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밤, 한강에서의 그 깊은 입맞춤이 어떤 계기가 되었을까?
회사 내에서 단 둘이서만 있으면, 한지수와의 관계가 그날 이전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되었다.
회의실에서 단 둘이 있게 되면 슬쩍 손을 잡거나, 볼을 잠시 만지거나 하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물론 당연히 현석이 먼저 시도를 했지만, 지수 역시 거절의 의사를 비친 적이 없다.
아니 느낌으로는 은연중에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 같다.
현석의 그런 시도에 그녀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마치 키스할 듯이 얼굴을 가까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현석은 그녀의 어깨를 슬쩍 당기거나 턱을 손가락으로 툭 치거나 하는 행동을 했고, 한지수 역시 그런 것을 은연중에 즐기고 있었다.
회사의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면서 둘이서 밀애를 즐기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것은 아슬아슬 하면서도 스릴 넘치는 희열도 있었다. 또 동시에 짜릿한 쾌감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아무도 없는 회의실이라고 하더라도 입맞춤 만은 시도해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초간단 입맞춤이라도, 그것을 시도해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제는 하영도 떠나고 없고, 윤가희도 떠났고,
이예리,
이예리도 떠나갔다.
뒤 돌아보면, 아니 엄밀하게 말 한다면, 예리한테는 현석이 오히려 당했다고 봐야 하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녀가 마음대로 현석에게 몸을 던졌고, 그리고 또 떠났다.
남자가 그런 치사한 생각은 하는 게 아니야, 라고 위안을 하긴 했지만, 그들의 떠나 감으로서 만들어진 빈자리, 그 빈자리로 인해서 생기는 공복감이나 공허함 같은 것 들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비록 지수와는 단 한번의 입맞춤이 전부일 뿐이지만, 그녀가 있어서, 그 무언가 모를 포만감이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사랑이어서 그런가?
그 한번의 입맞춤 만으로도 행복했다.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부서의 직원이 ‘차장님 뭐 좋은 일 있으세요?’ 하고 물어왔을 정도이다.
그때 마다, ‘아니, 그런 일 없는데.’ 라고 얼버무렸다.
대답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지만, 누구에겐가 말 할 수도 없고, 표시를 낼 수도 없다.
조금은 입이 근질거리기도 했지만, 적어도 회사내에서는 그 누구도 몰라야 하는 일이다.
현석은 인터폰으로 지수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고 보니 최소한 하루에 한두 번 정도는 인터폰으로 짧게나마 전화 데이트를 하는 것 같다.
간혹 지수도 현석에게 인터폰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인터폰을 하기 위해 그녀는 뒤돌아 보아야 하고, 현석은 고개만 들면 보인다.
그러니 현석은 언제라도 그녀에게 인터폰을 할 수 있다.
회사에서야 전화로 업무를 보는 경우가 워낙 많은데다가, 부서내의 직원들이 서로 전화기를 들고 있는 경우란 허다하기에 현석과 지수와의 인터폰 데이트가 하등 이상할 일이 없다.
다만, 거래처와의 업무는 목소리 톤이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현석과 지수와의 폰 데이트는 결코 톤이 올라갈 일이 없을 뿐이다.
“주말에 뭐해?”
지수가 인터폰을 받는 것을 확인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사내에 다른 직원들이 지수와 이러한 밀월 같은 관계를 눈치채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름도 부르지 않고 정말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트 신청 하려고 하는데요."
한지수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현석이 하려는 말을 선수 치는 것 같다.
고개를 들지 않고 눈만 들어서 지수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동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로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고 있었다.
내심 놀랐다. 이렇게 당돌하게 말을 하다니.
"사실은 나도 그 생각으로 인터폰 한 건데."
"그래요? 우린 뭔가 통하나 보네요."
우리? 그녀가 또 우리라고 한다.
현석은 여태 우리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우리란, 적어도 현석에게 그 용어는 참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조금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아마 그건 비슷한 의미 일수 있다.
그래서 그녀가 우리 라고 하면 모든 경계심을 놓아버리게 된다.
일부의 회사에서 시행중인 주 오일 격주 휴무 제를 현석의 회사에서도 시행하고 있지만, 현석은 대부분의 토요일에 출근을 했다.
집에 있어봐야 혼자이니 텔레비전을 벗삼아 뒹굴거리면서 낮잠만 자게 마련이어서, 차라리 회사나 가자.
멍하니 있더라도 책상에 앉아서 멍해야지, 잠이나 자면서 멍 하면 뭘해 라는 생각으로 회사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토요일에는 지수와 데이트를 하며, 한가로이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는데, 그녀가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했단다.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한지수의 화사한 옷차림.
