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어진 사춘기 -
“보고 싶대?”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난 동생에게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잠시 날 힐끔거리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어쩌냐? 오빠 첫사랑 만나는거 아냐? ㅎㅎㅎ
기분 좋겠다 오빠
내일 1시까지 요 앞 놀이터에서 보재
은영언니 디게 이쁜데 오빠 첫사랑인 줄은 몰랐네 ^^”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저 가슴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던 그녀를 내일이면 볼 수 있다니
그 날 밤 형의 방에서 같이 지낸 나는 밤새 뒤척이며 그녀를 되뇌였다
----------------------------------------------------------------------------------------
다음날 약속시간보다 일찍 난 놀이터로 나갔다
좀처럼 진정하고 기다릴 수 없어서 차라리 먼저 가 있는 편을 선택했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그녀와의 약속시간을 기다렸다
5분쯤 남았을까?
문득 시계를 쳐다 보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수니? 잘 지냈어? 여전히 부지런하네 먼저 나와 있고”
그녀다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만났는데
어제 내게 들려주던 목소리처럼 예전의 목소리 그대로다
너무 떨리는 마음에 바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서서히 그녀에게 시선을 내어 주었다
그렇게 고대했던 그녀는 내 앞에 서서 환히 웃고 있었다
예전에 그 미소 한 번 보면 그걸로 며칠동안 날 행복하게 했던 그녀가
거짓말처럼 내 앞에서 환히 웃고 있었다
“잘지냈어?”
“어… 어 넌?”
“나야 잘 지냈지 살다 보니 이렇게도 만나는구나”
“그러게 나도 상상도 못했어”
그렇게 우린 다시 만났다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그녀는 여전히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해 있을 뿐
예전에 꽤나 키가 컸던 그녀는 어느새 아담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떨어져 지낸 그 시간 동안 나만 변해 있었던 것이다
“키가 훌쩍 커버렸네”
“그러게 예전에 니가 더 컸는데”
“^^ 난 국민학교 이후로 안 자라더라고”
“그래도 이쁜 얼굴은 그대로야”
‘헉’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속마음을 말해버렸다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마냥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그녀가 이 어색한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난 아직 꼬마 같아 ^^
근데 넌 이제 넘 커서 어른같애 남자같고”
남자
그녀에게 난 남자이고 싶었던 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산으로 내려간 이후에도 친구들에게 그녀를 얘기했고
난 그녀의 남자로 살았다
그런 그녀가 내게 남자를 얘기하다니
‘그래 난 니 남자이고 싶어 니 남자가 되고 싶다고’
용기가 없어 맘속으로 밖에 말하지 못했지만
그녀를 보며 난 외치고 또 외쳤다
내가 니 남자라고
“우리 어디갈까?”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곳으로 갈까?”
“조용한 경양식집 있는데 거기로 갈래?”
“그래 어디든 좋아 ^^”
우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네의 조그마한 경양식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 당시 어른들과 외식할 때나 가던 곳
경양식에서 먹던 함박스테이크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녀가 떠오른다
“어떻게 지냈어?”
“그럭저럭 넌?”
“나야 여기서 늘 똑같지
넌 부산으로 내려갔다며? 어쩜 말도 없이 가냐?”
“어… 그게 갑자기 내려가게 된거라
아버지 사업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랬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새 학기 초에 널 찾아 다녔는데
니 생일 잔치 이후로 우리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랬어? 난 그것도 모르고 니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넌 다른 애들에게는 친절했는데 유독 내게만 차가워서
난 네게 좋아한다는 표현을 많이 한 것 같은데”
“니가 고백한 건 생일날이 처음인데? ㅡ.ㅡ;
사실 첫 전학 오는 날부터 우린 인연이 깊었잖아”
“어… 그거 기억하고 있었어?”
