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하고 난 핸드폰을 집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조금 빨리 해서 밖을 향해 걸어갔다.
“새 여자 친구 만들 생각이 있구만.”
시끄러워.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벨소리는 계속 울리고 있었지만 난 아직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계속 고민하다간 전화가 끊어질 것 같았다.
“여보세요?”
『…….』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나야.』
“어, 응.”
한동안 나나 정혜나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과를 해야 할까. 사과를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하지? 다른 여자랑 술 마셔서 미안하다고? 그러면 그건 정혜와 특별한 사이란 걸 인정한다는 뜻이다.
『우리 지금 만날래?』
“그래.”
정혜의 말에 난 바로 대답했다. 이렇게 전화로 무슨 말을 할지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직접 얼굴을 보고 말을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분 후 한 카페에서 나와 정혜는 만나기로 했다. 술집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문태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야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다.”
“그래, 여자 문제냐?”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꼭 말고 반드시?”
더 이상 문태 녀석과 말을 섞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얼른 술집을 나왔다.
“좋겠다. 취직도 하고 여자도 있어서.”
문태 녀석이 나 들으라고 말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술집을 나왔다. 약속장소와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도 5분이면 도착한다. 30분 후로 약속을 잡았지만, 미리 가서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할 생각이다.
눈앞에 정혜와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가 보였다. 카페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이제 고민해보자. 나는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난 정혜와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냥 만나서 하룻밤을 지냈고, 의외로 마음이 통해서 그 뒤로도 몇 번 만났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저 그런 사이다. 있으면 조금 편하고 즐거운 그런 사이일 뿐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사과를 한다면, 그것을 정혜가 받아준다면,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말을 할지 결정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게 문제다.
여전히 난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채로 시간이 흘렀다. 나중에는 그냥 결정을 포기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거다. 카페를 오가는 손님을 바라보며 정혜를 기다렸다.
정혜가 도착할 때가 되자 아메리카노를 두 개 시켰다. 아무것도 안 시키고 죽치고 앉아 있기는 미안했기 때문이다. 카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보면서 정혜를 기다렸다. 어느새 주문했던 커피가 나왔다. 30분이 거의 다 되었다.
정혜다. 정혜가 왔다. 문이 열리고 정혜가 들어왔다. 검은색 정장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아담한 체구. 작고 하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다소 짙은 화장. 특히 눈매가 날카로워 보이도록 화장을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정혜의 본래 얼굴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를 것이다.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높은 킬힐은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한 것일까. 또각거리는 걸음소리를 내며 정혜가 내 앞자리에 앉았다.
“왔어?”
“응.”
내 어색한 물음에 정혜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머릿속에서는 최대한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말투를 상상했지만, 그건 역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가보다.
“커피 마셔. 아메리카노야.”
“응.”
내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무슨 말을 할지 결국 결정 못했었지. 뒤늦게 깨달았다.
“있지.”
잠시 동안의 치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정혜였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할 사이는 아니지만, 어제 조금 충격 받았어.”
난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할 사이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에 다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이지만, 생각보다 충격이 셌다.
“그래도 나름대로…… 아니, 아니다.”
정혜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뒷말이 너무 궁금했다.
“나름대로 뭐?”
물어봐 놓고도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역시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목이 탔다. 내 앞에 있던 아메리카노를 홀짝 마셨다. 무지하게 뜨거워서 얼굴이 일그러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물론 받을 때 뜨거우니까 주의하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뜨거울 줄은 몰랐다.
“그때 말이야.”
이번엔 내가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가 이런 말을 할 사이는 아니지만.”
이건 조금 전 정혜의 말에 대한 복수 같은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다시는 하지 말았어야 할 최악의 실수 중의 하나다. 그러나 지금의 난 다소 치졸했다. 말하고나서 곧바로 후회가 되었지만, 어쩌랴. 이미 쏟아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때 그 애는 그냥 대학 후배였어.”
“그냥 대학 후배랑 단 둘이 와인바에 가는구나.”
말문이 막혔다. 누가 ‘그냥’ 대학 후배랑 와인바에 가겠냐. 머릿속에선 별 말도 안되는 변명거리가 떠올랐다. 승희와 내가 와인 매니아라서 함께 갔다던가 하는 그런 것. 그러나 아무리 내가 바보라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게, 어쩌다 보니까, 내가 그애한테 고백을 받았거든.”
정정.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고, 그보다도 훨씬 바보다. 평소에 조리 있게 말을 잘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할 걸.
“그래서, 고백 받아봤으니 한 번 먹어보려고 그랬어?”
“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가 뭐가 심했는데? 사실대로 말한 게? 내 말이 틀렸어?”
나와 정혜의 언성이 높아졌다. 주변의 시선이 쏠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정혜의 노골적인 말에 머리에 피가 몰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순한 의도로 만난 거 아니야.”
“아니면 뭔데?”
“그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거겠지.”
답답했다. 그러나 사실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긴 변명이다. 그리고 사실을 말한다고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최대한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이대로는 서로 감정만 상할 뿐이다. 사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정혜야. 우리 조금만 진정하고 이야기 해볼래?”
