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色道의 시작
“제가 들어다 드릴께요 택시까지”
“아니예요 괜찮아요”
한사코 말리는 그녀에게서 첼로가방을 빼앗아 가게 앞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녀를 먼저 태우고 앞자리에 첼로가방을 가지런히 챙겨 주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요”
“네 나중에 또 뵈요”
사라지는 택시를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 날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그녀의 흔들리는 가슴과 도드라진 꼭지가 눈에 아른거렸다
예술가의 향기가 나는 그녀는 지금껏 만나온 여자들과는 다른 부류라 그런지
내 성욕을 더욱 더 자극했다
=================================================================
‘혹시라도 안 오면 어쩌지?’
그런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신념대로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만날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만날 테니까
또 그렇게 하루가 흐른다
매일 매일 여는 가게 덕분에 난 좀처럼 휴일이라는 것이 없었다
한 달 내내 일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으니
사장님이 가금 패밀리를 동원해서 2주에 한번 꼴로 주말에 휴무를 준다
그렇게 간간히 돌아오는 휴무가 바로 오늘이다
간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보려고 어제 밤 캔맥주 몇 개를 마시고 잠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 꿈을 헤매고 있었는데
내 방에서 들리는 것 같지 않은 이상한 벨소리가 들렸다
‘뭐지? 이 소리는?’
마치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눈을 떠지지 않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이상한 벨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아~~ 진짜 뭐야?’
간신히 눈을 뜨고 소리 나는 곳을 둘러 보니
방 한 쪽 구석에 놓인 팩스기에서 들리는 소리다
“아이씨~~ 뭐야 시끄럽게”
팩스기가 고장 난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소리를 죽이기 위해 그 쪽으로 향했다
근데 고장 난 팩스기에서 나오는 소리치고는 귀에 익숙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옆에 달린 전화기를 들어보니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네 여보세요?”
“거기 혹시 희수씨 집 아닌가요?”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저 모르시겠어요?”
“네? 잘 모르겠는데요”
“에이 섭섭한데요? 저 수희예요 박수희”
‘박수희?’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내 방에 처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얼떨떨한 느낌에 곰곰히 생각하니 오전 알바 그녀다
“아~~~네 미안해요 처음 전화가 걸려온 거라 당황했어요”
“그래요? 내가 첫 전화예요? 우와~~”
“그러네요 첫 전화가 수희씨라니
근데 무슨 일로?”
“그냥 장부 보다가 번호가 있어서 걸어 봤어요”
“아….네 오늘 쉬는 날이라 좀 쉬고 있었어요
무신 일 있는 건 아니죠?”
“아니예요 ^^
근데 물어볼 것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혹시 내일 아침에 시간 괜찮으세요?”
“아침에 도서관 가는 거 말고는 별다른 일은 없는데요”
“그럼 제게 시간 좀 내주세요”
“시간요?”
“네 같이 영화 볼래요?”
갑자기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걸까?
알바가 끝나면 패밀리들을 데리고 저녁마다 만찬을 즐기는 여왕님이
이 미천한 저녁 알바생에게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시간은 괜찮은데 왜 저랑?”
“친해질 기회도 많지 않고
그 시간이 아니면 우리 둘 다 자유롭지 못하잖아요
조조영화보고 출근하면 딱 시간이 맞을 것 같아서”
“아 그렇네요 그럼 내일 봐요
어디로 가면 되요?”
“근처 XX극장 아시죠? 그 앞에서 8시에 봐요”
“네 그럼 내일 뵈요”
그녀와의 통화를 끝내고 잠시 머리를 굴렸다
‘형 수희 누나는 형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던데?
잘 한번 지켜봐’
희준이가 했던 말들이 생각나면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가 정말 날 맘에 두고 있는 걸까?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뭐 내일 나가서 얘기를 하다가 보면 알겠지
고민하지 말자
앞서 가지도 말고’
휴일 하루는 총알 같이 지나간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뒹굴 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내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일찌감치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혹시라도 늦게 될까 봐 맞추지 않던 알라까지 맞춰 두고
아니라고는 하지만 내 맘 속 한 편에 은근한 기대감 같은 것이 생겼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늦지 않게 준비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몸에 피트 되는 가죽 자켓과 그녀가 즐겨 입는 체크무늬 모직 치마
그녀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기다렸어요?”
“아니예요 금방 왔어요”
“영화 시간에 늦은 건 아니죠?”
