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제가 쓴 [나의 질내사정기 - 그란드미떼 편] 이후 미떼 님이 쪽지 테러를 당하셨다고 하네요. 무려 마흔 통 넘게... 근데 정작 글 쓴 나는 왜 아무런... ㅋ 우리 둘이 한참 웃었습니다.
3.
서른 살이 되고 한 달이 지난 후부터 출근하게 된 새로운 직장. 서울 인근에 있는 널찍한 부지의 4층 건물이었는데, 건물부지 뒤로 펼쳐진 산책코스가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주요 국가 기관들이 밀집한 곳이라 도시의 소음일랑 일절 없었고, 무엇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과 일할 수 있어 좋았다. 대부분이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어서 ‘직장에 출근 한다’라는 생각보다는 ‘대학원에 장학금(월급) 받고 다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입사 초반 나의 집중력을 바짝 끌어올린 것은, 내가 입사한고 이틀 후에 우리 팀에 합류한 동료(엄밀히 말하자면 상사) 때문이었다.
건강하게 까무잡잡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던, 아니, 이국적인 이름이 더 인상적이었던 그녀.
그녀의 이름은, 박, 슈, 라.
딱히 이상하다 할 수 없지만 한국인이 갖기에는 워낙 특이한 이름이었기에 몇 번이고 본명인지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왜요? 내 이름이 이상해요?”
이상하달 건 없지만 누가 들어도 이국적인 이름임은 분명했다.
“우리 오빠는 슈바에요, 박슈바.”
진심으로 빵 터졌다. 그녀의 오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사람 이름이 슈바라니. 팀원 몇 명이 애써 웃음을 삼키려다 기침을 해버렸다. 혹시라도 더 웃을 게 있을까 싶어 다른 형제는 없냐고 묻자,
“여동생 하나 있어요. 이름이 궁금해서 그러죠?”
아마도 그녀는 이런 유의 질문을 자주 받은 모양이다.
‘슈’자 돌림으로 기대할 수 있는 온갖 단어들이 떠올랐다. 설마하니 ‘슈퍼’는 아닐 테고, 여동생이라면 ‘슈가’? 그래, 슈가 정도가 무난하고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동생은, 박현경이에요. 실망하셨죠? 막내는 평범한 이름 지어주고 싶었대요. 나랑 오빠 이름 짓고 나중에 후회했다고.”
이름만큼이나 슈라 씨의 행동 또한 톡톡 튀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대뜸 “지승 씨, 우리 말 놓자. 우리 동갑이잖아?”라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한 발짝 몸을 뒤로 빼며 “아니에요. 직급도 저 보다 높으시고......”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박사 소지자였고, 나는 석사. 또한 그녀는 82년 생, 나는 83년 생 임을 상기 시켜주자 “아니야. 나는 아직 생일이 안 지났고, 지승 씨는 지났고. 그럼 똑같이 (만)스물아홉 살이지?”라며 말을 놓을 것을 밀어붙였다.
“혹시 슈라 씨, 외국에서 살다 오셨어요? 나이 계산법이 좀 다르네요?”
“응. 나 미국 시민권자야. 그리고 국적을 떠나서 나이가 대수야? 생각해보면 웃기잖아, 1월 1일에 전 국민이 동시에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무슨 공산주의도 아니고......”
아, 그녀의 톡톡 튀는 사고방식의 근원이 무언지 알 수 있었다.
“그럼 미국에서 오래 사셨겠어요? 어디 계셨어요? 저도 미국에서 3년......”
“나? um....... 2년 있었나?”
뭐라 답을 해줘야 그녀가 덜 병신 같을지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튼 우리는 보자마자 말을 놓기 시작하였고 (그나마) 직장에서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될 수 있었다. 우리 팀은 팀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움직였기에 출퇴근도 제각각이었고 단체회식 같이 한자리에 모일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슈라 씨와 나는 함께 점심을 먹고 뒤뜰을 산책하곤 하였다. 처음에는 거부감 들 정도로 개성 있던 슈라 씨였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그녀는 직장에서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 있었다.
내가 지윤이에게 슈라 씨에 대한 이야기를 풀자 그녀는 여자로서의 촉이라며 그녀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절대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동료일 뿐이고 여자로서의 매력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지윤이는 “아니야. 요즘 오빠 분명히 어딘가 이상해.”라며 치켜 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슈라 씨의 오빠 이름을 이야기 해주자 지윤이는 빵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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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슈라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자 여진이 역시 빵 터지고 말았다.
“아, 진짜 웃겨! 그 언니 정말 궁금하다!”
나는 여진이가 입을 가리지 않고 활짝 웃는 것이 정말 좋았다. 입을 가리지 않고 웃는 것은 그녀가 나를 경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몇 번의 관찰을 통해 그녀의 이런 버릇을 알 수 있었다.
“오빠, 근데 나도 이름 때문에 놀림 많이 받아서 그 고통 알아. 내가 서연이라고 개명한 것도 애들이 여진족이라고 놀려서 그랬거든.”
여진이의 별명이 여진족?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여진족이라는 별명은 전혀 생각도 못 했네?”
“나는 그래도 우리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자랑스러워했는데, 애들이 내 베프까지도 ‘거란족’이라고 부르잖아. 그래서 개명하려 마음먹었지.”
