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취직에 성공했다.
“여보세요.”
결과 발표 당일. 마음을 졸이며 결과발표를 기다렸다. 원래대로라면 오후 2시에 인터넷을 통해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보다 30분 빨리, 오후 1시 33분에 원하던 전화를 받았다.
『합격입니다.』
물론 저렇게 말하고 전화통화가 끝나진 않았지만 어쨌든 축약하면 저런 내용이었다.
“엄마! 나 합격했어!”
방 밖으로 나가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엄마에게 외쳤다.
“아부지! 저 합격이에요.”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
『나 취직했다.』
수업중이라 전화를 안 받는 동생한테는 문자를 보냈다. 가족에게 취직 사실을 알린 다음 다른 사람을 찾았다. 내 사실을 알릴 만한 사람. 중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친구. 친하게 지내는 대학교 선후배. 친척들. 하나하나 연락할 만한 사람을 머리에서 그렸다.
아니, 관뒀다.
괜히 나를 속이는 짓을 하고 싶지 않다. 사실 합격 통보를 받는 순간부터 떠오른 얼굴은 부모님도 친구도 아니었다.
얼굴이 떠오른 그 사람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은 일을 하고 있을 테니까.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세화야, 축하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들뜬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기분이 더 좋았다. 전화라서 다행이다. 아마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있었다면 이 히죽거리는 표정을 감추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오늘 만날 수 있어? 내가 쏠게!』
“진짜? 알았어! 오늘 몇 시에 일 끝나?”
『6시.』
그렇게 정혜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깨끗이 씻고, 옷을 다렸다. 군대에서 습득한 다리미질 스킬은 굳이 남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준비를 끝내고 나선 다른 사람들에게 합격 사실을 알렸다. 취직 준비를 하는 녀석들에겐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자랑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그랬다.
“엄마 나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요?”
“그래? 오늘 외식 하려고 했는데.”
“주말에 해요. 주말에.”
5시 30분에 집에서 나왔다. 택시를 타고 정혜가 일하는 출판사로 향했다. 50분이 되었을 때 정혜가 일하는 XX출판사 앞에 도착했다. 꽤 커다란 출판사 건물이었다. 정혜가 건물에 나와 있었다. 택시에서 내렸다. 날 발견한 정혜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따라 손을 흔들었다.
“6시에 끝난다고 하지 않았어?”
“오늘 좀 일찍 끝내고 나왔어.”
“오늘 네가 쏘는 거랬지? 어디로 갈 거야?”
“좋은 데.”
정혜의 안내를 따라 간 곳은 어느 레스토랑이다. 아주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야, 여기 너무 비싸 보이는데 괜찮아?”
“여기 보기보다 안 비싸. 그리고 쿠폰도 있거든.”
“아, 그래?”
정혜의 설명에 안심하고 나오는 식사를 먹었다.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라 처음엔 조금 위축됐지만, 나중엔 신경 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취직 성공하니까 어떤 기분이야?”
“아직은 모르겠어. 다음 달부터 견습사원으로 들어가는데,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 돼.”
“이제 한시름 놨겠네.”
“응.”
경사스러운 일도 있다 보니 정혜와 나 사이의 분위기가 아주 부드러웠다.
“그러고 보면 난 지금까지 뭔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는 것 같아.”
내가 말했다.
“그래? 긍정적인 성격인가보네.”
“긍정적인 편이기도 하고, 운도 좋은 것 같아.”
살면서 큰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다.
“대학도 1차 수시로 한 번에 입학했고, 성적도 그럭저럭 나왔고, 취업도 한 번에 했고. 뭔가 크게 마음을 졸인 적이 없는 것 같아.”
“지금 잘난 척 하는 거지?”
“아, 그건 아니야.”
“뭘 아니야. 아무리 봐도 자기 잘났다는 소리잖아.”
“들켰네.”
가정환경도 좋았다. 왕따라든가 학교폭력 같은 것에 시달린 적도 없다. 대인관계도 원활한 편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다고 할 만한 일을 한 번 정도 겪었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이 매번 겪는 힘든 일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뭐 하면서 지내?”
내가 정혜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람의 일상에 대해 들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쎄. 그냥 일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자고, 다시 일 나가고. 가끔은 혼자 맥주 마시고, 가끔은 책도 읽지.”
“얼마 전까지 애인 있지 않았어?”
“애인은 무슨.”
정혜가 차갑게 웃었다.
“그런 건 애인이 아니야.”
사람들에겐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함부로 묻지 않는 게 좋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는 뭐하면서 지내?”
“그냥 잠만 자.”
“피곤해서 그래?”
“모르겠어. 요즘 별로 하는 것도 없이 피곤해.”
나도 원래 주말에 생각 없이 푹 자는 것을 좋아한다.
“너무 시간을 낭비하는 걸까.”
