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쉬, 조금 더 진한 그레이 -8부-
난 커트 코베인처럼 죽고 싶어. 스물일곱살이 되면 말이지, 이렇게 하고.
예전에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난 음악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원래 나는 록음악에 심취해 있었지만 조금씩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악 취향이 변해가고 았었다. 물론 그녀의 영향이 컸다. 아니 그녀가 모든 사유 변화의 동기였다. 그날도 나는 그녀가 좋아한다는 가수의 발라드 음악을 동아리 방에서 듣고 있었다. 노래는 금방이라도 녹아들 것처럼 한없이 부드러웠고,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이상향을 더듬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마저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의 나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유치함조차 믿고 싶었고, 현실은 외면한, 진실따윈 전혀 고려치 않는 그런 노래마저도 참된 사랑의 노래라고 듣고 있었다. 그때 평소 동아리 활동을 하며 친하게 지내던 동기 녀석이 내게 다가와 말했었다. 난 커트 코베인처럼 죽을거야, 스물일곱 살이 되면, 이렇게 하고 말이지. 그 동기생 녀석은 무슨 권총이라도 손에 들고 있는 마냥 엄지와 검지를 펴 입에 우겨넣고는 웩웩거렸다. 그리고.
펑, 하고 쏴서 죽어 버릴거야. 커트 코베인처럼.
바로 스물일곱 살이 되면 말이지, 하고 그 동기생 녀석은 선언하듯 말했다. 난 아직 삼년이나 남았으니까, 공부나 열심히 해, 너 이번 학기까지 에러나면 큰일나지 않냐?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라고 중얼거린 후 여자 친구가 된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총기 소유가 불법이라 조금 힘들거야, 그렇지? 라는 동기생 녀석은 아쉬운 표정으로 한 숨을 쉬었고, 계속 문자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들러붙어 넌 어떻게 생각해? 라며 쉬지 않고 물었었다. 그때 나는 아파서 전화도 받지 못하던 그녀에게 문자메세지를 남기느라 동기생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언젠가부터 아프기 시작했던 그녀는 다른 모든 순위보다 우선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면 입대를 해야 했던 나에게 그녀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무가치한 것들이어서 신경 쓸 겨를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더욱이 우울증 초기 증상까지 보이던 그녀를 놔두고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나에겐 재앙이었다.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의 죽음까지 돌보아 주었는데, 나는 그녀의 삶조차 보살펴 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깊어질수록, 나의 상대적인 삶은 피폐함조차 외면한 구더기같았다. 나는 그 동기생 녀석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내가 말을 들어주지 않자 동기생 녀석은 다른 동아리 학생에게 다가가 또 웩웩거렸다. 난 커트 코베인처럼 죽을 거야, 스물일곱 살에 말이지, 정말이야.
그랬던 동기생 녀석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시비가 붙어 싸우다 테이블 모서리에 뒤통수를 부딪혀 뇌진탕으로 죽었다는 농담 같은 얘기를, 나는 군대 제대 말년 휴가를 나와서 들었다. 그날 나의 제대 축하 기념 술자리에는 그때까지 나를 위해 기다려 주었던 나의 그녀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내 군 생활에 있어 그녀와의 면회는 축복이었고, 휴가는 달콤한 축제였다. 내가 제대할 무렵 그녀는 졸업반이었고, 이미 취직자리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그 날의 술값도 그녀가 대신 내주었다. 친구들은 환호했고, 동기생 녀석의 죽음은 술안주보다 못한 채 흘러가 버렸다. 그녀는 내가 복학한 후 얼마간의 내 뒷바라지도 해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의 구원자였다. 그러나 그려는 내가 입대하기 전보다 더욱 심하게, 그리고 더욱 자주 아팠고 우울증세도 더 심해져 있었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만큼 나와 그녀의 인생도 창백해 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차라리 영원히 모르는 것이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말이다.
그때 난 동기생 녀석의 죽음 소식을 듣고는 아직 일 년이나 남았는데, 라고 겨우 중얼거렸던 것 같다. 아직, 일 년이나, 남았는데.
