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어진 사춘기 -
웃는 그녀를 잡아 당겨 내 품에 안고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이젠 자연스럽게 내 혀를 허용하는 그녀가 자신의 혀로 내 혀를 감아온다
뜨거운 우리의 체액이 합쳐지는 순간 우리는 하나되는걸 느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둘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는데
오랜 키스를 마치고 우린 병원으로 돌아왔다
무척이나 길었던 하루였다
병실에 들어서니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
“늦어서 죄송해요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아냐 늦지 않았어 명신아 재밌었니?”
“웅 좋았어 너무”
“그럼 됐네 고마워 희수야”
“아니예요 ^^”
“명신이 볼이 발그레하네? 열있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죄지은 사람처럼 움찔했고 그녀 역시 찔렸던 모양이다
“아냐 많이 돌아다녀서 좀 피곤해서 그런가봐”
“그래 그럼 얼른 쉬어”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께요”
“그래 오늘 수고 많았어 고맙다 희수야”
“아니예요 그럼 몸조리 잘하고 얼른 나아야 돼 약속했으니까’
“응 알았어 오늘 즐거웠어 조심히 가”
“그래 담주에 또 시간내서 올께 그때까지 잘 있어”
“응 잘자”
‘사랑해 명신아’
‘나도 사랑해 희수야’
부모님이 계셔서 말은 못했지만
그녀도 나도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날 사랑이라는 것이 여름 한철 소나기처럼 우릴 흠뻑 적셔 버렸다
그녀와의 첫 데이트 이후 난 꼬박꼬박 병실을 찾아갔고
병실 안에서는 하지 못했던 은밀한 대화들과 스킨십을
그녀를 휠체어에 태워 데리고 나와 병원 구석구석에서 즐기기 시작했다
“한번 터지더니만 매번 이러네 ^^”
“너도 즐기잖아?”
“웅 나도 좋아 사랑 받고 있는 이 느낌”
“사랑해 아주 많이”
“나두 사랑해”
외진 병원의 복도 끝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몇몇 곳을 아지터 삼아
한 곳에서 놀다가 사람이 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그러다가 간호사들에게 살짝 들키기도 하고
우리의 비밀 연애와 스킨십은 그렇게 끈끈히 이어지고 있었다
“반지 늘 끼고 있는 거야?”
“그럼 누가 준 반지인데”
“나중에 더 이쁘고 멋진 반지를 끼워 줄께”
“아냐 난 이게 좋아 너무 좋아”
“그래? 그럼 좋고”
사실 그녀와의 마음고리가 깊어갈수록 맘 한 켠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고3이라는 중요한 시기
하지만 그녀와의 시간 역시 난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시간을 쪼개서 아픈 여자친구의 간호도 하고
그녀도 내 상황에 조금은 부담이 되는지 내 방문을 자꾸 제지하고 나섰다
“이제 공부해야 하잖아 난 열심히 병과 싸우고 있을 테니까
넌 더욱 더 공부와 싸워
나 때문에 니가 실패했다는 소리 들으면 슬플 거 같애”
“시험이라는 게 사람 맘대로 되지 않잖아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라
부모님과 학교의 기대가 넘 커서 부담은 돼”
“넌 잘할 수 있을거야 힘내”
“고마워 명신아”
“나중에 배치고사 끝나면 그때 와 알았지?”
“웅 알았어”
시험기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원서 마무리 이후의 만남을 원했고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난 또 다시 학업에 매진했다
몇 번의 모의고사와 또 몇 번의 배치고사가 지나갔다
학력고사를 치기 이전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관문
그 관문을 지나야 우리에겐 입학원서와 배치사정의 기회가 주어졌다
배치고사의 마지막 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미쳐 주지 못한 그녀의 선물을 한 아름 들고
그녀가 날 보면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똑똑”
“…..”
“계세요?”
아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그녀 혼자 침상에 누워 있었다
잠들어 있는 듯 미동도 안 하는 그녀를 살펴보니
며칠 안보는 사이에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고 손톱 끝은 약간 검게 변해 있었다
머리에 비니를 쓰고 누워 잠든 그녀
그 생기발랄했던 내 여친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병색이 짙은 소녀만 그 곳에 있었다
차마 깨울 수가 없어 그녀의 곁에서 잠시 그녀를 바라 보았다
너무도 말라버린 그녀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원래도 하얗고 마른 그녀가 더 수척해 졌으니
그녀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살며시 잡아 보았다
온기마저 사라진 손에 더욱 더 가슴이 미어져왔다
“어? 왔어?”
