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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8:36 685회 0건
#4. 만남.

첫눈에 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계속 눈길이 가던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처음 그 사람을 본 것은 2학년을 마치던 2학기의 종강총회에서였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그 사람이 나타났다.
학회장 오빠가 반갑게 그 사람을 반겼다. 그리고 모두에게 인사를 시켰다. 다소 우물쭈물하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은 김세화. 이제 갓 전역을 했고 내년부터 복학을 한다고 들었다. 내년이라, 난 한 해 휴학을 하고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던 참이었다. 휴학시기가 엇갈리지 않는다면 1년 정도는 학교를 같이 다니게 될 것이다.
김세화.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이름을 되뇌었다. 예쁜 이름이다. 여자인 내 이름보다 예쁘다. 두꺼운 잠바를 입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얼굴만 보면 호리호리한 몸매인 것 같다.. 키는 170 후반? 180 정도 일지도 모른다. 사실 난 170이 넘으면 다 커보여서 잘 모른다.
순해 보이는 큰 눈을 가졌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얼굴선이다. 웃으면 눈이 반달처럼 변한다. 머리카락은 전역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짧다. 좀 더 긴 머리가 어울릴 것 같다.
학교에서 여러 사람과 술자리를 하게 되면, 자리가 바뀌는 일은 아주 흔하다. 처음에 앉았던 자리가 어디인지도 나중에는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세화 오빠와 내가 어쩌다 옆에 앉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딱히 신기한 일은 아니다. 세화 오빠는 처음 보는 후배가 옆에 있으니 조금 어색한 것 같다.
“안녕하세요.”
초면의 어색함을 날려버릴 겸,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세화 오빠도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오빠 말 놓으세요. 저 후배예요.”
“아아, 그래?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서.”
“적어도 여기 있는 여자는 전부 오빠 후배일 걸요.”
“그렇겠지?”
세화 오빠는 그렇게 말하고 약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 너 이름이?”
“승희요. 김승희.”
오빠의 질문에 대답했다.
“넌 지금 2학년이야?”
“네. 이제 2학년 끝나요.”
“아, 그러면 내년에 3학년이네.”
“아, 저 휴학하려고요.”
“아, 그렇구나.”
세화 오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휴학하거나 군대를 가는구나. 내년에 같이 학교 다닐 사람이랑 좀 친해져 보려고 했는데.”
“저랑도 친해져요. 내후년에는 같이 학교 다닐 거 아녜요.”
“내후년은 내가 휴학할 걸?”
“아, 그래요? 오빠 안녕. 잘 가요.”
“그래, 안녕. 잘 가.”
내가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자 오빠도 함께 손을 흔들었다.
“안 가요?”
“아직 안 갈라구.”
졌다. 내가 먼저 웃음을 터드렸다. 별로 웃긴 것도 아닌데 웃었다. 이것이 세화 오빠와의 첫 만남이었다.
다음 해에 난 예정대로 휴학을 했다. 세화 오빠는 복학을 해서 학교를 다니는 모양이었다. 난 학교를 다니지 않는 동안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했다. 월화수목금요일을 학원에 나가서 애들을 가르쳤다. 나머지 시간에는 학원, 인터넷 강의를 이용해서 공부를 했다. 생각보다 힘이 들긴 했어도 꽤나 알차게 나날을 보냈다. 토요일 일요일은 휴일이니까 예의상 집에서 쉬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화를 받았다.
『야, 얼굴좀 비춰봐.』
학교 선배의 전화였다. 올해의 학회장을 맡은 오빠다. 학교 축제에서 우리 과가 여느 때처럼 주점을 열었으니 찾아오라는 얘기였다.
『와서 매상 좀 올려줘.』
“같은 과 후배한테 매상 올려달라니요. 사주셔야죠.”
『그건 신입생들한테나 통하는 말이고. 이제 니들이 신입생이던 시절은 끝났어. 넌 왕언니잖아. 왕언니.』
“저 신입생 할래요.”
『어쨌든 올 거지?』
“언젠데요?”
『다음주 화수목.』
“시간 내볼게요.”
