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혜수예요!
13장은 나시에 반바지입고 차를 타면서 썼다면
14장은 레깅스에 외투를 입고 쓰네요~
그만큼 시간이 지나간 거겠죠?
추운데 건강 조심하시구요~
이번에 수아가 많이 울어요...
심경에 변화가 크다는 건데 잘 표현 되었는지는 의구심이 가네요~
나쁜남자란... 여전히 힘들어요~ ㅋㅋㅋ
늘 감사합니다^^
83.
[거 누구요? 야심한 밤에 아가씨 혼자 가는데 앞에서서 길을 막고 그러오?]
택시기사 아저씨는 조수석 창문을 내려 내가 곤경에 처한 상황인가 싶어 큰 소리로 얘기했다.
[아닙니다. 제 여친이예요. 연락도 없이 늦게까지 집에 안들어오길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영등포에서 출발하셨나요?]
검은 물체의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어이쿠. 미안하네 청년! 여자친구가 워낙 예뻐서 치한이라도 만나나 싶어서 그랬네... 이 놈의 오지랖이란...]
[아닙니다. 얼른 가세요~]
[여자친구 간수 잘하고... 술도 한잔 했나보던데... 그 시간에 영등포라면 뻔하잖는가?]
나를 잠깐 아래위로 훑으며 피식 웃고는 택시를 몰고 떠났다.
검은 실루엣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띄엄띄엄 서 있는 오렌지색 가로등으로 인해 얼굴은 환하게 보이지 않았다.
[... 집에 데려다 줄게~ 가자!]
한참동안 내 쪽으로 몸을 돌린 후 말 없이 서 있던 실루엣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콩닥콩닥.
찌르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심장은 왜 이렇게 빨리 뛰고... 나만 이러는 걸까? 쟤도 날 볼 때 이렇게 두근거릴까?/
아랫배에서는 계속 전율이 일어나고 있었다.
집으로 걸어올라가는데 전율이 일때마다 다리가 무의식적으로 꼬여 오른발은 왼발 바깥쪽으로 내딛었고 왼발은 오른발 바깥으로 내딛으며 올라갔다.
게다가 술기운 때문인지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눈은 자꾸 감겼고 다리는 점점 느려져 가는게 느껴졌다.
실루엣은 조금씩 멀어졌다가 내가 뒤처지는 걸 느끼면 걷는 속도를 줄여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앞서서 걸어갔다. 어느 순간 실루엣을 보니 넓은 등과 상대적으로 가느다란 허리로 인해 역삼각형처럼 생긴 등을 자연스레 바라보게 되었다.
/아... 힘들어... 등이 참 넓네... 업혀보고 싶다.../
[...!! 미쳤어... 으이그...]
난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등이 좀 어둡지 않냐?]
[으응..? 괜찮아. 충분히 넓어... ...!!!]
갑자기 현성이는 "등"에 대해 내게 물어 왔고 무심코 난 내가 생각하던 것이 입밖으로 나왔다. 등이라는게 가로등을 얘기한다는 건 말이 끝나는 동시에 알아챘다.
[응? 무슨 소리 하는거야?]
/아씨... 쪽팔려.. 못 알아챘겠지?/
난 고개를 푹 쳐박고 걷다가 쿵 하고 머리를 부딪혔다.
머리를 들어 앞을 보자 멈춰선 현성이의 가슴 앞이었다.
[너 늦게까지 술 쳐먹고 오더니 귀까지 먹었냐 쌍x아? 크큭~ 내 등이 넓어보였어?]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또 시작이야? 안 그래도 창피해 죽겠는데.../
[... 하나도 안 웃기거등?]
난 어느새 적응이 되는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업어줄까? 이 오빠 등에 한번 업히고 싶지?]
[흥! 됐거든요! 이제 집에 거의다 왔는데 뭐... 들어갈게~]
[야~! 아씨 사람 민망하게 반응이 그게 뭐야! 야야~ 잠깐만! 내가 너 두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그냥 들어가기냐?]
현성이는 볼 멘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누가 기다리래?]
난 마음과는 다른 말이 계속 입밖으로 나왔다.
[씨x, 할 말이 있어서 좀 기다렸다! 전화도 안 받고 화가 끝까지 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을 끊는 현상이었다.
[근데 뭐?]
[씨x, 쪽팔리게...아냐...]
멋쩍은 듯이 뭔가 혼자 중얼거렸다.
[......]
[......]
나랑 현성이는 잠시동안 서로를 쳐다봤다. 현성이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말하지는 않았다.
[뭐... 여기까지 바래다준건 고마워~ 할 말 없으면 들어가볼게! 잘 가!]
난 두근대는 심장소리 때문에, 더 이상 힘겹게 올리기를 거부하는 눈꺼풀때문에 얼른 들어가고 싶었다.
[야! 내일 야구장으로 와라! 4시까지 잠실로 와! 안오면 알지?]
다급한 현성이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데이트 신청일까? 나 혼자 오바하는 거 아니겠지? 침착해침착해!!/
[나 피곤해... 내일 연락해줄게~]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두근대는 심장소리를 감추려고 얼른 말하고 들어왔다.
[야! 나 생각해서 이쁘게 입고 와!]
찰칵. 삐리릿.
/이게 말로만 듣던 데이트? 야호!! 첫 데이트다!/
난 들어오자마자 현관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84.
재민이가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공동 휴게실에 들어왔다. 친구들은 재민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너 왜 그래 임마!]
[혼이 나갔네 이 새끼~ 크크]
[보영이가 뭘 해줬길래 그러냐?]
[오늘 첫 데이트라며?]
남자 녀석들이 호들갑을 치자 주위에 있던 여자애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재민이, 좀 부럽다 너?]
[첫 데이트라고?]
그 왁자지껄한 가운데서도 아무 말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재민이었다.
[새끼! 형님들한테 말 좀 해봐봐!]
재민이는 조금 더 뜸을 들이더니 말을 꺼냈다.
[날 좋아한다고 얘기하고, 헤어지기 전에 키스... 했어!]
[꺄울~~]
[어머어머... 웬일이야!]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봐봐~]
[얼음마녀 보영이가 너한테 키스를 했다니! 뭔일이 있었던 거 아냐?]
한동안 소란스러운 소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공간 한 쪽에서 난 남몰래 눈물을 닦았다.
그 날은 나와 보영이가 학생부장 선생님께 불려갔던 다음날이었다.
85.
/아우... 눈 따가워.../
간밤에 잠을 설쳤다.
남아있던 기억이 꿈으로 떠올라서였는지, 데이트를 한다는 것 때문이었는지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에 들었던 게 기억났다.
먼발치에 있는 시계를 보자 11시.
/쇼핑 좀 해야되는데.../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시간이 없어!]
몸은 피곤했지만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후다닥.
화장실에 들어와서 움찔한다.
예전에는 병실 화장실 거울은 떼버릴 정도였고, 밖에 나와서도 화장실 갈 때마다 신경쓰며 갔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화장실에 들어왔다가 거울을 보고 놀라는 정도가 되니 새삼스레 내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건 그거고... 걱정될 정도네 이건.../
소변을 보기위해 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앉자 허옇게 말라붙은 것이 깜짝 놀랐다.
/피곤해서 어제 들어오자마자 잤더니... 어제 현성이가 데려다 줄 때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던 게... 그거 때문인가?/
[도대체 내 몸은 어떻게 돼 먹은거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팬티는 벗어둔 채 나잇가운을 벗고 샤워를 시작했다.
/너 샤워할 때 안에도 좀 씻고 해라. 어휴... 말 안하려 했는데.../
물줄기에 몸을 갖다대자 어제 규철이가 나한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쪽팔려...]
/질 내부는 염기성이라 비누로 씻는 건 좀 안 좋을텐데... 혹시 보민이가 쓰는게 있을까?/
보민이가 쓰는 샴푸와 바디워시 같은 것을 모아두는 통을 보니 다른 통보다 비교적 조그마한 흰색 통이 보였다.
/혹시 이건가?/
흰색 통을 꺼내보니 의약외품이라고 적힌 통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조그마한 글씨로 "여성 산성세정액"이라고 설명이 적혀있었다.
[찾았다! 운 좋다~]
뚜껑을 여니 초록색 액체가 담겨 있었고 냄새는 향긋한 오렌지 향기가 났다.
/음... 어떻게 씻으면 되지? 손에 묻혀서 넣어야 되나?/
왼손에 조금 덜어 검지와 중지 손가락에 세정액을 묻혀 구멍 안으로 밀어넣었다.
미끌미끌.
곧 화장실 전체에 오렌지 향기가 가득퍼졌고 보지 부근에는 거품이 일어났다.
깨끗이 씻어 내기 위해 구석구석 손가락에 세정액을 묻혀 문질렀다.
[아흥!]
난 깜짝 놀라 얼른 아랫도리에서 손을 떼고 샤워기를 위로 향하게 하고는 거품을 씻어 냈다.
[아흣!]
강한 물줄기가 순간 머리로 자극을 보냈다. 지난번 내 아랫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빨아줄 때 느낌이었다.
/아~ 좋아.../
찌릿찌릿하면서 몸이 들뜬 기분이 들었다.
[아응...]
/그리고는... 여기에다 길고 딱딱한 게 들어간다면... 훨씬 큰 자극이 올텐데.../
[하아... 하읏...]
난 한동안 샤워기를 놓지 않고 머리로 올라오는 흥분감을 느꼈다.
[헉! 하응~]
세정액을 씻어내기 위해 한 손으로는 샤워기를 잡고 다른 손 손가락을 안쪽으로 밀어넣자 좀 더 강한 흥분감이 밀려왔다.
/아흑! 미쳤나봐.../
손가락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내 눈 앞에 규철이 얼굴과 자지가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나를 향해 욕망과 정복감이 가득 찬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좀 더... 조금만...]
/씹x년... 결국엔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도도한 척은...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크크.../
갑자기 내 상상 속에서 종진이 갑자기 나와 나를 보고 비릿한 웃음을 날렸다.
그 순간 난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가락을 뺐다.
/그 새끼가 왜 떠오른 거지?/
의아했다.
[도도한 척이라...]
흥분은 순식간에 가라앉긴 했지만 여전히 미끈거리며 흐르는 액을 느끼고 흐르는 물에 씻어냈다.
/그 새끼한테 고마워 해야하나? 참! 그건 그렇고... 그러고보니 난 왜 현성이랑 한 기억은 없는거지?/
[이상하네...풋...]
내 스스로도 의미를 알듯 말듯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지었다.
평소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린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화장실에 가득찬 수증기도 나와 같이 밖으로 넘실넘실 흘러 나왔다.
그리고 어제 입었던 브라를 하고는 애액이 덕지덕지 붙은 팬티 대신 다른 브라세트의 팬티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난 뒤, 이런저런 옷을 옷장에서 닥치는 대로 꺼내봤다.
/이쁘게 입고 와~/
어제 헤어지기 전에 내게 했던 현성이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연한 하늘색의 제깅 팬츠, 저번에 보민이랑 샀던 3부 청바지, 화이트 진, 섹시블루 원피스, 스판재질 미니스커트, 진 스커트들도 침대 위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 뭐 입지? 신발은 사러 갈거구... 야구장에 갈 때는 밖에 앉아 있으니까 시원하게는 입어야 할 것 같고... 그렇다고 짧은 스커트나 원피스를 입으면... 시원하긴 할텐데... 아냐! 앉아있을 때 신경쓰이고 불편해...]
예전에 보민이 말도 있고 해서 짧은 바지를 입기로 했다.
[위에는 뭐 입지?]
이리저리 옷걸이를 뒤지다보니 루즈핏의 얇은 니트 소재로 된 흰색 오프숄더 매쉬니트티가 회색 무늬가 포인트되어 눈에 띄었다. 좀 더 뒤져보니 정반대의 느낌의 스판 느낌이 약간 있는 검은색 브이넥티가 보였다.
[보민아~ 자꾸 니 옷 뺏어서 미안해~]
혼잣말을 하고는 티 두 개를 꺼냈다.
시계를 얼핏 봤다.
1시.
[으악! 늦겠다. 신발도 사야되는데...에휴!]
허둥지둥 브이넥티를 먼저 입어봤다. 보기보다 타이트한 느낌이 들면서 브라 바로 위쪽 가슴까지 옷이 덮이지 않았다.
[너무 많이 파였나?]
브라 때문인지 가슴부분이 도드라져 보였다.
브이넥 티를 벗고 매쉬니트티를 입었다. 루즈한 핏이라 몸매는 드러나진 않았지만 한쪽 어깨에 걸쳐진 옷은 대각선으로 다른 쪽 팔까지 내려와있었다.
입기전에는 몰랐지만 입고나니 매쉬니트라 그런지 사이사이 공간이 꽤 넓었다. 가슴부분은 그나마 촘촘히 짜져있어 검은색 브래지어가 옷 밑으로 조금씩 비쳐보였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성기게 짜여있었다.
/예쁘다~ 이거 입어야지.../
옷 끝에는 끈이 달려있었고 숏 팬츠 위에 얹히게끔 끈으로 묶어냈다.
허둥지둥 선크림과 비비를 순서대로 조금씩 펴바른 후 대충 머리를 손으로 털며 말렸다.
/휴~~ 머리칼만 보여도... 드라이기로 말리면서 머리 손질할 수 있을텐데.../
[왜..? 예쁘게 보이고 싶나봐?]
거울 앞에서 보이지도 않는 나를 보고 포즈를 잡아본다.
86.
난 가방을 챙겨서 쪼리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신발사려면... 신촌까지 갔다가 가야되는데... 네 시까지 빠듯하겠다.../
[어떡하지?]
