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50부
나는 누군가의 뒤를 쫓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펄럭이는 것을 보니 여자인 것 같기는 한데 얼굴을 보지 못하니 누군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꼭 그녀의 얼굴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을 빨리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 엄마였다! 다시 걸음을 계속하는데 그 앞은 절벽이었다. 엄마는 망설임 없이 절벽에서 뛰어 내렸다.
“엄마, 안 돼!”
소리치며 나는 몸을 날렸고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처음으로 엄마를 따라잡은 것이다. 그리고 함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
“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었다. 바로 엄마의 잠자리를 보니 이불이 걷어진 채 엄마는 없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나는 급히 방문을 열었다. 깜깜한 한밤중, 마루에도 마당에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변소깐에 인기척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그래, 와 ...... ?”
“갑자기 배가 아파서 ...... ”
나는 비로소 큰 숨을 내쉬었다.
잠자리에 들 때 나는 아랫목에 엄마의 요 이불을 펴고 내 자리를 멀찌감치 윗목에 차렸다.
그전까지 엄마 옆에서 잤던 영미 누나는 오늘 엄마와 대면하지도 않고 이부자리도 건너방에 펴놓고 있었다.
엄마의 마음이 좀 풀어진 것 같기도 하지만 엄마를 혼자 놔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안방에서 잠을 자면서 지은 죄가 많아 그런 악몽을 꾸게 된 모양이다.
엄마는 다시 잠든 것 같은데 나는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엄마를 그토록 괴롭혀 왔다는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보다 아버지 역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와 달리 아버지는 대가 약한 남자야. 닥쳐온 불행을 스스로 견디어 내지 못하고 자기도 깨닫지 못한 채 남에게, 그것도 가장 만만하고 약한 엄마에게 미루려고 했기 때문이야.
남자라면, 진정한 남자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 나는 그런 경우가 있어도 아버지를 닮지는 않을꺼야.
아버지의 행동이 반면교사(反面敎師)처럼 나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어무이, 학교 다녀 오겠심더.”
나는 선생들 앞에서 하듯 똑바로 서서 인사하고 학교로 향했다. 어제 일을 계기로 앞으로는 엄마에게도 존댓말을 쓰기로 작정했다. 우리집 아들 딸 중에 엄마에게 존댓말을 쓰기는 내가 처음이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는 없었다. 영자 누나에게 물으니 밭에 나간 모양이라고 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가을, 아들 딸에게 버림받은 환갑을 지난 여인이 자기 밭에서 농약을 먹고 자살한 일이 있었다.
신경과민이야. ...... 나는 스스로를 꾸짖으며 밭으로 갔다.
“니가 웬 일이고?”
“어무이 도와 드릴라꼬요.”
여름으로 접어들며 고구마 밭에는 고구마 줄기보다 많은 잡초가 덮여 있었다. 엄마가 호미로 김을 매는 동안 나는 낫으로 긴 풀들을 베었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까지 엄마와 나는 밭에서 땀을 흘렸다.
저녁 밥상에는 영미 누나도 함께였다. 저도 굶고 살 수는 없는 모양이다. 밥을 먹는 동안 나는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존댓말을 하는 나를 영미 누나가 아니꼬운 듯 흘기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는 밭에 나가 있었다. 나는 삽과 곡괭이까지 들고 밭으로 갔다. 비가 오면서 망가진 밭둑도 손보고 고랑의 흙을 거두어 많이 패인 자리들을 북돋아 주었다.
둘이 힘들여 하니 잡초도 꽤 많이 줄어 밭모양이 마치 갓 이발한 남자의 머리마냥 산뜻해 보였다. 서쪽 산으로 해가 슬슬 모습을 감추어 가는 석양이 아름다웠다.
나란히 그 석양을 바라보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의 손은 맞잡은 채였다.
그 다음날은 엄마가 집에 있었다.
마당에서 열무를 다듬고 씻어 소금에 절이더니 다시 마루에 앉아 밭에서 따온 완두콩을 깠다, 그때는 나도 영자 누나와 함께 엄마를 도왔다.
그 일이 끝나자 엄마는 그 자리에 다리미 방석을 폈다. 영미 누나가 벗어제낀 교복을 비롯해 몇벌의 옷이 반반해 졌다.
지금껏 나는 엄마의 그런 일들을 지나쳤었다. 엄마니까 당연히 해야지 라는 정도로 생각해 왔다. 그 한없이 고되고 끝없이 이어지는 일들을.
한편 금촌리 전체를 어수선하게 했던 달비장사 사건은 이장까지 나서서 중재를 하며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초기에 달비장사 남편 중 몇 명은 이장을 찾아가 여인들의 추문을 알리고 ‘조리돌림’이라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리돌림이란 우리나라뿐 아니라 덜 개화된 나라에서 아직도 시행되고 있다는데 마을의 규범을 어긴 자들에게 행하는 집단적 형벌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간통한 여인은 옷을 벗기고 등에는 맷돌을 지고 앞에는 북을 달아 죄를 지은 여인이 스스로 북을 치며 온 마을을 돌면서 온갖 수모를 겪게 하는 것이다.
이같은 형벌은 마을 원로들이 결정하고 어떤 마을에서는 조리돌림을 하게 되면 농악대까지 앞세우고 여인은 죄상을 적은 팻말을 붙인 채 마을을 몇 바퀴씩 돌게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금촌리에서는 이제껏 한번도 조리돌림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7명이나 되는 달비장사를 모두 발가벗겨 마을을 돌게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풍경이었다. 또 금촌리에도 풍물패는 있었지만 북이 7개까지는 없었다.
고심 끝에 이장이 생각해 낸 것은 치욕스럽기는 했지만 또 하나 조상의 지혜였다.
이장은 우선 7명의 달비장사와 그 남편들을 모두 이장집에 모이게 했다. 우리집과 또 한집은 남편이 외지로 나간 까닭에 7명의 여인과 5명의 남자가 모였다.
관아에 끌려간 죄인이나 증인들의 호출과 달리 이장집에는 술상이 차려 있었다.
“여러분 모두 이번 일로 인해 속도 상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부부싸움도 하고, ......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심더. 하지만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방도가 있심더. 여러분 모두 ‘호수만복’(湖水滿腹)에 빠져 보입시다.”
모였던 아무도 이장의 마지막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장도 이미 그러리라 알고 있었는지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공은 온 백성에게 혹독하고 참담한 시련이었다.