이제는 봄을 지나, 초 여름으로 치닫고 있는 계절이라 그녀의 옷차림은 그 늘씬한 키와 더불어 너무나 돋보였다.
지수는 어깨에 멜 수 있는 가방을 들고 챙이 긴 화사해 보이는 모자를 쓴 차림이었다.
집이 가까운 것을 알고 있기에 현석이 그 인근의 아파트 사거리에서 만나자고 했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뇨, 금방 나왔어요.”
"그런데, 지수씨 멋지네."
차를 출발시키면서 현석은 지수를 다시 한번 쳐다 보았다.
“차장님두요.”
“난 아니지만, 일단 가 보실까요?”
“네.”
서울 대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현석은 트렁크에서 쿠션매트와 모자, 그리고 물병이 든 가방을 꺼냈다.
그녀의 복장은 이미 출발전의 사거리에서 차에 타기 전에 이미 보았지만, 초여름의 야외 나들이에 잘 어울릴 정도로 화사하고 품위가 있다.
그녀는 회사에 출근하는 복장은 무척이나 기품이 있는 차림이다.
마주서면 그녀의 복장 때문에도 아무나 범접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긴 하다.
그런데 야외에 놀러 가는 복장 조차도 이렇게 아름답고 품위 있다니.
"밖에서 이런 차림으로 보니 정말 멋있어. 여태까지 전혀 못 느끼던 모습이네 정말."
현석은 그녀를 요모조모 뜯어 보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감사합니다."
“멋져.”
“정말요?”
현석의 거듭된 찬사에 그녀가 물었다.
"그럼.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본적 있어?"
"아~뇨. 그런데 그거.”
현석이 꺼낸 물건들을 보고 그게 뭐냐는 듯 물었다.
"응. 매트랑 물통."
매트는 쿠션매트라서 여느 사람들이 사용하는 돗자리와 비교한다면 접은 상태로도 무척이나 부피가 크다.
그러면서도 펼쳐면 아주 큰 크기는 아니다.
쿠션이 있는 매트이다 보니 두껍고 작은 크기이지만 접어도 어느정도 한계가 있다.
그렇게 부피가 크다보니 차에 싣고 다닌다면 몰라도 버스나 지하철에 들고 다니기에는 부담스러운 물건이다.
그대신 앉을때에는 무척이나 폭신하다.
몇번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웬지 앞으로 종종 사용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놈이 예뻐 보이기도 한다.
"그런 건, 제가 준비해야 하는데."
"이건 경험이 많은 사람이 준비하게 되어 있는 거야. 그리고 지수씨는 차를 안 가지고 왔잖아."
"흐흥. 멋져요. 제가 준비 안 할걸 아시고 이렇게 준비를 해 오시다니."
그녀의 얼굴은 밝다.
이렇게 화사하고 밝은 초여름의 오전 햇살 아래라서 더욱 그런가 싶지만, 지수의 모습은 정말 너무나 싱그러운 이 계절에 잘 맞는 모습이다.
"자 그럼 가실까요? 우리 공주님."
"네 왕자님!"
그녀가 팔짱을 끼어 온다.
현석은 그녀를 한 번 쳐다 보았다. 지수 역시도 팔짱을 끼면서 현석을 쳐다본다.
"왕자님이라. 뭔가 간지러운 느낌이라 어색하지만 기분은 그럴싸 한데."
"저는 공주님이라고 부르니까 좋은데요. 맨날 못난이 소리만 듣다가.. 호호호."
"그럼 자주 불러 주지 뭐. 우리 이쁜 공주님.”
"응. 고마워요. 왕자님."
서울랜드로 들어간 두 사람은 아이들처럼 놀이기구도 타고 귀신이 나온다는 굴 속으로도 들어갔다.
그녀가 이곳 저곳으로 먼저 이동하면서 현석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거나, 아니면 팔짱을 끼고 끌다시피 앞으로 갔다.
그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거나 껴안는 것이 문제 될게 없었다.
약간은 소리도 지르고 놀라서 품으로 파고들기도 하는 지수의 모습을 보며, 현석은 어찌 이리도 사랑스러운 여자가 있을까 생각 하면서도, 언제 이렇게 스스럼 없을 정도로 가까워 졌던가 싶다.
하긴,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된 관계는 아니다.
비록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관계이긴 해도 이미 1년 전부터 얼굴을 아는 사이가 아닌가?
그것이 몇 번의 포옹, 그리고 한번의 입맞춤으로 거리감이 한꺼번에 줄어들었을 뿐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다.
