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 선배님회고담 ~13 (서울의 중학생 시절/ 4.19 민주혁명)
과거엔 주야로 왁자지껄했다던 군산 ~ 장항간 옛 도선장과
해망동 수산시장의 싱싱한 활어, 어패류, 등을 아이쇼핑하고
전국적으로 소문난 드라이브 코스,
전군간 100리 벚꽃길을 시원스레 달렸다.
운전하는 선배님 설명으로는 ~
전주 ~ 군산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가 생기기 전만 해도
전북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고, 가장 아름다운 벚꽃길 도로였는데....
매년 봄이되면
벚꽃축제로 전국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였지만
지금은 한적한 지방도로가 되어 버렸다고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였다.
(선배님 승용차가 지나친 시간이 토요일 오전11시쯤이었는데
봄맞이 상춘객들로 엄청 붐빌 것이라 예상했던 것에 훨씬 못미친
젊은커플들 몇몇 팀들이 벚꽃나무 아래서 사진찍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늘의 드라이브 관광 코스는
군산 ~ 전주 ~ 정읍 ~ 내장사 ~ 그리고 전주역(순심누나 마중)
선배님이 운전을 하시면서
(평소에 손수 드라이브가 최미?)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다정스레 손잡고 있는 형수님과 옥잠화를 백미러로 힐끗 바라보더니
"허어 ~ 이젠 아주 천연덕스런 진짜 부부 사이가 되었구먼 ~~ "
"호호 ~ 당신이 정식으로 허락한 부부네요 ~ 더욱이 오후엔 순심언니도 내려올테구요 ~"
"하하 ~ 제가 너무 행복에 겨운탓에 분위기를 망치나 봅니다 ~"
"아냐 ~ 보기에 좋은걸~? ~ 둘이서 계속 정답게 지내라구 ~ 나에겐 자극이 필요하니까~! 허허허"
"호호 ~ 딴 말씀 안하기예요 ~ 질투하지 마시구요 ~"
"허허허 ...."
"호호호 ...."
"하하하 ...."
군산 ~ 전주 ~ 정읍 ~ 내장사를 향하는 차안에서
서울에서의 중학교 생활을 시작으로 ~ 선배님회고담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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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초,
내가 서울의 중학교에 입학하기 두어달 전, 부모님께서 미리 상경하시어
서울 성동구 신당동 한옥마을에
방3칸, 대청마루, 부엌이 딸린 아담한 전통한옥을 매입하셨다.
마당가에 우물 (펌프샘, 빨래간) 이 있고,
장독대, 변소, 창고, 작으마한 화단도 붙어있는 제법 정갈한 집이었다.
대학 다니는 둘째형,
고등학교 다니는 막내누나,
그리고 중학교 갓 입학한 나,
이렇게 셋이서 함께 자취하며 공부하라고 집 장만을 하셨는데 .....
고향집과는 규모를 비교할 수없는 아담한 집이었지만
밤이면 번쩍이는 전깃불이 들어오고 (고향에는 전기가 없었음)
필라멘트 진공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이 신기하기만 했다.
서울로 이사온 첫날 ....
집 가까운 신당동 재래시장에 아버지, 어머니, 둘째형, 막내누나, 순심누나를 따라 장보러갔더니 ~
쌀, 보리, 잡곡, 야채, 생선, 식료품, 과일, 별별 먹거리는 물론
전파사 전기용품, 만물상회 생활용품, 푸줏간의 쇠고기 돼지고기, 책방, 문방구점, 가구점, 골동품가게, ... 등
온갖 상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는데 ~
끝간데 없는 재래시장의 큰 규모에
농촌에서만 자라온 나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심누나가 우리와 함께 살면서 (막내누나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청소, 빨래, 식사, 등의 집안살림을 도맡아 해주기로 하였다.
(카리스마 있는 둘째형, 빈틈없는 막내누나와 함께 생활하였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순심누나와의 은근한 썸씽(?)은 감히 꿈도 못꾸었고 ...
나역시 새롭고, 재미난 서울생활에 적응하느라 중학교 3년간은 진짜 모범생(?) 이었다)
(이따금씩 꿈속에 몽정?을 하여 빤츠가 얼룩질 때도 있었는데 ~
순심누나가 깨끗이 빨래하여 내방의 옷을 담는 단스(설합장)에 차곡히 정리해 주면서
내 옆구리를 툭 툭 치고/
눈을 깜박 윙크하고/
혀끝을 낼름거려/
"너의 은밀한 비밀은 내가 다 알고있다" 라는 식으로 귀엽게 놀릴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나도 아릿한 옛정이(?) 솟아올라 ~ 실 실 웃으며
기습적으로 순심누나의 젖가슴과 궁둥이를 주물럭거렸지만 ~ 그 이상의 찐한 행동은 늘 자제하였다)
가끔씩 어머니, 아버지께서 서울에 올라와 며칠씩 함께 기거하시면서 ~
삼남매가 자취하며 학교 다니는데 불편한 점, 부족한 점이 없는지 ~ 두루 두루 살펴봐주셨다 ...
