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홍대 거리는 주말 밤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H와 나는 둘이 자주가던 이자카야식 술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죄의식과 조바심이 섞인 듯한 표정으로 힐끗거리는 H에게 깊숙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빠. 오늘은 지난번처럼 사라지면 안돼”
H는 그말에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안은 약간 이른 시간 탓인지 텅텅비어 있었다. 홀을 지나 제일 구석진 안쪽 방으로 들어서자 다다미방 특유의 냄새와 변함없는 구조가 익숙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자리에 앉아 우리는 잠시동안 추억에 빠져 대화를 나누었다. 그와 알게되고 서로에게 점점 중독되어가던 시절. 나와 함께라면 그는 어디서든 흥분했었고, 온 몸으로 나를 갈구했었다. 주말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 그는 나를 모텔로 데려갔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샤워도 전희도 없이, 치마를 들추고 팬티를 젖힌 채 굶주렸던 욕정을 풀어댔다. 그의 넘치는 젊음과 탄력, 나쁘지 않은 섹스실력보다도 좋았지만, 제일 좋았던 것은 그런 갈급함이었다. 그렇게 밤새 서로에게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막상 헤어질 시간이 되면 그는 아쉬워했고, 기억 속 그 날엔 밥이나 먹고 헤어지자며 이 곳, 이 방으로 나를 데리고 왔었다.
단촐한 안주와 소주 한잔. 갑자기 끊겨버린 대화와 나를 보던 H의 이글거리는 시선. 어느 순간 옆으로 옮겨와 앉은 H와 현안한 애무에 놓아버렸던 정신. 브라우스 밖으로 꺼내어진 유방과 발목까지 내려가버린 팬티. 언제 열릴지 몰라 지켜봤던 미닫이 방문. 옆방에서 누군가가 두런거리며 나누는 대화소리. 그 모든 불안 속에서 나는 H가 내 안에 질퍽하게 사정할때까지 입을 꼭 틀어막고 있어야만 했다.
“그 때 정말 짜릿했는데”
H가 므흣한 표정으로 손을 잡아왔다.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절정의 순간이 어디였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H와는 두번 다시 그런 느낌을 공유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은 이미 오래전에 들었다. 한번 내려온 산을 다시 올라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법이니까. 나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빙긋이 웃어주었다.
술과 안주가 나왔고, 종업원은 알듯 말듯한 미소를 띄며 예의있게 방문을 꼭 닫고 나갔다. 두어잔 연거푸 소주를 마신 H가 무슨 생각으로 그 아저씨를 오라고 했느냐며 물어왔다. 나는 H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나에게 있어서 남자들은 항상 똑같았다. 솟아오르는 욕구의 힘은 어마어마하지만, 관계가 반복되고 자신의 여자라는 느낌을 몸으로 느끼게되면 매 순간순간마다 놀랄만큼 빠르게 식어갔다. 나는 그런 느낌이 싫어서 구차해지기전에 항상 먼저 관계를 정리하고자 했다. 하강하기 시작한 H와의 관계, 그리고 삼천만원이라는 큰 돈으로 상징되어버린 A의 타오르기 시작한 욕망, 그 사이에 있다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가 궁금했다. 결국은 둘다 초라한 재만 남기고 과거라는 무덤속으로 뭍히게 되겠지만, 난 잃을 것도 없었고 새로운 시도는 언제든 환영이었다.
“아뭏든, 나는 여전히 오빠 여자야”
생각나는데로 내뱉은 구차한 설명과 변명 끝에 나는 H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꺼냈다. 내 말에 그는 알아보기 힘든 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안심을 한건지, 실망을 한건지 알아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어느쪽이든 그건 상관없었다. 내가 그렇듯, 그 역시 나름대로 생각과 계획이 있을테니까.
