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예리와 보낸 탓에 윤가희로부터 투정을 받은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덕분에 한 해의 마지막 밤을 가희와 보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에 자신과 약속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무언가 물으려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직감을 떠나서도 크리스마스 때 자신과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조금 이상하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내가 짐을 모조리 싸 들고 집을 나간 사실이나 결별을 예정하고 있는 사실이나 그로 인해 혼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이니 별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그것을 일부러 말 해 주어야 할 일이야 없지만, 관계야 어찌 되었건 두 여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는 것이 현석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과거에 일찍이 격어 보지 못한 일이다 보니 어찌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이런 부분에 거짓말도 분명 능숙하지 못한 탓에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윤가희도 자신의 위치 때문인지 별로 투정을 하지는 안는다.
년 말과 새해를 맞아 좋은 일과 즐겁지 않은 일이 한꺼번에 연이어 나타나는 것 같다.
이혼법정에 가는 것이 별로 알릴 만한 일은 아니라, 출근하자 말자 외출을 한다고 해 놓고는 법원으로 갔다.
하영은 새해가 오고 며칠이 지났을 때 연락이 왔다.
새해 벽두라고 하기에는 며칠이 지났지만, 어찌 되었던 새해는 새해인 셈이다.
그 새해에 아내와 함께 이혼법정에 서야 하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고 보니 하영이 짐을 모두 챙겨서 떠난 지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것 같다.
사장에게 구두 보고를 할 내용이 있었지만, 법정에 가야 하는 시간은 그런 것을 고려 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무조건 가야 한다.
하영이 가정법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영과 만나서는 법정에 들어서기 전에 휴대폰을 꺼 버렸다.
"기다렸어?"
현석이 하영에게 물었다.
"아니 나도 조금 전에."
"그래 어디서 지내?"
사실은 아내가 집을 비우고 나가 버렸으니 어디서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친정에...."
"친정에서 뭐라고 안 해?"
"뭐라고 하긴 했어. 그렇지만 어떡하겠어 못난 딸 두었으니."
"...."
"얼굴 좋아 보인다."
그녀가 현석의 얼굴을 슬쩍 쳐다 보더니 하는 말이다.
"밥은 안 굶으니까."
"다행이네."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나가 버려?"
"뒷모습 보이는 거 보기 좋은 거 아니잖아?"
"..."
"현석씨한테 많이 미안해."
"우리 서로 미안한 거지. 당신만 그런 게 아니잖아."
"그래... 편지에 쓴 것처럼 우리.... 오늘 이후에는 모르는 사람으로 살자."
"그게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잘 되는 거니?"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야지."
"말을 참 쉽게 한다."
"너무 쉽게 해서 미안해, 우리 남처럼 산지가 오래 되었잖아? 그러니 모르는 사람으로 사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그래, 그렇긴 하지. 우리가 이렇게 무덤덤 한 것만 봐도 그렇지.”
“그래, 이제 그런 이야기 하지 말자."
몇 마디 말을 나누지도 않고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면서도 별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서로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정이 내려지는 데는 너무나 짧게 걸렸다.
합의 된 거냐? 재산 분할 합의도 되었느냐? 후회 없느냐? 같은 형식적 질문과 답. 그리고 끝났다. 나오면서 찾아온 서류를 주소지 구청에 가서 이혼 신고를 하란다.
"집 내 놓았다. 팔리면 반 부쳐 줄께."
현석은 함께 걸어 나오면서 하영에게 말했다.
"그러지마. 새로 가정을 꾸리려면 집은 있어야지."
하영은 그냥 남의 이야기 하듯 말한다.
"그건 함께 장만 한 거야. 혼자 가질 수는 없어."
"주면 날 용서 안 하는 거야. 제발 그냥 가져가."
말은 그리 하지만 톤의 변화는 전혀 없다.
"하여튼 보낼 께. 잘 가. 잘 살고."
"응 현석씨도."
그 길로 돌아섰다. 하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 뿐이었다.
이렇게 쉬운 건가?
이렇게 간단한 건가?
갑자기 허탈해졌다.
현석은 구청에 가져가라는 서류가 들은 봉투를 내려다 보았다.
회사에 돌아가 책상에 앉았지만 일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새해라서 할 일도 많은데.
직원들이 보는 곳에서 멍하니 있는 것이 우스워 빈 회의실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하영과 나누어 가진 서류가 든 봉투에서 다시 한 번 꺼내 보았다. 구청에 신고해야 하는 이 서류. 달랑 이것으로 끝이구나.
그래도 오 년 넘게 살아온 부부가 그 짧은 시간에 서류로 정리되었다고 그냥 남남으로 돌아서 가게 되었는가?
의자를 뒤로 젖히고 천정을 바라보았다.
형광등 불빛만 무심하게 환 하다.
회의 탁자를 가운데 두고 회의실을 빙빙 돌며 생각해 봤지만, 자신이 이렇게 심각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영의 마음이 먼저 정리되었고, 자신에게 결별을 통지 했었다.
어쩌면 현석이 내리지 못한 결단을 그녀가 내려 준 것이다.
매사에 정확하고 빠른 결정을 하는 현석이었지만, 이 일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그것이 더 큰 고통이었는가?
그래서 그녀가 결정을 내리고는 통지한 것인가.
그래 이제 서류상 정리까지 끝낸 마당에 더 이상 고민할 것이 무엇인가?
"똑똑"
누군가가 회의실을 노크했다.