/아! 혹시... 매장이 강남에도 있지 않을까?!/
[물어보면 되겠다~]
마을버스를 타러 내려가면서 핸드폰에 온 문자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신수아 고객님 안녕하세요?]
굉장히 활달한 목소리로 전화를 응대하는 남자직원이었다.
[아... 네? 근데 제 이름을 어떻게...]
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내 이름을 얘기하는게 궁금했다.
[고객 관리차 전화번호 알고 있었습니다~]
[아...네...]
조금은 의아했지만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어떤 이유때문에 전화주셨나요?]
[제가 구두를 좀 사야되는데요... 신촌까지 갈 시간이 안되서 혹시 강남에도 매장이 있나요?]
[아... 그러시구나...]
약간은 소리가 줄어든 목소리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없나요?]
[압구정에 하나 있구요. 무역센터에도 매장이 하나 있으세요~]
[무역센터면 코엑스인가요?]
[네... 코엑스예요~ 근데 저희 매장에 오시면 더 싸게 해드릴 수 있는데 오시지 그러세요~?]
[네 시까지 잠실까지 가야해서요... 시간이 안될 것 같아요~]
[아~ 네 시까지요?]
[네! 무튼 감사합니다!]
[신수아고객님? 잠깐만요~ 신상품 종류도 저희가 더 많고 더 저렴하게 드릴테니까요~ 이쪽으로 오세요!]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네 시까지 가야된다구요~]
[음...이런 적은 한번도 없는데요~ 수아씨만 괜찮으시면 제가 오늘 출근할 때 바이크를 끌고 왔어요... 오시면 마음껏 쇼핑하시고 시간 맞춰서 제가 잠실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잠깐 생각하더니 의외의 제안을 한다.
/수아씨? 참나.../
상당히 급했는지 갑자기 수아씨라고 응대한다.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데요?]
[20분이면 충분히 도착합니다.]
[고민해볼게요~ 얼마나 싸게 해주실 수 있으신데요?]
[여러 켤레 사신다면 그 중 몇 켤레는 직원 할인가로 드릴게요~]
[치~ 두리뭉실하게 얘기하신다...]
[일단 오세요~]
[감사합니다~ 고민해볼게요~]
탁.
/나중에 사야겠어... 벌써 한 시 삼십분이 넘었는데 가는데 한 시간 가까이 걸리잖아?/
/그래도 많이 깎아준다는데... 어차피 강남 가더라도 한 시간 쇼핑할 거 아냐?/
[현성이가 어딨는지 먼저 전화해봐야겠다... 좀 늦는다고 그러면 되지않을까?]
띠루루루.
[어! 왜?]
[어딘데?]
[난 이미 강남에서 놀고 있지~]
[누구랑?]
[참나.. 그런건 왜 묻냐? 아는 사람~]
[치... 여자구나?]
[썅년이~ 남자거등?]
[알겠어... 언제까지 거기로 가면돼?]
[네 시쯤? 그때까지 와~]
[알았엉~ 거기가서 전화할게 그럼~]
[니 알아서 해~]
/네 시쯤 오라고 했으니까 네 시 좀 넘어도 되겠네~ 그럼 신촌 가자~/
일요일 이른 오후라 그런지 버스에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지는 않았다. 차도 생각보다 덜 막혀서 예상보다는 일찍 신촌에 도착했다.
/와! 좀 더 길게 쇼핑할 수 있겠다. 헤헷~/
슬라이드를 밀어올리니 두 시 반이 채 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강한 햇살 때문에 눈이 찌푸려졌다. 가로수 그늘로만 골라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내려갔다.
[눈이 부신데... 선글라스도 하나 사야겠어~]
주말이라 신촌은 사람이 정말 많았다. 좁은 인도를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들과 부딪혔다.
게다가 몇 걸음 마다 떨어져 있는 노점상들 때문에 엉킴이 더 심했다.
사람들 중에는 천천히 이동하는 것을 참지 못했는지 빨리 가려다가 가방이나 팔꿈치, 손등 같은 부위로 사람들 어깨나 팔, 골반이나 엉덩이를 툭 치거나 밀치고 지나갔다.
[앗...!?]
순간 허벅지에 얼얼한 느낌이 들어 보니 내 옆을 지나가려는 남자가 멘 노트북 가방이 내 허벅지를 친 듯 싶었다.
얼마나 정통으로 맞았는지 근육이 뭉쳐 맞은데로 주변의 근육들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씨... 넘 아프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남자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씨x새끼...]
절뚝절뚝 힘겹게 백화점 일층에 도착했다.
/아프다...힝.../
절뚝이는 걸음으로 일층에 들어서자 코너에 조그맣게 이월상품 선글라스를 팔고 있었다.
[언니~! 언니는 얼굴이 동그라니까 약간 각진 선글라스가 어울려. 이런거~]
내가 가니까 자매인듯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서서 선글라스를 보고 있었다.
[다른데 가서 보자. 좀 비싸다~]
두 여자는 날 지나쳐서 금새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오세요. 고객님~ 저희 이월 상품이라 40% 할인 들어가 있어요~ 한번 보세요~ 방금 가신 저 분처럼 고객님도 얼굴이 둥근 편이셔서 요런 스타일 잘 어울리실거예요~]
점원이 가리킨 곳을 내려다보니 안경알이 내 손바닥만한 크기의 선글라스가 있었다. 그 중에 하나 골라서 써봤다.
[언니~ 잘 어울려요?]
[어머...! 손님이라 아부떠는 게 아니라 진짜 잘 어울려요... 손님 얼굴도 작아서 잘 어울리시네요...]
[진짜요? 치... 좀 더 볼게요~]
난 선글라스를 모양만 이것 저것 골라서 보고는 써보지는 않았다. 매장 직원은 계속 착용해보라고 얘기를 했지만 보이지도 않는 얼굴을 들여다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까 잘 어울린다고 했던 선글라스가 디자인도 예쁘고 무난한 느낌을 계속 받았다.
[아까 그거 주세요~]
[이 제품은 30% 할인되는 물건이예요~ 완전 저렴하게 드리는 거거든요~ 괜찮으시죠?]
[얼마인데요?]
[30% 할인하셔서 17만1000원이세요~]
[헐... 그게 싼 거예요?]
/그럼 원래 가격이 24만원이 넘는 거잖아?/
[이 제품, 이 가격으로 다른데서 못 사요~ 올 여름 가장 따끈따끈한 상품이었거든요~?]
[네... 주세요...]
/내가 현성이 너 만나러 간다고 엄청 신경 쓴다!/
핑계아닌 핑계를 대며 텍을 떼고 계산이 끝난 선글라스를 꼈다.
매장 안에 잔뜩 켜놓은 불빛의 눈부심도 어느정도 차단해주는 선글라스가 내 눈을 좀 편안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구두 매장이 2층이었지?/
상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예전에 바지가 찢어 졌던 곳이 눈에 띄었다.
/에이씨~ 지금 생각해도 쪽팔리네~/
난 선글라스를 한 번 더 치켜올리며 시선을 돌리고는 구두 매장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고객님!]
[어떤 종류로 보시나요?]
나에게 인사한 한 명은 나를 지나쳐갔다.
[어서오세요 고객님!]
/응?/
뒤를 돌아봤더니 어떤 남자가 서너걸음 뒤에서 날 뒤따라 들어왔다. 눈이 내 엉덩이 쪽을 바라보다 내가 돌아서자 눈에 띄게 당황하며 내 눈과 마주쳤다.
/뭐야?/
난 혹시나해서 바지 매무새를 고쳤다.
[원하시는 스타일의 구두가 있으신지 둘러보세요~]
친절하게 남자 직원이 안내해준다.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 둘러보라는 말에 조금은 짜증이 났다.
[그냥 전 원피스나 스커트에 신을 구두가 필요해요~]
[아... 그러세요? 저희가 골라드리는 것보다 원하시는 스타일이 있으실 것 같은데... 의외시네요~ 이쪽으로...]
의아하다는 듯이 직원이 대꾸한다.
[이쪽 라인 구두 어떠세요? 마음에 드는 것 골라보세요~]
직원은 날 흘깃흘깃 쳐다보며 구두 진열대 앞에서 얘기했다.
/와~ 예쁘다!!/
금색 힐로 포인트 된 검은색 구두가 내 눈에 띄었다.
[기본 스타일에 포인트로 들어가서 많이 찾으시는 신상품입니다.]
한동안 구두에 흠뻑빠져 이것저것 신어봤다.
최종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두 켤레 정도였다.
계산을 하려고 마음 먹자 그제서야 매니저가 생각나 두리번거렸지만 태워다 준다고 약속했던 매니저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온 이유가 태워준다는 약속 때문인데.../
[저... 근데 매니저님은 안 계세요?]
[잠시 자릴 비우신 것 같은데 무슨일이시죠?]
[......]
시계를 보니 네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괜히 왔나봐... 생각해본다고 해서 그런가.../
[약속에 늦겠다...]
난 안절부절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요 고객님?]
옆에 있는 점원은 갑자기 당황하는 날 보며 말을 건넸다.
난 지금이라도 택시를 타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매장을 나서려고 했다.
[저...혹시?]
고민하던 그 때, 내 뒤에서 등에 살며시 손을 대면서 움직이는 나를 멈춰 세웠다.
[수아씨 맞네요! 선글라스 껴서 바로 못 알아 봐서 미안해요!]
매니저 였다.
[왜 이제 온거예요?]
난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구두는 고르셨어요?]
약간 당황한 듯 매니저는 구두를 골랐는지 물어봤다.
[네... 웨지힐이랑 저거요...]
옆에 서 있던 점원이 들고 있는 구두를 가리켰다.
[계산 먼저 해 드릴게요~ 수아씨! 둘 다 신상품인데 제가 한 켤레는 직원 할인가로 드리고 하나는 기본 할인가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더 비싼 걸 직원 할인가로 드려야겠죠? 이 구두를 직원할인 삼십프로하면... 이십육만삼천이백원이구요~ 웨지힐은 주말 할인가 오프로 하면... 이십팔만삼천백원이예요!]
[얼른 계산하고 데려다줘요... 늦겠어요...]
난 초조함에 사로잡힌 채 얼른 카드를 내밀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매니저는 더욱 여유롭게 구두를 포장하고 준비하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늦었다구요!]
[갑시다!]
싱긋 웃으며 카드와 영수증 구두가 담긴 백을 건네주며 날 이끌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우리는 바이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자! 여기 헬멧... 참! 밖에서는 말 놔도 되지?]
[마음대로...]
난 헬멧을 받아들고는 머리에 썼다.
/짧은 반바지라 타고 가면서 바지가 밀려올라갈 것 같은데.../
[니 신발이랑 가방은 안에다 넣자~]
매니저는 안장을 들어올리더니 내 손에서 짐을 뺏어서 안에 있는 공간에 짐을 밀어넣었다.
[됐다! 뭐... 짧지만 반바지니까 상관없겠지~ 얼른 타! 늦었다며?]
낑낑대며 안장을 닫고는 날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먼저 올라탔다.
정장에 구두를 신은 남자가 헬멧을 쓰고 바이크에 앉아 있는 모습은 약간 어색했다.
[알았어... 첨 타보는 거라 어떻게 타야될 지 몰라...]
[풋...그냥 자전거 올라타는 거랑 똑같다고 생각하면 돼]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날 보더니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가르쳐 준다.
난 자전거를 생각하면서 올라타려고 바이크 옆에 서보니 의외로 생각보다 바이크가 높지 않아서 다리만 길게 뻗어 올려서 앉았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쉽게 올라타네 뭐... 거기 발 얹는 곳 있지? 거기다가 발 얹고... 꽉 잡아! 선글라스 안 떨어지게 조심하고~]
난 양쪽에 받침대를 찾아 발을 올리고는 매니저의 양복 옆쪽을 양 손으로 꽉 잡았다.
/말 타는 자세 같네.../
[아니... 그렇게 잡으면 떨어져... 팔을 넣어서 내 허리를 감아서 깍지를 끼든지 해서 잡아야돼...]
난 하라는 대로 바싹 당겨 앉아 매니저 등에 밀착해서 허리를 감았다.
[...이름이 뭐야?]
[응? 내 이름 몰랐어? 명찰 못 봤구나?]
[어...]
[승훈이야 조승훈...]
부릉부릉.
깜짝.
대답과 함께 시동을 켰는지 오토바이의 떨림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긴장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긴장 풀어~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깍지만 잘 끼고 있어!]
[......]
[출발한다!]
[꺅!]
순간 내 몸이 받는 가속도로 인해 몸이 뒤로 급격히 쏠렸다.
승훈 오빠 말대로 깍지를 안 끼고 있었다면 뒤로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풍기의 강풍보다 더 센 바람이 온몸을 휘감더니 급정거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떠보니 순식간에 지하주차장을 벗어나 신호등 앞에 멈춰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옆에 차들이 서있었다.
선글라스 때문에 몰랐는지 나와 눈이 마주친 운전자는 비릿한 웃음을 날리며 음흉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나를 쳐다봤다.
[...!]
내가 바지 밑단을 잡아내리자 그 운전자는 그제서야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신호등이 바뀌었는지 또 내 몸이 뒤로 쏠렸다.
[꺅!!]
86.
[야! 다 왔어! 종합운동장 역 5번 출구에 내려주면 되지? 대부분 여기서 만나니까~]
[어? 어... 고마워...]
내려서 시간을 보니 4시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걸 보니 승훈 오빠는 정말 빠른 속도로 도심을 질주 했던 것 같았다.
[야! 너 진짜 긴장했구나? 얼굴이 완전 상기 됐어! 크크크]
승훈 오빠는 내 얼굴을 보자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어... 처음 타본다고 했잖아!]