여진족과 거란족. 나는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다가 말을 이었다.
“나 왠지 그 친구의 마음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 오빠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짝꿍이 은비였는데, 걔 짝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별명이 ‘까비’였거든. 그때 ‘은비 까비 옛날 옛적에’라는 만화가 있어서.”
“은비 까비? 그런 게 있었어?”
그 유명한 만화영화 ‘은비 까비 옛날 옛적에’를 모르다니. 나는 손가락으로 그 만화가 방영되던 해를 꼽아 보다가 알았다. 그때는 여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내가 웃으며 “아, 너 태어나기 전이었구나.”라고 하자, 여진이는 “으이구~ 아저씨!”라며 핀잔주듯 나를 놀려댔다. 내가 아저씨라는 놀림에 “그럼 원빈도 아저씨니까 나랑 원빈이랑 동급이네?”라고 농담을 했다가 오히려 더 큰 핀잔을 들었다.
“그럼 ‘피구왕 통키’는 알지?”
“들어는 봤어. 아빠가 피구 하다가 죽는 거 아니야?”
“응. 그 만화 할 때는 내 별명이 통키였어.”
“왜? 피구를 잘 했어?”
“아니......” 나는 짐짓 심각한 듯 목소리로 변조하여 “사실은 그 별명엔 슬픈 사연이 있어......”라고 농을 부렸다.
“아, 또 무슨 드립 치려고? 뭐, 오빠네 아빠가 피구하다 돌아가시기라도 했어?”
“사실....... 그때 내 짝 이름이 ‘미나’여서 내 별명이 통키가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아, 뭐야!?”
나는 나 보다 열 살이나 어린 여진이에게 이런 실없는 농담을 즐겨했다.
그러다 문득 들여다보게 된 여진이의 눈동자. 정말이지 언제 봐도 매혹적인 짙은 까만색. 그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았을 것 같이 순수한 black. 이렇게 아름다운 black을 가지고 있는데 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 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떠한 눈동자 보다 매력적인 눈동자를 가진 여진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동자를 칭찬했다.
“아~ 또 그 소리야. 나 진짜 그 말 들을 때 마다 완전 오글오글 거린다고!”
“나 빈말 못 해. 정말 눈동자 색이 예뻐서 그래.”
“그냥 넣어둬! 하고 싶어도 참아!”
하지 말라고 하니 오히려 더 놀려대고 싶었다. 나는 느끼한 말투로 멘트를 날렸다.
“여진이 너, 입버릇처럼 스무 살 되면 자동적으로 예뻐진다고 했는데, 이제 정말 예뻐지려나 보네? 스무 살 되고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벌써 이렇게 예뻐지면 어쩌려나?”
“하지 말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싫지는 않은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여진이.
“왜 싫어? 그만 할까?”
“아니, 싫은 건 아니고....... 그래도 그런 말은 우리 둘만 있을 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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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는 지윤이와 잠시 헤어져 있던 동안 사귀게 된 ‘아마도’ 나의 여자 친구이다.
그녀가 나의 여자 친구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그저 한 번 몸을 섞은 사이이기 때문이다.
2012년 1월 8일은, 지윤이와 헤어진 나의 홧김과, 자신에게 입대 3일 전 그 사실을 통보한 남자친구에 대한 여진이의 실망이 교차한 날이었다. 동호회 사람들 없이 우리 둘이 술을 마신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꽤나 따뜻한 일요일이었고, 나는 한가한 주일을 보낼 심산으로 홍대에 들러 아이쇼핑을 하다가 우연히 여진이 역시 아무런 목적 없이 같은 거리를 배회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린 동호회 이야기와 지난 밤 있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를 씹을 거리 삼아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처음 동호회에 나왔을 때만 해도 열아홉 살 대학 새내기였던 여진이는 “이젠 나도 법적 성인이에요!”라며 과시하듯 맥주잔을 비워냈다. 좀 과하다 싶어 말리니 “그동안 못 마셔서 그렇지, 친구들이랑 몰래몰래 먹을 때 보면 내가 술 제일 세더라고요.”라며 배시시 웃는 여진이. 우린 제법 그럴싸하게 pub(영국식 선술집) 인테리어를 재현한 bar에 나란히 앉아 서늘한 맥주에 새우칩을 먹었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마신 맥주에 홀린 걸까? 아니면 나이 서른에 접어들며 주책이라는 것이 생긴 걸까. 나는 갓 스무 살 된 핏덩이의 배시시한 미소에 잠시 두근거렸다.
그녀는 이따금 장난스러운 얼굴로 나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열 살 차이는 오빠동생이 성립할 수 없는 나이라며, 삼촌조카가 자연스러운 호칭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내가 삼촌이라는 호칭을 오빠로 바로 잡기 위해 낑낑거릴 때마다 그녀는 스무 살의 미소를 보여주었고, 그때 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결국 삼촌미소를 짓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두근거림은 단순히 지윤이가 머물던 빈자리가 주는 허전함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스무 살 성인이라고 해도 그녀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여자아이였다. 어쩌면 여진이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편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또한 그녀 역시 나를 열 살 위의 삼촌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꽤나 많이 마셨다는 생각에 “집에 가는 길에 화장실 자주 들르겠는 걸?”이라며 자리를 파할 것을 유도했으나, 그녀는 내 속내를 잘못 읽었는지 “그럼 종목(주종)을 바꿀까요?”라며 “이자카야 가보고 싶어요!”라고 내 팔을 이끌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럼 남은 잔만 모두 비워내고 일어나자며 시간을 끌었다.