언젠가부터 매년 새해가 되면, 난 내 속에 남아있는 찌꺼기들을 쏟아내기 위해 하루 종일 변기 속에 머리를 처박고 구역질을 했다. 새해에, 나는 아직 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고, 나는 죽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은 내게 매달려 무엇이라도 생각해내라고 버글거렸다. 나는 죽지 못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변기 속 폭포수들은 유연한 나선형 곡선을 기르며 내 오물들을 빨아 먹었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있으며 그것을 바라보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토해야 했다. 토하는 것은 새해를 맞이하는 나의 의식같았다. 내 속에 담긴 희망과 굴레의 찌꺼기들은 끝이 없었다. 때론 아직 토해내지 못한 오물을 버리기 위해 아무 여자의 질 속에 성기를 처박기도 했다. 여자들은 나의 오물을 질 속의 컴컴한 어둠으로 빨아들이고, 가끔은 입에다 담기도 했다. 여자들이 입에다 넣을 때에 나는, 절대로 그것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나오지 못하게 입을 틀어 막았다. 두 번 다시 태양을 볼 수 없게. 아니 그늘진 경계조차도. 여자들의 성기와 입은 내 오물들의 하수구였다. 그들의 비명을 무참히 나의 오물과 비벼졌고, 나는 겨우 안도했다.
그 날도 나는 새벽까지 구토를 한 후 부글거리는 속을 겨우 붙잡고 여자의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하얀 팬티를 벗긴 후 성기를 우겨넣었다. 여자는 가만히 있었고, 나는 더러운 오물을 입가에 그득 뭍인 해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은 추위도, 오르가즘도 아닌, 거세게 요동치며 나를 탄핵하려는 나의 희망때문이었다. 새해 첫 날의 희망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나는 나를 탄핵하려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나는 탄핵하려는 것들을 탄핵하는 것조차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희망 속에서 눈을 흘기며 나를 부정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조차 오로지 그것 뿐인 듯했다. 나는 이것들을 가지고 나를 절망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여자의 성기에 내 썩은 정액과 희망을 버무려 쏟아내었다.
한참 후, 나는 겨우 비틀거리며 일어나 입을 닦고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창밖에서 찬란하게 떠오르는 새해 첫 날 아침의 태양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태양은 날 것 그대로 드러난 내 온 몸을 비추더니 이내 오피스텔 방안으로 한가득 자신의 모습을 우겨넣어 주었다. 난 멍하니 햇살을 입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무력한 구토감을 느꼈다. 여자는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투명한 망사로 된 실크 팬티를 입으며 말했다.
무슨 말이 그래요? 당장 죽을 사람처럼. 그것도 새해 첫 날 아침부터.
성경 말씀이야. 모르면 가만있어.
타박하듯 내가 말하자 여자는 얼핏 놀란 듯 다시 내게 물었다.
아저씨, 교회 다녀요?
교회? 다녔지. 옛날에.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지난 삶 속에 파묻혀. 나는 몸을 돌려 여자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냥 어디서 들은 말이야.
그래도 뭔가 의미심장한 말 같은데요?
의미?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마도 여자 앞에서 웃는 것은 처음인 듯 싶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이든. 여자는 어머, 아저씨도 웃을 줄 알아요? 라며 신기해했다.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 것에도 의미를 두지 마. 의미를 만들지도 말고, 만들려고도 하지 말고, 생각지도 말아. 그런 것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생각하는게 좋아. 의미는 구덩이니까. 점점 깊어지는 무덤 속 구덩이처럼 의미가 커지면 커질수록 들어가야 하는 갱도만 깊어질 뿐이지. 일부러 의미를 만들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애써 파멸로 몰아가는 것은 멍청한 것들이나 하는 바보같은 짓이야. 의미의 노예 따윈 되지 않는게 좋아. 아무 것에도 의미를 두지마, 알겠어?
태양은 여전히 등 뒤를 긁어대며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 태양이 내 등 뒤에서 그대로 불에 타 잿덩이도 남기지 않고 소멸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태양은 빛으로 산화하며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나는 무력하게 빛을 온 몸으로 맞아야 했다. 내 방에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가득 들어찬 빛의 덩어리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그래, 알고 있어. 의미가 노예가 된 건 바로 나라는 것. 나는 모순 속에서 살고 있는 한 마리의 바퀴벌레, 여자에게 주절거린 말은 바로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었고, 지킬 수도 없는 말 위에서 버둥거리며 구덩이로 내몰리고 있던 것 또한 나였다. 그날 나는 희망에게 탄핵당하고 말았다. 나는 커튼을 쳤다. 순식간에 태양빛은 죽어버리고 내가 만든 새하얀 형광이 자리를 차지했다.
