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 선배님 회고담 ~03 (나의 어린시절/ 여장부 할머니)
대명 리조트, 45평 ~ 방 3개에 거실과 주방이 꽤나 넓었어요.
선배님과 나는 팬티 런닝 차림으로 ...
형수는 젖꼭지와 자주색 팬티가 훤히 내비치는 밝은 미색 실크잠옷(란제리)을 걸치고 ...
선배/ 형수/ 나/ 이런 순서로 쇼파에 나란히 앉아
냉장고에서 꺼내온 (미리 넣어둔 것?) 딸기, 육포, 땅콩비스켓, 오렌지쥬스를 들면서
아기자기 하고 회한이 서린 선배님의 73년, 옛추억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부터는 회원님들 이해하기 편하도록 "선배님 1인칭" 독백 형식의
회고담으로 쓰겠습니다 ...
내용이 조금 지루하지만 뒷 이야기를 위한 어밀조밀한 설명입니다)
나의 신상 :
본 인 : 김운명 ~ 1940년 경진생 용 띠 (만 73세)
마 눌 : 서순이 ~ 1949년 기축생 소 띠 (만 64세)
첩 실 : 김순심 ~ 1936년 병자생 쥐 띠 (만 77세)
자 녀 : 아들 넷, 딸 한 명, (임신중, 유산한 2명 제외)
인 연 : 마눌/ 첩실/ 50~60년의 첫사랑? 여인들 ~
고 향 : 충청도 양반고을, (지역은 생략합니다)
경 력 : 지방공무원/ 증권사/ 자영업/ 부동산, 빌딩업/ 기타 개인사업/
나의 일생은 수많은 고난의 역사와 함께하였다 ..........
일제침략기 ~ 대동아전쟁이 막바지일 때 출생하여 5살 어린나이에 감격적인 해방을 맞았고
10살에 6.25 전쟁
20살에 4.19 민주의거
21살에 5.16 군사 구테타
30살에 새마을운동 전개
32살에 유신독재
39살에 12.12 신군부 구테타
40살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58살에 IMF 외환위기
기타 ~ 월남전 참전, 해외인력 송출(독일광부, 간호사) 등 급변하고 격동하는
수많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직접겪으며 그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집안은 조상대대로 천석지기 부농이었고 ~
3대독자 외아들인 부친께서는 일제침략기 여려운 시절에 일본유학을 다녀온 신세대 인테리셨다
큰형, 둘째형 ~
큰누나, 막내누나, ~ 그리고 순심이누나 ~ 우르르 집안 남매들이 도합 6명,
(아버지가 3대독자 외아들인 탓에 할머니의 강권?으로
우리는 남녀 형제가 많았다 ~ 갓난이 때 죽은 형,누나도 있었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집 가계부는 좀 복잡한 편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두 번 장가 들었고, 8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 외아들 하나 달랑 남기고, 20대 젊은나이에 돌아가셨다.
할 머 니 : 1863 ~ 1953년 정전무렵까지 90세를 장수하셨다.
아 버 지 : 1883 ~ 1960년 외아들로 귀하게 사시다가 4.19 나던 해 여름 77세 별세
어 머 니 : 1895 ~ 1976년 20살 때, 12살 차이 아버지께 재취로 시집와 81세 별세
(큰 엄 마) : 나이 불확실 ~ 아버지와 결혼, 딸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21세 별세
(이복누나): 출생년 불명 ~ 태어날 때, 큰엄마 돌아가시고 뒷따라 갓난이로 별세
큰 형 : 1916 ~ 1986년 젊은 나이에 대전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다가 70세 별세
큰 누나 : 1920 ~ 2008년 대전 부잣집에 시집가 다복하게 살다가 88세 별세
(형,누나) : 출생년 불명 ~ 중간에 태어났으나 젖먹이 때 전염성 폐렴으로 같은날 별세
둘 째 형 : 1932 ~ 1960년 대학교 4학년 때 4.19민주혁명의 희생자로 28세 잘열한 희생
막내누나 : 1936 ~ 현재 생존 : 나와 함께 서울유학(?) 과외선생이자 가장친한 누나
주인공 나 : 1940년 출생 ~ 부모님의 늦둥이이자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아들
(아버지57세/ 어머니45세/ ~~ 하룻밤 힘 써서 (?) 만든 복둥이?...)
순심누나 : 1936 ~ 현재 생존 (아버지의 이쁜 양녀이자? 나의 세컨드 첩실?)
아버지께서 대전역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5살 여아를 대려다 집에서 친 딸처럼 길렀음.
할머니 생존해 계실 때는, 무한한 귀여움과 사랑과 동정과 보살핌을 받았고.
