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휘몰아 치며 아직도 내리고 있는 눈을 쓸어 올리며 현석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한강변의 고수부지로 나온 것은 잠을 이루지 못한 때문이다.
이월의 첫 휴일 아침은 세상을 하얗게 덮으며 시작되었다.
현석은 일찍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지 못했다.
하영이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이다지도 커서 잠들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쉬움이야 많다.
그러나, 그리 큰 슬픔도 괴로움도 없이 조용하게 마음이 정리 되었다.
윤가희,
어쩌면, 그녀를 붙잡지 못해서 생긴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예리와의 관계?
참으로 예쁜 아이이다.
비록 현석이 그리 크게 나이를 먹지는 않았어도, 이예리를 보면 싱싱한 젊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비록 첫 정을 준 사람이 현석이긴 했지만, 그리고 그 뒤로도 몇 번, 예리의 샵에 있는 그곳을 찾아갔었다.
왜 첫 정을 주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는 것이 무언가 어색하기도 하고, 그런 것을 물어보는 남자는 참으로 웃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누구에게든 한번은 주어버릴 것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잠이 오지 않아 서성이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무심코 내다본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눈 속에 길을 열고 한강 고수부지로 나왔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라서 아직 많이 쌓이지 않았지만, 이제부터 눈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듯, 아직은 여명에 묻혀 있는 강 건너의 아파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한강을 건너다 보며 자욱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다 보는데 갑자기 온 몸을 싸고도는 소름 같은 외로움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대라고 불러보고 싶은 이 간절한 마음.
이 애타는 마음.
누구에게 하소연도 할 수 없고, 내 마음이 이러한데,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대상이다.
아무런 관계도 아닌,
그저 부서의 직원일 뿐이다.
그걸 관계라고 한다면, 세상 모두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집합체일 것이다.
그러니 이 답답한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눈 앞에 보이지 라도 않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석이 외근을 나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을 함께 보낸다.
언제부터 마음 한구석에 그녀, 한지수를 품어 왔던가?
언제부터 인가?
아마 입사할 때 인사를 나누던 그 때부터 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미 몇 달이 흘렀지만, 그것은 현석의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그 때는 이혼 남, 흔히 말하는 돌씽도 아니었으니 그런 생각을 품으면 안되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아무런 자격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를 마음속에 품었단 말인가?
아니, 지금은 자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가? 지금이라도 행여나 마음속에 품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아무런 흠 결이라고는 하나 없는,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인데 반해, 현석은 나이 먹은 이혼 남이다.
비교를 하자면 곳곳에 결격 사유를 덕지덕지 달라 붙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먼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아무런 자격이 없다.
그러니, 어디 감히 여신처럼 아름다운 그녀에게 이 속마음을 내 비칠 수 있단 말인가?
미국출장지에서의 생각이 난다.
그 마지막 밤에 찾아왔던 방문. 비록 꿈속의 방문이지만 정말 진한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살아 있는 현실처럼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그것이 꿈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아악~”
두 손으로 입가를 모으고 강 건너를 향해 고함을 질러 보았다.
아무런 메아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고수부지에는 오직 현석 혼자, 움직이는 까만 점으로 눈보라 속에서 움직일 뿐이다.
이곳에 그녀가 걸어와 준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띠리링.
이 눈 내리는 아침에 웬 전화일까?
그것도 휴일 아침에?
“여보세요?”
‘안녕, 아저씨.’
전화를 받으니 이예리다. 이 애는 여전히 현석을 아저씨라 부른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온 이예리의 목소리에 조금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걱정이 어느새 꼬리를 감추고 사라져 버린다.
“웬일로 이렇게 이른 아침에?”
“아침에 나와보니 세상이 하얗게 덥혀 있기에 아직도 주무시나 하고 전화 드렸어요.”
“벌써 일어났어?”
“그럼요.”
“잠꾸러기인줄 알았는데,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하잖아.”
“아이참.”
“그런데 왜?”