내 온기를 느꼈는지 잠에서 깬 그녀가 날 보고 웃음을 짓는다
창백한 그녀의 미소는 예전처럼 따스했다
그 모습이 더 아프고 슬퍼 보이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왜 이렇게 말랐어? 갑자기 나빠진거야?”
“웅 조금 사정이 있어서 한번 치료를 걸렀는데 갑자기 이러네”
“많이 나빠진거야? 얼굴이 이게 뭐야? 나없이 잘 치료받는다더니”
“괜찮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마
시험은 잘 봤어? 원서 내러 가야 하지?”
“시험이 문제야? 니 얼굴이 이 모양인데
내가 소홀해서 그런가 같아 넘 미안해”
“아냐 니 잘못은 무슨
근데 그거 뭐야?”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금새 밝은 미소를 짓는 그녀
“내가 널 위해 준비했어
예전에 사격장 인형은 못 따줬지만 이걸로 대신 해
내 대신 끌어 안고 자고 내 생각하고 나 없는 동안”
“진짜? 고마워”
“으흡~~~ 으음읍”
갑자기 생기 발랄해져 내 목을 끌어 안고 내 입술에 덮쳐 온다
다행히 병실에 아무도 없어서 그녀는 더 대담하게 달려든 듯 하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내 본능이 눈을 떠버려 그녀의 입술 사이에 혀를 넣었다
“흐으음~~ 후르르흡”
이미 내 몸에 익숙해진 그녀는 능숙하게 내 입술을 받아들여
자신의 혀로 휘감아 버린다
내 한 손이 그녀의 가슴으로 올라갔지만 체중감소로 인해 빈약해진 가슴은
내 손을 부끄럽게 만들고 내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몇 번이고 맛보고 나서야
그녀를 다시 침대 위로 돌려 놓을 수 있었다
“사랑해 아프면 안돼”
“응 조심할께 너무 고마워”
“나 대신 안고 잘거야?”
“그럼 매일 매일 안아줄거야”
“그렇다고 매일 매일 덮치면 나 슬퍼할거다”
“하하하 알았어 너만 사랑해
이 녀석은 네 분신으로 생각할께”
커다란 곰돌이 인형을 들고 좋아하는 그녀를 보니
가슴속을 파고 들던 죄책감이 조금은 사라졌다
“나 이번 주에 원서 내러 서울 가”
“그래? 잘 다녀와 희수야
근데 너 돌아오면 나 여기 없을지도 몰라
부모님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기려고 하더라고”
“그래? 그럼 서울로 올라가는거야?’
“아마 그럴지도 가게 되면 규상이나 상희한테 연락처 남겨 놓을께”
“응”
휴대폰이나 삐삐 조차 없었던 시절
집 전화번호나 주소가 없으면 연락할 길이 막막했던 때
갑작스러운 그녀의 서울행은 내게 왠지 모를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호전이 되어서가 아닌 악화되면서 떠나는 길이라 더 불안했다
"어? 희수 왔니?”
“네 어머니 안녕하세요?”
부모님의 등장으로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끊어져 버렸다
원서를 넣고 다시 찾아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그날 그녀와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지 모르게 그녀와 한동안 떨어져 지낼 것 같다는
불안한 느낌을 끝내 지워 버릴 수 없었다
며칠 후 난 배치 사정을 끝냈고 서울 최고의 대학은 아니지만
상위 3개 중 하나의 대학에 원서를 쓸 수가 있었다
경쟁률이 높은 과인지라 합격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모든 건 순리대로 되겠지 라는 생각에 그 당시 유행하던 눈치작전 없이
생각했던 과에 바로 입학 원서를 제출하였다
다시 부산으로 와서 그녀를 찾아 갔을 땐 이미 병원을 옮긴 후였다
규상이와 상희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그들 역시 서울에 도착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녀와의 이별이 난 너무 불안했지만
마지막 학력고사를 앞 둔 시점에 흔들리는 건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거라 생각하고 학업에 몰두했다
대학입시가 있던 날 몹시 추운 한파가 몰아 닥쳤다
자기가 지원한 대학에서 마련한 입시장에서 시험을 치는 관계로
많은 학생들이 상경과 지방 이동을 했고
많은 눈이 내린 덕분에 입실시간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교통대란에 시달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단 반나절의 시험을 위해 12년을 준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입시제도
그 제도의 희생양들이 학력고사 종료와 더불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얼른 명신이가 어디 있는지 수소문 해봐야겠다
빨리 보고 싶다 명신아’
집으로 돌아와 축하해 주는 가족 친지들과 저녁을 먹고
규상이와 상희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상희 역시 수험생이라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통화가 안 되는 통에 난 며칠 후 부산으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시험을 치고 처음 등교한 날
학교 교실로 규상이가 찾아왔다
녀석 말로는 그 이후 명신이 로부터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입원하고 자리를 잡으면 연락할 텐데
뭔가가 불길한 느낌이었다
“행님아 아마 병원 옮겨 다니며 치료받고 있어서 그랄끼다
넘 걱정 말고 행님 합격이나 신경써라”
“그렇겠지? 암 일 없겠지?”
