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말이 다 되어가니 회사가 정신 없이 바쁘다.
이제 올해의 마지막 달의 둘째 날이다.
년 말의 또 몇 일간 일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일하는 날로 이십 일도 남지 않았다.
현석의 부서는 지난달 말에 이미 매출목표를 달성했다.
그래서 미국출장도 순조로웠고 내년 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외출을 하려고 주차장 밖으로 차를 몰고 나오는데 휴대폰이 울려 주차장 입구에 잠깐 차를 세웠다.
"여보세요?"
"저.. 휴대폰...."
"아. 네 그렇잖아도 전화 기다렸습니다. 지난번에 연락 안 주셔서."
지난주에 만나기로 했었다가 그녀가 연락하지 않은 통에 출장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던 전화기의 주인이다.
목소리가 참 예쁘다.
그 때는 몰랐는데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 오는 목소리는 라디오 드라마에서 나오는 주연 여자의 목소리 같이 맑고 투명했다.
"네. 그 날 시간 도저히 안되어서요."
"아네. 그러셨군요."
"네.. 오늘 되돌려 받았으면 해서요."
현석은 주머니에 전화기가 있는지를 확인한 후에
"그래요? 오늘은 오후 네 시 이후면 다 가능해요."
"그러시면.... 어느 쪽이 좋으세요?"
"음. 난 회사 부근이 좋지만 나오시기가 힘드실 텐데... 그냥 편하게 나올 수 있는 곳을 말씀하세요."
"그럼.. 청담동에 있는..."
말을 무척이나 뜸 들인다.
현석은 약간의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청담동에 있는 무슨 극장 위에 있는 식당인데 다이닝 바라고 한단다.
식당이라 하면 될걸 무슨.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네 그러지요. 근데... 혹시 전화번호 알고 계세요? 못 찾으면 물어 봐야 하거든요."
여자는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수첩에다 메모를 했다.
그런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뭐라고 불러야 되죠?"
"아.. 네. 이름을 말씀 안 드렸네요.... 저는 이예리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퇴근은 몇 시 이세요?"
"여섯 시 인데요."
"그럼 제가 일곱 시쯤 갈께요."
"네 알겠습니다. 그 때 뵙죠."
왜 일곱 시쯤 나오라고 할까? 네 시 이후에는 다 가능하다고 했는데.
퇴근 시간을 약간 늦추며 시간을 확인하고는 청담동으로 차를 몰았다.
극장은 찾기 쉬웠고 주차를 한 후에 다이닝 바 전용 이라고 쓰여진 엘리베이터를 탓다.
엘리베이터는 한 층도 정지하지 않고 십여 층을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말자 바로 고전적 인테리어로 장식한 식당 안이었다.
프론트에서 이예리라는 손님을 찾는다고 하자 종업원이 앞장서면서 안내를 했다.
분위기는 현석에게 썩 어울리는 장소는 아닌 것 같다.
좀 뭔가 졸부의 자식들이나 드나 들만한 무척이나 비싸 보이는 그런 곳이다.
종업원을 따라 가며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대개가 다 젊은 층이다.
현석 또래 비슷한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를 않는다.
실내는 약간의 따뜻한 느낌이 들도록 온방이 되어 있었지만 조명이 낮아 조금만 떨어져 있는 사람은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손님 여깁니다."
종업원이 안내한 곳은 문은 없지만 별실처럼 꾸며진 작고 아담한 방이었다. 칸막이가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어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 안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하얀색 니트 티셔츠를 입고 있는데 가슴이 유난히 도드라져 있고 검고 긴 머리를 귓 뒤로 단정하게 넘기고 핀을 찔러 앞으로 넘어오지 않게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켜진 작은 촛불에 비친 얼굴이 앳되지만 청순하게 생긴 모습으로 비춰 주고 있었다.
"허! 미인인데.."
그 날도 미인인 줄은 알았지만 무척 아름다운 얼굴이다.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바지를 입은 것 같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아주 단정하고 점잔은 모습이다.
"응? 이 향은?"
들어서자 말자 느껴지는 향수냄새.
아침에 뿌린 향수인지 그 향은 아주 은은하게 맡아졌다.
종업원이 나가고 여자는 인사를 했다.
"이예리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김현석입니다."
"죄송해요 지난번에 연락을 못 드려서."
"별말씀을요. 일주일 동안이나 전화기 사용 못해서 불편 했겠네요."
"네. 조금."
"제가 출장 가는 통에.... 그런데 로리타 좋아하시는 모양이죠?"
"네?"
"로리타 렘피카요."
"아..... 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흘러갔다.
그리고는 두 사람 다 자리에 앉았고 여자는 말을 계속했다.
"처음이네요. 바로 아시는 분이..."
그래, 내 꿈속의 사랑 한지수가 쓰는 향수이다.
그러니까 알지.
그런것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매니아도 아닌데 여자들이 쓰는 향을 내가 어찌 알리.
"익숙한 향 이라서 요."
"사모님께서 쓰시는 모양이죠?"
"아뇨 "
"그럼 애인?"
여자가 웃음이 가득 담긴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석을 바라보았다.
애인?
애인이라면 윤가희가 있다.
교암리에서 만난 뒤에 지금까지도 자주 만나는 그 여인이 애인이다.
"내가 조금만 젊다면 이예리씨와 애인하고 싶은데요...."
현석은 웃었다. 여자도 따라 웃는다.
"호호호."
웃음 속에 천진 난만함이 묻어 나온다.
"..."
"참. 내 정신 좀 봐. 죄송합니다. 배 고프실 텐데 식사도 안시키고..."
