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 - 다른능력 2
예전에 난 초능력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다른 능력이란, 허황되지 않은 것들,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가진 사람이 능력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면서 점점 다른 능력을 개발하는 식으로 진행됐었다. 예를 들면, 눈이 뛰어나게 좋아서 카드마술의 수수께끼를 아무런 장치없이 쉽게 알아내버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오감이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식이었다.
쓰다 만 그 소설에서 난 여러가지 능력을 주인공에게 부여했었는데, 기억이 나는 것은 투시라던가 간단한 수준의 염동력같은 것들이었다. 동물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좀 뜬금없었다. 수의사 선생님은 채근하면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없는지를 묻고 또 물었지만,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성림씨는 미용사 아가씨에게 물을 한 잔 부탁해서 마신 뒤 쇼파에 앉아 잠시 안정을 취한 후, 나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는 곧 비척거리면서 시간이 되어 강의를 가봐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났다.
나를 보고 부끄러운 빛을 보여서 난 성림씨가 어떤 것을 들었는지, 레나가 어떤 생각을 그녀에게 전했는지가 몹시 궁금했지만, 말똥말똥 나를 보는 레나의 눈빛에서 어떤 것도 읽을 수가 없어서 그저 답답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내게 부끄러운 눈길을 던진걸까?
특별한 경험이었지만, 수의사 선생님도 나도, 미용사 아가씨도 모두 이번 일에 대해서는 확실한 어떤 증좌가 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하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우선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인터넷이나 방송에 이름이 나와서 딱히 덕을 볼 사람이 없기도 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제가 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동의가 필요한데, 문화센터에서 강의까지 할 정도의 성림씨가 뭐가 아쉬워서, 자신의 상처를 밝히고 내 강아지와 의사소통하는 것을 떠들까하는 기본인식이 모두에게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레나를 데리고 돌아와서 내내 레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지만, 레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애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일텐데. 기적과 다름없는 것을 바랄 정도로 난 감상적이지는 못해서 이내 레나와의 소통을 단념하고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문득, 성림씨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떠올랐다. 자위를 할까 잠깐 생각했었지만,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레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잡종 발바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성림씨가 말한 정도의 문장을 구성해서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지능이 없을 터였다. 무엇이었을까. 성림씨가 말한 내용의 배후가 몹시 궁금했다.
고민을 거듭한 결과,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정황은 수의사 선생님과 미용사 아가씨, 그리고 성림씨가 서로의 공모하에 나를 속인 경우만이 남았다. 나머지는 모두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가 개입해야 한다. 무슨 너목들도 아니고.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이 들리는 설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되는 사회를 대했을 때 난 많이 당황했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왜라는 동기부분에 들어가자, 수의사 선생님은 물론이고, 생전 처음 보는 성림씨가 왜 날 그런 곤경에 빠뜨려야 하는 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이 되지 않아서, 단 하나의 현실적인 판단을 포기해야 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무정한 소시오패스들이 가끔씩 세상을 뒤집지만, 내가 면밀히 관찰한 수의사 선생님은 그런 타입의 사람이 아니다. 이런저런 무리한 가정들의 가능성을 다시 하나 하나 되집어가고 있었는데, 전화가 울렸고, 받았더니 수의사 선생님이었다.
"경민씨, 술을 한잔 했어요. 내가 믿는 과학과는 전혀 다른 현상을 목격하고나니까, 뭐랄까요. 좀 허무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네요. 같이 와서 한 잔 하지 않으실래요?"
"아니요. 전 그다지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실은 저도 지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까 일 때문에 심란해져 있었어요."
"아아, 퇴근 전에 성림씨가 와서 경민씨 전화를 알려달래서 알려줬습니다."
"네. 많이 드시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네."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의사인 그가 이런 식의 사고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술에 잔뜩 취한 수의사의 전화를 받고 나니 그의 심경이 일견 이해가 됐다. 의사로서 도저히 회생할 수 없어 안락사 판정을 내렸는데, 그 다음날 쯤 기적적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면, 기뻐할 수 만은 없을 것 같은 이치였다. 자괴감이 들 것이다. 다만, 선생님이 나처럼 동물과의 의사소통이 의사로서의 소양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빌었다. 오늘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선생님과의 통화를 끊고서, 뭘 좀 먹을까 해서 포도를 찾으러 냉장고로 가는데, 핸드폰이 울려서 받았더니, 몹시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성림씨였다.