그렇겐 해도, 그 입맞춤을 통해 아주 오랫동안 사귄 사이처럼 이렇게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이 혹시 꿈이 아닐까 하고 한번씩 깜짝 놀랐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두 사람은 나란히 걷거나 앞 서거니 뒷 서거니 했지만, 둘이서 나란히 걷게 되면, 지수는 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귀신이 나오는 모험의 동굴에서 그녀는 거의 온 몸으로 매달려 왔다.
불과 얼마 전, 그러니까 횡령제보가 있기 이전의 한지수가 맞는 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싶을 정도로 달라졌다.
물론, 회사에서의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회사 안에서는 횡령제보사건이 있기 이전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달라진 것은 오직 단 두 사람이 있을 때, 그 때뿐이다.
회사에서는 남들이 없는 곳에서 이따금 장난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회사인지라 약간의 경계심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경계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전혀 거리감이 없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매달리듯 옆에서 따라 걷는 모습은 남들에게 연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현석과 지수를 심심찮게 쳐다보고 지나간다.
특히나 남자들이 많이 그렇게 쳐다보고 지나갔고, 어떤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쳐다보고 있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한 쌍 중에 남자가 지수를 쳐다보다가 함께 가는 여자에게 끌려 가기도 한다.
그것은 현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수를 쳐다보는 것이란 걸 현석은 이미 알고 있다.
지수의 훤칠한 키에 싱그러운 복장과 미모는 주위를 압도하고 있고, 너무나 뛰어나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으쓱하는 기분, 한편으로는 좋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기도 하다.
불편이라는 말보다는, 불안한 느낌이라는 것이 더 어울리려나?
해가 서쪽하늘을 가리고 있는 산등성이에 아직 걸리지는 않았지만, 곧 그곳으로 넘어갈것 같은 시간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 갔는지 모르겠다.
점심을 먹은 것도, 사이사이에 솜사탕을 사서는 장난스레 뜯어서 서로의 얼굴에 부쳐 주기도 하고 궤도열차에서는 까악! 하며 고함도 지르는 한지수는 정말 행복해 보이는 듯 했다.
서울랜드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인파로 입구까지 가는 코끼리 열차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줄 지어 있었다.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그 차를 타려면 아무래도 몇 대의 차가 지나가야 할 것 같았다.
"이거 차 타기 힘들겠는데."
"네. 걸어 갈까요?"
"피곤하지 않아?"
"조금요."
"그럼 저기서 뭘 좀 먹고, 저 아래 호숫가에서 잠깐 쉬었다 가지 뭐. 조금 더 있다 나가면 사람이 없을 것 같으니까."
"네. 그게 좋겠어요."
지난번부터 단 둘이 있을 때면, 지수에게 말을 편하게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아마 그것이 조금 더 친하게 만들게 되었나 싶다.
이동식 판매점에서 맥주 두 캔, 마른안주와 군것질 거리 몇 가지를 사서는 호숫가로 갔다.
몇몇 무리들이 돗자리를 펴고 황혼이 지는 초여름 저녁의 정취를 느끼고 있었다.
현석은 사람이 없는 곳의 평평한 곳을 골라서 쿠션매트를 폈다.
다른 사람들은 얇은 돗자리 이지만, 현석은 제법 두께가 있는 쿠션 매트라서 크고 두껍긴 하지만, 앉을 때에는 무척이나 편하다.
넓게 펼친 쿠션매트에 현석도 지수도 약속이나 한 듯이 신발을 벗고 그 위에 올라왔다.
"피곤하지?"
"네. 그렇지만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또 와요."
"지수씨가 좋으면 나야 무조건 오케이지."
앉자 말자 캔 하나를 따서 그녀에게 쥐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마개를 따고는 건배하듯 손을 들자 그녀가 그 곳에 캔을 부딪쳤다.
회사 이야기, 제휴이야기,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 맥주도 떨어지고, 날씨는 더 어두워져 이쪽 저쪽에서 사람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지수씨 미안. 다리 좀 베고 누워도 될까?"
"...."
무슨 뜻이냐는 듯 쳐다 본다. 그러더니 잠시 멈칫 했다.
"아. 네. 괜찮아요."
잠시 뜸을 들인 후에 허락한다.
현석은 참 주책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수의 다리를 움직여서 왼쪽 허벅지 중간을 베고 누웠다.
"다리 아프면 말해요 지수씨."
"네.”
“좋다.”
“참 편해 보여요. 그러고 계시니까."
"지수씨가 이렇게 해 볼래?"
"아뇨. 남들이 흉 봐요. 여자가 그러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데?"