“그람 넘 걱정 마라”
그녀와의 연락이 두절된 지도 2개월이 지났을 무렵
대학입학 합격자 발표를 시작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발표를 기다렸지만 아쉽게도 난 낙방을 하고 말았다
명문대 합격이라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충격이 날 목 졸라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쳐져 있는 내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가족과 친지들은 용기를 주었고
서울에서 사촌 형이 직접 내려와 원서를 써 자신의 학교에 후기입시 전형에 지원했다
명문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상위권 대학이었는지라
재수를 하더라도 안전한 끈 하나 만들어둔다는 생각에 후기 입시를 치뤘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고 후기 발표가 났다
특별히 준비를 하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 무난히 합격을 했다
“희수야 수고했다”
“그래 재수를 하더라도 일단 하나 붙여 놓고 하는 게 좋지”
다들 위로하듯 말했지만 한번의 실패는 꽤나 입에 쓴 약이었다
일단 후기를 마치고 나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명신이에 대한 일이 생각난 것도 그때 즈음의 일이다
‘이상하다 왜 연락이 없을까?’
‘혹시 건강이 악화되어서 연락조차 못하는 것 아닐까?’
‘아무래도 불안해 마음이….맘이 안 놓여’
학력고사를 마치면 사실상 고3 생활은 끝이다
굳이 학교에 나가야 할 일은 없었지만 그때는 왜 굳이 나오라고 했는지
후기 시험을 마치고 합격자 발표까지 시간이 금새 지나가 버렸다
전기를 떨어지고 그대로 후기 시험을 보았지만
다행히 합격을 했다
합격 소식을 알리기 위해 그 다음 날 학교로 향했다
비록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불합격에 대한 실망이 컸던 터라
합격의 소식만으로도 난 조금은 들떠 있었다
“행님아 축하한다”
언제 들었는지 합격 소식을 듣고 규상이 녀석이 우리 반으로 찾아 왔다
“고맙디 근데 상희랑 니한테 명신이가 소식 안전했나?”
명신이의 연락을 묻는 날 보더니 규상이 녀석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금새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안구에 이슬이 고였다
“행님아 말 못해서 미안타
사실 명신이 누나 소식 알고 있었다
행님 전기 떨어질 때쯤 연락이 왔는데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다
미안타 행님아”
“뭔데? 뭐 때문에 그라노?”
“행님아 넘 놀라지 마래
명신이 누나 하늘로 갔다”
“임마가 뭐라하노? 명신이가 와?”
“누나 아픈 거 알았다 아이가?
행님 마지막 봤을 때 누나 치료 함 거르면서
갑자기 급격히 악화됐다
그래가 서울로 올라가려고 한긴데 올라 가기도 전에
넘 심각해져서 그만 세상을 떠났단다”
갑작스러운 청천벽력에 난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이건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지 현실에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날 보며 웃음짓던 소녀가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아이다 이건 꿈일끼다
대학입시 낙방보다 더 지독한 악몽일끼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가슴속에서 지울 수 없었던 불안감은
그게 현실이라고 꿈이 아니라고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규상이는 계속 날 붙잡고 뭐라고 주저리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행님아 정신 차리라
명신이 누나 좋은데 갔을끼다
행님 이라면 누나도 슬퍼 할끼다
행님아 제발 정신차리라”
규상이 늠은 고여 있던 눈물은 터뜨리며 날 흔들어 깨웠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다리의 힘이 풀려 나는 그냥 주저 앉아 버렸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렸을 땐 친구들이 마련해준 의자에 반쯤 누워 있는 상태였다
“규상아 언제 그랬노?”