“그럼 너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데 나만 보내준다고 ^^
그리고 교실에 들어갔는데 니가 딱 있는거야
친해지고 싶었지만 여자애들 사이에 말이 많았어
니 인기가 좋더라고 전학 와서 너랑 친해지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았어
그 전 학교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거든
너한테 그래서 일부러 더 차갑게 대할 수 밖에 없었어
그러다 보니 친해질 기회를 잃어버린 거지 나도”
그랬다
그녀가 날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는 상황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산에서 극심한 따돌림을 경험했던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구나 진작 알았으면 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학기초에 친해지기 위해 널 찾아 다녔을 땐 이미 니가 없더라
말 한 마디 없이 간 널 원망도 했었는데 어제 전화 받고 넘 기뻤어”
“그랬구나 고마워 기억해 줘서”
“아냐 나 널 좋아했었어
그래서 니가 날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너무 좋았어”
‘그랬구나
너도 날 좋아했었구나’
기뻤다 정말
그녀의 맘속에도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날 너무 들뜨게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더 이상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결말은 새드엔딩이었다
“나에게도 넌 첫사랑이었는데 ^^
근데 지금은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우리 오빠 친군데 넘 좋아서 가슴 아프고 슬퍼
그 오빠가 날 바라봐 줬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예전에 그녀를 보며 내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가슴 아픈 사랑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듯이 그녀 역시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서로의 짝사랑에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너무 힘들어 하지마
언젠가는 그 오빠도 니 마음을 알아 줄거야”
‘그래 예전에 아팠던 내 마음을 지금 니가 알아주는 것처럼’
그렇게 거의 8시간이 넘는 우리의 긴 대화는 밤이 깊어가면서 끝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 단지 내가 확인했던 건
한때 나를 좋아했었다는 사실과
일부러 날 쌀쌀맞게 대했던 이유
생일고백 이후 나와 친해지기 위해
날 찾아서 학교를 헤맸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 말도 없이 떠나간 날 원망했다는 것
그게 다였다
그 시간 이후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동안
난 그녀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가야지?”
“어… 그래 가야지”
“어두워졌겠다 이제 나가자”
“웅 그래”
그녀는 쉴 새 없이 조잘대고 있었지만
난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난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잠깐 나랑 어디 좀 갈래?”
“어… 그래”
그녀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작은 서점이었다
“내가 넘 감명 깊게 읽어서 그 오빠에게 선물한 책이 있는데
너한테도 선물해 주고 싶어”
“그래? 고마워 나한테 선물까지”
그녀가 고른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이었다
“나 부탁이 있는데”
“뭐?”
“책에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한마디만 써줘”
“^^ 내가 작가도 아닌데?”
“그래도 그걸 보며 널 기억하고 싶어서”
“그래 알았어”
그녀는 책방 주인에게 볼펜을 빌려 책 속 표지에 뭐라고 글을 써 내려갔다
“나중에 집에 가서 봐
오늘 즐겁고 고마웠어 건강히 잘 지내고
서울 올라오면 내가 준 번호로 전화해”
“그래 너도 혹시 부산에 오면 연락해”
“잘 가 친구야”
친구야….
그 단어가 그렇게 슬프게 들릴 줄은 몰랐다
그녀가 악수를 청했다
난 그녀에게 영화처럼 키스를 하고 싶었는데
그냥 친구에게는 키스가 허용되지 않았다
예전에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그녀의 손을 잡고도
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만”
난 마지막 용기를 낼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 하는 그녀의 표정을 외면한 채
난 그녀의 이마에 기습적으로 키스를 날렸다
첨엔 많이 당황해 하던 그녀도
진지한 내 얼굴을 보며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렇게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날 뒤로 하고
그녀는 내게서 떠나갔다
그녀를 보내고 돌아서는 길
그녀가 준 책을 살포시 펼쳐 들었다
‘고마워 지금이라도 기억나게 해줘서
앞으로도 영원히 좋은 친구로 기억할께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은영- “
나는 알고 있었다
다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녀 이마 위의 내 입술자국만을 남기고 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내 사춘기 시절
내겐 첫 상처였을 그녀와의 기억은 미처 익어가지도 못한 채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내 가슴 깊숙이 박혀 버렸다
정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아 아직도 빼내지 못한 채로
부산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다
이젠 생활에 적응해서 그 누구도 내가 서울에서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곁에서 살아 왔던 사람처럼
난 그들 사이에 흡수되어 부산남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거친 바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낯간지러운 단어 – 사랑
사춘기 청소년들이 겪어내기엔 너무 큰 단어
멀쩡한 사람을 열병에 앓게 하고 미친 놈처럼 실실 웃게 만드는 단어
그 단어가 내게 다가온 건
그 시절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고3을 얼마 앞 둔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어린 시절 나의 감성을 지배했던 사람
그녀와의 만남을 시작했던 날이
“보고 싶대?”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난 동생에게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잠시 날 힐끔거리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어쩌냐? 오빠 첫사랑 만나는거 아냐? ㅎㅎㅎ
기분 좋겠다 오빠
내일 1시까지 요 앞 놀이터에서 보재
은영언니 디게 이쁜데 오빠 첫사랑인 줄은 몰랐네 ^^”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저 가슴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던 그녀를 내일이면 볼 수 있다니
그 날 밤 형의 방에서 같이 지낸 나는 밤새 뒤척이며 그녀를 되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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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약속시간보다 일찍 난 놀이터로 나갔다
좀처럼 진정하고 기다릴 수 없어서 차라리 먼저 가 있는 편을 선택했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그녀와의 약속시간을 기다렸다
5분쯤 남았을까?
