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어진 사춘기 -
첨엔 눈길 조차 안주던 그녀가 편하게 말도 놓고 미소까지 보여주니
그 날 밤 혼자 고민했던 상념들이 머리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뭐꼬? 야들 넘 빨리 불붙는 거 아이가?”
“그라게 누나야 우리가 왕따 되는거 같다”
“와 또? 소개 시켜줄 땐 언제고 친해져도 뭐라카네”
“하하하~~~ 아이다 좋다”
규상이 녀석은 자신이 뭔가 해냈다는 뿌듯한 맘에 기분이 좋았지만
상희의 눈빛에선 언뜻 불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마 상희도 그 날의 일을 마음 속에서 떨쳐내진 못했던 모양이다
어느 정도는 내게 자신의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
=============================================================================================
그 날 꽤 밤늦게까지 우린 얘기를 나눴다
그녀와 둘만의 대화는 아니었지만 첫인상과 다르게 그녀는 꽤 밝은 성격이었고
아파서 입원해 있음에도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그녀가 난 맘에 들었다
그래도 그녀의 모습에서 자꾸 은영이가 겹쳐가는 것을 스스로 어쩔 수는 없었다
단지 그녀를 통해 은영이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상희가 퇴원한 후 난 편하게 명신이 병문안을 가끔 갔었고
둘만의 대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녀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좀 더 알 수 있었다
서울에서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딱히 학업에 뜻이 없어서
졸업하고 적당한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부산에서 꽤나 유명한 상업학교에 진학했고
1학년을 마치기 얼마 전 몸이 아픈 것을 느끼고 진찰을 받았을 때
별 이상을 못 느꼈지만 상희가 입원하기 얼마 전 증세가 심해져서 입원하게 되었다는 것
병명에 대해 굳이 말하지 않기에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늘 쾌활하고 밝은 성격 때문에 크게 아픈 건 아닐 거라고 내 스스로 생각했었다
어느새 한 달에 한 두 번 주말 학교가 끝난 뒤 병원에 들려
그녀가 좋아하는 장미꽃을 선물하는 게 내 중요한 일과가 되어 버렸다
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 때문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엔 한계가 있었지만
내가 오면 그녀가 더욱 더 밝아지는 모습을 보며 걱정하시던 그녀의 부모님도
나라는 녀석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점점 더 커져 그녀의 남자친구로 인정해 주셨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께는 따로 말씀드릴 수 없었다
고 3 중요한 시기를 앞두고 있는 아들에게 아픈 여자친구는 악재가 될 수 있었으니까
“희수야 공부는 잘돼?”
“솔직히 난 그다지 수재는 아닌가 봐 노력 안 하면 떨어져 ^^”
“누구든 다 그렇지 나도 너랑 같이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에이 난 니가 부러운데? ^^ 곧 나아서 그렇게 될 수 있을거야”
“나도 인문계에 갈껄 그랬나? 너랑 같이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늦지 않았어 몸 얼른 좋아지면 다시 공부해서 가면 되지
어차피 난 군대도 다녀와야 하니까 우리 같이 공부할 수 있을거야”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정말 근데 그럴 수 있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이 왠지 스산한 느낌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하지만 이내 밝아진 그녀의 표정 때문에 나 역시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결국 그녀가 보내온 신호는 내 마음에 닿지 못했다
그걸 잡았어야 했는데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꾸준히 치료를 한 덕분에 그녀의 병세는 점점 더 호전된다는 느낌을 받았고
강인하게 이겨내는 그녀가 나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사랑’
사춘기의 정점에 있던 내게 그 막연한 단어의 느낌을 어느 정도 알게 해준 게 그녀였다
은영이로 인해 받았던 첫 상처는 나도 모르게 아물게 되었고
그녀로 인해 기억조차 까마득해 버린 그저 어린 시절 에피소드가 되어 버렸다
“희수야 이번 주말에 뭐해?”
“나? 그냥 공부하겠지 ^^”
“그래? 그럼 날 위해 시간 내줄 수 있어?”