“싫어.”
“정혜야.”
“싫어 할 말 없어.”
대화를 할 때, 가장 답답할 때는 말발이 밀려서 질 때가 아니다. 대화 상대가 전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야말로 가장 답답하다. 최소한 들어줄 자세라도 되어 있으면 무슨 말인들 하려만, 상대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골만 깊어진다.
“나 이제 갈래.”
급기야 정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의 나라면 정혜를 잡아세웠겠지만, 지금은 나도 너무 감정이 상했다. 정혜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저 쳐다만 보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모르겠다.
모르긴 뭘 몰라. 내가 쓸데없는 말, 쓸데없는 짓을 했기 때문이다. 실수는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잡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노력은 할 수 있지만, 시간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혜에게 몇 번이고 전화를 했지만, 정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예 수신거부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3월.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춥지만, 그래도 조금씩 푸른빛이 피어나고 있다.
어느새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뒤로 정혜와는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시도한 적도 없었고, 정혜에게서 연락이 온 적도 없었다. 아마도 우리의 관계는 거기까지였나 보다. 사실 당연하다. 나와 정혜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조금은 애틋한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우리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체온을 나누면 누구에게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 증거로 난 이미 새로운 여자 친구가 있고, 새 여자 친구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 차이라고 한다면 그저 안고 있을 때의 느낌이 조금 다르다는 것뿐. 그건 체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현재 난 회사에 들어온 후 3개월의 수습기간을 막 뗀 풋내기 신입사원이다. 수습기간을 벗어났다고 해봤자, 군대로 치자면 훈련소를 막 나온 느낌이다. 쉽게 말하면 이등병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난 오랜만에 토요일 주말을 맞았다. 주말이야 매주 찾아오지만, 정말 오랜만이라는 느낌이다. 수습기간 동안 기숙사에서 지내느라 제대로 된 주말을 맞아본 적이 없다.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즐겨볼 것이다.
오늘은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날이다. 수습기간 동안 정식으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 정말 그럴듯한 데이트를 해볼 생각이다. 지금은 오전 8시 55분. 9시에 역 앞에서 만나 명동 쪽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쪽은 차가 진입하기 어렵기도 하고, 아무래도 저녁에는 알콜이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9시 3분 전. 저 멀리서 걸어오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여자 친구다.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자 친구도 날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좋은 아침.”
서로의 거리가 많이 줄어들자, 여자 친구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나도 여자 친구의 인사에 답해 주었다.
“응, 승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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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뒤통수 맞는 그날까지
“새 여자 친구 만들 생각이 있구만.”
시끄러워.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벨소리는 계속 울리고 있었지만 난 아직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계속 고민하다간 전화가 끊어질 것 같았다.
“여보세요?”
『…….』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나야.』
“어, 응.”
한동안 나나 정혜나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과를 해야 할까. 사과를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하지? 다른 여자랑 술 마셔서 미안하다고? 그러면 그건 정혜와 특별한 사이란 걸 인정한다는 뜻이다.
『우리 지금 만날래?』
“그래.”
정혜의 말에 난 바로 대답했다. 이렇게 전화로 무슨 말을 할지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직접 얼굴을 보고 말을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분 후 한 카페에서 나와 정혜는 만나기로 했다. 술집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문태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야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다.”
“그래, 여자 문제냐?”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꼭 말고 반드시?”
더 이상 문태 녀석과 말을 섞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얼른 술집을 나왔다.
“좋겠다. 취직도 하고 여자도 있어서.”
문태 녀석이 나 들으라고 말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술집을 나왔다. 약속장소와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도 5분이면 도착한다. 30분 후로 약속을 잡았지만, 미리 가서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할 생각이다.
눈앞에 정혜와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가 보였다. 카페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이제 고민해보자. 나는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난 정혜와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냥 만나서 하룻밤을 지냈고, 의외로 마음이 통해서 그 뒤로도 몇 번 만났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저 그런 사이다. 있으면 조금 편하고 즐거운 그런 사이일 뿐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사과를 한다면, 그것을 정혜가 받아준다면,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말을 할지 결정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게 문제다.
여전히 난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채로 시간이 흘렀다. 나중에는 그냥 결정을 포기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거다. 카페를 오가는 손님을 바라보며 정혜를 기다렸다.
정혜가 도착할 때가 되자 아메리카노를 두 개 시켰다. 아무것도 안 시키고 죽치고 앉아 있기는 미안했기 때문이다. 카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보면서 정혜를 기다렸다. 어느새 주문했던 커피가 나왔다. 30분이 거의 다 되었다.
정혜다. 정혜가 왔다. 문이 열리고 정혜가 들어왔다. 검은색 정장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아담한 체구. 작고 하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다소 짙은 화장. 특히 눈매가 날카로워 보이도록 화장을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정혜의 본래 얼굴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를 것이다.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높은 킬힐은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한 것일까. 또각거리는 걸음소리를 내며 정혜가 내 앞자리에 앉았다.
