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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8:25 473회 0건
포비아 - 공포증

성림씨에게 전화를 해볼까하는 생각에 뒤척이고 있었는데, 전화가 계속 울려 핸드폰을 봤더니, 역시나 지원이였다. 전화를 끊고, 수신거부번호로 등록했다. 문자 역시 스팸처리를 해버렸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 물을 계속해서 마셨더니 오줌이 마려워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열어놓은 창문에서 찬바람이 휙하고 불었다. 뒷목이 뻣뻣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직 고혈압에 시달릴 나이는 아닌데, 가족력으로 혈압이 높은 나는 평소에도 혈압문제에는 예민한 편이다.

깨고 나서 아침을 먹다가, 생각이 나서 정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어졌다고는 해도, 전화번호를 지웠다고 해도 헤어진 여자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녀석은 한참이나 전화를 받지 않다가 받자마자 내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야, 그 씨발 년이 누구랑 결혼하는 지 아냐?"
"아침부터 넌 왜 욕질이냐."
"됐어. 욕먹을 일을 하면 욕 먹어야지. 그 개년이 우리 후배새끼랑 결혼한단다. 너 김재환이라고 알지?"
"들었어. 그러지 않아도 그 이야기 하려고 전화했다. 그냥 모른 척 해라. 사람 사귀다가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씨발, 니가 무슨 부처님이냐. 넌 존심도 없냐. 그런다고 걔가 너 좋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닐까봐서?"
"그런 게 아니고, 나도 새 사람 만나 보려고 해서."
"그래? 누군데? 그런 사항이 있으면 이 형님한테 재깍재깍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니라서."
"이쁘냐?"
"지원이보다는 낫다."
"그래, 지원이 그 개년보다는 나아야지. 한 번 보자."
"물어보고."
"새끼, 사내 새끼가 여자한테 잡히기는. 됐어. 내일 저녁에 보는 거다. 술은 내가 산다."
"됐고, 알아보고 카톡 칠게. 지원이 문제는 그냥 덮는 거다. 알았지?"
"알았다. 오바. 씨발."

성림씨와 만난 지 이틀, 아무리 아들바보인 엄마라 하더라도 성림씨의 조건은 부모라면 누구라도 반대를 할만해서 성림씨와의 미래같은 것은 꿈꿀리 없어야 하는데, 내가 노력을 하더라도 이 여자와는 이어질 것 같은 예감 같은 것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그날 저녁이 되었을 때 더 확실하게 그 실체를 드러냈다.

퇴근을 하고 빌라에 도착하고, 주차를 하고 로비로 들어서려는데, 일층 편의점 안에서 성림씨가 나오더니 나를 불러세웠던 것이다. 성림씨는 핸드백을 어제의 종이가방처럼 꼭 끌어안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패딩차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장차림이었다.

"늦었네요."
"저 기다린 거예요? 전화를 하죠."
"일하고 있을 것 같아서요. 언제 끝나는 지 몰라서, 남자가 밖에서 일할 때 여자 전화받고 그러면 그렇잖아요. 내가 좀 기다리면 되는데요. 뭐."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삼십 분쯤 기다렸나봐요. 우리 어디 좀 가요."
"어디요?"
"경민씨 시골 집이요. 아, 전화부터 드려요. 저녁을 드시지 마시라고요. 저녁 대접을 하고 싶다고요."
"안 그래도 돼요."
"피곤해요? 좀 다녀오면 안 되나요?"

장화신은 고양이 눈을 해가지고 나를 올려다 보는 작은 체구의 성림씨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말았고, 성림씨는 핸드백을 목숨처럼 끌어안고는 벌써 내 차 옆에 서는 것이었다. 집에 전화를 걸어서, 어제의 성림씨가 밥을 사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는 부모님은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그러면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셔서 나도 좀 놀랬다.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내 생각엔 어제의 일은 부모님께도 각별한 기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엇다.