"여보세요. 윤성림입니다. 아까 동물병원에서 뵀었죠."
"네. 무슨 일이신지..."
"잠시 봴 수 있을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일이 있으시면, 괜찮으신 시간을 알려주시겠어요?"
"아니요. 저도 궁금한 일도 많고 해서요. 지금 어디시죠?"
"둔산동이에요.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어요."
"전 집이 월평동이거든요. 성림씨 집 근처에 까페 같은 곳이 있나요. 제가 움직일게요. 자전거가 있어서, 금방 갈 수 있어요."
"아뇨. 집이 어디 쯤이세요. 실은 저도 집이 월평동이에요. 리더스 빌이요."
"어. 같은 건물이네요. 한 번도 못 봬서 전 같은 건물에 산다고 생각을 못했어요. 전 202호에요."
"아, 전 출입구가 달라서 그런가 본데요. 전 708호에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거의 도착했거든요."
택시를 탔는지, 아저씨 얼마에요라고 묻는 성림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고, 대강이라도 집을 치운 후, 성림씨를 기다렸는데, 한 30분쯤이 지나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었더니. 수면바지에 트레이닝 재킷을 챙겨입은 성림씨가 약간 젖은 머리로 문앞에 서 있었다.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성림씨가 이내 자기 자리를 찾았다는 듯 식탁의 의자에 가서 앉았고, 난 전기포트의 스위치를 올리고서는 성림씨에게 무슨 차를 마실 건지를 물었다.
"뭐가 있는데요?"
"웬만한 건 다 있을 걸요."
"그럼 홍차도 있나요?"
"다즐링이랑 얼그레이가 있어요."
"다즐링으로 주세요."
그녀는 남자 혼자서 사는 곳에 처음 온 것인지 방의 이곳저곳을 살폈는데, 레나가 내내 내 다리께를 따라다니다가 내가 파리바게뜨에서 산 더블소프트 생크림식빵을 하나 던져주자 신이나서 뜯어먹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설핏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아. 좀 어려운 부탁을 드리려 했는데, 지금 보니 무리일 것 같네요."
"부탁이라면... 혹시 레나의 입양을 생각하신 건가요?"
"어떻게.. 네... 아무리 생각해도 인연 같아서요."
"입양은 곤란할 것 같고, 건물도 같으니까요. 자주 보러 오세요. 저도 급한 일이 있거나 하면 레나를 부탁드릴게요. 그런데요. 아까의 상황을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는 것, 레나가 닭고기 육포를 좋아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요. 저도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감정이랑 생각같은 것이 전해져왔어요. 구체적인 단어나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냥 생각이 전해졌달까요. 영상같은 것도 목소리 같은 것도 아니고 언어로 표현하기는 좀 어렵네요."
"여기요. 아직 뜨거우니까 조금 기다렸다 드세요. 레나야."
식빵을 뜯어먹던 레나가 내가 부르자마자 뛰어와서 성림씨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내게 뛰어 올라서 품에 안겼다. 난 레나의 지금 생각을 물어보기로 했다.
"레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물어봐도 되나요?"
"음.. 차가 맛있어요. 레나가 지금... 아..."
또 아까 전의 그 얼굴이었다. 몹시 부끄러워 하는 얼굴. 홍당무가 된 성림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전에도 그런 표정을 하셔서 무슨 일인지 엄청 궁금했었는데, 레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에요."
"말하기 곤란한 거면,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네. 죄송해요."
딱 잘라 거절하는 성림씨의 태도에 더 궁금해졌지만,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성림씨는 집안이 깨끗한 것과 강아지를 키우는데도 냄새가 나지 않는 것에 놀랐는데, 난 자주 씻기고, 레나가 대소변을 가릴 줄 알아 그렇다는 말을 조금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레나의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보니 레나를 입양시키는 계기가 된 예전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이런 저런 말을 나누다 보니 밤이 됐고, 저녁 때가 지나버렸다. 생전 처음 대하는 사람이었지만, 성림씨는 어느 정도 편한 사람이었고, 말투가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꽤나 훌륭한 대화상대여서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지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배가 고파져서 괜찮으면 저녁을 먹고가길 권했는데, 성림씨는 그것은 아닌 것 같다면서, 각자의 집에서 밥을 먹고 난 후, 근처의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 잔 하는 것은 어떠냐는 것이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 성림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마 했다. 시간 약속을 잡은 후 적당히 밥을 챙겨 먹고 만나기로한 빌라의 후문 출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성림씨가 옷을 챙겨입고 내려왔다. 아까 입었던 옷에 패딩을 입은 모습이어서, 깔끔한 차림이었던 점심때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어 몹시 편하게 느껴졌다.