오래지 않아 A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행동 하나하나는 여전히 매너있었고, 옷은 지난번보다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의 주변으로 ‘윤택’의 빛이 넘쳐 흘렀다. 이런 것이 후광효과일테지 싶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고, 찰나의 순간에 둘만 알수 있는 농밀한 시선이 오갔다. 그것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그리움, 욕망, 서운함, 계산, 탐색 같은 것들. 자리에 앉은 후, H와 A는 마치 타고난 연기자들처럼 행동했다. 서로에 대해, 그리고 지난번 일에 대해 그들은 묘기를 부리듯 진실과 거짓사이를 넘나들었다. 그것이 가증스럽다기보다는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하고, 또 신선하게도 느껴졌는데, 진실됨을 떠나서, 각각 농밀한 경험을 나누었던 두 남자와 동시에 한자리에 있다는 상황이 주는 야릇함 때문이었다. 셋이서 함께 그 경험을 나누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보다는 술잔이 더 많이 오고갔고, 방안은 금새 후끈하게 달구어졌다. 서로의 체온으로, 보이지 않게 오고가는 욕망의 에너지로.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버린 A는 섹시했다. 잘 다려진 새하얀 와이셔츠, 옆으로 단정하게 빗어넘긴 희끗한 짧은 머리. 좀 번들거리긴 하지만, 건강한 혈색과 귀여운 인상. 동그랗고 두툼하지만 단단한 체형, 굵은 허벅지.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는 그의 입술이 그 날의 경험과 연결이 되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눈이 마주친 A가 나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다말고,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날 우리 셋이 못했던 것, 오늘 해보고 싶어” 나는 H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내 말에 H는 펄쩍 뛰었다.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납득할 수 없다는 투였다. 재미있었다. 이면의 진실이 어쨌건 그 제안을 먼저 했던 것은 그였으니까. 나는 그에게 우리 셋이 만나게 된 본래의 목적과 그가 주기로 했던 돈의 연관관계에 대해서 말했다. 원래 목적을 달성해야 계약이 완성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A는 욕구를 채우고, H는 욕심을 채우고, 나는 호기심을. 그러면 모두 다 행복해지는 것 아닌가? 내 말에 H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난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야 진정으로 H의 여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했다. H의 원망스런 시선이 나를 뚫고 머리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A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때, 이번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며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행복하고 들뜬 표정들이었다. 나도 아무 생각없이 마냥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잠시 회한에 잠겼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H는 여전히 똥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A는 상기된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내 뜻이 전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욕망이라는 강에 노를 젓기 시작했다. 표면은 잔잔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급류가 흐르는 강.
더이상 탐색이 불필요해지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한동안 길가에서 서로 눈치만 보다가, A의 제안으로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택시안에서 H는 취기가 올라오는 듯,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다. 그는 어느순간부터 A를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호칭만 그랬을 뿐, 그의 애완견이라도 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원래의 습관이 나온 것이겠지 싶었다. 그런 H보다 내 신경을 쓰이게 했던 것은 예상치 못한 A의 제안이었다. 당연히 그를 유부남으로 생각했었는데, 집으로 우릴 데리고 간다? 이혼남이나 싱글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의 집은 홍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주상복합이었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고, 넓고, 고급스러웠다. 신발을 벗는 곳이 내 방보다 컸으니까. 바닥엔 장판이 아니라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도대체 방이 몇개인지, 화장실은 어느쪽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주눅들었다기보다는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전체적인 집의 느낌은 약간 휑해 보이기도 했는데, 잡다한 세간살이가 없고 꼭 필요한 것들과 최소한의 장식이 주는 절제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집주인의 성향이 투영되었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어느곳에서도 안주인이나 다른 가족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방으로 들어갔던 A가 편안한 차림으로 비싸보이는 양주와 맥주를 가져왔고, 익숙한 듯 빠른 솜씨로 간단한 안주를 만들어왔다. 요리를 하는 남자는 멋져보이지만, 능력도 있으면서 요리도 잘하는 남자는 섹시하다. 그런 A를 나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았나보다. 갑자기 H가 팔꿈치로 나를 툭 쳤다. 돌아보니 H의 차갑고 깊은 눈동자가 보였다. ‘왜’라고 물어봤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양주를 개봉하기 시작했다.
