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쉬, 조금 더 진한 그레이 -1부-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고 했어.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난 강하지 못했어. 인정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한 사람이었을까? 모르겠어. 정말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강인한 악마가 나를 집어삼키는 기분이 들어.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내 등을 밟고 서 있어.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왜 악마는 죽지 않는 거지? 부정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두려워. 입 속의 어둠이 너무 축축해. 자궁 속을 걷는 기분이야. 깊이도, 넓이도 알 수 없는 산도産道를. 나약한 모습으로 발버둥치는 천사가 너무 불쌍해. 나 그냥 들어갈까 봐. 붉은 천공이 따뜻해 보여. 곧 검게 변하겠지. 어쩌면 하얗게. 나는 바퀴벌레처럼 기어가고 있어. 속도는 느려. 걸음이 걸어지지 않아. 모든 대지가 나의 힘을 빨아먹는 것 같아. 다리는 고장 난 주유기처럼 나를 흘려내리고 있어. 약해. 너무 나약해. 숨은 발악하지 못하고 겨우 힘을 풀었어. 난 벌을 받는거야. 악하지 못한 죄. 악한 것과 약한 것은 획수 하나 차이의 단어일 뿐인데 틈은 왜 이리 거대하지? 난 의미에 집어삼켜지는 벌레야. 불평할 수 없는 벌레. 천사가 손을 놓았어. 고마워. 너의 외면. 나는 입 속에서 짓밟히는 무참한 소화물. 밟히면서 생각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믿었던 걸까? 뭘 기대했던 걸까?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난, 약했어. 사실 지금도 그래. 그런데 말이야. 선한 것이란 도대체 뭘까? 난, 모르겠어. 아무것도. 내 말, 듣고 있니?
시커먼 심연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곁에서 기억이 손짓한다. 손 잡지 못할 영혼들이 부유하며 나를 쳐다본다. 하나, 둘, 셋. 나는 모든 것을 외면한다. 잠시 후. 물컹거리는 액체가 몰려왔다. 하얗고, 역겨운 유동체. 피할 곳이 없다. 고약한 냄새가 사방을 잠식한다. 나는 늪에 빠진 나방처럼 점점 가라앉는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나는 식물인간처럼 그것을 내려만 본다. 내 의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눈 뿐인 듯했다. 그리고 뇌. 내 영혼을 게워내 버릴 것 같은 욕지기가 올라왔다. 나는 토하지 못한다. 탈출하지 못한 나의 영혼은 스스로 구토물 속에서 오염된다. 비릿한 냄새가 치받고 올라왔다. 곧 액체가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흘러가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그러나 영혼의 몸부림일 뿐 나는 심연으로 떠내려간다. 기억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싶지만 감을 수가 없다. 침식된 대지에 황량하게 드러난 뼈처럼 내 두 눈은 날것 그대로 노출되어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쳐다본다. 심연의 공간이 축축하다. 젖은 몸은 추위와 두려움에 떤다. 부유하던 영혼들이 빠르게 날아온다. 나는 공포에 질려 입을 열려 하지만 말은 내 안에서 비벼지고 뭉개져 흩어진다. 심연이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기억은 웃고 있다. 영혼들은 거대한 바퀴벌레가 되어 나는 짓밟는다. 나의 다리가 부서지고, 하반신이 으깨진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못한다. 녹아버린 치즈처럼 입이 끈끈하게 들러붙어 있다. 말은 세상으로 내달리지 못한다. 벌레 하나가 내 성기를 물어뜯는다. 이어 배, 가슴, 목덜미가 차례로 뜯겨져 나간다. 흥분에 젖은 끈적한 타액이 바퀴벌레들의 입과 성기에서 질척거리며 흘러나온다. 나는 모든 것을 똑똑히 쳐다본다. 비명은 내 안에서 요동친다. 나의 머리를 단숨에 삼키려는 바퀴벌레의 검은 입 속을 본다. 심연은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제야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심연이 나를 집어 삼켰다.