할머니 권유로 어버지/어머니 친자식으로 호적에도 올렸음. ~
(밖에서 낳은 딸이라고 수군 수군 말들이 많았음)
평소 할머니의 말 동무이자, 비서역할, 한자, 불경공부, 언제나 한방에서 함께 잠자고 ~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집안식솔 중 제일 슬프게 울었음.
순심누나는 막내누나와 함께 읍내심상소학교를 4년간 다녀 한글과 일본어를 깨우쳤음.
또한 순심누나는 막내아들인 나의 놀이친구이자, 사랑의 돌보미,
집안청소와 잡다한 잔 심부름 등을 전담하였음 ~ 동네방네 소문난 택배(?)역할 ~
아담한 체구에/ 박속 처럼 하얀피부/ 얼굴 예쁘고/ 마음씨 고운 ~ 온동네 어른들의 귀염독차지,
(나의 배다른 누나? 같은데 ... DNA 유전자 (친형제) 검사를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음)
나의 어린시절 기억들 :
지엄한 대장부 할머니는 우리집안의 기둥,
천석지기 부잣집 외아들로 ~ 일본유학을 다녀오신 귀골풍, 신식인텔리 아버지께서는
점잖은 풍모에 문밖 출입을 하실 때는 반드시 양복차림에 구두를 신고, 중절모자를 쓰셨다.
인자하신 어머니는 늘 한복차림의 단아한 전형적인 현모양처 타입,
20살 때, 12살 차이나는 어버지께 재취로 시집와,
큰형 부터 ~ 막내인 나까지 4남3녀를 낳았는데 ~ 그중 둘은 젖먹이로 죽고, 다섯 남매를 길렀다.
근동 100리 안에선 제일 부잣집이라고 ~ 면이나 군에까지 소문이 자자했지만
실제로 우리집은 안팎이 엄청 넓었다 ......
기와집 ~ 안채, 사랑채, 큰대문,
초가집 ~ 바깥채, 행랑채, 곡간(창고), 기계간, 축사,
건물구조 ~ 대청마루, 큰방, 작은방, 건너방, 사랑방, 부억방, 다락방, ....
아흔아홉칸 사대부가의 구중궁궐은 아니었지만
동네 초입 멀리서 바라다보면 사람인자 솟을 기와대문이 유난히 크고
기와를 얻은 흙담에 빙 ~ 둘러쌓인 집 전체가 우람해 보였다.
소달구지가 출입할 수 있는 커다란 대문/
담쟁이로 둘러쳐진 무지개 모양의 중문/
마당구석에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과
사랑방 앞에 수석, 부래옥잠, 잉어들이 어우러진 작은 연못도 있었다.
집 뒷편 뜰에는 세 마지기 (600평?) 규모의 넓은 채소밭이 있었고
소, 돼지, 닭, 거위, 개, 고양이, ... 여러가지 가축들을 많이 길렀다.
다른집에 없는 우리집만의 특별한 것들 ......
뒤 뜰 곡간(창고) 옆의 기계간(공장?)에 가면
수많은 농기구들이 언제나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시쿵 ~ 시쿵 ~ 퉁 퉁 퉁...
파란연기 품으며 요란하게 돌아가는 방아찧는 발동기,
이쁘장하게 꾸며진 꽃가마 (할머니,어머니, 장거리 외출용 ~ 누나 시집갈 때 사용),
마른 소나무판자 ~ 갑작스레 집안의 누가 돌아가시면 관을 짜기위해 비축,
우리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들 (도우미?) ......
집사아저씨 : 집안 대소사를 총괄 (송씨 = 일본식으로 송상~!)
일군아저씨 : 농사를 짓는 부지런한 아저씨들 (머슴 3명)
찬모아줌마 : 부엌일 전담하는 친절한 아줌마 (아짐 2명)
유모아줌마 : 우리들 5남매들을 기르고 돌봐주신 이웃집 바느질아줌마
기타 소작인 : 우리집의 전답을 빌려서 농사 짓는 한마을, 이웃마을, 사람들
나와 형제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다복한 부잣집 자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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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간 ~ 소라소설의 야한스토리 전개와 판이한 뜬금없는 이야기 한토막 ~!
(선배님이 장시간을 말씀 했음, ~ 꼭 써달라고 당부한 선배 할머님 이야기 입니다)
지금부터 120여년 전 ~ 1894년 구 한말,
전라북도 정읍, 고창, 인근에서 양반들에게 핍박 받아온 농민들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필두로 봉기한
"일대 사건"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 (일본식 속된 말 동학란)
힘 없는 농민들이 추진한 사회전반의 개혁운동,
일부 양반들, 권력가의 출세길 통로였던던 과거제도 철폐,
양반과 상놈을 가리는 차별적인 사회신분제도 타파, 과부의 재가 혼인을 허용 ... 등
우리나라의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 ...수천년동안 내려오던 잘못된 기득권 제도를 확 ~ 바꾸어
양반이나 관리들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일반 농민대중이 중심이 되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세상을 이룩하고저했던
농민운동의 주인공들이 바로 동학민중운동이었다.