오실 때마다 공동생활비, 학교등록금, 외에 별도로 각자에게 용돈을 넉넉히 주셨다
(서울 친구들 많이 사귀라고 ~)
중학교에 입학하고 등하교 길은 버스와 전차를 주로 이용하였는데
(그 당시 땅위 철길로 다니는 한 칸짜리 재래식 전차 ~
서대문, 동대문, 영등포, 노량진, 왕십리, 청량리, 돈암동, 종점이었던가 ~?)
중학교 1~2~3학년 동안
같은 동네에서 함께 등교하던 단짝 친구 몇명과 사귀면서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함께 야외로 놀러 다니면서/
나는 서서히 서울특별시민(?)으로 길들여졌다.
얼굴은 농촌의 촌티가 벗겨지고 사춘기 소년답게 반질반질 윤기가 났으며,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로서
국민학교 때는 체격이 빈약하고, 왜소해서 등에 업혀 등교했던 내가
할머니 영향 탓인지?
중학교에 입학 후, 키가 부쩍 자라나 175cm 정도,
우리반에서도 제일 큰 편에 속했다 (맨 뒷자리에 앉았으니까...)
말씨도 어눌하고 느릿한 충청도 고향말 보다는
"야 ~ 점심 먹었니?..."
"너 ~ 숙제 다했니?..."
"이번 ~ 일요일 약속있니?..."
서울의 남여 학생들이 사용하는 낯 간지러운(니 자?) 말투를 금방 습득하였다.
일요일 쉬는 날에 날씨가 좋으면
형, 작은누나, 순심누나와 함께 벤또 (도시락) 싸들고
한강 여의나루/ 마포샛강에 나가 뱃놀이도 즐기고
남산의 KBS방송국/ 서울특별시청/ 국회의사당/
덕수궁/ 창덕궁/ 명동거리/ 충무로/ 종로/ 을지로/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돈화문/ 두루 두루 구경하였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중학생인 나에게
대학교(법대)에서 학생회 간부활동을 하는 둘째형님은
애국, 애족에 대한 정신적 (도산 안창호 = 흥사단운동 주입) 스승이 되어주었고,
고등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투는 실력파 막내누나는
친절한 과외선생이 되어주었다. (특히 영어와 수학 개인지도)
"막내야 ~
우리나라는 앞으로 크게 변할거다 ~
지금은 농업국가로 가난한 후진국이지만,
잘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업국가로 변화해야 한다
미국, 유럽의 산업화 ... 그게 바로 세계적인 추세이거든 ~
너도 특기를 잘 살려서 대학진학을 목표로 공부 열심히 해라 ~
정치인 되고 싶으면 정치외교과 ...
교수가 되고 싶으면 사범대학을 ...
법조인이 되고 싶으면 법과대학 ...
사업가 금융가 되려면 경제학과 ....
의사가 되고 싶거던 의대를 선택해야겠지?
그러나 우리나라 미래의 주인공이 되려면 공대를 선택하렴 ~
단순 가계기술자가 아닌, 미래산업의 중요한 엔지니어가 되도록 ~
아직은 네가 이해하기 좀 어렵겠지만 ~
책장에 있는 형, 누나의 모든 책들을 많이 많이 읽어라 ~
독서야 말로 남모르게 진짜실력을 갖추게 하는 지름길이다 ~!
책은 총칼보다 무섭다고 말 하잖니?..."
근엄한 둘째형님의 독서지도로 나는 실로 많은 책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지금식으로 표현하자면 닥치는대로 읽기 ~
다독/ 열독/ 탐독/ 광독/ ...?
잘 모르는 부분은 언더라인 긋거나 책갈피에 표시를 해두었다가
형, 누나에게 물었고 ~
그 때마다 친절한 설명과 가르침을 받아, 나의 두뇌는 날로 발달하고, 지혜의 보고가 되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않았는데
내가 잠자는 머리맡엔 읽다가 놔둔 책이 항상 있었으니까....
오즉하면 순심누나가 나에게
"책을 머리에 베고 자면 뒷꼭지 틀어진다" 고 걱정을 하였을까?...
집에 있는 책들이 식상하면
학교도서관/ 시립도서관/ 열람하면서 독서에 정진하였다 ....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중, 고등학교 6년동안 읽은 책이
평생동안 읽은 책의 3분의2쯤 되는 거 같다.
(내 평생에 작은 자랑거리중 하나는 "삼국지연의"를 7번이나 읽었다는 것...!
유비,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 조조, 순욱, 사마의/ 손권, 주유 ...
그 주인공들의 심오한 처세술에 심취해 ~ 어린나이에 정의, 의리, 명분, 실리, 보은, 임기응변, 뜻을 알게된 것 ~ )
형 / 누나의 독서지도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작문시간에 ~ 뛰어난 수작을 썼다고 학교장 상을 받았고
학교를 대표해서 서울시내 중학생 글쓰기(국산품 애용) 대회에 참석 특상을 받았다.