"그래두요."
이렇게 부담 없이 이럴 수 있는 것이 한강변의 키스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단둘이만 되면 은연중에 즐기는 스킨십으로 인해 거리감이 없이 무척이나 친숙해 진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손을 어디에 놓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냥 내리고 있자니 모양이 어색하고 자연스럽게 내리면 왼 손은 현석의 머리에 오른손은 손은 현석의 배나 가슴에 와야 한다.
현석은 지수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리고 가슴 위에 얹고는 그 손을 토닥거렸다.
"아. 편하다. 시원하기도 하고...."
"낮엔 더운 듯 하더니 저녁이 되어서 그런지 정말 시원해요."
"이러고 잠들었으면 좋겠다. 그래두 되? 지수씨?"
"아뇨. 잠들지는 마세요."
"흠. 난 좋기만 한데."
"피. 그럼 저 혼자 멀뚱멀뚱 있으라구요?"
"그렇게 되는구나. 아. 미안."
지수가 가만있다가 오른손으로 옷 위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이동거리가 워낙 짧아 쓰다듬는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녀의 왼손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무척이나 좋다.
이런 모양은 남들이 보면 영락없는 연인 관계이지 누구도 직장의 상사와 여직원의 관계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녀가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올려다 보는 현석의 눈에 보이는 지수의 작은 얼굴이 예쁘다.
그녀는 얼굴이 참 작은 편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그렇게 보인다.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함이 배어나고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피로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긴 오전에 와서 하루 종일 놀이동산을 휘젓고 다녔으니 피곤할 수도 있다.
초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해가 넘어가려고 하니 조금 쌀쌀하게 느껴진다.
나무 끝에넌 아직 햇살이 남아 있지만, 현석이 누워있는 바닥에는 햇빛이 사라지고 없다.
"좀 쌀쌀하지 않아?"
현석이 물었다.
"네 조금. 차장님 가슴이 따뜻해요."
"나도 지수씨 다리가 참 따뜻하다. 그런데 다리 아플 거 같다"
"아뇨, 괜찮아요."
현석은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다리가 아플 테고 계속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조금은 민망했다.
반쯤 몸을 일으키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 때 그녀가 무언가 머뭇거리듯 하더니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입술이 찾아왔다.
무심결에 입술을 받았다.
지수의 입술이 현석의 입술과 겹쳐지며, 그녀의 혀가 밀려 들어왔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현석도 자신도 모르게 지수를 껴 안았다. 지수의 혀는 더 이상 깊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현석의 입 안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현석이 혀를 마중 나가서 함께 움직였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감미로웠다.
한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 소리에 지수는 몸을 돌리며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몸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는 현석이 채 어색할 사이도 없이 몸을 일으켜서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우리가 입맞춤을 하면 왜 자꾸 사람들이 방해를 하는 거야?
지난번에 한강변에서도 그러더니, 오늘 여기서도 또 그렇다.
그래서 안타깝다.
그녀가 일어서자 그녀의 얼굴에 햇빛이 든다.
그 햇빛에 그녀의 까만 머리가 머리가 갈색으로 빛난다.
현석도 일어섰다.
수풀 너머로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현석은 가만히 다가가서 등 뒤에서 안았다.
포근한 느낌이다.
그녀의 얼굴에 남아 있던 햇살이 현석의 얼굴로도 슬금슬금 넘어 왔다.
해가 넘어가며 느껴지던 약간의 쌀쌀함이 두 사람의 포옹으로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배에 가 있는 현석의 손을 그녀는 가만히 잡았다.
"…"
그녀의 팔이 현석의 팔 위에 맨살로 닿았다.
현석의 배에 닿여있는 그녀의 등이 부드럽고 따스하다.
초여름의 늦은 오후에 불어오는 미풍이 두 사람을 질투하듯 한바퀴 돌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고 지나간다.
얼마전 한강에서와 달리 오늘은 그녀가 머리를 묶지 않았기에 그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이 현석의 얼굴을 간지럽히듯 살랑거렸다.
그녀와의 포옹, 그녀의 머리카락의 간지럽힘, 그리고 현석의 하복부 앞에 닿아있는 그녀의 엉덩이가 새삼스럽게 느껴지자 갑자기 육봉이 힘을 받기 시작한다.
아하. 안되는데.
이런,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얘가 왜이래.
그렇지만 이것은 자율신경이지,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걸 알지만, 민망하잖아.
초여름이라 옷이 얇아서 옷으로 어떻게 커버하지도 못하는데.
현석은 이 난국을 어떻게 모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런.
그녀도 느꼇으리라.