성림씨는 술이 약한 지, 자신은 500이면 땡이라는 말을 했고, 난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음료수를 주문했다. 성림씨는 그러면 자신도 콜라를 시키겠다 했고, 우리는 훈제치킨에 콜라 두병을 시켜서 술집에서 음료수를 마시면서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성림씨는 자신이 오래도록 키웠던 덕희라는 강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대화가 진전되면서는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자신의 핸드폰으로 덕희의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덕희는 마르티즈였는데, 성림씨가 몹시 아꼈던 듯 늘 계절에 맞는 털 길이를 유지하고 있었고, 옷들도 종류가 많았다. 사진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성림씨는 이때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었다는 것을 모조리 말하고 있었고, 그런 성림씨를 보면서 나도 레나와의 추억을 이렇게 남겨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성림씨가 화장실을 다녀온다 했고, 난 성림씨가 화장실을 간 다음에도 한장씩 사진을 넘겨가며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난 충격적인 사진을 목격하고 말았다. 폴더정리를 하지 않고 그냥 두었는지 덕희의 사진들이 쭉 이어진 가운데에 한 장의 개인적인 사진이 끼어있었는데, 그 사진은 얼굴은 나오지 않고 다리를 벌린 채 찍은 누드였던 것이다. 딱히 성림씨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그런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웃겼다. 특이한 것은 깎은 것인지 원래 털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털이 하나도 없는 보지사진이었고, 난 그 사진에 정신이 빠져서 넘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던 난, 화장실에 다녀온 성림씨에게 내가 그 사진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예전에 난 초능력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다른 능력이란, 허황되지 않은 것들,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가진 사람이 능력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면서 점점 다른 능력을 개발하는 식으로 진행됐었다. 예를 들면, 눈이 뛰어나게 좋아서 카드마술의 수수께끼를 아무런 장치없이 쉽게 알아내버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오감이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식이었다.
쓰다 만 그 소설에서 난 여러가지 능력을 주인공에게 부여했었는데, 기억이 나는 것은 투시라던가 간단한 수준의 염동력같은 것들이었다. 동물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좀 뜬금없었다. 수의사 선생님은 채근하면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없는지를 묻고 또 물었지만,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성림씨는 미용사 아가씨에게 물을 한 잔 부탁해서 마신 뒤 쇼파에 앉아 잠시 안정을 취한 후, 나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는 곧 비척거리면서 시간이 되어 강의를 가봐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났다.
나를 보고 부끄러운 빛을 보여서 난 성림씨가 어떤 것을 들었는지, 레나가 어떤 생각을 그녀에게 전했는지가 몹시 궁금했지만, 말똥말똥 나를 보는 레나의 눈빛에서 어떤 것도 읽을 수가 없어서 그저 답답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내게 부끄러운 눈길을 던진걸까?
특별한 경험이었지만, 수의사 선생님도 나도, 미용사 아가씨도 모두 이번 일에 대해서는 확실한 어떤 증좌가 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하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우선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인터넷이나 방송에 이름이 나와서 딱히 덕을 볼 사람이 없기도 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제가 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동의가 필요한데, 문화센터에서 강의까지 할 정도의 성림씨가 뭐가 아쉬워서, 자신의 상처를 밝히고 내 강아지와 의사소통하는 것을 떠들까하는 기본인식이 모두에게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레나를 데리고 돌아와서 내내 레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지만, 레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애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일텐데. 기적과 다름없는 것을 바랄 정도로 난 감상적이지는 못해서 이내 레나와의 소통을 단념하고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문득, 성림씨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떠올랐다. 자위를 할까 잠깐 생각했었지만,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레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잡종 발바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성림씨가 말한 정도의 문장을 구성해서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지능이 없을 터였다. 무엇이었을까. 성림씨가 말한 내용의 배후가 몹시 궁금했다.