고유의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근대사회 민주주의가 시작되길 원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기점을 만들어 내었다.
동학농민혁명이야말로 신분자유를 갈망하는 민중운동의 거대한 첫 걸음이었으며
올 곧은 방향타요, 지침이 되었던 셈이다.
충청도 내륙까지 진군한 노도와 같이 성난 동학민중에 의해
관리들, 군대들, 위세하던 양반들, 무참히 살해되기도 하였는데
우리 최씨 집안도 대대로 농민을 수탈해온 부잣집이란 이유로 동학군들에 의해
집안이 풍지박산, 지리멸렬, 멸문지화, 풍전등화, 위태로운 처지에 처해졌었지만 ~
여장군(?) 풍모의 할머니 ...
눈썹이 짙고/ 눈이 황소처럼 커다란/
다른 여인들과 달리 키가 170cm 가까운 장신의 31살의 젊은 안방마님
(실제로 할머니의 친정집은 임진왜란 때 공신으로 이름난 무관집안이었다 ~ 명예문제로 밝히지 않음)
결론은 ~
할머니의 빠른 판단과 재치있는 결단과 조치로 온마을 모두가 구사일생할 수가 있었다.
여장부 ~!
덩치 큰 할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 온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
황소를 잡고,
돼지를 잡고,
밥이며, 떡이며, 술이며 ~ 몇일동안 동학군을 위한 동네잔치를 벌렸고
곡간의 쌀 보리를 몽땅 털어내고,
집안의 보물 가보를 아낌없이 내 놓으면서 성난 동학군들 마음을 달래어 무마했다고 한다,
그 당시 외아들 하나 기르던, 31살 젊디나 젊은 청상과부셨던 할머니의 통 큰(?) 배품에
성난 동학군들이 허~허~허 웃으면서 자발적으로 퇴장,
대대로 이어내려온 집안 건물과, 가족들, 자자일촌의 친척들, 집안 일군들, 한동네 마을사람들, ....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는 통쾌무비한 일화는
동학민중운동 이후,
인근 마을에 파다하게 퍼져 오래도록 전해지는 무용담(?)이기도 하였다.
거구의 여장군 할머니께서는 일제침략기 36년동안에도 아무런 탈(?)없이 집안을 잘 건사하셨다.
평소에 가난한 이웃들을 진심으로 보살폈으며,
비밀이지만 남들 모르게 독립운동자금도 간간히 지원하셨다고 한다.
근동에 워낙 할머니의 명성이 자자한 터라
면소재지 지서(파출소)의 악명 높은 일본순사들도 우리집안에 대해서는 괴롭힘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비용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외아들인 아버지를 일본으로 유학 보내셨고
우리 형제들에게도 반드시 신식공부를 배워야한다고
읍내의 심상소학교/ 보통학교/ 5년제 중학교/ 등에 보내주었다.
그러한 할머니의 배려에
큰형은 일찍 한의학을 공부,
젊은 나이에 대전에서 한의원을 차려 직접 운영했고,
큰누나는 보통학교 졸업후 19살에 대전의 양가집으로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청춘에 과수댁이 된 할머니께서는 ~
오직 외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일평생 수절하셨으며
5남매의 친손자들을 금자동이, 옥자동이,
할머니께서 직접 낳은 친아들 친딸처럼 돌봐주시는게 유일한 보람이자 즐거움이셨고
불심이 매우 깊으셔서 ~
온 집안 식솔들, 이웃들을 불교에 귀의토록 인도 하였으며
(그 시절엔 기독교 예배당이 극히 적었음)
매일 잠자리 들기전 순심누나와 함께 정자세로 앉아
손에 염주를 굴리며 장시간 불경을 암송하였고
논산 관촉사, 부여 고란사, 공주 갑사, 등에 해마다 초파일을 맞아 많은 시주를 올리셨다.
(자손발복과 행복한 가정을 발원하셨으리라 믿어진다)
평소엔 웃음 많고, 인자하고, 정이 많았던 할머니였지만 ~
우리들 5남매에게 차례 차례 ~
하늘천 따지 ...
천지지간 만물지중 ...
어려운 천자문/ 명심보감을 직접 가르치셨는데
우리들이 사소한 게으름이라도 피우면 가차없이 무릅꿇어 앉히고,
회초리를 들고 엄하게 훈도하셨던 무서운 할머니 ~
실로 할머니께서는 우리들의 스승이셨고, 집안의 든든한 대들보로 군림(?)하셨다.