상을 받으니 기분이 우쭐해졌다
학교 친구들이 나의 글솜씨를 부러워 하면서,
나와 친교하기를 원하였고, 그 때문에 단짝 친구들이 많이 생겨났다.
나는 또 다른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쉬지 않고 독서를 하였고
독서에 매진한 그 자세 그 대로
형님 누나의 공부하는 자세를 본받아 ~ 학교 교과공부에도 진짜 진짜 열심히하였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이란 한문 붓글씨는
열심히 노력하는 중학생 막내동생이 대견하다고
그 당시 둘째형님이 직접 써서 내 책상머리에 붙여준 격려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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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도 ~! 격동의 해 ~!
우리 집안엔 경사와 함께 무시무시한 불행의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법대에 다니던 둘째형이 사법고시 1차에 합격하였다.
소문이 퍼져 이웃동네까지 퍼져나가 온통 난리가 났었다.
나는 3학년 담임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 당시 바로 서울대학교에 진학하는 루트였으니까...)
막내누나 역시 유명 사립여자대학교 영문과에 당당히 합격 ~
집안에 겹경사 ~!
함께 자취생활하면서 독서와, 학과공부를 지도해준 형/ 누나는 자신들의 자랑보다는
막내동생의 일류고 합격이 대견하다는 듯 날마다 칭찬과 격려 ~
고향에서는 근동 이웃마을에까지 소문이 퍼져 큰 경사 났다면서
둘째아들 ~ 장래 판검사 될거라고 축하,
막내아들 ~ 일류 고등학교 합격,
막내 딸 ~ 명문 대학교 영문과 합격,
돼지잡고, 떡하고, 술 빚어 ... 며칠동안 동네잔치를 벌렸다.
그러나 호사다마란 고사성어가 있듯이
좋은일,
기쁜일,
끝에는 항상 마가 따르기 마련 ~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 ~ 이승만대통령/ 이기붕부통령?
온나라가 뒤숭숭해졌다
4월에 들어서자 서울 시내에선 연일 학생데모가 판을 쳤으며
대학교 4학년, 법대 학생회 간부였던 형님은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 잊지못할 4.19 민주의거 (혁명)
광화문에서 ~ 구 청와대 입구 ~ 데모 군중 맨 앞에 섰던 형님이
정치경찰의 무자비한 총알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형님 학교 친구들이 신당동 집으로 통지해 주기전까지는 .....
형님이 돌아신 것을 막내누나와 나는 전혀 몰랐다
청천벽력이었다 ~
절치절명이었다 ~
울고불고 정신이 없는 막내누나, 순심누나, 손을 잡고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달려갈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땅이 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막내누나는 울면서 자꾸만 길에 넘어지고/
순심누나도 정신이 혼미한 듯/
쓰러진 누나 두 사람을 일으켜 부여잡고/ 뛰고 또 뛰었다.
흐릿한 백열등 아래
하얀 광목천에 덥힌 싸늘한 시신들 ~!
한 두사람이 아니라 ~ 사망자 수가 엄청났다 ~ 숫자를 셀 수없을 정도로 .....
여기 저기서 ~ 숨진 시신을 붙들어 잡고 흔들면서, 통곡하는 가족들 ~
마치 지옥의 한장면 같았다.
형님의 이름표가 붙은 시신을 찾았다
막내누나는 기절할 듯 오열하고 ~ 순심누나는 땅을 치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나는 침착하게 흰 광목천을 벗겼다.
가슴에 한 방,
배에 한 방,
다리에 한 방 ....
온몸이 피투성이 너무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우리들 하고 함께 어깨 동무한 채로 데모 대열 맨 앞줄에 서서 노래부르며 행진했는데 ~
갑자기 탕, 탕, 탕, 몇발의 총소리가 나더니
김선배가 다리에 총알을 맞아 그자리에 주저앉았어 ~
우리가 다친 김선배를 들쳐업고 뒤로 물러서려는데
무장경찰들이 두 번째로 무자비한 총알을 쏘기 시작했어 ~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어 ~
가슴과 배에 총알을 맞은 것도 그때야 ~
아아아 ~ 아아아 ~ 분하다 ~!!!"
형님친구, 후배들, 십여명이 격한 말로서 피습 당시의 상황을
나와 누나들에게 번갈아 전해주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는 마치 꿈속의 메아리 같았다 ~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
너무 슬프면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했던가?
형님의 시신을 부여잡고 기절할 듯 쓰러진 두 누나를 부여잡고 달래면서
고향 부모님께 어서 빨리 알려야겠다는 생각뿐 ~!
둘째 형님의 별세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 어머니, 대전 큰형님께서 득달같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형님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시던
부모님의 슬퍼하셨던 모습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렵다.
형님의 시신을 담은 목관을
도랏쿠 (화물차, 트럭)에 싣고서 일단 고향으로 옮겼다
(지금은 수유리 4.19 민주묘역에 안치되어 있지만... 처음엔 고향의 선영에 묻혔다 )
온마을,
모든 사람들이 슬픔에 젖어 함께 흐느꼈다....