여자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침대 위에서 팬티만 걸친 채 벽에 기대있었다. 여자는 계속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잠시 후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 나 궁금한 거 있어요.
나는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본 다음, 테이블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후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나 왜 만나요?
입에 물고 있는 담배가 문득 쓰다고 느껴졌다. 여자는 그냥 궁금해서요, 사람만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아저씨가, 굳이 나는 만나주는 이유요, 라며 끌어당긴 무릎에 팔을 괴며 말했다. 구하려면 다른 여자들도 많을 텐데, 라고 여자는 나를 쳐다보았고, 뭐 딱히 좋아하는 티는 안 내지만, 이라며 입술을 쌜쭉거렸다. 눈 앞에 피워 오르던 연기는 장막이 되어 내 눈을 가리고 여자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느새 잠잠해진 구토감을 버려둔 채 다시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연기가 내 모든 어둠을 거쳐 심장까지, 아니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저편까지 몰려가는 느낌이었다.
노래.
희뿌연 연기를 한가득 천천히 내뿜은 후 내가 말했다. 연기는 나와 여자 사이에 가득 머물며 피어오른 물안개같았다. 연기는 나를 망망하지만 또렷한 곳으로 인도하는 듯 싶었다. 나는 끝내 연기에 몸을 맡겼다.
그날, 그러니까 여자를 처음 본 날. 나는 여자에게 노래를 하나 불러달라고 했었다.
듣고 싶으신 노래가 있으세요?
라고 여자는 물었고, 나는 대답없이 담배만 물었었다. 여자는 내 담배에 불을 붙여 주더니, 나의 말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런거 없어, 그냥 너 하고 싶은거해. 난 상관없으니까. 그냥 아무 노래나 듣고 싶은거 뿐이야. 크게 신경쓰지마. 의미도 두지 말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괜찮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여자는 뭘 불러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을 번호책을 뒤적거리더니 다시 나에게 말했다.
죄송한데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노래 불러도 돼요?
그래, 그렇게 해. 나도 그게 좋아. 너하고 싶은 노래 해.
나의 말에 여자는 번호책에서 어떤 곡을 찾더니 곧 노래를 입력했다. 나는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마이크를 가지러 앞으로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나의 눈은 못 볼 것을 본 사람마냥 휘둥그레졌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마저 놓칠뻔했다 순간 나는 노래를 부르려고 마이크를 잡고 룸의 한쪽 구석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던 여자의 얼굴에서, 참담하게도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야 했다.
난 이 노래가 참 좋아.
언제였던가. 그때 그녀는 우리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바닷가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었다. 나는 노래방 기계의 화면을 슬쩍 쳐다본 후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미 시작된 노래에서는 슬프고 애절한 피아노 반주의 전주부분이 흐르고 있었다.
야상곡? 자우림 노래 아냐?
응. 김윤아 노래.
왜 하필 이런 노래를. 너하고는 별로 안 어울리는데?
그래. 그때까지 나는 아직 그녀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상황. 그녀를 둘러싼 그녀의 세계를. 제대 후 졸업반이었던 나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까지 관계가 진전된 그녀였지만,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그녀가 왜 우울하고 슬퍼했는지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였다. 나는 다만 그녀가 자주 아파하고 우울증이 걸려 있는 것이, 그냥 피곤해서 몸이 안 좋은 줄로만 알았다. 잔물결이 고요하게 파동치며 흐르던, 바다가 내려다보이던 그 노래방의 창가 앞에서 그녀는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냥 우울하잖아. 내 몸을 모두 맡겨 버려도 좋을 만큼, 슬프기도 하고.