문득 시계를 쳐다 보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수니? 잘 지냈어? 여전히 부지런하네 먼저 나와 있고”
그녀다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만났는데
어제 내게 들려주던 목소리처럼 예전의 목소리 그대로다
너무 떨리는 마음에 바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서서히 그녀에게 시선을 내어 주었다
그렇게 고대했던 그녀는 내 앞에 서서 환히 웃고 있었다
예전에 그 미소 한 번 보면 그걸로 며칠동안 날 행복하게 했던 그녀가
거짓말처럼 내 앞에서 환히 웃고 있었다
“잘지냈어?”
“어… 어 넌?”
“나야 잘 지냈지 살다 보니 이렇게도 만나는구나”
“그러게 나도 상상도 못했어”
그렇게 우린 다시 만났다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그녀는 여전히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해 있을 뿐
예전에 꽤나 키가 컸던 그녀는 어느새 아담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떨어져 지낸 그 시간 동안 나만 변해 있었던 것이다
“키가 훌쩍 커버렸네”
“그러게 예전에 니가 더 컸는데”
“^^ 난 국민학교 이후로 안 자라더라고”
“그래도 이쁜 얼굴은 그대로야”
‘헉’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속마음을 말해버렸다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마냥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그녀가 이 어색한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난 아직 꼬마 같아 ^^
근데 넌 이제 넘 커서 어른같애 남자같고”
남자
그녀에게 난 남자이고 싶었던 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산으로 내려간 이후에도 친구들에게 그녀를 얘기했고
난 그녀의 남자로 살았다
그런 그녀가 내게 남자를 얘기하다니
‘그래 난 니 남자이고 싶어 니 남자가 되고 싶다고’
용기가 없어 맘속으로 밖에 말하지 못했지만
그녀를 보며 난 외치고 또 외쳤다
내가 니 남자라고
“우리 어디갈까?”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곳으로 갈까?”
“조용한 경양식집 있는데 거기로 갈래?”
“그래 어디든 좋아 ^^”
우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네의 조그마한 경양식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 당시 어른들과 외식할 때나 가던 곳
경양식에서 먹던 함박스테이크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녀가 떠오른다
“어떻게 지냈어?”
“그럭저럭 넌?”
“나야 여기서 늘 똑같지
넌 부산으로 내려갔다며? 어쩜 말도 없이 가냐?”
“어… 그게 갑자기 내려가게 된거라
아버지 사업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랬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새 학기 초에 널 찾아 다녔는데
니 생일 잔치 이후로 우리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랬어? 난 그것도 모르고 니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넌 다른 애들에게는 친절했는데 유독 내게만 차가워서
난 네게 좋아한다는 표현을 많이 한 것 같은데”
“니가 고백한 건 생일날이 처음인데? ㅡ.ㅡ;
사실 첫 전학 오는 날부터 우린 인연이 깊었잖아”
“어… 그거 기억하고 있었어?”
