영이도 있고, 다영이의 반대가 심하기도 해서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 주희는 잠시나마 민수를 의심했던 것을 후회했다.
‘젊은 남녀’라고 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고, 또 다영이가 민수에게 남자로서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심하였다. 판조도 민수와 술을 마셔본 결과 그가 속에 뭘 숨기고 있는 줄은 잘 모르지만 예의와 체념이 있고, 고시를 한다니 사회에 잘 적응해서 살려는 규격화된 인물임을 알고 ‘자신을 해롭게 하는 엉뚱한 짓은 하지 않을 사내’라고 민수를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여자를 사궈본 적도, 그럴 마음도 없는 쑥맥인 것 같았고 나아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내같아 어느 정도 맘에 들었다. 또 고교 시절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나가 은상을 받았다고 하니 딸의 선생으로서 믿을 만했다. 고시에 합격하면 ‘사윗감...’하는 김칫국도 마셔보았다. 하지만 이는 나중 일이었다.
그렇게 주희네 집에서 민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이글의 주인공들에 대해서 배경설명을 하다 보니 글이 지루하게 되었네요. 어떤분이 경험담을 쓴 글이 인칭 시점도 맞지 않고 전개방식이 황당하다고 했는데….전 여기에 나오는 모든사람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그 주인공 자신의 관점에서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해나가는 방식으로 글을 ㎧윱求蔑┎臼?앞에서부터 읽지 않으면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이글의 장르가 어떤것이든간에 약간의 경험이 가미된 픽션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P혀둡니다.
야설은 야설입니다. 저는 단지 야설을 좋아하는 평범한 직장 셀러리맨입니다. 작가의 글솜씨에 대한 비판보다는 글속에 주인공들과 대화를 해보시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전 야설을 좋아하는 모든분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가장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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