"장래 ~ 판검사 될 똑똑한 젊은이가 요절하였다..."
너무 분하고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우리가족들과 마을주민들을 달래면서
명예로운 민주의사란 명칭으로 군청에서 5일장을 치루어 주었다
장례를 마치고 .....
식음을 전폐한 부모님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평소 몸이 약하셨던 아버지께서 기어히 몸져 누우셨고
심성이 여리선 어머님은 머리를 싸매고 눈물로 나날을 보냈다.
형님의 장례를 마치고 ~
어머님, 아버지, 병수발을 하기 위해 둘째누나가 대학을 휴학하였고
나와 순심누나 둘이서만 서울 신당동 집으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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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존경하는 둘째 형님의 변고로 나의 생활은 한 순간에 변하였다....
학생이 술 마시면 안된다는 순심누나에게 꽥~ 소리 질러가며
막걸리를 사다가 밤새도록 마셨다.
토하고 마시고
또 토하고 마시고
학교에도 등교하지 않고 날마다 술만 마셨다.
잠시나마 술이 깨면
둘째형 ~ !
둘째형 ~ !
중얼중얼 부르면서 한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순심누나가 나를 붙잡고 얼래고 달래고 했으나
나의 마음은 이미 하늘이 무너진 듯한 절망 뿐 ~!!!
오로지 세상을 한탄하고 원망하는 반항심 뿐이었다.
일주일에 2~3일정도 학교에 출석하며
다니는둥 마는둥 ~ 고등학교 1학기를 마쳤다
(그나마 제적되지 않은 것은 둘째형의 불의의 변고에 대한 담임선생님의 이해와 동정 때문?)
통신표의 성적은 너무도 초라했다. 반에서 꼴등 ~!!!
여름방학이 되어 서울집 대문을 열쇠로 철장하고 순심누나와 고향집으로 힘없이 내려왔다
아버지 병환은 위독한 상태였고 ~
어머니는 너무도 쇠약해져 몸져 누워계셨다.
아버지께서 누워 계시는 사랑방을 찾아가
순심누나와 함께 오랜만에 드리는 인사로 큰절을 올리려 했지만
병들어 자리에 누운 어른들에게는 큰절을 하지 않는 법이라며 극구 사양하시면서 ~
곁에 다가 앉으라고 하셨다.
피골이 상접한 상태의 극히 쇠약해지신 아버지께서는
쾡한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채로
앙상한 손끝으로 순심누나/ 나의/ 손을 양손에 꼭 쥐어주셨다
"막내야 ~ 너는 자랄수록 외모나 성격이 꼭 할머니를 빼어닮았다 .....
심성을 곧게하고 훌륭한 대장부가 되어 네가 우리집안의 기둥이 되어다오 ~
어머니께 효도하고 가족들을 잘 보살펴라 ~
이웃을 두루 돌봐주고 ~ 없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덕을 배풀어라 ~"
"순심이 너는 ~ 하늘아래 피붙이가 하나도 없는 외로운 신세지만 ~
호적상으로 우리가족이고, 또한 지난 20여년 내 친딸처럼 여기고 정으로 길러왔다.
네가 힘든 일은 반드시 운명이랑 의논하고 ~ 운명이가 힘들어하면 네가 보살펴주어라...."
"순심아 ~
운명아 ~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 쭈욱 ~ 너희는 서로 친 오누이다 ~
늙도록 서로 가까이 살면서 ~ 이해하고 아끼고 돌봐주고 사랑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힘없이 말씀하셨고
순심누나와 나는 소리없이 흐느끼며 ~ 아버지의 말씀 한자 한자를 마음에 깊이 새겨담았다.
(아버지의 그날 말씀이 순심누나/ 나에게는/ 사실상 유언이나 진배없었다 ~)
나는 날마다 아버지 곁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정성으로 병수발 시중을 들었지만 ....
마을 입구 500년된 느티나무에 하루종일 매미가 맴~맴 울어대는
뙤약볕 쨍~쨍 내리쬐는 8월 중복날 ...
둘째형의 이름을 두번, 세번, 목메어 부르시던 아버지께서 기어이 숨을 거두셨다 ~
(사인은 심화병이었다...우울증?)
할 말이 없었다
20살, 고등학교 1학년인 내게는 너무도 큰 시련이었다.
대전에 한의원을 하시던 큰형님이 장손으로서
아버지의 싸늘한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
"아버지 ~ 아버지 ~ 못난 아들이 어버지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
가족들, 일가 친척들이 다 모이고
평소 아버지 친구분들, 인근의 유지들이 구름처럼 모여 5일장을 엄숙히 치루었다.
장지는 할머니, 작은형이 있는 선영의 양지바른 묘택으로 ~
갑자기 인생살이가 허무해졌다 ~
인간세상 누구나 "생로병사" 닥친다 했지만 형님과 아버님의 억울한 죽음은
탐욕스런 위정자들에 의한 미필적, 고의적, 살인이었다 ~~~
앞으로 ~ 나의 피끓는 젊은 인생사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
과거엔 주야로 왁자지껄했다던 군산 ~ 장항간 옛 도선장과
해망동 수산시장의 싱싱한 활어, 어패류, 등을 아이쇼핑하고
전국적으로 소문난 드라이브 코스,
전군간 100리 벚꽃길을 시원스레 달렸다.