한 겨울의 밤이었지만 바람은 시리지 않았다. 나는 안에 누빔을 덧댄 숏 코트를 입고 있었고, 여진이는 두툼한 재질의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내가 끼고 있던 가죽장갑 한 쪽을 끌러 여진이 손에 끼워주자 그녀는 “아~ 따뜻해!”라며 좋아하였다.
이자카야에서는 주로 그녀의 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예전 그녀가 동호회 사람들에게 소개한 20대 초반의 남학생을 떠올렸다. 그 나이의 남자아이가 그렇듯 적당한 허세와 건들거림이 몸에 밴 듯 한 녀석이었다.
둘은 동네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났고, 남자 녀석이 여진이에게 구애를 하며 관계를 시작했다고 하였다. 여진이로서는 나이 열아홉에 처음 해보는 연애였기에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행복들을 상상했지만, 사귀는 관계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녀석은 돌연 군입대를 통보해왔다는 것이다. 입대를 불과 3일 앞둔 날이었다고 한다.
“군대 가기 전에 나를 가지고 장난한 거죠, 뭐.”
여진이는 푸념조로 말하며 작은 사기잔에 담긴 사케로 입술을 살짝 적셨다. 그녀가 잔을 들자 나 역시 반사적으로 잔을 들어 건배를 하는 모션을 취했다.
총 얼마나 사귀었냐는 질문에 석 달이 채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도 남자 녀석은 여진이를 만나기 전에 이미 자신의 입영날짜를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여진이에게는 그 생각을 말해주진 않았다.
그렇게 몇 순배의 술이 돌았을 때, 나는 돌연 강한 취기를 느꼈다. 어질하다기 보다는 아찔한 취기였다. 더 이상 마시면 안 될 거 같아 그녀가 잔을 비울 때 마다 마시는 척만 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각은 어느덧 막차시간을 생각해야 하는 범주에 이르렀다. 혹시라도 그녀가 취하면 택시를 태워 보내야 하나, 하는 생각도 교차했다.
그녀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남자친구에게 그렇게 휘둘린 것이 자신이 못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아니다, 너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런 너를 남겨두고 가버린 그 남자 녀석은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라는 말로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은 그다지 풀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구체적인 칭찬을 생각해야 했다. 내가 찾은 그녀의 매력은 까만 눈동자였다.
“여진이 너, 렌즈 같은 거 껴?”
“아니오. 저 눈 좋아요.”
“써클렌즈 그런 것도 안 낀다는 거지?”
“저 그렇게 꾸미는 거 할 줄 몰라요.” 써클렌즈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는 헛헛하게 웃으며 답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눈동자가 정말 까맣고 예뻐. 그래서인지 눈이 참 맑아 보여.
내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적극적으로 칭찬한 것인데, 그녀의 코드에는 맞지 않았나 보다. 그녀는 크게 웃더니 “무슨 도를 아십니까, 예요? 눈이 맑다니!!”라며 깔깔거렸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입술을 살짝 적시기만 했던 술잔을 들어 건배 제스처를 취하며 그녀의 웃음을 술로 넘기려 했다.
건배, 그리고 쭈욱.
더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가슴을 가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 역시 비슷한 것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여진이가 헤에-하며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좋아 마주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여진이의 웃음이 살짝 진지해졌다. 사실 그녀의 웃음이 진지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나는 테이블 맞은편의 여진이에게로 내 몸을 가져가버린 후였다.
문득 정신을 수습했을 때,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몸을 기울인 후였다. 매우 천천히, 느릿하게 움직이는 나를 여진이는 피하지 않았다. 내가 입을 맞춘 이후에도 여진이는 살짝 입술을 오므렸을 뿐. 숨소리조차 삼킨 듯 미동도 하지 안은 그녀였다.
어째서? 그리고 어쩌다?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 사이에는 식은 청주의 미끌거림이 느껴졌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내가 자리에 다시 앉았을 때, 그제야 여진이는 내 시선을 피하며 민망한 듯 웃어보였다. 민망한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뜻하지 않은 고요를 타파하기 위해 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자 여진이는 조용히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방금 전까지 나를 삼촌이라 놀리며 까불던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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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주변에는 숙박업소가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린 택시를 잡아 신촌 로터리로 향했다.
주점에서 나온 이후 그녀는 말수가 부쩍 줄었다. 야물게 말아 쥔 그녀의 두 손을 보며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과연 하루 전까지 친한 오빠동생으로 지내던 우리가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인해 모텔로 가는 것이 제대로 된 행동인가를 생각해보려다, 어차피 여기서 그만둔다면 그게 더 어색한 행동일 거 같아 그만두었다. 나 역시 생각이 복잡했지만 그런 복잡함을 행동으로 보인다면 오히려 여진이가 더 당황할 거 같아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방에 들어가 우선 여진이의 코트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주었다. 하얀색 니트에 검은색 스키니 진 차림이 된 그녀는 침대에 올라앉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여진이는 이때 처음으로 모텔이라는 곳을 와 본 거라고. 유흥가의 모텔이 대부분 그러하듯 침대 하나, 소파 하나, 화장대 하나 들어차니 디딜 공간이 많이 없어 보이는 그런 방이었다. 나 역시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스웨터를 벗어 접어놓고, 가벼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 되어 침대 끝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자~ 이제 뭘 어떻게 하지?”