몽고군은 7차례나 한반도를 쳐들어 왔고 조정은 40년동안 강화도에 피신해 있었으며 몽고군은 90년이나 고려를 지배했다.
왕이 항복과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환궁해보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부녀자들의 피해가 컸다.
왕을 비롯해 무사나 군졸들도 모두 도망을 치고 아무 보호막이 없는 부녀자들은 양반 쌍놈을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몽고군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래서 임신도 하고 아이를 낳기도 했다.
부녀자의 태반이 몽고군에게 당했으니 그녀들을 부정하다고 처벌하거나 내쫓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 호수만복이었다.
일정한 지역의 개울이나 연못에서 몸을 씻으면 강간당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고 왕이 칙령을 내린 것이다.
이장의 호수만복은 약간 변형된 것이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술 한잔을 따르고 사죄의 뜻으로 큰 절을 올린다. 그리고 남편이 그 술을 마심으로써 여인들의 과오는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장의 지시에 따라 달비장사 여인들은 술을 따르고 큰절을 했다. 남편이 없는 엄마와 또 한 여인은 이장과 종실 어른에게 술잔을 올렸다.
어찌 보면 좀 우스꽝스러운 의식이지만 남편들은 다 그 술잔을 비웠다. 그래서 이 문제는 누구도 다시 따지지 않기로 약속을 한 셈이었다.
임질소동을 빚은 당사자들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게 스스로 진화(鎭火) 되었다.
그 일은 마을 안에서 이웃 간의 간통으로 번진 일이었고 성병이라는 창피한 병이 개입된 것이므로 모두가 쉬쉬하면서 묻어 버린 것이다.
다만 문종일과 문근식이 큰 싸움을 벌인 것을 구경한 사람들은 꽤 있었다. 그러나 종일이 일방적으로 근식에게 얻어맞기만 한 것을 간통과 임질사건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달비장사나 임질사건을 빌미로 부부간에 이혼을 하거나 아내를 내쫓는 일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한동안은 매 맞는 여인의 비명이나 어느 집은 이혼하느니 누구는 쫓겨났느니 하는 소문도 나돌았고 아직도 속내로는 어떤 상처가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이장댁에서 야릇한 의식을 치룬 후 겉으로는 모두 수습이 된 듯 했다.
어쩌면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가난 탓일지도 모른다. 달비장사들은 일단 집에 남아있는 여인들보다는 더 고생을 하면서 돈을 벌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의 분위기와 비슷하게 우리집도 점차 치유되고 있었다.
다시 밭에 나간 엄마를 뒤따라가서 일을 도울 때 엄마가 밭둑에 앉아 나를 불렀다.
“영도야, 빵 좀 묵자.”
땀을 닦으며 다가가니 엄마는 셀로판 종이에 싼 빵과 우유팩을 들고 있었다.
“나는 배 안 고파요. 어무이 잡수이소.”
“오늘도 니 올 줄 할고 두 개씩 가왔다.”
솔직히 배도 고팠기에 빵과 우유는 꿀맛이었다.
“영도야!”
나직히 나를 부르는데 눈길도 유난히 그윽해 보였다.
“니 그리 안해도 된다.”
“뭐를요?”
“에미는 벌써 다 풀었다. 우리 아들 하는 짓 보이 새삼 사는 맛도 난다. 하지만 에미가 죄를 지은 긴데 니가 너무 그러이 외래 나는 부끄럽고 안쓰럽다.”
엄마의 눈에 습기가 차는 것 같더니 급히 나를 외면한다.
“아이라예. 제가 잘못했심더. 그라고 어무이가 그래 힘들고 슬프게 살아오신 줄도 몰랐고요. 내락도 이제부터 어무이 힘을 좀 덜어 들여야죠. 또 쪼매만 더 참으이소. 제가 돈 벌게 되마 그때는 어무이 놀고 묵어도 됩니더.”
그예 엄마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더니 웃음지으며 말했다.
“아들 하나락도 그래 말해주이 내 한이 벌써 절반은 줄어든 갑다. 하지만 에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식한테 뭘 바랬던 적은 없다. 그저 느그들 무사히 잘 커서 사람구실만 하마 내는 더 바랄 것이 없는기라.”
엄마는 나는 정말 용서했을까. 하지만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엄마가 뭐라고 하든 나는 더욱 엄마에게 잘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참, 오늘부터 잠도 건너방에서 자거라.”
나에게는 참 고마운 말이다. 사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엄마도 나와 단둘이 한방에 자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다.
내가 건너방으로 잠자리를 옮긴지 하루 만에 영미 누나는 안방으로 돌아갔다. 우리집도 달비장사 문제가 터지기 전의 원상태로 회귀한 셈이다.
영미 누나의 핑계는 이번에도 내 몸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따돌림 때문일 수도 있다.
영자 누나와는 정답게 대화하면서 영미 누나는 본척도 안했기 때문이다.
비록 며칠만이지만 영자 누나와 단둘이 있다는 것은 호젓하면서도 아늑했다.
나는 누나의 젖을 매만지고 조금 빨기도 했다. 누나는 그저 내가 하는 짓을 받아 주었다. 그러나 그 전처럼 내 팬티에 손을 넣지는 않았다.
나는 불쑥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났다. 엄마를 괴롭혔던 그날 누나는 건너방에서 문을 열어 놓은 채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누부야, 누부야 한테도 미안타. 내가 정말 못된 놈이제?”
오늘밤 처음으로 누나가 몸을 움직여 나를 안아주며 속삭였다.
“아이다! 니는 착한 아들, 좋은 아들이다!”
엄마와의 일로 중압감을 느껴 오던데서 해방됐다는 기분으로 내 발길은 재실로 향하고 있었다. 꼽추할매에게 월부금을 낼 때도 되었다.
그녀의 양옥집 현관문을 열자 거실의 소파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꺼?”
나의 인사에 상대의 답례는 특별했다.
“어 ...... ! 와 ...... ?”
단 두마디 뿐이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너무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남이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했으면 최소한 그쪽에서도 “무슨 일이냐?” 정도의 말은 있어야 할텐데 ‘어,와’가 뭔가.
“재실할매 좀 뵐라꼬 ...... ”
“네가, ...... 이름이 ...... ?”
“문영도.”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 광석씨 아들이구나!”