운전하는 선배님 설명으로는 ~
전주 ~ 군산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가 생기기 전만 해도
전북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고, 가장 아름다운 벚꽃길 도로였는데....
매년 봄이되면
벚꽃축제로 전국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였지만
지금은 한적한 지방도로가 되어 버렸다고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였다.
(선배님 승용차가 지나친 시간이 토요일 오전11시쯤이었는데
봄맞이 상춘객들로 엄청 붐빌 것이라 예상했던 것에 훨씬 못미친
젊은커플들 몇몇 팀들이 벚꽃나무 아래서 사진찍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늘의 드라이브 관광 코스는
군산 ~ 전주 ~ 정읍 ~ 내장사 ~ 그리고 전주역(순심누나 마중)
선배님이 운전을 하시면서
(평소에 손수 드라이브가 최미?)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다정스레 손잡고 있는 형수님과 옥잠화를 백미러로 힐끗 바라보더니
"허어 ~ 이젠 아주 천연덕스런 진짜 부부 사이가 되었구먼 ~~ "
"호호 ~ 당신이 정식으로 허락한 부부네요 ~ 더욱이 오후엔 순심언니도 내려올테구요 ~"
"하하 ~ 제가 너무 행복에 겨운탓에 분위기를 망치나 봅니다 ~"
"아냐 ~ 보기에 좋은걸~? ~ 둘이서 계속 정답게 지내라구 ~ 나에겐 자극이 필요하니까~! 허허허"
"호호 ~ 딴 말씀 안하기예요 ~ 질투하지 마시구요 ~"
"허허허 ...."
"호호호 ...."
"하하하 ...."
군산 ~ 전주 ~ 정읍 ~ 내장사를 향하는 차안에서
서울에서의 중학교 생활을 시작으로 ~ 선배님회고담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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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초,
내가 서울의 중학교에 입학하기 두어달 전, 부모님께서 미리 상경하시어
서울 성동구 신당동 한옥마을에
방3칸, 대청마루, 부엌이 딸린 아담한 전통한옥을 매입하셨다.
마당가에 우물 (펌프샘, 빨래간) 이 있고,
장독대, 변소, 창고, 작으마한 화단도 붙어있는 제법 정갈한 집이었다.
대학 다니는 둘째형,
고등학교 다니는 막내누나,
그리고 중학교 갓 입학한 나,
이렇게 셋이서 함께 자취하며 공부하라고 집 장만을 하셨는데 .....
고향집과는 규모를 비교할 수없는 아담한 집이었지만
밤이면 번쩍이는 전깃불이 들어오고 (고향에는 전기가 없었음)
필라멘트 진공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이 신기하기만 했다.
서울로 이사온 첫날 ....
집 가까운 신당동 재래시장에 아버지, 어머니, 둘째형, 막내누나, 순심누나를 따라 장보러갔더니 ~
쌀, 보리, 잡곡, 야채, 생선, 식료품, 과일, 별별 먹거리는 물론
전파사 전기용품, 만물상회 생활용품, 푸줏간의 쇠고기 돼지고기, 책방, 문방구점, 가구점, 골동품가게, ... 등
온갖 상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는데 ~
끝간데 없는 재래시장의 큰 규모에
농촌에서만 자라온 나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심누나가 우리와 함께 살면서 (막내누나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청소, 빨래, 식사, 등의 집안살림을 도맡아 해주기로 하였다.
(카리스마 있는 둘째형, 빈틈없는 막내누나와 함께 생활하였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순심누나와의 은근한 썸씽(?)은 감히 꿈도 못꾸었고 ...
나역시 새롭고, 재미난 서울생활에 적응하느라 중학교 3년간은 진짜 모범생(?) 이었다)
(이따금씩 꿈속에 몽정?을 하여 빤츠가 얼룩질 때도 있었는데 ~
순심누나가 깨끗이 빨래하여 내방의 옷을 담는 단스(설합장)에 차곡히 정리해 주면서
내 옆구리를 툭 툭 치고/
눈을 깜박 윙크하고/
혀끝을 낼름거려/
"너의 은밀한 비밀은 내가 다 알고있다" 라는 식으로 귀엽게 놀릴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나도 아릿한 옛정이(?) 솟아올라 ~ 실 실 웃으며
기습적으로 순심누나의 젖가슴과 궁둥이를 주물럭거렸지만 ~ 그 이상의 찐한 행동은 늘 자제하였다)
가끔씩 어머니, 아버지께서 서울에 올라와 며칠씩 함께 기거하시면서 ~
삼남매가 자취하며 학교 다니는데 불편한 점, 부족한 점이 없는지 ~ 두루 두루 살펴봐주셨다 ...