나는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몽롱한 정신.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따라 흘러가 버린 기억. 천장이 보이고, 형광등은 죽지 못한 태양이 남기고 간 찌꺼기처럼 누런 빛을 쏟아 내고 있다. 바닥에 누운 채 나는 숨을 한 번, 들이 마신다. 순간 엄청난 고통이 나를 관통한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딱딱하게 굳은 숨이 내 안에서 뭉쳐진다.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풀지 못하는 비명이 요동친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니 힘이 내 다리를 움켜쥐고 있다. 엄청난 완력은 다리를 마비시키고 뇌에 충격을 가한다. 눈을 감고 싶지만 감을 수가 없다. 통증이 눈을 부라린다. 심연의 공포가 다시 나를 엄습한다. 눈을 감지 못한다. 나의 모든 세포를 날카로운 송곳으로 후벼 파는 고통이 다시 전해온다. 아니 멈추지 않는다. 감지 못한 눈은 강제로 열리는 지옥의 문처럼 부릅떠진다. 천장을 응시한다. 아니 천장이 나를 주시한다. 검은 얼룩이 점점이 박혀있다. 마치 바퀴벌레의 눈알에서 터져 나온 체액이 묻은 것 같다. 그 정액같은 얼룩에서, 언젠가 죽어버린 누군가의 얼굴이 투영된다. 난 그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인지도. 아니면 그. 밖에서 고함이 들려온다. 하루라도 빨리 죽음에 이르고 싶은 인간들의 절박한 외침. 절벽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비명 같은 소음. 나와는 상관없는, 먼 세상 속 신화 속의 라그나로크. 거대한 모기가 귓가에서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시끄럽다. 너무 시끄러워. 눈을 감고 싶다. 영원에 안기고 싶어. 난 간신히 고개를 돌린다. 욱신거리는 느낌이 나의 행동을 따라 천천히 그리고 명확하게 따라온다. 파삭거리는 유리 조각의 파열음이 바닥에 널부러진 나의 등 전체로 느껴진다. 거대한 통증 앞에서 떨려오는 미세한 쓰라림. 까마득한 것들이 나풀거린다. 통증을 부여잡고 싶지만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나를 뒤흔든다. 난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다. 손에 힘을 줄 수가 없다. 붉은 핏방울이 바닥에 흥건하다. 죽어버린 강처럼 흐르지 못하는 진홍빛 액체. 경련이 일어난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잡고 싶다. 무엇이라도. 손가락을 꿈틀거려 보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너무 멀다. 아니 원래 없었다. 아무것도. 눈앞에 하얀 눈처럼 뭉쳐진 공기가 가득하다. 아니 매연에 썩어버린 잿덩이. 시선의 궤적에 밟히는 혼란의 사물들. 자신의 자리에서 내팽개쳐진 무질서한 흔적. 난 시선을 옮긴다. 조금 위로. 조금 더. 커튼 저편으로 썩어버린 유채꽃 같은 빛의 강물이 넘실거린다. 조금 떨어진 곳에 검게 그을린 듯한 선반 아래로 푸른 형광조명이 반짝인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의 흐름. 시간은 기억에 속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마리오네트 같다. 난 시계를 쳐다보지만, 곧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누군가의 다리. 창백한 노을처럼 붉게 물든 육체. 아직 썩지 않아 번들거리는 피의 흐름. 잠이 쏟아진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어둠이 잠깐 찾아온다. 그리고 영원처럼 난, 겨우 눈을 감는다. 잠시 후. 심연이 나를 반긴다. 깜짝 놀란 나는 다시 눈을 뜨지만 도망갈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더 이상. 잊혀진 기억처럼 통증이 다시 요동친다. 들쑤시는 고통에 나는 바들바들 떤다. 통증이 나를 심연으로 잡아당긴다. 고통 너머로 희뿌연 환영이 망망한 요단강을 건너다 나의 뇌 속으로 돌진한다. 희미한 것들이 나비처럼 날아와 송곳처럼 잔상에 박힌다. 그리 오래지 않은 것들이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아득하다. 누군가 누워 있던 침대. 썩은 정액 덩어리. 널브러진 몸뚱아리. 푸르른 영롱함에 찬란하게 빛나던 아침 햇살. 눈부시게 반짝거리던 날카로운 추억. 아니 기억. 그리고 피. 그래. 피가 있었다. 그곳에도. 그때 나는 그 피를 보고 참 깨끗하다, 라는 생각을 문득 했었다. 맑고 아름다운 투명함. 순수의 결정체. 희미한 안개가 눈에 가득하다. 회색빛. 아니 오염되어버린 흰색. 커튼은 이제 핏빛으로 물들어 암흑의 세계를 인도한다. 나 역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무의미한 것들이 공허하게 나를 안내하고 있다. 심연으로. 기억으로. 허무의 안식으로. 눈을 감기 전 나는 텅 빈 시간을 본다. 여덟시 십구분. 현재. 안녕.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기가 날아다녔다. 나는 눈을 떠 절망에 떠밀리듯 몸을 일으켰다. 불이 환했다. 살아있는 것의 행방을 좇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자취는 공허했다. 궤적은 혼란스러웠고, 나의 관심 또한 무질서했다. 관심은 이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결여된 공간에서 모든 관심은 무의미했다. 나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벌거벗은 몸으로 자고 있는 여자. 여자에게 매달렸던 수많은 손길들이 어지럽게 밀려왔다. 이불도 없이 자고 있던 여자가 몸을 비틀었다. 나는 다시 누워, 죽음처럼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앵앵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모기는 잡으려 하면 더욱 잡히지 않는 희망 같았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꿈. 실존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대표성.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미세한 것들이 고막에 부딪혀 선명하게 진동했다.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 고막을 찢고 뇌로, 심장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소리가 멈췄다. 나는 눈을 뜨고 행적을 찾았다. 모기는 절망을 빌려준 빚쟁이처럼 여자의 허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미 많은 피를 빨아 먹었는지, 배가 불룩했다. 