“왜? 병원에 혼자 있기 싫어서? 우리 명신이가 오라면 와야지 ^^”
“아니 나 그날 외출할려고 선생님한테 부탁드렸거든 많이 나았으니 하루 바람 쐬고 싶다고”
“그래도 돼? 그럼 우리 놀러 가자 시내로”
“웅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럼 내가 주말에 데리러 올께 우리 첫 데이트에 ^^”
“웅 이제 곧 너도 시험이고 더 늦으면 못해 볼 것 같아서”
“에이 왜? 시험치고 너 건강해지면 내가 다 데리고 다닐께”
“그래….그래”
기뻐서였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흐려지는 말끝이 너무 기뻐서 슬픈 거라고
그녀와의 첫 데이트를 위해서 뭔가를 준비하고 싶었다
이제 배치고사 기간이 다가오면 시간은 점점 더 모자랄 것이고
많이 친해지긴 했지만 정식으로 사귀자는 고백도 못했기 때문에
이번 데이트를 통해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상희를 통해 여자라는 걸 조금은 맛보았지만
왠지 명신에게는 남자의 모습으로, 늑대의 모습으로 다가갈 수 없는
순결한 느낌이 있었다
그녀를 완전히 갖지는 못하겠지만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 올랐다
그녀와의 데이트 전 날
내 방 서랍에 뒹굴던 예쁜 편지지에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게 어디 있더라?’
한참 동안 내가 가진 상자들과 서랍들을 뒤진 후 난 찾고 싶은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내 반지”
내 손에 들려진 것은 마치 태극문양이 뒤집혀 맞닿은 것 같은 은색 반지였다
예전에 귀금속 공장을 하시던 이모부 댁에 놀러 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신기한 모양의 반지를 쳐다 보고 있었더니
이모부님이 나중에 여자친구가 생기면 선물하라고 주신 은반지였다
‘이걸 받으면 명신이가 좋아할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거라면 끼워주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아무런 끈이 없는 것 같아서
다른 잡생각 없이 준비해뒀던 반지케이스에 넣어 포장지로 이쁘게 포장했다
기다리던 주말이 왔다
최대한 멋을 내고 집에는 독서실 간다고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왔다
병원 앞 꽃가게에 들려 그녀가 좋아하는 장미도 준비하고
최대한 그녀를 위해 하루를 사용하리라 맘 먹고 병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병실에 들어서니 늘상 입던 환자복이 아닌 밝은 아이보리색 원피스로 차려 입은
그녀가 날 보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와 진짜 달라보이네”
“그래? 이뻐? ^^”
“웅 원래부터 넌 이뻤어”
“진짜? ㅎㅎㅎ”
환자복이 아닌 그녀도 생소했지만 이쁘게 차려 입은 그녀가 넘 눈부셔
나도 모르게 맘속으로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의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고
우린 처음으로 함께 병원 밖을 나왔다
오랜만에 외출을 한 그녀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모든 것을 눈 속에 담고 있었다
“모두 다 너무 신기해”
“그래? 오늘 많이 보고 가 또 다시 나올 때까지 참아야 하니까”
“웅 그럴려고”
먼저 번화가로 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보스를 잡아타고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창가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손을 잡았다
“명신아 나 너무 좋다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게”
“그래 나두 꿈 같애”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을 느끼며 혹시 땀이 축축하게 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우린 시내에 내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무작정 걸어 다녔다
짧은 외출 때문인지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으려는 듯 이 곳 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출출해진 배를 채워야 했다
“명신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웅 있어 떡볶이 순대 튀김 ^^”
“그래? 하긴 병원에서는 먹기 힘드니까”
부산 남포동 극장거리에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먹거리가 있었다
그나마 아이들 사이에 유명하고 맛있는 분식집을 찾아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 원하는 만큼 시켜 주었다
학교를 쉬는 관계로 그녀의 머리는 긴 생머리였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는 아마 길거리를 지나다니던 모든 남고생들의 시선을 잡았던 것 같다
그때 난 왜 그녀를 보면서 은영이를 느꼈던 가를 깨달았다
모든 남자들이 꿈꾸던 첫사랑의 이미지
명신이는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은영이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명신이를 통해 아마 그녀를 생각하고 느꼈을 것이다
명신이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나 태종대 가보고 싶어”
“그래? 안가봤어?”
