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은밀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A를 맞이했다. 문가에 서서 잠시 두런거리는 낮은 대화소리, 그리고 H와 A가 방으로 들어왔다. A는 방안에 있는 나를 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건냈다. 그의 첫 이미지는 사진과는 사뭇 달랐는데, 조금은 더 나이가 들어보이고 두툼한 체격,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은빛 안경, 그리고 과도하지 않게 신경을 쓴 듯한 스트라이프 감색 양복이 인상적이었다.
“반가워요. 전 오 대웅이라고 합니다” 그는 선뜻 나에게 악수를 건냈다. 어짜피 본명도 아닐텐데 선뜻 이름을 말하는 것이 의아하고 당황스러웠지만, 난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지만 남자다운 힘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지긋이 미소짓던 그가 H를 향해 돌아서면서 말했다. “이렇게 누추한 곳인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도 사회적이고 의례적인 인사말들이 오고 갔다. H는 다소 주눅든 사람처럼, 거짓된 웃음을 섞으며 A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맥주와 안주를 꺼내어 남자들 사이에 놓았는데, 그 와중에도 A의 시선이 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H는 건배를 제안하고는 급하게 맥주를 마셔댔고, 연신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아마도 A에 대한 내 감정이 궁금한 것이겠지. 그가 마음에 들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는 점잖게 맥주잔을 양손으로 감싸쥐고는 H의 두서없는 대화에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두툼하면서 동그란 손이었고, 고생을 한 흔적은 없었으며 손톱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반지를 꼈던 흔적조차 없었다. 왠지 은밀하면서도 속내를 잘 알수 없는 타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부럽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분과 애인이시라니..” 나를 은은하게 쳐다보며 A가 말하자, H는 호방하게 웃으며 몸을 크게 부풀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사뭇 경박하게 들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는데, 한 점으로 모아진 그의 진득한 시선에 온 몸이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런 곳도 이런 상황도 다 처음이라 좀 떨리는군요.” A가 이번엔 맥주를 한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H는 사무적인 말투로 긴장할 필요 전혀 없다고 말하고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미 체크인한지 한시간 가량 흘러가고 있었으므로, 그가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 더운데 샤워부터 하시죠? 자기 먼저 할래?” H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구마같이 보였고 눈빛은 요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순간 왠지 모르겠지만, 그의 상상속에 내 모습이 아닌, A의 벗은 몸을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하는 의심이 들었다. 선뜻 나의 대답이 나오지 않자, A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기의 물소리가 나자 H는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때? 맘에 들어?” 그가 궁금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확히 그 지점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글쎄...”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게 진실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곧 그의 상상력에 도움을 주는 편을 택했다. “괜찮은거 같아. 분위기도 맘에 들고.. 얼굴도 귀엽네. 나같은 타입도 좋아하는 것 같고” H가 나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다니까? 완전 네 팬이래” 팬이라, 우스웠지만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H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맥주를 한모금 들이마셨다. 체온으로 미적지근해 진 맥주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다. H에 대한 기묘한 감정,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와 혐오 사이로.
A는 런닝셔츠와 바지만 다시 챙겨 입은 채로 나왔다. 살짝 물기가 내려앉은 그의 몸은 양복을 입고 있을때보다 더 육중해 보였지만, 퍼져보인다는 느낌보다는 단단한 느낌이 강했다. 그는 쑥쓰러운 듯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원래 자기가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H가 무언의 시선을 나에게 던졌다. ‘안 씻어? 나 먼저 씻을까?’라고 묻는 눈빛. 그는 무슨 말이든 표정으로 대신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들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H가 씻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에게 했던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셋이 함께 살을 부비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A는? 글쎄..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일 솔직한 표현은 ‘글쎄’였다.