두 남자는 양주를 마셨고, 나는 맥주를 마셨다. 이미 1차에서 주량을 오버했고, 양주는 너무 독해 보였다. 그리고 불확실하지만 자극적인 기대감을 술에 취해 날려버리고 싶진 않았다. 계속되는 건배. 쨍하는 소리와 거침없이 뒤로 꺾이는 남자들의 목. H는 취기가 많이 오른 듯, 소파에 파뭍혀 비스듬히 앉아서 낄낄거리고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A는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약간 말이 어눌해 진 것을 빼고는 마신 술의 양에 비해서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두 사람은 약속한 듯이 번갈아가며 힐끔거리듯 나를 쳐다보았다.
대화의 소재가 고갈된 듯 말수가 적어지고, 시계가 11시를 가리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남자가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왜?’라고 묻는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너무 마셨나봐요 좀 어지럽네요. 저..혹시 좀 씻어도 될까요?”
H는 왜 굳이 남의 집에서 샤워까지 하느냐고 질책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A의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A는 양손을 써가며 불을 켜주고 세세하게 수건이 놓여진 위치와 불편한 것이 없는지 살폈다.
“그런데..다른 가족 분들은..”
“아....”
잠시 머뭇하던 그가 대답했다.
“와이프는 사별했구요. 아이는 지금 외국에 나가 있습니다”
그런 대답을 하게 한 것은 미안했지만,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물줄기에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나는 호화로운 욕실에서 아주 천천히 샤워를 즐겼다. 밖으로 나왔을 때 A와 H는 여전히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동시에 나를 쳐다보는 두 남자의 시선에서 각자 다른 색깔의 욕망이 보였다. 나는 소파 옆 러그위에 앉아 두 남자의 은밀한 시선을 만끽한 후에 피곤해서 먼저 쉬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도 A가 일어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곳은 손님방인듯 했는데, 트윈정도 되어보이는 잘 정리된 침대 하나만 방에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A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나는 불을 끄고 속옷차림으로 이불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부드럽고 부슬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밖에서는 두런거리는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대화일까 궁금했고,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에 긴장되었지만, 술기운과 따뜻한 샤워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 채,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때, 나는 벽쪽을 향해 모로 누워 잠든 상태였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린것 같았는데 방은 여전히 고요했고 어두웠다. 하지만 나는 다시 꿈속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깨까지 덮혀있었던 이불이 누군가에 의해 천천히 끌어져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오빠. 오늘은 지난번처럼 사라지면 안돼”
H는 그말에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안은 약간 이른 시간 탓인지 텅텅비어 있었다. 홀을 지나 제일 구석진 안쪽 방으로 들어서자 다다미방 특유의 냄새와 변함없는 구조가 익숙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자리에 앉아 우리는 잠시동안 추억에 빠져 대화를 나누었다. 그와 알게되고 서로에게 점점 중독되어가던 시절. 나와 함께라면 그는 어디서든 흥분했었고, 온 몸으로 나를 갈구했었다. 주말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 그는 나를 모텔로 데려갔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샤워도 전희도 없이, 치마를 들추고 팬티를 젖힌 채 굶주렸던 욕정을 풀어댔다. 그의 넘치는 젊음과 탄력, 나쁘지 않은 섹스실력보다도 좋았지만, 제일 좋았던 것은 그런 갈급함이었다. 그렇게 밤새 서로에게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막상 헤어질 시간이 되면 그는 아쉬워했고, 기억 속 그 날엔 밥이나 먹고 헤어지자며 이 곳, 이 방으로 나를 데리고 왔었다.
단촐한 안주와 소주 한잔. 갑자기 끊겨버린 대화와 나를 보던 H의 이글거리는 시선. 어느 순간 옆으로 옮겨와 앉은 H와 현안한 애무에 놓아버렸던 정신. 브라우스 밖으로 꺼내어진 유방과 발목까지 내려가버린 팬티. 언제 열릴지 몰라 지켜봤던 미닫이 방문. 옆방에서 누군가가 두런거리며 나누는 대화소리. 그 모든 불안 속에서 나는 H가 내 안에 질퍽하게 사정할때까지 입을 꼭 틀어막고 있어야만 했다.
“그 때 정말 짜릿했는데”
H가 므흣한 표정으로 손을 잡아왔다.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절정의 순간이 어디였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H와는 두번 다시 그런 느낌을 공유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은 이미 오래전에 들었다. 한번 내려온 산을 다시 올라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법이니까. 나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빙긋이 웃어주었다.