“헤헷!”
정말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물었던 질문인데, 그녀는 그저 내가 넉살 떤다고 생각했는지 헤헷 거리며 웃었다. 의도치 않은 키스에 이어진 모텔 행이었다. 잠시 낮잠에 든 엘리스가 눈을 떠 이상한 나라를 두리번거리듯, 우리는 눈을 껌뻑이며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자연스럽게 엔딩이 될 수 있을지 서로의 눈빛만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도 예전과 같은 편한 오빠동생은 되기 힘드리라. 나는 우리 사이에 무언가 액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여진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야동을 본 적이 없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정말 한 번도 안 봤다고?”
“응. 구하는 법도 몰라요.”
나 역시 일본AV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어떻게 다운 받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럼 하나 받아 볼까? 볼래?”
“좋아!”
모텔 들어와서 처음으로 그녀가 자신을 무장해제 하고 웃는 순간이었다. 그때 알았다. 그녀는 긴장하고 있을 때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긴장이 풀렸을 때는 이를 드러내며 환희 웃는다는 것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어색하지 않게 나를 대한다는 것이 더욱 좋았다.
내가 선택한 일본AV는 (나름) 교육용 영상이었다. ‘48수’라는 제목인데, 두 남녀가 매트리스 위에서 마흔여덟 가지 체위로 교접하는 내용이었다. 각 체위가 시작하기 전에는 그 체위에 대한 설명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로 나오고 있었다.
사실 마흔여덟 가지라고는 하지만 흔한 체위를 변형하여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 전혀 교육용이라고 볼 수 없는, 오히려 영상이 뒤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여배우의 일그러지는 표정과 성기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포르노였다.
하지만 그녀는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 했다. 간혹 가다 특이한 동작들이 나오면 “정말로 저런 거예요?”라고 묻거나 “저런 것도 가능하구나.”라면서 화면을 뜯어먹을 듯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 VTR 옆에는 거울이 있어 그 거울을 통해 여진이의 표정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영상이 30분 정도 돌아갔을까? 그제야 조금씩 성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지윤이를 사귄 이후 1년 가까이 다른 이성을 품은 적이 없었다. 비로소 스무 살 여자아이의 살내음이 내 코와 이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옆에 앉아 있는 여진이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시선은 여전히 거울을 통해 여진이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는 내 손에 어떠한 거부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내 손과 여진이의 목덜미가 비슷한 온도가 되었을 때, 여진이의 두 팔을 만세자세로 만들고 그대로 하얀색 스웨터를 벗겼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따르던 여진이는 민소매차림이 되었고, 그때부터 영상이 아닌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말인데, 사실 여진이는 처음부터 화면 속 그 무엇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분명 눈은 화면에 두었지만, 자기의 눈앞에는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며 자신을 바라볼 내 모습만 그려졌다고 한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혹 이대로 숨이 멈춰서 영영 시간이 정지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긴장하여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일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자신의 스웨터를 아기 옷 벗기듯 벗겨냈을 때야 비로소 내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민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젖가슴을 말아 잡았을 때야 “아......”하는 조심스런 탄성이 한 번 나왔을 뿐, 여진이는 숨소리 하나 뱉지 않았다. 손끝에 아찔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영상은 계속 돌고 있었고 우리는 천천히 옷을 벗었지만 방 안의 공기가 정지해버린 듯 적막만 흘렀다. 어느덧 여진이는 하얀색 브래지어와 그와 세트인듯 한 작은 팬티만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샤워....... 먼저 하고 올게요.”
휴우~ 이제야 방 안의 공기가 움직이는 거 같았다. 그저 여진이의 옷을 벗겼을 뿐인데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 옷을 벗었는데도 오히려 땀이 나는 것 같았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침대 위에 벌렁 눕자, 그때서야 지윤이가 생각났다. 왜 지금 지윤이가 생각나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끝난 건가? 지금 지윤이는 뭐하고 있을까? 나 이래도 되는 건가?
물론 그런 갈등은 여진이의 나신을 보고 날아가 버렸다. 흑칠 한 듯 까만 눈동자와는 다르게 눈부시도록 하아얀 나신을 가진 그녀였다. 여진이는 뱃살이 나왔다며 가리려 했지만, 투명한 피부에 봉긋하게 솟은 가슴, 발달된 골반과 적당한 음모의 스무 살 여체가 발산하는 싱그러움은 도저히 가려지지 않았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탐스러운 육체였다.
여진이는 매우 부끄러워했지만 자신을 만지는 내 손을 거부하진 않았다, 다만 그 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조심스레 올려다 볼 뿐이었다. 아마도 예전 남자친구와 경험이 있었으리라. 내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이 스무 살 여자아이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여진이 안으로 내가 들어갔을 때, 그녀는 몹시도 아파했다. 이미 촉촉해진 꽃잎이었지만 갓 스무 살 어린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자극이 너무 컸나보다. 그녀의 신음이 터지면서 “어떡해......”라는 외마디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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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에서 계속
* 여진이 사진은 앨범게시판-몸짱게시판-온몸승부에서, 닉네임 [어디쯤이나]를 검색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3.