“왜가 어디 있어요? 이렇게 아침에 편하게 전화드릴 수 있을 때 드려야죠. 이렇게 하얗게 눈이 쌓인 날을 그냥 보낼 수 없잖아요?”
언젠가, 아내가 해외 연수를 떠났다고 했었고, 또 언젠가 만났을 때,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었었다. 그때 4월에 돌아온다고 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땐 그냥 그랬다.
“하하하”
“좀 미끄럽긴 하겠지만, 안 나오실래요?”
“난 벌써 나와 있는걸.”
“앗, 정말요?”
“그럼.”
“어디인데요?”
“응, 한강 고수부지.”
“우와, 어쩜, 나도 갈께요. 어디쯤 인데요.”
“눈보라가 너무 쳐서 안 좋아. 집에 얌전히 있는 게 좋을걸.”
“제가 나오시라고 연락했는데, 벌써 나와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죠. 저도 바로 나갈께요.”
현석은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가능하면 택시로 오라고 했다.
혼자 이것 저것 생각도 하고, 눈보라 치는 강변에 홀로 움직이고 싶어서 나왔는데, 마치 그것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연락을 해 왔다.
바람을 마주보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보라가 날렸다.
머리에 내려앉은 눈이 물로 바뀌어 흘러내린다.
그러다가 머리에 쌓인 눈이 미끄러져 발 앞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천천히 걸어서 움직이며 뒤돌아 보니, 혼자 밟고 지나온 곳에 발자국이 깊이 찍혀있다.
아까 서있던 한쪽의 발자국은 내리는 눈과 바람에 날려온 눈에 이미 덮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들고 멀리를 바라보니, 아스라히 보이는 곳에 두 개의 점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현석처럼 나와서 움직이나 보다.
저들은 어떤 괴로움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예리처럼 무언가 모를 환희에 차서 저렇게 나온 것일까?
바람이 많이 불어 차가운 기운이 몸을 파고든다.
몸을 떨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추위가 심해진다.
따끈한 커피가 생각 났지만, 아직은 고수부지 한쪽에 서있는 작은 편의점의 문을 열 시간이 되지 않았다.
아니, 설사 문을 열 시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눈보라 치는 오전의 한강변에 그렇게 일찍이 나와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수부지에 나온 지 시간이 제법 지나서, 발은 많이 젖었다.
숨을 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이 눈앞에서 흩어진다.
이예리가 온다고 하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쯤은 슬슬 걸어서 고수부지를 벗어나야 할 시간대이다.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올릭픽대로에서 택시한대가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켠 상태로 고수부지로 진입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예리가 오는 듯 하다.
고수부지는 눈이 제법 쌓여있어서 도로와 도로 아닌 곳이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높고 낮은 구분이 있어서 그곳이 길의 가장자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예리가 코트차림에 모자를 쓰고 내렸다.
한 손에 큰 가방을 들고 다른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다.
택시가 출발하고, 뒤돌아선 예리는 현석을 향해 빠르게 걸어 오고 있었다.
저러다가 행여 미끄러져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현석을 알아보고 우산을 든 손을 흔들어서 자신임을 알렸다.
“오래 기다렸죠?”
“아니, 조금, 어서 와. 그런데 눈 오는 한강에 오면서 뭘 그렇게 들고 와?”
“나오려다가 생각해 보니, 따끈한 커피가 있으면 좋을 것 같기에 보온병에 커피 좀 준비해 왔어요.”
그러면서 가방을 들어 보인다.
제법 준비성이 높다.
하긴 언제 함께 밖에 나들이 갈 일이 없었으니 이런 것을 볼 기회는 없었었다.
가방을 받아서 보니 안에는 보온병과 찻잔도 있고, 군것질 꺼리도 몇 가지 들어있다.
현석은 자동차 트렁크 안에 넣어둔 쿠션매트가 생각났다.