"네."
무심결에 대답을 했다.
"차장님. 사장님 전화세요."
문이 빼꼼이 열리며 한지수가 현석을 불렀다.
"응? 그래요.?"
"네. 얼른 받아 보세요. 세 번이나 전화 주셨는데 차장님 여기 계신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았어요. 핸드폰도 안받으시고....."
"아. 그렇네. 알았어요."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자리로 달리듯이 뛰어 나갔다.
박일한 사장의 전화야 자주 있는 일이니 그럴 수도 있지만, 아까 법정에 갈 때 휴대폰을 끈 다음 다시 켜지 않은 생각이 났다.
이제 생각 나면 뭐하냐?
그 사이에 전화가 얼마나 왔을지도 모르는데.
현석은 인터폰으로 지금 사장실로 가겠다고 하고는 수첩을 들고 사장실로 향했다.
"핸드폰은 왜 껏어?"
사장실로 가서 업무에 대한 지시를 듣고, 필요한 보고를 하고 마무리가 되었을 때 말을 흘리듯 슬쩍 사장이 물어 왔다.
입사한지 아직 일 년도 안되었지만 박사장의 현석에 대한 신뢰가 매우 높다는 것을 현석은 느낌으로 알고 있다.
이혼 사실을 광고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알려는 드리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 후 부장급 부부 합동 식사모임에 하영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박사장이 이것저것 물었었지만 대답을 회피했었다.
아마 느낌으로 부부간의 관계가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일이 좀 있었습니다."
"왜? 말 못할 일인가?"
"그런 건 아니구요. 법정에 좀 다녀오느라고 꺼 두었는데 깜박 잊었습니다."
"법정엔 왜?"
"....."
"말 못할 일이면 안 해도 되고."
"아닙니다. 어차피 사장님께서 알고 계셔야 할 일이고 알린다면, 사장님께 제일 먼저 알려 드려야 하는데."
"그래?"
"사실은 아내와 이혼법정에 갔습니다."
"자네가 이야기는 안 했지만, 부부동반 모임에 같이 안 오기에 원만하지는 않다는 정도는 느낌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였나?"
"사이가 나쁘거나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아. 참 자네는 애들이 없지? 그것 때문이었나?"
"네. 아내가 놓아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놓아 줬고?"
"네. 오늘 다 결정 나고 정리까지 되었습니다."
"노력은 해 봤고?"
"네. 노력을 많이 해 봤는데 안되었습니다."
"그래. 자네도 고통일 테니 더 이상은 안 물어 보겠네."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지."
오늘 현석이 하영과의 일 때문에 일찍 외출 하는 통에 주간 업무보고가 서류로 처리 된 것 중에 구두로 보고해야 할 사항이 있음을 하영과의 일로 인해 현석도 간과해 버린 것이 있었다.
박 사장은 현석이 예측한 대로 그것을 확인 해 왔고 현석은 설명을 했다.
"아차. 아까 그 서류"
오늘은 좀 덤벙댄다.
사장실을 나오면서 회의실에 둔 이혼서류가 생각났다. 사장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벌써 시간이 삼십 분 이상이 흘렀는데..
정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진 아내지만, 그래도 이혼이란 것이 결코 평범한 일상은 아닌가 보다.
전화기를 다시 켜는 것도 잊어버리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멍 하게 있고, 이혼서류를 회의실에서 보다가 그냥 두고 오다니.
아무도 안 봤겠지.
결코 좋은 일이 아닐진대.
회의실에 그 서류는 그대로 있었다.
현석은 그것을 챙겨서 바로 봉투에 집어 넣었다.
겨울이 시작되던 계절에 집을 내어 놓았는데 아직도 안 팔린다.
경기가 나쁘지는 않은데, 언론에서 유동성이 나쁘고 외환보유고가 낮아서 어려움이 있고 갈수록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경제전문가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지만 최대의 호경기를 구가하고 있는 상태라서 그런지 정부에서는 그리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지 않다.
하기야 정부뿐만이 아니다.
회사도 그렇고 거래관계의 회사들도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당연히 그럴 것이 현석이나 주위의 직장동료들에게 외환보유고가 낮은 것은 살아가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유동성이 낮은 것도 별로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것이 집이 안 팔리는 것과는 상관이 있으려나. 겨울이라 이사 철이 아니라서 그런 것인가?
이해가 잘 안되지만 그렇다고 아내와 힘겹게 장만한 집인데 빨리 팔기 위해서 싸게 처분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못 팔아서 안달 할 일도 없으니 적당하게 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자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집이라 빨리 떠나는 것도 아내를 빨리 잊는 좋은 방법이고, 이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것도 그리 좋지도 않다.
평일에 집에 없고 휴일에도 자주 나가서 집 보러 오는 사람이 구경을 못해서 그런 건가?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복덕방에 열쇠를 아예 맡겨 버려야겠다.
전에는 자주자주 아내를 도와 청소를 해 주었는데 깨끗하게 치워 봐야 혼자 있을 건데 라는 생각이 들자 어쩌다 한 번씩 하는 청소 조차도 영 재미가 없고 지겹기만 하다.
아침에 출근하면 대부분은 밤 늦게 들어오는 데다가 휴일도 자주 나가다 보니 집은 자연스럽게 지저분해 져 간다.
그래도 혹시나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청소를 해야 했고 그런 덕분에 집 안이 그리 흉해 보이지는 않는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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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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