“아니예요 예매해 놨으니 들어가요”
그녀는 미리 나와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여자 치고는 적극적이고 준비성이 철저한 것이 조금 맘에 들었다
그녀와의 영화관람은 딱히 특별할 것이 없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현대물
그냥 좀 특별한 직업의 주인공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 한다는 내용이 전부다
여자와 첫 데이트에 본 영화치고는 무미건조했지만
그래도 그녀와 단 둘이 새로운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영화 어땠어요?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그러네요”
“아니예요 재미 있었어요”
“근데 시간이 길어서 벌써 오픈 시간이네”
“우리 택시 타고 가요 내가 오픈 도와 줄께요”
택시를 잡고 뒷자리에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저기… 우리 그냥 말 편하게 하면 안 되요?
다른 사람들하고는 편하게 지내는데 유독 희수씨만 어려워서
나이도 동갑인데 말이라도 편하게 하면 좀 나을까 해서”
“많이 불편했어요? 제가 워낙 그런 거에 융통성이 없어서
그럼 말 놓을까?”
“그래 말 놓자 나이도 같고 친구하면 되잖아”
“그래 그러자 그럼”
말을 놓고 나니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가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택시를 타니 금방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많이 어색해했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그녀의 정수리 쪽을 몇 번 쓰다듬었다
“어???”
조금 당황한 듯한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부끄러워한다
그저 가볍게 스킨십을 했을 뿐인데 보이는 그녀의 반응이 더 이상했다
“어서 가자 가게 오픈 해야지”
“어…. 그래…..”
당황해서 우물쭈물 거리는 그녀를 잡아 끌어 가게로 향했다
함께 문을 열고 가게를 정리하면서 많이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그래도 이 시간이 지나면 또 어색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진 않았다
영화를 같이 본 후에도 우리 사이는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예전에 존댓말을 하던 것이 반말로 바뀌었다는 점과
그 전보다는 서로 많이 어색해하지 않는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반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패밀리들의 눈에는 아주 큰 변화였던 모양이다
특히 수희에게 맘이 있었던 석진이 녀석이 나를 더욱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못마땅했지만
그저 녀석의 자격지심이라 생각하고 따로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우리 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봄이 오려는지 겨울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비가 오는 거리를 가게 정문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는데
가게 앞에 택시가 한 대 섰다
그러더니 사람보다 먼저 커다란 붉은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다 첼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그녀는 한동안 가게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
방학도 끝나가는 기간이라 난 이미 지방으로 내려갔겠구나 포기하고 있었다
“딸랑 딸랑”
그녀가 들어왔을 때 난 문 앞에서 그녀의 가방을 먼저 받아주었다
“어? 희수씨 마중 나와 있었던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난지?”
“택시에서 내리는 거 정문 통해서 봤어요
어디서 한 잔 했어요?”
“네… 비도 오고 기분도 꿀꿀해서 친구들과 한잔 했어요
마시고 집에 오는데 희수씨 생각이 나서 차 돌렸죠 뭐”
“그러셨어요? 잘했어요
술은 마신 거 같으니까 따뜻한 차 한잔 하세요”
“아니예요 이왕 마신 거 한 잔 더 할려고요
희수씨가 만들어주는 스크류 드라이버 마실래요”
“괜찮겠어요? 이미 많이 마셨는데”
“괜찮아요 취하고 싶어요 오늘은”
그녀의 마지막 말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지만
딱히 대놓고 물어볼 만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매번 앉던 카운터 내 앞자리에 그녀는 첼로를 기대놓고 앉는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난 주방에서 칵테일을 만들었다
그녀에게 칵테일을 내려 주고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커다란 첼로 가방에 짐 가방까지 하나 들고 있는 그녀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취기는 꽤 올라 있었고
비도 살짝 맞아 머리와 얼굴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춥겠다 잠시만요”
여벌로 준비해 놓은 수건을 가져다가 그녀의 얼굴과 머리를 닦아 주었다
술 기운 때문에 힘이 든 지 내가 닦아주는데도 그녀는 얌전히 몸을 맡긴다
“희수씨 나 듣고 싶은 음악 있는데”
“그래요? 뭐?”