느끼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녀와 현석이 너무나 가깝게 밀착해 있는 상태이기에 현석의 하복부가 힘을 받고 부풀어 오르는 것이 그녀의 엉덩이를 밀면서 벌떡 일어서는 것을 현석이 느꼈는데, 그녀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대로 모른척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녀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살짝 돌리는듯 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뺨과 현석의 뺨이 닿았다.
따스한 감촉이 전해진다.
"지수씨."
"네."
할말은 없다.
아니, 있다.
사랑해.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사랑해 지수씨.
진정으로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상황의 타개가 먼저다.
현석은 몸을 그녀로부터 조금 떼어내면서 몸을 돌려 그녀의 앞으로 한발짝 이동했다.
그녀의 촉촉히 젖은 입술과 저녁 햇살에 비친 눈동자가 보인다. 그 햇살 때문에 유난히 밝은 갈색으로 투명해 보이는 눈동자가 약간씩 움직였다.
그녀는 현석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아래로 시선이 내려가 있다.
아마 그 시선이 현석의 입술 위치나 코의 위치쯤 보고 있으리라.
현석이 그녀를 뒤에서 안고 있을 때 현석의 몸의 일부가 꼿꼿하게 일어서는 것이 그녀의 엉덩이에서 느껴서 그런가? 그래서 눈을 똑바로 못보는 것인가 싶다.
속눈썹이 길다.
그 긴 속눈썹이 햇살속에 가지런히 줄을 맞추어 서 있고, 떨리듯이 몇번을 살짝 살짝 움직였다.
그녀의 눈 아래로 뽀얀 피부가 아직도 넘어가지 않고 남아있는 햇살에 투명하게 빛이 난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발갛게 타오른 숫불보다 더 붉은 입술이 역시 햇살에 빛을 발하고 있다.
이렇게 한줌 남은 햇살이어서 더 붉게 보이는것인지, 그래서 더 투명하게 보이는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몸은 서로간에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있어서 육봉이 힘을 받고 뻣뻣하게 일어섯던 그 민망함은 없어졌지만, 그 민망함이 언제 그랬냐는 생각도 없이 그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저 입술에 입을 맞추면 몸도 영혼도 깨끗하게 빨려 들어가버릴 것만 같다.
마치 그녀의 입술속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서 소멸되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소멸 되어도 좋다.
현석은 도저히 더 이상은 그냥 바라보고 있을수만은 없었다.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찾아갔다.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살며시 눈을 감았고, 현석의 입술을 맞아 들였다.
입술과 입술이 겹쳐진 후에 다시 그녀의 혀가 먼저 현석의 입안으로 찾아 들었다.
감미롭다.
태양빛을 받아 투명한 붉은 빛을 내던 그녀의 입술의 열기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릴듯이 붉은 그 입술이, 뜨거운 열기 대신 감미로움으로 변해서 현석의 입안으로 들어오고 있는것이었다.
현석은 지수를 힘껏 껴 안으며, 그녀의 혀를 입 안으로 받아들이고, 입안에서 자신의 혀로 그녀를 맞아 들였다.
그녀도 현석의 혀와 하나되어 그녀 입안의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이빨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고, 혀의 아래쪽을 들어가기도 했고, 그리고 들어갈 수 있는한, 그녀의 입속의 가장 깊은곳까지 들어갔다.
옆에 누군가가 있는지, 있었는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오직 지금 이순간, 그녀와의 감미로운 입맞춤, 부드러운 느낌, 촉촉한 느낌과 맛, 머릿속에서는 불꽃 속에 한방울씩 설탕물을 뜅겨낼 때마다 그 불속에서 짧은시간 화르륵 타오르고는 사라지는 듯, 피어 오르는 그 느낌과 그것 전체를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거리며 지나가듯 느껴지는 포근함 밖에는 없었다.
현석과 지수가 그래도 못내 아쉬워하며, 얼굴이 벌개진채 서로를 바라보았을 때는 목 위에 겨우 걸려있던 햇살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
그녀를 바라 보았다.
무언가 놀라운 것과 아쉬움이 반반씩 섞인 듯한 그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현석도 약간은 가쁨 숨을 진정시키느라 가슴속으로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현석은 그녀를 가슴에 안아 들였다.
그녀의 두 팔이 현석의 허리에서 등뒤로 돌아왔다.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콩닥콩닥 들려왔다.
맞나?
혹시 그것이 내 심장 뛰는 소리는 아닐까?
아니, 틀림없이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였다.
그녀의 심장이 뛰는 그 박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현석의 심장도 뛰고 있었을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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