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쉬, 조금 더 진한 그레이 -9부-
우리, 여행 갈래?
시간 속에 함몰되어 지나버린 아주 무서운 힘들은 여전히 나를 사슬에 묶어두고 있었다. 기억의 그림은 현실의 모형처럼 위장한 채 슬그머니 나와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 관계들은 힘들었다. 사태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었지만, 나는 한 사건의 존립 또는 비존립으로부터 다른 한 사태의 결과를 추론할 수 없었다. 기억은 이미 전체적인 현실이 되어 나의 세계를 신의 시선처럼 정복해버렸다.
제대를 하고, 복학한 그 이듬해, 교환학생 자격으로 1년동안 외국에 나가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유학을 다녀와 취직을 하게되면 정식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결혼을 하자는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녀는 나의 약속에 손가락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어느새 유학을 마친 나는 교수들과 선배들의 추천과 권유로 중견 건설회사 자금담당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일은 바빴고, 바쁜 틈바구니 사이에서 나는 그녀의 일상을 다독여 주었다. 미흡했지만, 최선이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 나는 그녀에게 여행, 이라는 낯설고도 가까운 단어를 꺼내보였다. 그즈음의 그녀는 밥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할정도로 피폐해져 있었고, 우울증은 극을 달리고 있었다. 병원에 가자는 나의 말은 그녀에게 요원했고, 나는 그녀의 장벽을 쉽사리 넘지 못했다. 나는 병원, 이라는 단어 앞에서 항상 무참했다. 그녀는 괜찮다가도 어느 시점을 경계로 심해지고는 했다. 시점. 그래, 그녀는 어떤 특정한 시점을 경계로 주기적으로 아팠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은 지옥도보다 지독한 파멸의 전주곡이었다.
승호 선배 알지, 오빠?
어느 날 그녀는 병원에 가자고 물러서지 않은채 말을 이어가던 나에게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응, 알아
그 선배. 전문의 되었잖아. 대학병원에 말이야. 승호선배가 자기 병원에서 약 지어주고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마.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안도했다. 안도는 기약이 없었다.
그래, 알았어. 대신 계속 아프면 나랑 같이 꼭 큰 병원 같이 가봐야해, 알았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침대 위에 걸터앉았고, 걸터 앉으며 침대 머리맡에 있는 어떤 약병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 약이니? 네가 먹는다는거?
하얀 약병에는 파란색의 캡슐이 들어있었다. 그래. 그녀의 말에 나는 약병을 들어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여행 갈래?
창밖은 푸르렀고, 내가 앉아있던 침대에서는 그녀의 향기와 미약한 약 냄새가 혼재했다. 그녀는 여행을 가자는 나의 말에 희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여행?
여행요?
시커멓게 뻗은 적막한 도로 속에서 어둠을 죽이며 두 개의 빛이 질주하고 있었다. 빛은 교배하며 내 앞길을 열어주었지만 나를 암흑에서 구해주지는 못했다. 검은 어둠을 간신히 뚫고 질주하는 나의 시선은 깊은 자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썩은 정액들의 선두에 서 있는 것처럼 노곤했다. 어둠의 식도는 시커먼 점처럼 다가와 면이 되었고, 면은 다시 공간이 되어 여자와 내가 타고 있는 차를 집어 삼켰다. 나는 겨우 눈을 들어 빠르게 뒤로 물러서는 하얀 차선을 견뎌내고 있었다. 길고 긴 도로는 나의 삶 같았고, 어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길바닥은 내팽개쳐진 나의 인생같았다. 지나온 길은 아득했고, 가야할 길 또한 막연했는데, 나는 가로수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나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안도가 슬며시 엄습해왔다. 라디오에서는 나른한 목소리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But it"s only when I sleep, See you in my dreams, Got me spinning round and round Turning upside down. 노래는 나를 더욱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나른함으로 몰아붙였고, 그녀와 여자가 비벼지는 알 수 없는 지난 시간의 간격들을 안개처럼 끌고 왔다.
이 노래를 부른 어떤 여배우가 자살을 했는데.