난 얼버무렸다.
사실 내가 얼굴이 붉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동차 운전자들은 멈춰 있을 때나 달릴 때나 상관없이 입맛을 다시거나 음흉한 눈빛과 표정을 보냈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찝찝한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찝찝했던 처음 느낌은 없어지고 오히려 강렬한 엔진 진동과 함께 운전자들의 눈빛으로 인해 몸이 움찔움찔 자극이 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신호등 때문에 멈출 때마다 끌어내렸던 바지 밑단도 그냥 놔둬 버렸다.
[으이구... 너 바지 다 밀려올라갔다... 엉덩이 밑살 다보여!]
승훈 오빠는 안장 밑에서 내 짐을 꺼내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 내게 한 마디 했다.
[승훈 오빠가 갑자기 출발했다가 갑자기 멈췄다가 그래서 그렇잖아! 흥!!]
난 오히려 투덜대며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짐을 받아 들었다.
[남자 친구랑 보러온 거구나? 나중에 오빠랑도 한 번 놀러오자~ 연락할게!]
[응! 고마워 오빠! 근데 그냥 남자애야 남자 친구 노노~]
승훈 오빠는 내게 한 번 싱긋 웃어주고는 헬멧을 다시 쓴 뒤, 쏜살 같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짐을 어떡한다...?/
[혹시 보관함이 있을까?]
난 쪼리를 끌면서 지하철 역으로 내려갔다.
[아가씨, 표 구했어?]
어떤 아저씨 한 분이 히죽거리면서 내 옆에 서서 걷는다.
[......]
[스타일 죽이는 아가씨~ 표 못구해서 돌아가는 거 아냐? 시작시간 다 됐으니까 싸게 줄게~ 잠깐 일로와봐~]
[친구가 표 사놨을거예요~]
난 무시하며 걸어가다가 계속 따라오자 한 마디 했다.
[아 그럼 빨리 대답하지... 뭘 질질 끌어.. 씨발년... 아예 옷을 벗고 다니지? 브라자는 다 비치고...]
궁시렁거리며 돌아서는 아저씨의 말이 귀에 들렸다.
[뭐라구요?]
내가 쏘아붙였다.
아저씨는 못 들은 척 다른 커플에게 다가갔다.
/아...짜증나.../
짜증을 내며 두리번 거리다 보니 화장실 근처에 물품보관소가 보였다.
[하나 남았네?]
보관함이 모두 사용중인지 하나 빼고는 다 차있었다.
/여행용 가방 넣는 큰 곳인데.../
[어쩔 수 없지뭐...]
돈을 내고 마지막 남은 큰 보관함을 선택했다.
구두를 넣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가방만 어깨에 메고 문을 닫으려했다.
[저기! 잠시만요!! 혹시 두산팬 분이세요?]
어떤 남자 두 명이 닫으려는 보관함 문을 급히 잡고 말을 걸었다.
[네?]
[엘지팬 분이신가?]
[병신아~ 그게 중요하냐? 그나저나 저희도 물품 보관함이 필요한데... 이 근처에 싹 다 찼더라구요... 저희가 돈을 드릴테니 같이 보관해주시면 안될까요?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그럼... 연락을 어떻게...]
[나중에 경기끝나고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난 괜찮다며 억지로 손에 들려주는 오천원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였고 그 와중에 다른 한 남자는 뒷주머니에 들어있던 내 폰을 가져가서 자기 폰으로 전화를 건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같은 팬 분이시면 끝나고 한잔 하실래요? 고딩은 아니시죠? 후후후..]
내 폰 슬라이드를 밀어 내리며 말한다.
[전 팬 그런거 아직 없어요~]
난 빼앗듯이 폰을 집어 넣고 대꾸했다.
[그럼 두산팬 해요 저희랑~]
[나중에 해요~ 저도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왠지 말이 길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말을 잘랐다.
[그럼 경기 재밌게 관람하시고 좀 있다 뵈요~]
[......]
[거봐! 일행이 있을거랬잖아!]
내 뒷통수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난 두리번 거릴때 마다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한껏 느끼며 지하철 역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여기 버거킹 앞에 있엉~]
하하하호호호.
수화기 너머로 여자웃음소리가 같이 들렸다.
[누구랑 있어?]
[대학교 후배 두 명 만났어~ 이리로 와~]
뚝.
[뭐야...]
/나랑 데이트 하는게 아녔나?/
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난 입을 삐죽거리면서 버거킹을 찾았다.
[저기있다!]
현성이를 발견한 기쁨도 잠시, 나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없자 실망감이 크게 들었다. 현성이는 벽에 기대 서서 미소를 지으며 연신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그 앞에는 두 명의 여자가 연신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야구선수 복장처럼 옷을 입고 굉장히 오버스러운 몸짓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승욱이...?/
그 순간 내 쪽으로 승욱이가 고개를 돌렸고 깜짝 놀라는 나를 금새 알아본 듯 했다.
[여~ 오랜만이다?]
손을 흔드는 승욱이로 인해 나머지 사람들도 고개를 돌리거나 몸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승욱...씨, 안녕?]
호칭이 어색해서 씨를 붙였는데 더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어유~ 드레스 코드가~ 딱 내 스탈이네! 이리로 와봐요~]
승욱이는 내 손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내 어깨에 팔을 걸고는 소개를 한다.
[여기는 내 친한 친구 수아! 쟤들은 우리과 후배 지민이와 효진이! 인사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승욱오빠 친구라는데 몇 살이세요? 동갑?]
현성이 옆에 서있던 예쁘지만 눈매가 날카롭게 생긴 효진이라는 애가 말을 꺼낸다.
[......]
순간 기분이 굉장히 불쾌했다.
/저 표정... 저 말투.../
익숙하지만 익숙해질 수 없는 눈매.
[여자들끼리도 나이 묻고 그러냐? 남자들 보고는 나이 묻는거 실례라며?]
옆에서 승욱이가 불쑥 끼어든다.
[여자들끼린 서열 정리가 필요하거든... 왜 이런데 꼭 남자가 끼어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치?]
효진이는 지민이에게 말을 건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난 현성이를 슬쩍 쳐다봤다. 현성이는 꽁초를 발로 밟아 끄고 있었다.
87.
[얘! 넌 몇 살이니?]
[저 열 살이예요...]
[수아니? 수아는 몇 짤이예여?]
[...그런 어투 들을 나이는 지났거든요? 아 짜증나...]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내가 불쌍해 보여요? 왜 상대방은 원하지도 않는데 동정을 하고 그래요??]
88.
발로 담배 꽁초를 비벼 끈 현성이는 주저주저 하던 나를 보고는 한 마디 했다.
[이 썅년이 얼마나 도도한지 나한테 오빠라고 한 번도 안하더라... 너희한테 좀 배우라고 하고 싶네...]
[아 진짜요? 그럼 우리랑 동갑?]
지민이가 말을 거든다.
[몰라~ 너네가 올해 입학한 11학번이잖아?]
현성이는 어물쩍 넘어가려는 듯 승욱이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야! 넌 무슨 학번이야?]
눈치 못 챈 승욱이는 본인도 내 나이가 궁금했던지 물었다.
[난 대학 안다니는데...]
[아~큭.. 그럼 직장다니나봐요?]
효진이는 재밌다는 듯이 물어본다.
[그럼 너희는 몇 년생이냐?]
승욱이가 물었다.
[우리는 92년생 이죠~]
효진이는 바로 대답했다.
[아~ 맞어! 쟤 91년생이야~ 저번에 민증 본적 있엉~]
현성이는 서둘러 말해주었다.
[에이씨ㅂ.... 우리보다 언니잖아? 우리보다 나이도 많은데...]
효진이는 지민이 귀에대고 속닥거렸다.
[이제 들어가자~]
현성이가 앞장 서 걷자 효진이와 지민이는 재빨리 현성이 팔짱을 끼고 걸어갔다.
[두산팬! 그럼 우린 저리로 간다!]
승욱이는 내 손을 잡고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뭐야? 왜 우린 다, 다른데로 가?]
난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내가 엘지팬이니까... 표를 구하다보니까 현성이 저 자식이 두산쪽에다가 세 자리를 예매해놨더라고... 난 그것도 모르고 왔다가 봉변당했고... 그래서 나는 엘지쪽에다가 두 자리 암표 샀고 두 명 남길래 우리 과후배 두 명 부른거야!]
[난 근데 왜 너랑 보러 가는 거야?]
[쟤네 둘이 두산 광팬이래서.. 너는 그런거 없다며? 오늘부터 나랑 엘지팬 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승욱이가 말했다.
/내일 예쁘게 하고 4시까지 와!/
[......]
고마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머리 끝까지 화가난 나는 아무말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선글라스도 벗어서 가방에 넣어버리고 보관함에서 구두를 꺼내고는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89.
[띵동띵동~ 등기입니다. 계세요?]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10시.
깜짝 놀라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 주무시고 있으셨구나...크흠... 등기라서... 여기 사, 사인 좀 부탁드려요...]
갑자기 당황한 우체국 아저씨는 얼른 사인을 받고 나갔다.
[네... 고맙습니다...]
딸깍. 삐리릿.
/연작고등학교. 신수아 학생 귀하... 입학안내문 재중.../
[드디어 왔구나~ 근데 뭐이리 얇어?]
봉투를 뜯어보니 종이가 두 장 있었다.
하나는 편지였다.
[신수아에게... 반갑다. 선생님은 김기웅 선생님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아직 널 본 적 없지만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똘똘하고 적응 잘할 것 같다고들 이야기하셔서 기대가 된다. 개학은 8월 마지막주 월요일이란다. 반년이지만 이것도 사제간의 인연이니 잘 부탁한다! 또 다른 종이에 적혀있는 수업료랑 기타 제반 사항들은 참고만 하고 학교오면 처리할 수 있도록 하자. 교복입고 등교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보자~ 얼마 남지 않은 방학 잘 보내렴~]
[뭐야~ 웬 유치하게 손 편지? 컴퓨터로 쳐도 될텐데...]
다음 종이를 보자 나도 모르게 김빠지는 소리가 났다.
[헐! 수업료가 왜 이리 비싸?! 아무리 사립고등학교라지만!!]
중얼거리며 화장실에 들어간 나는 비명을 질렀다.
[꺅!!]
브라에 팬티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내가 이 모습으로 등기를 받았어?/
[아이씨~~ 힝...근데 내가 언제 집에 들어왔더라?]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
좀전 보다 몇 배는 더 크게 놀랐다. 너무 놀라 비명도 나오질 않았다.
[우편물 온 거야?]
화장실로 들어선 건 다름 아닌 현성이었다.
[니가 여,여긴 어떻게...]
난 화장실에 있는 타월로 몸을 가렸다.
[뭘 어떻게야... 밤새 너 뒤치닥거리 해줬잖아~ 어유... 술도 안 먹었는데 이 다크서클 봐...]
현성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변기뚜껑을 올리고는 거무튀튀한 물건을 꺼내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어제 야구장에서 헤어졌잖아?]
난 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랬지... 그런데 승욱이가 나한테 전화와서 니가 집에 가버렸대서 부리나케 니 집으로 왔지... 씨발년. 또 두 시간 넘게 전화도 안되고 서성이다 보니까 술에 취한 널 남정네 두 명이서 부축한답시고 존ㄴ 주물럭거리면서 올라오더라? 병신들인지... 나 같으면 근처 모텔 같은데 데려갔을텐데.. 니 집에서 따먹으려고 했는지 널 델꼬 올라오더라구... 올라오다가 나한테 딱 걸렸지...]
[......]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몇 대 쥐어박아 주니까 꺼지더라. 걔네들도 술이 꽤 됐는데 날 이길 수 있겠냐? 크크..]
[그래서... 니가 걔들 대신해서 나랑 했어?]
[말도 마. 너 오바이트하고 난리도 아녔어... 내 옷 다 버리고 니 옷도... 어제 밤에 세탁기 돌리고 생쑈를 했어... 이씨...지금쯤 옷 다 말랐으려나?]
[...그것 뿐이야?]
[에이... 니가 그럴 년이냐? 크크... 새벽네시 쯤 됐으려나? 이상한 느낌에 깼더니 니가 위에서 흔들고 있더라구... 조임이 어휴... 끊어지는 줄 알았어...]
[구라치지마...!]
난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씨발! 진짜야...하면서 나 좋아한다고 계속 중얼거려놓고 쌍년이...]
[......]
난 침대 맡에 앉아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씨발년... 그렇게 있으니까 또 꼴리네... 야 빨아봐 어제처럼!]
갑자기 현성이는 덜렁대는 자신의 물건을 내 입에 가져다댔다.
[싫어!]
난 도리질쳤다.
[넌 늘 그렇게 싫다고 하면서도 박아주면 미친듯이 허리 돌려대면서... 웃기지도 않는다. 크큭...]
[아흐...]
갑자기 현성이가 팬티를 젖히고 내 아래에다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크큭... 거봐...]
[싫어! 하지마! 이런 식으로 하는 거 정말 싫어!]
[......]
찌꺽찌꺽.
화장실안에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반면에 현성이는 대꾸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응... 제발... 하지마!! 엉엉~]
결국 난 눈물이 났다.
잠시나마 마음이 갔던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날 대우한다는 게 속상했다.
억울했고 내 자신이 싫어졌다.
/내가 이런 사람으로밖에 보이질 않는 건가... 내가 변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런 고통은 계속 되려나봐.../
한번 터진 울음은 쉽게 가라 앉지 않았다.
[이래도? 이래도 하지마? 몸은 반응하면서 말로만 하지말라는 거 봐 크크...]