“행님 원서 내러 갔을 때 안 좋아져서 그 길로 떠났다”
“그람 그때 내가 마지막 본거네
어쩐지 불안하고 맘이 이상하더니만
그럼 원서 내고 와서 알려 줬어야지”
“내도 몰랐다
명신이 누나가 부모님께 사정했다더라
행님 알면 중요한 시험 망친다고 비밀로 해달라고
그래서 우리집도 얼마 전에 알게 됐다
행님 후기라도 보면 말하자고 어머니가 그래서 지금 말하는기다”
“임마 그래도 알려 줬어야지
혼자 가는데 남자친구가 되가 아무 것도 몰랐다 아이가?
울 명신이 불쌍해서 어짜노?”
“행님아 정신 차리라
명신이 누나가 행님한테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했단다
유언으로 행님 준 반지랑 곰인형도 같이 보내달라고
사랑해줘서 너무 고맙고 다 기억하고 가겠다고
행님아 누나 행복하게 떠났다 그라니 기운차리고 살아야 된대”
“치아라~~
그게 다 뭔 소용 있노?”
난 붙잡는 규상이를 뿌리치고 학교를 뛰쳐 나왔다
목 밑까지 숨이 막혀오는데 더는 그 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 길로 병원에 가서 명신이의 흔적을 쫓았다
내용은 규상이가 말해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명신이는 끝까지 날 위해 배려했고 명신이의 부모님 역시 그랬다
손수 장문의 편지를 적어 내게 보내주시며
마지막 딸의 가는 길에 좋은 인연을 안겨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셨다
오랜 딸의 투병 끝에 몸도 마음도 다쳐버린 그 분들은
명신이의 장례를 모두 마치고 모두 외국으로 떠나셨다고 했다
명신이의 소식을 듣고 근 일주일을 시체처럼 지냈다
영문을 모르는 부모님은 계속 날 다그치며 이유를 물었지만
떠난 사람에게 미움을 심어줄 것 같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전기 시험을 실패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시도록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친구녀석들과 학교에서 만났다
“힘드나? 술 한잔 할까?”
그렇게 생활관에서 한 두잔 마시게 된 술이
쓰라린 마음의 입맛에 맞았는지 점점 더 늘어갔다
학교 생활의 마지막을 앞둔 어느 날 밤
난 명신이와 체온을 나눴던 아지터 그 장소에 와 있었다
“명신아 미안하다
내가 좀 더 보살폈어야 했는데
니 맘을 더 보듬어 줬어야 했는데
너만 생각하고 아껴줬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그녀는 없고 모든 게 그저 공허한 메아리 뿐이었다
술이 떨어지자 그 곳에서 내려와 가게에서 소주 몇 병을 사서
학교 스텐드에 앉았다
쓰디 쓴 소주를 위 속에 털어 넣고 하늘을 보니 달이 참 밝았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난 갑자기 몸을 일으켜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마치 누가 시키는 것처럼
어느 누구 하나 남지 않은 학교 운동장은 정말 고즈넉했다
그 곳에 있는 내 곁에 남은 건 너무도 차가운 겨울 바람뿐이었다
“명신아~~~ 명신아~~~”
“미안해 영신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미 소주를 몇 병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내 주량을 넘어서는 알코올이 내 식도를 타고 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뿐
이미 맘 속 깊이까지 죽어버린 내게 그런 것들은 중요치 않았다
“명신아~~~~~~~ 보고싶다 명신아~~~~”
“널 보내고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하니? 대답해봐 어떻게 해야 할지”
그렇게 나는 달빛이 비추는 차가운 운동장을 돌고 돌았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마저 흐려질 것을 알기에
잊지 않기 위해 다짐하고 다짐하며 내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었지만
시간이라는 요물이 결국엔 나를 잡아먹어 버릴 것을
누구보다 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한없이 그녀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밤새 그 곳을 달렸고
눈부시도록 차가운 달빛이 그날 내 사랑을 파편처럼 나눠버렸다
“명신아
너 말고 다른 사람을 가슴에 담진 않을께
여자는 그저 즐기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할거야
내가 사랑한 사람은 너 하나 뿐 일거야
죽음 속에서도 니가 간직하고 간 기억
나 역시 지우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우리를 갈라놓으려는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난 그렇게 살거다”
의식이 있어서 다짐한 것은 아니었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나에게 그렇게 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난 내 속에 악마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직도 내 안에서 잠들지 않고 고개를 쳐들고 있는 악마를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았지만
난 그 악마를 떨쳐낼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웃는 그녀를 잡아 당겨 내 품에 안고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이젠 자연스럽게 내 혀를 허용하는 그녀가 자신의 혀로 내 혀를 감아온다
뜨거운 우리의 체액이 합쳐지는 순간 우리는 하나되는걸 느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둘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는데
오랜 키스를 마치고 우린 병원으로 돌아왔다
무척이나 길었던 하루였다
병실에 들어서니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
“늦어서 죄송해요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아냐 늦지 않았어 명신아 재밌었니?”