저 뱃속에 나의 피와 여자의 피와 수많은 익명의 피가 들어있겠지. 나는 담배를 물었다. 불타는 주황색 불빛이 하얀 담배와 만나 검게 썩어갔다. 담배는 점차 죽어가고 있었다. 여자가 뭔가를 느꼈는지 허리를 탁, 쳤다. 모기는 날아가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수많은 땀과 용량이 가늠되지 않는 정액에 물들었을 더러운 걸레 같은 침대보에서 모기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날개를 다쳤는지 더 이상 날지 못했다. 나는 담배를 다시 빨았다. 하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다 제각기 스러졌다. 허무한 것들은 형태가 없어서 사라진다 해도 그 누구 하나 알아차리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내 심장 속에서 스러졌다. 그러나 냄새는 남겠지. 썩은 담뱃재에도 자신의 흔적이 묻어 있을 테고. 날려고 애쓰는 모기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희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그곳이 어딘지 모른 채 희망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날 수 있을거야. 그래, 난 날 수 있어. 모기는 날지 못했다. 모기를 손가락으로 집어 여자의 허리에 올려놓았다. 날개가 꺾인 모기는 도망가지도, 자신의 삶을 찾아 날아가지도 못했다. 나는 모기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였다. 뽁, 하는 하찮은 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죽음을 지탱한 나의 손길에 여자가 꿈틀거렸다. 난 모기의 피, 아니 주인을 가늠할 수 없는 피가 묻은 손가락을 여자의 허리에 닦았다. 피의 종적이 길게 패였다. 피는 사소해보였다. 모기는 찌꺼기만 남은 채 여자의 허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난 다시 담배를 빨았다. 깊고, 깊게. 세상은 침묵하고 있었다. 모기 하나쯤 죽어도 세상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신도 그러하겠지. 난 텔레비전을 켰다. 현란하게 춤을 추는 여가수가 남자와 몸을 비비고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 수많은 플래시. 집중된 무대의 조명. 모두의 선망. 반라의 여가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여자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길을 천진하게 걸어가던 현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동일한 사안에 대해 열거하는 기분이 들었다. 천장의 환한 빛이 여자에게 집중되는 환상이 뿌연 안개처럼 눈에 들어찼다. 나는 죽어가는 담배를 들고 피어나지 않는 연기 속으로 걸어갔다. 무대용으로 고안된 이야기들이 실재하기를 거부하며 우상 없는 극장에 천천히 입장했다. 나는 느릿느릿하게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자를 만난 건 한달 전 어느 룸살롱에서 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삼 번, 보리예요.
여자는 여자들의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그 속에서 여자는 그냥 여자였고, 구분은 불가해했다. 그들은 쇼윈도에 진열된 마네킹 같았다. 아니 정육점에서 파는 고깃덩어리. 조명은 거뭇거뭇했고, 나는 지쳐있었다. 테이블에는 아직 개봉하지 않는 양주 두 병과 검은 재가 수북한 재떨이, 깎지 않은 과일,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손이 놓여 있었다. 담배를 들고 있던 그 손은 낯설었다. 자욱한 담배연기에 도취된 흐릿한 눈을 나는 겨우 비볐다. 눈을 들었을 때 여자는, 끊어질 듯한 실끈으로 된 검은색 란제리를 작은 어깨에 겨우 걸치고 있었다. 검붉은 레이스가 달린 검은 속옷이 여자의 숨결을 따라 보였다, 사라졌다. 나는 손을 들어 여자를 가리켰다.
탁월한 선택이세요.
곁에서 내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던 실장이 말했다.
좆까.
나는 중얼거렸고, 말은 중얼거림 속에서 비벼지지 못하고 소멸되어 전달되지 못했다. 우르르 몰려가는 소리와 바닥을 짓밟는 또각거리는 하이힐 마찰음이 아득한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졌다.
그 날 여자와 나는 모텔을 거쳐 오피스텔로 장소를 옮겨 가며 섹스를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오직 그것뿐인 듯한 사람들처럼 여자와 나는 서로를 탐했다. 하늘은 어두웠고 세상은 고요했지만, 여자와 나는 뜨거운 태양에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처럼 공간에 침잠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차리고 싶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멀어져가는 영혼을 놓아버리는 심정으로 혼란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러나 끝도 없이 공허한 것들은 전혀 채워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구원을 포기한 사람처럼 여자를 보냈다.
여자가 내 오피스텔로 다시 찾아온 건, 내가 룸살롱에서 여자를 네 번째 만나 모텔에서 잠을 이루었던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새벽이었다.
이 오피스텔에서 손님과 이차가 있었어요. 그래서 온 김에 잠깐 들러봤어요.
여자는 자연스럽게 내 방에 들어왔다. 마치 나의 방을 탐닉하듯이. 검정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마치 어둠처럼. 여자는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 속으로 핏빛같은 속옷이 거뭇거렸다.
술 마시고 있었어요?
여자는 내가 마시던 잔을 살짝 들어 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술잔을 뺏어왔다. 여자는 픽, 하는 소리와 함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익숙한 모습으로 싱크대에서 양주잔을 꺼내더니 나도 한 잔 줘요, 라고 했다. 나는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여자는 나는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나는 여자의 눈을 마주 보며, 술이 넘어가는 여자의 목젖 아래에 자리하고 있을 시커먼 식도의 어둠과 그 어둠에 지하에 숨어있을 심장을 문득 떠올렸다.
그 사람은 아직도 자고 있어요. 아마 내가 나온지도 모를걸요?