“가 봤는데 또 가보고 싶어
바다가 넘 좋았어
모자상 전망대에서 보는 바다”
“그래 가보자”
남포동에서 길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꺼낸 그녀의 말에
우린 버스를 잡아타고 태종대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많이 걸어서 그런지 그녀는 조금 피곤해 했고
버스에 나란히 앉은 내 어깨에 그녀는 살포시 고개를 기대왔다
코끝에 그녀의 머리카락향기가 폴폴 날려 들어온다
이성에 대한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나였지만
그녀의 향기가 내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꼈다
만약 환자가 아니었다면 내 마음을 이렇게 가지고 간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간직하기엔 내 욕구가 너무 강했다
아픈 그녀였기에 내 본능보다는 이성과 감성이 더 그게 작용했고
그게 우리 사이를 좀 더 깊고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 같다
“희수야”
“왜?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나 니가 좋아”
“뭐??? 뭐라고???”
“바보야 니가 좋다고”
“넌 그런 말을 이런 상황에서 흘리듯 말하니? 좀 진지하게 해야지 ^^”
“푸읍~~~ ^^”
“명신아 나도 너 많이 좋아해
온전히 내 여자친구구나 하는 그런 느낌
그런 사람 니가 처음이야”
“정말? 그럼 내가 니 애인이야?”
“그렇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넌 내 애인이지”
“그렇구나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고마워 희수야”
태종대로 가는 버스 뒷자리에서 우리 서로에게 수줍은 맘을 고백했다
영화처럼 로맨틱한 건 아니었지만
그 순간 온 맘을 다해 서로에게 고백하고 그 맘을 확인했기에
그녀와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첨엔 눈길 조차 안주던 그녀가 편하게 말도 놓고 미소까지 보여주니
그 날 밤 혼자 고민했던 상념들이 머리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뭐꼬? 야들 넘 빨리 불붙는 거 아이가?”
“그라게 누나야 우리가 왕따 되는거 같다”
“와 또? 소개 시켜줄 땐 언제고 친해져도 뭐라카네”
“하하하~~~ 아이다 좋다”
규상이 녀석은 자신이 뭔가 해냈다는 뿌듯한 맘에 기분이 좋았지만
상희의 눈빛에선 언뜻 불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마 상희도 그 날의 일을 마음 속에서 떨쳐내진 못했던 모양이다
어느 정도는 내게 자신의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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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꽤 밤늦게까지 우린 얘기를 나눴다
그녀와 둘만의 대화는 아니었지만 첫인상과 다르게 그녀는 꽤 밝은 성격이었고
아파서 입원해 있음에도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그녀가 난 맘에 들었다
그래도 그녀의 모습에서 자꾸 은영이가 겹쳐가는 것을 스스로 어쩔 수는 없었다
단지 그녀를 통해 은영이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상희가 퇴원한 후 난 편하게 명신이 병문안을 가끔 갔었고
둘만의 대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녀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좀 더 알 수 있었다
서울에서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딱히 학업에 뜻이 없어서
졸업하고 적당한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부산에서 꽤나 유명한 상업학교에 진학했고
1학년을 마치기 얼마 전 몸이 아픈 것을 느끼고 진찰을 받았을 때
별 이상을 못 느꼈지만 상희가 입원하기 얼마 전 증세가 심해져서 입원하게 되었다는 것
병명에 대해 굳이 말하지 않기에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늘 쾌활하고 밝은 성격 때문에 크게 아픈 건 아닐 거라고 내 스스로 생각했었다
어느새 한 달에 한 두 번 주말 학교가 끝난 뒤 병원에 들려
그녀가 좋아하는 장미꽃을 선물하는 게 내 중요한 일과가 되어 버렸다
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 때문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엔 한계가 있었지만
내가 오면 그녀가 더욱 더 밝아지는 모습을 보며 걱정하시던 그녀의 부모님도
나라는 녀석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점점 더 커져 그녀의 남자친구로 인정해 주셨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께는 따로 말씀드릴 수 없었다
고 3 중요한 시기를 앞두고 있는 아들에게 아픈 여자친구는 악재가 될 수 있었으니까
“희수야 공부는 잘돼?”
