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냉장고에서 소주 두병을 꺼내놓고, 가져온 전들을 후라이팬에 데우기 시작했다. 전자렌지가 없는 집을 오랜만에 봐서, 후라이팬에 데워지는 전들이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전자렌지가 없다니. 가난이 정말로 피부로 다가왔다. 술이 땡겼다. 술을 마시면 차는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했는데, 그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싼 기름 냄새가 부엌에 가득 퍼졌다. 식탁 의자에 앉았는데, 한파 때문인지, 소파에 벗어서 지희를 덮어준 외투 때문인지 몸이 좀 떨렸다. 선생님은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전들을 데워오셨고, 소주 잔을 싱크대에서 꺼내시더니 자기 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시더니 한 번에 툭 털어넣으셨다.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연휴인데, 애 혼자 둬서 기분이 좀 그랬었어. 내가 복을 받나보다. 널 이렇게 보고."
"아니요. 저도 재미있었어요. 어렸을 때 다니던 곳들 돌아다녔거든요. 김천 와봤자 친구도 없고 해서, 혼자 집에서 떡이나 만들고 그랬었는데, 좋았어요."
"아버지가 공무원 아니셨어?"
"명예퇴직 하시고 지금은 떡집 하세요."
"그렇구나. 너도 이젠 아저씨가 다 됐다. 마지막 봤을 때만 해도 솜털이 보송보송했었는데."
"지금도 뭐 털은 없는 편이죠. 이제 솜털은 없지만."
"학교 졸업하고 뭐해?"
"편의점 해요."
"니가? 난 니가 좀 더 잘 될 줄 알았었는데. 태현이는 sk다닌다던데. 현숙이는 사회복지사고."
"아. 서태현이요? 잘 됐네요. 어떻게 아시네요."
"이리 저리 잘된 사람들 소식은 들리잖아. 난 니가 제일 잘 될 줄 알았거든. 다른 애들이랑 다르게 넌 좀 달랐잖아."
"예?"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읽고, 여자도 빨리 알았고 말이야. 정윤이랑은 연락하고 지내니?"
"아니요. 헤어졌어요. 고등학교 가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까요."
"좋다. 옛날 이야기 하니까. 한 잔 해."
"네."
몇 순배 술이 돌아갔다. 선생님과 난 20년 정도가 지난 중학교 때 이야기를 하며,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생각보다 우리의 대화는 겉돌지 않았다. 이야기하면 할 수록 그 시절의 기억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마치 소년이 된 것처럼 그 시절의 선생님과 지금의 선생님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한 병을 비우고, 두 병째를 따는데, 선생님이 물을 가져오더니 물컵에 물을 반쯤 따르고 술을 한잔 따랐다.
"아, 나 술이 약해서. 이렇게 마시면 덜 취하거든."
"미즈와리네요."
"미즈와리?"
"찬물에 술을 타먹는 거요. 뜨거운 물에 타마시면 오유와리라고 하거든요."
"그래? 난 술이 약해서 그렇게 마시는 건데, 나 말고도 그렇게 마시는 사람이 많나 보네."
"이렇게 마시면 더 맛있어요."
난 냉장고에서 얼음을 찾아와서 잔에 얼음과 물을 따르고, 소주를 한잔 붓고, 마지막으로 귤즙을 살짝 내서 짜넣었다. 선생님은 마셔보시더니 감탄했다.
"맛있네. 어디서 이런 건 배운거야?"
"저도 술이 약해서요. 일본 갔을 때 그쪽 사람들 마시는 거 보고 배웠어요."
"일본에 갔었어? 유학?"
"아니요. 그냥요. 가족들이랑 놀러 갔었어요. 온천도 하고, 일본 음식도 먹고요. 다른 사람들은 가이세키 요리가 싱겁다고 하는데, 전 입맛이 싱거운 편이라서 맛있게 먹었어요. 돈가스 덮밥이랑 오야꼬동도 맛있었고요."
"사는 게 여유가 있나봐. 좋다. 편의점 장사는 잘 돼?"
"그냥 저냥요. 한 지 오래됐어요. 벌써 거의 7-8년이나 됐으니까요. 대학교 졸업하기 전에 차린 거거든요."
"진짜? 아버님께서 차려주신거야?"
"아뇨. 지금도 아버지는 공부해서 공무원 같은 거 하기를 바라세요. 편의점 장사라는 게 어차피 알바 쓰는 거니까 사시라도 치라고요."
"그러게. 나도 네가 법관이 될 줄 알았는데."