말하는 품새가 계속 아니꼬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니! 여기 광석씨 아들 영도라는 애가 찾아 왔어요.”
그녀의 방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 제법 공손한 투로 말한다. 그렇게 할 줄도 알면서 나한테는 건방을 떠니 더욱 아니꼽다.
“오, 영도 왔나?”
반가운 말씨지만 나와 청년을 번갈아 보며 얼굴도 살짝 붉어지고 어색한 표정이 된다.
하기야 그럴 것이다. 한쪽은 양자라지만 아들이라는 신분이고 또 한쪽은 아직 어려 보이지만 자신의 빠구리 상대니까 별스런 3자대면이다.
이 건방진 청년은 문재석, 바로 ‘쌉골집’ 병천의 손자고 꼽추할매 남편이었던 광호의 맏형인 진호의 아들이다.
그런데 얼마 전 정식으로 꼽추할매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입양잔치는 돼지까지 잡아 퍽 떠들썩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참,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더니 쌉골집 일가가 그렇다. 쌉골집은 풍산 홍씨네와 사돈을 맺기 전까지 금촌리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하나였다.
병천은 아들 넷, 딸 둘의 6남매를 두었는데 원래 땅뙈기도 별로 없어 야산도 개간하고 가족들이 어디 허드렛일이나 품을 팔아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셋째 아들 광호가 꼽추할매인 홍복순과 혼인하면서 논 20마지기와 밭 2천평을 떼어받았고 광호는 단번에 금촌리의 중농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꼽추와 사는 것이 싫었던지 집을 뛰쳐나갔고 3년쯤 후 원양어선을 탔다가 죽었다.
광호가 사라진 후에도 그의 농토는 형제들이 농사를 지었는데 경제적으로 넉넉한 꼽추할매는 소작료도 안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쌉골집 일가가 모두 가난에서 벗어났고 진호의 아들 재석은 그 집에서 광호와 꼽추할매의 양자로 일찍부터 점찍어 놓았었다.
재석이 금촌리에서는 드물게 서울의 별로 이름 없는 따라지 대학이라도 다니게 된 것도 다 그런 인연에서다. 나도 그런 내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내 앞에서 건방을 떠니 더 아니꼽게 보이는 것이다.
“영도야, 차 한잔 줄께.”
어색한 자리에서 일단 벗어나려는 듯 그녀는 자리를 떴다.
“그래, 느그 어무이가 그래 한다카더나?”
차 석잔을 놓고 둘러앉았는데 그녀가 눈을 꿈벅하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임기응변 솜씨에 놀라면서 나는 엉겁결에 “예.”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아들에게 말을 건다.
“재석아, 올라가는 길에 먼저 대구에 들려 외할아버님 뵙고 가그라.”
“아이, 나는 외할아버지가 괜히 무섭고 딱딱해서, ...... 그냥 바로 가면 안될까요?”
꼴에 서울말을 쓰고 건방을 떠는 것이 여전히 아니꼽다.
“그럴수록 자주 뵙고 정도 쌓아가야 하는 기라. 신체검사 하러 고향에 들렸다가 뵙고 싶어 왔습니다 하마 말하기도 좋잖나. 원래 통이 큰 분이라 니 용돈도 주실끼다.”
마지막 말에 재석의 눈이 반짝이는 것 같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머니.”
“내일 출발할끼가?”
“네, 아침 일찍, 어머니.”
“그라고 영도야, 그건 내일 니한데 전해줄게.”
그녀는 또 눈을 꿈벅하면서 뜬금없는 말을 했지만 의사는 통했다. 빠구리가 하루 연기된 것이다.
이튿날 비슷한 시각에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물론 재석은 없었다.
오늘은 차를 마신다든가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안방의 침대 앞에서 키스를 좀 오래 하고는 곧 각자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는 팬티만 남긴 채 침대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고 나는 완전히 알몸이 되어 그 옆에 몸을 뉘었다.
“어제는 미안했다. 헛걸음을 하게 해서 ...... ”
“아이라예. 그렇다고 아들 있는데서 할 수는 없잖아예.”
그녀는 조금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길이 내 가슴을 쓰다듬다 천천히 내려와서 두덩에 머물렀다.
“우리 영도도 이제 꽤 터레기가 많아졌네.”
그녀는 이제 벌떡 선 자지를 훑어 주면서 말했다.
“아, 언제 봐도 우째 이래 늠름하노! 참, 오늘은 나도 오랜만에 이걸 해볼끼다.”
자지를 덥석 물더니 혀를 살살 돌린다. 나는 엎드림 자세라 조금은 더 크게 보이는 그녀의 젖통을 두주먹으로 감쌌다가 젖꼭지를 비벼 주었다.
“아하!”
꽤 오래 자지를 빨아대던 그녀가 입을 떼면서 큰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내가 해볼끼다.”
그 말은 아까 자지를 입에 물 때도 했었는데 그녀는 내 앞에 두다리를 벌리며 깔고 앉았다.그리고 자지를 잡아 보지에 집어넣는다.
그녀와 어울릴 때면 가끔 느끼는 일이지만, 내가 할매라고 부르기는 하나 나보다 작은 체구에 약간 쳐젔으면서도 내 주먹만 한 작은 젖통, 그리고 살이 별로 붙지 않은 팔다리를 보면 나보다 훨씬 어린 여인을 상대하는 기분도 든다.
“아아!”
그녀가 눈을 사르르 감으며 신음을 낼 때 완전히 자지를 삼킨 보지 속살이 조금씩 옴찔거렸다. 이런 반응도 처음 그녀와 빠구리할 때와는 달랐다. 그 전에는 반응이 별로 없었다. 마흔살이 넘었는데도 자꾸 몸이 개발되고 적응하는가 하는 기분도 들었다.
“아이고, 너무 받친다!”
기마자세로 엉덩이질을 하던 그녀가 동작을 멈추었다. 나도 귀두 끝이 어떤 벽이나 맨살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체구가 작듯 그녀의 보지 속도 짧아서 그런 것 같다.
“참, 그전에 서울띠기가 가르쳐 준 게 있제.”
그녀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머리맡의 수건을 자지에 감고 집어넣었다.
엉덩이의 움직임이 빨라지며 숨소리가 가빠지더니 엎어지면서 내 몸을 덮어 왔다.
“하아, 너무 벅차다! 우째 이래 니 꺼만 들어오마 내 온몸을 뿌샤 뿌리노? 하아, 이제 내사 도저히 몬 움직이겠다.”