“웅 좋았어 너무”
“그럼 됐네 고마워 희수야”
“아니예요 ^^”
“명신이 볼이 발그레하네? 열있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죄지은 사람처럼 움찔했고 그녀 역시 찔렸던 모양이다
“아냐 많이 돌아다녀서 좀 피곤해서 그런가봐”
“그래 그럼 얼른 쉬어”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께요”
“그래 오늘 수고 많았어 고맙다 희수야”
“아니예요 그럼 몸조리 잘하고 얼른 나아야 돼 약속했으니까’
“응 알았어 오늘 즐거웠어 조심히 가”
“그래 담주에 또 시간내서 올께 그때까지 잘 있어”
“응 잘자”
‘사랑해 명신아’
‘나도 사랑해 희수야’
부모님이 계셔서 말은 못했지만
그녀도 나도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날 사랑이라는 것이 여름 한철 소나기처럼 우릴 흠뻑 적셔 버렸다
그녀와의 첫 데이트 이후 난 꼬박꼬박 병실을 찾아갔고
병실 안에서는 하지 못했던 은밀한 대화들과 스킨십을
그녀를 휠체어에 태워 데리고 나와 병원 구석구석에서 즐기기 시작했다
“한번 터지더니만 매번 이러네 ^^”
“너도 즐기잖아?”
“웅 나도 좋아 사랑 받고 있는 이 느낌”
“사랑해 아주 많이”
“나두 사랑해”
외진 병원의 복도 끝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몇몇 곳을 아지터 삼아
한 곳에서 놀다가 사람이 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그러다가 간호사들에게 살짝 들키기도 하고
우리의 비밀 연애와 스킨십은 그렇게 끈끈히 이어지고 있었다
“반지 늘 끼고 있는 거야?”
“그럼 누가 준 반지인데”
“나중에 더 이쁘고 멋진 반지를 끼워 줄께”
“아냐 난 이게 좋아 너무 좋아”
“그래? 그럼 좋고”
사실 그녀와의 마음고리가 깊어갈수록 맘 한 켠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고3이라는 중요한 시기
하지만 그녀와의 시간 역시 난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시간을 쪼개서 아픈 여자친구의 간호도 하고
그녀도 내 상황에 조금은 부담이 되는지 내 방문을 자꾸 제지하고 나섰다
“이제 공부해야 하잖아 난 열심히 병과 싸우고 있을 테니까
넌 더욱 더 공부와 싸워
나 때문에 니가 실패했다는 소리 들으면 슬플 거 같애”
“시험이라는 게 사람 맘대로 되지 않잖아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라
부모님과 학교의 기대가 넘 커서 부담은 돼”
“넌 잘할 수 있을거야 힘내”
“고마워 명신아”
“나중에 배치고사 끝나면 그때 와 알았지?”
“웅 알았어”
시험기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원서 마무리 이후의 만남을 원했고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난 또 다시 학업에 매진했다
몇 번의 모의고사와 또 몇 번의 배치고사가 지나갔다
학력고사를 치기 이전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관문
그 관문을 지나야 우리에겐 입학원서와 배치사정의 기회가 주어졌다
배치고사의 마지막 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미쳐 주지 못한 그녀의 선물을 한 아름 들고
그녀가 날 보면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똑똑”
“…..”
“계세요?”
아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그녀 혼자 침상에 누워 있었다
잠들어 있는 듯 미동도 안 하는 그녀를 살펴보니
며칠 안보는 사이에 얼굴은 수척해져 있었고 손톱 끝은 약간 검게 변해 있었다
머리에 비니를 쓰고 누워 잠든 그녀
그 생기발랄했던 내 여친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병색이 짙은 소녀만 그 곳에 있었다
차마 깨울 수가 없어 그녀의 곁에서 잠시 그녀를 바라 보았다
너무도 말라버린 그녀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원래도 하얗고 마른 그녀가 더 수척해 졌으니
그녀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살며시 잡아 보았다
온기마저 사라진 손에 더욱 더 가슴이 미어져왔다
“어? 왔어?”