폴리우레탄으로 폭신폭신하게 만든 쿠션매트는 가볍기도 하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아줄 뿐만 아니라, 폭신폭신 하기도 하여 두 해쯤 전에 하영과 놀러 가면서 산 것인데, 딱 한번 사용한 후에 트렁크 안데 그냥 들어있다.
“잠깐 기다려 봐.”
“으응.”
현석은 눈이 수북이 쌓인 자동차로 갔다.
눈은 이제 제법 발등을 덮을 만큼 빠진다.
트렁크에도 수북하게 눈이 쌓여 손으로 슥슥 문질러서 눈을 밀고는 트렁크에서 쿠션매트를 꺼냈다.
“저기 강가로 갈까?”
가방을 받고 우산도 받아 들고 턱으로 강가를 가리키자 이예리가 팔짱을 끼었다.
“네, 그리 가요.”
현석은 천천히 걸어서 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만들어진 계단에 쿠션매트를 깔았다.
“앉아.”
“으응.”
쿠션매트는 크기가 무척 커서 다 펼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앉고도 많이 남을 것 같다.
이예리가 편하게 앉도록 해주고 현석도 그 옆에 앉았다.
우산으로 눈보라를 가렸다.
“와. 좋다. 어떻게 이렇게 멋진 생각을 했어요?”
예리가 현석이 앉는 것을 기다려서 다시 팔짱을 끼면서 하는 말이다.
그녀는 현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음, 내가 보기보다 낭만적인 사람이거든.”
“진짜요?”
“그럼, 여태 만나면서 그것도 몰랐단 말이야?”
“피, 언제 보여 줬어야 말이죠.”
“자주 안보여 줬나? 난, 예리의 모든 것에 관심이 많은데, 예리는 나한테 무관심 하구만.”
“에이, 고짖말이다.”
“진짜야.”
“커피 한잔 하세요. 속이 좀 따뜻해 질 거예요.”
“그럴까?”
예리는 보온병을 열고 커피를 따랐다.
커피가 따라진 잔에서 피어 오르는 김이 바람에 날리면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쳐 지나간다.
“음. 향 좋은데.”
“맛있을 거예요.”
뽀얗게 내리는 눈 속에 받친 우산아래에 흐르는 진한 커피 향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 마시는 커피와도 비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커피 한 모금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감미로운 향기와 진한 커피 맛이 온몸을 감싼다.
“좋은데.”
“좋죠?”
“으응, 어떻게 커피를 타올 생각을 했을까? 아주 이뻐 죽겠어.”
현석은 추위에 발개진 예리의 볼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손으로 쥐었다가 놓은 자리는 더욱 빨개진다.
예리의 코끝도 발갛다.
예리가 현석을 쳐다보다가 살짝 입술을 맞춰 왔다.
잠시 맞춘 입술이지만 입에서 커피 향이 함께 전해진다.
떨어져 나간 입술에 찬바람이 휘이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아마 그 짧은 순간 너무나 따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리가 미소 띤 눈으로 현석을 쳐다 보았다.
숨을 내쉴 때 마다 하얗게 김이 밀려나오며, 잠깐씩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현석이 예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맞추어진 입술 사이로 예리의 혀가 살짝 밀고 들어왔다. 커피 맛과 함께 매끄러운 혀가 현석의 입안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두 사람 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는 상황이라 깊은 키스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깊은 키스보다 입술만 살짝 부딪치는 키스가 더 감미로울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 이다.
두 사람 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는 금방 떠서 상대의 눈을 쳐다보았다.
현석은 예리의 혀를 밀어내면서 예리의 입안으로 혀끝을 밀고 들어갔다.
예리가 천천히, 부드럽게 현석의 혀를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입안에서 마치 사탕을 빨아먹듯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빨아 당겼다.
이 키스는 정말 감미로운 느낌을 준다.