말을 그렇게 하는데도 보지 속살은 더욱 옴찔거린다.
어떻든 이제는 내 차례다. 그녀를 눕히고 자지를 밀어 넣었다. 서서히 박음질을 시작하자 그녀의 두다리가 내 허리를 휘감는다. 역시 왼쪽으로 몇 번, 오른쪽으로도 몇 번, 그리고 위로 치받치면서도 그녀의 보지를 찔러댔다.
“엄마야!”
그 소리는 오늘 다른 때보다 일찍 터졌다.
“엄마야! ...... 아이고! ...... 엄마야! ...... 아이고! ...... ”
그 소리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나는 자지를 뺐다. 처음 내가 서비스를 받은 것처럼 그녀에게도 해주고 싶었다.
공알에 혀를 대자 그녀는 잠시 몸을 떨었다. 보지는 이미 질퍽해서 밑으로 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녀와 처음 빠구리를 할 때는 밑이 너무 메말라 있어 올리브유를 바르고서야 자지를 넣을 수 있었는데 그 후에는 다시 그렇게 기름을 바르는 일은 없었다. 서로 익숙해진 것일까, 그녀의 몸이 스스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아하, 그만, ...... 그만!”
내 머리를 밀어내면서 그녀가 엎드렸다. 이런 식의 끝맺음이 그녀는 가장 좋은가 보다.
나도 그녀와 할 때면 이 체위가 익숙해 졌다.
풍만하다고 말하기는 어렵게, 어쩌면 아직 덜 자란 여자애처럼 그저 아담해 보이는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불룩 솟아난 곱사등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자세는 좀 가련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녀 역시 정열을 가진 뜨거운 몸이었다.
자지를 박아대고 속도가 빨라지자 늘 그랫듯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엄마야! ...... 아이고! ...... 엄마야! ...... 아이고! ...... ”
나는 그 자세로 사정했다. 사정이 끝나고 그녀가 눕자 또 부르르 하고 공기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오늘은 우째 더 이래 몸이 달아 오르노? 어제 바로 못하고 하루 뜸을 들이가 더 그런 갑다.”
뒤처리도 끝나고 잠시 숨을 고르며 나란히 누웠을 때 그녀가 몸을 옆으로 돌려 풀죽은 자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할매 말 잘 하데요. 내사 처음에 깜짝 놀랐지만 ...... ”
“히 히 ...... ”
그녀는 쑥스러운 듯 웃음을 웃고 나서 말했다.
“내도 처음 참 당황했다. 아들하고 ...... 양자라지만 아들하고 니하고 맞닥드리이 갑자기 어쩔 줄 모르겠더라. 니는 내 표정 어색한 것 몰랐나?”
“알았으이 그래 대답했죠. 그래도 아들 생기이 좀 든든하죠?”
나는 어제 재석의 건방진 태도가 영 아니꼬웠지만 그렇게 물었다.
“글세, ...... 내가 몸 아파 낳은 자식도 아이고 내가 키운 것도 아이라 아직도 내는 그저 덤덤하다. 정이라 카는 건 ...... ”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가 나를 끼어 안았다. 가는 그녀의 팔로 볼 때 무척 힘이 들어간 포옹이었다.
“아아, 영도 니가 내 진짜 아들이마 얼마나 좋겠노!”
불쑥 나온 말에 나도 좀 당황했다.
“그래가 아들캉 빠구리할라꼬요?”
그 말에 그녀 역시 당황한 것 같았다.
“그기사 안되지.”
잠시 대화가 끊어진 사이 그녀는 내 자지를 매만졌다. 풀죽었던 자지는 그녀의 조그만 손길이 닿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니는 내 아들이마 안되지. 그래, 내 서방이다! 둘째 서방, ...... 아아, 니를 만나마 와 이렇게 되는지, ...... 참말로 니가 내 아들이마 좋겠는데 이래 살을 섞었으이 ...... ”
마주 보는 그녀의 말투나 표정이 갑자기 복잡해 보여 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니캉 그라고 나서 나도 참 혼란스럽데이. 여자란 그저 일부종사 하면서 살다 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 니 몸이 들어오마 나는 미쳐 뿌는기라.”
“광호 할배는 잘 안해 줬어예?‘
아직 나는 그녀의 말들을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중에 불쑥 물었다.
“글쎄, ...... 같이 살 때는 잘하고 몬하고도 생각을 안해 봤다. 여자야 그저 남자가 품어주마 그런기다 하고 받아 들였제. 좋다 나쁘다도 없었다. 아니, 나쁠 것은 없었제. 서방이 올라오마 나도 가슴이 통통 튀었으이, ...... 그런데 한번은, 아까 니처럼, 그래 막 아래도 빨아주고 온몸을 더듬는데 내 몸이 갑자기 붕 뜨는기라. 그때 처음으로 막 소리도 질러 댔제. 내사 처음으로 그런 기분을 느낀기라. ...... 그런데 눈을 떴을 때 서방은 나를 버리고 떠나가 뿠다.”
비슷한 말을 나는 그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서울띠기와 어울렸을 때 두 여인이 술을 마시며 옛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꼽추할매는 남편과 이별의 사연을 털어놓더니, “못된 사람!” 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었다.
그녀는 지금도 마음이 아플지 모른다. 나는 그녀의 약간 처진 젖통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귓바퀴를 혀로 돌려 주었다.
“흐윽!”
그녀는 신음을 내며 나를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다시 내 입은 부끄러운 듯 털이 조금 나있는 겨드랑이를 덮었다.
“아하! ....... 아하! ...... ”
그녀는 몸을 조금씩 들썩이기도 한다. 보지도 다시 축축해 있었다.
“할매, 오늘은 한번 더 할까예?”
“어 ...... ?”
갑자기 잠에서 깬 사람처럼 외마디를 지르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아이다. 오늘 유난히 좋았다. 포식한 듯 몸도 가득 부르다. 그런데 더 하마 체하제.”
내가 불쑥 그런 말을 한 것은 갑자기 엄마가 떠오르며 그녀와 겹쳐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녀와 엄마는 닮은 곳이 하나도 없다. 얼굴도 체격도, 또 살아온 환경까지 ......
그런데도 그녀와 엄마가 겹쳐 보이는 것은 며칠 전 엄마에게서 들은 여자의 운명이라는 말이 떠올라서다.