“뭐 어때 주말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치?”
정혜가 웃었다. 주말에는 놀자. 이게 내 지론이다. 원래 뼈 빠지게 공부하고 뼈 빠지게 일하는 이유는 주말에 생각 없이 자고 싶어서잖아. 물론 취업하기 전까지는 주말에 편히 쉬어본 기억이 없지만, 이제는 취업했으니까. 얼마간은 펑펑 놀아버릴 것이다.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낸 뒤 우린 가까운 술집으로 이동했다. 알콜이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내가 그때 왜 울었을까? 딱히 헤어지는 게 슬펐던 건 아니거든. 오히려 헤어지고 싶었으니까.”
정혜가 말했다.
“좀 억울해서 북받쳤나봐. 나 때문에 헤어진다는 식으로 말하니까. 내가 아무 잘못도 안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기는 뭐 잘못 안 했나.”
“다들 잘못이 있지.”
“근데 확실한 건 내가 분명히 덜 잘못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혜의 말에 동의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언제든지 팔을 안으로 굽히겠다.
“크리스마스에는 뭐 할 거야?”
내 질문에 정혜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웃었다.
“뭐할까?”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뭐 했어?”
“작년은 일했어. 한창 바빴거든.”
“나랑 비슷하네. 나도 공부하고 있었는데.”
불확실한 미래에 벌벌 떨면서 초조한 마음을 공부로 달래고 있었다. 초조하고 불안할 때야말로 공부가 가장 잘 되는 때라고 생각한다. 조금쯤 마음이 비어 있는 편이 공부할 때에 좋다.
“이제는 고민할 것 없으니까 좋겠네.”
“일단 입사를 해봐야 알겠지.”
“별로 어려울 거 없어. 그냥 하면 돼.”
정혜가 가볍게 말했다.
“사회생활 선배로서 나한테 조언좀 해줄래?”
“음, 별로 조언할 것도 없는데.”
별로 조언할 게 없다고 해놓고는 정혜의 말이 길어졌다. 정혜는 나보다 사회생활 2년 선배다. 나처럼 대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취직에 성공한 모양이다. 나랑 다른 점은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았다는 것.
“내 말 듣고 있어?”
솔직히 정혜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정혜의 입술은 부드럽겠지, 지금 키스해도 될까 같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조언해달라고 해놓고 뭐야.”
정혜가 삐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미안해. 이번엔 잘 들을게.”
“잘 안 듣고 있었다는 소리네.”
“미안.”
“그럼 다시 잘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
정혜가 살짝 풀린 눈으로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모르는 사이에 취했나보다. 나도 조금 취했다. 아까부터 엄한 생각만 계속 하고 있다. 정혜의 입술이나, 눈이나, 발그레한 볼로 시선이 간다. 내 시선을 눈치 챘을까.
“너 아까부터 어디 보는 거야.”
눈치 챘구나.
“너 엄청 노골적인 거 알아?”
엄청 부끄러웠다.
“그래도, 너라면 괜찮아.”
정혜가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놀랐다. 그리고 기뻤다.
다음은 정혜네 집으로 갔다. 뻔한 수순이다. 우린 그곳에서 몸을 섞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키스를 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벗었다. 나중엔 너무 지쳐서 침대에서 움직일 여력조차 없었다. 대체 몇 시간이나 침대에서 굴러다녔는지 모르겠다.
침대에 함께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뜨겁게 서로를 탐하고 나서 나른하게 체온을 나누는 시간을 좋아한다. 자그만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따뜻하다.”
정혜가 말했다.
“나도 따뜻해.”
나도 말했다. 정혜가 내 품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정혜의 어깨를 감아 품에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품 안에서 느껴졌다.
“사랑해.”
내 품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정혜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사랑해”라는 말은 가식으로라도 도저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말해야 하나? 지금 정혜에게 맞춰 그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알아. 나도.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정혜가 내 망설이는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나도 깊은 뜻을 담은 건 아니야. 그냥 우리 지금 나쁘지 않잖아. 그냥 조금 따뜻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 말해주면 안 돼?”
정혜가 말했다. 멍청하게도 난 그 말에 바로 넘어갔다. 그래, 진짜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면 괜찮아. 이건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말이다.
“사랑해.”
정혜가 말했다. 그리고는 내 눈을 바라본다.
“응. 나도 사랑해.”
내가 대답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서로의 입술을 훔쳤다. 탐했다. 원했다.
만약 나와 정혜가 좀 더 다른 방식으로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앞선 과정을 모두 건너 뛰어버리지 않고, 차근차근 그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역시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아무리 다른 상황을 상상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뭐 해?”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해.”
“만날 수 있어?”
“응.”
우린 크리스마스 이브에 약속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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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올리는데 분량도 적어서 죄송합니다
고민이 좀 많았네요
너라면 괜찮아
엄청 좋아하는 말입니다
“여보세요.”