언젠가 이 소식을 전해주던 나에게 그녀는 공허한 눈빛으로 그래, 그 기분 알 것 같아, 라고 중얼거렸었다. 나는 참혹한 기억 앞에 눈을 비벼 뜨며 어둠을 바라보았다. 길게 뻗은 어둠은 그대로였고,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아니. 아니.
여행 갈래? 라는 나의 물음에 여자는 휘둥그레진 눈을 더욱 크게 떠 되물었다. 여행요? 믿기지 않는 누군가의 죽음을 들었을 때처럼 여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는 나야 좋지만, 아저씨 괜찮겠어요? 나랑 가도? 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 난 괜찮아, 오히려 내가 고맙지, 라고 대답했다. 그때 여자가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것은 왜 였을까. 여자는 무엇을 알고 있었고, 또 무엇을 걱정했던 것일까.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여자에게 묻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속에 많은 것을 스스로에게 물었었다. 내가 무슨 말을 건넨걸까. 여자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 날이었을까. 궁금한 것들이 알을 깨고 치달으려 했지만, 진출하지 못하게 통로를 막아버렸다. 나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괜찮다고 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 어떤 것도. 내가 괜찮다고 하자, 여자는 투명한 망사로 된 하얀 실크팬티만 걸친 채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 커피 마셔요, 라고 하더니 싱크대로 걸어갔다. 잠시 후, 삐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전기포트에서 울렸다. 창밖으로는 매연에 찌든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먼지를 뒤집어쓴 바퀴벌레가 날아다니는 재앙 같았다. 나는 그것을 보며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니야, 상관없어, 잘 하는 것도 잘못 하는 것도 아니야. 어차피 남은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소멸하는 거야. 재난에 빠져 허우적대는 미미한 존재들처럼. 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은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곳을 벗어나면 저 시커먼 존재들도 나에게서 떨어지겠지. 잠시,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천장에 달린 히터에서 뜨거운 바람이 밀려나왔다. 창가에는 눈물같은 이슬이 맺혀있었다.
근데, 새해 아침인데 남아있는 방이 있을까요?
방?
여자는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는 커피를 저었다. 그녀의 말과 행동에는 미세한 흥분이 걸터앉고 있었다. 난 걱정마, 돈만 있으면 다 돼, 넌 그런 거 걱정하지만, 걱정은 내가 해, 라고 말하며 여자가 건네주는 커피를 건네받았다. 커피는 쓰고, 달았다. 여자는 그럼 저는 뭘 준비하면 될까요? 라며 조금은 상기된 말투로 얘기했다. 난 고개를 들어 여자를 쳐다보았고, 여자는 나의 시선을 아슬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테이블에 놓아두고 여자에게로 다가가, 여자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포갰다. 여자의 어깨가 순간 파르르 떨렸다. 그 떨림을, 나는 애써 무시했다. 세상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감정들을 나는 무참히 박살내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다. 나는 여자의 떨림을 무시했다. 너를 준비해줘, 아무것도 필요없는 너 자신만을. 잠시 후, 창가에 맺혀있던 이슬이 바닥으로 떨어져 고였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방 한 마리가 차의 앞유리에 처박힌 후 터져버렸다. 터져버린 점액은 바람에 맞부딪혀 호수에 던진 돌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더 이상 갈 곳 없이 끝에 도달한 나방의 점액을 나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와이퍼는 푸른 워셔액을 하얀 정액처럼 쏟아내었다. 하얀 거품은 나방의 시체조각과 점액을 뒤덮어버리며 넝마가 되어 앞유리를 치덕거렸다. 와이퍼의 울음 없는 소리가 마치 죽어가는 시체를 기다리는 독수리의 기다림처럼 들려왔다. 와이퍼는 이내 거품과 나방의 몸체를 조각조각 분해하더니 그것들을 가늠할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던져버렸다. 어느 순간, 나방과 점액과 거품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앞 유리의 구석 경계로 밀려나버린 먼지와 온갖 오물들은 내가 손댈 수 없는 것들처럼 완고하게 들러붙어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 와요?