미즈와리라고는 해도 술을 두병째 비우고 나니, 개인당 한 병은 마신 셈이 됐다. 술이 약한 나는 머리가 조금씩 띵해왔고, 선생님도 취하신 게 역력해 보이셨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면서 선생님이 화장실에 들어가시고, 나도 머리가 뜨거워져서 싱크대 개수대에 가서 세수를 했는데, 볼이 뜨끈뜨끈했다. 찬물에 세수를 했더니 그래도 정신이 돌아왔다. 선생님이 나오면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술을 마시다보니 진짜로 몸이 추웠다. 몸이 좀 으슬으슬 떨려서 안되겠다 싶어서 지희를 제 방에다 옮겨놓고 내 코트를 입어야겠다 싶어서 지희를 안고 지희방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자다가 누가 안아드니까 지희가 놀라서 깼다가 부스스한 내 모습과 술취한 냄새에 갑자기 자기 머리를 감싸쥐고 아빠 미안해요, 잘못 했어요라고 몸을 덜덜 떠는 거였다. 놀란 내가 아까 그 아저씨라고 말하니 그제야 나를 보고 빙긋이 웃는데, 그 미소가 정말로 엄청나게 쓸쓸했다. 이건 하루이틀에 생긴 버릇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들었는데, 난 지희를 침대에 뉘이고 그 앞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애가 놀라서 온 몸이 긴강되어 있었다. 조용하게 노래를 불렀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 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엔 수많은 어려움 뿐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굳은 다짐 뿐이죠. 다시 너를 구하고 말거라고. 두손을 모아 기도 했죠. 끝없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손을 잡아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은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지희는 아무 말이 없이 그저 내가 나직하게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마친 후 지희에게 주문을 걸듯 말했다.
"믿어야 돼. 너는 지금 마법에 걸린 공주야. 김지희, 네가 그 공주라고. 나는 말이야 한참이나 진짜 오래 기다려왔어. 마법에 걸린 공주를 찾아왔어. 용기도 별로 없고, 지혜도 별로 없는 나라서 찾지 못하나 싶어서 조바심이 났거든. 솔직히 말하면 아까 지희 너를 만났을 때도 몰랐었어. 네가 그 공주란 걸. 이제 알겠다. 아까 네가 우는데 그 눈물 방울이 알려줬어. 보석같았거든. 흑해에서 캐낸 진주를 본 적이 있었는데, 지희 네 눈물빛 같았어. 그러니까 이제는 용기를 내야해. 너도. 마법은 쉽게 풀리지 않거든. 네가 용기를 내고 소중해질 세상을 향해 한 걸음을 떼야 해. 아저씨가 말이야. 도와줄게. 언제든 전화해. 함께 걷자. 김지희. 꼬마공주."
지희는 목까지 덮었던 이불을 제 이마까지 끌어올리더니 내게 말했다.
"거짓말이란 거 알거든요. 무슨 마법에 빠진 공주에요. 내가 다섯 살짜리 꼬마인 줄 아세요. 그래도 노래는 잘하네요. 거짓말도 잘하고. 오늘은 봐줄게요."
이마가 빨갰다. 부끄러운 건가. 지희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고는 코트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더니, 선생님이 소파에 앉아서 쿨쩍쿨쩍 울고 계셨다. 무슨 말을 하기가 힘들어서 꾸벅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뭔가 큰 잘 못을 한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지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괜히 아이에게 동정하듯 정을 뿌린 것이 아니었을까가 말할 수 없이 속상했다.
아마도 맞고 살았던 것 같다. 술냄새가 나는 남자 어른에게 경기를 일으킬 만큼 긴장하는 꼬마 여자애가 겪었을 과거의 상처가 그대로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아서 그 순간엔 내가 아빠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차를 선생님 댁 앞에다 두고 택시를 잡으려고 골목을 걷는데 누가 뒤를 따라오는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봤더니, 선생님이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뛰어오는 게 보였다. 이 날씨에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선생님은 내 핸드폰을 손에 들고 계셨다.
"저기. 이거."
"아. 예. 선생님 들어가세요. 날이 추워요."
"고마워. 잘 들어가."
"네."
골목길을 뛰어 들어가셨고,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취해서 들어온 나를 아무 말없이 맞아주셨고, 난 내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려고 했었다.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편의점에서 온 전화였다. 무슨 사고라도 있나 해서 받았더니. 그냥 새해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조갈증이 나서 냉장고에서 찬물을 떠서 한 잔을 마셨는데, 다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선생님이셨다.