가늠할 수 없는 기억은 나의 추억을 무력하게 했다. 여자는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가운 술잔에 담긴 술이 파동을 치며 잔물결을 흘려내는 것 같았다. 그 잔물결 사이로 푸른 장막이 떠올라 나를 집어삼키는 기분이 온 몸을 휘감았다. 푸른 물결을 간직한 장마은 오염에 찌들어 검게 썩어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맞이한 눈꽃. 흐드러진 긴 생머리. 하얀 운동화. 조금은 바랜 듯한 푸른색 원피스. 바닥에 나동그라진, 머리를 묶을 때 쓰던 분홍빛 스카프. 터질 듯 도드라진 가슴. 그리고 눈꽃 속에서 태어난 오물들. 오물 사이에 핀 푸르른 청초. 침대 아래에 널린 검은 팬티. 썩은 채 말라버린 악마의 씨앗. 침대에 묶여 있던 노란 스카프. 새하얀 천사의 날개. 새하얀 눈동자. 그들의 성가. 번들거리는 붉은 입술. 그리고. 그리고.
그만해.
나는 나직이 말했다. 단호함이 나직함을 짓밟고 있었지만, 여자는 단호함을 못 본듯 했다. 여자는 계속 불렀다.
그만해라.
나의 단호는 다시 한 번 여자를 향해 달려갔다. 여자는 나의 의지를 알지 못했고, 나는 다시 그만하라고 했지, 라고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그때서야 여자는 예? 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벌떡 일어서 걸어가 여자의 마이크를 확 낚아채었다.
내가, 그만, 하라고 했지.
초조한 분노에 갖혀버린 말은 겨우 끊어진 채로 여자에게로 질러갔다. 나는 여자의 몸에 간신히 붙어있던 란제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여자의 몸. 나는 란제리를 찢어 발기듯 거칠게 내려붙였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나는 여자의 목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여자의 입에 내 혀를 우겨넣었다. 여자는 가만히 있었다. 모든 체념이 여자를 휘감은 채 나에게 기어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체념. 그래, 어쩌면 그것은 이미 여자를 정복하고 있던 체념인지도 몰랐다. 여자 자신도 가늠할 수 없었던 희망을 버리고 달콤한 마약처럼 다가온 절망에 몸을 맡겨버린지도. 나중에, 여자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나 역시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것을 듣는 순간에도. 한손으로 여자의 목을 움켜쥐고, 다른 한손으로는 여자의 속옷을 벗겨 내리던 나는 결국, 감당할 수 없었던 분노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천장에 걸린 조명등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목이 졸린 여자는 노래를 잃어버렸다. 노래를 잃어버린 곡은 반주만이 쓸쓸히 흘러나왔고, 재떨이의 피다만 담배는 연기를 흩뜨려 올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가서 술이나 더 가져오라고 해.
나는 말했다. 여자는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더니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와 있던 자신의 속옷을 끌어올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날 나는 술에 만신창이가 되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오직 그것뿐인 듯한 사람처럼 여자와 섹스를 했다. 끝도 없이 공허한 것들은 전혀 채워지지 않았다. 여자 역시 술에 취해 엉망인 채로 나와 함께 있었다. 그날 여자가 나에게 무슨 얘기를 했고, 내가 여자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가 나의 눈에 가만히 입술을 대고 키스를 하며 뭔가를 닦아준 후 한참동안 나를 안고 있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여자를 보냈다. 마치 구원을 내보내야 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후 나는 그 노래와 그녀가 겹쳐보였던 여자의 얼굴에 절망처럼 구속되어 계속 여자만 찾게 되었다. 여자가 노래를 하던 그 날, 나는 그 어떤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 날에도.
노래? 무슨 노래요?
여자의 눈이 동그래지며 나를 쳐다보았다. 휘둥그레진 여자의 눈은 나의 대답을 되물었지만, 나는 이미 구덩이에 몸을 던진 의미의 노예였다. 나는 피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다. 바닥에 널린 여자의 슬립이 보였다. 그 옆에 벗어놓은, 아니 벗겨진 스타킹이 나뒹굴고 있었다. 주인을 잃은 치마는 침대 아래편에 던져진 채로 구겨져 있었다. 브래지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팬티만 입은 채 이불을 감싸 안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의자에서 일어서 여자에게 다가가 그 입술에 키스를 했다. 따뜻함이 아득하게 밀려왔다.
여행 갈래?