침대 안에서 맨 살을 맞대고 나누는 키스와는 전혀 다른 신선함과 달콤한 솜사탕 같은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온 몸은 한겨울의 추위와 함께 내리는 눈보라에 덩그러니 나와 있어서 더욱 더 그런 것 같다.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그 긴 입맞춤은 바깥의 추위에 발그래진 얼굴을 더 발갛게 만들었다.
현석은 우산을 접어버리고, 매트에 벌렁 누우며 예리를 당기자, 이예리는 현석의 몸 위에 엎드렸다.
우산이 치워지자 눈이 현석과 이예리 위에 흩날리듯 내려앉는다.
현석이 예리를 꼭 끌어 앉자 그녀는 입술을 현석의 입으로 가져왔다.
바람에 날리는 눈발이 현석과 예리의 얼굴에 쏟아져 내렸지만 바람에 일부는 밀려가고 일부는 얼굴에서 녹아 드는 듯 약간은 시린 느낌이 들었지만, 예리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입을 맞추어 온다.
예리는 몸을 옆으로 돌려서 현석의 바로 옆에 누웠다.
“참, 예쁘다 그쵸?”
“그러긴 한데, 춥지 않니?”
“음, 약간요. 그래도 많이 춥지는 않아요.”
“그럼 우리 일어날까? 따뜻한 난로가 있는 곳이 가고 싶어지네.”
“조금만 이대로 더 있다 가요.”
한쪽으로 두 사람이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다.
이쪽을 힐끔거리는지 발걸음이 느려졌다가는 잠시 서 있다가 지나갔다.
현석은 일어나 앉아 우산을 다시 펼쳤다.
눈이 훑고 지나가는 얼굴이 차가웠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
아무런 걱정도 부러움도 없이 동심으로 돌아와 이렇게 정답게 손잡고, 입 맞추고, 커피 마시고.
참으로 편안한 시간이다.
이 눈이 녹으면서 거리는 지저분해지고 검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이곳의 이 시간이 지나면 삶도 또 그렇게 되리라.
그러나 내리고 있는 눈은 아름답기 그지 없고, 녹기 전에 세상만물을 모두 덮고 있는 눈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한강변의 고수부지로 나온 것은 잠을 이루지 못한 때문이다.
이월의 첫 휴일 아침은 세상을 하얗게 덮으며 시작되었다.
현석은 일찍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지 못했다.
하영이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이다지도 커서 잠들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쉬움이야 많다.
그러나, 그리 큰 슬픔도 괴로움도 없이 조용하게 마음이 정리 되었다.
윤가희,
어쩌면, 그녀를 붙잡지 못해서 생긴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예리와의 관계?
참으로 예쁜 아이이다.
비록 현석이 그리 크게 나이를 먹지는 않았어도, 이예리를 보면 싱싱한 젊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비록 첫 정을 준 사람이 현석이긴 했지만, 그리고 그 뒤로도 몇 번, 예리의 샵에 있는 그곳을 찾아갔었다.
왜 첫 정을 주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는 것이 무언가 어색하기도 하고, 그런 것을 물어보는 남자는 참으로 웃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누구에게든 한번은 주어버릴 것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잠이 오지 않아 서성이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무심코 내다본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눈 속에 길을 열고 한강 고수부지로 나왔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라서 아직 많이 쌓이지 않았지만, 이제부터 눈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듯, 아직은 여명에 묻혀 있는 강 건너의 아파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한강을 건너다 보며 자욱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다 보는데 갑자기 온 몸을 싸고도는 소름 같은 외로움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대라고 불러보고 싶은 이 간절한 마음.
이 애타는 마음.
누구에게 하소연도 할 수 없고, 내 마음이 이러한데,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대상이다.
아무런 관계도 아닌,
그저 부서의 직원일 뿐이다.
그걸 관계라고 한다면, 세상 모두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집합체일 것이다.
그러니 이 답답한 마음을 누구에게 털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눈 앞에 보이지 라도 않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석이 외근을 나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을 함께 보낸다.
언제부터 마음 한구석에 그녀, 한지수를 품어 왔던가?