(6.25전쟁 수복 후, 90세로 돌아가심)
할머니의 대장부다운 핏줄 탓일까?
우리 5명의 남녀형제들은 모두들 키가 크고, 눈섭이 짙고, 얼굴 윤곽이 반듯하여 근사했다.
36년간의 일제침략기와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보릿고개로 굶주리고 헐벗었던 그 당시
대부분 주민들의 체격이 왜소했고 얼굴도 가난에 찌들어 보였는데
유독 우리 형제들은 키가 크고, 우람했으며, 얼굴 윤곽이 반듯한 미남 미녀였다,
또한 우리 형제들은 다들 재치있고 두뇌가 명색하여 학교 공부를 잘하였다.
지금식으로 표현하자면 잘나가는 엄친아 들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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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 히로시마,
1945년 8월 9일 - 나가사키,
두 번의 원폭투하로 대동아전쟁의 원흉 일본이 무조건 항복으로 패망 ~!
일주일 뒤 8월 15일, 36년간 일제침략의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대한민국이 독립되었지만
그 당시 사회는 몹씨 어지러웠다.
일부 배운사람들은 신탁, 반탁, 운동으로 갈라섰고
일본사람들 밑에서 알랑거리면서 온갖 치부를 다 하였던 매국노 민족반역자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술수를 동원하였다.
남한은 이승만박사, 김구선생님이 민주주의를 ...
북한은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이 공산주의를 ...
아무튼 그 당시 5살 어린 나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남과 북... 날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기만 하였다.
권력쟁취, 사상투쟁, 통일문제, 사회질서, ...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칭 타칭...
모두가 애국자로 부각되길 원했던 무질서한 시절이었다.
해방 후, 우리집 대문간에는 부쩍 점잖은 어른들의 발길이 분주해졌다
후일,
할머니께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부잣집 아들, 일본유학 인테리, 아버지께 정치를 권유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줄지어왔다고 한다.
제헌국회 - 대한민국의 헌법이 만들어지고
이승만정부 - 대한민국이라는 정식국가가 건국되었지만
모든걸 미국에만 의존하던 허수아비(?) 대한민국 정부는
갑작스런 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우왕좌왕 갈팡질팡 .....
힘없는 국민들은 전쟁을 피해 남부여대 천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부자들도 봇짐을 싸들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행렬 ~
우리집 대가족은(일가친척, 일군들 포함 수십명) 먼 친척이 살고있는 전라남도 목포에서도 한참 떨어진
무안군의 이름 모를 섬으로 커다란 풍선배(나무 돗단배)를 타고 수륙 천리길 피난을 떠났다.
지금은, 기억이 아물아물 잊혀져 가지만 ...
검푸른바다,
드넓은 갯뻘,
울창한 소나무 해변 ~
섬주민들의 식수원인 저수지 ~
온동네 100여 가구 집들이 모두 초가지붕 ~
논두렁에 콩들이 자라고/ 밭고랑에 옥수수가 자라던 그 곳/ ...
막내누나, 순심누나, 뒤따라 달려다니며
낮이면 논두렁 밭두렁에서 방아개비(메뚜기) 잠자리 잡고
밤이면 호롱불 켜들고 갯뻘에서 게를 잡고 ...
아득히 멀게 느껴진 그 곳 섬마을에서
하늘높이 까마득하게 날아가는 연합군의 B29 폭격기를 바라보면서
야 ~ 호 소리치며, 깡총깡총 뛰면서, 두 손 흔들고 ~
아무튼,
피난살이 2년여를 외딴섬에서 숨어(?) 지내다가 충청도 고향집으로 되돌아왔다
1953년 봄, 2년 반만에 다시 찾아온 우리집안은 풍비박산 엉망이었다.
지붕은 부서지고
창문은 찢어지고
살림 가구는 도난 당하고
마당엔 잡초가 무성하였고
창고는 텅~텅 비어 당장 먹을 거리가 없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너무도 황량한 광경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6.25전쟁의 피해 때문에 여장부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피난지에서 고향집으로 돌아오신 후,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자주 눕더니만
어느날 밤, 잠드신 것처럼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90세 할머니께서
집안이 풍비박산(= 풍지박산) 된 일로 우울증(울화병)을 앓지 않았을까?
흰 상복 입고,
흰 두건을 쓰고,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들을 따라 할머니의 하얀 백상여를 따라가면서
상여꾼이 부르는 애절한 매김소리, 서글픈 요령소리 ...
상여에서 찢기어 바람에 휘날리는 하얀 창호지 조각 ...