나는 담배를 물었다. 여자가 내 라이터를 뺏듯이 가져가더니 나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의 담배에도 불길이 타올랐다. 후욱, 내뿜는 숨소리가 담배 연기와 몸을 비벼가며 사라져갔다. 감당할 수 없는 영혼들도 함께. 나는 여자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술을 마신 여자가 창밖을 쳐다보더니 오늘따라 밤이 더 깜깜하네, 라고 중얼거렸다. 난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 속엔 뭐가 있을까. 검은 미니스커트 아래에 잠겨 있을 것드리 나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단정할 수 없는 내면과 나를 곤궁에서 구해줄 온갖 종류의 사색들이 떠올랐다. 구원. 아니면 지옥의 감옥 같은 절망. 시선을 느낀 여자가 내 눈을 잠깐 쳐다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담배를 비벼 끄더니 일어서서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내 앞으로 천천히 돌아 나왔다. 걸음은 한 없이 느렸고, 시선은 확고했다. 새끼에게 갖다 줄 먹이를 눈 앞에 둔 어미새 같았다. 나는 술을 한 잔 부어 마셨다. 타들어 가는 술이 내 메마른 식도를 긁어댔다. 여자는 내 다리를 작게 잡더니 나를 자신의 앞으로 돌렸다. 나는 자아를 통제할 수 없는 아기처럼 여자의 손길을 따라갔다. 어둠에 잠긴 창밖 세상이 보였다. 그리고 여자의 모습, 두 개. 여자가 묶은 머리를 풀더니 나에게 키스를 했다. 나는 영혼을 빨아들이듯 혀를 빨아들였다. 잠시 후, 입술을 뗀 여자가 내 뺨을 어루만지더니 싱긋 웃었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요?
속박에서 벗어난 여자의 머릿결이 한쪽 어깨로 흘러내렸다. 여자가 내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리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의 손길에 대답을 주었다. 창밖 검은 어둠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등 뒤로 버티고 있는 어둠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소통은 멀었지만, 존재는 확고했다. 환한 형광등의 빛이 어둠과 맞서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럴수록 어둠은 더욱 명확하고 조밀하게 존재를 어필하고 있었다. 여자의 혀는 그런 존재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혀 안에서 어둠과 대등했다. 내 성기가 여자의 입 속으로 뿌리까지 들어가는 순간, 나는 무력無力감과 동시에 무력武力을 느꼈다. 뜨거운 숨이 아래로부터 밀려 올라왔다. 나의 심장은 숨과 함께 치받아 올라갔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 붕괴의 연속 속에서 내 심장은 다시 재건축되었다.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의 빛. 찬란한 그 빛 속에서 나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절정의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죽지 못하는 바퀴벌레도, 익명의 피를 머금은 죽어버린 모기도, 썩은 사체를 뜯어먹는 파리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여자의 목에 난 아주 작은 점 하나가 확대경에 비취진 것처럼 내 눈 앞으로 확, 다가왔다. 난 여자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꺼억, 꺼억. 쥐어진 아귀에 힘의 뿌리까지 들어찼다. 곧 여자의 입 안으로 내 심장을 쏟아내었다.
사실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정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으로, 여자는 내 성기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는 내 정액이 관통했을 여자의 식도를 떠올렸다. 난 여자의 머리를 작게 토닥거리며 쓰다듬었다. 새카맣게 타들어간 담배가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난 텔레비전을 껐다. 단체로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여가수들이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창밖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자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시선을 흐트려뜨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의 브래지어가 보였다. 말라붙은 정액이 블러붙은 콘돔. 누런 점액이 점점이 박힌 휴지조각. 힘없이 늘어진 여자의 머리카락. 엉겨붙은 조각같은 팬티. 구겨진 바지, 여자의 스타킹. 텅 빈 공간. 뭉쳐진 양말 한 짝. 나머지 한 짝은 어디로 갔을까. 여자가 돌아누웠다. 그리고 눈을 떠 나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나의 배에 손을 올려 잡히지 않는 것들을 찾고 있는 듯 더듬었다. 여자의 눈이 공허해보였다. 무참한 것들이 그 공허함 속에서 스러져 갈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가신 줄 알았어요.
눈을 감으며 여자가 말했다. 졸린 목소리는 허공에 부유했지만 여자는 침잠했다. 곧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든 여자의 손을 나는, 치워냈다. 나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 그 어떤 곳에도, 가기 싫어. 힘없이 늘어진 여자의 손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 뿐이야. 나를 받아 줄 수 있는 곳도 그 곳밖에 없지. 넌, 아마 거기가 어딘지 꿈에도 모를 거야. 혹시 알더라도, 아는체를 해서는 안돼. 그래. 알아선 안 돼. 모기의 시체가 여자의 허리에 눌려 보이지 않았다. 난 이불을 여자에게 덮어주었다. 대지의 무덤처럼 여자와 모기가 이불에 묻혔다. 여자가 몸을 꿈틀거렸다. 난 이불을 여자 쪽으로 밀었다. 잠시 후. 다시 끌어당겨 덮었다. 그리고 누웠다. 여자가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안겨왔다. 난 여자를 안으며 생각했다. 남은 양말 한 짝은 어디로 갔을까.