화장실은 수증기와 비누냄새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가방을 젖지 않은 한쪽 구석에 내려놓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거울을 손으로 닦아내자, 다른 공간속에 있는 듯한 내가 보였다. 술 몇잔에 발그레해진 볼, 다듬은지 오래되어보이는 머리, 둥그스름한 어깨 커다란 젖가슴. 한껏 벌어진 골반,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나를 보고 성적으로 흥분해주는 남자들이 있다는 자체로 감사해야 할 지 몰랐다. ‘넌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니..?’ 소리 내어 묻고 싶었고, 다 취소하고 집으로 가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꼼꼼하게 샤워를 마친 후에 가방을 열고 준비해온 속옷을 꺼내 입었다. 속이 살짝 비치는 베이지색 슬립. 은밀한 만남이 있으면 제일 먼저 손이 가는 속옷, 나는 전날밤에 미리 이 옷을 가방속에 넣어놨더랬다. 속옷의 상태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원피스를 입은 후 밖으로 나왔을 때, 뭔가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H가 보이지 않았다. A는 내가 밖으로 나오자,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서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어디갔어요?” 내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바쁜일이 생겼다면서 미안하다고 말을 전해달라며..”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나는 가방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H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안내 멘트로 넘어갔다. 두번째, 세번째도 마찬가지였다. A는 그때까지도 런닝차림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로 어찌할바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H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상황을 벌였는지, 이런 저런 상상들은 떠 올랐지만 무엇하나 명쾌하지 않았다. 그토록 관음증적인 욕구를 들이대다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다니. H의 의도가 궁금했고 당장은 짜증이 밀려왔다. “저.....” A의 말소리에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당장은 공범으로 느껴졌다. “저도 그렇지만 많이 당황하셨을 것 같아요. 저와는 아무 것도 안해도 좋으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뭔가 대단히 중요한 일 같았어요” A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 때문인지, 그의 그런 태도 때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이유도 짜증을 낼 이유도 없다고 생각되었다. “네..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네요” 나는 가방속에서 벗어두었던 스타킹을 꺼내 침대위에 앉아 신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그 역시 벗어두었던 와이셔츠를 입고는 처음 들어올 때 모습으로 옷을 갖추어 입기 시작했다.
“정말 저같은 스타일 여자 좋아하세요?” 돌발적으로 나온 질문이었다. 그는 갑작스런 내 말에 놀란 듯, 잠시 나를 보더니 대답했다. “그럼요..제가 P님 왕팬이에요. 처음에 올리신 사진부터 전부 다 봤구요. P님이 가장 이쁘시다는 답글이랑 쪽지도 여러번 보냈었는데..” “님 닉이?” “August69요” 비슷비슷한 쪽지들 사이에서 그 닉을 본 기억이 났다. “왜 저같은 스타일이 좋으세요?” A는 여전히 거울앞에 선 채로 양손을 모으고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왜...라구 물어보시면, 음...그냥 좋으니까요... 젊을 때는 마르고 이쁜 여자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더라구요. 그러다 S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님 사진 보고 제대로 알게 된 거죠..” 그는 띄엄띄엄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전하려는 듯 신중하게 말했다.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와 좀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의 대답은 고루했지만, 그의 표정이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기왕 사놓은 맥주를 마저 꺼내서 그와 마주 앉았다. 그냥 이곳에서 나간다면 H에게 지는 것 같아 싫었고, A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A는 나의 허락이 무척이나 반가운 듯, 테이블 맞은 편쪽에서 나를 향해 돌진하듯 위태롭게 앉아 있었다.
“저 같은 여자 만나보신 적 있어요?” 내 말에 그의 작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아뇨...한번도 없어요. 사실 오늘 일도 P님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꺼에요. 님이란 걸 알게 된 후에 용기를 냈던거죠” 경험이 없다는 말에 그에게 감점을 줘야할지 점수를 줘야할 지 망설여졌다. “그럼 실제로 만나보니 어떠신데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갑자기 굉장히 멍해지고 한없이 깊어지는 것이 보였다. 한없이 뒤로 후퇴하여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좋죠..정말 좋죠.....” 그의 말이 길고 구차하지 않아서 좋았다. “피..거짓말” 나는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척을 했다. A는 답답한 듯이 어떻게 해야 믿겠냐면서 이쪽 저쪽으로 몸을 들썩거렸다. 순간 그의 바지한가운데가 불룩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안고 싶어한다는 가장 순수하고 확고한 증거. 솔직한 것은 항상 좋다. 그것이 솔직한 욕정을 말한다 해도.