서른 살이 되고 한 달이 지난 후부터 출근하게 된 새로운 직장. 서울 인근에 있는 널찍한 부지의 4층 건물이었는데, 건물부지 뒤로 펼쳐진 산책코스가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주요 국가 기관들이 밀집한 곳이라 도시의 소음일랑 일절 없었고, 무엇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과 일할 수 있어 좋았다. 대부분이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어서 ‘직장에 출근 한다’라는 생각보다는 ‘대학원에 장학금(월급) 받고 다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입사 초반 나의 집중력을 바짝 끌어올린 것은, 내가 입사한고 이틀 후에 우리 팀에 합류한 동료(엄밀히 말하자면 상사) 때문이었다.
건강하게 까무잡잡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던, 아니, 이국적인 이름이 더 인상적이었던 그녀.
그녀의 이름은, 박, 슈, 라.
딱히 이상하다 할 수 없지만 한국인이 갖기에는 워낙 특이한 이름이었기에 몇 번이고 본명인지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왜요? 내 이름이 이상해요?”
이상하달 건 없지만 누가 들어도 이국적인 이름임은 분명했다.
“우리 오빠는 슈바에요, 박슈바.”
진심으로 빵 터졌다. 그녀의 오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사람 이름이 슈바라니. 팀원 몇 명이 애써 웃음을 삼키려다 기침을 해버렸다. 혹시라도 더 웃을 게 있을까 싶어 다른 형제는 없냐고 묻자,
“여동생 하나 있어요. 이름이 궁금해서 그러죠?”
아마도 그녀는 이런 유의 질문을 자주 받은 모양이다.
‘슈’자 돌림으로 기대할 수 있는 온갖 단어들이 떠올랐다. 설마하니 ‘슈퍼’는 아닐 테고, 여동생이라면 ‘슈가’? 그래, 슈가 정도가 무난하고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동생은, 박현경이에요. 실망하셨죠? 막내는 평범한 이름 지어주고 싶었대요. 나랑 오빠 이름 짓고 나중에 후회했다고.”
이름만큼이나 슈라 씨의 행동 또한 톡톡 튀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대뜸 “지승 씨, 우리 말 놓자. 우리 동갑이잖아?”라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한 발짝 몸을 뒤로 빼며 “아니에요. 직급도 저 보다 높으시고......”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박사 소지자였고, 나는 석사. 또한 그녀는 82년 생, 나는 83년 생 임을 상기 시켜주자 “아니야. 나는 아직 생일이 안 지났고, 지승 씨는 지났고. 그럼 똑같이 (만)스물아홉 살이지?”라며 말을 놓을 것을 밀어붙였다.
“혹시 슈라 씨, 외국에서 살다 오셨어요? 나이 계산법이 좀 다르네요?”
“응. 나 미국 시민권자야. 그리고 국적을 떠나서 나이가 대수야? 생각해보면 웃기잖아, 1월 1일에 전 국민이 동시에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무슨 공산주의도 아니고......”
아, 그녀의 톡톡 튀는 사고방식의 근원이 무언지 알 수 있었다.
“그럼 미국에서 오래 사셨겠어요? 어디 계셨어요? 저도 미국에서 3년......”
“나? um....... 2년 있었나?”
뭐라 답을 해줘야 그녀가 덜 병신 같을지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튼 우리는 보자마자 말을 놓기 시작하였고 (그나마) 직장에서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될 수 있었다. 우리 팀은 팀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움직였기에 출퇴근도 제각각이었고 단체회식 같이 한자리에 모일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슈라 씨와 나는 함께 점심을 먹고 뒤뜰을 산책하곤 하였다. 처음에는 거부감 들 정도로 개성 있던 슈라 씨였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그녀는 직장에서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 있었다.
내가 지윤이에게 슈라 씨에 대한 이야기를 풀자 그녀는 여자로서의 촉이라며 그녀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절대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동료일 뿐이고 여자로서의 매력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지윤이는 “아니야. 요즘 오빠 분명히 어딘가 이상해.”라며 치켜 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슈라 씨의 오빠 이름을 이야기 해주자 지윤이는 빵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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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슈라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자 여진이 역시 빵 터지고 말았다.
“아, 진짜 웃겨! 그 언니 정말 궁금하다!”
나는 여진이가 입을 가리지 않고 활짝 웃는 것이 정말 좋았다. 입을 가리지 않고 웃는 것은 그녀가 나를 경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몇 번의 관찰을 통해 그녀의 이런 버릇을 알 수 있었다.
“오빠, 근데 나도 이름 때문에 놀림 많이 받아서 그 고통 알아. 내가 서연이라고 개명한 것도 애들이 여진족이라고 놀려서 그랬거든.”
여진이의 별명이 여진족?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여진족이라는 별명은 전혀 생각도 못 했네?”
“나는 그래도 우리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자랑스러워했는데, 애들이 내 베프까지도 ‘거란족’이라고 부르잖아. 그래서 개명하려 마음먹었지.”
여진족과 거란족. 나는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다가 말을 이었다.