"잘 들어갔어?"
"예."
"지희에게 잘 대해 줘서 고마워. 에미가 되어서 뭐 하나 해 준게 없었는데."
"아니에요. 하루 반짝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냥 마음이 좋지 않아요. 아이에게 못할 일을 한 것 같아서."
"안 묻네. 내 이야기..."
"듣는다 해도 제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 같아서요."
"그러네. 그것도..."
선생님은 잠시 말이 없으시더니, 곧 전화를 끊으셨다. 난 항상 진퇴가 다른 사람보다 빠르다. 발을 빼는 타이밍을 안다. 여기까진 거다. 마음 아픈 사연들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나는 매주 탈북여성들의 방송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보면서도 울고, 사랑의 리퀘스트를 보면서도 운다. 차인표가 방송했던 힐링캠프를 보고 컴페션 활동도 하고있고, 유니세프에 꾸준히 성금을 내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한 때 난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았다. 뭐, 이정도인 거다. 나쁘진 않지만, 찝찝한 기분이었다. 속으로 항변을 계속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뭐가 더 있겠어. 뭐, 아빠라도 되줘야 하는 거야? 그건 아니잖아. 뭐 그러면서...
돕고 싶은 누군가를 그대로 두고 내 갈 길을 가는 찝찝함이 다른 것들보다 더 더러운 것은, 그 전, 또 그 전에 내가 한 다른 행동들 위에 이번에 행한 내가 한 버림이 쌓이기 때문이다. 껌파는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대전 역 앞에 언제나 있는 소주를 마시는 더러운 노숙자들을 피해가거나 하는 것 위에 지희의 빨개진 이마가 하나 더해지는 것이다.
안경을 벗고,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앞에 전등의 빛이 붉게 일렁거렸다. 꼬맹이 지희의 붉어진 이마가 또 생각이 나버렸다. 진짜로 몹시 답답했다. 나란 사람은 왜 이 모양인지. 속이 상했다. 여기까지다. 여기까지다. 여기까지다... 제길. 화가났다. 그래. 뭐가 무서워서... 불편이야 좀 감수하면 그만이다. 돈이야 덜 쓰면 그만이다. 꼬맹이 지희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돈,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나는 지희를 돕기로 했다.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서 평생을 괴로워하며 지내느니 한가지 걱정씩이라도 덜어 내는 쪽이 나은 삶일 것이다. 난 내일 일어나자마자 전자렌지와 지희가 볼 책 몇 권을 사서 일단 선생님댁에 가져다 주기로 했다. 난 내 책장에서 지희가 볼 수 있을만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연휴인데, 애 혼자 둬서 기분이 좀 그랬었어. 내가 복을 받나보다. 널 이렇게 보고."
"아니요. 저도 재미있었어요. 어렸을 때 다니던 곳들 돌아다녔거든요. 김천 와봤자 친구도 없고 해서, 혼자 집에서 떡이나 만들고 그랬었는데, 좋았어요."
"아버지가 공무원 아니셨어?"
"명예퇴직 하시고 지금은 떡집 하세요."
"그렇구나. 너도 이젠 아저씨가 다 됐다. 마지막 봤을 때만 해도 솜털이 보송보송했었는데."
"지금도 뭐 털은 없는 편이죠. 이제 솜털은 없지만."
"학교 졸업하고 뭐해?"
"편의점 해요."
"니가? 난 니가 좀 더 잘 될 줄 알았었는데. 태현이는 sk다닌다던데. 현숙이는 사회복지사고."
"아. 서태현이요? 잘 됐네요. 어떻게 아시네요."
"이리 저리 잘된 사람들 소식은 들리잖아. 난 니가 제일 잘 될 줄 알았거든. 다른 애들이랑 다르게 넌 좀 달랐잖아."
"예?"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읽고, 여자도 빨리 알았고 말이야. 정윤이랑은 연락하고 지내니?"
"아니요. 헤어졌어요. 고등학교 가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까요."
"좋다. 옛날 이야기 하니까. 한 잔 해."
"네."
몇 순배 술이 돌아갔다. 선생님과 난 20년 정도가 지난 중학교 때 이야기를 하며,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생각보다 우리의 대화는 겉돌지 않았다. 이야기하면 할 수록 그 시절의 기억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마치 소년이 된 것처럼 그 시절의 선생님과 지금의 선생님의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한 병을 비우고, 두 병째를 따는데, 선생님이 물을 가져오더니 물컵에 물을 반쯤 따르고 술을 한잔 따랐다.