얼마 후, 입을 뗀 나는 새카만 여명같은 여자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커트 코베인처럼 죽고 싶어. 스물일곱살이 되면 말이지, 이렇게 하고.
예전에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난 음악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원래 나는 록음악에 심취해 있었지만 조금씩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악 취향이 변해가고 았었다. 물론 그녀의 영향이 컸다. 아니 그녀가 모든 사유 변화의 동기였다. 그날도 나는 그녀가 좋아한다는 가수의 발라드 음악을 동아리 방에서 듣고 있었다. 노래는 금방이라도 녹아들 것처럼 한없이 부드러웠고,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이상향을 더듬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마저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의 나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유치함조차 믿고 싶었고, 현실은 외면한, 진실따윈 전혀 고려치 않는 그런 노래마저도 참된 사랑의 노래라고 듣고 있었다. 그때 평소 동아리 활동을 하며 친하게 지내던 동기 녀석이 내게 다가와 말했었다. 난 커트 코베인처럼 죽을거야, 스물일곱 살이 되면, 이렇게 하고 말이지. 그 동기생 녀석은 무슨 권총이라도 손에 들고 있는 마냥 엄지와 검지를 펴 입에 우겨넣고는 웩웩거렸다. 그리고.
펑, 하고 쏴서 죽어 버릴거야. 커트 코베인처럼.
바로 스물일곱 살이 되면 말이지, 하고 그 동기생 녀석은 선언하듯 말했다. 난 아직 삼년이나 남았으니까, 공부나 열심히 해, 너 이번 학기까지 에러나면 큰일나지 않냐?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라고 중얼거린 후 여자 친구가 된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총기 소유가 불법이라 조금 힘들거야, 그렇지? 라는 동기생 녀석은 아쉬운 표정으로 한 숨을 쉬었고, 계속 문자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들러붙어 넌 어떻게 생각해? 라며 쉬지 않고 물었었다. 그때 나는 아파서 전화도 받지 못하던 그녀에게 문자메세지를 남기느라 동기생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언젠가부터 아프기 시작했던 그녀는 다른 모든 순위보다 우선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면 입대를 해야 했던 나에게 그녀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무가치한 것들이어서 신경 쓸 겨를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더욱이 우울증 초기 증상까지 보이던 그녀를 놔두고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나에겐 재앙이었다.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의 죽음까지 돌보아 주었는데, 나는 그녀의 삶조차 보살펴 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깊어질수록, 나의 상대적인 삶은 피폐함조차 외면한 구더기같았다. 나는 그 동기생 녀석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내가 말을 들어주지 않자 동기생 녀석은 다른 동아리 학생에게 다가가 또 웩웩거렸다. 난 커트 코베인처럼 죽을 거야, 스물일곱 살에 말이지, 정말이야.
그랬던 동기생 녀석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시비가 붙어 싸우다 테이블 모서리에 뒤통수를 부딪혀 뇌진탕으로 죽었다는 농담 같은 얘기를, 나는 군대 제대 말년 휴가를 나와서 들었다. 그날 나의 제대 축하 기념 술자리에는 그때까지 나를 위해 기다려 주었던 나의 그녀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내 군 생활에 있어 그녀와의 면회는 축복이었고, 휴가는 달콤한 축제였다. 내가 제대할 무렵 그녀는 졸업반이었고, 이미 취직자리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그 날의 술값도 그녀가 대신 내주었다. 친구들은 환호했고, 동기생 녀석의 죽음은 술안주보다 못한 채 흘러가 버렸다. 그녀는 내가 복학한 후 얼마간의 내 뒷바라지도 해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의 구원자였다. 그러나 그려는 내가 입대하기 전보다 더욱 심하게, 그리고 더욱 자주 아팠고 우울증세도 더 심해져 있었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만큼 나와 그녀의 인생도 창백해 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차라리 영원히 모르는 것이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말이다.
그때 난 동기생 녀석의 죽음 소식을 듣고는 아직 일 년이나 남았는데, 라고 겨우 중얼거렸던 것 같다. 아직, 일 년이나, 남았는데.