“그럼 너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데 나만 보내준다고 ^^
그리고 교실에 들어갔는데 니가 딱 있는거야
친해지고 싶었지만 여자애들 사이에 말이 많았어
니 인기가 좋더라고 전학 와서 너랑 친해지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았어
그 전 학교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거든
너한테 그래서 일부러 더 차갑게 대할 수 밖에 없었어
그러다 보니 친해질 기회를 잃어버린 거지 나도”
그랬다
그녀가 날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는 상황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산에서 극심한 따돌림을 경험했던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구나 진작 알았으면 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학기초에 친해지기 위해 널 찾아 다녔을 땐 이미 니가 없더라
말 한 마디 없이 간 널 원망도 했었는데 어제 전화 받고 넘 기뻤어”
“그랬구나 고마워 기억해 줘서”
“아냐 나 널 좋아했었어
그래서 니가 날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너무 좋았어”
‘그랬구나
너도 날 좋아했었구나’
기뻤다 정말
그녀의 맘속에도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날 너무 들뜨게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더 이상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결말은 새드엔딩이었다
“나에게도 넌 첫사랑이었는데 ^^
근데 지금은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우리 오빠 친군데 넘 좋아서 가슴 아프고 슬퍼
그 오빠가 날 바라봐 줬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예전에 그녀를 보며 내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가슴 아픈 사랑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듯이 그녀 역시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서로의 짝사랑에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너무 힘들어 하지마
언젠가는 그 오빠도 니 마음을 알아 줄거야”
‘그래 예전에 아팠던 내 마음을 지금 니가 알아주는 것처럼’
그렇게 거의 8시간이 넘는 우리의 긴 대화는 밤이 깊어가면서 끝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 단지 내가 확인했던 건
한때 나를 좋아했었다는 사실과
일부러 날 쌀쌀맞게 대했던 이유
생일고백 이후 나와 친해지기 위해
날 찾아서 학교를 헤맸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 말도 없이 떠나간 날 원망했다는 것
그게 다였다
그 시간 이후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동안
난 그녀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가야지?”
“어… 그래 가야지”
“어두워졌겠다 이제 나가자”
“웅 그래”
그녀는 쉴 새 없이 조잘대고 있었지만
난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난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잠깐 나랑 어디 좀 갈래?”
“어… 그래”
그녀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작은 서점이었다
“내가 넘 감명 깊게 읽어서 그 오빠에게 선물한 책이 있는데
너한테도 선물해 주고 싶어”
“그래? 고마워 나한테 선물까지”
그녀가 고른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이었다
“나 부탁이 있는데”
“뭐?”
“책에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한마디만 써줘”
“^^ 내가 작가도 아닌데?”
“그래도 그걸 보며 널 기억하고 싶어서”
“그래 알았어”
그녀는 책방 주인에게 볼펜을 빌려 책 속 표지에 뭐라고 글을 써 내려갔다
“나중에 집에 가서 봐
오늘 즐겁고 고마웠어 건강히 잘 지내고
서울 올라오면 내가 준 번호로 전화해”
“그래 너도 혹시 부산에 오면 연락해”
“잘 가 친구야”
친구야….
그 단어가 그렇게 슬프게 들릴 줄은 몰랐다
그녀가 악수를 청했다
난 그녀에게 영화처럼 키스를 하고 싶었는데
그냥 친구에게는 키스가 허용되지 않았다
예전에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그녀의 손을 잡고도
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만”
난 마지막 용기를 낼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 하는 그녀의 표정을 외면한 채
난 그녀의 이마에 기습적으로 키스를 날렸다
첨엔 많이 당황해 하던 그녀도
진지한 내 얼굴을 보며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렇게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날 뒤로 하고
그녀는 내게서 떠나갔다
그녀를 보내고 돌아서는 길
그녀가 준 책을 살포시 펼쳐 들었다
‘고마워 지금이라도 기억나게 해줘서
앞으로도 영원히 좋은 친구로 기억할께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은영- “
나는 알고 있었다
다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녀 이마 위의 내 입술자국만을 남기고 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내 사춘기 시절
내겐 첫 상처였을 그녀와의 기억은 미처 익어가지도 못한 채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내 가슴 깊숙이 박혀 버렸다
정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아 아직도 빼내지 못한 채로
부산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다
이젠 생활에 적응해서 그 누구도 내가 서울에서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곁에서 살아 왔던 사람처럼
난 그들 사이에 흡수되어 부산남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거친 바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낯간지러운 단어 – 사랑
사춘기 청소년들이 겪어내기엔 너무 큰 단어
멀쩡한 사람을 열병에 앓게 하고 미친 놈처럼 실실 웃게 만드는 단어
그 단어가 내게 다가온 건
그 시절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고3을 얼마 앞 둔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어린 시절 나의 감성을 지배했던 사람
그녀와의 만남을 시작했던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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