“나 왠지 그 친구의 마음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 오빠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짝꿍이 은비였는데, 걔 짝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별명이 ‘까비’였거든. 그때 ‘은비 까비 옛날 옛적에’라는 만화가 있어서.”
“은비 까비? 그런 게 있었어?”
그 유명한 만화영화 ‘은비 까비 옛날 옛적에’를 모르다니. 나는 손가락으로 그 만화가 방영되던 해를 꼽아 보다가 알았다. 그때는 여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내가 웃으며 “아, 너 태어나기 전이었구나.”라고 하자, 여진이는 “으이구~ 아저씨!”라며 핀잔주듯 나를 놀려댔다. 내가 아저씨라는 놀림에 “그럼 원빈도 아저씨니까 나랑 원빈이랑 동급이네?”라고 농담을 했다가 오히려 더 큰 핀잔을 들었다.
“그럼 ‘피구왕 통키’는 알지?”
“들어는 봤어. 아빠가 피구 하다가 죽는 거 아니야?”
“응. 그 만화 할 때는 내 별명이 통키였어.”
“왜? 피구를 잘 했어?”
“아니......” 나는 짐짓 심각한 듯 목소리로 변조하여 “사실은 그 별명엔 슬픈 사연이 있어......”라고 농을 부렸다.
“아, 또 무슨 드립 치려고? 뭐, 오빠네 아빠가 피구하다 돌아가시기라도 했어?”
“사실....... 그때 내 짝 이름이 ‘미나’여서 내 별명이 통키가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아, 뭐야!?”
나는 나 보다 열 살이나 어린 여진이에게 이런 실없는 농담을 즐겨했다.
그러다 문득 들여다보게 된 여진이의 눈동자. 정말이지 언제 봐도 매혹적인 짙은 까만색. 그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았을 것 같이 순수한 black. 이렇게 아름다운 black을 가지고 있는데 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 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떠한 눈동자 보다 매력적인 눈동자를 가진 여진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동자를 칭찬했다.
“아~ 또 그 소리야. 나 진짜 그 말 들을 때 마다 완전 오글오글 거린다고!”
“나 빈말 못 해. 정말 눈동자 색이 예뻐서 그래.”
“그냥 넣어둬! 하고 싶어도 참아!”
하지 말라고 하니 오히려 더 놀려대고 싶었다. 나는 느끼한 말투로 멘트를 날렸다.
“여진이 너, 입버릇처럼 스무 살 되면 자동적으로 예뻐진다고 했는데, 이제 정말 예뻐지려나 보네? 스무 살 되고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벌써 이렇게 예뻐지면 어쩌려나?”
“하지 말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싫지는 않은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여진이.
“왜 싫어? 그만 할까?”
“아니, 싫은 건 아니고....... 그래도 그런 말은 우리 둘만 있을 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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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는 지윤이와 잠시 헤어져 있던 동안 사귀게 된 ‘아마도’ 나의 여자 친구이다.
그녀가 나의 여자 친구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그저 한 번 몸을 섞은 사이이기 때문이다.
2012년 1월 8일은, 지윤이와 헤어진 나의 홧김과, 자신에게 입대 3일 전 그 사실을 통보한 남자친구에 대한 여진이의 실망이 교차한 날이었다. 동호회 사람들 없이 우리 둘이 술을 마신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꽤나 따뜻한 일요일이었고, 나는 한가한 주일을 보낼 심산으로 홍대에 들러 아이쇼핑을 하다가 우연히 여진이 역시 아무런 목적 없이 같은 거리를 배회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린 동호회 이야기와 지난 밤 있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를 씹을 거리 삼아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처음 동호회에 나왔을 때만 해도 열아홉 살 대학 새내기였던 여진이는 “이젠 나도 법적 성인이에요!”라며 과시하듯 맥주잔을 비워냈다. 좀 과하다 싶어 말리니 “그동안 못 마셔서 그렇지, 친구들이랑 몰래몰래 먹을 때 보면 내가 술 제일 세더라고요.”라며 배시시 웃는 여진이. 우린 제법 그럴싸하게 pub(영국식 선술집) 인테리어를 재현한 bar에 나란히 앉아 서늘한 맥주에 새우칩을 먹었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마신 맥주에 홀린 걸까? 아니면 나이 서른에 접어들며 주책이라는 것이 생긴 걸까. 나는 갓 스무 살 된 핏덩이의 배시시한 미소에 잠시 두근거렸다.
그녀는 이따금 장난스러운 얼굴로 나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열 살 차이는 오빠동생이 성립할 수 없는 나이라며, 삼촌조카가 자연스러운 호칭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내가 삼촌이라는 호칭을 오빠로 바로 잡기 위해 낑낑거릴 때마다 그녀는 스무 살의 미소를 보여주었고, 그때 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결국 삼촌미소를 짓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두근거림은 단순히 지윤이가 머물던 빈자리가 주는 허전함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스무 살 성인이라고 해도 그녀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여자아이였다. 어쩌면 여진이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편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또한 그녀 역시 나를 열 살 위의 삼촌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꽤나 많이 마셨다는 생각에 “집에 가는 길에 화장실 자주 들르겠는 걸?”이라며 자리를 파할 것을 유도했으나, 그녀는 내 속내를 잘못 읽었는지 “그럼 종목(주종)을 바꿀까요?”라며 “이자카야 가보고 싶어요!”라고 내 팔을 이끌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럼 남은 잔만 모두 비워내고 일어나자며 시간을 끌었다.