언제부터 인가?
아마 입사할 때 인사를 나누던 그 때부터 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미 몇 달이 흘렀지만, 그것은 현석의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그 때는 이혼 남, 흔히 말하는 돌씽도 아니었으니 그런 생각을 품으면 안되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아무런 자격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를 마음속에 품었단 말인가?
아니, 지금은 자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가? 지금이라도 행여나 마음속에 품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아무런 흠 결이라고는 하나 없는,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인데 반해, 현석은 나이 먹은 이혼 남이다.
비교를 하자면 곳곳에 결격 사유를 덕지덕지 달라 붙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먼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아무런 자격이 없다.
그러니, 어디 감히 여신처럼 아름다운 그녀에게 이 속마음을 내 비칠 수 있단 말인가?
미국출장지에서의 생각이 난다.
그 마지막 밤에 찾아왔던 방문. 비록 꿈속의 방문이지만 정말 진한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살아 있는 현실처럼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그것이 꿈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아악~”
두 손으로 입가를 모으고 강 건너를 향해 고함을 질러 보았다.
아무런 메아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고수부지에는 오직 현석 혼자, 움직이는 까만 점으로 눈보라 속에서 움직일 뿐이다.
이곳에 그녀가 걸어와 준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띠리링.
이 눈 내리는 아침에 웬 전화일까?
그것도 휴일 아침에?
“여보세요?”
‘안녕, 아저씨.’
전화를 받으니 이예리다. 이 애는 여전히 현석을 아저씨라 부른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온 이예리의 목소리에 조금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걱정이 어느새 꼬리를 감추고 사라져 버린다.
“웬일로 이렇게 이른 아침에?”
“아침에 나와보니 세상이 하얗게 덥혀 있기에 아직도 주무시나 하고 전화 드렸어요.”
“벌써 일어났어?”
“그럼요.”
“잠꾸러기인줄 알았는데,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하잖아.”
“아이참.”
“그런데 왜?”
“왜가 어디 있어요? 이렇게 아침에 편하게 전화드릴 수 있을 때 드려야죠. 이렇게 하얗게 눈이 쌓인 날을 그냥 보낼 수 없잖아요?”
언젠가, 아내가 해외 연수를 떠났다고 했었고, 또 언젠가 만났을 때,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었었다. 그때 4월에 돌아온다고 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땐 그냥 그랬다.
“하하하”
“좀 미끄럽긴 하겠지만, 안 나오실래요?”
“난 벌써 나와 있는걸.”
“앗, 정말요?”
“그럼.”
“어디인데요?”
“응, 한강 고수부지.”
“우와, 어쩜, 나도 갈께요. 어디쯤 인데요.”
“눈보라가 너무 쳐서 안 좋아. 집에 얌전히 있는 게 좋을걸.”
“제가 나오시라고 연락했는데, 벌써 나와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죠. 저도 바로 나갈께요.”
현석은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가능하면 택시로 오라고 했다.
혼자 이것 저것 생각도 하고, 눈보라 치는 강변에 홀로 움직이고 싶어서 나왔는데, 마치 그것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연락을 해 왔다.
바람을 마주보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보라가 날렸다.
머리에 내려앉은 눈이 물로 바뀌어 흘러내린다.
그러다가 머리에 쌓인 눈이 미끄러져 발 앞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천천히 걸어서 움직이며 뒤돌아 보니, 혼자 밟고 지나온 곳에 발자국이 깊이 찍혀있다.
아까 서있던 한쪽의 발자국은 내리는 눈과 바람에 날려온 눈에 이미 덮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들고 멀리를 바라보니, 아스라히 보이는 곳에 두 개의 점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현석처럼 나와서 움직이나 보다.
저들은 어떤 괴로움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예리처럼 무언가 모를 환희에 차서 저렇게 나온 것일까?
바람이 많이 불어 차가운 기운이 몸을 파고든다.
몸을 떨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추위가 심해진다.