언젠가부터 매년 새해가 되면, 난 내 속에 남아있는 찌꺼기들을 쏟아내기 위해 하루 종일 변기 속에 머리를 처박고 구역질을 했다. 새해에, 나는 아직 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고, 나는 죽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은 내게 매달려 무엇이라도 생각해내라고 버글거렸다. 나는 죽지 못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변기 속 폭포수들은 유연한 나선형 곡선을 기르며 내 오물들을 빨아 먹었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있으며 그것을 바라보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토해야 했다. 토하는 것은 새해를 맞이하는 나의 의식같았다. 내 속에 담긴 희망과 굴레의 찌꺼기들은 끝이 없었다. 때론 아직 토해내지 못한 오물을 버리기 위해 아무 여자의 질 속에 성기를 처박기도 했다. 여자들은 나의 오물을 질 속의 컴컴한 어둠으로 빨아들이고, 가끔은 입에다 담기도 했다. 여자들이 입에다 넣을 때에 나는, 절대로 그것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나오지 못하게 입을 틀어 막았다. 두 번 다시 태양을 볼 수 없게. 아니 그늘진 경계조차도. 여자들의 성기와 입은 내 오물들의 하수구였다. 그들의 비명을 무참히 나의 오물과 비벼졌고, 나는 겨우 안도했다.
그 날도 나는 새벽까지 구토를 한 후 부글거리는 속을 겨우 붙잡고 여자의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하얀 팬티를 벗긴 후 성기를 우겨넣었다. 여자는 가만히 있었고, 나는 더러운 오물을 입가에 그득 뭍인 해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은 추위도, 오르가즘도 아닌, 거세게 요동치며 나를 탄핵하려는 나의 희망때문이었다. 새해 첫 날의 희망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나는 나를 탄핵하려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나는 탄핵하려는 것들을 탄핵하는 것조차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희망 속에서 눈을 흘기며 나를 부정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조차 오로지 그것 뿐인 듯했다. 나는 이것들을 가지고 나를 절망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여자의 성기에 내 썩은 정액과 희망을 버무려 쏟아내었다.
한참 후, 나는 겨우 비틀거리며 일어나 입을 닦고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창밖에서 찬란하게 떠오르는 새해 첫 날 아침의 태양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태양은 날 것 그대로 드러난 내 온 몸을 비추더니 이내 오피스텔 방안으로 한가득 자신의 모습을 우겨넣어 주었다. 난 멍하니 햇살을 입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무력한 구토감을 느꼈다. 여자는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투명한 망사로 된 실크 팬티를 입으며 말했다.
무슨 말이 그래요? 당장 죽을 사람처럼. 그것도 새해 첫 날 아침부터.
성경 말씀이야. 모르면 가만있어.
타박하듯 내가 말하자 여자는 얼핏 놀란 듯 다시 내게 물었다.
아저씨, 교회 다녀요?
교회? 다녔지. 옛날에.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지난 삶 속에 파묻혀. 나는 몸을 돌려 여자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냥 어디서 들은 말이야.
그래도 뭔가 의미심장한 말 같은데요?
의미?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마도 여자 앞에서 웃는 것은 처음인 듯 싶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이든. 여자는 어머, 아저씨도 웃을 줄 알아요? 라며 신기해했다.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 것에도 의미를 두지 마. 의미를 만들지도 말고, 만들려고도 하지 말고, 생각지도 말아. 그런 것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생각하는게 좋아. 의미는 구덩이니까. 점점 깊어지는 무덤 속 구덩이처럼 의미가 커지면 커질수록 들어가야 하는 갱도만 깊어질 뿐이지. 일부러 의미를 만들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애써 파멸로 몰아가는 것은 멍청한 것들이나 하는 바보같은 짓이야. 의미의 노예 따윈 되지 않는게 좋아. 아무 것에도 의미를 두지마, 알겠어?
태양은 여전히 등 뒤를 긁어대며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 태양이 내 등 뒤에서 그대로 불에 타 잿덩이도 남기지 않고 소멸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태양은 빛으로 산화하며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나는 무력하게 빛을 온 몸으로 맞아야 했다. 내 방에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가득 들어찬 빛의 덩어리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그래, 알고 있어. 의미가 노예가 된 건 바로 나라는 것. 나는 모순 속에서 살고 있는 한 마리의 바퀴벌레, 여자에게 주절거린 말은 바로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었고, 지킬 수도 없는 말 위에서 버둥거리며 구덩이로 내몰리고 있던 것 또한 나였다. 그날 나는 희망에게 탄핵당하고 말았다. 나는 커튼을 쳤다. 순식간에 태양빛은 죽어버리고 내가 만든 새하얀 형광이 자리를 차지했다.