『그래.』
짧은 통화가 끝났다. 벌써 학교 축제가 열리는 5월이란 사실에 놀랐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나 공부에 빠져서 집중을 하지 못했다. 하루이틀 정도는 쉬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학원에 전화해서 잠시 쉬기로 했다. 다음주 수요일과 목요일. 원장님이 흔쾌히 나에게 휴가를 주셨다. 중학생들이 시험기간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다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어느새 수요일이 되었다. 쉬는 날이라 거의 정오가 다되도록 자다가, 점심을 먹고, 계속 빈둥거렸다. 오후 4시 정도가 되어서야 슬슬 나갈 채비를 했다. 오랜만에 시간을 들여 꾸몄다. 아이라인도 정성들여 그리고, 컨실러도 사용했다. 그동안 집에만 있거나, 중딩들만 상대하느라 몇 개월간 기초화장만 하고 다녀서 어떻게 화장을 하는지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어찌저찌 화장을 마쳤다. 그리고 혜미에게 전화를 했다. 혼자서 가기는 뭐해서 같이 갈 동료로 내 동기이자 절친인 혜미를 부른 것이다. 혜미도 나처럼 올해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 삼매경이다. 아니 삼매경이었다. 얼마 전에 때려쳤다고 들었다.
“혜미야, 나 준비 다 됐어. 어디쯤이야?”
『한 3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아.』
“알았어. 시간 거의 딱 맞겠네. 그럼 조금 이따가 봐.”
『응.』
혜미와는 대학 동기로 만난 친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이 잘 통해서 지금까지도 매일 같이 연락하고 지낸다. 집이 좀 멀리 있어서 자주 보기 힘든 친구지만, 학교에 있을 땐 애인처럼 붙어다녔다. 사실, 둘 다 애인이 없어서 붙어 다닐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도 있지만. 아, 갑자기 슬퍼진다.
대충 준비가 끝났다. 나가기 전에 물건들을 확인했다. 백. 백 안에 핸드폰. 혹시나 모를 갖가지 물품들. 좋아, 다 챙겼다. 밖으로 나갔다. 역에서 만나기로 해서 역으로 향하는 버스에 탔다. 우리 집은 버스를 타면 역까지 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역앞에 도착해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희야!”
뒤를 돌아보니 혜미였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서로 손을 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우리 지난겨울에 한 번 보고 거의 3개월 만에 보는 거잖아.”
내가 말했다.
“근데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가 않아.”
“매일 밤낮으로 연락하니까 그렇지.”
“그러네. 애인이 없으니까 연락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우리 둘이 애인하자.”
“그래!”
이렇게 나와 혜미는 사귀기로 했다.
……. 믿는 사람은 없겠지?
혜미와 역 앞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탔다. 매일 같이 연락을 주고받는데도 할 말이 많았다. 잠깐 떠들다보니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정류장에서 내려서 천천히 걸었다.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곳저곳에서 그들만의 주점을 열어 장사를 하고 있다. 주점이라고 해봤자 천막을 펼치고 거기에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을 놔뒀을 뿐이지만. 그래도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 싫지 않다.
“끄아아악!”
너무 시끄러울 때는 싫다. 갑작스런 비명에 깜짝 놀랐다. 나도 혜미도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누가 낸 소리인지는 못 찾았다.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많다. 얼마 걷지 않아 우리 학과의 주점으로 생각되는 곳이 보였다. 몇몇 아는 얼굴이 보인다.
“어, 혜미야 승희야! 오랜만이다!”
학회장 오빠가 우리 둘에게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한다. 서글서글한 인상. 전부터 느꼈지만 정말 사람 좋은 오빠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에요.”
나와 혜미도 오빠에게 인사를 했다.
“둘 다 잘 지냈어?”
“네.”
“잘 왔어. 재미있게 놀다가. 나는 지금 잠깐 가볼 데가 있어서 갔다 올게. 이따 봐!”
그렇게 말하고 학회장 오빠는 분주한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많이 바쁜 것 같다.
“우린 뭐할까?”
“뭐하긴 술 먹어야지.”
내 말에 즉답하는 혜미.
“너 그동안 술이 너무 고팠구나.”
“응.”