여자는 테이블 한쪽에 있는 작은 버튼을 눌렀다.
여기는 자주 오는 곳인 양 익숙한 몸짓 이었다.
종업원이 오자 여기 정식이 괜찮은데 양식도 잘 먹느냐고 물어 보았다.
현석은 생선요리를 주문했고 여자가 같은 걸로 달라고 하면서 포도주 한 병을 시켰다.
그런데 가격표가 장난이 아니다.
이크 어떡하지 너무 비싼걸 시킨 건 아닌가.
주머니가 조금 걱정되었다.
여자가 식비를 지불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지만 젊은 아가씨와 데이트 하는 비용으로 조금 비싸게 먹혔다고 생각하자.
아니 많이 비싸게 먹혔다고 생각하자.
"학생이세요?"
"네.."
"몇 학년?"
"지금 4학년, 졸업반이에요."
"그럼 재수를 안 하셨으면 스물 셋인가요?"
"계산이 빠르시네요. 맞아요."
"숙녀의 나이를 확인하는 건 실례라는데 ...."
"아뇨 괜찮아요."
"나이보다 얼굴은 더 어려 보이는데 행동은 더 어른스럽고. 참 특이한 캐릭터인데요?"
"그래 보이세요?"
"네. 아 내 정신 좀 봐. 전화기를 돌려 드리는 게 오늘의 목적인데."
"급하지 않아도 되요. 어차피 식사는 하셔야 되잖아요."
"그러네요."
현석은 전화기를 안주머니에서 꺼내서 여자에게 밀었다.
여자는 전화기 폴더를 열고 전원을 켜 보았다.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이미 전원이 다한 전화기 이니 전화를 켜서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잠시 동안 켜 지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아저씨 목소리 정말 좋으시네요. 전화에서도 그렇게 느꼈지만."
"아저씨라. 하긴 아저씨가 맞지."
"죄송해요 아저씨라 불러서..."
"제가 이름 안 가르쳐 드렸죠?"
"네."
"김현석입니다."
"김현석씨. 그런데 어색하네요. 나이 많으신 분에게 그렇게 부르려니.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 되요?"
"그러세요. 요즘 대학생들 당돌하다고 하던데. 현석아 하고 안 부르면 다행이죠 뭐."
"어머. 농담도 잘 하시네요. 저는 안 그래요."
"캬. 농담 잘 한단 소리도 처음 듣네."
"정말이에요."
"난 참 재미없는 부류인데. 말이 재미 없어서."
"목소리도 좋고 농담도 잘 하시고."
"그래요? 얼굴안보면 이십 대라 할 것 같아요?"
"네."
"하하하. 오늘 내가 갑자기 젊어지네요. 예리씨 덕분에."
식사 보다 포도주가 먼저 도착했다.
서빙 직원이 흰색 수건으로 감은 포도주 병을 따고 여자의 잔에 조금 따라 준다. 여자는 그것을 홀짝 마시더니,
"음. 괜찮아요."
경험이 많은 표정이다.
행동에서도 경험이 많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병을 달라고 하더니 현석에게로 술병을 기울이며 밀었다.
한잔 따를 테니 받으라는 뜻이다.
여자에게서 술을 받아 본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잔을 들어 내밀었다.
여자는 약간은 노란 느낌이 나는 백포도주를 삼 분지 일정도 되도록 술을 따랐다.
그리고 병을 내려 놓고는 잔을 들어 올렸다.
따라 달라는 뜻이구나.
현석은 여자가 따른 양만큼을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웠다.
여자가 잔을 내밀었다.
건배? 나쁠 것 없다.
"쨍."
잔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다.
"전화기를 찾은 것을 기념하며..."
현석은 그렇게 말했다. 달리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저씨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그녀는 다른 말로 건배를 했다. 입술을 적신 포도주의 맛이 향긋한 향과 함께 몸으로 전해져 왔다.
식사를 하는 동안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역시 아직은 대학생인 고만고만한 여학생 수준인 것 같다.
친구들 이야기며 주변 이야기들을 미주알 고주알 했다.
그렇지만 입에 넣으면 비린내가 날것 같은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시계를 보니 제법 시간이 지났다.
"저만 너무 떠들었죠?"
현석이 시계를 보는 것을 보던 예리가 하는 말이다.
"아니. 아니. 정말 재미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난 대학 졸업하고 제법 된지라 벌써 잊어 먹고 있었는데. 예리씨 덕분에 재미 있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후훗. 재미 있었다니 다행이에요."
"자. 그럼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됫죠?"
"오늘 제 이야기 들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아저씨 목소리 너무 좋은데 나중에 전화해도 되나요?"
"전화요?."
"네."
"그러세요. 나도 예리씨 같이 젊은 사람 이야기 듣는 게 좋으네요."
"정말요?"
"그럼요. 얼마든지."
"저녁에 해도 되요?"
아마 아내와 있을 때 전화해도 되느냐는 질문 같다.
"그럼요. 저녁에 해도 되요."
어차피 저녁에도 혼자 있는 몸이다.
거기다가 바로 며칠 전에 아내의 결별의 편지를 읽었지 않은가.
참 나도 한심하다. 아내의 결별의 편지를 읽은 지가 며칠이나 되었다고....
아내를 놓아주자는 결심을 한지가 몇 시간이나 흘렀다고.
아내와의 긴 긴 기간 동안 남도 아니오 부부도 아닌 것처럼 살아온 그것 때문인가.
돌아서며 그 생각이 들었다.
(계속)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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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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