“나 올 때마다 들렸던 음악인데 슬픈 바이올린 소리가 나는”
“아 뭔지 알겠어요”
그녀가 말하는 건 뉴트롤스의 음악일 것이다
그녀가 비 오는 날 유독 많이 왔었고 비 오는 날 난 뉴트롤스의 음악을 많이 틀었다
대충 어림 짐작으로 뉴트롤스의 "Cadenza"를 들려주었다
“어~~ 맞아요 이거”
조금은 어두웠던 그녀의 얼굴이 음악 덕분에 조금 환히 밝아졌다
한동안 그녀는 말없이 음악에 집중했다
그녀의 기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나 역시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오늘 따라 무척 슬퍼 보이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뇨. 그냥 기분이 그러네요"
어렵게 꺼낸 내 말에 그녀는 짧은 한마디로 대답한다
그렇게 한동안 또 침묵이 계속되었다
빗소리와 어울리는 음악들을 계속 틀어주었더니 그녀가 드디어 입을 뗀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눈물이 나와요"
“무슨 일 이예요?”
“앞으로의 내 미래를 생각하면 너무 겁이 나는데
이틀 전에 남자친구랑도 헤어졌어요
난 남자친구 앞에서 솔직했는데 그런 모습이 부담된대요”
“많이 아파요?”
“그러네요 참기 힘들게”
"아픔이란 그런 거죠. 참아도 참아낼 수 없는 것"
힘들어 하는 그녀를 보니 나도 모르게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미래와 남친 과의 이별로 아파하는 그녀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위로가 되는 듯 했다
어느새 난 그런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사실 오늘 지방으로 내려가려고 집에서 나왔어요
도저히 이 기분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친구들과 한 잔 했는데
막상 갈 곳이 없는 거예요
그때 희수씨가 생각났어요”
“그럼 우리 못 볼 뻔 했네요 지희씨가 힘들지 않았으면”
“그러네요 근데 오길 잘 한 것 같아요”
늘 가게를 나가던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자리에 남아 있었다
결국 문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늦었는데 집에 안 들어가도 되요?"
"어차피 집에는 지방 내려간다고 나온 거라
집에 들어가면 오히려 더 이상해요
괜찮으면 희수씨 나랑 술이나 한잔 더 할래요? 그래 줄 수 있죠?"
간곡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늦어 대강 가게 정리를 마치고 문을 닫은 후
난 그녀의 첼로 가방을 들고 함께 다른 술집을 찾았다
어깨를 짓눌러오는 첼로 가방의 무게
그 가방을 대신 들고서야 난 그녀가 짊어진 고통의 무게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간이고 평일이라 술집들은 일찍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무거운 짐들을 들고 찾아 들어갈 술집이 마땅치 않았다
“저기 지희씨
오늘 어차피 갈 곳이 없다면 그냥 내 방에 가서 마실래요?
술 마시고 더 늦게 모텔을 찾을려면 그것도 마땅치 않고
지금 이 짐을 다 들고 다닐 수도 없고”
“그럼 저야 좋죠 안주거리 사 들고 가요 그럼”
오해의 소지도 있고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그녀는 흔쾌히 내 뒤를 따랐다
내 방까지 가는 중에도 어깨를 누르는 가방의 무게가 힘겹다
방에 들어서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녀가 침대에 털썩 앉는다
“괜찮아요?”
“네 조금 취해서 그래요 괜찮아요”
“괜찮으면 씻을래요? 옷은 가방에 있나?”
“네 갈아 입을 옷 있어요 씻어도 괜찮죠?”
“그럼요 내가 준비해 놓을 테니 씻고 나와요”
그녀는 가방을 뒤져 옷가지를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나오면 마실 술자리를 준비하자니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자꾸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아우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잠시 후 촉촉하게 젖은 모습으로 그녀가 나왔다
난 그냥 티셔츠에 츄리닝 차림의 그녀를 상상했는데
그녀는 조금 헐렁한 셔츠에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그녀의 뇌쇄적인 모습에 순간 아랫도리가 요동쳤다
“희수씨도 씻어야죠?