혜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혜미는 우리 과 주점에 자리를 잡았다. 6시를 조금 넘긴 시간. 우리는 음주를 시작했다.
학교 행사, 거기다 우리 과의 행사이다 보니 아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과 선배, 동기, 후배, 다른 과 선배, 동기, 후배, 그리고 교수님. 이따금 아는 얼굴과 마주치면 인사를 하면서 혜미와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 말하면 혜미가 하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어주었다.
“진짜, 화가 안 나고 배기냐고!”
굳이 언성을 낮추지 않는 혜미. 그러나, 어차피 주변이 다 시끄러워서 그다지 티도 나지 않는다. 혜미는 휴학하는 동안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거기 있는 매니저가 유독 혜미를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혜미는 그동안 대체 매니저가 자신에게 왜 횡포를 부리는지 몰랐다.
몰랐다, 과거형인 이유는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건형이 알지.”
혜미가 말했다. 낯익은 이름이었는데 누군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아, 기억났다. 유건형. 성을 안 붙이고 이름만 말하니까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니 전 남자 친구였던 건형이?”
남자 친구란 말에 혜미가 인상을 찌뿌렸다.
“그렇게도 부르지.”
혜미가 푸념을 시작했다. 유건형이라는 22살, 우리와 동갑인 청년은 혜미의 전 남자 친구다.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사귀었는지는 아주 긴 이야기라서 생략하겠다. 중요한 건 어떻게 헤어졌냐인데, 남자 쪽에서 바람을 피우다가 걸려서 헤어졌다. 바람을 피운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 혜미는 미련 없이 남자를 냉큼 차버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는데, 남자가 열심히 매달렸다. 집에 찾아오고, 계속 연락하고, 하여간 진상이라는 진상은 다부렸다. 거기에 얽힌 걸작스토리가 또 많지만 그것도 생략하겠다. 어쨌든 중요한 건 전 남자 친구와 혜미는 아주 좋지 않은 일로 헤어졌다.
그게 작년의 일이었고, 그렇게 조금씩 그 전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나와 혜미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방금도 이름 기억하는데 꽤나 걸린 걸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리고 여기서 신기한 우연이 발생하는데, 그 전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웠던 다른 여자와 혜미가 같은 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혜미가 일하던 옷가게의 매니저가 바로 그 여자다.
“못생긴 게!”
그 매니저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 남자 친구가 혜미랑 사귀던 중 바람을 피운 게 아니고, 매니저와 남자가 사귀다가 혜미가 나타났다고. 남자 쪽에서 어떤 화술을 부린 건지, 또는 매니저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 여자한테 제대로 얘기해봤어?”
“하려고 했지!”
“근데 들을 생각을 안 해! 아, 진짜 일 관둬버릴까?”
혜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혜미는 술이 그다지 센 편이 아니라 소주를 잘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따라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아니, 딱히 소주를 마시고 싶다는 건 아니야.
“그냥 관두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그러면 진짜 내가 무슨 잘못해서 도망치는 것 같잖아.”
혜미가 말했다. 혜미는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아무래도 이대로 일을 관두면 정말 떳떳하지 못해서 일을 관두는 것처럼 여겨질까봐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다.
혜미의 푸념을 들으며 계속 술을 마셨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세화 오빠다. 몇 개월만에 보는 얼굴인데 바로 알아봤다.
“오빠, 안녕하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세화 오빠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세화 오빠가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겨우 날 알아봤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 승희구나!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네.”
“미안, 내가 어두워서 잘 못 알아봤어.”
어두워서는 무슨, 오랜만에 봤는데 바로 알아보는 게 신기한 거지. 세화 오빠와 내가 처음 만나고 나서 몇 개월이나 지나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쩐지 조금 심통이 났다. 나는 진작에 알아봤는데.
“오빠는 학교 잘 다니셨어요?”
“어, 그냥 잘 다녔지.”
뭔가 맥이 빠지는 반응이다. 그러다 세화 오빠와 혜미의 눈이 어색하게 마주쳤다.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인지 어색했다. 선후배 관계인 것도 모르겠지.
“혜미야 인사드려 세화 오빠야. XX학번이셔. 오빠 얘는 혜미라고 해요. 저랑 동기예요.”