오실 때마다 공동생활비, 학교등록금, 외에 별도로 각자에게 용돈을 넉넉히 주셨다
(서울 친구들 많이 사귀라고 ~)
중학교에 입학하고 등하교 길은 버스와 전차를 주로 이용하였는데
(그 당시 땅위 철길로 다니는 한 칸짜리 재래식 전차 ~
서대문, 동대문, 영등포, 노량진, 왕십리, 청량리, 돈암동, 종점이었던가 ~?)
중학교 1~2~3학년 동안
같은 동네에서 함께 등교하던 단짝 친구 몇명과 사귀면서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함께 야외로 놀러 다니면서/
나는 서서히 서울특별시민(?)으로 길들여졌다.
얼굴은 농촌의 촌티가 벗겨지고 사춘기 소년답게 반질반질 윤기가 났으며,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로서
국민학교 때는 체격이 빈약하고, 왜소해서 등에 업혀 등교했던 내가
할머니 영향 탓인지?
중학교에 입학 후, 키가 부쩍 자라나 175cm 정도,
우리반에서도 제일 큰 편에 속했다 (맨 뒷자리에 앉았으니까...)
말씨도 어눌하고 느릿한 충청도 고향말 보다는
"야 ~ 점심 먹었니?..."
"너 ~ 숙제 다했니?..."
"이번 ~ 일요일 약속있니?..."
서울의 남여 학생들이 사용하는 낯 간지러운(니 자?) 말투를 금방 습득하였다.
일요일 쉬는 날에 날씨가 좋으면
형, 작은누나, 순심누나와 함께 벤또 (도시락) 싸들고
한강 여의나루/ 마포샛강에 나가 뱃놀이도 즐기고
남산의 KBS방송국/ 서울특별시청/ 국회의사당/
덕수궁/ 창덕궁/ 명동거리/ 충무로/ 종로/ 을지로/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돈화문/ 두루 두루 구경하였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중학생인 나에게
대학교(법대)에서 학생회 간부활동을 하는 둘째형님은
애국, 애족에 대한 정신적 (도산 안창호 = 흥사단운동 주입) 스승이 되어주었고,
고등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투는 실력파 막내누나는
친절한 과외선생이 되어주었다. (특히 영어와 수학 개인지도)
"막내야 ~
우리나라는 앞으로 크게 변할거다 ~
지금은 농업국가로 가난한 후진국이지만,
잘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업국가로 변화해야 한다
미국, 유럽의 산업화 ... 그게 바로 세계적인 추세이거든 ~
너도 특기를 잘 살려서 대학진학을 목표로 공부 열심히 해라 ~
정치인 되고 싶으면 정치외교과 ...
교수가 되고 싶으면 사범대학을 ...
법조인이 되고 싶으면 법과대학 ...
사업가 금융가 되려면 경제학과 ....
의사가 되고 싶거던 의대를 선택해야겠지?
그러나 우리나라 미래의 주인공이 되려면 공대를 선택하렴 ~
단순 가계기술자가 아닌, 미래산업의 중요한 엔지니어가 되도록 ~
아직은 네가 이해하기 좀 어렵겠지만 ~
책장에 있는 형, 누나의 모든 책들을 많이 많이 읽어라 ~
독서야 말로 남모르게 진짜실력을 갖추게 하는 지름길이다 ~!
책은 총칼보다 무섭다고 말 하잖니?..."
근엄한 둘째형님의 독서지도로 나는 실로 많은 책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지금식으로 표현하자면 닥치는대로 읽기 ~
다독/ 열독/ 탐독/ 광독/ ...?
잘 모르는 부분은 언더라인 긋거나 책갈피에 표시를 해두었다가
형, 누나에게 물었고 ~
그 때마다 친절한 설명과 가르침을 받아, 나의 두뇌는 날로 발달하고, 지혜의 보고가 되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않았는데
내가 잠자는 머리맡엔 읽다가 놔둔 책이 항상 있었으니까....
오즉하면 순심누나가 나에게
"책을 머리에 베고 자면 뒷꼭지 틀어진다" 고 걱정을 하였을까?...
집에 있는 책들이 식상하면
학교도서관/ 시립도서관/ 열람하면서 독서에 정진하였다 ....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중, 고등학교 6년동안 읽은 책이
평생동안 읽은 책의 3분의2쯤 되는 거 같다.
(내 평생에 작은 자랑거리중 하나는 "삼국지연의"를 7번이나 읽었다는 것...!
유비,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 조조, 순욱, 사마의/ 손권, 주유 ...
그 주인공들의 심오한 처세술에 심취해 ~ 어린나이에 정의, 의리, 명분, 실리, 보은, 임기응변, 뜻을 알게된 것 ~ )
형 / 누나의 독서지도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작문시간에 ~ 뛰어난 수작을 썼다고 학교장 상을 받았고
학교를 대표해서 서울시내 중학생 글쓰기(국산품 애용) 대회에 참석 특상을 받았다.