따끈한 커피가 생각 났지만, 아직은 고수부지 한쪽에 서있는 작은 편의점의 문을 열 시간이 되지 않았다.
아니, 설사 문을 열 시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눈보라 치는 오전의 한강변에 그렇게 일찍이 나와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수부지에 나온 지 시간이 제법 지나서, 발은 많이 젖었다.
숨을 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하얀 김이 눈앞에서 흩어진다.
이예리가 온다고 하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쯤은 슬슬 걸어서 고수부지를 벗어나야 할 시간대이다.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올릭픽대로에서 택시한대가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켠 상태로 고수부지로 진입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예리가 오는 듯 하다.
고수부지는 눈이 제법 쌓여있어서 도로와 도로 아닌 곳이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높고 낮은 구분이 있어서 그곳이 길의 가장자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예리가 코트차림에 모자를 쓰고 내렸다.
한 손에 큰 가방을 들고 다른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다.
택시가 출발하고, 뒤돌아선 예리는 현석을 향해 빠르게 걸어 오고 있었다.
저러다가 행여 미끄러져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현석을 알아보고 우산을 든 손을 흔들어서 자신임을 알렸다.
“오래 기다렸죠?”
“아니, 조금, 어서 와. 그런데 눈 오는 한강에 오면서 뭘 그렇게 들고 와?”
“나오려다가 생각해 보니, 따끈한 커피가 있으면 좋을 것 같기에 보온병에 커피 좀 준비해 왔어요.”
그러면서 가방을 들어 보인다.
제법 준비성이 높다.
하긴 언제 함께 밖에 나들이 갈 일이 없었으니 이런 것을 볼 기회는 없었었다.
가방을 받아서 보니 안에는 보온병과 찻잔도 있고, 군것질 꺼리도 몇 가지 들어있다.
현석은 자동차 트렁크 안에 넣어둔 쿠션매트가 생각났다.
폴리우레탄으로 폭신폭신하게 만든 쿠션매트는 가볍기도 하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아줄 뿐만 아니라, 폭신폭신 하기도 하여 두 해쯤 전에 하영과 놀러 가면서 산 것인데, 딱 한번 사용한 후에 트렁크 안데 그냥 들어있다.
“잠깐 기다려 봐.”
“으응.”
현석은 눈이 수북이 쌓인 자동차로 갔다.
눈은 이제 제법 발등을 덮을 만큼 빠진다.
트렁크에도 수북하게 눈이 쌓여 손으로 슥슥 문질러서 눈을 밀고는 트렁크에서 쿠션매트를 꺼냈다.
“저기 강가로 갈까?”
가방을 받고 우산도 받아 들고 턱으로 강가를 가리키자 이예리가 팔짱을 끼었다.
“네, 그리 가요.”
현석은 천천히 걸어서 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만들어진 계단에 쿠션매트를 깔았다.
“앉아.”
“으응.”
쿠션매트는 크기가 무척 커서 다 펼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앉고도 많이 남을 것 같다.
이예리가 편하게 앉도록 해주고 현석도 그 옆에 앉았다.
우산으로 눈보라를 가렸다.
“와. 좋다. 어떻게 이렇게 멋진 생각을 했어요?”
예리가 현석이 앉는 것을 기다려서 다시 팔짱을 끼면서 하는 말이다.
그녀는 현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음, 내가 보기보다 낭만적인 사람이거든.”
“진짜요?”
“그럼, 여태 만나면서 그것도 몰랐단 말이야?”
“피, 언제 보여 줬어야 말이죠.”
“자주 안보여 줬나? 난, 예리의 모든 것에 관심이 많은데, 예리는 나한테 무관심 하구만.”
“에이, 고짖말이다.”
“진짜야.”
“커피 한잔 하세요. 속이 좀 따뜻해 질 거예요.”
“그럴까?”
예리는 보온병을 열고 커피를 따랐다.
커피가 따라진 잔에서 피어 오르는 김이 바람에 날리면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쳐 지나간다.