내 온기를 느꼈는지 잠에서 깬 그녀가 날 보고 웃음을 짓는다
창백한 그녀의 미소는 예전처럼 따스했다
그 모습이 더 아프고 슬퍼 보이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왜 이렇게 말랐어? 갑자기 나빠진거야?”
“웅 조금 사정이 있어서 한번 치료를 걸렀는데 갑자기 이러네”
“많이 나빠진거야? 얼굴이 이게 뭐야? 나없이 잘 치료받는다더니”
“괜찮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마
시험은 잘 봤어? 원서 내러 가야 하지?”
“시험이 문제야? 니 얼굴이 이 모양인데
내가 소홀해서 그런가 같아 넘 미안해”
“아냐 니 잘못은 무슨
근데 그거 뭐야?”
내가 가져온 선물을 보곤 금새 밝은 미소를 짓는 그녀
“내가 널 위해 준비했어
예전에 사격장 인형은 못 따줬지만 이걸로 대신 해
내 대신 끌어 안고 자고 내 생각하고 나 없는 동안”
“진짜? 고마워”
“으흡~~~ 으음읍”
갑자기 생기 발랄해져 내 목을 끌어 안고 내 입술에 덮쳐 온다
다행히 병실에 아무도 없어서 그녀는 더 대담하게 달려든 듯 하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내 본능이 눈을 떠버려 그녀의 입술 사이에 혀를 넣었다
“흐으음~~ 후르르흡”
이미 내 몸에 익숙해진 그녀는 능숙하게 내 입술을 받아들여
자신의 혀로 휘감아 버린다
내 한 손이 그녀의 가슴으로 올라갔지만 체중감소로 인해 빈약해진 가슴은
내 손을 부끄럽게 만들고 내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몇 번이고 맛보고 나서야
그녀를 다시 침대 위로 돌려 놓을 수 있었다
“사랑해 아프면 안돼”
“응 조심할께 너무 고마워”
“나 대신 안고 잘거야?”
“그럼 매일 매일 안아줄거야”
“그렇다고 매일 매일 덮치면 나 슬퍼할거다”
“하하하 알았어 너만 사랑해
이 녀석은 네 분신으로 생각할께”
커다란 곰돌이 인형을 들고 좋아하는 그녀를 보니
가슴속을 파고 들던 죄책감이 조금은 사라졌다
“나 이번 주에 원서 내러 서울 가”
“그래? 잘 다녀와 희수야
근데 너 돌아오면 나 여기 없을지도 몰라
부모님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기려고 하더라고”
“그래? 그럼 서울로 올라가는거야?’
“아마 그럴지도 가게 되면 규상이나 상희한테 연락처 남겨 놓을께”
“응”
휴대폰이나 삐삐 조차 없었던 시절
집 전화번호나 주소가 없으면 연락할 길이 막막했던 때
갑작스러운 그녀의 서울행은 내게 왠지 모를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호전이 되어서가 아닌 악화되면서 떠나는 길이라 더 불안했다
"어? 희수 왔니?”
“네 어머니 안녕하세요?”
부모님의 등장으로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끊어져 버렸다
원서를 넣고 다시 찾아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그날 그녀와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지 모르게 그녀와 한동안 떨어져 지낼 것 같다는
불안한 느낌을 끝내 지워 버릴 수 없었다
며칠 후 난 배치 사정을 끝냈고 서울 최고의 대학은 아니지만
상위 3개 중 하나의 대학에 원서를 쓸 수가 있었다
경쟁률이 높은 과인지라 합격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모든 건 순리대로 되겠지 라는 생각에 그 당시 유행하던 눈치작전 없이
생각했던 과에 바로 입학 원서를 제출하였다
다시 부산으로 와서 그녀를 찾아 갔을 땐 이미 병원을 옮긴 후였다
규상이와 상희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그들 역시 서울에 도착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녀와의 이별이 난 너무 불안했지만
마지막 학력고사를 앞 둔 시점에 흔들리는 건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거라 생각하고 학업에 몰두했다
대학입시가 있던 날 몹시 추운 한파가 몰아 닥쳤다
자기가 지원한 대학에서 마련한 입시장에서 시험을 치는 관계로
많은 학생들이 상경과 지방 이동을 했고
많은 눈이 내린 덕분에 입실시간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교통대란에 시달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단 반나절의 시험을 위해 12년을 준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입시제도
그 제도의 희생양들이 학력고사 종료와 더불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얼른 명신이가 어디 있는지 수소문 해봐야겠다
빨리 보고 싶다 명신아’
집으로 돌아와 축하해 주는 가족 친지들과 저녁을 먹고
규상이와 상희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상희 역시 수험생이라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통화가 안 되는 통에 난 며칠 후 부산으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시험을 치고 처음 등교한 날
학교 교실로 규상이가 찾아왔다
녀석 말로는 그 이후 명신이 로부터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입원하고 자리를 잡으면 연락할 텐데
뭔가가 불길한 느낌이었다
“행님아 아마 병원 옮겨 다니며 치료받고 있어서 그랄끼다
넘 걱정 말고 행님 합격이나 신경써라”
“그렇겠지? 암 일 없겠지?”