“아, 안녕.”
“네, 안녕하세요.”
세화 오빠와 혜미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서로 숫기가 없는 성격이다 보니, 어색하다.
“야, 뭐하냐 얼른 와!”
그때 누군가 세화 오빠를 불렀다. 세화 오빠의 동기인가보다. 나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알았어 갈게!”
세화 오빠가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가 불러서 난 갈게. 둘이 재밌게 잘 놀다가. 내가 차린 주점은 아니지만.”
세화 오빠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멀어졌다. 멀어졌다고 해봤자 바로 옆옆 테이블이었지만. 나는 오빠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혜미를 쳐다보앗다.
“세화 오빠라고? 어떻게 알게 됐어?”
혜미가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작년에 종강총회에서 봤어. 전역하고 얼마 안 돼서 애들 얼굴도 익히고 인사하려고 왔었거든.”
“그래? 잘생겼다.”
“너, 남자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두 달이면 오래 됐지. 벌써 다 잊혀질 만큼.”
혜미가 세화 오빠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실은 내가 저 오빠 어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혜미가 선수를 쳐버렸다. 뒤늦게 나도 관심이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나 다음 학기부터 복학할까.”
혜미가 말했다.
“1년 한다더니, 남자 때문에 한 학기만에 복학해?”
“아니, 그냥 기껏 휴학했는데 공부도 안 하고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아서.”
계집애, 속이 뻔히 보이는데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도 같이 복학해서 같이 학교 다니자.”
“왜 나는 끌어들여.”
“너 없이 학교 다니면 심심하잖아.”
혜미가 나를 꼬시기 시작했다. 일단은 튕겼지만, 사실 나도 혜미의 제안이 끌렸다. 딱히 어떤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휴학한 것이 아니라, 막연히 이대로 학교를 다니기엔 막막한 기분이 들어 휴학을 한 것이다. 한 학기쯤 쉬고 나니 다시 학교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럴까?”
“그러자!”
혜미의 말에 나는 살짝 튕겼다. 그러나 속으로는 마음이 거의 넘어간 상태다. 혜미 이 계집애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진짜로 복학을 해버릴까. 1년 휴학은 너무 기니까. 다음학기 다니고 내년 2학기 때쯤 휴학을 또 하는 거야.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졸지에 나와 혜미는 다음 학기 계획을 짜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고, 곧 다시 술과 함께 혜미의 전 남친 뒷다마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지나다 보니 우리 둘만의 술자리에 인원이 늘었다. 하나 둘 친한 사람끼리 합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친한 사람의 친한 사람, 그 친한 사람의 또 다른 친한 사람이 붙어 테이블이 붙었다. 테이블을 붙여서 거의 10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 술을 마셨다. 슬슬 둘만 놀기 심심해질 때라 우리도 냉큼 합석을 했다.
그리고 그 대인원의 술자리에는 세화 오빠도 껴 있었다. 그리고 혜미는 우연인 척하면서 세화 오빠의 옆에 앉아 세화 오빠와 친분을 다지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 나라면 아마 저렇게 못 했을 거다. 혜미의 실행력이 부러웠다. 나라면 그냥 얼굴 알고 마주치면 인사나 하는 게 다였을 거다.
그리고 이 만남을 계기로 혜미와 세화 오빠, 그리고 나 셋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이따금 셋이 만나서 놀기도 했다. 혜미의 경우는 둘만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혜미가 조금씩 오빠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친해지고 싶은 오빠였지만, 갈수록 혜미는 세화 오빠에게 목을 매기 시작했다.
세화 오빠는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았다. 대체로 혜미가 먼저, 또는 혜미에게 명령을 받은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먼저 연락은 거의 하지 않는 주제에 또 답장은 잘해주었다. 또 지칠만 하면 먼저 연락을 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하면 얼마 안 있어 세화 오빠와 혜미는 곧 사귈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빠는 막 전역한 혈기왕성한 솔로 남성이고, 혜미는 그런 오빠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귀여운 후배였으니까.