13살, 어린 나로서는 영문도 모른체 눈물을 훔치곤 했다.
대명 리조트, 45평 ~ 방 3개에 거실과 주방이 꽤나 넓었어요.
선배님과 나는 팬티 런닝 차림으로 ...
형수는 젖꼭지와 자주색 팬티가 훤히 내비치는 밝은 미색 실크잠옷(란제리)을 걸치고 ...
선배/ 형수/ 나/ 이런 순서로 쇼파에 나란히 앉아
냉장고에서 꺼내온 (미리 넣어둔 것?) 딸기, 육포, 땅콩비스켓, 오렌지쥬스를 들면서
아기자기 하고 회한이 서린 선배님의 73년, 옛추억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부터는 회원님들 이해하기 편하도록 "선배님 1인칭" 독백 형식의
회고담으로 쓰겠습니다 ...
내용이 조금 지루하지만 뒷 이야기를 위한 어밀조밀한 설명입니다)
나의 신상 :
본 인 : 김운명 ~ 1940년 경진생 용 띠 (만 73세)
마 눌 : 서순이 ~ 1949년 기축생 소 띠 (만 64세)
첩 실 : 김순심 ~ 1936년 병자생 쥐 띠 (만 77세)
자 녀 : 아들 넷, 딸 한 명, (임신중, 유산한 2명 제외)
인 연 : 마눌/ 첩실/ 50~60년의 첫사랑? 여인들 ~
고 향 : 충청도 양반고을, (지역은 생략합니다)
경 력 : 지방공무원/ 증권사/ 자영업/ 부동산, 빌딩업/ 기타 개인사업/
나의 일생은 수많은 고난의 역사와 함께하였다 ..........
일제침략기 ~ 대동아전쟁이 막바지일 때 출생하여 5살 어린나이에 감격적인 해방을 맞았고
10살에 6.25 전쟁
20살에 4.19 민주의거
21살에 5.16 군사 구테타
30살에 새마을운동 전개
32살에 유신독재
39살에 12.12 신군부 구테타
40살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58살에 IMF 외환위기
기타 ~ 월남전 참전, 해외인력 송출(독일광부, 간호사) 등 급변하고 격동하는
수많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직접겪으며 그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집안은 조상대대로 천석지기 부농이었고 ~
3대독자 외아들인 부친께서는 일제침략기 여려운 시절에 일본유학을 다녀온 신세대 인테리셨다
큰형, 둘째형 ~
큰누나, 막내누나, ~ 그리고 순심이누나 ~ 우르르 집안 남매들이 도합 6명,
(아버지가 3대독자 외아들인 탓에 할머니의 강권?으로
우리는 남녀 형제가 많았다 ~ 갓난이 때 죽은 형,누나도 있었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집 가계부는 좀 복잡한 편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두 번 장가 들었고, 8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 외아들 하나 달랑 남기고, 20대 젊은나이에 돌아가셨다.
할 머 니 : 1863 ~ 1953년 정전무렵까지 90세를 장수하셨다.
아 버 지 : 1883 ~ 1960년 외아들로 귀하게 사시다가 4.19 나던 해 여름 77세 별세
어 머 니 : 1895 ~ 1976년 20살 때, 12살 차이 아버지께 재취로 시집와 81세 별세
(큰 엄 마) : 나이 불확실 ~ 아버지와 결혼, 딸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21세 별세
(이복누나): 출생년 불명 ~ 태어날 때, 큰엄마 돌아가시고 뒷따라 갓난이로 별세
큰 형 : 1916 ~ 1986년 젊은 나이에 대전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다가 70세 별세
큰 누나 : 1920 ~ 2008년 대전 부잣집에 시집가 다복하게 살다가 88세 별세
(형,누나) : 출생년 불명 ~ 중간에 태어났으나 젖먹이 때 전염성 폐렴으로 같은날 별세
둘 째 형 : 1932 ~ 1960년 대학교 4학년 때 4.19민주혁명의 희생자로 28세 잘열한 희생
막내누나 : 1936 ~ 현재 생존 : 나와 함께 서울유학(?) 과외선생이자 가장친한 누나
주인공 나 : 1940년 출생 ~ 부모님의 늦둥이이자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아들
(아버지57세/ 어머니45세/ ~~ 하룻밤 힘 써서 (?) 만든 복둥이?...)
순심누나 : 1936 ~ 현재 생존 (아버지의 이쁜 양녀이자? 나의 세컨드 첩실?)
아버지께서 대전역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5살 여아를 대려다 집에서 친 딸처럼 길렀음.
할머니 생존해 계실 때는, 무한한 귀여움과 사랑과 동정과 보살핌을 받았고.