“그람 넘 걱정 마라”
그녀와의 연락이 두절된 지도 2개월이 지났을 무렵
대학입학 합격자 발표를 시작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발표를 기다렸지만 아쉽게도 난 낙방을 하고 말았다
명문대 합격이라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충격이 날 목 졸라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쳐져 있는 내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가족과 친지들은 용기를 주었고
서울에서 사촌 형이 직접 내려와 원서를 써 자신의 학교에 후기입시 전형에 지원했다
명문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상위권 대학이었는지라
재수를 하더라도 안전한 끈 하나 만들어둔다는 생각에 후기 입시를 치뤘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고 후기 발표가 났다
특별히 준비를 하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 무난히 합격을 했다
“희수야 수고했다”
“그래 재수를 하더라도 일단 하나 붙여 놓고 하는 게 좋지”
다들 위로하듯 말했지만 한번의 실패는 꽤나 입에 쓴 약이었다
일단 후기를 마치고 나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명신이에 대한 일이 생각난 것도 그때 즈음의 일이다
‘이상하다 왜 연락이 없을까?’
‘혹시 건강이 악화되어서 연락조차 못하는 것 아닐까?’
‘아무래도 불안해 마음이….맘이 안 놓여’
학력고사를 마치면 사실상 고3 생활은 끝이다
굳이 학교에 나가야 할 일은 없었지만 그때는 왜 굳이 나오라고 했는지
후기 시험을 마치고 합격자 발표까지 시간이 금새 지나가 버렸다
전기를 떨어지고 그대로 후기 시험을 보았지만
다행히 합격을 했다
합격 소식을 알리기 위해 그 다음 날 학교로 향했다
비록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불합격에 대한 실망이 컸던 터라
합격의 소식만으로도 난 조금은 들떠 있었다
“행님아 축하한다”
언제 들었는지 합격 소식을 듣고 규상이 녀석이 우리 반으로 찾아 왔다
“고맙디 근데 상희랑 니한테 명신이가 소식 안전했나?”
명신이의 연락을 묻는 날 보더니 규상이 녀석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금새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안구에 이슬이 고였다
“행님아 말 못해서 미안타
사실 명신이 누나 소식 알고 있었다
행님 전기 떨어질 때쯤 연락이 왔는데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다
미안타 행님아”
“뭔데? 뭐 때문에 그라노?”
“행님아 넘 놀라지 마래
명신이 누나 하늘로 갔다”
“임마가 뭐라하노? 명신이가 와?”
“누나 아픈 거 알았다 아이가?
행님 마지막 봤을 때 누나 치료 함 거르면서
갑자기 급격히 악화됐다
그래가 서울로 올라가려고 한긴데 올라 가기도 전에
넘 심각해져서 그만 세상을 떠났단다”
갑작스러운 청천벽력에 난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이건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지 현실에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날 보며 웃음짓던 소녀가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아이다 이건 꿈일끼다
대학입시 낙방보다 더 지독한 악몽일끼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가슴속에서 지울 수 없었던 불안감은
그게 현실이라고 꿈이 아니라고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규상이는 계속 날 붙잡고 뭐라고 주저리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행님아 정신 차리라
명신이 누나 좋은데 갔을끼다
행님 이라면 누나도 슬퍼 할끼다
행님아 제발 정신차리라”
규상이 늠은 고여 있던 눈물은 터뜨리며 날 흔들어 깨웠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다리의 힘이 풀려 나는 그냥 주저 앉아 버렸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렸을 땐 친구들이 마련해준 의자에 반쯤 누워 있는 상태였다
“규상아 언제 그랬노?”