나는 누군가의 뒤를 쫓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펄럭이는 것을 보니 여자인 것 같기는 한데 얼굴을 보지 못하니 누군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꼭 그녀의 얼굴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을 빨리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 엄마였다! 다시 걸음을 계속하는데 그 앞은 절벽이었다. 엄마는 망설임 없이 절벽에서 뛰어 내렸다.
“엄마, 안 돼!”
소리치며 나는 몸을 날렸고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처음으로 엄마를 따라잡은 것이다. 그리고 함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
“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었다. 바로 엄마의 잠자리를 보니 이불이 걷어진 채 엄마는 없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나는 급히 방문을 열었다. 깜깜한 한밤중, 마루에도 마당에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변소깐에 인기척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그래, 와 ...... ?”
“갑자기 배가 아파서 ...... ”
나는 비로소 큰 숨을 내쉬었다.
잠자리에 들 때 나는 아랫목에 엄마의 요 이불을 펴고 내 자리를 멀찌감치 윗목에 차렸다.
그전까지 엄마 옆에서 잤던 영미 누나는 오늘 엄마와 대면하지도 않고 이부자리도 건너방에 펴놓고 있었다.
엄마의 마음이 좀 풀어진 것 같기도 하지만 엄마를 혼자 놔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안방에서 잠을 자면서 지은 죄가 많아 그런 악몽을 꾸게 된 모양이다.
엄마는 다시 잠든 것 같은데 나는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엄마를 그토록 괴롭혀 왔다는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보다 아버지 역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와 달리 아버지는 대가 약한 남자야. 닥쳐온 불행을 스스로 견디어 내지 못하고 자기도 깨닫지 못한 채 남에게, 그것도 가장 만만하고 약한 엄마에게 미루려고 했기 때문이야.
남자라면, 진정한 남자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 나는 그런 경우가 있어도 아버지를 닮지는 않을꺼야.
아버지의 행동이 반면교사(反面敎師)처럼 나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어무이, 학교 다녀 오겠심더.”
나는 선생들 앞에서 하듯 똑바로 서서 인사하고 학교로 향했다. 어제 일을 계기로 앞으로는 엄마에게도 존댓말을 쓰기로 작정했다. 우리집 아들 딸 중에 엄마에게 존댓말을 쓰기는 내가 처음이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는 없었다. 영자 누나에게 물으니 밭에 나간 모양이라고 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가을, 아들 딸에게 버림받은 환갑을 지난 여인이 자기 밭에서 농약을 먹고 자살한 일이 있었다.
신경과민이야. ...... 나는 스스로를 꾸짖으며 밭으로 갔다.
“니가 웬 일이고?”
“어무이 도와 드릴라꼬요.”
여름으로 접어들며 고구마 밭에는 고구마 줄기보다 많은 잡초가 덮여 있었다. 엄마가 호미로 김을 매는 동안 나는 낫으로 긴 풀들을 베었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까지 엄마와 나는 밭에서 땀을 흘렸다.
저녁 밥상에는 영미 누나도 함께였다. 저도 굶고 살 수는 없는 모양이다. 밥을 먹는 동안 나는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존댓말을 하는 나를 영미 누나가 아니꼬운 듯 흘기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는 밭에 나가 있었다. 나는 삽과 곡괭이까지 들고 밭으로 갔다. 비가 오면서 망가진 밭둑도 손보고 고랑의 흙을 거두어 많이 패인 자리들을 북돋아 주었다.
둘이 힘들여 하니 잡초도 꽤 많이 줄어 밭모양이 마치 갓 이발한 남자의 머리마냥 산뜻해 보였다. 서쪽 산으로 해가 슬슬 모습을 감추어 가는 석양이 아름다웠다.
나란히 그 석양을 바라보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의 손은 맞잡은 채였다.
그 다음날은 엄마가 집에 있었다.
마당에서 열무를 다듬고 씻어 소금에 절이더니 다시 마루에 앉아 밭에서 따온 완두콩을 깠다, 그때는 나도 영자 누나와 함께 엄마를 도왔다.
그 일이 끝나자 엄마는 그 자리에 다리미 방석을 폈다. 영미 누나가 벗어제낀 교복을 비롯해 몇벌의 옷이 반반해 졌다.
지금껏 나는 엄마의 그런 일들을 지나쳤었다. 엄마니까 당연히 해야지 라는 정도로 생각해 왔다. 그 한없이 고되고 끝없이 이어지는 일들을.
한편 금촌리 전체를 어수선하게 했던 달비장사 사건은 이장까지 나서서 중재를 하며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초기에 달비장사 남편 중 몇 명은 이장을 찾아가 여인들의 추문을 알리고 ‘조리돌림’이라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리돌림이란 우리나라뿐 아니라 덜 개화된 나라에서 아직도 시행되고 있다는데 마을의 규범을 어긴 자들에게 행하는 집단적 형벌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간통한 여인은 옷을 벗기고 등에는 맷돌을 지고 앞에는 북을 달아 죄를 지은 여인이 스스로 북을 치며 온 마을을 돌면서 온갖 수모를 겪게 하는 것이다.
이같은 형벌은 마을 원로들이 결정하고 어떤 마을에서는 조리돌림을 하게 되면 농악대까지 앞세우고 여인은 죄상을 적은 팻말을 붙인 채 마을을 몇 바퀴씩 돌게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금촌리에서는 이제껏 한번도 조리돌림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7명이나 되는 달비장사를 모두 발가벗겨 마을을 돌게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풍경이었다. 또 금촌리에도 풍물패는 있었지만 북이 7개까지는 없었다.
고심 끝에 이장이 생각해 낸 것은 치욕스럽기는 했지만 또 하나 조상의 지혜였다.
이장은 우선 7명의 달비장사와 그 남편들을 모두 이장집에 모이게 했다. 우리집과 또 한집은 남편이 외지로 나간 까닭에 7명의 여인과 5명의 남자가 모였다.
관아에 끌려간 죄인이나 증인들의 호출과 달리 이장집에는 술상이 차려 있었다.
“여러분 모두 이번 일로 인해 속도 상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부부싸움도 하고, ......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심더. 하지만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방도가 있심더. 여러분 모두 ‘호수만복’(湖水滿腹)에 빠져 보입시다.”
모였던 아무도 이장의 마지막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장도 이미 그러리라 알고 있었는지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공은 온 백성에게 혹독하고 참담한 시련이었다.