내 성기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여자가 잠시 고개를 들더니 내게 말했다. 나는 핸들을 왼손으로 바꿔 잡은 뒤, 자유를 찾은 오른손으로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차 바닥에는 휴지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엉겨붙은 음모와 정액이 누렇게 변색되어 휴지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던 오른손을 작게 누르며 대답했다.
아니.
여자가 나의 성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나는 입을 벌린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저씨, 나 오줌 마려워요.
국도로 갓 접어든 차는 이내 목적지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목표는 명확했고, 나는 그 명확한 목적지가 두려웠다. 두려움은 가끔 깜빡이도 켜지 않고 내 앞에 불쑥 끼어들어오곤 했는데, 난 항상 급정거를 하며 쏠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어둠을 토해내듯 치달았다. 어둠은 내 앞에서 소멸해갔고, 다시 나의 뒤를 빠르게 뒤쫓아왔다. 늦은 시간, 새해 첫날의 국도를 달리는 차는 거의 없었고, 오직 나와 여자만이 그 속에서 유일한 듯싶었다. 국도는 버림받은 구세대처럼 무력하고 무가치해 보였다. 나는 무력한 것 위를 달리는 또 다른 무가치였다. 창밖으로 어둠이 빠르게 지나갔다. 여자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채, 다리를 꼬았다. 미니스커트가 허벅지 안쪽까지 말려 올라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창문은 뜨거운 히터와 반응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두운 창문에 반사된 여자의 옆모습이 낯설게 보였다.
조금만 참아.
나는 얼마 후 갓길에 차를 정차시켰다. 정리되지 않은 국도 도로변은 무성한 풀들이 성기의 음모처럼 제멋대로 나있었다. 나는 어두운 자궁속으로 들어가는 성기의 무모함처럼 국도 기슭에 차 앞대가리를 밀어 넣었다. 곧 속도가 생명을 잃었다. 부릉거리는 엔진만이 고요한 암흑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빨리 해결해.
난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여자가 사라진 쪽의 어둠을 잠시 쳐다본 후 밖으로 나갔다. 사각거리는 풀밭의 결이 느껴졌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나의 온 몸을 부숴버릴 듯 밀려왔다. 나는 무방비했다. 적막한 공간에 엔진소리만이 애처롭게 들려왔다. 그것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한 인간의 비명소리 같았다. 작은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은 절대적 심연이었다. 라이터를 켜자 암흑 속에서 낯선 남자의 손이 보였다. 나는 불을 켠 채 라이터를 들고 그 손을 쳐다보았다. 너는 구원도 없이 나를 따라다니는구나. 나는 영원히 널 쫓아다닐거야. 네가 죽을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영원히. 낯선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를 끄자 낯선 남자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후, 하고 나는 담배 연기를 깊숙한 폐의 안쪽으로부터 끌어내린 후, 다시 토해냈다. 나는 어둠의 구석에서 배설하고 있는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여자는 가까운 곳에서 더 이상 걷어올릴 것도 없어보이는 미니스커트를 올린 채 자신의 배설물을 푸른 잡초밭에 쏟아내고 있었다. 익명의 잡초밭은 그녀의 심장에서 나오는 체액들을 받아먹고 있었다. 여자의 보지를 향해 뻗은 잡초들이 남자의 자지같이 뻗어있었다. 그 광경은 하나의 여자를 향해 달려드는 남자들의 성기 같았다. 곧 여자는 볼일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치마를 올린 후 속옷을 끌어올리려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돌아봐.
여자는 나의 말에 응?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찰칵. 나는 아직 추켜올리지 못한 속옷을 무릎에 걸치고 있는 한 여자의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치마와 속옷은 여자의 성기와 음모를 날것 그대로 내 핸드폰에 담겨주었다. 찰칵. 나는 다시 핸드폰으로 여자의 모습을 찍었다. 여자가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요의尿意를 느꼈다.
이리와봐.
나는 바지의 허리띠를 풀었고, 여자는 내게로 다가왔다. 여자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여자의 입에 페니스를 물린 후 나의 배설물들을 쏟아내었다. 내 몸안의 모든 수액을 배출할 것처럼. 오줌이 여자의 입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후. 꿀꺽, 하는 힘겨운 소리가 아래로부터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는 안도했다. 한참 후, 어둠에 묻혀있던 차 한 대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넌 꿈이 뭐니?