나머지는 내가 준비할께요”
“아니예요 다했어요
금방 나올 테니 앉아서 쉬고 계세요
목마르면 먼저 맥주 한 잔 하시던지”
집에서 입던 츄리닝을 들고 들어가려다가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고
서랍에서 있던 그나마 괜찮은 옷들을 꺼내 가지고 들어간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동안 내 분신이 점점 고개를 든다
낯선 여자와 한 방에 있는 것이 처음은 아닌데
그녀에게선 뭔가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내가 그녀를 접수한다기 보다 그녀가 날 유혹한다는 느낌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 입고 욕실에서 조용히 나왔다
“제가 들어다 드릴께요 택시까지”
“아니예요 괜찮아요”
한사코 말리는 그녀에게서 첼로가방을 빼앗아 가게 앞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녀를 먼저 태우고 앞자리에 첼로가방을 가지런히 챙겨 주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요”
“네 나중에 또 뵈요”
사라지는 택시를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 날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그녀의 흔들리는 가슴과 도드라진 꼭지가 눈에 아른거렸다
예술가의 향기가 나는 그녀는 지금껏 만나온 여자들과는 다른 부류라 그런지
내 성욕을 더욱 더 자극했다
=================================================================
‘혹시라도 안 오면 어쩌지?’
그런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신념대로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만날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만날 테니까
또 그렇게 하루가 흐른다
매일 매일 여는 가게 덕분에 난 좀처럼 휴일이라는 것이 없었다
한 달 내내 일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으니
사장님이 가금 패밀리를 동원해서 2주에 한번 꼴로 주말에 휴무를 준다
그렇게 간간히 돌아오는 휴무가 바로 오늘이다
간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보려고 어제 밤 캔맥주 몇 개를 마시고 잠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 꿈을 헤매고 있었는데
내 방에서 들리는 것 같지 않은 이상한 벨소리가 들렸다
‘뭐지? 이 소리는?’
마치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눈을 떠지지 않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이상한 벨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아~~ 진짜 뭐야?’
간신히 눈을 뜨고 소리 나는 곳을 둘러 보니
방 한 쪽 구석에 놓인 팩스기에서 들리는 소리다
“아이씨~~ 뭐야 시끄럽게”
팩스기가 고장 난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소리를 죽이기 위해 그 쪽으로 향했다
근데 고장 난 팩스기에서 나오는 소리치고는 귀에 익숙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옆에 달린 전화기를 들어보니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네 여보세요?”
“거기 혹시 희수씨 집 아닌가요?”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저 모르시겠어요?”
“네? 잘 모르겠는데요”
“에이 섭섭한데요? 저 수희예요 박수희”
‘박수희?’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내 방에 처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얼떨떨한 느낌에 곰곰히 생각하니 오전 알바 그녀다
“아~~~네 미안해요 처음 전화가 걸려온 거라 당황했어요”
“그래요? 내가 첫 전화예요? 우와~~”
“그러네요 첫 전화가 수희씨라니
근데 무슨 일로?”
“그냥 장부 보다가 번호가 있어서 걸어 봤어요”
“아….네 오늘 쉬는 날이라 좀 쉬고 있었어요
무신 일 있는 건 아니죠?”
“아니예요 ^^
근데 물어볼 것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혹시 내일 아침에 시간 괜찮으세요?”
“아침에 도서관 가는 거 말고는 별다른 일은 없는데요”
“그럼 제게 시간 좀 내주세요”
“시간요?”
“네 같이 영화 볼래요?”
갑자기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걸까?
알바가 끝나면 패밀리들을 데리고 저녁마다 만찬을 즐기는 여왕님이
이 미천한 저녁 알바생에게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시간은 괜찮은데 왜 저랑?”
“친해질 기회도 많지 않고
그 시간이 아니면 우리 둘 다 자유롭지 못하잖아요
조조영화보고 출근하면 딱 시간이 맞을 것 같아서”
“아 그렇네요 그럼 내일 봐요
어디로 가면 되요?”
“근처 XX극장 아시죠? 그 앞에서 8시에 봐요”
“네 그럼 내일 뵈요”
그녀와의 통화를 끝내고 잠시 머리를 굴렸다
‘형 수희 누나는 형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던데?
잘 한번 지켜봐’
희준이가 했던 말들이 생각나면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가 정말 날 맘에 두고 있는 걸까?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뭐 내일 나가서 얘기를 하다가 보면 알겠지
고민하지 말자
앞서 가지도 말고’
휴일 하루는 총알 같이 지나간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뒹굴 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내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일찌감치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혹시라도 늦게 될까 봐 맞추지 않던 알라까지 맞춰 두고
아니라고는 하지만 내 맘 속 한 편에 은근한 기대감 같은 것이 생겼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늦지 않게 준비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몸에 피트 되는 가죽 자켓과 그녀가 즐겨 입는 체크무늬 모직 치마
그녀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기다렸어요?”
“아니예요 금방 왔어요”
“영화 시간에 늦은 건 아니죠?”