몽고군은 7차례나 한반도를 쳐들어 왔고 조정은 40년동안 강화도에 피신해 있었으며 몽고군은 90년이나 고려를 지배했다.
왕이 항복과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환궁해보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부녀자들의 피해가 컸다.
왕을 비롯해 무사나 군졸들도 모두 도망을 치고 아무 보호막이 없는 부녀자들은 양반 쌍놈을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몽고군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래서 임신도 하고 아이를 낳기도 했다.
부녀자의 태반이 몽고군에게 당했으니 그녀들을 부정하다고 처벌하거나 내쫓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 호수만복이었다.
일정한 지역의 개울이나 연못에서 몸을 씻으면 강간당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고 왕이 칙령을 내린 것이다.
이장의 호수만복은 약간 변형된 것이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술 한잔을 따르고 사죄의 뜻으로 큰 절을 올린다. 그리고 남편이 그 술을 마심으로써 여인들의 과오는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장의 지시에 따라 달비장사 여인들은 술을 따르고 큰절을 했다. 남편이 없는 엄마와 또 한 여인은 이장과 종실 어른에게 술잔을 올렸다.
어찌 보면 좀 우스꽝스러운 의식이지만 남편들은 다 그 술잔을 비웠다. 그래서 이 문제는 누구도 다시 따지지 않기로 약속을 한 셈이었다.
임질소동을 빚은 당사자들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게 스스로 진화(鎭火) 되었다.
그 일은 마을 안에서 이웃 간의 간통으로 번진 일이었고 성병이라는 창피한 병이 개입된 것이므로 모두가 쉬쉬하면서 묻어 버린 것이다.
다만 문종일과 문근식이 큰 싸움을 벌인 것을 구경한 사람들은 꽤 있었다. 그러나 종일이 일방적으로 근식에게 얻어맞기만 한 것을 간통과 임질사건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달비장사나 임질사건을 빌미로 부부간에 이혼을 하거나 아내를 내쫓는 일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한동안은 매 맞는 여인의 비명이나 어느 집은 이혼하느니 누구는 쫓겨났느니 하는 소문도 나돌았고 아직도 속내로는 어떤 상처가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이장댁에서 야릇한 의식을 치룬 후 겉으로는 모두 수습이 된 듯 했다.
어쩌면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가난 탓일지도 모른다. 달비장사들은 일단 집에 남아있는 여인들보다는 더 고생을 하면서 돈을 벌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의 분위기와 비슷하게 우리집도 점차 치유되고 있었다.
다시 밭에 나간 엄마를 뒤따라가서 일을 도울 때 엄마가 밭둑에 앉아 나를 불렀다.
“영도야, 빵 좀 묵자.”
땀을 닦으며 다가가니 엄마는 셀로판 종이에 싼 빵과 우유팩을 들고 있었다.
“나는 배 안 고파요. 어무이 잡수이소.”
“오늘도 니 올 줄 할고 두 개씩 가왔다.”
솔직히 배도 고팠기에 빵과 우유는 꿀맛이었다.
“영도야!”
나직히 나를 부르는데 눈길도 유난히 그윽해 보였다.
“니 그리 안해도 된다.”
“뭐를요?”
“에미는 벌써 다 풀었다. 우리 아들 하는 짓 보이 새삼 사는 맛도 난다. 하지만 에미가 죄를 지은 긴데 니가 너무 그러이 외래 나는 부끄럽고 안쓰럽다.”
엄마의 눈에 습기가 차는 것 같더니 급히 나를 외면한다.
“아이라예. 제가 잘못했심더. 그라고 어무이가 그래 힘들고 슬프게 살아오신 줄도 몰랐고요. 내락도 이제부터 어무이 힘을 좀 덜어 들여야죠. 또 쪼매만 더 참으이소. 제가 돈 벌게 되마 그때는 어무이 놀고 묵어도 됩니더.”
그예 엄마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더니 웃음지으며 말했다.
“아들 하나락도 그래 말해주이 내 한이 벌써 절반은 줄어든 갑다. 하지만 에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식한테 뭘 바랬던 적은 없다. 그저 느그들 무사히 잘 커서 사람구실만 하마 내는 더 바랄 것이 없는기라.”
엄마는 나는 정말 용서했을까. 하지만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엄마가 뭐라고 하든 나는 더욱 엄마에게 잘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참, 오늘부터 잠도 건너방에서 자거라.”
나에게는 참 고마운 말이다. 사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엄마도 나와 단둘이 한방에 자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다.
내가 건너방으로 잠자리를 옮긴지 하루 만에 영미 누나는 안방으로 돌아갔다. 우리집도 달비장사 문제가 터지기 전의 원상태로 회귀한 셈이다.
영미 누나의 핑계는 이번에도 내 몸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따돌림 때문일 수도 있다.
영자 누나와는 정답게 대화하면서 영미 누나는 본척도 안했기 때문이다.
비록 며칠만이지만 영자 누나와 단둘이 있다는 것은 호젓하면서도 아늑했다.
나는 누나의 젖을 매만지고 조금 빨기도 했다. 누나는 그저 내가 하는 짓을 받아 주었다. 그러나 그 전처럼 내 팬티에 손을 넣지는 않았다.
나는 불쑥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났다. 엄마를 괴롭혔던 그날 누나는 건너방에서 문을 열어 놓은 채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누부야, 누부야 한테도 미안타. 내가 정말 못된 놈이제?”
오늘밤 처음으로 누나가 몸을 움직여 나를 안아주며 속삭였다.
“아이다! 니는 착한 아들, 좋은 아들이다!”
엄마와의 일로 중압감을 느껴 오던데서 해방됐다는 기분으로 내 발길은 재실로 향하고 있었다. 꼽추할매에게 월부금을 낼 때도 되었다.
그녀의 양옥집 현관문을 열자 거실의 소파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꺼?”
나의 인사에 상대의 답례는 특별했다.
“어 ...... ! 와 ...... ?”
단 두마디 뿐이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너무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남이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했으면 최소한 그쪽에서도 “무슨 일이냐?” 정도의 말은 있어야 할텐데 ‘어,와’가 뭔가.
“재실할매 좀 뵐라꼬 ...... ”
“네가, ...... 이름이 ...... ?”
“문영도.”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 광석씨 아들이구나!”
말하는 품새가 계속 아니꼬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니! 여기 광석씨 아들 영도라는 애가 찾아 왔어요.”