찌꺽찌꺽.
[하지마 이 새끼야! 흐응... 하지마!!]
난 펑펑 울면서 몸을 비틀어댔다.
[펑펑 울 정도로 좋은 모양이네~]
자신감이 듬뿍 묻은 목소리였다.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녔어?! 흑흑... 왜 내가 싫다는데 이렇게 강제로 하는 거야?]
[크크.. 웃기시네~ 니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서 허리 흔드는게 한 두번이냐? 더 이상은 안 속아~]
[악!]
지금까지 손으로 애무를 해 한껏 달아올라 열기가 머물러 있던 아래 부위의 열기가 순간 온 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아! 들어왔어...! 들어온거야.../
[크흐... 아! 좋다...]
[흐윽! 하지마... 제발...]
[어제처럼 나 좋아한다고 말해봐!]
[이 잔인한 새끼야! 날 좋아하는거면 이래선 안되잖아! 내가 싫다는데!]
난 여전히 울면서 말했다.
[썅년.. 꼴갑떠네...]
현성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피치를 올려댔다.
내 몸은 서서히 포기하게 되었다.
[흑...흑...]
/아흥... 근데 왜 더 이상 흥분이 안 올라가는 거지? 규철이랑 할때는 너무 다른데?/
내 마음 속 한켠에서는 이상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은 현성이와 했던 게 생각이 나질 않잖아! 오늘이 처음인거야 나한테는.../
난 두 손으로 세면대를 짚고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빠져나오려 힘을 썼다.
[그만해 제발! 부탁할게... 나 이런 식으로 너에게 당하고 싶지 않아...]
난 손을 모아 빌기까지 했다.
그 순간.
[나 싼다!! 아흣... 어휴...]
내 뒤에서 미지근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튀었다. 엉덩이에도 등에도.
[후우... 후우...]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더니 거실의자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는 현성이었다.
난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좋았냐?]
[......]
난 조용히 흐느꼈다.
/이젠 나 어떻게 해야할까... 외형이 바뀌어도 주위에선 날 함부로 대하는 게 똑같은 걸.../
[좋았으면서 부끄럼타긴...]
[......]
/근데... 솔직히 난 느끼지도 못했어... 지금까지 니가 해준 기억이 없는 건... 규철이나... 그 새끼나... 기억이 나는데.../
난 떨어져있는 샤워타올을 슬며시 끌어 두르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대꾸도 없냐?]
[이제... 그만 가...]
난 침대머리에 앉으며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말을 했다.
그 때, 갑자기 수건이 홱 벗겨지며 현성이가 내 가슴을 잡아챘다.
[악! 아퍼!]
[너 자꾸 그럴거냐?]
[내가 뭘?]
[니가 뭔데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화가 난 듯한 현성이의 모습에 난 잔뜩 얼어붙고 말았다.
[......]
[오냐오냐 봐주니까... 씨발년이... 내 밑에 깔려서 신음소리 흘리고 좆 구걸하는 주제에 성질 돋구고 있어 쌍년이! 평소에도 여자는 쌕 할때처럼 하는거야 알아들어? 알아들었냐고!!]
[......]
난 내 얼굴 앞에서 소리지르는 현성이에게 새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는 현성이를 한동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제 왜 나랑 데이트하는 것처럼 불러냈어?]
난 조심스럽게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이불을 살며시 당겨서 가슴을 덮은 뒤 화가 난 원인이었던 사건을 물었다.
[원래는 친한친구인 승욱이한테 너랑 친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승욱이가 너한테 관심있으니까~]
[근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구?]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씨발... 그런 말투로 말하지 말랬지?]
순간 내 얼굴은 오른쪽으로 휙 꺾였다. 내가 왼뺨을 맞았다는 사실은 찰나가 지나고 고통이 뇌를 울린 다음이었다.
[......]
부들부들.
예전의 기억이 눈 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난 흐트러진 머리가 얼굴을 덮었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할 정신은 없었다.
난 소리죽여 눈물을 흘렸다.
예전에도 이런 상황에서 소리내어 울면 더 안 좋은 상황을 맞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흐느낌이 조금씩 줄어들자 현성이가 말을 이었다.
[니가 승욱이 연락 다 씹었다며? 술 먹쟤도, 하룻밤 같이 놀자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고 그러더라? 난 널 불러내면 나오는데 그래서 좀... 아 씨발 남자들은 그런거 있어...]
/그래서... 내가 나와준게 너한테는 전리품 같은거였네? 괜히 오해했구나.../
[씨ㅂ...]
또르륵.
/몸이 먼저 가고... 겨우겨우 마음도 따라갔는데... 난 얘한테 그냥 아무 의미도 아니었던 거구나.../
[왜 또 우냐?]
[그냥 오늘은 가주라~ 제발 부탁할게...]
[아직 내 말 안끝났어!]
[그럼 빨리 얘기하고 가!]
[어차피 어제 너 찾으러 나왔기 때문에 소문 다 돌았을거야... 너 어차피 이제 내 깔이야... 그 말 하려고 왔어...]
[...깔이라는 말은 뭐... 내가 니 여자친구라는 말이야?]
[뭐 비슷해...]
/...... 뭐야... 사귄다는 말을 이런식으로 하는 거야?/
매너도 무드도 없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나 군대 환송 파티 겸 술자리 있어~ 같이가자...]
[군대?]
여전히 화끈거리는 내 뺨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있었는데 엎친데 덮친격인지 군대라는 두 글자는 충격 그 자체였다.
[어... 솔직히...음... 내가 말 안하고 가려고 했는데... 니가 어제 그렇게 가버린 바람에 너네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결심했어... 내꺼 해야겠다고... 그만큼 고민 많이 한거야... 너 생각해서...]
현성이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 말을 꺼냈다.
[...언제 가는데?]
[이번주 목요일에~]
/...!!!/
[야! 그냥 가지... 왜 나한테 말해...]
억울했다.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이 남자가 정말 미웠다.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현성이 품에 안겨서 한동안 울었다.
90.
샤워를 하고 나왔다.
난 눈도 부은 것 같았고 뺨도 화끈거려 정말 가기 싫었지만 옆에서 계속 보채고 협박하고 구슬리는 현성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현성이는 내 옷마저 자기 마음대로 입히려고 했다.
[야! 이거 입어라~]
현성이가 꺼내든 옷은 어제 입으려 몸에 댔다가 짧다는 촉감이 들어 말았던 흰색에 남색으로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면 스판 슬리브리스 원피스였다.
[너 정도 몸매 되는 년들이 이런 것 좀 입어줘야지~ 다리라인 되지, 골반라인 되겠다... 뭐...가슴은 좀 작지만...]
[싫어... 내꺼 아니야... 나한테 그리고 짧아...]
[야! 원래 짧게 나오는 거야 이런게... 니 친구년 좀 본받아라... 봐봐~ 걔는 스타일이 되잖아!]
[알았어, 알았어! 입으면 될거 아니야!]
[너 어제 했던 브라하면 가슴 좀 커보이더라. 그거 해!]
[아 싫어! 검은색이라 비치잖아!]
계속 티격태격하다가 결국은 현성이가 원하는 대로 입었다.
[너 나 자체를 좋아하는 거 아닌 것 같애...]
옷 매무새를 만지면서 슬픈 감정이 들었다.
[어! 당연하지... 난 꾸민 여자를 좋아해~ 니가 날 좋아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입어줘야 되는거 아냐?!]
/...!!/
[알,알겠어...]
말은 알겠다고 했지만 적잖이 충격이었다.
[넘 짧다... 조금만 걷거나 팔을 올리면 엉덩이 다 보일 것 같애...]
걱정이 된 난 푸념을 늘어놓았다.
[지랄하네... 핫팬츠를 입는데 노팬티로 돌아다녔던 년이... 그거 가지고 오버하기는...]
[야! 자꾸 그럴래?!]
결국은 발끈했다.
[어쭈! 씨발년이... 콱 씨! 자꾸 기어오른다?!]
그런데 현성이는 공중에 손을 들어올려 날 때리는 시늉을 한다.
[꺅!]
[놀라긴...얼른 가자~ 늦겠어...]
[스타킹이라도 신으면 안될까?]
이대로 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제법 간절해졌다.
[마음대로 해... 근데 무지 더울텐데...]
[괜찮아... 맨다리로 나가는 것 보다 나을 것 같애... ]
서랍장에서 살구색 스타킹을 신은 뒤 한 번 더 옷 매무새를 고치고 하이힐을 신었다.
허겁지겁 서두르는 현성이는 내 가방마저 뺏더니 내 손을 잡고 엄청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난 짧은 원피스로 인해 옷까지 신경써야했다.
[야! 좀 천천히 걸어! 나 구두 신어서 빨리 못 걸어!]
현성이는 듣는둥마는둥 누군가와 통화하기에 바빴다. 난 힐을 신고 내리막길을 걸어내려가려니 중심 잡기가 힘들어 무릎이 벌어지고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갔다.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교복 입은 학생들과 남자들의 야릇한 표정과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억지로 다리를 오무리려고 노력했고 그럴 때마다 휘청이는 몸을 가누기 위해 현성이에게 몸을 기대게 되었다.
/아읏.. 쓰라려.../
발 뒤꿈치가 따끔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새 구두라 그런지 빨리 걸어서 그런지 발 뒤꿈치가 쓰라렸다.
[혹시 반창고 없지? 약국 좀 들러야겠어!]
[왜?]
[발꿈치가 까진 것 같아...]
[저기 편의점에서 사올게~ 기다려봐...]
[웬일이야?]
[아~ 담배가 마침 떨어져서 가려고 했었어~]
[쳇...]
/어쩐지.../
난 핸드폰 슬라이드를 밀어올렸다.
문자가 와있었다.
/잘사냐? 언제또술한잔해야지?/
규철이었다.
/잘지내~ 너도잘지내?/
답장을 보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답장이 왔다.
/나야니생각나서 잘못지내지ㅋㅋㅋ/
/무슨소리야?/
/니신음소리가머릿속에맴돌아서ㅋㅋㅋ/
/참나ㅋㅋ여친있다며?/
/여친이랑해도니상상하면서하거든ㅋㅋ/
/변태ㅋ/
/오늘저녁시간돼?/
/약속있엉/
/내일은?/
/저녁땐 괜찮아/
[뭐하냐?]
내 어깨를 툭 치는 현성이었다.
[어... 친구야...]
대충 얼버무렸다.
[얼른 붙여... 빨리가야지~]
[화장실 가야돼... 스타킹신었잖아...]
[그냥 저기 구석에서 해... 언제 화장실 다녀오냐! 이 근처에 개방화장실 있는 곳 없어...]
눈을 부라리며 명령조로 얘기했다.
[저기서? 아씨... 망 봐줄거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함께 들면서 쓰라린 발뒤꿈치를 끌고 절뚝이면서 건물 틈새로 들어갔다.
[보기 좋은데? 크큭. 걸레맞아 역시. 크크크...야외에서 스트립하는 거 같애...]
원피스 아래로 손가락을 넣어 스타킹을 끌어내리자 망을 보던 현성이가 쪼그려 앉아 한 마디한다.
흠칫.
오전부터 내게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몸과 생각을 파고들었다.
/밖에서 밴드 붙이랬다고 진짜 밖에서 스타킹 까내리는 나... 진짜... 걸레같아보이겠다.../
[얼른 붙여~]
쪼그려앉아 나를 위로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대꾸한다.
난 서서 붙이려던 생각을 접고 쪼그려 앉아 겨우겨우 밴드를 뜯어 빨갛게 물이 오른 발뒤꿈치에 붙이고 스타킹을 신으려고 했다.
[그거입고 쪼그려 앉으면 안되겠다 너~ 크크큭... 완전 야해~]
[......]
/아무리 남이 시킨 거지만... 이렇게 짧은 원피스를 입고 밖에서.../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이러지?/
난 당황한 나머지 후들거리는 손가락으로 스타킹을 다시 끌어올리다가 손톱에 걸려 올이 나갔다.
[야~ 올이 나갔다~ 것봐! 뭐하려고 신고나와서 고생하냐? 버리고 얼른가자!]
[......]
[뭐해? 왜 가만히 서 있냐? 도와줄까?]
현성이는 어쩡정하게 서 있는 내 다리쪽을 몇 번 쓰다듬더니 스타킹을 확 내려 벗겨버렸다.
뚝.
그와 동시에 머릿속 무언가가 외타래 실 하나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말이 없냐?]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길래 곰곰이 혼자 생각하고 있던 난 깜짝 놀라 말을 걸어온 사람을 쳐다봤다.
낯선 사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현성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현성이 친구들이라고 모인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현성이 여자친구라며? 전에 애들이랑 분위기가 묘하게 다른데?]
[무슨소리야?]
옆에 있던 다른 남자하나가 물어봤다.
[아니... 얘는 얼굴이 평범한데.. 묘하게 더 야해보이고.. 근데 뭔가 더 범접할 수 없는 느낌?]
[그래서 뭐~ 현성이 깔이면 똑같이 그런 류지~ 다를게 있겠어? 남자라면 사족을 못쓰겠지... 크큭~]
[야~ 너 도대체 몇 살이냐?]
[지겨워...후우...]
/내가 듣고 있는지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해대? 그리고 어려보인다는 거 이제 칭찬이 아닌 거 느꼈어...휴우... 머리 아프다... 씨발.../
[이 년이 뭐라는거야?]
[지겹다고... 술이나 줘!]
[역시! 화끈한 년이잖아!]
내 술잔에 맥주와 소주를 섞은 술이 따라졌고 그 위로 눈물 한 방울 떨어진 액체를 난 한 번에 들이켰다.
혜수예요!