결과 발표 당일. 마음을 졸이며 결과발표를 기다렸다. 원래대로라면 오후 2시에 인터넷을 통해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보다 30분 빨리, 오후 1시 33분에 원하던 전화를 받았다.
『합격입니다.』
물론 저렇게 말하고 전화통화가 끝나진 않았지만 어쨌든 축약하면 저런 내용이었다.
“엄마! 나 합격했어!”
방 밖으로 나가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엄마에게 외쳤다.
“아부지! 저 합격이에요.”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
『나 취직했다.』
수업중이라 전화를 안 받는 동생한테는 문자를 보냈다. 가족에게 취직 사실을 알린 다음 다른 사람을 찾았다. 내 사실을 알릴 만한 사람. 중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친구. 친하게 지내는 대학교 선후배. 친척들. 하나하나 연락할 만한 사람을 머리에서 그렸다.
아니, 관뒀다.
괜히 나를 속이는 짓을 하고 싶지 않다. 사실 합격 통보를 받는 순간부터 떠오른 얼굴은 부모님도 친구도 아니었다.
얼굴이 떠오른 그 사람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은 일을 하고 있을 테니까.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세화야, 축하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들뜬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기분이 더 좋았다. 전화라서 다행이다. 아마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있었다면 이 히죽거리는 표정을 감추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오늘 만날 수 있어? 내가 쏠게!』
“진짜? 알았어! 오늘 몇 시에 일 끝나?”
『6시.』
그렇게 정혜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깨끗이 씻고, 옷을 다렸다. 군대에서 습득한 다리미질 스킬은 굳이 남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준비를 끝내고 나선 다른 사람들에게 합격 사실을 알렸다. 취직 준비를 하는 녀석들에겐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자랑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그랬다.
“엄마 나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요?”
“그래? 오늘 외식 하려고 했는데.”
“주말에 해요. 주말에.”
5시 30분에 집에서 나왔다. 택시를 타고 정혜가 일하는 출판사로 향했다. 50분이 되었을 때 정혜가 일하는 XX출판사 앞에 도착했다. 꽤 커다란 출판사 건물이었다. 정혜가 건물에 나와 있었다. 택시에서 내렸다. 날 발견한 정혜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따라 손을 흔들었다.
“6시에 끝난다고 하지 않았어?”
“오늘 좀 일찍 끝내고 나왔어.”
“오늘 네가 쏘는 거랬지? 어디로 갈 거야?”
“좋은 데.”
정혜의 안내를 따라 간 곳은 어느 레스토랑이다. 아주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야, 여기 너무 비싸 보이는데 괜찮아?”
“여기 보기보다 안 비싸. 그리고 쿠폰도 있거든.”
“아, 그래?”
정혜의 설명에 안심하고 나오는 식사를 먹었다.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라 처음엔 조금 위축됐지만, 나중엔 신경 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취직 성공하니까 어떤 기분이야?”
“아직은 모르겠어. 다음 달부터 견습사원으로 들어가는데,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 돼.”
“이제 한시름 놨겠네.”
“응.”
경사스러운 일도 있다 보니 정혜와 나 사이의 분위기가 아주 부드러웠다.
“그러고 보면 난 지금까지 뭔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는 것 같아.”
내가 말했다.
“그래? 긍정적인 성격인가보네.”
“긍정적인 편이기도 하고, 운도 좋은 것 같아.”
살면서 큰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다.
“대학도 1차 수시로 한 번에 입학했고, 성적도 그럭저럭 나왔고, 취업도 한 번에 했고. 뭔가 크게 마음을 졸인 적이 없는 것 같아.”
“지금 잘난 척 하는 거지?”
“아, 그건 아니야.”
“뭘 아니야. 아무리 봐도 자기 잘났다는 소리잖아.”
“들켰네.”
가정환경도 좋았다. 왕따라든가 학교폭력 같은 것에 시달린 적도 없다. 대인관계도 원활한 편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다고 할 만한 일을 한 번 정도 겪었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이 매번 겪는 힘든 일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뭐 하면서 지내?”
내가 정혜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람의 일상에 대해 들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쎄. 그냥 일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자고, 다시 일 나가고. 가끔은 혼자 맥주 마시고, 가끔은 책도 읽지.”
“얼마 전까지 애인 있지 않았어?”
“애인은 무슨.”
정혜가 차갑게 웃었다.
“그런 건 애인이 아니야.”
사람들에겐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함부로 묻지 않는 게 좋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는 뭐하면서 지내?”
“그냥 잠만 자.”
“피곤해서 그래?”
“모르겠어. 요즘 별로 하는 것도 없이 피곤해.”
나도 원래 주말에 생각 없이 푹 자는 것을 좋아한다.
“너무 시간을 낭비하는 걸까.”
“뭐 어때 주말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치?”