“솔직히 난 그다지 수재는 아닌가 봐 노력 안 하면 떨어져 ^^”
“누구든 다 그렇지 나도 너랑 같이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에이 난 니가 부러운데? ^^ 곧 나아서 그렇게 될 수 있을거야”
“나도 인문계에 갈껄 그랬나? 너랑 같이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늦지 않았어 몸 얼른 좋아지면 다시 공부해서 가면 되지
어차피 난 군대도 다녀와야 하니까 우리 같이 공부할 수 있을거야”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정말 근데 그럴 수 있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이 왠지 스산한 느낌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하지만 이내 밝아진 그녀의 표정 때문에 나 역시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결국 그녀가 보내온 신호는 내 마음에 닿지 못했다
그걸 잡았어야 했는데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꾸준히 치료를 한 덕분에 그녀의 병세는 점점 더 호전된다는 느낌을 받았고
강인하게 이겨내는 그녀가 나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사랑’
사춘기의 정점에 있던 내게 그 막연한 단어의 느낌을 어느 정도 알게 해준 게 그녀였다
은영이로 인해 받았던 첫 상처는 나도 모르게 아물게 되었고
그녀로 인해 기억조차 까마득해 버린 그저 어린 시절 에피소드가 되어 버렸다
“희수야 이번 주말에 뭐해?”
“나? 그냥 공부하겠지 ^^”
“그래? 그럼 날 위해 시간 내줄 수 있어?”
“왜? 병원에 혼자 있기 싫어서? 우리 명신이가 오라면 와야지 ^^”
“아니 나 그날 외출할려고 선생님한테 부탁드렸거든 많이 나았으니 하루 바람 쐬고 싶다고”
“그래도 돼? 그럼 우리 놀러 가자 시내로”
“웅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럼 내가 주말에 데리러 올께 우리 첫 데이트에 ^^”
“웅 이제 곧 너도 시험이고 더 늦으면 못해 볼 것 같아서”
“에이 왜? 시험치고 너 건강해지면 내가 다 데리고 다닐께”
“그래….그래”
기뻐서였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흐려지는 말끝이 너무 기뻐서 슬픈 거라고
그녀와의 첫 데이트를 위해서 뭔가를 준비하고 싶었다
이제 배치고사 기간이 다가오면 시간은 점점 더 모자랄 것이고
많이 친해지긴 했지만 정식으로 사귀자는 고백도 못했기 때문에
이번 데이트를 통해 그녀를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상희를 통해 여자라는 걸 조금은 맛보았지만
왠지 명신에게는 남자의 모습으로, 늑대의 모습으로 다가갈 수 없는
순결한 느낌이 있었다
그녀를 완전히 갖지는 못하겠지만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 올랐다
그녀와의 데이트 전 날
내 방 서랍에 뒹굴던 예쁜 편지지에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게 어디 있더라?’