13장은 나시에 반바지입고 차를 타면서 썼다면
14장은 레깅스에 외투를 입고 쓰네요~
그만큼 시간이 지나간 거겠죠?
추운데 건강 조심하시구요~
이번에 수아가 많이 울어요...
심경에 변화가 크다는 건데 잘 표현 되었는지는 의구심이 가네요~
나쁜남자란... 여전히 힘들어요~ ㅋㅋㅋ
늘 감사합니다^^
83.
[거 누구요? 야심한 밤에 아가씨 혼자 가는데 앞에서서 길을 막고 그러오?]
택시기사 아저씨는 조수석 창문을 내려 내가 곤경에 처한 상황인가 싶어 큰 소리로 얘기했다.
[아닙니다. 제 여친이예요. 연락도 없이 늦게까지 집에 안들어오길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영등포에서 출발하셨나요?]
검은 물체의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어이쿠. 미안하네 청년! 여자친구가 워낙 예뻐서 치한이라도 만나나 싶어서 그랬네... 이 놈의 오지랖이란...]
[아닙니다. 얼른 가세요~]
[여자친구 간수 잘하고... 술도 한잔 했나보던데... 그 시간에 영등포라면 뻔하잖는가?]
나를 잠깐 아래위로 훑으며 피식 웃고는 택시를 몰고 떠났다.
검은 실루엣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띄엄띄엄 서 있는 오렌지색 가로등으로 인해 얼굴은 환하게 보이지 않았다.
[... 집에 데려다 줄게~ 가자!]
한참동안 내 쪽으로 몸을 돌린 후 말 없이 서 있던 실루엣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콩닥콩닥.
찌르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심장은 왜 이렇게 빨리 뛰고... 나만 이러는 걸까? 쟤도 날 볼 때 이렇게 두근거릴까?/
아랫배에서는 계속 전율이 일어나고 있었다.
집으로 걸어올라가는데 전율이 일때마다 다리가 무의식적으로 꼬여 오른발은 왼발 바깥쪽으로 내딛었고 왼발은 오른발 바깥으로 내딛으며 올라갔다.
게다가 술기운 때문인지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눈은 자꾸 감겼고 다리는 점점 느려져 가는게 느껴졌다.
실루엣은 조금씩 멀어졌다가 내가 뒤처지는 걸 느끼면 걷는 속도를 줄여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앞서서 걸어갔다. 어느 순간 실루엣을 보니 넓은 등과 상대적으로 가느다란 허리로 인해 역삼각형처럼 생긴 등을 자연스레 바라보게 되었다.
/아... 힘들어... 등이 참 넓네... 업혀보고 싶다.../
[...!! 미쳤어... 으이그...]
난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등이 좀 어둡지 않냐?]
[으응..? 괜찮아. 충분히 넓어... ...!!!]
갑자기 현성이는 "등"에 대해 내게 물어 왔고 무심코 난 내가 생각하던 것이 입밖으로 나왔다. 등이라는게 가로등을 얘기한다는 건 말이 끝나는 동시에 알아챘다.
[응? 무슨 소리 하는거야?]
/아씨... 쪽팔려.. 못 알아챘겠지?/
난 고개를 푹 쳐박고 걷다가 쿵 하고 머리를 부딪혔다.
머리를 들어 앞을 보자 멈춰선 현성이의 가슴 앞이었다.
[너 늦게까지 술 쳐먹고 오더니 귀까지 먹었냐 쌍x아? 크큭~ 내 등이 넓어보였어?]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또 시작이야? 안 그래도 창피해 죽겠는데.../
[... 하나도 안 웃기거등?]
난 어느새 적응이 되는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업어줄까? 이 오빠 등에 한번 업히고 싶지?]
[흥! 됐거든요! 이제 집에 거의다 왔는데 뭐... 들어갈게~]
[야~! 아씨 사람 민망하게 반응이 그게 뭐야! 야야~ 잠깐만! 내가 너 두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그냥 들어가기냐?]
현성이는 볼 멘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누가 기다리래?]
난 마음과는 다른 말이 계속 입밖으로 나왔다.
[씨x, 할 말이 있어서 좀 기다렸다! 전화도 안 받고 화가 끝까지 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을 끊는 현상이었다.
[근데 뭐?]
[씨x, 쪽팔리게...아냐...]
멋쩍은 듯이 뭔가 혼자 중얼거렸다.
[......]
[......]
나랑 현성이는 잠시동안 서로를 쳐다봤다. 현성이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말하지는 않았다.
[뭐... 여기까지 바래다준건 고마워~ 할 말 없으면 들어가볼게! 잘 가!]
난 두근대는 심장소리 때문에, 더 이상 힘겹게 올리기를 거부하는 눈꺼풀때문에 얼른 들어가고 싶었다.
[야! 내일 야구장으로 와라! 4시까지 잠실로 와! 안오면 알지?]
다급한 현성이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데이트 신청일까? 나 혼자 오바하는 거 아니겠지? 침착해침착해!!/
[나 피곤해... 내일 연락해줄게~]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두근대는 심장소리를 감추려고 얼른 말하고 들어왔다.
[야! 나 생각해서 이쁘게 입고 와!]
찰칵. 삐리릿.
/이게 말로만 듣던 데이트? 야호!! 첫 데이트다!/
난 들어오자마자 현관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84.
재민이가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공동 휴게실에 들어왔다. 친구들은 재민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너 왜 그래 임마!]
[혼이 나갔네 이 새끼~ 크크]
[보영이가 뭘 해줬길래 그러냐?]
[오늘 첫 데이트라며?]
남자 녀석들이 호들갑을 치자 주위에 있던 여자애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재민이, 좀 부럽다 너?]
[첫 데이트라고?]
그 왁자지껄한 가운데서도 아무 말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재민이었다.
[새끼! 형님들한테 말 좀 해봐봐!]
재민이는 조금 더 뜸을 들이더니 말을 꺼냈다.
[날 좋아한다고 얘기하고, 헤어지기 전에 키스... 했어!]
[꺄울~~]
[어머어머... 웬일이야!]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봐봐~]
[얼음마녀 보영이가 너한테 키스를 했다니! 뭔일이 있었던 거 아냐?]
한동안 소란스러운 소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공간 한 쪽에서 난 남몰래 눈물을 닦았다.
그 날은 나와 보영이가 학생부장 선생님께 불려갔던 다음날이었다.
85.
/아우... 눈 따가워.../
간밤에 잠을 설쳤다.
남아있던 기억이 꿈으로 떠올라서였는지, 데이트를 한다는 것 때문이었는지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에 들었던 게 기억났다.
먼발치에 있는 시계를 보자 11시.
/쇼핑 좀 해야되는데.../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시간이 없어!]
몸은 피곤했지만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후다닥.
화장실에 들어와서 움찔한다.
예전에는 병실 화장실 거울은 떼버릴 정도였고, 밖에 나와서도 화장실 갈 때마다 신경쓰며 갔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화장실에 들어왔다가 거울을 보고 놀라는 정도가 되니 새삼스레 내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건 그거고... 걱정될 정도네 이건.../
소변을 보기위해 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앉자 허옇게 말라붙은 것이 깜짝 놀랐다.
/피곤해서 어제 들어오자마자 잤더니... 어제 현성이가 데려다 줄 때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던 게... 그거 때문인가?/
[도대체 내 몸은 어떻게 돼 먹은거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팬티는 벗어둔 채 나잇가운을 벗고 샤워를 시작했다.
/너 샤워할 때 안에도 좀 씻고 해라. 어휴... 말 안하려 했는데.../
물줄기에 몸을 갖다대자 어제 규철이가 나한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쪽팔려...]
/질 내부는 염기성이라 비누로 씻는 건 좀 안 좋을텐데... 혹시 보민이가 쓰는게 있을까?/
보민이가 쓰는 샴푸와 바디워시 같은 것을 모아두는 통을 보니 다른 통보다 비교적 조그마한 흰색 통이 보였다.
/혹시 이건가?/
흰색 통을 꺼내보니 의약외품이라고 적힌 통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조그마한 글씨로 "여성 산성세정액"이라고 설명이 적혀있었다.
[찾았다! 운 좋다~]
뚜껑을 여니 초록색 액체가 담겨 있었고 냄새는 향긋한 오렌지 향기가 났다.
/음... 어떻게 씻으면 되지? 손에 묻혀서 넣어야 되나?/
왼손에 조금 덜어 검지와 중지 손가락에 세정액을 묻혀 구멍 안으로 밀어넣었다.
미끌미끌.
곧 화장실 전체에 오렌지 향기가 가득퍼졌고 보지 부근에는 거품이 일어났다.
깨끗이 씻어 내기 위해 구석구석 손가락에 세정액을 묻혀 문질렀다.
[아흥!]
난 깜짝 놀라 얼른 아랫도리에서 손을 떼고 샤워기를 위로 향하게 하고는 거품을 씻어 냈다.
[아흣!]
강한 물줄기가 순간 머리로 자극을 보냈다. 지난번 내 아랫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빨아줄 때 느낌이었다.
/아~ 좋아.../
찌릿찌릿하면서 몸이 들뜬 기분이 들었다.
[아응...]
/그리고는... 여기에다 길고 딱딱한 게 들어간다면... 훨씬 큰 자극이 올텐데.../
[하아... 하읏...]
난 한동안 샤워기를 놓지 않고 머리로 올라오는 흥분감을 느꼈다.
[헉! 하응~]
세정액을 씻어내기 위해 한 손으로는 샤워기를 잡고 다른 손 손가락을 안쪽으로 밀어넣자 좀 더 강한 흥분감이 밀려왔다.
/아흑! 미쳤나봐.../
손가락이 들락날락할 때마다 내 눈 앞에 규철이 얼굴과 자지가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나를 향해 욕망과 정복감이 가득 찬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좀 더... 조금만...]
/씹x년... 결국엔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도도한 척은...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크크.../
갑자기 내 상상 속에서 종진이 갑자기 나와 나를 보고 비릿한 웃음을 날렸다.
그 순간 난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가락을 뺐다.
/그 새끼가 왜 떠오른 거지?/
의아했다.
[도도한 척이라...]
흥분은 순식간에 가라앉긴 했지만 여전히 미끈거리며 흐르는 액을 느끼고 흐르는 물에 씻어냈다.
/그 새끼한테 고마워 해야하나? 참! 그건 그렇고... 그러고보니 난 왜 현성이랑 한 기억은 없는거지?/
[이상하네...풋...]
내 스스로도 의미를 알듯 말듯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지었다.
평소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린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화장실에 가득찬 수증기도 나와 같이 밖으로 넘실넘실 흘러 나왔다.
그리고 어제 입었던 브라를 하고는 애액이 덕지덕지 붙은 팬티 대신 다른 브라세트의 팬티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난 뒤, 이런저런 옷을 옷장에서 닥치는 대로 꺼내봤다.
/이쁘게 입고 와~/
어제 헤어지기 전에 내게 했던 현성이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연한 하늘색의 제깅 팬츠, 저번에 보민이랑 샀던 3부 청바지, 화이트 진, 섹시블루 원피스, 스판재질 미니스커트, 진 스커트들도 침대 위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 뭐 입지? 신발은 사러 갈거구... 야구장에 갈 때는 밖에 앉아 있으니까 시원하게는 입어야 할 것 같고... 그렇다고 짧은 스커트나 원피스를 입으면... 시원하긴 할텐데... 아냐! 앉아있을 때 신경쓰이고 불편해...]
예전에 보민이 말도 있고 해서 짧은 바지를 입기로 했다.
[위에는 뭐 입지?]
이리저리 옷걸이를 뒤지다보니 루즈핏의 얇은 니트 소재로 된 흰색 오프숄더 매쉬니트티가 회색 무늬가 포인트되어 눈에 띄었다. 좀 더 뒤져보니 정반대의 느낌의 스판 느낌이 약간 있는 검은색 브이넥티가 보였다.
[보민아~ 자꾸 니 옷 뺏어서 미안해~]
혼잣말을 하고는 티 두 개를 꺼냈다.
시계를 얼핏 봤다.
1시.
[으악! 늦겠다. 신발도 사야되는데...에휴!]
허둥지둥 브이넥티를 먼저 입어봤다. 보기보다 타이트한 느낌이 들면서 브라 바로 위쪽 가슴까지 옷이 덮이지 않았다.
[너무 많이 파였나?]
브라 때문인지 가슴부분이 도드라져 보였다.
브이넥 티를 벗고 매쉬니트티를 입었다. 루즈한 핏이라 몸매는 드러나진 않았지만 한쪽 어깨에 걸쳐진 옷은 대각선으로 다른 쪽 팔까지 내려와있었다.
입기전에는 몰랐지만 입고나니 매쉬니트라 그런지 사이사이 공간이 꽤 넓었다. 가슴부분은 그나마 촘촘히 짜져있어 검은색 브래지어가 옷 밑으로 조금씩 비쳐보였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성기게 짜여있었다.
/예쁘다~ 이거 입어야지.../
옷 끝에는 끈이 달려있었고 숏 팬츠 위에 얹히게끔 끈으로 묶어냈다.
허둥지둥 선크림과 비비를 순서대로 조금씩 펴바른 후 대충 머리를 손으로 털며 말렸다.
/휴~~ 머리칼만 보여도... 드라이기로 말리면서 머리 손질할 수 있을텐데.../
[왜..? 예쁘게 보이고 싶나봐?]
거울 앞에서 보이지도 않는 나를 보고 포즈를 잡아본다.
86.
난 가방을 챙겨서 쪼리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신발사려면... 신촌까지 갔다가 가야되는데... 네 시까지 빠듯하겠다.../
[어떡하지?]