“행님 원서 내러 갔을 때 안 좋아져서 그 길로 떠났다”
“그람 그때 내가 마지막 본거네
어쩐지 불안하고 맘이 이상하더니만
그럼 원서 내고 와서 알려 줬어야지”
“내도 몰랐다
명신이 누나가 부모님께 사정했다더라
행님 알면 중요한 시험 망친다고 비밀로 해달라고
그래서 우리집도 얼마 전에 알게 됐다
행님 후기라도 보면 말하자고 어머니가 그래서 지금 말하는기다”
“임마 그래도 알려 줬어야지
혼자 가는데 남자친구가 되가 아무 것도 몰랐다 아이가?
울 명신이 불쌍해서 어짜노?”
“행님아 정신 차리라
명신이 누나가 행님한테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했단다
유언으로 행님 준 반지랑 곰인형도 같이 보내달라고
사랑해줘서 너무 고맙고 다 기억하고 가겠다고
행님아 누나 행복하게 떠났다 그라니 기운차리고 살아야 된대”
“치아라~~
그게 다 뭔 소용 있노?”
난 붙잡는 규상이를 뿌리치고 학교를 뛰쳐 나왔다
목 밑까지 숨이 막혀오는데 더는 그 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 길로 병원에 가서 명신이의 흔적을 쫓았다
내용은 규상이가 말해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명신이는 끝까지 날 위해 배려했고 명신이의 부모님 역시 그랬다
손수 장문의 편지를 적어 내게 보내주시며
마지막 딸의 가는 길에 좋은 인연을 안겨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셨다
오랜 딸의 투병 끝에 몸도 마음도 다쳐버린 그 분들은
명신이의 장례를 모두 마치고 모두 외국으로 떠나셨다고 했다
명신이의 소식을 듣고 근 일주일을 시체처럼 지냈다
영문을 모르는 부모님은 계속 날 다그치며 이유를 물었지만
떠난 사람에게 미움을 심어줄 것 같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전기 시험을 실패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시도록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친구녀석들과 학교에서 만났다
“힘드나? 술 한잔 할까?”
그렇게 생활관에서 한 두잔 마시게 된 술이
쓰라린 마음의 입맛에 맞았는지 점점 더 늘어갔다
학교 생활의 마지막을 앞둔 어느 날 밤
난 명신이와 체온을 나눴던 아지터 그 장소에 와 있었다
“명신아 미안하다
내가 좀 더 보살폈어야 했는데
니 맘을 더 보듬어 줬어야 했는데
너만 생각하고 아껴줬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그녀는 없고 모든 게 그저 공허한 메아리 뿐이었다
술이 떨어지자 그 곳에서 내려와 가게에서 소주 몇 병을 사서
학교 스텐드에 앉았다
쓰디 쓴 소주를 위 속에 털어 넣고 하늘을 보니 달이 참 밝았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난 갑자기 몸을 일으켜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마치 누가 시키는 것처럼
어느 누구 하나 남지 않은 학교 운동장은 정말 고즈넉했다
그 곳에 있는 내 곁에 남은 건 너무도 차가운 겨울 바람뿐이었다
“명신아~~~ 명신아~~~”
“미안해 영신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미 소주를 몇 병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내 주량을 넘어서는 알코올이 내 식도를 타고 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뿐
이미 맘 속 깊이까지 죽어버린 내게 그런 것들은 중요치 않았다
“명신아~~~~~~~ 보고싶다 명신아~~~~”
“널 보내고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하니? 대답해봐 어떻게 해야 할지”
그렇게 나는 달빛이 비추는 차가운 운동장을 돌고 돌았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마저 흐려질 것을 알기에
잊지 않기 위해 다짐하고 다짐하며 내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었지만
시간이라는 요물이 결국엔 나를 잡아먹어 버릴 것을
누구보다 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한없이 그녀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밤새 그 곳을 달렸고
눈부시도록 차가운 달빛이 그날 내 사랑을 파편처럼 나눠버렸다
“명신아
너 말고 다른 사람을 가슴에 담진 않을께
여자는 그저 즐기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할거야
내가 사랑한 사람은 너 하나 뿐 일거야
죽음 속에서도 니가 간직하고 간 기억
나 역시 지우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우리를 갈라놓으려는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난 그렇게 살거다”
의식이 있어서 다짐한 것은 아니었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나에게 그렇게 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난 내 속에 악마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직도 내 안에서 잠들지 않고 고개를 쳐들고 있는 악마를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았지만
난 그 악마를 떨쳐낼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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