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호텔은 잘 알려진 꽤나 고급스러운 곳이다.
현석이 조금 늦게 퇴근을 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때에 울려온 전화벨소리의 건너편에 가희의 음성이 낭낭하게 들렸었다.
일찍 퇴근해 봐야 집에 가면 혼자이니, 약속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늦게 퇴근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가는 중이다.
회사 문을 나서며 가희한테 전화를 해 볼까 아니면 시간 좀 더 때우다가 크리스마스 이브의 그일 이후에 부쩍 가까워진 예리에게 가 볼까 궁리를 하던 차였다.
가희가 올 수 있느냐는 물음에 간다고 했고 호텔에 있다며 호실을 알려 주었었다.
호실을 확인하고 벨을 눌렀다.
"딩동."
잠시 기다리자 문 앞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문이 짤깍 열린다.
연한 베이지의 도발적인 이브닝 드레스차림이다.
"안녕."
"현석씨."
문을 닫고 들어서자 말자 그녀는 마치 덤벼들듯이 현석의 목을 껴 안았다.
그리고는 숨가쁠 일도 없었을 터인데도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가만히 안긴 채로.
"가희야. 왜. 무슨 일 있어?"
"....."
"무슨 일이 있구나."
"나. 안가고 싶단 말이야. 현석씨 두고."
이민 이야기 인가보다.
하긴 윤가희야 현석이 이미 이혼 남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하영이 떠난 뒤에도 그 사실을 이야기 해 줄 필요는 없었고, 가희는 자신의 위치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애인의 위치.
글쎄 애인의 위치라는 게 딱히 정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아내의 자리로 넘어와 보겠다는 어떤 의도도 내 비친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다르다.
윤가희 사랑스러운 여자 맞다.
그런데 아내와의 이별 이후에도 그녀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제안도 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정 없이 오랜 기간 살아 오기는 했지만, 이혼서류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인데, 그 자리에 다른 여자를 어떻게 한다는 것이 영 마음 내키지 않기도 하고, 실현될 가능성은 없어도 마음속 한구석을 너무도 크게 차지하고 있는 다른 한 여인, 한지수 때문이기도 하다.
정말 왜 그런지 현석 자신도 알 수가 없다.
자신은 유부남, 그리고 직장상사.
한지수에게는 아무런 표현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데도, 손만 뻗으면 달려올 윤가희나 이예리를 두고 한지수를 생각하고 있다니.
이예리는 너무 어리긴 하다.
그래서 손을 뻗어 보는 것은 현석이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웃긴다는 느낌이다.
한지수.
그 여인이 차지한 크기가 너무나 크지만, 그래도 윤가희를 생각하는 마음이나 또 이예리를 만날 때, 예리에 대한 사랑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 현석 스스로도 가끔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을 안고 있는 여인.
윤가희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에게 물어도 그렇다는 대답이 확실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크게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여인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하던 카사노바의 기질이 있는 것인가?
간혹 그런 생각을 하며 깜짝 놀랄 때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때. 정말 그녀를 붙잡고 싶으면 "그래 가지마." 라고 하면 그녀는 안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한술 더 뜬다면 "가희야. 우리 결혼하자." 라고 하면 아마 윤가희는 정말 그렇게 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도 않고 말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 이유가 아닌, 나머지 이혼서류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까닭이라는 것은 어떻게 본다면 조금의 이유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혼자만의 짝사랑인 것을,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인 것을,
어쩌면 윤가희를 만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 오늘은 윤가희에게 만 집중하자.
그렇다고 이민을 만류할 것은 아니지만.
"그럼 안가면 되지."
"그러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데 왜?"
"안 가면? 가족이 모두 다 가는데. 나만?"
"그렇긴 하다만. 뭐라 말을 못하겠네."
"후~~ 난 현석씨한테, 현석씨는 나한테 뭐야?"
"음. 우린 사랑하는 사이."
현석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 했다.
"그래 맞아요. 그런데...."
"...."
"우린 서로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잖아."
그래 그 말은 맞다. 서로 무언가 요구할 입장이 아니다. 지난해 봄. 파도소리가 들리는 동해바닷가의 송림아래에서 만나 삼일간을 같이 여행했고, 그리고 애인하자고 했었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이다.
그럼 너무 이기적인 것인가?
얼마간의 침묵.
이런 어색한 침묵은 참 그렇다.
생각 같아서는 붙잡아 두고 싶다. 그렇지만 그 어떤 약속도 해 줄 수 없는데,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도 옳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 지려나. 마음속의 그대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옅어 지려나.
공항에는 나가지 않았다.
몇 번을 딸막이기는 했지만 결국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붙잡을 수도 붙잡아도 안 되는 여인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공항에 나가서 또 한 번의 이별을 해야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어제 밤 가희와의 섹스는 참으로 격렬했다. 마치 다시는 오지 못할 곳으로 가는 것처럼 그녀는 온 몸에 남아 있는 정열을 모두 다 쏟아 부었다.
그리도 긴 밤이 한없이 짧게 느껴지도록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탐했다.
그리고 서로 알몸인 채로 긴 시간의 포옹으로 말 없이 이별의 인사를 대신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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