반면, H에 대한 적개심과 괘씸한 마음은 커져만 갔는데, 그가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지, 갑자기 방을 나간 이유가 무엇이던지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는 시작부터 어느 한순간이라도 솔직했던 적이 없었다. 그 앞에서 나는 완전한 성적 대상물이면서, 사랑과 진실에 대해 무책임한 여자가 되곤 했다. 그 순간에도 어디선가 낄낄거리는 그의 경박한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A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침대 위에 누워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똑바로 누워 두눈을 감았다. A는 당황한 듯 잠시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A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계속>
“반가워요. 전 오 대웅이라고 합니다” 그는 선뜻 나에게 악수를 건냈다. 어짜피 본명도 아닐텐데 선뜻 이름을 말하는 것이 의아하고 당황스러웠지만, 난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지만 남자다운 힘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지긋이 미소짓던 그가 H를 향해 돌아서면서 말했다. “이렇게 누추한 곳인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도 사회적이고 의례적인 인사말들이 오고 갔다. H는 다소 주눅든 사람처럼, 거짓된 웃음을 섞으며 A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맥주와 안주를 꺼내어 남자들 사이에 놓았는데, 그 와중에도 A의 시선이 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H는 건배를 제안하고는 급하게 맥주를 마셔댔고, 연신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아마도 A에 대한 내 감정이 궁금한 것이겠지. 그가 마음에 들지도 싫지도 않았다. 그는 점잖게 맥주잔을 양손으로 감싸쥐고는 H의 두서없는 대화에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두툼하면서 동그란 손이었고, 고생을 한 흔적은 없었으며 손톱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반지를 꼈던 흔적조차 없었다. 왠지 은밀하면서도 속내를 잘 알수 없는 타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부럽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분과 애인이시라니..” 나를 은은하게 쳐다보며 A가 말하자, H는 호방하게 웃으며 몸을 크게 부풀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사뭇 경박하게 들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는데, 한 점으로 모아진 그의 진득한 시선에 온 몸이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런 곳도 이런 상황도 다 처음이라 좀 떨리는군요.” A가 이번엔 맥주를 한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H는 사무적인 말투로 긴장할 필요 전혀 없다고 말하고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미 체크인한지 한시간 가량 흘러가고 있었으므로, 그가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 더운데 샤워부터 하시죠? 자기 먼저 할래?” H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구마같이 보였고 눈빛은 요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순간 왠지 모르겠지만, 그의 상상속에 내 모습이 아닌, A의 벗은 몸을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하는 의심이 들었다. 선뜻 나의 대답이 나오지 않자, A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기의 물소리가 나자 H는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어때? 맘에 들어?” 그가 궁금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확히 그 지점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글쎄...”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게 진실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곧 그의 상상력에 도움을 주는 편을 택했다. “괜찮은거 같아. 분위기도 맘에 들고.. 얼굴도 귀엽네. 나같은 타입도 좋아하는 것 같고” H가 나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다니까? 완전 네 팬이래” 팬이라, 우스웠지만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H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맥주를 한모금 들이마셨다. 체온으로 미적지근해 진 맥주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다. H에 대한 기묘한 감정,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와 혐오 사이로.
A는 런닝셔츠와 바지만 다시 챙겨 입은 채로 나왔다. 살짝 물기가 내려앉은 그의 몸은 양복을 입고 있을때보다 더 육중해 보였지만, 퍼져보인다는 느낌보다는 단단한 느낌이 강했다. 그는 쑥쓰러운 듯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원래 자기가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H가 무언의 시선을 나에게 던졌다. ‘안 씻어? 나 먼저 씻을까?’라고 묻는 눈빛. 그는 무슨 말이든 표정으로 대신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들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H가 씻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에게 했던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셋이 함께 살을 부비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A는? 글쎄..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일 솔직한 표현은 ‘글쎄’였다.