"아, 나 술이 약해서. 이렇게 마시면 덜 취하거든."
"미즈와리네요."
"미즈와리?"
"찬물에 술을 타먹는 거요. 뜨거운 물에 타마시면 오유와리라고 하거든요."
"그래? 난 술이 약해서 그렇게 마시는 건데, 나 말고도 그렇게 마시는 사람이 많나 보네."
"이렇게 마시면 더 맛있어요."
난 냉장고에서 얼음을 찾아와서 잔에 얼음과 물을 따르고, 소주를 한잔 붓고, 마지막으로 귤즙을 살짝 내서 짜넣었다. 선생님은 마셔보시더니 감탄했다.
"맛있네. 어디서 이런 건 배운거야?"
"저도 술이 약해서요. 일본 갔을 때 그쪽 사람들 마시는 거 보고 배웠어요."
"일본에 갔었어? 유학?"
"아니요. 그냥요. 가족들이랑 놀러 갔었어요. 온천도 하고, 일본 음식도 먹고요. 다른 사람들은 가이세키 요리가 싱겁다고 하는데, 전 입맛이 싱거운 편이라서 맛있게 먹었어요. 돈가스 덮밥이랑 오야꼬동도 맛있었고요."
"사는 게 여유가 있나봐. 좋다. 편의점 장사는 잘 돼?"
"그냥 저냥요. 한 지 오래됐어요. 벌써 거의 7-8년이나 됐으니까요. 대학교 졸업하기 전에 차린 거거든요."
"진짜? 아버님께서 차려주신거야?"
"아뇨. 지금도 아버지는 공부해서 공무원 같은 거 하기를 바라세요. 편의점 장사라는 게 어차피 알바 쓰는 거니까 사시라도 치라고요."
"그러게. 나도 네가 법관이 될 줄 알았는데."
미즈와리라고는 해도 술을 두병째 비우고 나니, 개인당 한 병은 마신 셈이 됐다. 술이 약한 나는 머리가 조금씩 띵해왔고, 선생님도 취하신 게 역력해 보이셨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면서 선생님이 화장실에 들어가시고, 나도 머리가 뜨거워져서 싱크대 개수대에 가서 세수를 했는데, 볼이 뜨끈뜨끈했다. 찬물에 세수를 했더니 그래도 정신이 돌아왔다. 선생님이 나오면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술을 마시다보니 진짜로 몸이 추웠다. 몸이 좀 으슬으슬 떨려서 안되겠다 싶어서 지희를 제 방에다 옮겨놓고 내 코트를 입어야겠다 싶어서 지희를 안고 지희방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자다가 누가 안아드니까 지희가 놀라서 깼다가 부스스한 내 모습과 술취한 냄새에 갑자기 자기 머리를 감싸쥐고 아빠 미안해요, 잘못 했어요라고 몸을 덜덜 떠는 거였다. 놀란 내가 아까 그 아저씨라고 말하니 그제야 나를 보고 빙긋이 웃는데, 그 미소가 정말로 엄청나게 쓸쓸했다. 이건 하루이틀에 생긴 버릇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들었는데, 난 지희를 침대에 뉘이고 그 앞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애가 놀라서 온 몸이 긴강되어 있었다. 조용하게 노래를 불렀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 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엔 수많은 어려움 뿐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굳은 다짐 뿐이죠. 다시 너를 구하고 말거라고. 두손을 모아 기도 했죠. 끝없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손을 잡아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은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지희는 아무 말이 없이 그저 내가 나직하게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마친 후 지희에게 주문을 걸듯 말했다.
"믿어야 돼. 너는 지금 마법에 걸린 공주야. 김지희, 네가 그 공주라고. 나는 말이야 한참이나 진짜 오래 기다려왔어. 마법에 걸린 공주를 찾아왔어. 용기도 별로 없고, 지혜도 별로 없는 나라서 찾지 못하나 싶어서 조바심이 났거든. 솔직히 말하면 아까 지희 너를 만났을 때도 몰랐었어. 네가 그 공주란 걸. 이제 알겠다. 아까 네가 우는데 그 눈물 방울이 알려줬어. 보석같았거든. 흑해에서 캐낸 진주를 본 적이 있었는데, 지희 네 눈물빛 같았어. 그러니까 이제는 용기를 내야해. 너도. 마법은 쉽게 풀리지 않거든. 네가 용기를 내고 소중해질 세상을 향해 한 걸음을 떼야 해. 아저씨가 말이야. 도와줄게. 언제든 전화해. 함께 걷자. 김지희. 꼬마공주."