혜미와 술을 먹는 날이 늘어났다. 세화 오빠는 혜미와 적어도 이주일에 한 번씩은 만났다. 영화도 같이 보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내가 생각한 예비역 오빠의 모습이랑은 아주 달랐다. 보통은 어리고 싱싱한 후배들에게 헉헉대는 꼴불견의 모습을 많이 봐왔거든. 세화 오빠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세화 오빠는 일절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답장은 잘해주면서도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말 그대로 좋은 후배라는 생각을 가지고 혜미와 연락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가지고 노는 걸까?
그러나 그것을 직접 물어볼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먼저 고백을 해볼까?”
혜미가 말했다.
“선고백은 니 인생에 없다면서.”
“그렇지만…….”
내 말에 혜미가 울상을 지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나와 혜미는 복학을 했다. 그리고 중간고사가 끝난 10월 말에도 혜미와 세화 오빠는 사귀지 않았다. 그렇게 2학기의 막바지를 달리는 11월 말. 점점 추워지는 날씨. 기말고사 기간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학교 근처의 술집에서 나와 혜미는 술자리를 가졌다.
최근의 혜미는 계속 저기압상태다. 그런 주제에 세화 오빠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빠졌나보다.
“남자끼리 만나도 이쯤 되면 사귀겠다!”
혜미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주변의 시선이 향하는 것을 보고 혜미에게 부탁했다. 혜미가 혼자 소주를 따라 혼자 마셨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사람이 얼마 없는 게 다행이다. 아니, 사람이 많았으면 시끄러워서 묻혔을지도. 어쨌든 혜미가 진정했으면 좋겠다.
“오빠는 나 안 좋아하나?”
혜미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소주를 혼자 따라 혼자 마셨다.
“에이, 계속 그렇게 연락하고 지냈는데 그럴 리가 없지.”
혜미의 말에 내가 바로 대답했다. 울적한 혜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다. 사실은 나도 약간 의심이 간다. 혜미와 세화 오빠는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고, 데이트도 자주 하고 있다.
혹시나 어장관리가 아닐까 싶어 세화 오빠의 주변을 캐본 적이 있는데,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다면 뭘까. 고백할 용기가 없는 걸까. 아니면 연애경험이 없어서 그런 걸까. 외모도 괜찮고, 성격도 괜찮고, 성실하고, 친절하기까지 한 오빠가 연애경험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용기가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런 결론이 아니면 곤란하다.
“오빠가 용기가 없어서 고백을 못하고 있는 걸 거야. 조금만 기다려봐.”
“진짜 울고 싶다.”
혜미가 다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술이 그다지 세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마셔대니 얼굴을 새빨갛고, 눈을 풀렸다. 혜미의 고개가 점점 내려간다.
“혜미야. 혜미야! 혜미야?”
혜미를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잠들어 버린 거야? 하여간 쉴 틈 없이 술을 마셔대니까 그렇지. 곤란해졌다. 술 취해 뻗어버린 혜미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내 힘으로는 혜미를 업고서 자취방까지 갈 자신이 없다.
이때에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핸드폰으로 세화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음이 가더니 세화 오빠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승희야 무슨 일이야?』
“여보세요. 오빠, 혜미가 취해서 술집에서 잠들었어요.”
『…….』
잠시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거기 어디야?』
세화 오빠의 말에 술집의 이름을 말했다.
『나 학교 도서관이니까 금방 갈게.』
“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화 오빠가 술집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숨도 살짝 거칠다. 뛰어 왔나보다. 세화 오빠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빠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혜미의 옆에 앉았다.
“혜미야. 괜찮아? 술 많이 마셨어?”
세화 오빠가 혜미의 어깨를 살짝 흔들며 말을 걸었다. 오빠가 흔드는 대로 혜미의 몸과 고개가 힘없이 흔들린다. 정말 거의 정신을 잃었나보다.
“혜미 자취방이 근처지? 안내해줘.”
오빠가 혜미의 팔을 어깨에 두르며 말했다.
“잠시만요. 오빠 잠깐 앉아봐요.”
“응?”
“잠시만요.”
나는 세화 오빠를 일단 앉혔다.
“왜?”
“잠깐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일단 저랑 잠깐 술 좀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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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직업이 아닌 이상에서야...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환경과 시간을 확보하기란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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