화장실은 수증기와 비누냄새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가방을 젖지 않은 한쪽 구석에 내려놓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거울을 손으로 닦아내자, 다른 공간속에 있는 듯한 내가 보였다. 술 몇잔에 발그레해진 볼, 다듬은지 오래되어보이는 머리, 둥그스름한 어깨 커다란 젖가슴. 한껏 벌어진 골반,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나를 보고 성적으로 흥분해주는 남자들이 있다는 자체로 감사해야 할 지 몰랐다. ‘넌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니..?’ 소리 내어 묻고 싶었고, 다 취소하고 집으로 가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꼼꼼하게 샤워를 마친 후에 가방을 열고 준비해온 속옷을 꺼내 입었다. 속이 살짝 비치는 베이지색 슬립. 은밀한 만남이 있으면 제일 먼저 손이 가는 속옷, 나는 전날밤에 미리 이 옷을 가방속에 넣어놨더랬다. 속옷의 상태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원피스를 입은 후 밖으로 나왔을 때, 뭔가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H가 보이지 않았다. A는 내가 밖으로 나오자,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서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어디갔어요?” 내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바쁜일이 생겼다면서 미안하다고 말을 전해달라며..”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나는 가방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H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안내 멘트로 넘어갔다. 두번째, 세번째도 마찬가지였다. A는 그때까지도 런닝차림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로 어찌할바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H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상황을 벌였는지, 이런 저런 상상들은 떠 올랐지만 무엇하나 명쾌하지 않았다. 그토록 관음증적인 욕구를 들이대다가,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다니. H의 의도가 궁금했고 당장은 짜증이 밀려왔다. “저.....” A의 말소리에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당장은 공범으로 느껴졌다. “저도 그렇지만 많이 당황하셨을 것 같아요. 저와는 아무 것도 안해도 좋으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뭔가 대단히 중요한 일 같았어요” A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 때문인지, 그의 그런 태도 때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이유도 짜증을 낼 이유도 없다고 생각되었다. “네..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네요” 나는 가방속에서 벗어두었던 스타킹을 꺼내 침대위에 앉아 신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그 역시 벗어두었던 와이셔츠를 입고는 처음 들어올 때 모습으로 옷을 갖추어 입기 시작했다.
“정말 저같은 스타일 여자 좋아하세요?” 돌발적으로 나온 질문이었다. 그는 갑작스런 내 말에 놀란 듯, 잠시 나를 보더니 대답했다. “그럼요..제가 P님 왕팬이에요. 처음에 올리신 사진부터 전부 다 봤구요. P님이 가장 이쁘시다는 답글이랑 쪽지도 여러번 보냈었는데..” “님 닉이?” “August69요” 비슷비슷한 쪽지들 사이에서 그 닉을 본 기억이 났다. “왜 저같은 스타일이 좋으세요?” A는 여전히 거울앞에 선 채로 양손을 모으고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왜...라구 물어보시면, 음...그냥 좋으니까요... 젊을 때는 마르고 이쁜 여자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더라구요. 그러다 S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님 사진 보고 제대로 알게 된 거죠..” 그는 띄엄띄엄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전하려는 듯 신중하게 말했다.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와 좀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의 대답은 고루했지만, 그의 표정이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기왕 사놓은 맥주를 마저 꺼내서 그와 마주 앉았다. 그냥 이곳에서 나간다면 H에게 지는 것 같아 싫었고, A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A는 나의 허락이 무척이나 반가운 듯, 테이블 맞은 편쪽에서 나를 향해 돌진하듯 위태롭게 앉아 있었다.
“저 같은 여자 만나보신 적 있어요?” 내 말에 그의 작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아뇨...한번도 없어요. 사실 오늘 일도 P님이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꺼에요. 님이란 걸 알게 된 후에 용기를 냈던거죠” 경험이 없다는 말에 그에게 감점을 줘야할지 점수를 줘야할 지 망설여졌다. “그럼 실제로 만나보니 어떠신데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갑자기 굉장히 멍해지고 한없이 깊어지는 것이 보였다. 한없이 뒤로 후퇴하여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좋죠..정말 좋죠.....” 그의 말이 길고 구차하지 않아서 좋았다. “피..거짓말” 나는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척을 했다. A는 답답한 듯이 어떻게 해야 믿겠냐면서 이쪽 저쪽으로 몸을 들썩거렸다. 순간 그의 바지한가운데가 불룩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안고 싶어한다는 가장 순수하고 확고한 증거. 솔직한 것은 항상 좋다. 그것이 솔직한 욕정을 말한다 해도.
반면, H에 대한 적개심과 괘씸한 마음은 커져만 갔는데, 그가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지, 갑자기 방을 나간 이유가 무엇이던지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는 시작부터 어느 한순간이라도 솔직했던 적이 없었다. 그 앞에서 나는 완전한 성적 대상물이면서, 사랑과 진실에 대해 무책임한 여자가 되곤 했다. 그 순간에도 어디선가 낄낄거리는 그의 경박한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A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침대 위에 누워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똑바로 누워 두눈을 감았다. A는 당황한 듯 잠시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A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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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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