할머니 권유로 어버지/어머니 친자식으로 호적에도 올렸음. ~
(밖에서 낳은 딸이라고 수군 수군 말들이 많았음)
평소 할머니의 말 동무이자, 비서역할, 한자, 불경공부, 언제나 한방에서 함께 잠자고 ~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집안식솔 중 제일 슬프게 울었음.
순심누나는 막내누나와 함께 읍내심상소학교를 4년간 다녀 한글과 일본어를 깨우쳤음.
또한 순심누나는 막내아들인 나의 놀이친구이자, 사랑의 돌보미,
집안청소와 잡다한 잔 심부름 등을 전담하였음 ~ 동네방네 소문난 택배(?)역할 ~
아담한 체구에/ 박속 처럼 하얀피부/ 얼굴 예쁘고/ 마음씨 고운 ~ 온동네 어른들의 귀염독차지,
(나의 배다른 누나? 같은데 ... DNA 유전자 (친형제) 검사를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음)
나의 어린시절 기억들 :
지엄한 대장부 할머니는 우리집안의 기둥,
천석지기 부잣집 외아들로 ~ 일본유학을 다녀오신 귀골풍, 신식인텔리 아버지께서는
점잖은 풍모에 문밖 출입을 하실 때는 반드시 양복차림에 구두를 신고, 중절모자를 쓰셨다.
인자하신 어머니는 늘 한복차림의 단아한 전형적인 현모양처 타입,
20살 때, 12살 차이나는 어버지께 재취로 시집와,
큰형 부터 ~ 막내인 나까지 4남3녀를 낳았는데 ~ 그중 둘은 젖먹이로 죽고, 다섯 남매를 길렀다.
근동 100리 안에선 제일 부잣집이라고 ~ 면이나 군에까지 소문이 자자했지만
실제로 우리집은 안팎이 엄청 넓었다 ......
기와집 ~ 안채, 사랑채, 큰대문,
초가집 ~ 바깥채, 행랑채, 곡간(창고), 기계간, 축사,
건물구조 ~ 대청마루, 큰방, 작은방, 건너방, 사랑방, 부억방, 다락방, ....
아흔아홉칸 사대부가의 구중궁궐은 아니었지만
동네 초입 멀리서 바라다보면 사람인자 솟을 기와대문이 유난히 크고
기와를 얻은 흙담에 빙 ~ 둘러쌓인 집 전체가 우람해 보였다.
소달구지가 출입할 수 있는 커다란 대문/
담쟁이로 둘러쳐진 무지개 모양의 중문/
마당구석에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과
사랑방 앞에 수석, 부래옥잠, 잉어들이 어우러진 작은 연못도 있었다.
집 뒷편 뜰에는 세 마지기 (600평?) 규모의 넓은 채소밭이 있었고
소, 돼지, 닭, 거위, 개, 고양이, ... 여러가지 가축들을 많이 길렀다.
다른집에 없는 우리집만의 특별한 것들 ......
뒤 뜰 곡간(창고) 옆의 기계간(공장?)에 가면
수많은 농기구들이 언제나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시쿵 ~ 시쿵 ~ 퉁 퉁 퉁...
파란연기 품으며 요란하게 돌아가는 방아찧는 발동기,
이쁘장하게 꾸며진 꽃가마 (할머니,어머니, 장거리 외출용 ~ 누나 시집갈 때 사용),
마른 소나무판자 ~ 갑작스레 집안의 누가 돌아가시면 관을 짜기위해 비축,
우리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들 (도우미?) ......
집사아저씨 : 집안 대소사를 총괄 (송씨 = 일본식으로 송상~!)
일군아저씨 : 농사를 짓는 부지런한 아저씨들 (머슴 3명)
찬모아줌마 : 부엌일 전담하는 친절한 아줌마 (아짐 2명)
유모아줌마 : 우리들 5남매들을 기르고 돌봐주신 이웃집 바느질아줌마
기타 소작인 : 우리집의 전답을 빌려서 농사 짓는 한마을, 이웃마을, 사람들
나와 형제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다복한 부잣집 자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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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간 ~ 소라소설의 야한스토리 전개와 판이한 뜬금없는 이야기 한토막 ~!
(선배님이 장시간을 말씀 했음, ~ 꼭 써달라고 당부한 선배 할머님 이야기 입니다)
지금부터 120여년 전 ~ 1894년 구 한말,
전라북도 정읍, 고창, 인근에서 양반들에게 핍박 받아온 농민들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필두로 봉기한
"일대 사건"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 (일본식 속된 말 동학란)
힘 없는 농민들이 추진한 사회전반의 개혁운동,
일부 양반들, 권력가의 출세길 통로였던던 과거제도 철폐,
양반과 상놈을 가리는 차별적인 사회신분제도 타파, 과부의 재가 혼인을 허용 ... 등
우리나라의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 ...수천년동안 내려오던 잘못된 기득권 제도를 확 ~ 바꾸어
양반이나 관리들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일반 농민대중이 중심이 되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세상을 이룩하고저했던
농민운동의 주인공들이 바로 동학민중운동이었다.