한 겨울의 밤이었지만 바람은 시리지 않았다. 나는 안에 누빔을 덧댄 숏 코트를 입고 있었고, 여진이는 두툼한 재질의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내가 끼고 있던 가죽장갑 한 쪽을 끌러 여진이 손에 끼워주자 그녀는 “아~ 따뜻해!”라며 좋아하였다.
이자카야에서는 주로 그녀의 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예전 그녀가 동호회 사람들에게 소개한 20대 초반의 남학생을 떠올렸다. 그 나이의 남자아이가 그렇듯 적당한 허세와 건들거림이 몸에 밴 듯 한 녀석이었다.
둘은 동네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났고, 남자 녀석이 여진이에게 구애를 하며 관계를 시작했다고 하였다. 여진이로서는 나이 열아홉에 처음 해보는 연애였기에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행복들을 상상했지만, 사귀는 관계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녀석은 돌연 군입대를 통보해왔다는 것이다. 입대를 불과 3일 앞둔 날이었다고 한다.
“군대 가기 전에 나를 가지고 장난한 거죠, 뭐.”
여진이는 푸념조로 말하며 작은 사기잔에 담긴 사케로 입술을 살짝 적셨다. 그녀가 잔을 들자 나 역시 반사적으로 잔을 들어 건배를 하는 모션을 취했다.
총 얼마나 사귀었냐는 질문에 석 달이 채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도 남자 녀석은 여진이를 만나기 전에 이미 자신의 입영날짜를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여진이에게는 그 생각을 말해주진 않았다.
그렇게 몇 순배의 술이 돌았을 때, 나는 돌연 강한 취기를 느꼈다. 어질하다기 보다는 아찔한 취기였다. 더 이상 마시면 안 될 거 같아 그녀가 잔을 비울 때 마다 마시는 척만 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각은 어느덧 막차시간을 생각해야 하는 범주에 이르렀다. 혹시라도 그녀가 취하면 택시를 태워 보내야 하나, 하는 생각도 교차했다.
그녀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남자친구에게 그렇게 휘둘린 것이 자신이 못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아니다, 너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런 너를 남겨두고 가버린 그 남자 녀석은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라는 말로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은 그다지 풀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구체적인 칭찬을 생각해야 했다. 내가 찾은 그녀의 매력은 까만 눈동자였다.
“여진이 너, 렌즈 같은 거 껴?”
“아니오. 저 눈 좋아요.”
“써클렌즈 그런 것도 안 낀다는 거지?”
“저 그렇게 꾸미는 거 할 줄 몰라요.” 써클렌즈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는 헛헛하게 웃으며 답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눈동자가 정말 까맣고 예뻐. 그래서인지 눈이 참 맑아 보여.
내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적극적으로 칭찬한 것인데, 그녀의 코드에는 맞지 않았나 보다. 그녀는 크게 웃더니 “무슨 도를 아십니까, 예요? 눈이 맑다니!!”라며 깔깔거렸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입술을 살짝 적시기만 했던 술잔을 들어 건배 제스처를 취하며 그녀의 웃음을 술로 넘기려 했다.
건배, 그리고 쭈욱.
더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가슴을 가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 역시 비슷한 것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여진이가 헤에-하며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좋아 마주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여진이의 웃음이 살짝 진지해졌다. 사실 그녀의 웃음이 진지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나는 테이블 맞은편의 여진이에게로 내 몸을 가져가버린 후였다.
문득 정신을 수습했을 때,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몸을 기울인 후였다. 매우 천천히, 느릿하게 움직이는 나를 여진이는 피하지 않았다. 내가 입을 맞춘 이후에도 여진이는 살짝 입술을 오므렸을 뿐. 숨소리조차 삼킨 듯 미동도 하지 안은 그녀였다.
어째서? 그리고 어쩌다?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 사이에는 식은 청주의 미끌거림이 느껴졌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내가 자리에 다시 앉았을 때, 그제야 여진이는 내 시선을 피하며 민망한 듯 웃어보였다. 민망한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뜻하지 않은 고요를 타파하기 위해 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자 여진이는 조용히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방금 전까지 나를 삼촌이라 놀리며 까불던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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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주변에는 숙박업소가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린 택시를 잡아 신촌 로터리로 향했다.
주점에서 나온 이후 그녀는 말수가 부쩍 줄었다. 야물게 말아 쥔 그녀의 두 손을 보며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과연 하루 전까지 친한 오빠동생으로 지내던 우리가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인해 모텔로 가는 것이 제대로 된 행동인가를 생각해보려다, 어차피 여기서 그만둔다면 그게 더 어색한 행동일 거 같아 그만두었다. 나 역시 생각이 복잡했지만 그런 복잡함을 행동으로 보인다면 오히려 여진이가 더 당황할 거 같아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방에 들어가 우선 여진이의 코트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주었다. 하얀색 니트에 검은색 스키니 진 차림이 된 그녀는 침대에 올라앉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여진이는 이때 처음으로 모텔이라는 곳을 와 본 거라고. 유흥가의 모텔이 대부분 그러하듯 침대 하나, 소파 하나, 화장대 하나 들어차니 디딜 공간이 많이 없어 보이는 그런 방이었다. 나 역시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스웨터를 벗어 접어놓고, 가벼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 되어 침대 끝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자~ 이제 뭘 어떻게 하지?”