지희는 목까지 덮었던 이불을 제 이마까지 끌어올리더니 내게 말했다.
"거짓말이란 거 알거든요. 무슨 마법에 빠진 공주에요. 내가 다섯 살짜리 꼬마인 줄 아세요. 그래도 노래는 잘하네요. 거짓말도 잘하고. 오늘은 봐줄게요."
이마가 빨갰다. 부끄러운 건가. 지희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고는 코트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더니, 선생님이 소파에 앉아서 쿨쩍쿨쩍 울고 계셨다. 무슨 말을 하기가 힘들어서 꾸벅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뭔가 큰 잘 못을 한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지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괜히 아이에게 동정하듯 정을 뿌린 것이 아니었을까가 말할 수 없이 속상했다.
아마도 맞고 살았던 것 같다. 술냄새가 나는 남자 어른에게 경기를 일으킬 만큼 긴장하는 꼬마 여자애가 겪었을 과거의 상처가 그대로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아서 그 순간엔 내가 아빠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차를 선생님 댁 앞에다 두고 택시를 잡으려고 골목을 걷는데 누가 뒤를 따라오는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봤더니, 선생님이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뛰어오는 게 보였다. 이 날씨에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선생님은 내 핸드폰을 손에 들고 계셨다.
"저기. 이거."
"아. 예. 선생님 들어가세요. 날이 추워요."
"고마워. 잘 들어가."
"네."
골목길을 뛰어 들어가셨고,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취해서 들어온 나를 아무 말없이 맞아주셨고, 난 내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려고 했었다.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편의점에서 온 전화였다. 무슨 사고라도 있나 해서 받았더니. 그냥 새해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조갈증이 나서 냉장고에서 찬물을 떠서 한 잔을 마셨는데, 다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선생님이셨다.
"잘 들어갔어?"
"예."
"지희에게 잘 대해 줘서 고마워. 에미가 되어서 뭐 하나 해 준게 없었는데."
"아니에요. 하루 반짝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냥 마음이 좋지 않아요. 아이에게 못할 일을 한 것 같아서."
"안 묻네. 내 이야기..."
"듣는다 해도 제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 같아서요."
"그러네. 그것도..."
선생님은 잠시 말이 없으시더니, 곧 전화를 끊으셨다. 난 항상 진퇴가 다른 사람보다 빠르다. 발을 빼는 타이밍을 안다. 여기까진 거다. 마음 아픈 사연들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나는 매주 탈북여성들의 방송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보면서도 울고, 사랑의 리퀘스트를 보면서도 운다. 차인표가 방송했던 힐링캠프를 보고 컴페션 활동도 하고있고, 유니세프에 꾸준히 성금을 내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한 때 난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았다. 뭐, 이정도인 거다. 나쁘진 않지만, 찝찝한 기분이었다. 속으로 항변을 계속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뭐가 더 있겠어. 뭐, 아빠라도 되줘야 하는 거야? 그건 아니잖아. 뭐 그러면서...
돕고 싶은 누군가를 그대로 두고 내 갈 길을 가는 찝찝함이 다른 것들보다 더 더러운 것은, 그 전, 또 그 전에 내가 한 다른 행동들 위에 이번에 행한 내가 한 버림이 쌓이기 때문이다. 껌파는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대전 역 앞에 언제나 있는 소주를 마시는 더러운 노숙자들을 피해가거나 하는 것 위에 지희의 빨개진 이마가 하나 더해지는 것이다.
안경을 벗고,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앞에 전등의 빛이 붉게 일렁거렸다. 꼬맹이 지희의 붉어진 이마가 또 생각이 나버렸다. 진짜로 몹시 답답했다. 나란 사람은 왜 이 모양인지. 속이 상했다. 여기까지다. 여기까지다. 여기까지다... 제길. 화가났다. 그래. 뭐가 무서워서... 불편이야 좀 감수하면 그만이다. 돈이야 덜 쓰면 그만이다. 꼬맹이 지희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돈,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나는 지희를 돕기로 했다.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서 평생을 괴로워하며 지내느니 한가지 걱정씩이라도 덜어 내는 쪽이 나은 삶일 것이다. 난 내일 일어나자마자 전자렌지와 지희가 볼 책 몇 권을 사서 일단 선생님댁에 가져다 주기로 했다. 난 내 책장에서 지희가 볼 수 있을만한 책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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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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