고유의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근대사회 민주주의가 시작되길 원했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기점을 만들어 내었다.
동학농민혁명이야말로 신분자유를 갈망하는 민중운동의 거대한 첫 걸음이었으며
올 곧은 방향타요, 지침이 되었던 셈이다.
충청도 내륙까지 진군한 노도와 같이 성난 동학민중에 의해
관리들, 군대들, 위세하던 양반들, 무참히 살해되기도 하였는데
우리 최씨 집안도 대대로 농민을 수탈해온 부잣집이란 이유로 동학군들에 의해
집안이 풍지박산, 지리멸렬, 멸문지화, 풍전등화, 위태로운 처지에 처해졌었지만 ~
여장군(?) 풍모의 할머니 ...
눈썹이 짙고/ 눈이 황소처럼 커다란/
다른 여인들과 달리 키가 170cm 가까운 장신의 31살의 젊은 안방마님
(실제로 할머니의 친정집은 임진왜란 때 공신으로 이름난 무관집안이었다 ~ 명예문제로 밝히지 않음)
결론은 ~
할머니의 빠른 판단과 재치있는 결단과 조치로 온마을 모두가 구사일생할 수가 있었다.
여장부 ~!
덩치 큰 할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 온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
황소를 잡고,
돼지를 잡고,
밥이며, 떡이며, 술이며 ~ 몇일동안 동학군을 위한 동네잔치를 벌렸고
곡간의 쌀 보리를 몽땅 털어내고,
집안의 보물 가보를 아낌없이 내 놓으면서 성난 동학군들 마음을 달래어 무마했다고 한다,
그 당시 외아들 하나 기르던, 31살 젊디나 젊은 청상과부셨던 할머니의 통 큰(?) 배품에
성난 동학군들이 허~허~허 웃으면서 자발적으로 퇴장,
대대로 이어내려온 집안 건물과, 가족들, 자자일촌의 친척들, 집안 일군들, 한동네 마을사람들, ....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는 통쾌무비한 일화는
동학민중운동 이후,
인근 마을에 파다하게 퍼져 오래도록 전해지는 무용담(?)이기도 하였다.
거구의 여장군 할머니께서는 일제침략기 36년동안에도 아무런 탈(?)없이 집안을 잘 건사하셨다.
평소에 가난한 이웃들을 진심으로 보살폈으며,
비밀이지만 남들 모르게 독립운동자금도 간간히 지원하셨다고 한다.
근동에 워낙 할머니의 명성이 자자한 터라
면소재지 지서(파출소)의 악명 높은 일본순사들도 우리집안에 대해서는 괴롭힘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비용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외아들인 아버지를 일본으로 유학 보내셨고
우리 형제들에게도 반드시 신식공부를 배워야한다고
읍내의 심상소학교/ 보통학교/ 5년제 중학교/ 등에 보내주었다.
그러한 할머니의 배려에
큰형은 일찍 한의학을 공부,
젊은 나이에 대전에서 한의원을 차려 직접 운영했고,
큰누나는 보통학교 졸업후 19살에 대전의 양가집으로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청춘에 과수댁이 된 할머니께서는 ~
오직 외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일평생 수절하셨으며
5남매의 친손자들을 금자동이, 옥자동이,
할머니께서 직접 낳은 친아들 친딸처럼 돌봐주시는게 유일한 보람이자 즐거움이셨고
불심이 매우 깊으셔서 ~
온 집안 식솔들, 이웃들을 불교에 귀의토록 인도 하였으며
(그 시절엔 기독교 예배당이 극히 적었음)
매일 잠자리 들기전 순심누나와 함께 정자세로 앉아
손에 염주를 굴리며 장시간 불경을 암송하였고
논산 관촉사, 부여 고란사, 공주 갑사, 등에 해마다 초파일을 맞아 많은 시주를 올리셨다.
(자손발복과 행복한 가정을 발원하셨으리라 믿어진다)
평소엔 웃음 많고, 인자하고, 정이 많았던 할머니였지만 ~
우리들 5남매에게 차례 차례 ~
하늘천 따지 ...
천지지간 만물지중 ...
어려운 천자문/ 명심보감을 직접 가르치셨는데
우리들이 사소한 게으름이라도 피우면 가차없이 무릅꿇어 앉히고,
회초리를 들고 엄하게 훈도하셨던 무서운 할머니 ~
실로 할머니께서는 우리들의 스승이셨고, 집안의 든든한 대들보로 군림(?)하셨다.