여자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침대 위에서 팬티만 걸친 채 벽에 기대있었다. 여자는 계속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잠시 후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 나 궁금한 거 있어요.
나는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본 다음, 테이블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후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나 왜 만나요?
입에 물고 있는 담배가 문득 쓰다고 느껴졌다. 여자는 그냥 궁금해서요, 사람만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아저씨가, 굳이 나는 만나주는 이유요, 라며 끌어당긴 무릎에 팔을 괴며 말했다. 구하려면 다른 여자들도 많을 텐데, 라고 여자는 나를 쳐다보았고, 뭐 딱히 좋아하는 티는 안 내지만, 이라며 입술을 쌜쭉거렸다. 눈 앞에 피워 오르던 연기는 장막이 되어 내 눈을 가리고 여자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느새 잠잠해진 구토감을 버려둔 채 다시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연기가 내 모든 어둠을 거쳐 심장까지, 아니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저편까지 몰려가는 느낌이었다.
노래.
희뿌연 연기를 한가득 천천히 내뿜은 후 내가 말했다. 연기는 나와 여자 사이에 가득 머물며 피어오른 물안개같았다. 연기는 나를 망망하지만 또렷한 곳으로 인도하는 듯 싶었다. 나는 끝내 연기에 몸을 맡겼다.
그날, 그러니까 여자를 처음 본 날. 나는 여자에게 노래를 하나 불러달라고 했었다.
듣고 싶으신 노래가 있으세요?
라고 여자는 물었고, 나는 대답없이 담배만 물었었다. 여자는 내 담배에 불을 붙여 주더니, 나의 말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런거 없어, 그냥 너 하고 싶은거해. 난 상관없으니까. 그냥 아무 노래나 듣고 싶은거 뿐이야. 크게 신경쓰지마. 의미도 두지 말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괜찮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여자는 뭘 불러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을 번호책을 뒤적거리더니 다시 나에게 말했다.
죄송한데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노래 불러도 돼요?
그래, 그렇게 해. 나도 그게 좋아. 너하고 싶은 노래 해.
나의 말에 여자는 번호책에서 어떤 곡을 찾더니 곧 노래를 입력했다. 나는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마이크를 가지러 앞으로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나의 눈은 못 볼 것을 본 사람마냥 휘둥그레졌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마저 놓칠뻔했다 순간 나는 노래를 부르려고 마이크를 잡고 룸의 한쪽 구석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던 여자의 얼굴에서, 참담하게도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야 했다.
난 이 노래가 참 좋아.
언제였던가. 그때 그녀는 우리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바닷가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었다. 나는 노래방 기계의 화면을 슬쩍 쳐다본 후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미 시작된 노래에서는 슬프고 애절한 피아노 반주의 전주부분이 흐르고 있었다.
야상곡? 자우림 노래 아냐?
응. 김윤아 노래.
왜 하필 이런 노래를. 너하고는 별로 안 어울리는데?
그래. 그때까지 나는 아직 그녀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상황. 그녀를 둘러싼 그녀의 세계를. 제대 후 졸업반이었던 나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까지 관계가 진전된 그녀였지만,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그녀가 왜 우울하고 슬퍼했는지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였다. 나는 다만 그녀가 자주 아파하고 우울증이 걸려 있는 것이, 그냥 피곤해서 몸이 안 좋은 줄로만 알았다. 잔물결이 고요하게 파동치며 흐르던, 바다가 내려다보이던 그 노래방의 창가 앞에서 그녀는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냥 우울하잖아. 내 몸을 모두 맡겨 버려도 좋을 만큼, 슬프기도 하고.