그녀의 방문 앞에서 노크를 하고 제법 공손한 투로 말한다. 그렇게 할 줄도 알면서 나한테는 건방을 떠니 더욱 아니꼽다.
“오, 영도 왔나?”
반가운 말씨지만 나와 청년을 번갈아 보며 얼굴도 살짝 붉어지고 어색한 표정이 된다.
하기야 그럴 것이다. 한쪽은 양자라지만 아들이라는 신분이고 또 한쪽은 아직 어려 보이지만 자신의 빠구리 상대니까 별스런 3자대면이다.
이 건방진 청년은 문재석, 바로 ‘쌉골집’ 병천의 손자고 꼽추할매 남편이었던 광호의 맏형인 진호의 아들이다.
그런데 얼마 전 정식으로 꼽추할매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입양잔치는 돼지까지 잡아 퍽 떠들썩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참,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더니 쌉골집 일가가 그렇다. 쌉골집은 풍산 홍씨네와 사돈을 맺기 전까지 금촌리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하나였다.
병천은 아들 넷, 딸 둘의 6남매를 두었는데 원래 땅뙈기도 별로 없어 야산도 개간하고 가족들이 어디 허드렛일이나 품을 팔아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셋째 아들 광호가 꼽추할매인 홍복순과 혼인하면서 논 20마지기와 밭 2천평을 떼어받았고 광호는 단번에 금촌리의 중농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꼽추와 사는 것이 싫었던지 집을 뛰쳐나갔고 3년쯤 후 원양어선을 탔다가 죽었다.
광호가 사라진 후에도 그의 농토는 형제들이 농사를 지었는데 경제적으로 넉넉한 꼽추할매는 소작료도 안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쌉골집 일가가 모두 가난에서 벗어났고 진호의 아들 재석은 그 집에서 광호와 꼽추할매의 양자로 일찍부터 점찍어 놓았었다.
재석이 금촌리에서는 드물게 서울의 별로 이름 없는 따라지 대학이라도 다니게 된 것도 다 그런 인연에서다. 나도 그런 내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내 앞에서 건방을 떠니 더 아니꼽게 보이는 것이다.
“영도야, 차 한잔 줄께.”
어색한 자리에서 일단 벗어나려는 듯 그녀는 자리를 떴다.
“그래, 느그 어무이가 그래 한다카더나?”
차 석잔을 놓고 둘러앉았는데 그녀가 눈을 꿈벅하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임기응변 솜씨에 놀라면서 나는 엉겁결에 “예.”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아들에게 말을 건다.
“재석아, 올라가는 길에 먼저 대구에 들려 외할아버님 뵙고 가그라.”
“아이, 나는 외할아버지가 괜히 무섭고 딱딱해서, ...... 그냥 바로 가면 안될까요?”
꼴에 서울말을 쓰고 건방을 떠는 것이 여전히 아니꼽다.
“그럴수록 자주 뵙고 정도 쌓아가야 하는 기라. 신체검사 하러 고향에 들렸다가 뵙고 싶어 왔습니다 하마 말하기도 좋잖나. 원래 통이 큰 분이라 니 용돈도 주실끼다.”
마지막 말에 재석의 눈이 반짝이는 것 같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머니.”
“내일 출발할끼가?”
“네, 아침 일찍, 어머니.”
“그라고 영도야, 그건 내일 니한데 전해줄게.”
그녀는 또 눈을 꿈벅하면서 뜬금없는 말을 했지만 의사는 통했다. 빠구리가 하루 연기된 것이다.
이튿날 비슷한 시각에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물론 재석은 없었다.
오늘은 차를 마신다든가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안방의 침대 앞에서 키스를 좀 오래 하고는 곧 각자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는 팬티만 남긴 채 침대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고 나는 완전히 알몸이 되어 그 옆에 몸을 뉘었다.
“어제는 미안했다. 헛걸음을 하게 해서 ...... ”
“아이라예. 그렇다고 아들 있는데서 할 수는 없잖아예.”
그녀는 조금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길이 내 가슴을 쓰다듬다 천천히 내려와서 두덩에 머물렀다.
“우리 영도도 이제 꽤 터레기가 많아졌네.”
그녀는 이제 벌떡 선 자지를 훑어 주면서 말했다.
“아, 언제 봐도 우째 이래 늠름하노! 참, 오늘은 나도 오랜만에 이걸 해볼끼다.”
자지를 덥석 물더니 혀를 살살 돌린다. 나는 엎드림 자세라 조금은 더 크게 보이는 그녀의 젖통을 두주먹으로 감쌌다가 젖꼭지를 비벼 주었다.
“아하!”
꽤 오래 자지를 빨아대던 그녀가 입을 떼면서 큰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내가 해볼끼다.”
그 말은 아까 자지를 입에 물 때도 했었는데 그녀는 내 앞에 두다리를 벌리며 깔고 앉았다.그리고 자지를 잡아 보지에 집어넣는다.
그녀와 어울릴 때면 가끔 느끼는 일이지만, 내가 할매라고 부르기는 하나 나보다 작은 체구에 약간 쳐젔으면서도 내 주먹만 한 작은 젖통, 그리고 살이 별로 붙지 않은 팔다리를 보면 나보다 훨씬 어린 여인을 상대하는 기분도 든다.
“아아!”
그녀가 눈을 사르르 감으며 신음을 낼 때 완전히 자지를 삼킨 보지 속살이 조금씩 옴찔거렸다. 이런 반응도 처음 그녀와 빠구리할 때와는 달랐다. 그 전에는 반응이 별로 없었다. 마흔살이 넘었는데도 자꾸 몸이 개발되고 적응하는가 하는 기분도 들었다.
“아이고, 너무 받친다!”
기마자세로 엉덩이질을 하던 그녀가 동작을 멈추었다. 나도 귀두 끝이 어떤 벽이나 맨살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체구가 작듯 그녀의 보지 속도 짧아서 그런 것 같다.
“참, 그전에 서울띠기가 가르쳐 준 게 있제.”
그녀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머리맡의 수건을 자지에 감고 집어넣었다.
엉덩이의 움직임이 빨라지며 숨소리가 가빠지더니 엎어지면서 내 몸을 덮어 왔다.
“하아, 너무 벅차다! 우째 이래 니 꺼만 들어오마 내 온몸을 뿌샤 뿌리노? 하아, 이제 내사 도저히 몬 움직이겠다.”