정혜가 웃었다. 주말에는 놀자. 이게 내 지론이다. 원래 뼈 빠지게 공부하고 뼈 빠지게 일하는 이유는 주말에 생각 없이 자고 싶어서잖아. 물론 취업하기 전까지는 주말에 편히 쉬어본 기억이 없지만, 이제는 취업했으니까. 얼마간은 펑펑 놀아버릴 것이다.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낸 뒤 우린 가까운 술집으로 이동했다. 알콜이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내가 그때 왜 울었을까? 딱히 헤어지는 게 슬펐던 건 아니거든. 오히려 헤어지고 싶었으니까.”
정혜가 말했다.
“좀 억울해서 북받쳤나봐. 나 때문에 헤어진다는 식으로 말하니까. 내가 아무 잘못도 안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기는 뭐 잘못 안 했나.”
“다들 잘못이 있지.”
“근데 확실한 건 내가 분명히 덜 잘못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혜의 말에 동의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언제든지 팔을 안으로 굽히겠다.
“크리스마스에는 뭐 할 거야?”
내 질문에 정혜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웃었다.
“뭐할까?”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뭐 했어?”
“작년은 일했어. 한창 바빴거든.”
“나랑 비슷하네. 나도 공부하고 있었는데.”
불확실한 미래에 벌벌 떨면서 초조한 마음을 공부로 달래고 있었다. 초조하고 불안할 때야말로 공부가 가장 잘 되는 때라고 생각한다. 조금쯤 마음이 비어 있는 편이 공부할 때에 좋다.
“이제는 고민할 것 없으니까 좋겠네.”
“일단 입사를 해봐야 알겠지.”
“별로 어려울 거 없어. 그냥 하면 돼.”
정혜가 가볍게 말했다.
“사회생활 선배로서 나한테 조언좀 해줄래?”
“음, 별로 조언할 것도 없는데.”
별로 조언할 게 없다고 해놓고는 정혜의 말이 길어졌다. 정혜는 나보다 사회생활 2년 선배다. 나처럼 대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취직에 성공한 모양이다. 나랑 다른 점은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았다는 것.
“내 말 듣고 있어?”
솔직히 정혜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정혜의 입술은 부드럽겠지, 지금 키스해도 될까 같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조언해달라고 해놓고 뭐야.”
정혜가 삐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미안해. 이번엔 잘 들을게.”
“잘 안 듣고 있었다는 소리네.”
“미안.”
“그럼 다시 잘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
정혜가 살짝 풀린 눈으로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모르는 사이에 취했나보다. 나도 조금 취했다. 아까부터 엄한 생각만 계속 하고 있다. 정혜의 입술이나, 눈이나, 발그레한 볼로 시선이 간다. 내 시선을 눈치 챘을까.
“너 아까부터 어디 보는 거야.”
눈치 챘구나.
“너 엄청 노골적인 거 알아?”
엄청 부끄러웠다.
“그래도, 너라면 괜찮아.”
정혜가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놀랐다. 그리고 기뻤다.
다음은 정혜네 집으로 갔다. 뻔한 수순이다. 우린 그곳에서 몸을 섞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키스를 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벗었다. 나중엔 너무 지쳐서 침대에서 움직일 여력조차 없었다. 대체 몇 시간이나 침대에서 굴러다녔는지 모르겠다.
침대에 함께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뜨겁게 서로를 탐하고 나서 나른하게 체온을 나누는 시간을 좋아한다. 자그만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따뜻하다.”
정혜가 말했다.
“나도 따뜻해.”
나도 말했다. 정혜가 내 품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정혜의 어깨를 감아 품에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품 안에서 느껴졌다.
“사랑해.”
내 품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정혜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사랑해”라는 말은 가식으로라도 도저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말해야 하나? 지금 정혜에게 맞춰 그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알아. 나도.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정혜가 내 망설이는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나도 깊은 뜻을 담은 건 아니야. 그냥 우리 지금 나쁘지 않잖아. 그냥 조금 따뜻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 말해주면 안 돼?”
정혜가 말했다. 멍청하게도 난 그 말에 바로 넘어갔다. 그래, 진짜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면 괜찮아. 이건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말이다.
“사랑해.”
정혜가 말했다. 그리고는 내 눈을 바라본다.
“응. 나도 사랑해.”
내가 대답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서로의 입술을 훔쳤다. 탐했다. 원했다.
만약 나와 정혜가 좀 더 다른 방식으로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앞선 과정을 모두 건너 뛰어버리지 않고, 차근차근 그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역시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아무리 다른 상황을 상상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뭐 해?”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해.”
“만날 수 있어?”
“응.”
우린 크리스마스 이브에 약속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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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올리는데 분량도 적어서 죄송합니다
고민이 좀 많았네요
너라면 괜찮아
엄청 좋아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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