“왔어?”
“응.”
내 어색한 물음에 정혜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머릿속에서는 최대한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말투를 상상했지만, 그건 역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가보다.
“커피 마셔. 아메리카노야.”
“응.”
내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무슨 말을 할지 결국 결정 못했었지. 뒤늦게 깨달았다.
“있지.”
잠시 동안의 치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정혜였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할 사이는 아니지만, 어제 조금 충격 받았어.”
난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할 사이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에 다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이지만, 생각보다 충격이 셌다.
“그래도 나름대로…… 아니, 아니다.”
정혜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뒷말이 너무 궁금했다.
“나름대로 뭐?”
물어봐 놓고도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역시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목이 탔다. 내 앞에 있던 아메리카노를 홀짝 마셨다. 무지하게 뜨거워서 얼굴이 일그러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물론 받을 때 뜨거우니까 주의하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뜨거울 줄은 몰랐다.
“그때 말이야.”
이번엔 내가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가 이런 말을 할 사이는 아니지만.”
이건 조금 전 정혜의 말에 대한 복수 같은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다시는 하지 말았어야 할 최악의 실수 중의 하나다. 그러나 지금의 난 다소 치졸했다. 말하고나서 곧바로 후회가 되었지만, 어쩌랴. 이미 쏟아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때 그 애는 그냥 대학 후배였어.”
“그냥 대학 후배랑 단 둘이 와인바에 가는구나.”
말문이 막혔다. 누가 ‘그냥’ 대학 후배랑 와인바에 가겠냐. 머릿속에선 별 말도 안되는 변명거리가 떠올랐다. 승희와 내가 와인 매니아라서 함께 갔다던가 하는 그런 것. 그러나 아무리 내가 바보라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게, 어쩌다 보니까, 내가 그애한테 고백을 받았거든.”
정정.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고, 그보다도 훨씬 바보다. 평소에 조리 있게 말을 잘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할 걸.
“그래서, 고백 받아봤으니 한 번 먹어보려고 그랬어?”
“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가 뭐가 심했는데? 사실대로 말한 게? 내 말이 틀렸어?”
나와 정혜의 언성이 높아졌다. 주변의 시선이 쏠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정혜의 노골적인 말에 머리에 피가 몰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순한 의도로 만난 거 아니야.”
“아니면 뭔데?”
“그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거겠지.”
답답했다. 그러나 사실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긴 변명이다. 그리고 사실을 말한다고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최대한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이대로는 서로 감정만 상할 뿐이다. 사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정혜야. 우리 조금만 진정하고 이야기 해볼래?”
“싫어.”
“정혜야.”
“싫어 할 말 없어.”
대화를 할 때, 가장 답답할 때는 말발이 밀려서 질 때가 아니다. 대화 상대가 전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야말로 가장 답답하다. 최소한 들어줄 자세라도 되어 있으면 무슨 말인들 하려만, 상대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골만 깊어진다.
“나 이제 갈래.”
급기야 정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의 나라면 정혜를 잡아세웠겠지만, 지금은 나도 너무 감정이 상했다. 정혜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저 쳐다만 보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모르겠다.
모르긴 뭘 몰라. 내가 쓸데없는 말, 쓸데없는 짓을 했기 때문이다. 실수는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잡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노력은 할 수 있지만, 시간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혜에게 몇 번이고 전화를 했지만, 정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예 수신거부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3월.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춥지만, 그래도 조금씩 푸른빛이 피어나고 있다.
어느새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뒤로 정혜와는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시도한 적도 없었고, 정혜에게서 연락이 온 적도 없었다. 아마도 우리의 관계는 거기까지였나 보다. 사실 당연하다. 나와 정혜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조금은 애틋한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우리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체온을 나누면 누구에게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 증거로 난 이미 새로운 여자 친구가 있고, 새 여자 친구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 차이라고 한다면 그저 안고 있을 때의 느낌이 조금 다르다는 것뿐. 그건 체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현재 난 회사에 들어온 후 3개월의 수습기간을 막 뗀 풋내기 신입사원이다. 수습기간을 벗어났다고 해봤자, 군대로 치자면 훈련소를 막 나온 느낌이다. 쉽게 말하면 이등병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난 오랜만에 토요일 주말을 맞았다. 주말이야 매주 찾아오지만, 정말 오랜만이라는 느낌이다. 수습기간 동안 기숙사에서 지내느라 제대로 된 주말을 맞아본 적이 없다.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즐겨볼 것이다.
오늘은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날이다. 수습기간 동안 정식으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 정말 그럴듯한 데이트를 해볼 생각이다. 지금은 오전 8시 55분. 9시에 역 앞에서 만나 명동 쪽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쪽은 차가 진입하기 어렵기도 하고, 아무래도 저녁에는 알콜이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9시 3분 전. 저 멀리서 걸어오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여자 친구다.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자 친구도 날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좋은 아침.”
서로의 거리가 많이 줄어들자, 여자 친구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나도 여자 친구의 인사에 답해 주었다.
“응, 승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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