“아니예요 예매해 놨으니 들어가요”
그녀는 미리 나와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여자 치고는 적극적이고 준비성이 철저한 것이 조금 맘에 들었다
그녀와의 영화관람은 딱히 특별할 것이 없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현대물
그냥 좀 특별한 직업의 주인공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 한다는 내용이 전부다
여자와 첫 데이트에 본 영화치고는 무미건조했지만
그래도 그녀와 단 둘이 새로운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영화 어땠어요?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그러네요”
“아니예요 재미 있었어요”
“근데 시간이 길어서 벌써 오픈 시간이네”
“우리 택시 타고 가요 내가 오픈 도와 줄께요”
택시를 잡고 뒷자리에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저기… 우리 그냥 말 편하게 하면 안 되요?
다른 사람들하고는 편하게 지내는데 유독 희수씨만 어려워서
나이도 동갑인데 말이라도 편하게 하면 좀 나을까 해서”
“많이 불편했어요? 제가 워낙 그런 거에 융통성이 없어서
그럼 말 놓을까?”
“그래 말 놓자 나이도 같고 친구하면 되잖아”
“그래 그러자 그럼”
말을 놓고 나니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가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택시를 타니 금방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많이 어색해했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그녀의 정수리 쪽을 몇 번 쓰다듬었다
“어???”
조금 당황한 듯한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부끄러워한다
그저 가볍게 스킨십을 했을 뿐인데 보이는 그녀의 반응이 더 이상했다
“어서 가자 가게 오픈 해야지”
“어…. 그래…..”
당황해서 우물쭈물 거리는 그녀를 잡아 끌어 가게로 향했다
함께 문을 열고 가게를 정리하면서 많이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그래도 이 시간이 지나면 또 어색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진 않았다
영화를 같이 본 후에도 우리 사이는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예전에 존댓말을 하던 것이 반말로 바뀌었다는 점과
그 전보다는 서로 많이 어색해하지 않는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반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패밀리들의 눈에는 아주 큰 변화였던 모양이다
특히 수희에게 맘이 있었던 석진이 녀석이 나를 더욱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못마땅했지만
그저 녀석의 자격지심이라 생각하고 따로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우리 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봄이 오려는지 겨울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비가 오는 거리를 가게 정문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는데
가게 앞에 택시가 한 대 섰다
그러더니 사람보다 먼저 커다란 붉은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다 첼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그녀는 한동안 가게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
방학도 끝나가는 기간이라 난 이미 지방으로 내려갔겠구나 포기하고 있었다
“딸랑 딸랑”
그녀가 들어왔을 때 난 문 앞에서 그녀의 가방을 먼저 받아주었다
“어? 희수씨 마중 나와 있었던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난지?”
“택시에서 내리는 거 정문 통해서 봤어요
어디서 한 잔 했어요?”
“네… 비도 오고 기분도 꿀꿀해서 친구들과 한잔 했어요
마시고 집에 오는데 희수씨 생각이 나서 차 돌렸죠 뭐”
“그러셨어요? 잘했어요
술은 마신 거 같으니까 따뜻한 차 한잔 하세요”
“아니예요 이왕 마신 거 한 잔 더 할려고요
희수씨가 만들어주는 스크류 드라이버 마실래요”
“괜찮겠어요? 이미 많이 마셨는데”
“괜찮아요 취하고 싶어요 오늘은”
그녀의 마지막 말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지만
딱히 대놓고 물어볼 만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매번 앉던 카운터 내 앞자리에 그녀는 첼로를 기대놓고 앉는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난 주방에서 칵테일을 만들었다
그녀에게 칵테일을 내려 주고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커다란 첼로 가방에 짐 가방까지 하나 들고 있는 그녀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 취기는 꽤 올라 있었고
비도 살짝 맞아 머리와 얼굴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춥겠다 잠시만요”
여벌로 준비해 놓은 수건을 가져다가 그녀의 얼굴과 머리를 닦아 주었다
술 기운 때문에 힘이 든 지 내가 닦아주는데도 그녀는 얌전히 몸을 맡긴다
“희수씨 나 듣고 싶은 음악 있는데”
“그래요? 뭐?”