고민을 거듭한 결과,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정황은 수의사 선생님과 미용사 아가씨, 그리고 성림씨가 서로의 공모하에 나를 속인 경우만이 남았다. 나머지는 모두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가 개입해야 한다. 무슨 너목들도 아니고.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이 들리는 설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되는 사회를 대했을 때 난 많이 당황했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왜라는 동기부분에 들어가자, 수의사 선생님은 물론이고, 생전 처음 보는 성림씨가 왜 날 그런 곤경에 빠뜨려야 하는 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이 되지 않아서, 단 하나의 현실적인 판단을 포기해야 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무정한 소시오패스들이 가끔씩 세상을 뒤집지만, 내가 면밀히 관찰한 수의사 선생님은 그런 타입의 사람이 아니다. 이런저런 무리한 가정들의 가능성을 다시 하나 하나 되집어가고 있었는데, 전화가 울렸고, 받았더니 수의사 선생님이었다.
"경민씨, 술을 한잔 했어요. 내가 믿는 과학과는 전혀 다른 현상을 목격하고나니까, 뭐랄까요. 좀 허무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네요. 같이 와서 한 잔 하지 않으실래요?"
"아니요. 전 그다지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실은 저도 지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까 일 때문에 심란해져 있었어요."
"아아, 퇴근 전에 성림씨가 와서 경민씨 전화를 알려달래서 알려줬습니다."
"네. 많이 드시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네."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의사인 그가 이런 식의 사고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술에 잔뜩 취한 수의사의 전화를 받고 나니 그의 심경이 일견 이해가 됐다. 의사로서 도저히 회생할 수 없어 안락사 판정을 내렸는데, 그 다음날 쯤 기적적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면, 기뻐할 수 만은 없을 것 같은 이치였다. 자괴감이 들 것이다. 다만, 선생님이 나처럼 동물과의 의사소통이 의사로서의 소양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빌었다. 오늘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선생님과의 통화를 끊고서, 뭘 좀 먹을까 해서 포도를 찾으러 냉장고로 가는데, 핸드폰이 울려서 받았더니, 몹시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성림씨였다.
"여보세요. 윤성림입니다. 아까 동물병원에서 뵀었죠."
"네. 무슨 일이신지..."
"잠시 봴 수 있을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일이 있으시면, 괜찮으신 시간을 알려주시겠어요?"
"아니요. 저도 궁금한 일도 많고 해서요. 지금 어디시죠?"
"둔산동이에요.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어요."
"전 집이 월평동이거든요. 성림씨 집 근처에 까페 같은 곳이 있나요. 제가 움직일게요. 자전거가 있어서, 금방 갈 수 있어요."
"아뇨. 집이 어디 쯤이세요. 실은 저도 집이 월평동이에요. 리더스 빌이요."
"어. 같은 건물이네요. 한 번도 못 봬서 전 같은 건물에 산다고 생각을 못했어요. 전 202호에요."
"아, 전 출입구가 달라서 그런가 본데요. 전 708호에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거의 도착했거든요."
택시를 탔는지, 아저씨 얼마에요라고 묻는 성림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고, 대강이라도 집을 치운 후, 성림씨를 기다렸는데, 한 30분쯤이 지나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었더니. 수면바지에 트레이닝 재킷을 챙겨입은 성림씨가 약간 젖은 머리로 문앞에 서 있었다.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성림씨가 이내 자기 자리를 찾았다는 듯 식탁의 의자에 가서 앉았고, 난 전기포트의 스위치를 올리고서는 성림씨에게 무슨 차를 마실 건지를 물었다.
"뭐가 있는데요?"
"웬만한 건 다 있을 걸요."
"그럼 홍차도 있나요?"
"다즐링이랑 얼그레이가 있어요."
"다즐링으로 주세요."
그녀는 남자 혼자서 사는 곳에 처음 온 것인지 방의 이곳저곳을 살폈는데, 레나가 내내 내 다리께를 따라다니다가 내가 파리바게뜨에서 산 더블소프트 생크림식빵을 하나 던져주자 신이나서 뜯어먹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설핏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아. 좀 어려운 부탁을 드리려 했는데, 지금 보니 무리일 것 같네요."