/아! 혹시... 매장이 강남에도 있지 않을까?!/
[물어보면 되겠다~]
마을버스를 타러 내려가면서 핸드폰에 온 문자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신수아 고객님 안녕하세요?]
굉장히 활달한 목소리로 전화를 응대하는 남자직원이었다.
[아... 네? 근데 제 이름을 어떻게...]
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내 이름을 얘기하는게 궁금했다.
[고객 관리차 전화번호 알고 있었습니다~]
[아...네...]
조금은 의아했지만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어떤 이유때문에 전화주셨나요?]
[제가 구두를 좀 사야되는데요... 신촌까지 갈 시간이 안되서 혹시 강남에도 매장이 있나요?]
[아... 그러시구나...]
약간은 소리가 줄어든 목소리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없나요?]
[압구정에 하나 있구요. 무역센터에도 매장이 하나 있으세요~]
[무역센터면 코엑스인가요?]
[네... 코엑스예요~ 근데 저희 매장에 오시면 더 싸게 해드릴 수 있는데 오시지 그러세요~?]
[네 시까지 잠실까지 가야해서요... 시간이 안될 것 같아요~]
[아~ 네 시까지요?]
[네! 무튼 감사합니다!]
[신수아고객님? 잠깐만요~ 신상품 종류도 저희가 더 많고 더 저렴하게 드릴테니까요~ 이쪽으로 오세요!]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네 시까지 가야된다구요~]
[음...이런 적은 한번도 없는데요~ 수아씨만 괜찮으시면 제가 오늘 출근할 때 바이크를 끌고 왔어요... 오시면 마음껏 쇼핑하시고 시간 맞춰서 제가 잠실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잠깐 생각하더니 의외의 제안을 한다.
/수아씨? 참나.../
상당히 급했는지 갑자기 수아씨라고 응대한다.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데요?]
[20분이면 충분히 도착합니다.]
[고민해볼게요~ 얼마나 싸게 해주실 수 있으신데요?]
[여러 켤레 사신다면 그 중 몇 켤레는 직원 할인가로 드릴게요~]
[치~ 두리뭉실하게 얘기하신다...]
[일단 오세요~]
[감사합니다~ 고민해볼게요~]
탁.
/나중에 사야겠어... 벌써 한 시 삼십분이 넘었는데 가는데 한 시간 가까이 걸리잖아?/
/그래도 많이 깎아준다는데... 어차피 강남 가더라도 한 시간 쇼핑할 거 아냐?/
[현성이가 어딨는지 먼저 전화해봐야겠다... 좀 늦는다고 그러면 되지않을까?]
띠루루루.
[어! 왜?]
[어딘데?]
[난 이미 강남에서 놀고 있지~]
[누구랑?]
[참나.. 그런건 왜 묻냐? 아는 사람~]
[치... 여자구나?]
[썅년이~ 남자거등?]
[알겠어... 언제까지 거기로 가면돼?]
[네 시쯤? 그때까지 와~]
[알았엉~ 거기가서 전화할게 그럼~]
[니 알아서 해~]
/네 시쯤 오라고 했으니까 네 시 좀 넘어도 되겠네~ 그럼 신촌 가자~/
일요일 이른 오후라 그런지 버스에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지는 않았다. 차도 생각보다 덜 막혀서 예상보다는 일찍 신촌에 도착했다.
/와! 좀 더 길게 쇼핑할 수 있겠다. 헤헷~/
슬라이드를 밀어올리니 두 시 반이 채 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강한 햇살 때문에 눈이 찌푸려졌다. 가로수 그늘로만 골라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내려갔다.
[눈이 부신데... 선글라스도 하나 사야겠어~]
주말이라 신촌은 사람이 정말 많았다. 좁은 인도를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들과 부딪혔다.
게다가 몇 걸음 마다 떨어져 있는 노점상들 때문에 엉킴이 더 심했다.
사람들 중에는 천천히 이동하는 것을 참지 못했는지 빨리 가려다가 가방이나 팔꿈치, 손등 같은 부위로 사람들 어깨나 팔, 골반이나 엉덩이를 툭 치거나 밀치고 지나갔다.
[앗...!?]
순간 허벅지에 얼얼한 느낌이 들어 보니 내 옆을 지나가려는 남자가 멘 노트북 가방이 내 허벅지를 친 듯 싶었다.
얼마나 정통으로 맞았는지 근육이 뭉쳐 맞은데로 주변의 근육들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씨... 넘 아프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남자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씨x새끼...]
절뚝절뚝 힘겹게 백화점 일층에 도착했다.
/아프다...힝.../
절뚝이는 걸음으로 일층에 들어서자 코너에 조그맣게 이월상품 선글라스를 팔고 있었다.
[언니~! 언니는 얼굴이 동그라니까 약간 각진 선글라스가 어울려. 이런거~]
내가 가니까 자매인듯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서서 선글라스를 보고 있었다.
[다른데 가서 보자. 좀 비싸다~]
두 여자는 날 지나쳐서 금새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오세요. 고객님~ 저희 이월 상품이라 40% 할인 들어가 있어요~ 한번 보세요~ 방금 가신 저 분처럼 고객님도 얼굴이 둥근 편이셔서 요런 스타일 잘 어울리실거예요~]
점원이 가리킨 곳을 내려다보니 안경알이 내 손바닥만한 크기의 선글라스가 있었다. 그 중에 하나 골라서 써봤다.
[언니~ 잘 어울려요?]
[어머...! 손님이라 아부떠는 게 아니라 진짜 잘 어울려요... 손님 얼굴도 작아서 잘 어울리시네요...]
[진짜요? 치... 좀 더 볼게요~]
난 선글라스를 모양만 이것 저것 골라서 보고는 써보지는 않았다. 매장 직원은 계속 착용해보라고 얘기를 했지만 보이지도 않는 얼굴을 들여다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까 잘 어울린다고 했던 선글라스가 디자인도 예쁘고 무난한 느낌을 계속 받았다.
[아까 그거 주세요~]
[이 제품은 30% 할인되는 물건이예요~ 완전 저렴하게 드리는 거거든요~ 괜찮으시죠?]
[얼마인데요?]
[30% 할인하셔서 17만1000원이세요~]
[헐... 그게 싼 거예요?]
/그럼 원래 가격이 24만원이 넘는 거잖아?/
[이 제품, 이 가격으로 다른데서 못 사요~ 올 여름 가장 따끈따끈한 상품이었거든요~?]
[네... 주세요...]
/내가 현성이 너 만나러 간다고 엄청 신경 쓴다!/
핑계아닌 핑계를 대며 텍을 떼고 계산이 끝난 선글라스를 꼈다.
매장 안에 잔뜩 켜놓은 불빛의 눈부심도 어느정도 차단해주는 선글라스가 내 눈을 좀 편안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구두 매장이 2층이었지?/
상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예전에 바지가 찢어 졌던 곳이 눈에 띄었다.
/에이씨~ 지금 생각해도 쪽팔리네~/
난 선글라스를 한 번 더 치켜올리며 시선을 돌리고는 구두 매장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고객님!]
[어떤 종류로 보시나요?]
나에게 인사한 한 명은 나를 지나쳐갔다.
[어서오세요 고객님!]
/응?/
뒤를 돌아봤더니 어떤 남자가 서너걸음 뒤에서 날 뒤따라 들어왔다. 눈이 내 엉덩이 쪽을 바라보다 내가 돌아서자 눈에 띄게 당황하며 내 눈과 마주쳤다.
/뭐야?/
난 혹시나해서 바지 매무새를 고쳤다.
[원하시는 스타일의 구두가 있으신지 둘러보세요~]
친절하게 남자 직원이 안내해준다.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 둘러보라는 말에 조금은 짜증이 났다.
[그냥 전 원피스나 스커트에 신을 구두가 필요해요~]
[아... 그러세요? 저희가 골라드리는 것보다 원하시는 스타일이 있으실 것 같은데... 의외시네요~ 이쪽으로...]
의아하다는 듯이 직원이 대꾸한다.
[이쪽 라인 구두 어떠세요? 마음에 드는 것 골라보세요~]
직원은 날 흘깃흘깃 쳐다보며 구두 진열대 앞에서 얘기했다.
/와~ 예쁘다!!/
금색 힐로 포인트 된 검은색 구두가 내 눈에 띄었다.
[기본 스타일에 포인트로 들어가서 많이 찾으시는 신상품입니다.]
한동안 구두에 흠뻑빠져 이것저것 신어봤다.
최종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두 켤레 정도였다.
계산을 하려고 마음 먹자 그제서야 매니저가 생각나 두리번거렸지만 태워다 준다고 약속했던 매니저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온 이유가 태워준다는 약속 때문인데.../
[저... 근데 매니저님은 안 계세요?]
[잠시 자릴 비우신 것 같은데 무슨일이시죠?]
[......]
시계를 보니 네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괜히 왔나봐... 생각해본다고 해서 그런가.../
[약속에 늦겠다...]
난 안절부절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요 고객님?]
옆에 있는 점원은 갑자기 당황하는 날 보며 말을 건넸다.
난 지금이라도 택시를 타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매장을 나서려고 했다.
[저...혹시?]
고민하던 그 때, 내 뒤에서 등에 살며시 손을 대면서 움직이는 나를 멈춰 세웠다.
[수아씨 맞네요! 선글라스 껴서 바로 못 알아 봐서 미안해요!]
매니저 였다.
[왜 이제 온거예요?]
난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구두는 고르셨어요?]
약간 당황한 듯 매니저는 구두를 골랐는지 물어봤다.
[네... 웨지힐이랑 저거요...]
옆에 서 있던 점원이 들고 있는 구두를 가리켰다.
[계산 먼저 해 드릴게요~ 수아씨! 둘 다 신상품인데 제가 한 켤레는 직원 할인가로 드리고 하나는 기본 할인가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더 비싼 걸 직원 할인가로 드려야겠죠? 이 구두를 직원할인 삼십프로하면... 이십육만삼천이백원이구요~ 웨지힐은 주말 할인가 오프로 하면... 이십팔만삼천백원이예요!]
[얼른 계산하고 데려다줘요... 늦겠어요...]
난 초조함에 사로잡힌 채 얼른 카드를 내밀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매니저는 더욱 여유롭게 구두를 포장하고 준비하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늦었다구요!]
[갑시다!]
싱긋 웃으며 카드와 영수증 구두가 담긴 백을 건네주며 날 이끌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우리는 바이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자! 여기 헬멧... 참! 밖에서는 말 놔도 되지?]
[마음대로...]
난 헬멧을 받아들고는 머리에 썼다.
/짧은 반바지라 타고 가면서 바지가 밀려올라갈 것 같은데.../
[니 신발이랑 가방은 안에다 넣자~]
매니저는 안장을 들어올리더니 내 손에서 짐을 뺏어서 안에 있는 공간에 짐을 밀어넣었다.
[됐다! 뭐... 짧지만 반바지니까 상관없겠지~ 얼른 타! 늦었다며?]
낑낑대며 안장을 닫고는 날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먼저 올라탔다.
정장에 구두를 신은 남자가 헬멧을 쓰고 바이크에 앉아 있는 모습은 약간 어색했다.
[알았어... 첨 타보는 거라 어떻게 타야될 지 몰라...]
[풋...그냥 자전거 올라타는 거랑 똑같다고 생각하면 돼]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날 보더니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가르쳐 준다.
난 자전거를 생각하면서 올라타려고 바이크 옆에 서보니 의외로 생각보다 바이크가 높지 않아서 다리만 길게 뻗어 올려서 앉았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쉽게 올라타네 뭐... 거기 발 얹는 곳 있지? 거기다가 발 얹고... 꽉 잡아! 선글라스 안 떨어지게 조심하고~]
난 양쪽에 받침대를 찾아 발을 올리고는 매니저의 양복 옆쪽을 양 손으로 꽉 잡았다.
/말 타는 자세 같네.../
[아니... 그렇게 잡으면 떨어져... 팔을 넣어서 내 허리를 감아서 깍지를 끼든지 해서 잡아야돼...]
난 하라는 대로 바싹 당겨 앉아 매니저 등에 밀착해서 허리를 감았다.
[...이름이 뭐야?]
[응? 내 이름 몰랐어? 명찰 못 봤구나?]
[어...]
[승훈이야 조승훈...]
부릉부릉.
깜짝.
대답과 함께 시동을 켰는지 오토바이의 떨림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긴장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긴장 풀어~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깍지만 잘 끼고 있어!]
[......]
[출발한다!]
[꺅!]
순간 내 몸이 받는 가속도로 인해 몸이 뒤로 급격히 쏠렸다.
승훈 오빠 말대로 깍지를 안 끼고 있었다면 뒤로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풍기의 강풍보다 더 센 바람이 온몸을 휘감더니 급정거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떠보니 순식간에 지하주차장을 벗어나 신호등 앞에 멈춰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옆에 차들이 서있었다.
선글라스 때문에 몰랐는지 나와 눈이 마주친 운전자는 비릿한 웃음을 날리며 음흉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나를 쳐다봤다.
[...!]
내가 바지 밑단을 잡아내리자 그 운전자는 그제서야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신호등이 바뀌었는지 또 내 몸이 뒤로 쏠렸다.
[꺅!!]
86.
[야! 다 왔어! 종합운동장 역 5번 출구에 내려주면 되지? 대부분 여기서 만나니까~]
[어? 어... 고마워...]
내려서 시간을 보니 4시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걸 보니 승훈 오빠는 정말 빠른 속도로 도심을 질주 했던 것 같았다.
[야! 너 진짜 긴장했구나? 얼굴이 완전 상기 됐어! 크크크]
승훈 오빠는 내 얼굴을 보자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어... 처음 타본다고 했잖아!]