상을 받으니 기분이 우쭐해졌다
학교 친구들이 나의 글솜씨를 부러워 하면서,
나와 친교하기를 원하였고, 그 때문에 단짝 친구들이 많이 생겨났다.
나는 또 다른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쉬지 않고 독서를 하였고
독서에 매진한 그 자세 그 대로
형님 누나의 공부하는 자세를 본받아 ~ 학교 교과공부에도 진짜 진짜 열심히하였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이란 한문 붓글씨는
열심히 노력하는 중학생 막내동생이 대견하다고
그 당시 둘째형님이 직접 써서 내 책상머리에 붙여준 격려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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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도 ~! 격동의 해 ~!
우리 집안엔 경사와 함께 무시무시한 불행의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법대에 다니던 둘째형이 사법고시 1차에 합격하였다.
소문이 퍼져 이웃동네까지 퍼져나가 온통 난리가 났었다.
나는 3학년 담임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 당시 바로 서울대학교에 진학하는 루트였으니까...)
막내누나 역시 유명 사립여자대학교 영문과에 당당히 합격 ~
집안에 겹경사 ~!
함께 자취생활하면서 독서와, 학과공부를 지도해준 형/ 누나는 자신들의 자랑보다는
막내동생의 일류고 합격이 대견하다는 듯 날마다 칭찬과 격려 ~
고향에서는 근동 이웃마을에까지 소문이 퍼져 큰 경사 났다면서
둘째아들 ~ 장래 판검사 될거라고 축하,
막내아들 ~ 일류 고등학교 합격,
막내 딸 ~ 명문 대학교 영문과 합격,
돼지잡고, 떡하고, 술 빚어 ... 며칠동안 동네잔치를 벌렸다.
그러나 호사다마란 고사성어가 있듯이
좋은일,
기쁜일,
끝에는 항상 마가 따르기 마련 ~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 ~ 이승만대통령/ 이기붕부통령?
온나라가 뒤숭숭해졌다
4월에 들어서자 서울 시내에선 연일 학생데모가 판을 쳤으며
대학교 4학년, 법대 학생회 간부였던 형님은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 잊지못할 4.19 민주의거 (혁명)
광화문에서 ~ 구 청와대 입구 ~ 데모 군중 맨 앞에 섰던 형님이
정치경찰의 무자비한 총알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형님 학교 친구들이 신당동 집으로 통지해 주기전까지는 .....
형님이 돌아신 것을 막내누나와 나는 전혀 몰랐다
청천벽력이었다 ~
절치절명이었다 ~
울고불고 정신이 없는 막내누나, 순심누나, 손을 잡고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달려갈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땅이 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막내누나는 울면서 자꾸만 길에 넘어지고/
순심누나도 정신이 혼미한 듯/
쓰러진 누나 두 사람을 일으켜 부여잡고/ 뛰고 또 뛰었다.
흐릿한 백열등 아래
하얀 광목천에 덥힌 싸늘한 시신들 ~!
한 두사람이 아니라 ~ 사망자 수가 엄청났다 ~ 숫자를 셀 수없을 정도로 .....
여기 저기서 ~ 숨진 시신을 붙들어 잡고 흔들면서, 통곡하는 가족들 ~
마치 지옥의 한장면 같았다.
형님의 이름표가 붙은 시신을 찾았다
막내누나는 기절할 듯 오열하고 ~ 순심누나는 땅을 치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나는 침착하게 흰 광목천을 벗겼다.
가슴에 한 방,
배에 한 방,
다리에 한 방 ....
온몸이 피투성이 너무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우리들 하고 함께 어깨 동무한 채로 데모 대열 맨 앞줄에 서서 노래부르며 행진했는데 ~
갑자기 탕, 탕, 탕, 몇발의 총소리가 나더니
김선배가 다리에 총알을 맞아 그자리에 주저앉았어 ~
우리가 다친 김선배를 들쳐업고 뒤로 물러서려는데
무장경찰들이 두 번째로 무자비한 총알을 쏘기 시작했어 ~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어 ~
가슴과 배에 총알을 맞은 것도 그때야 ~
아아아 ~ 아아아 ~ 분하다 ~!!!"
형님친구, 후배들, 십여명이 격한 말로서 피습 당시의 상황을
나와 누나들에게 번갈아 전해주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는 마치 꿈속의 메아리 같았다 ~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
너무 슬프면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했던가?
형님의 시신을 부여잡고 기절할 듯 쓰러진 두 누나를 부여잡고 달래면서
고향 부모님께 어서 빨리 알려야겠다는 생각뿐 ~!
둘째 형님의 별세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 어머니, 대전 큰형님께서 득달같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형님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시던
부모님의 슬퍼하셨던 모습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렵다.
형님의 시신을 담은 목관을
도랏쿠 (화물차, 트럭)에 싣고서 일단 고향으로 옮겼다
(지금은 수유리 4.19 민주묘역에 안치되어 있지만... 처음엔 고향의 선영에 묻혔다 )
온마을,
모든 사람들이 슬픔에 젖어 함께 흐느꼈다....