“헤헷!”
정말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물었던 질문인데, 그녀는 그저 내가 넉살 떤다고 생각했는지 헤헷 거리며 웃었다. 의도치 않은 키스에 이어진 모텔 행이었다. 잠시 낮잠에 든 엘리스가 눈을 떠 이상한 나라를 두리번거리듯, 우리는 눈을 껌뻑이며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자연스럽게 엔딩이 될 수 있을지 서로의 눈빛만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도 예전과 같은 편한 오빠동생은 되기 힘드리라. 나는 우리 사이에 무언가 액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여진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야동을 본 적이 없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정말 한 번도 안 봤다고?”
“응. 구하는 법도 몰라요.”
나 역시 일본AV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어떻게 다운 받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럼 하나 받아 볼까? 볼래?”
“좋아!”
모텔 들어와서 처음으로 그녀가 자신을 무장해제 하고 웃는 순간이었다. 그때 알았다. 그녀는 긴장하고 있을 때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긴장이 풀렸을 때는 이를 드러내며 환희 웃는다는 것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어색하지 않게 나를 대한다는 것이 더욱 좋았다.
내가 선택한 일본AV는 (나름) 교육용 영상이었다. ‘48수’라는 제목인데, 두 남녀가 매트리스 위에서 마흔여덟 가지 체위로 교접하는 내용이었다. 각 체위가 시작하기 전에는 그 체위에 대한 설명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로 나오고 있었다.
사실 마흔여덟 가지라고는 하지만 흔한 체위를 변형하여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 전혀 교육용이라고 볼 수 없는, 오히려 영상이 뒤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여배우의 일그러지는 표정과 성기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포르노였다.
하지만 그녀는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 했다. 간혹 가다 특이한 동작들이 나오면 “정말로 저런 거예요?”라고 묻거나 “저런 것도 가능하구나.”라면서 화면을 뜯어먹을 듯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 VTR 옆에는 거울이 있어 그 거울을 통해 여진이의 표정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영상이 30분 정도 돌아갔을까? 그제야 조금씩 성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지윤이를 사귄 이후 1년 가까이 다른 이성을 품은 적이 없었다. 비로소 스무 살 여자아이의 살내음이 내 코와 이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옆에 앉아 있는 여진이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시선은 여전히 거울을 통해 여진이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는 내 손에 어떠한 거부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내 손과 여진이의 목덜미가 비슷한 온도가 되었을 때, 여진이의 두 팔을 만세자세로 만들고 그대로 하얀색 스웨터를 벗겼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따르던 여진이는 민소매차림이 되었고, 그때부터 영상이 아닌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말인데, 사실 여진이는 처음부터 화면 속 그 무엇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분명 눈은 화면에 두었지만, 자기의 눈앞에는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며 자신을 바라볼 내 모습만 그려졌다고 한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혹 이대로 숨이 멈춰서 영영 시간이 정지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긴장하여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일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자신의 스웨터를 아기 옷 벗기듯 벗겨냈을 때야 비로소 내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민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젖가슴을 말아 잡았을 때야 “아......”하는 조심스런 탄성이 한 번 나왔을 뿐, 여진이는 숨소리 하나 뱉지 않았다. 손끝에 아찔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영상은 계속 돌고 있었고 우리는 천천히 옷을 벗었지만 방 안의 공기가 정지해버린 듯 적막만 흘렀다. 어느덧 여진이는 하얀색 브래지어와 그와 세트인듯 한 작은 팬티만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샤워....... 먼저 하고 올게요.”
휴우~ 이제야 방 안의 공기가 움직이는 거 같았다. 그저 여진이의 옷을 벗겼을 뿐인데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 옷을 벗었는데도 오히려 땀이 나는 것 같았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침대 위에 벌렁 눕자, 그때서야 지윤이가 생각났다. 왜 지금 지윤이가 생각나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끝난 건가? 지금 지윤이는 뭐하고 있을까? 나 이래도 되는 건가?
물론 그런 갈등은 여진이의 나신을 보고 날아가 버렸다. 흑칠 한 듯 까만 눈동자와는 다르게 눈부시도록 하아얀 나신을 가진 그녀였다. 여진이는 뱃살이 나왔다며 가리려 했지만, 투명한 피부에 봉긋하게 솟은 가슴, 발달된 골반과 적당한 음모의 스무 살 여체가 발산하는 싱그러움은 도저히 가려지지 않았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탐스러운 육체였다.
여진이는 매우 부끄러워했지만 자신을 만지는 내 손을 거부하진 않았다, 다만 그 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조심스레 올려다 볼 뿐이었다. 아마도 예전 남자친구와 경험이 있었으리라. 내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이 스무 살 여자아이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여진이 안으로 내가 들어갔을 때, 그녀는 몹시도 아파했다. 이미 촉촉해진 꽃잎이었지만 갓 스무 살 어린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자극이 너무 컸나보다. 그녀의 신음이 터지면서 “어떡해......”라는 외마디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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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에서 계속
* 여진이 사진은 앨범게시판-몸짱게시판-온몸승부에서, 닉네임 [어디쯤이나]를 검색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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