술과 안주가 나왔고, 종업원은 알듯 말듯한 미소를 띄며 예의있게 방문을 꼭 닫고 나갔다. 두어잔 연거푸 소주를 마신 H가 무슨 생각으로 그 아저씨를 오라고 했느냐며 물어왔다. 나는 H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나에게 있어서 남자들은 항상 똑같았다. 솟아오르는 욕구의 힘은 어마어마하지만, 관계가 반복되고 자신의 여자라는 느낌을 몸으로 느끼게되면 매 순간순간마다 놀랄만큼 빠르게 식어갔다. 나는 그런 느낌이 싫어서 구차해지기전에 항상 먼저 관계를 정리하고자 했다. 하강하기 시작한 H와의 관계, 그리고 삼천만원이라는 큰 돈으로 상징되어버린 A의 타오르기 시작한 욕망, 그 사이에 있다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가 궁금했다. 결국은 둘다 초라한 재만 남기고 과거라는 무덤속으로 뭍히게 되겠지만, 난 잃을 것도 없었고 새로운 시도는 언제든 환영이었다.
“아뭏든, 나는 여전히 오빠 여자야”
생각나는데로 내뱉은 구차한 설명과 변명 끝에 나는 H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꺼냈다. 내 말에 그는 알아보기 힘든 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안심을 한건지, 실망을 한건지 알아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어느쪽이든 그건 상관없었다. 내가 그렇듯, 그 역시 나름대로 생각과 계획이 있을테니까.
오래지 않아 A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행동 하나하나는 여전히 매너있었고, 옷은 지난번보다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의 주변으로 ‘윤택’의 빛이 넘쳐 흘렀다. 이런 것이 후광효과일테지 싶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고, 찰나의 순간에 둘만 알수 있는 농밀한 시선이 오갔다. 그것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그리움, 욕망, 서운함, 계산, 탐색 같은 것들. 자리에 앉은 후, H와 A는 마치 타고난 연기자들처럼 행동했다. 서로에 대해, 그리고 지난번 일에 대해 그들은 묘기를 부리듯 진실과 거짓사이를 넘나들었다. 그것이 가증스럽다기보다는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하고, 또 신선하게도 느껴졌는데, 진실됨을 떠나서, 각각 농밀한 경험을 나누었던 두 남자와 동시에 한자리에 있다는 상황이 주는 야릇함 때문이었다. 셋이서 함께 그 경험을 나누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보다는 술잔이 더 많이 오고갔고, 방안은 금새 후끈하게 달구어졌다. 서로의 체온으로, 보이지 않게 오고가는 욕망의 에너지로.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버린 A는 섹시했다. 잘 다려진 새하얀 와이셔츠, 옆으로 단정하게 빗어넘긴 희끗한 짧은 머리. 좀 번들거리긴 하지만, 건강한 혈색과 귀여운 인상. 동그랗고 두툼하지만 단단한 체형, 굵은 허벅지.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는 그의 입술이 그 날의 경험과 연결이 되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눈이 마주친 A가 나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다말고,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날 우리 셋이 못했던 것, 오늘 해보고 싶어” 나는 H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내 말에 H는 펄쩍 뛰었다.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납득할 수 없다는 투였다. 재미있었다. 이면의 진실이 어쨌건 그 제안을 먼저 했던 것은 그였으니까. 나는 그에게 우리 셋이 만나게 된 본래의 목적과 그가 주기로 했던 돈의 연관관계에 대해서 말했다. 원래 목적을 달성해야 계약이 완성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A는 욕구를 채우고, H는 욕심을 채우고, 나는 호기심을. 그러면 모두 다 행복해지는 것 아닌가? 내 말에 H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난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야 진정으로 H의 여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했다. H의 원망스런 시선이 나를 뚫고 머리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A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때, 이번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며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행복하고 들뜬 표정들이었다. 나도 아무 생각없이 마냥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잠시 회한에 잠겼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H는 여전히 똥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A는 상기된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내 뜻이 전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욕망이라는 강에 노를 젓기 시작했다. 표면은 잔잔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급류가 흐르는 강.