선한 자들은 모두 약하다고 했어. 악인이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선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난 강하지 못했어. 인정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한 사람이었을까? 모르겠어. 정말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강인한 악마가 나를 집어삼키는 기분이 들어.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내 등을 밟고 서 있어.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왜 악마는 죽지 않는 거지? 부정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두려워. 입 속의 어둠이 너무 축축해. 자궁 속을 걷는 기분이야. 깊이도, 넓이도 알 수 없는 산도産道를. 나약한 모습으로 발버둥치는 천사가 너무 불쌍해. 나 그냥 들어갈까 봐. 붉은 천공이 따뜻해 보여. 곧 검게 변하겠지. 어쩌면 하얗게. 나는 바퀴벌레처럼 기어가고 있어. 속도는 느려. 걸음이 걸어지지 않아. 모든 대지가 나의 힘을 빨아먹는 것 같아. 다리는 고장 난 주유기처럼 나를 흘려내리고 있어. 약해. 너무 나약해. 숨은 발악하지 못하고 겨우 힘을 풀었어. 난 벌을 받는거야. 악하지 못한 죄. 악한 것과 약한 것은 획수 하나 차이의 단어일 뿐인데 틈은 왜 이리 거대하지? 난 의미에 집어삼켜지는 벌레야. 불평할 수 없는 벌레. 천사가 손을 놓았어. 고마워. 너의 외면. 나는 입 속에서 짓밟히는 무참한 소화물. 밟히면서 생각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믿었던 걸까? 뭘 기대했던 걸까?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난, 약했어. 사실 지금도 그래. 그런데 말이야. 선한 것이란 도대체 뭘까? 난, 모르겠어. 아무것도. 내 말, 듣고 있니?
시커먼 심연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곁에서 기억이 손짓한다. 손 잡지 못할 영혼들이 부유하며 나를 쳐다본다. 하나, 둘, 셋. 나는 모든 것을 외면한다. 잠시 후. 물컹거리는 액체가 몰려왔다. 하얗고, 역겨운 유동체. 피할 곳이 없다. 고약한 냄새가 사방을 잠식한다. 나는 늪에 빠진 나방처럼 점점 가라앉는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나는 식물인간처럼 그것을 내려만 본다. 내 의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눈 뿐인 듯했다. 그리고 뇌. 내 영혼을 게워내 버릴 것 같은 욕지기가 올라왔다. 나는 토하지 못한다. 탈출하지 못한 나의 영혼은 스스로 구토물 속에서 오염된다. 비릿한 냄새가 치받고 올라왔다. 곧 액체가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흘러가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그러나 영혼의 몸부림일 뿐 나는 심연으로 떠내려간다. 기억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싶지만 감을 수가 없다. 침식된 대지에 황량하게 드러난 뼈처럼 내 두 눈은 날것 그대로 노출되어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쳐다본다. 심연의 공간이 축축하다. 젖은 몸은 추위와 두려움에 떤다. 부유하던 영혼들이 빠르게 날아온다. 나는 공포에 질려 입을 열려 하지만 말은 내 안에서 비벼지고 뭉개져 흩어진다. 심연이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기억은 웃고 있다. 영혼들은 거대한 바퀴벌레가 되어 나는 짓밟는다. 나의 다리가 부서지고, 하반신이 으깨진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못한다. 녹아버린 치즈처럼 입이 끈끈하게 들러붙어 있다. 말은 세상으로 내달리지 못한다. 벌레 하나가 내 성기를 물어뜯는다. 이어 배, 가슴, 목덜미가 차례로 뜯겨져 나간다. 흥분에 젖은 끈적한 타액이 바퀴벌레들의 입과 성기에서 질척거리며 흘러나온다. 나는 모든 것을 똑똑히 쳐다본다. 비명은 내 안에서 요동친다. 나의 머리를 단숨에 삼키려는 바퀴벌레의 검은 입 속을 본다. 심연은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제야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심연이 나를 집어 삼켰다.