“나 올 때마다 들렸던 음악인데 슬픈 바이올린 소리가 나는”
“아 뭔지 알겠어요”
그녀가 말하는 건 뉴트롤스의 음악일 것이다
그녀가 비 오는 날 유독 많이 왔었고 비 오는 날 난 뉴트롤스의 음악을 많이 틀었다
대충 어림 짐작으로 뉴트롤스의 "Cadenza"를 들려주었다
“어~~ 맞아요 이거”
조금은 어두웠던 그녀의 얼굴이 음악 덕분에 조금 환히 밝아졌다
한동안 그녀는 말없이 음악에 집중했다
그녀의 기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나 역시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오늘 따라 무척 슬퍼 보이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뇨. 그냥 기분이 그러네요"
어렵게 꺼낸 내 말에 그녀는 짧은 한마디로 대답한다
그렇게 한동안 또 침묵이 계속되었다
빗소리와 어울리는 음악들을 계속 틀어주었더니 그녀가 드디어 입을 뗀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눈물이 나와요"
“무슨 일 이예요?”
“앞으로의 내 미래를 생각하면 너무 겁이 나는데
이틀 전에 남자친구랑도 헤어졌어요
난 남자친구 앞에서 솔직했는데 그런 모습이 부담된대요”
“많이 아파요?”
“그러네요 참기 힘들게”
"아픔이란 그런 거죠. 참아도 참아낼 수 없는 것"
힘들어 하는 그녀를 보니 나도 모르게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미래와 남친 과의 이별로 아파하는 그녀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위로가 되는 듯 했다
어느새 난 그런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사실 오늘 지방으로 내려가려고 집에서 나왔어요
도저히 이 기분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친구들과 한 잔 했는데
막상 갈 곳이 없는 거예요
그때 희수씨가 생각났어요”
“그럼 우리 못 볼 뻔 했네요 지희씨가 힘들지 않았으면”
“그러네요 근데 오길 잘 한 것 같아요”
늘 가게를 나가던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자리에 남아 있었다
결국 문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늦었는데 집에 안 들어가도 되요?"
"어차피 집에는 지방 내려간다고 나온 거라
집에 들어가면 오히려 더 이상해요
괜찮으면 희수씨 나랑 술이나 한잔 더 할래요? 그래 줄 수 있죠?"
간곡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늦어 대강 가게 정리를 마치고 문을 닫은 후
난 그녀의 첼로 가방을 들고 함께 다른 술집을 찾았다
어깨를 짓눌러오는 첼로 가방의 무게
그 가방을 대신 들고서야 난 그녀가 짊어진 고통의 무게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간이고 평일이라 술집들은 일찍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무거운 짐들을 들고 찾아 들어갈 술집이 마땅치 않았다
“저기 지희씨
오늘 어차피 갈 곳이 없다면 그냥 내 방에 가서 마실래요?
술 마시고 더 늦게 모텔을 찾을려면 그것도 마땅치 않고
지금 이 짐을 다 들고 다닐 수도 없고”
“그럼 저야 좋죠 안주거리 사 들고 가요 그럼”
오해의 소지도 있고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그녀는 흔쾌히 내 뒤를 따랐다
내 방까지 가는 중에도 어깨를 누르는 가방의 무게가 힘겹다
방에 들어서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녀가 침대에 털썩 앉는다
“괜찮아요?”
“네 조금 취해서 그래요 괜찮아요”
“괜찮으면 씻을래요? 옷은 가방에 있나?”
“네 갈아 입을 옷 있어요 씻어도 괜찮죠?”
“그럼요 내가 준비해 놓을 테니 씻고 나와요”
그녀는 가방을 뒤져 옷가지를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나오면 마실 술자리를 준비하자니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자꾸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아우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잠시 후 촉촉하게 젖은 모습으로 그녀가 나왔다
난 그냥 티셔츠에 츄리닝 차림의 그녀를 상상했는데
그녀는 조금 헐렁한 셔츠에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그녀의 뇌쇄적인 모습에 순간 아랫도리가 요동쳤다
“희수씨도 씻어야죠?
나머지는 내가 준비할께요”
“아니예요 다했어요
금방 나올 테니 앉아서 쉬고 계세요
목마르면 먼저 맥주 한 잔 하시던지”
집에서 입던 츄리닝을 들고 들어가려다가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고
서랍에서 있던 그나마 괜찮은 옷들을 꺼내 가지고 들어간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동안 내 분신이 점점 고개를 든다
낯선 여자와 한 방에 있는 것이 처음은 아닌데
그녀에게선 뭔가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내가 그녀를 접수한다기 보다 그녀가 날 유혹한다는 느낌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 입고 욕실에서 조용히 나왔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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