"장래 ~ 판검사 될 똑똑한 젊은이가 요절하였다..."
너무 분하고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우리가족들과 마을주민들을 달래면서
명예로운 민주의사란 명칭으로 군청에서 5일장을 치루어 주었다
장례를 마치고 .....
식음을 전폐한 부모님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평소 몸이 약하셨던 아버지께서 기어히 몸져 누우셨고
심성이 여리선 어머님은 머리를 싸매고 눈물로 나날을 보냈다.
형님의 장례를 마치고 ~
어머님, 아버지, 병수발을 하기 위해 둘째누나가 대학을 휴학하였고
나와 순심누나 둘이서만 서울 신당동 집으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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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존경하는 둘째 형님의 변고로 나의 생활은 한 순간에 변하였다....
학생이 술 마시면 안된다는 순심누나에게 꽥~ 소리 질러가며
막걸리를 사다가 밤새도록 마셨다.
토하고 마시고
또 토하고 마시고
학교에도 등교하지 않고 날마다 술만 마셨다.
잠시나마 술이 깨면
둘째형 ~ !
둘째형 ~ !
중얼중얼 부르면서 한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순심누나가 나를 붙잡고 얼래고 달래고 했으나
나의 마음은 이미 하늘이 무너진 듯한 절망 뿐 ~!!!
오로지 세상을 한탄하고 원망하는 반항심 뿐이었다.
일주일에 2~3일정도 학교에 출석하며
다니는둥 마는둥 ~ 고등학교 1학기를 마쳤다
(그나마 제적되지 않은 것은 둘째형의 불의의 변고에 대한 담임선생님의 이해와 동정 때문?)
통신표의 성적은 너무도 초라했다. 반에서 꼴등 ~!!!
여름방학이 되어 서울집 대문을 열쇠로 철장하고 순심누나와 고향집으로 힘없이 내려왔다
아버지 병환은 위독한 상태였고 ~
어머니는 너무도 쇠약해져 몸져 누워계셨다.
아버지께서 누워 계시는 사랑방을 찾아가
순심누나와 함께 오랜만에 드리는 인사로 큰절을 올리려 했지만
병들어 자리에 누운 어른들에게는 큰절을 하지 않는 법이라며 극구 사양하시면서 ~
곁에 다가 앉으라고 하셨다.
피골이 상접한 상태의 극히 쇠약해지신 아버지께서는
쾡한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채로
앙상한 손끝으로 순심누나/ 나의/ 손을 양손에 꼭 쥐어주셨다
"막내야 ~ 너는 자랄수록 외모나 성격이 꼭 할머니를 빼어닮았다 .....
심성을 곧게하고 훌륭한 대장부가 되어 네가 우리집안의 기둥이 되어다오 ~
어머니께 효도하고 가족들을 잘 보살펴라 ~
이웃을 두루 돌봐주고 ~ 없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덕을 배풀어라 ~"
"순심이 너는 ~ 하늘아래 피붙이가 하나도 없는 외로운 신세지만 ~
호적상으로 우리가족이고, 또한 지난 20여년 내 친딸처럼 여기고 정으로 길러왔다.
네가 힘든 일은 반드시 운명이랑 의논하고 ~ 운명이가 힘들어하면 네가 보살펴주어라...."
"순심아 ~
운명아 ~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 쭈욱 ~ 너희는 서로 친 오누이다 ~
늙도록 서로 가까이 살면서 ~ 이해하고 아끼고 돌봐주고 사랑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힘없이 말씀하셨고
순심누나와 나는 소리없이 흐느끼며 ~ 아버지의 말씀 한자 한자를 마음에 깊이 새겨담았다.
(아버지의 그날 말씀이 순심누나/ 나에게는/ 사실상 유언이나 진배없었다 ~)
나는 날마다 아버지 곁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정성으로 병수발 시중을 들었지만 ....
마을 입구 500년된 느티나무에 하루종일 매미가 맴~맴 울어대는
뙤약볕 쨍~쨍 내리쬐는 8월 중복날 ...
둘째형의 이름을 두번, 세번, 목메어 부르시던 아버지께서 기어이 숨을 거두셨다 ~
(사인은 심화병이었다...우울증?)
할 말이 없었다
20살, 고등학교 1학년인 내게는 너무도 큰 시련이었다.
대전에 한의원을 하시던 큰형님이 장손으로서
아버지의 싸늘한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
"아버지 ~ 아버지 ~ 못난 아들이 어버지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
가족들, 일가 친척들이 다 모이고
평소 아버지 친구분들, 인근의 유지들이 구름처럼 모여 5일장을 엄숙히 치루었다.
장지는 할머니, 작은형이 있는 선영의 양지바른 묘택으로 ~
갑자기 인생살이가 허무해졌다 ~
인간세상 누구나 "생로병사" 닥친다 했지만 형님과 아버님의 억울한 죽음은
탐욕스런 위정자들에 의한 미필적, 고의적, 살인이었다 ~~~
앞으로 ~ 나의 피끓는 젊은 인생사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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