나는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몽롱한 정신.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따라 흘러가 버린 기억. 천장이 보이고, 형광등은 죽지 못한 태양이 남기고 간 찌꺼기처럼 누런 빛을 쏟아 내고 있다. 바닥에 누운 채 나는 숨을 한 번, 들이 마신다. 순간 엄청난 고통이 나를 관통한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딱딱하게 굳은 숨이 내 안에서 뭉쳐진다.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풀지 못하는 비명이 요동친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니 힘이 내 다리를 움켜쥐고 있다. 엄청난 완력은 다리를 마비시키고 뇌에 충격을 가한다. 눈을 감고 싶지만 감을 수가 없다. 통증이 눈을 부라린다. 심연의 공포가 다시 나를 엄습한다. 눈을 감지 못한다. 나의 모든 세포를 날카로운 송곳으로 후벼 파는 고통이 다시 전해온다. 아니 멈추지 않는다. 감지 못한 눈은 강제로 열리는 지옥의 문처럼 부릅떠진다. 천장을 응시한다. 아니 천장이 나를 주시한다. 검은 얼룩이 점점이 박혀있다. 마치 바퀴벌레의 눈알에서 터져 나온 체액이 묻은 것 같다. 그 정액같은 얼룩에서, 언젠가 죽어버린 누군가의 얼굴이 투영된다. 난 그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인지도. 아니면 그. 밖에서 고함이 들려온다. 하루라도 빨리 죽음에 이르고 싶은 인간들의 절박한 외침. 절벽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비명 같은 소음. 나와는 상관없는, 먼 세상 속 신화 속의 라그나로크. 거대한 모기가 귓가에서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시끄럽다. 너무 시끄러워. 눈을 감고 싶다. 영원에 안기고 싶어. 난 간신히 고개를 돌린다. 욱신거리는 느낌이 나의 행동을 따라 천천히 그리고 명확하게 따라온다. 파삭거리는 유리 조각의 파열음이 바닥에 널부러진 나의 등 전체로 느껴진다. 거대한 통증 앞에서 떨려오는 미세한 쓰라림. 까마득한 것들이 나풀거린다. 통증을 부여잡고 싶지만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나를 뒤흔든다. 난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다. 손에 힘을 줄 수가 없다. 붉은 핏방울이 바닥에 흥건하다. 죽어버린 강처럼 흐르지 못하는 진홍빛 액체. 경련이 일어난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잡고 싶다. 무엇이라도. 손가락을 꿈틀거려 보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너무 멀다. 아니 원래 없었다. 아무것도. 눈앞에 하얀 눈처럼 뭉쳐진 공기가 가득하다. 아니 매연에 썩어버린 잿덩이. 시선의 궤적에 밟히는 혼란의 사물들. 자신의 자리에서 내팽개쳐진 무질서한 흔적. 난 시선을 옮긴다. 조금 위로. 조금 더. 커튼 저편으로 썩어버린 유채꽃 같은 빛의 강물이 넘실거린다. 조금 떨어진 곳에 검게 그을린 듯한 선반 아래로 푸른 형광조명이 반짝인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의 흐름. 시간은 기억에 속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마리오네트 같다. 난 시계를 쳐다보지만, 곧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누군가의 다리. 창백한 노을처럼 붉게 물든 육체. 아직 썩지 않아 번들거리는 피의 흐름. 잠이 쏟아진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어둠이 잠깐 찾아온다. 그리고 영원처럼 난, 겨우 눈을 감는다. 잠시 후. 심연이 나를 반긴다. 깜짝 놀란 나는 다시 눈을 뜨지만 도망갈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더 이상. 잊혀진 기억처럼 통증이 다시 요동친다. 들쑤시는 고통에 나는 바들바들 떤다. 통증이 나를 심연으로 잡아당긴다. 고통 너머로 희뿌연 환영이 망망한 요단강을 건너다 나의 뇌 속으로 돌진한다. 희미한 것들이 나비처럼 날아와 송곳처럼 잔상에 박힌다. 그리 오래지 않은 것들이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아득하다. 누군가 누워 있던 침대. 썩은 정액 덩어리. 널브러진 몸뚱아리. 푸르른 영롱함에 찬란하게 빛나던 아침 햇살. 눈부시게 반짝거리던 날카로운 추억. 아니 기억. 그리고 피. 그래. 피가 있었다. 그곳에도. 그때 나는 그 피를 보고 참 깨끗하다, 라는 생각을 문득 했었다. 맑고 아름다운 투명함. 순수의 결정체. 희미한 안개가 눈에 가득하다. 회색빛. 아니 오염되어버린 흰색. 커튼은 이제 핏빛으로 물들어 암흑의 세계를 인도한다. 나 역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무의미한 것들이 공허하게 나를 안내하고 있다. 심연으로. 기억으로. 허무의 안식으로. 눈을 감기 전 나는 텅 빈 시간을 본다. 여덟시 십구분. 현재. 안녕.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기가 날아다녔다. 나는 눈을 떠 절망에 떠밀리듯 몸을 일으켰다. 불이 환했다. 살아있는 것의 행방을 좇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자취는 공허했다. 궤적은 혼란스러웠고, 나의 관심 또한 무질서했다. 관심은 이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결여된 공간에서 모든 관심은 무의미했다. 나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벌거벗은 몸으로 자고 있는 여자. 여자에게 매달렸던 수많은 손길들이 어지럽게 밀려왔다. 이불도 없이 자고 있던 여자가 몸을 비틀었다. 나는 다시 누워, 죽음처럼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앵앵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모기는 잡으려 하면 더욱 잡히지 않는 희망 같았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꿈. 실존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대표성.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미세한 것들이 고막에 부딪혀 선명하게 진동했다.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 고막을 찢고 뇌로, 심장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소리가 멈췄다. 나는 눈을 뜨고 행적을 찾았다. 모기는 절망을 빌려준 빚쟁이처럼 여자의 허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미 많은 피를 빨아 먹었는지, 배가 불룩했다. 