더이상 탐색이 불필요해지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한동안 길가에서 서로 눈치만 보다가, A의 제안으로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택시안에서 H는 취기가 올라오는 듯,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다. 그는 어느순간부터 A를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호칭만 그랬을 뿐, 그의 애완견이라도 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원래의 습관이 나온 것이겠지 싶었다. 그런 H보다 내 신경을 쓰이게 했던 것은 예상치 못한 A의 제안이었다. 당연히 그를 유부남으로 생각했었는데, 집으로 우릴 데리고 간다? 이혼남이나 싱글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의 집은 홍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주상복합이었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고, 넓고, 고급스러웠다. 신발을 벗는 곳이 내 방보다 컸으니까. 바닥엔 장판이 아니라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도대체 방이 몇개인지, 화장실은 어느쪽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주눅들었다기보다는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전체적인 집의 느낌은 약간 휑해 보이기도 했는데, 잡다한 세간살이가 없고 꼭 필요한 것들과 최소한의 장식이 주는 절제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집주인의 성향이 투영되었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어느곳에서도 안주인이나 다른 가족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방으로 들어갔던 A가 편안한 차림으로 비싸보이는 양주와 맥주를 가져왔고, 익숙한 듯 빠른 솜씨로 간단한 안주를 만들어왔다. 요리를 하는 남자는 멋져보이지만, 능력도 있으면서 요리도 잘하는 남자는 섹시하다. 그런 A를 나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았나보다. 갑자기 H가 팔꿈치로 나를 툭 쳤다. 돌아보니 H의 차갑고 깊은 눈동자가 보였다. ‘왜’라고 물어봤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양주를 개봉하기 시작했다.
두 남자는 양주를 마셨고, 나는 맥주를 마셨다. 이미 1차에서 주량을 오버했고, 양주는 너무 독해 보였다. 그리고 불확실하지만 자극적인 기대감을 술에 취해 날려버리고 싶진 않았다. 계속되는 건배. 쨍하는 소리와 거침없이 뒤로 꺾이는 남자들의 목. H는 취기가 많이 오른 듯, 소파에 파뭍혀 비스듬히 앉아서 낄낄거리고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A는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약간 말이 어눌해 진 것을 빼고는 마신 술의 양에 비해서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두 사람은 약속한 듯이 번갈아가며 힐끔거리듯 나를 쳐다보았다.
대화의 소재가 고갈된 듯 말수가 적어지고, 시계가 11시를 가리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남자가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왜?’라고 묻는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너무 마셨나봐요 좀 어지럽네요. 저..혹시 좀 씻어도 될까요?”
H는 왜 굳이 남의 집에서 샤워까지 하느냐고 질책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A의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A는 양손을 써가며 불을 켜주고 세세하게 수건이 놓여진 위치와 불편한 것이 없는지 살폈다.
“그런데..다른 가족 분들은..”
“아....”
잠시 머뭇하던 그가 대답했다.
“와이프는 사별했구요. 아이는 지금 외국에 나가 있습니다”
그런 대답을 하게 한 것은 미안했지만,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물줄기에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나는 호화로운 욕실에서 아주 천천히 샤워를 즐겼다. 밖으로 나왔을 때 A와 H는 여전히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동시에 나를 쳐다보는 두 남자의 시선에서 각자 다른 색깔의 욕망이 보였다. 나는 소파 옆 러그위에 앉아 두 남자의 은밀한 시선을 만끽한 후에 피곤해서 먼저 쉬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도 A가 일어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곳은 손님방인듯 했는데, 트윈정도 되어보이는 잘 정리된 침대 하나만 방에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A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나는 불을 끄고 속옷차림으로 이불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부드럽고 부슬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밖에서는 두런거리는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대화일까 궁금했고,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에 긴장되었지만, 술기운과 따뜻한 샤워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 채,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때, 나는 벽쪽을 향해 모로 누워 잠든 상태였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린것 같았는데 방은 여전히 고요했고 어두웠다. 하지만 나는 다시 꿈속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깨까지 덮혀있었던 이불이 누군가에 의해 천천히 끌어져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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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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