"부탁이라면... 혹시 레나의 입양을 생각하신 건가요?"
"어떻게.. 네... 아무리 생각해도 인연 같아서요."
"입양은 곤란할 것 같고, 건물도 같으니까요. 자주 보러 오세요. 저도 급한 일이 있거나 하면 레나를 부탁드릴게요. 그런데요. 아까의 상황을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는 것, 레나가 닭고기 육포를 좋아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요. 저도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감정이랑 생각같은 것이 전해져왔어요. 구체적인 단어나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냥 생각이 전해졌달까요. 영상같은 것도 목소리 같은 것도 아니고 언어로 표현하기는 좀 어렵네요."
"여기요. 아직 뜨거우니까 조금 기다렸다 드세요. 레나야."
식빵을 뜯어먹던 레나가 내가 부르자마자 뛰어와서 성림씨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내게 뛰어 올라서 품에 안겼다. 난 레나의 지금 생각을 물어보기로 했다.
"레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물어봐도 되나요?"
"음.. 차가 맛있어요. 레나가 지금... 아..."
또 아까 전의 그 얼굴이었다. 몹시 부끄러워 하는 얼굴. 홍당무가 된 성림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전에도 그런 표정을 하셔서 무슨 일인지 엄청 궁금했었는데, 레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에요."
"말하기 곤란한 거면,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네. 죄송해요."
딱 잘라 거절하는 성림씨의 태도에 더 궁금해졌지만,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성림씨는 집안이 깨끗한 것과 강아지를 키우는데도 냄새가 나지 않는 것에 놀랐는데, 난 자주 씻기고, 레나가 대소변을 가릴 줄 알아 그렇다는 말을 조금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레나의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보니 레나를 입양시키는 계기가 된 예전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이런 저런 말을 나누다 보니 밤이 됐고, 저녁 때가 지나버렸다. 생전 처음 대하는 사람이었지만, 성림씨는 어느 정도 편한 사람이었고, 말투가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꽤나 훌륭한 대화상대여서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지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배가 고파져서 괜찮으면 저녁을 먹고가길 권했는데, 성림씨는 그것은 아닌 것 같다면서, 각자의 집에서 밥을 먹고 난 후, 근처의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 잔 하는 것은 어떠냐는 것이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 성림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마 했다. 시간 약속을 잡은 후 적당히 밥을 챙겨 먹고 만나기로한 빌라의 후문 출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성림씨가 옷을 챙겨입고 내려왔다. 아까 입었던 옷에 패딩을 입은 모습이어서, 깔끔한 차림이었던 점심때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어 몹시 편하게 느껴졌다.
성림씨는 술이 약한 지, 자신은 500이면 땡이라는 말을 했고, 난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음료수를 주문했다. 성림씨는 그러면 자신도 콜라를 시키겠다 했고, 우리는 훈제치킨에 콜라 두병을 시켜서 술집에서 음료수를 마시면서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성림씨는 자신이 오래도록 키웠던 덕희라는 강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대화가 진전되면서는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자신의 핸드폰으로 덕희의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덕희는 마르티즈였는데, 성림씨가 몹시 아꼈던 듯 늘 계절에 맞는 털 길이를 유지하고 있었고, 옷들도 종류가 많았다. 사진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성림씨는 이때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었다는 것을 모조리 말하고 있었고, 그런 성림씨를 보면서 나도 레나와의 추억을 이렇게 남겨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성림씨가 화장실을 다녀온다 했고, 난 성림씨가 화장실을 간 다음에도 한장씩 사진을 넘겨가며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난 충격적인 사진을 목격하고 말았다. 폴더정리를 하지 않고 그냥 두었는지 덕희의 사진들이 쭉 이어진 가운데에 한 장의 개인적인 사진이 끼어있었는데, 그 사진은 얼굴은 나오지 않고 다리를 벌린 채 찍은 누드였던 것이다. 딱히 성림씨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그런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웃겼다. 특이한 것은 깎은 것인지 원래 털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털이 하나도 없는 보지사진이었고, 난 그 사진에 정신이 빠져서 넘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던 난, 화장실에 다녀온 성림씨에게 내가 그 사진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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