저 뱃속에 나의 피와 여자의 피와 수많은 익명의 피가 들어있겠지. 나는 담배를 물었다. 불타는 주황색 불빛이 하얀 담배와 만나 검게 썩어갔다. 담배는 점차 죽어가고 있었다. 여자가 뭔가를 느꼈는지 허리를 탁, 쳤다. 모기는 날아가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수많은 땀과 용량이 가늠되지 않는 정액에 물들었을 더러운 걸레 같은 침대보에서 모기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날개를 다쳤는지 더 이상 날지 못했다. 나는 담배를 다시 빨았다. 하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다 제각기 스러졌다. 허무한 것들은 형태가 없어서 사라진다 해도 그 누구 하나 알아차리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내 심장 속에서 스러졌다. 그러나 냄새는 남겠지. 썩은 담뱃재에도 자신의 흔적이 묻어 있을 테고. 날려고 애쓰는 모기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희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그곳이 어딘지 모른 채 희망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날 수 있을거야. 그래, 난 날 수 있어. 모기는 날지 못했다. 모기를 손가락으로 집어 여자의 허리에 올려놓았다. 날개가 꺾인 모기는 도망가지도, 자신의 삶을 찾아 날아가지도 못했다. 나는 모기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였다. 뽁, 하는 하찮은 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죽음을 지탱한 나의 손길에 여자가 꿈틀거렸다. 난 모기의 피, 아니 주인을 가늠할 수 없는 피가 묻은 손가락을 여자의 허리에 닦았다. 피의 종적이 길게 패였다. 피는 사소해보였다. 모기는 찌꺼기만 남은 채 여자의 허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난 다시 담배를 빨았다. 깊고, 깊게. 세상은 침묵하고 있었다. 모기 하나쯤 죽어도 세상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신도 그러하겠지. 난 텔레비전을 켰다. 현란하게 춤을 추는 여가수가 남자와 몸을 비비고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 수많은 플래시. 집중된 무대의 조명. 모두의 선망. 반라의 여가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여자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길을 천진하게 걸어가던 현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동일한 사안에 대해 열거하는 기분이 들었다. 천장의 환한 빛이 여자에게 집중되는 환상이 뿌연 안개처럼 눈에 들어찼다. 나는 죽어가는 담배를 들고 피어나지 않는 연기 속으로 걸어갔다. 무대용으로 고안된 이야기들이 실재하기를 거부하며 우상 없는 극장에 천천히 입장했다. 나는 느릿느릿하게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자를 만난 건 한달 전 어느 룸살롱에서 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삼 번, 보리예요.
여자는 여자들의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그 속에서 여자는 그냥 여자였고, 구분은 불가해했다. 그들은 쇼윈도에 진열된 마네킹 같았다. 아니 정육점에서 파는 고깃덩어리. 조명은 거뭇거뭇했고, 나는 지쳐있었다. 테이블에는 아직 개봉하지 않는 양주 두 병과 검은 재가 수북한 재떨이, 깎지 않은 과일,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손이 놓여 있었다. 담배를 들고 있던 그 손은 낯설었다. 자욱한 담배연기에 도취된 흐릿한 눈을 나는 겨우 비볐다. 눈을 들었을 때 여자는, 끊어질 듯한 실끈으로 된 검은색 란제리를 작은 어깨에 겨우 걸치고 있었다. 검붉은 레이스가 달린 검은 속옷이 여자의 숨결을 따라 보였다, 사라졌다. 나는 손을 들어 여자를 가리켰다.
탁월한 선택이세요.
곁에서 내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던 실장이 말했다.
좆까.
나는 중얼거렸고, 말은 중얼거림 속에서 비벼지지 못하고 소멸되어 전달되지 못했다. 우르르 몰려가는 소리와 바닥을 짓밟는 또각거리는 하이힐 마찰음이 아득한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졌다.
그 날 여자와 나는 모텔을 거쳐 오피스텔로 장소를 옮겨 가며 섹스를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오직 그것뿐인 듯한 사람들처럼 여자와 나는 서로를 탐했다. 하늘은 어두웠고 세상은 고요했지만, 여자와 나는 뜨거운 태양에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처럼 공간에 침잠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차리고 싶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멀어져가는 영혼을 놓아버리는 심정으로 혼란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러나 끝도 없이 공허한 것들은 전혀 채워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구원을 포기한 사람처럼 여자를 보냈다.
여자가 내 오피스텔로 다시 찾아온 건, 내가 룸살롱에서 여자를 네 번째 만나 모텔에서 잠을 이루었던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새벽이었다.
이 오피스텔에서 손님과 이차가 있었어요. 그래서 온 김에 잠깐 들러봤어요.
여자는 자연스럽게 내 방에 들어왔다. 마치 나의 방을 탐닉하듯이. 검정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마치 어둠처럼. 여자는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 속으로 핏빛같은 속옷이 거뭇거렸다.
술 마시고 있었어요?
여자는 내가 마시던 잔을 살짝 들어 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술잔을 뺏어왔다. 여자는 픽, 하는 소리와 함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익숙한 모습으로 싱크대에서 양주잔을 꺼내더니 나도 한 잔 줘요, 라고 했다. 나는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여자는 나는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나는 여자의 눈을 마주 보며, 술이 넘어가는 여자의 목젖 아래에 자리하고 있을 시커먼 식도의 어둠과 그 어둠에 지하에 숨어있을 심장을 문득 떠올렸다.
그 사람은 아직도 자고 있어요. 아마 내가 나온지도 모를걸요?