한참 동안 내가 가진 상자들과 서랍들을 뒤진 후 난 찾고 싶은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내 반지”
내 손에 들려진 것은 마치 태극문양이 뒤집혀 맞닿은 것 같은 은색 반지였다
예전에 귀금속 공장을 하시던 이모부 댁에 놀러 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신기한 모양의 반지를 쳐다 보고 있었더니
이모부님이 나중에 여자친구가 생기면 선물하라고 주신 은반지였다
‘이걸 받으면 명신이가 좋아할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거라면 끼워주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아무런 끈이 없는 것 같아서
다른 잡생각 없이 준비해뒀던 반지케이스에 넣어 포장지로 이쁘게 포장했다
기다리던 주말이 왔다
최대한 멋을 내고 집에는 독서실 간다고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왔다
병원 앞 꽃가게에 들려 그녀가 좋아하는 장미도 준비하고
최대한 그녀를 위해 하루를 사용하리라 맘 먹고 병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병실에 들어서니 늘상 입던 환자복이 아닌 밝은 아이보리색 원피스로 차려 입은
그녀가 날 보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와 진짜 달라보이네”
“그래? 이뻐? ^^”
“웅 원래부터 넌 이뻤어”
“진짜? ㅎㅎㅎ”
환자복이 아닌 그녀도 생소했지만 이쁘게 차려 입은 그녀가 넘 눈부셔
나도 모르게 맘속으로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의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고
우린 처음으로 함께 병원 밖을 나왔다
오랜만에 외출을 한 그녀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모든 것을 눈 속에 담고 있었다
“모두 다 너무 신기해”
“그래? 오늘 많이 보고 가 또 다시 나올 때까지 참아야 하니까”
“웅 그럴려고”
먼저 번화가로 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보스를 잡아타고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창가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손을 잡았다
“명신아 나 너무 좋다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게”
“그래 나두 꿈 같애”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을 느끼며 혹시 땀이 축축하게 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우린 시내에 내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무작정 걸어 다녔다
짧은 외출 때문인지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으려는 듯 이 곳 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출출해진 배를 채워야 했다
“명신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웅 있어 떡볶이 순대 튀김 ^^”
“그래? 하긴 병원에서는 먹기 힘드니까”
부산 남포동 극장거리에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먹거리가 있었다
그나마 아이들 사이에 유명하고 맛있는 분식집을 찾아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가 원하는 만큼 시켜 주었다
학교를 쉬는 관계로 그녀의 머리는 긴 생머리였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는 아마 길거리를 지나다니던 모든 남고생들의 시선을 잡았던 것 같다
그때 난 왜 그녀를 보면서 은영이를 느꼈던 가를 깨달았다
모든 남자들이 꿈꾸던 첫사랑의 이미지
명신이는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은영이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명신이를 통해 아마 그녀를 생각하고 느꼈을 것이다
명신이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나 태종대 가보고 싶어”
“그래? 안가봤어?”
“가 봤는데 또 가보고 싶어
바다가 넘 좋았어
모자상 전망대에서 보는 바다”
“그래 가보자”
남포동에서 길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꺼낸 그녀의 말에
우린 버스를 잡아타고 태종대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많이 걸어서 그런지 그녀는 조금 피곤해 했고
버스에 나란히 앉은 내 어깨에 그녀는 살포시 고개를 기대왔다
코끝에 그녀의 머리카락향기가 폴폴 날려 들어온다
이성에 대한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은 나였지만
그녀의 향기가 내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꼈다
만약 환자가 아니었다면 내 마음을 이렇게 가지고 간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간직하기엔 내 욕구가 너무 강했다
아픈 그녀였기에 내 본능보다는 이성과 감성이 더 그게 작용했고
그게 우리 사이를 좀 더 깊고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 같다
“희수야”
“왜?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나 니가 좋아”
“뭐??? 뭐라고???”
“바보야 니가 좋다고”
“넌 그런 말을 이런 상황에서 흘리듯 말하니? 좀 진지하게 해야지 ^^”
“푸읍~~~ ^^”
“명신아 나도 너 많이 좋아해
온전히 내 여자친구구나 하는 그런 느낌
그런 사람 니가 처음이야”
“정말? 그럼 내가 니 애인이야?”
“그렇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넌 내 애인이지”
“그렇구나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고마워 희수야”
태종대로 가는 버스 뒷자리에서 우리 서로에게 수줍은 맘을 고백했다
영화처럼 로맨틱한 건 아니었지만
그 순간 온 맘을 다해 서로에게 고백하고 그 맘을 확인했기에
그녀와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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