“음. 향 좋은데.”
“맛있을 거예요.”
뽀얗게 내리는 눈 속에 받친 우산아래에 흐르는 진한 커피 향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 마시는 커피와도 비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커피 한 모금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감미로운 향기와 진한 커피 맛이 온몸을 감싼다.
“좋은데.”
“좋죠?”
“으응, 어떻게 커피를 타올 생각을 했을까? 아주 이뻐 죽겠어.”
현석은 추위에 발개진 예리의 볼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손으로 쥐었다가 놓은 자리는 더욱 빨개진다.
예리의 코끝도 발갛다.
예리가 현석을 쳐다보다가 살짝 입술을 맞춰 왔다.
잠시 맞춘 입술이지만 입에서 커피 향이 함께 전해진다.
떨어져 나간 입술에 찬바람이 휘이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아마 그 짧은 순간 너무나 따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리가 미소 띤 눈으로 현석을 쳐다 보았다.
숨을 내쉴 때 마다 하얗게 김이 밀려나오며, 잠깐씩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현석이 예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맞추어진 입술 사이로 예리의 혀가 살짝 밀고 들어왔다. 커피 맛과 함께 매끄러운 혀가 현석의 입안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두 사람 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있는 상황이라 깊은 키스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깊은 키스보다 입술만 살짝 부딪치는 키스가 더 감미로울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 이다.
두 사람 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는 금방 떠서 상대의 눈을 쳐다보았다.
현석은 예리의 혀를 밀어내면서 예리의 입안으로 혀끝을 밀고 들어갔다.
예리가 천천히, 부드럽게 현석의 혀를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입안에서 마치 사탕을 빨아먹듯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빨아 당겼다.
이 키스는 정말 감미로운 느낌을 준다.
침대 안에서 맨 살을 맞대고 나누는 키스와는 전혀 다른 신선함과 달콤한 솜사탕 같은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온 몸은 한겨울의 추위와 함께 내리는 눈보라에 덩그러니 나와 있어서 더욱 더 그런 것 같다.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그 긴 입맞춤은 바깥의 추위에 발그래진 얼굴을 더 발갛게 만들었다.
현석은 우산을 접어버리고, 매트에 벌렁 누우며 예리를 당기자, 이예리는 현석의 몸 위에 엎드렸다.
우산이 치워지자 눈이 현석과 이예리 위에 흩날리듯 내려앉는다.
현석이 예리를 꼭 끌어 앉자 그녀는 입술을 현석의 입으로 가져왔다.
바람에 날리는 눈발이 현석과 예리의 얼굴에 쏟아져 내렸지만 바람에 일부는 밀려가고 일부는 얼굴에서 녹아 드는 듯 약간은 시린 느낌이 들었지만, 예리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입을 맞추어 온다.
예리는 몸을 옆으로 돌려서 현석의 바로 옆에 누웠다.
“참, 예쁘다 그쵸?”
“그러긴 한데, 춥지 않니?”
“음, 약간요. 그래도 많이 춥지는 않아요.”
“그럼 우리 일어날까? 따뜻한 난로가 있는 곳이 가고 싶어지네.”
“조금만 이대로 더 있다 가요.”
한쪽으로 두 사람이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다.
이쪽을 힐끔거리는지 발걸음이 느려졌다가는 잠시 서 있다가 지나갔다.
현석은 일어나 앉아 우산을 다시 펼쳤다.
눈이 훑고 지나가는 얼굴이 차가웠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
아무런 걱정도 부러움도 없이 동심으로 돌아와 이렇게 정답게 손잡고, 입 맞추고, 커피 마시고.
참으로 편안한 시간이다.
이 눈이 녹으면서 거리는 지저분해지고 검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이곳의 이 시간이 지나면 삶도 또 그렇게 되리라.
그러나 내리고 있는 눈은 아름답기 그지 없고, 녹기 전에 세상만물을 모두 덮고 있는 눈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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