"괜찮으시대요?"
"맛있는 거 먹으면 좋지. 이러시는데요."
"다행이네요. 어서 가요."

차를 타고서도 성림씨의 가방 사랑은 여지없어서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다시 핸드백을 껴안는 것이었다. 정장차림일 때 따로 쓰는 명품브랜드인가 슬쩍 봤는데, mcm의 중저가 백이었다. 난 다시 한 번 농담을 던졌다.

"가방에 뭐라도 들었어요. 한 천만원쯤 들어있는 가방처럼 안고 있네요."
"네. 천만원이 들었어요."

키를 꽂고 시동을 걸려다가 난 성림씨가 가방에서 꺼낸 오만원 짜리 신권 묶음 2개를 보여줘서 봤는데, 진짜로 놀라고 말았다.

"천만원짜리 밥을 사려고요? 우리 집 근처에서 제일 비싼 식당에 가서 우리 네 명이서 죽어라고 이박 삼일을 먹어도 백만원치도 못 먹을 텐데요."
"우리 같은 북조선 여자들은요, 돈을 모으는 이유가 하나에요. 조국에 데려올 가족이 있어서죠. 내 아는 언니는 겨울이 되면 내내 우는 게 일이에요. 대전은 춥지 않잖아요. 보일러를 켜지 않아도 춥지가 않아서 미칠 것 같대요. 고향의 가족들은 굶고 주리고, 죽을 것 같이 추운데, 자기 혼자 너무 편하게 사는 것 같아서 죽을 것같이 괴롭대요. 나는 돈을 쓸 데가 없어요. 고향에 남겨둔 가족도 없고, 평생 혼자 살 거라서 남편을 위해서도 모을 일이 없거든요. 그런데요, 어제 밥을 먹고요. 돈을 쓰고 싶어졌어요."

마음이 이해됐지만, 그 진심이 이해가 됐지만, 과했다.

"과해요. 5만원짜리 200장은 안 반가우니까요. 오늘은 2장만 쓰는 걸로 해요."
"아니에요. 선물을 살까 했는데, 뭐가 필요한 것인지 잘 몰라서, 드리고 올래요."
"부담스러우실 거에요. 그럼 이렇게 해요. 한 방에 쓰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우니까, 그 돈으로 밥을 사요. 나 한 번, 우리 아버지 한 번, 성림씨 한 번 이렇게 사는 걸로 하고 밥을 먹어요. 내가 일주일에 한 번은 시골을 갈테니까요. 그 때마다 따라 붙어요. 그러는 걸로 해요. 갑자기 시골 양반들에게 밥 잘먹었다고 천만 원을 남기면 성림씨 대하시는 게 불편해질 거에요. 그러는 건 싫죠?"
"네."

성림씨는 돈 묶음에서 두 장을 빼서 자기 지갑에 넣은 뒤에 나무지 돈 뭉치를 내게 내밀었다.

"맡아 주세요."
"네?"
"난 간이 작아서, 이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땀이 나서리."
"그래요. 그러면 내가 맡아 둘게요."

난 돈뭉치를 받아서 그냥 잠바의 안주머니에 넣고는 시동을 걸고는, 유성 톨게이트를 향해 차를 몰았다. 성림씨는 내 얼굴을 보다가, 내 가슴 언저리를 보다가, 또 내 얼굴을 보고 그러더니, 곧 내게 존경한다는 인사를 전했다.

"경민씨, 원장님께 큰 사업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큰 사업은요. 작은 편의점을 하는데요."
"큰 사업이시지요. 직원도 여러 명 거느리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성림씨의 생각은 꽤나 독특했고, 자라온 세월이 전혀 다른 만큼, 생경한 서로의 일상이 재미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이 반갑게 나와 성림씨를 맞아주셨고, 곧 내 차에 올라서 가족의 외식이 있을 때 자주 가는 도성옥이라는 돼지갈비집으로 향했다.