난 얼버무렸다.
사실 내가 얼굴이 붉어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동차 운전자들은 멈춰 있을 때나 달릴 때나 상관없이 입맛을 다시거나 음흉한 눈빛과 표정을 보냈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찝찝한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찝찝했던 처음 느낌은 없어지고 오히려 강렬한 엔진 진동과 함께 운전자들의 눈빛으로 인해 몸이 움찔움찔 자극이 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신호등 때문에 멈출 때마다 끌어내렸던 바지 밑단도 그냥 놔둬 버렸다.
[으이구... 너 바지 다 밀려올라갔다... 엉덩이 밑살 다보여!]
승훈 오빠는 안장 밑에서 내 짐을 꺼내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 내게 한 마디 했다.
[승훈 오빠가 갑자기 출발했다가 갑자기 멈췄다가 그래서 그렇잖아! 흥!!]
난 오히려 투덜대며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짐을 받아 들었다.
[남자 친구랑 보러온 거구나? 나중에 오빠랑도 한 번 놀러오자~ 연락할게!]
[응! 고마워 오빠! 근데 그냥 남자애야 남자 친구 노노~]
승훈 오빠는 내게 한 번 싱긋 웃어주고는 헬멧을 다시 쓴 뒤, 쏜살 같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짐을 어떡한다...?/
[혹시 보관함이 있을까?]
난 쪼리를 끌면서 지하철 역으로 내려갔다.
[아가씨, 표 구했어?]
어떤 아저씨 한 분이 히죽거리면서 내 옆에 서서 걷는다.
[......]
[스타일 죽이는 아가씨~ 표 못구해서 돌아가는 거 아냐? 시작시간 다 됐으니까 싸게 줄게~ 잠깐 일로와봐~]
[친구가 표 사놨을거예요~]
난 무시하며 걸어가다가 계속 따라오자 한 마디 했다.
[아 그럼 빨리 대답하지... 뭘 질질 끌어.. 씨발년... 아예 옷을 벗고 다니지? 브라자는 다 비치고...]
궁시렁거리며 돌아서는 아저씨의 말이 귀에 들렸다.
[뭐라구요?]
내가 쏘아붙였다.
아저씨는 못 들은 척 다른 커플에게 다가갔다.
/아...짜증나.../
짜증을 내며 두리번 거리다 보니 화장실 근처에 물품보관소가 보였다.
[하나 남았네?]
보관함이 모두 사용중인지 하나 빼고는 다 차있었다.
/여행용 가방 넣는 큰 곳인데.../
[어쩔 수 없지뭐...]
돈을 내고 마지막 남은 큰 보관함을 선택했다.
구두를 넣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가방만 어깨에 메고 문을 닫으려했다.
[저기! 잠시만요!! 혹시 두산팬 분이세요?]
어떤 남자 두 명이 닫으려는 보관함 문을 급히 잡고 말을 걸었다.
[네?]
[엘지팬 분이신가?]
[병신아~ 그게 중요하냐? 그나저나 저희도 물품 보관함이 필요한데... 이 근처에 싹 다 찼더라구요... 저희가 돈을 드릴테니 같이 보관해주시면 안될까요?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그럼... 연락을 어떻게...]
[나중에 경기끝나고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난 괜찮다며 억지로 손에 들려주는 오천원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였고 그 와중에 다른 한 남자는 뒷주머니에 들어있던 내 폰을 가져가서 자기 폰으로 전화를 건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같은 팬 분이시면 끝나고 한잔 하실래요? 고딩은 아니시죠? 후후후..]
내 폰 슬라이드를 밀어 내리며 말한다.
[전 팬 그런거 아직 없어요~]
난 빼앗듯이 폰을 집어 넣고 대꾸했다.
[그럼 두산팬 해요 저희랑~]
[나중에 해요~ 저도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왠지 말이 길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말을 잘랐다.
[그럼 경기 재밌게 관람하시고 좀 있다 뵈요~]
[......]
[거봐! 일행이 있을거랬잖아!]
내 뒷통수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난 두리번 거릴때 마다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한껏 느끼며 지하철 역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여기 버거킹 앞에 있엉~]
하하하호호호.
수화기 너머로 여자웃음소리가 같이 들렸다.
[누구랑 있어?]
[대학교 후배 두 명 만났어~ 이리로 와~]
뚝.
[뭐야...]
/나랑 데이트 하는게 아녔나?/
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난 입을 삐죽거리면서 버거킹을 찾았다.
[저기있다!]
현성이를 발견한 기쁨도 잠시, 나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없자 실망감이 크게 들었다. 현성이는 벽에 기대 서서 미소를 지으며 연신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그 앞에는 두 명의 여자가 연신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야구선수 복장처럼 옷을 입고 굉장히 오버스러운 몸짓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승욱이...?/
그 순간 내 쪽으로 승욱이가 고개를 돌렸고 깜짝 놀라는 나를 금새 알아본 듯 했다.
[여~ 오랜만이다?]
손을 흔드는 승욱이로 인해 나머지 사람들도 고개를 돌리거나 몸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승욱...씨, 안녕?]
호칭이 어색해서 씨를 붙였는데 더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어유~ 드레스 코드가~ 딱 내 스탈이네! 이리로 와봐요~]
승욱이는 내 손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내 어깨에 팔을 걸고는 소개를 한다.
[여기는 내 친한 친구 수아! 쟤들은 우리과 후배 지민이와 효진이! 인사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승욱오빠 친구라는데 몇 살이세요? 동갑?]
현성이 옆에 서있던 예쁘지만 눈매가 날카롭게 생긴 효진이라는 애가 말을 꺼낸다.
[......]
순간 기분이 굉장히 불쾌했다.
/저 표정... 저 말투.../
익숙하지만 익숙해질 수 없는 눈매.
[여자들끼리도 나이 묻고 그러냐? 남자들 보고는 나이 묻는거 실례라며?]
옆에서 승욱이가 불쑥 끼어든다.
[여자들끼린 서열 정리가 필요하거든... 왜 이런데 꼭 남자가 끼어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치?]
효진이는 지민이에게 말을 건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난 현성이를 슬쩍 쳐다봤다. 현성이는 꽁초를 발로 밟아 끄고 있었다.
87.
[얘! 넌 몇 살이니?]
[저 열 살이예요...]
[수아니? 수아는 몇 짤이예여?]
[...그런 어투 들을 나이는 지났거든요? 아 짜증나...]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내가 불쌍해 보여요? 왜 상대방은 원하지도 않는데 동정을 하고 그래요??]
88.
발로 담배 꽁초를 비벼 끈 현성이는 주저주저 하던 나를 보고는 한 마디 했다.
[이 썅년이 얼마나 도도한지 나한테 오빠라고 한 번도 안하더라... 너희한테 좀 배우라고 하고 싶네...]
[아 진짜요? 그럼 우리랑 동갑?]
지민이가 말을 거든다.
[몰라~ 너네가 올해 입학한 11학번이잖아?]
현성이는 어물쩍 넘어가려는 듯 승욱이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야! 넌 무슨 학번이야?]
눈치 못 챈 승욱이는 본인도 내 나이가 궁금했던지 물었다.
[난 대학 안다니는데...]
[아~큭.. 그럼 직장다니나봐요?]
효진이는 재밌다는 듯이 물어본다.
[그럼 너희는 몇 년생이냐?]
승욱이가 물었다.
[우리는 92년생 이죠~]
효진이는 바로 대답했다.
[아~ 맞어! 쟤 91년생이야~ 저번에 민증 본적 있엉~]
현성이는 서둘러 말해주었다.
[에이씨ㅂ.... 우리보다 언니잖아? 우리보다 나이도 많은데...]
효진이는 지민이 귀에대고 속닥거렸다.
[이제 들어가자~]
현성이가 앞장 서 걷자 효진이와 지민이는 재빨리 현성이 팔짱을 끼고 걸어갔다.
[두산팬! 그럼 우린 저리로 간다!]
승욱이는 내 손을 잡고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뭐야? 왜 우린 다, 다른데로 가?]
난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내가 엘지팬이니까... 표를 구하다보니까 현성이 저 자식이 두산쪽에다가 세 자리를 예매해놨더라고... 난 그것도 모르고 왔다가 봉변당했고... 그래서 나는 엘지쪽에다가 두 자리 암표 샀고 두 명 남길래 우리 과후배 두 명 부른거야!]
[난 근데 왜 너랑 보러 가는 거야?]
[쟤네 둘이 두산 광팬이래서.. 너는 그런거 없다며? 오늘부터 나랑 엘지팬 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승욱이가 말했다.
/내일 예쁘게 하고 4시까지 와!/
[......]
고마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머리 끝까지 화가난 나는 아무말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선글라스도 벗어서 가방에 넣어버리고 보관함에서 구두를 꺼내고는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89.
[띵동띵동~ 등기입니다. 계세요?]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10시.
깜짝 놀라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 주무시고 있으셨구나...크흠... 등기라서... 여기 사, 사인 좀 부탁드려요...]
갑자기 당황한 우체국 아저씨는 얼른 사인을 받고 나갔다.
[네... 고맙습니다...]
딸깍. 삐리릿.
/연작고등학교. 신수아 학생 귀하... 입학안내문 재중.../
[드디어 왔구나~ 근데 뭐이리 얇어?]
봉투를 뜯어보니 종이가 두 장 있었다.
하나는 편지였다.
[신수아에게... 반갑다. 선생님은 김기웅 선생님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아직 널 본 적 없지만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똘똘하고 적응 잘할 것 같다고들 이야기하셔서 기대가 된다. 개학은 8월 마지막주 월요일이란다. 반년이지만 이것도 사제간의 인연이니 잘 부탁한다! 또 다른 종이에 적혀있는 수업료랑 기타 제반 사항들은 참고만 하고 학교오면 처리할 수 있도록 하자. 교복입고 등교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보자~ 얼마 남지 않은 방학 잘 보내렴~]
[뭐야~ 웬 유치하게 손 편지? 컴퓨터로 쳐도 될텐데...]
다음 종이를 보자 나도 모르게 김빠지는 소리가 났다.
[헐! 수업료가 왜 이리 비싸?! 아무리 사립고등학교라지만!!]
중얼거리며 화장실에 들어간 나는 비명을 질렀다.
[꺅!!]
브라에 팬티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내가 이 모습으로 등기를 받았어?/
[아이씨~~ 힝...근데 내가 언제 집에 들어왔더라?]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
좀전 보다 몇 배는 더 크게 놀랐다. 너무 놀라 비명도 나오질 않았다.
[우편물 온 거야?]
화장실로 들어선 건 다름 아닌 현성이었다.
[니가 여,여긴 어떻게...]
난 화장실에 있는 타월로 몸을 가렸다.
[뭘 어떻게야... 밤새 너 뒤치닥거리 해줬잖아~ 어유... 술도 안 먹었는데 이 다크서클 봐...]
현성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변기뚜껑을 올리고는 거무튀튀한 물건을 꺼내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어제 야구장에서 헤어졌잖아?]
난 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랬지... 그런데 승욱이가 나한테 전화와서 니가 집에 가버렸대서 부리나케 니 집으로 왔지... 씨발년. 또 두 시간 넘게 전화도 안되고 서성이다 보니까 술에 취한 널 남정네 두 명이서 부축한답시고 존ㄴ 주물럭거리면서 올라오더라? 병신들인지... 나 같으면 근처 모텔 같은데 데려갔을텐데.. 니 집에서 따먹으려고 했는지 널 델꼬 올라오더라구... 올라오다가 나한테 딱 걸렸지...]
[......]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몇 대 쥐어박아 주니까 꺼지더라. 걔네들도 술이 꽤 됐는데 날 이길 수 있겠냐? 크크..]
[그래서... 니가 걔들 대신해서 나랑 했어?]
[말도 마. 너 오바이트하고 난리도 아녔어... 내 옷 다 버리고 니 옷도... 어제 밤에 세탁기 돌리고 생쑈를 했어... 이씨...지금쯤 옷 다 말랐으려나?]
[...그것 뿐이야?]
[에이... 니가 그럴 년이냐? 크크... 새벽네시 쯤 됐으려나? 이상한 느낌에 깼더니 니가 위에서 흔들고 있더라구... 조임이 어휴... 끊어지는 줄 알았어...]
[구라치지마...!]
난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씨발! 진짜야...하면서 나 좋아한다고 계속 중얼거려놓고 쌍년이...]
[......]
난 침대 맡에 앉아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씨발년... 그렇게 있으니까 또 꼴리네... 야 빨아봐 어제처럼!]
갑자기 현성이는 덜렁대는 자신의 물건을 내 입에 가져다댔다.
[싫어!]
난 도리질쳤다.
[넌 늘 그렇게 싫다고 하면서도 박아주면 미친듯이 허리 돌려대면서... 웃기지도 않는다. 크큭...]
[아흐...]
갑자기 현성이가 팬티를 젖히고 내 아래에다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크큭... 거봐...]
[싫어! 하지마! 이런 식으로 하는 거 정말 싫어!]
[......]
찌꺽찌꺽.
화장실안에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반면에 현성이는 대꾸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응... 제발... 하지마!! 엉엉~]
결국 난 눈물이 났다.
잠시나마 마음이 갔던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날 대우한다는 게 속상했다.
억울했고 내 자신이 싫어졌다.
/내가 이런 사람으로밖에 보이질 않는 건가... 내가 변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런 고통은 계속 되려나봐.../
한번 터진 울음은 쉽게 가라 앉지 않았다.
[이래도? 이래도 하지마? 몸은 반응하면서 말로만 하지말라는 거 봐 크크...]