가늠할 수 없는 기억은 나의 추억을 무력하게 했다. 여자는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가운 술잔에 담긴 술이 파동을 치며 잔물결을 흘려내는 것 같았다. 그 잔물결 사이로 푸른 장막이 떠올라 나를 집어삼키는 기분이 온 몸을 휘감았다. 푸른 물결을 간직한 장마은 오염에 찌들어 검게 썩어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맞이한 눈꽃. 흐드러진 긴 생머리. 하얀 운동화. 조금은 바랜 듯한 푸른색 원피스. 바닥에 나동그라진, 머리를 묶을 때 쓰던 분홍빛 스카프. 터질 듯 도드라진 가슴. 그리고 눈꽃 속에서 태어난 오물들. 오물 사이에 핀 푸르른 청초. 침대 아래에 널린 검은 팬티. 썩은 채 말라버린 악마의 씨앗. 침대에 묶여 있던 노란 스카프. 새하얀 천사의 날개. 새하얀 눈동자. 그들의 성가. 번들거리는 붉은 입술. 그리고. 그리고.
그만해.
나는 나직이 말했다. 단호함이 나직함을 짓밟고 있었지만, 여자는 단호함을 못 본듯 했다. 여자는 계속 불렀다.
그만해라.
나의 단호는 다시 한 번 여자를 향해 달려갔다. 여자는 나의 의지를 알지 못했고, 나는 다시 그만하라고 했지, 라고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그때서야 여자는 예? 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벌떡 일어서 걸어가 여자의 마이크를 확 낚아채었다.
내가, 그만, 하라고 했지.
초조한 분노에 갖혀버린 말은 겨우 끊어진 채로 여자에게로 질러갔다. 나는 여자의 몸에 간신히 붙어있던 란제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여자의 몸. 나는 란제리를 찢어 발기듯 거칠게 내려붙였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나는 여자의 목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여자의 입에 내 혀를 우겨넣었다. 여자는 가만히 있었다. 모든 체념이 여자를 휘감은 채 나에게 기어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체념. 그래, 어쩌면 그것은 이미 여자를 정복하고 있던 체념인지도 몰랐다. 여자 자신도 가늠할 수 없었던 희망을 버리고 달콤한 마약처럼 다가온 절망에 몸을 맡겨버린지도. 나중에, 여자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나 역시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것을 듣는 순간에도. 한손으로 여자의 목을 움켜쥐고, 다른 한손으로는 여자의 속옷을 벗겨 내리던 나는 결국, 감당할 수 없었던 분노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천장에 걸린 조명등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목이 졸린 여자는 노래를 잃어버렸다. 노래를 잃어버린 곡은 반주만이 쓸쓸히 흘러나왔고, 재떨이의 피다만 담배는 연기를 흩뜨려 올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가서 술이나 더 가져오라고 해.
나는 말했다. 여자는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더니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와 있던 자신의 속옷을 끌어올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날 나는 술에 만신창이가 되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오직 그것뿐인 듯한 사람처럼 여자와 섹스를 했다. 끝도 없이 공허한 것들은 전혀 채워지지 않았다. 여자 역시 술에 취해 엉망인 채로 나와 함께 있었다. 그날 여자가 나에게 무슨 얘기를 했고, 내가 여자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가 나의 눈에 가만히 입술을 대고 키스를 하며 뭔가를 닦아준 후 한참동안 나를 안고 있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여자를 보냈다. 마치 구원을 내보내야 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후 나는 그 노래와 그녀가 겹쳐보였던 여자의 얼굴에 절망처럼 구속되어 계속 여자만 찾게 되었다. 여자가 노래를 하던 그 날, 나는 그 어떤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 날에도.
노래? 무슨 노래요?
여자의 눈이 동그래지며 나를 쳐다보았다. 휘둥그레진 여자의 눈은 나의 대답을 되물었지만, 나는 이미 구덩이에 몸을 던진 의미의 노예였다. 나는 피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다. 바닥에 널린 여자의 슬립이 보였다. 그 옆에 벗어놓은, 아니 벗겨진 스타킹이 나뒹굴고 있었다. 주인을 잃은 치마는 침대 아래편에 던져진 채로 구겨져 있었다. 브래지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팬티만 입은 채 이불을 감싸 안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의자에서 일어서 여자에게 다가가 그 입술에 키스를 했다. 따뜻함이 아득하게 밀려왔다.
여행 갈래?
얼마 후, 입을 뗀 나는 새카만 여명같은 여자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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