말을 그렇게 하는데도 보지 속살은 더욱 옴찔거린다.
어떻든 이제는 내 차례다. 그녀를 눕히고 자지를 밀어 넣었다. 서서히 박음질을 시작하자 그녀의 두다리가 내 허리를 휘감는다. 역시 왼쪽으로 몇 번, 오른쪽으로도 몇 번, 그리고 위로 치받치면서도 그녀의 보지를 찔러댔다.
“엄마야!”
그 소리는 오늘 다른 때보다 일찍 터졌다.
“엄마야! ...... 아이고! ...... 엄마야! ...... 아이고! ...... ”
그 소리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나는 자지를 뺐다. 처음 내가 서비스를 받은 것처럼 그녀에게도 해주고 싶었다.
공알에 혀를 대자 그녀는 잠시 몸을 떨었다. 보지는 이미 질퍽해서 밑으로 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녀와 처음 빠구리를 할 때는 밑이 너무 메말라 있어 올리브유를 바르고서야 자지를 넣을 수 있었는데 그 후에는 다시 그렇게 기름을 바르는 일은 없었다. 서로 익숙해진 것일까, 그녀의 몸이 스스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아하, 그만, ...... 그만!”
내 머리를 밀어내면서 그녀가 엎드렸다. 이런 식의 끝맺음이 그녀는 가장 좋은가 보다.
나도 그녀와 할 때면 이 체위가 익숙해 졌다.
풍만하다고 말하기는 어렵게, 어쩌면 아직 덜 자란 여자애처럼 그저 아담해 보이는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불룩 솟아난 곱사등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자세는 좀 가련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녀 역시 정열을 가진 뜨거운 몸이었다.
자지를 박아대고 속도가 빨라지자 늘 그랫듯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엄마야! ...... 아이고! ...... 엄마야! ...... 아이고! ...... ”
나는 그 자세로 사정했다. 사정이 끝나고 그녀가 눕자 또 부르르 하고 공기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오늘은 우째 더 이래 몸이 달아 오르노? 어제 바로 못하고 하루 뜸을 들이가 더 그런 갑다.”
뒤처리도 끝나고 잠시 숨을 고르며 나란히 누웠을 때 그녀가 몸을 옆으로 돌려 풀죽은 자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할매 말 잘 하데요. 내사 처음에 깜짝 놀랐지만 ...... ”
“히 히 ...... ”
그녀는 쑥스러운 듯 웃음을 웃고 나서 말했다.
“내도 처음 참 당황했다. 아들하고 ...... 양자라지만 아들하고 니하고 맞닥드리이 갑자기 어쩔 줄 모르겠더라. 니는 내 표정 어색한 것 몰랐나?”
“알았으이 그래 대답했죠. 그래도 아들 생기이 좀 든든하죠?”
나는 어제 재석의 건방진 태도가 영 아니꼬웠지만 그렇게 물었다.
“글세, ...... 내가 몸 아파 낳은 자식도 아이고 내가 키운 것도 아이라 아직도 내는 그저 덤덤하다. 정이라 카는 건 ...... ”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가 나를 끼어 안았다. 가는 그녀의 팔로 볼 때 무척 힘이 들어간 포옹이었다.
“아아, 영도 니가 내 진짜 아들이마 얼마나 좋겠노!”
불쑥 나온 말에 나도 좀 당황했다.
“그래가 아들캉 빠구리할라꼬요?”
그 말에 그녀 역시 당황한 것 같았다.
“그기사 안되지.”
잠시 대화가 끊어진 사이 그녀는 내 자지를 매만졌다. 풀죽었던 자지는 그녀의 조그만 손길이 닿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니는 내 아들이마 안되지. 그래, 내 서방이다! 둘째 서방, ...... 아아, 니를 만나마 와 이렇게 되는지, ...... 참말로 니가 내 아들이마 좋겠는데 이래 살을 섞었으이 ...... ”
마주 보는 그녀의 말투나 표정이 갑자기 복잡해 보여 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니캉 그라고 나서 나도 참 혼란스럽데이. 여자란 그저 일부종사 하면서 살다 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 니 몸이 들어오마 나는 미쳐 뿌는기라.”
“광호 할배는 잘 안해 줬어예?‘
아직 나는 그녀의 말들을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중에 불쑥 물었다.
“글쎄, ...... 같이 살 때는 잘하고 몬하고도 생각을 안해 봤다. 여자야 그저 남자가 품어주마 그런기다 하고 받아 들였제. 좋다 나쁘다도 없었다. 아니, 나쁠 것은 없었제. 서방이 올라오마 나도 가슴이 통통 튀었으이, ...... 그런데 한번은, 아까 니처럼, 그래 막 아래도 빨아주고 온몸을 더듬는데 내 몸이 갑자기 붕 뜨는기라. 그때 처음으로 막 소리도 질러 댔제. 내사 처음으로 그런 기분을 느낀기라. ...... 그런데 눈을 떴을 때 서방은 나를 버리고 떠나가 뿠다.”
비슷한 말을 나는 그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서울띠기와 어울렸을 때 두 여인이 술을 마시며 옛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꼽추할매는 남편과 이별의 사연을 털어놓더니, “못된 사람!” 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었다.
그녀는 지금도 마음이 아플지 모른다. 나는 그녀의 약간 처진 젖통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귓바퀴를 혀로 돌려 주었다.
“흐윽!”
그녀는 신음을 내며 나를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다시 내 입은 부끄러운 듯 털이 조금 나있는 겨드랑이를 덮었다.
“아하! ....... 아하! ...... ”
그녀는 몸을 조금씩 들썩이기도 한다. 보지도 다시 축축해 있었다.
“할매, 오늘은 한번 더 할까예?”
“어 ...... ?”
갑자기 잠에서 깬 사람처럼 외마디를 지르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아이다. 오늘 유난히 좋았다. 포식한 듯 몸도 가득 부르다. 그런데 더 하마 체하제.”
내가 불쑥 그런 말을 한 것은 갑자기 엄마가 떠오르며 그녀와 겹쳐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녀와 엄마는 닮은 곳이 하나도 없다. 얼굴도 체격도, 또 살아온 환경까지 ......
그런데도 그녀와 엄마가 겹쳐 보이는 것은 며칠 전 엄마에게서 들은 여자의 운명이라는 말이 떠올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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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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