대중을 상대로 강의를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성림씨는 스스럼없이 우리 부모님을 대했고,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자신이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도 편하게 대해 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전하면서, 북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성림씨의 마음은 북한에 대한 언급을 억지로 피하려는 부모님을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럴 때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이 꽤나 유용했다.

식당에 도착해서, 난 성림씨가 문화센터에서 강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했고, 엄마는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느냐를 물었다. 성림씨는 베이킹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것은 나도 몰랐던 일이었다. 교회의 성찬식에 쓰는 계란 카스테라 빵을 거의 삼십 년쯤을 구워오고 있는 엄마와는 곧 대화가 통했고, 함경도 은율이 고향인 할머니를 엄마로 둔 실향민의 아들인 아버지는 은율에 대해 궁금해 했는데, 청진이 고향인 그녀는 평생을 청진에만 살아서 은율은 가본 적이 없다는 말로 아버지를 좀 실망시켰다. 대신해서 여행증명서가 있어야 여행을 할 수 있다던지, 북한에서 유행하는 신혼살림 중 담배필터를 소독하고 세탁해서 그 필터로 만든 이불이 유행한다던지 하는 북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정보들을 알려줘서 식사의 자리는 흥미로웠다.

식사를 마친 후, 엄마는 밤 운전이 위험하다면서 집에서 자고 새벽에 출발하라는 말을 하셨고, 불편해 할 것 같았던 성림씨는 의외로 몹시 좋아하는 표정을 보여서 - 이 때에는 마음이 들리지 않아서 진심을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표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어서, 거짓말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제 성림씨가 샀던 호두과자와 커피로 후식을 먹으면서, 엄마는 내가 성림씨의 마음을 실제로 알 수 있는지를 물었고, 나는 언제나 되는 것은 아니고, 성림씨가 진심일 경우, 강렬한 열망이나 기억 같은 것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생각이 전해진다는 말을 했다.

"그럼, 오늘은 얼마나 성림이 마음을 안 거야?"
"오늘은 두번이요. 아까 김천 내려오기 전에 성림씨가 엄마 깻잎김치 값으로 천만원을 찾아 왔더라고요. 진짜로 주고 싶었나 봐요. 그런데, 내가 너무 과하다고 10만원만 쓰면 된다고 했더니, 서운해 하던 거랑, 밥 먹을 때 성림씨가 북한 사람인 게 걸려서 아버지랑 엄마가 북한 이야기를 일부러 피하니까 죄송스러워하면서 자기가 먼저 북한 이야기를 꺼낼 때 그 두 번이요."
"뭐, 천만 원?"
"네. 여기요."

나는 잠바 주머니에서 오만원 뭉치를 꺼내면서, 어제 성림씨가 느꼈던 마음을 성림씨가 된 것처럼 설명했고, 엄마는 그 마음에 감동하셨다. 그러면서, 엄마는 핸드 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오셨는데, 거기엔 삼십만 원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이럴 요량이셨던 것이다.

매우 훈훈한 시간이 지나갔다.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시집간 동생 방에서 성림씨가 자러 들어가자, 엄마는 나를 이끌고 내 방으로 갔고, 집에 오자마자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레나를 안고 내가 침대에 앉자 엄마는 다짜고짜 성림씨와 나를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저만하기도 어렵겠다."
"뭐가요?"
"애 하나 너무 쓸쓸한 것이 흠이다만, 저만하기도 어렵겠어. 야물겠더라. 아이가."
"그러지 마세요."
"너 말이야. 부부가 살면서 서로 마음을 확실히 아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니? 넌 저 아이 마음을 볼 수 있다며. 저 아이면 널 평생 떠받들며 살거야. 난 잘난 며느리 얻어서 니가 그 며느리 떠받들고 사는 거 못 본다. 엄마는 저 아이면 됐다."

인연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내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중국인 남편이 있었고, 성적으로 학대당한 기억이 있는 여자를 내가 아무렇지 않게 평생을 덮어가며 살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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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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