(6.25전쟁 수복 후, 90세로 돌아가심)
할머니의 대장부다운 핏줄 탓일까?
우리 5명의 남녀형제들은 모두들 키가 크고, 눈섭이 짙고, 얼굴 윤곽이 반듯하여 근사했다.
36년간의 일제침략기와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보릿고개로 굶주리고 헐벗었던 그 당시
대부분 주민들의 체격이 왜소했고 얼굴도 가난에 찌들어 보였는데
유독 우리 형제들은 키가 크고, 우람했으며, 얼굴 윤곽이 반듯한 미남 미녀였다,
또한 우리 형제들은 다들 재치있고 두뇌가 명색하여 학교 공부를 잘하였다.
지금식으로 표현하자면 잘나가는 엄친아 들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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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 히로시마,
1945년 8월 9일 - 나가사키,
두 번의 원폭투하로 대동아전쟁의 원흉 일본이 무조건 항복으로 패망 ~!
일주일 뒤 8월 15일, 36년간 일제침략의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대한민국이 독립되었지만
그 당시 사회는 몹씨 어지러웠다.
일부 배운사람들은 신탁, 반탁, 운동으로 갈라섰고
일본사람들 밑에서 알랑거리면서 온갖 치부를 다 하였던 매국노 민족반역자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술수를 동원하였다.
남한은 이승만박사, 김구선생님이 민주주의를 ...
북한은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이 공산주의를 ...
아무튼 그 당시 5살 어린 나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남과 북... 날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기만 하였다.
권력쟁취, 사상투쟁, 통일문제, 사회질서, ...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칭 타칭...
모두가 애국자로 부각되길 원했던 무질서한 시절이었다.
해방 후, 우리집 대문간에는 부쩍 점잖은 어른들의 발길이 분주해졌다
후일,
할머니께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부잣집 아들, 일본유학 인테리, 아버지께 정치를 권유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줄지어왔다고 한다.
제헌국회 - 대한민국의 헌법이 만들어지고
이승만정부 - 대한민국이라는 정식국가가 건국되었지만
모든걸 미국에만 의존하던 허수아비(?) 대한민국 정부는
갑작스런 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우왕좌왕 갈팡질팡 .....
힘없는 국민들은 전쟁을 피해 남부여대 천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부자들도 봇짐을 싸들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행렬 ~
우리집 대가족은(일가친척, 일군들 포함 수십명) 먼 친척이 살고있는 전라남도 목포에서도 한참 떨어진
무안군의 이름 모를 섬으로 커다란 풍선배(나무 돗단배)를 타고 수륙 천리길 피난을 떠났다.
지금은, 기억이 아물아물 잊혀져 가지만 ...
검푸른바다,
드넓은 갯뻘,
울창한 소나무 해변 ~
섬주민들의 식수원인 저수지 ~
온동네 100여 가구 집들이 모두 초가지붕 ~
논두렁에 콩들이 자라고/ 밭고랑에 옥수수가 자라던 그 곳/ ...
막내누나, 순심누나, 뒤따라 달려다니며
낮이면 논두렁 밭두렁에서 방아개비(메뚜기) 잠자리 잡고
밤이면 호롱불 켜들고 갯뻘에서 게를 잡고 ...
아득히 멀게 느껴진 그 곳 섬마을에서
하늘높이 까마득하게 날아가는 연합군의 B29 폭격기를 바라보면서
야 ~ 호 소리치며, 깡총깡총 뛰면서, 두 손 흔들고 ~
아무튼,
피난살이 2년여를 외딴섬에서 숨어(?) 지내다가 충청도 고향집으로 되돌아왔다
1953년 봄, 2년 반만에 다시 찾아온 우리집안은 풍비박산 엉망이었다.
지붕은 부서지고
창문은 찢어지고
살림 가구는 도난 당하고
마당엔 잡초가 무성하였고
창고는 텅~텅 비어 당장 먹을 거리가 없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너무도 황량한 광경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6.25전쟁의 피해 때문에 여장부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피난지에서 고향집으로 돌아오신 후,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자주 눕더니만
어느날 밤, 잠드신 것처럼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90세 할머니께서
집안이 풍비박산(= 풍지박산) 된 일로 우울증(울화병)을 앓지 않았을까?
흰 상복 입고,
흰 두건을 쓰고,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들을 따라 할머니의 하얀 백상여를 따라가면서
상여꾼이 부르는 애절한 매김소리, 서글픈 요령소리 ...
상여에서 찢기어 바람에 휘날리는 하얀 창호지 조각 ...
13살, 어린 나로서는 영문도 모른체 눈물을 훔치곤 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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