시커먼 어둠은 끝도 없는 우주같았다. 여자와 나는 한계조차 불분명한 우주 공간을 떠도는 미아처럼 암흑 속을 부유해야 했다. 공기조차 희미한 캡슐 속에서 영원히 떠돌아야 하는 죽음의 관처럼. 언젠가 영화에서 죽은 시체를 작은 캡슐에 넣어 우주선 밖으로 쏘아 보내던 장면을 떠올리던 나는, 며칠 전 친구가 나에게 물었던 질문이 생각나 여자에게 물었다.
꿈이요?
창밖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여자는 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어느새 차는 자갈이 깔린 시골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바퀴에 짖이겨지는 자갈 소리가 뼈를 갉아대는 소리 같았다. 나는 헤드라이트를 상향으로 조절했다. 머리 위로 목적지와 나의 간격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빠르게 지나갔다.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 달려오던 차가 경적을 울렸다. 차는 다급하게 사라졌고, 이내 나에게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차 안에 흐르고 있던 음악이 Creep으로 바뀌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여자가 말했다.
그런 거 없어요.
차는 곧 호텔에 도착했다. 어둠에 잠긴 바닷가가 철썩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여행 갈래?
시간 속에 함몰되어 지나버린 아주 무서운 힘들은 여전히 나를 사슬에 묶어두고 있었다. 기억의 그림은 현실의 모형처럼 위장한 채 슬그머니 나와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 관계들은 힘들었다. 사태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었지만, 나는 한 사건의 존립 또는 비존립으로부터 다른 한 사태의 결과를 추론할 수 없었다. 기억은 이미 전체적인 현실이 되어 나의 세계를 신의 시선처럼 정복해버렸다.
제대를 하고, 복학한 그 이듬해, 교환학생 자격으로 1년동안 외국에 나가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유학을 다녀와 취직을 하게되면 정식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결혼을 하자는 프로포즈를 하였다. 그녀는 나의 약속에 손가락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어느새 유학을 마친 나는 교수들과 선배들의 추천과 권유로 중견 건설회사 자금담당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일은 바빴고, 바쁜 틈바구니 사이에서 나는 그녀의 일상을 다독여 주었다. 미흡했지만, 최선이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 나는 그녀에게 여행, 이라는 낯설고도 가까운 단어를 꺼내보였다. 그즈음의 그녀는 밥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할정도로 피폐해져 있었고, 우울증은 극을 달리고 있었다. 병원에 가자는 나의 말은 그녀에게 요원했고, 나는 그녀의 장벽을 쉽사리 넘지 못했다. 나는 병원, 이라는 단어 앞에서 항상 무참했다. 그녀는 괜찮다가도 어느 시점을 경계로 심해지고는 했다. 시점. 그래, 그녀는 어떤 특정한 시점을 경계로 주기적으로 아팠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은 지옥도보다 지독한 파멸의 전주곡이었다.
승호 선배 알지, 오빠?
어느 날 그녀는 병원에 가자고 물러서지 않은채 말을 이어가던 나에게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응, 알아
그 선배. 전문의 되었잖아. 대학병원에 말이야. 승호선배가 자기 병원에서 약 지어주고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마.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안도했다. 안도는 기약이 없었다.
그래, 알았어. 대신 계속 아프면 나랑 같이 꼭 큰 병원 같이 가봐야해, 알았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침대 위에 걸터앉았고, 걸터 앉으며 침대 머리맡에 있는 어떤 약병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 약이니? 네가 먹는다는거?
하얀 약병에는 파란색의 캡슐이 들어있었다. 그래. 그녀의 말에 나는 약병을 들어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여행 갈래?
창밖은 푸르렀고, 내가 앉아있던 침대에서는 그녀의 향기와 미약한 약 냄새가 혼재했다. 그녀는 여행을 가자는 나의 말에 희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여행?
여행요?