나는 담배를 물었다. 여자가 내 라이터를 뺏듯이 가져가더니 나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의 담배에도 불길이 타올랐다. 후욱, 내뿜는 숨소리가 담배 연기와 몸을 비벼가며 사라져갔다. 감당할 수 없는 영혼들도 함께. 나는 여자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술을 마신 여자가 창밖을 쳐다보더니 오늘따라 밤이 더 깜깜하네, 라고 중얼거렸다. 난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 속엔 뭐가 있을까. 검은 미니스커트 아래에 잠겨 있을 것드리 나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단정할 수 없는 내면과 나를 곤궁에서 구해줄 온갖 종류의 사색들이 떠올랐다. 구원. 아니면 지옥의 감옥 같은 절망. 시선을 느낀 여자가 내 눈을 잠깐 쳐다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담배를 비벼 끄더니 일어서서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내 앞으로 천천히 돌아 나왔다. 걸음은 한 없이 느렸고, 시선은 확고했다. 새끼에게 갖다 줄 먹이를 눈 앞에 둔 어미새 같았다. 나는 술을 한 잔 부어 마셨다. 타들어 가는 술이 내 메마른 식도를 긁어댔다. 여자는 내 다리를 작게 잡더니 나를 자신의 앞으로 돌렸다. 나는 자아를 통제할 수 없는 아기처럼 여자의 손길을 따라갔다. 어둠에 잠긴 창밖 세상이 보였다. 그리고 여자의 모습, 두 개. 여자가 묶은 머리를 풀더니 나에게 키스를 했다. 나는 영혼을 빨아들이듯 혀를 빨아들였다. 잠시 후, 입술을 뗀 여자가 내 뺨을 어루만지더니 싱긋 웃었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요?
속박에서 벗어난 여자의 머릿결이 한쪽 어깨로 흘러내렸다. 여자가 내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리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의 손길에 대답을 주었다. 창밖 검은 어둠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등 뒤로 버티고 있는 어둠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소통은 멀었지만, 존재는 확고했다. 환한 형광등의 빛이 어둠과 맞서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럴수록 어둠은 더욱 명확하고 조밀하게 존재를 어필하고 있었다. 여자의 혀는 그런 존재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혀 안에서 어둠과 대등했다. 내 성기가 여자의 입 속으로 뿌리까지 들어가는 순간, 나는 무력無力감과 동시에 무력武力을 느꼈다. 뜨거운 숨이 아래로부터 밀려 올라왔다. 나의 심장은 숨과 함께 치받아 올라갔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 붕괴의 연속 속에서 내 심장은 다시 재건축되었다.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의 빛. 찬란한 그 빛 속에서 나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절정의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죽지 못하는 바퀴벌레도, 익명의 피를 머금은 죽어버린 모기도, 썩은 사체를 뜯어먹는 파리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여자의 목에 난 아주 작은 점 하나가 확대경에 비취진 것처럼 내 눈 앞으로 확, 다가왔다. 난 여자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꺼억, 꺼억. 쥐어진 아귀에 힘의 뿌리까지 들어찼다. 곧 여자의 입 안으로 내 심장을 쏟아내었다.
사실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정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으로, 여자는 내 성기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나는 내 정액이 관통했을 여자의 식도를 떠올렸다. 난 여자의 머리를 작게 토닥거리며 쓰다듬었다. 새카맣게 타들어간 담배가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난 텔레비전을 껐다. 단체로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여가수들이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창밖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자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시선을 흐트려뜨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의 브래지어가 보였다. 말라붙은 정액이 블러붙은 콘돔. 누런 점액이 점점이 박힌 휴지조각. 힘없이 늘어진 여자의 머리카락. 엉겨붙은 조각같은 팬티. 구겨진 바지, 여자의 스타킹. 텅 빈 공간. 뭉쳐진 양말 한 짝. 나머지 한 짝은 어디로 갔을까. 여자가 돌아누웠다. 그리고 눈을 떠 나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나의 배에 손을 올려 잡히지 않는 것들을 찾고 있는 듯 더듬었다. 여자의 눈이 공허해보였다. 무참한 것들이 그 공허함 속에서 스러져 갈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가신 줄 알았어요.
눈을 감으며 여자가 말했다. 졸린 목소리는 허공에 부유했지만 여자는 침잠했다. 곧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든 여자의 손을 나는, 치워냈다. 나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 그 어떤 곳에도, 가기 싫어. 힘없이 늘어진 여자의 손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 뿐이야. 나를 받아 줄 수 있는 곳도 그 곳밖에 없지. 넌, 아마 거기가 어딘지 꿈에도 모를 거야. 혹시 알더라도, 아는체를 해서는 안돼. 그래. 알아선 안 돼. 모기의 시체가 여자의 허리에 눌려 보이지 않았다. 난 이불을 여자에게 덮어주었다. 대지의 무덤처럼 여자와 모기가 이불에 묻혔다. 여자가 몸을 꿈틀거렸다. 난 이불을 여자 쪽으로 밀었다. 잠시 후. 다시 끌어당겨 덮었다. 그리고 누웠다. 여자가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안겨왔다. 난 여자를 안으며 생각했다. 남은 양말 한 짝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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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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