찌꺽찌꺽.
[하지마 이 새끼야! 흐응... 하지마!!]
난 펑펑 울면서 몸을 비틀어댔다.
[펑펑 울 정도로 좋은 모양이네~]
자신감이 듬뿍 묻은 목소리였다.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녔어?! 흑흑... 왜 내가 싫다는데 이렇게 강제로 하는 거야?]
[크크.. 웃기시네~ 니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서 허리 흔드는게 한 두번이냐? 더 이상은 안 속아~]
[악!]
지금까지 손으로 애무를 해 한껏 달아올라 열기가 머물러 있던 아래 부위의 열기가 순간 온 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아! 들어왔어...! 들어온거야.../
[크흐... 아! 좋다...]
[흐윽! 하지마... 제발...]
[어제처럼 나 좋아한다고 말해봐!]
[이 잔인한 새끼야! 날 좋아하는거면 이래선 안되잖아! 내가 싫다는데!]
난 여전히 울면서 말했다.
[썅년.. 꼴갑떠네...]
현성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피치를 올려댔다.
내 몸은 서서히 포기하게 되었다.
[흑...흑...]
/아흥... 근데 왜 더 이상 흥분이 안 올라가는 거지? 규철이랑 할때는 너무 다른데?/
내 마음 속 한켠에서는 이상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은 현성이와 했던 게 생각이 나질 않잖아! 오늘이 처음인거야 나한테는.../
난 두 손으로 세면대를 짚고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빠져나오려 힘을 썼다.
[그만해 제발! 부탁할게... 나 이런 식으로 너에게 당하고 싶지 않아...]
난 손을 모아 빌기까지 했다.
그 순간.
[나 싼다!! 아흣... 어휴...]
내 뒤에서 미지근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튀었다. 엉덩이에도 등에도.
[후우... 후우...]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더니 거실의자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는 현성이었다.
난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좋았냐?]
[......]
난 조용히 흐느꼈다.
/이젠 나 어떻게 해야할까... 외형이 바뀌어도 주위에선 날 함부로 대하는 게 똑같은 걸.../
[좋았으면서 부끄럼타긴...]
[......]
/근데... 솔직히 난 느끼지도 못했어... 지금까지 니가 해준 기억이 없는 건... 규철이나... 그 새끼나... 기억이 나는데.../
난 떨어져있는 샤워타올을 슬며시 끌어 두르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대꾸도 없냐?]
[이제... 그만 가...]
난 침대머리에 앉으며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말을 했다.
그 때, 갑자기 수건이 홱 벗겨지며 현성이가 내 가슴을 잡아챘다.
[악! 아퍼!]
[너 자꾸 그럴거냐?]
[내가 뭘?]
[니가 뭔데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야?]
화가 난 듯한 현성이의 모습에 난 잔뜩 얼어붙고 말았다.
[......]
[오냐오냐 봐주니까... 씨발년이... 내 밑에 깔려서 신음소리 흘리고 좆 구걸하는 주제에 성질 돋구고 있어 쌍년이! 평소에도 여자는 쌕 할때처럼 하는거야 알아들어? 알아들었냐고!!]
[......]
난 내 얼굴 앞에서 소리지르는 현성이에게 새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는 현성이를 한동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제 왜 나랑 데이트하는 것처럼 불러냈어?]
난 조심스럽게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이불을 살며시 당겨서 가슴을 덮은 뒤 화가 난 원인이었던 사건을 물었다.
[원래는 친한친구인 승욱이한테 너랑 친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승욱이가 너한테 관심있으니까~]
[근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구?]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씨발... 그런 말투로 말하지 말랬지?]
순간 내 얼굴은 오른쪽으로 휙 꺾였다. 내가 왼뺨을 맞았다는 사실은 찰나가 지나고 고통이 뇌를 울린 다음이었다.
[......]
부들부들.
예전의 기억이 눈 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난 흐트러진 머리가 얼굴을 덮었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할 정신은 없었다.
난 소리죽여 눈물을 흘렸다.
예전에도 이런 상황에서 소리내어 울면 더 안 좋은 상황을 맞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흐느낌이 조금씩 줄어들자 현성이가 말을 이었다.
[니가 승욱이 연락 다 씹었다며? 술 먹쟤도, 하룻밤 같이 놀자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고 그러더라? 난 널 불러내면 나오는데 그래서 좀... 아 씨발 남자들은 그런거 있어...]
/그래서... 내가 나와준게 너한테는 전리품 같은거였네? 괜히 오해했구나.../
[씨ㅂ...]
또르륵.
/몸이 먼저 가고... 겨우겨우 마음도 따라갔는데... 난 얘한테 그냥 아무 의미도 아니었던 거구나.../
[왜 또 우냐?]
[그냥 오늘은 가주라~ 제발 부탁할게...]
[아직 내 말 안끝났어!]
[그럼 빨리 얘기하고 가!]
[어차피 어제 너 찾으러 나왔기 때문에 소문 다 돌았을거야... 너 어차피 이제 내 깔이야... 그 말 하려고 왔어...]
[...깔이라는 말은 뭐... 내가 니 여자친구라는 말이야?]
[뭐 비슷해...]
/...... 뭐야... 사귄다는 말을 이런식으로 하는 거야?/
매너도 무드도 없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나 군대 환송 파티 겸 술자리 있어~ 같이가자...]
[군대?]
여전히 화끈거리는 내 뺨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있었는데 엎친데 덮친격인지 군대라는 두 글자는 충격 그 자체였다.
[어... 솔직히...음... 내가 말 안하고 가려고 했는데... 니가 어제 그렇게 가버린 바람에 너네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결심했어... 내꺼 해야겠다고... 그만큼 고민 많이 한거야... 너 생각해서...]
현성이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 말을 꺼냈다.
[...언제 가는데?]
[이번주 목요일에~]
/...!!!/
[야! 그냥 가지... 왜 나한테 말해...]
억울했다.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이 남자가 정말 미웠다.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현성이 품에 안겨서 한동안 울었다.
90.
샤워를 하고 나왔다.
난 눈도 부은 것 같았고 뺨도 화끈거려 정말 가기 싫었지만 옆에서 계속 보채고 협박하고 구슬리는 현성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현성이는 내 옷마저 자기 마음대로 입히려고 했다.
[야! 이거 입어라~]
현성이가 꺼내든 옷은 어제 입으려 몸에 댔다가 짧다는 촉감이 들어 말았던 흰색에 남색으로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면 스판 슬리브리스 원피스였다.
[너 정도 몸매 되는 년들이 이런 것 좀 입어줘야지~ 다리라인 되지, 골반라인 되겠다... 뭐...가슴은 좀 작지만...]
[싫어... 내꺼 아니야... 나한테 그리고 짧아...]
[야! 원래 짧게 나오는 거야 이런게... 니 친구년 좀 본받아라... 봐봐~ 걔는 스타일이 되잖아!]
[알았어, 알았어! 입으면 될거 아니야!]
[너 어제 했던 브라하면 가슴 좀 커보이더라. 그거 해!]
[아 싫어! 검은색이라 비치잖아!]
계속 티격태격하다가 결국은 현성이가 원하는 대로 입었다.
[너 나 자체를 좋아하는 거 아닌 것 같애...]
옷 매무새를 만지면서 슬픈 감정이 들었다.
[어! 당연하지... 난 꾸민 여자를 좋아해~ 니가 날 좋아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입어줘야 되는거 아냐?!]
/...!!/
[알,알겠어...]
말은 알겠다고 했지만 적잖이 충격이었다.
[넘 짧다... 조금만 걷거나 팔을 올리면 엉덩이 다 보일 것 같애...]
걱정이 된 난 푸념을 늘어놓았다.
[지랄하네... 핫팬츠를 입는데 노팬티로 돌아다녔던 년이... 그거 가지고 오버하기는...]
[야! 자꾸 그럴래?!]
결국은 발끈했다.
[어쭈! 씨발년이... 콱 씨! 자꾸 기어오른다?!]
그런데 현성이는 공중에 손을 들어올려 날 때리는 시늉을 한다.
[꺅!]
[놀라긴...얼른 가자~ 늦겠어...]
[스타킹이라도 신으면 안될까?]
이대로 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제법 간절해졌다.
[마음대로 해... 근데 무지 더울텐데...]
[괜찮아... 맨다리로 나가는 것 보다 나을 것 같애... ]
서랍장에서 살구색 스타킹을 신은 뒤 한 번 더 옷 매무새를 고치고 하이힐을 신었다.
허겁지겁 서두르는 현성이는 내 가방마저 뺏더니 내 손을 잡고 엄청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난 짧은 원피스로 인해 옷까지 신경써야했다.
[야! 좀 천천히 걸어! 나 구두 신어서 빨리 못 걸어!]
현성이는 듣는둥마는둥 누군가와 통화하기에 바빴다. 난 힐을 신고 내리막길을 걸어내려가려니 중심 잡기가 힘들어 무릎이 벌어지고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갔다.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교복 입은 학생들과 남자들의 야릇한 표정과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억지로 다리를 오무리려고 노력했고 그럴 때마다 휘청이는 몸을 가누기 위해 현성이에게 몸을 기대게 되었다.
/아읏.. 쓰라려.../
발 뒤꿈치가 따끔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새 구두라 그런지 빨리 걸어서 그런지 발 뒤꿈치가 쓰라렸다.
[혹시 반창고 없지? 약국 좀 들러야겠어!]
[왜?]
[발꿈치가 까진 것 같아...]
[저기 편의점에서 사올게~ 기다려봐...]
[웬일이야?]
[아~ 담배가 마침 떨어져서 가려고 했었어~]
[쳇...]
/어쩐지.../
난 핸드폰 슬라이드를 밀어올렸다.
문자가 와있었다.
/잘사냐? 언제또술한잔해야지?/
규철이었다.
/잘지내~ 너도잘지내?/
답장을 보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답장이 왔다.
/나야니생각나서 잘못지내지ㅋㅋㅋ/
/무슨소리야?/
/니신음소리가머릿속에맴돌아서ㅋㅋㅋ/
/참나ㅋㅋ여친있다며?/
/여친이랑해도니상상하면서하거든ㅋㅋ/
/변태ㅋ/
/오늘저녁시간돼?/
/약속있엉/
/내일은?/
/저녁땐 괜찮아/
[뭐하냐?]
내 어깨를 툭 치는 현성이었다.
[어... 친구야...]
대충 얼버무렸다.
[얼른 붙여... 빨리가야지~]
[화장실 가야돼... 스타킹신었잖아...]
[그냥 저기 구석에서 해... 언제 화장실 다녀오냐! 이 근처에 개방화장실 있는 곳 없어...]
눈을 부라리며 명령조로 얘기했다.
[저기서? 아씨... 망 봐줄거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함께 들면서 쓰라린 발뒤꿈치를 끌고 절뚝이면서 건물 틈새로 들어갔다.
[보기 좋은데? 크큭. 걸레맞아 역시. 크크크...야외에서 스트립하는 거 같애...]
원피스 아래로 손가락을 넣어 스타킹을 끌어내리자 망을 보던 현성이가 쪼그려 앉아 한 마디한다.
흠칫.
오전부터 내게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몸과 생각을 파고들었다.
/밖에서 밴드 붙이랬다고 진짜 밖에서 스타킹 까내리는 나... 진짜... 걸레같아보이겠다.../
[얼른 붙여~]
쪼그려앉아 나를 위로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대꾸한다.
난 서서 붙이려던 생각을 접고 쪼그려 앉아 겨우겨우 밴드를 뜯어 빨갛게 물이 오른 발뒤꿈치에 붙이고 스타킹을 신으려고 했다.
[그거입고 쪼그려 앉으면 안되겠다 너~ 크크큭... 완전 야해~]
[......]
/아무리 남이 시킨 거지만... 이렇게 짧은 원피스를 입고 밖에서.../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이러지?/
난 당황한 나머지 후들거리는 손가락으로 스타킹을 다시 끌어올리다가 손톱에 걸려 올이 나갔다.
[야~ 올이 나갔다~ 것봐! 뭐하려고 신고나와서 고생하냐? 버리고 얼른가자!]
[......]
[뭐해? 왜 가만히 서 있냐? 도와줄까?]
현성이는 어쩡정하게 서 있는 내 다리쪽을 몇 번 쓰다듬더니 스타킹을 확 내려 벗겨버렸다.
뚝.
그와 동시에 머릿속 무언가가 외타래 실 하나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말이 없냐?]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길래 곰곰이 혼자 생각하고 있던 난 깜짝 놀라 말을 걸어온 사람을 쳐다봤다.
낯선 사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현성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현성이 친구들이라고 모인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현성이 여자친구라며? 전에 애들이랑 분위기가 묘하게 다른데?]
[무슨소리야?]
옆에 있던 다른 남자하나가 물어봤다.
[아니... 얘는 얼굴이 평범한데.. 묘하게 더 야해보이고.. 근데 뭔가 더 범접할 수 없는 느낌?]
[그래서 뭐~ 현성이 깔이면 똑같이 그런 류지~ 다를게 있겠어? 남자라면 사족을 못쓰겠지... 크큭~]
[야~ 너 도대체 몇 살이냐?]
[지겨워...후우...]
/내가 듣고 있는지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해대? 그리고 어려보인다는 거 이제 칭찬이 아닌 거 느꼈어...휴우... 머리 아프다... 씨발.../
[이 년이 뭐라는거야?]
[지겹다고... 술이나 줘!]
[역시! 화끈한 년이잖아!]
내 술잔에 맥주와 소주를 섞은 술이 따라졌고 그 위로 눈물 한 방울 떨어진 액체를 난 한 번에 들이켰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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