시커멓게 뻗은 적막한 도로 속에서 어둠을 죽이며 두 개의 빛이 질주하고 있었다. 빛은 교배하며 내 앞길을 열어주었지만 나를 암흑에서 구해주지는 못했다. 검은 어둠을 간신히 뚫고 질주하는 나의 시선은 깊은 자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썩은 정액들의 선두에 서 있는 것처럼 노곤했다. 어둠의 식도는 시커먼 점처럼 다가와 면이 되었고, 면은 다시 공간이 되어 여자와 내가 타고 있는 차를 집어 삼켰다. 나는 겨우 눈을 들어 빠르게 뒤로 물러서는 하얀 차선을 견뎌내고 있었다. 길고 긴 도로는 나의 삶 같았고, 어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길바닥은 내팽개쳐진 나의 인생같았다. 지나온 길은 아득했고, 가야할 길 또한 막연했는데, 나는 가로수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나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안도가 슬며시 엄습해왔다. 라디오에서는 나른한 목소리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But it"s only when I sleep, See you in my dreams, Got me spinning round and round Turning upside down. 노래는 나를 더욱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나른함으로 몰아붙였고, 그녀와 여자가 비벼지는 알 수 없는 지난 시간의 간격들을 안개처럼 끌고 왔다.
이 노래를 부른 어떤 여배우가 자살을 했는데.
언젠가 이 소식을 전해주던 나에게 그녀는 공허한 눈빛으로 그래, 그 기분 알 것 같아, 라고 중얼거렸었다. 나는 참혹한 기억 앞에 눈을 비벼 뜨며 어둠을 바라보았다. 길게 뻗은 어둠은 그대로였고,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아니. 아니.
여행 갈래? 라는 나의 물음에 여자는 휘둥그레진 눈을 더욱 크게 떠 되물었다. 여행요? 믿기지 않는 누군가의 죽음을 들었을 때처럼 여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는 나야 좋지만, 아저씨 괜찮겠어요? 나랑 가도? 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 난 괜찮아, 오히려 내가 고맙지, 라고 대답했다. 그때 여자가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것은 왜 였을까. 여자는 무엇을 알고 있었고, 또 무엇을 걱정했던 것일까.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여자에게 묻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속에 많은 것을 스스로에게 물었었다. 내가 무슨 말을 건넨걸까. 여자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 날이었을까. 궁금한 것들이 알을 깨고 치달으려 했지만, 진출하지 못하게 통로를 막아버렸다. 나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괜찮다고 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 어떤 것도. 내가 괜찮다고 하자, 여자는 투명한 망사로 된 하얀 실크팬티만 걸친 채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우리 커피 마셔요, 라고 하더니 싱크대로 걸어갔다. 잠시 후, 삐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전기포트에서 울렸다. 창밖으로는 매연에 찌든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먼지를 뒤집어쓴 바퀴벌레가 날아다니는 재앙 같았다. 나는 그것을 보며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니야, 상관없어, 잘 하는 것도 잘못 하는 것도 아니야. 어차피 남은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소멸하는 거야. 재난에 빠져 허우적대는 미미한 존재들처럼. 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은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곳을 벗어나면 저 시커먼 존재들도 나에게서 떨어지겠지. 잠시,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천장에 달린 히터에서 뜨거운 바람이 밀려나왔다. 창가에는 눈물같은 이슬이 맺혀있었다.
근데, 새해 아침인데 남아있는 방이 있을까요?
방?
여자는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는 커피를 저었다. 그녀의 말과 행동에는 미세한 흥분이 걸터앉고 있었다. 난 걱정마, 돈만 있으면 다 돼, 넌 그런 거 걱정하지만, 걱정은 내가 해, 라고 말하며 여자가 건네주는 커피를 건네받았다. 커피는 쓰고, 달았다. 여자는 그럼 저는 뭘 준비하면 될까요? 라며 조금은 상기된 말투로 얘기했다. 난 고개를 들어 여자를 쳐다보았고, 여자는 나의 시선을 아슬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테이블에 놓아두고 여자에게로 다가가, 여자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포갰다. 여자의 어깨가 순간 파르르 떨렸다. 그 떨림을, 나는 애써 무시했다. 세상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감정들을 나는 무참히 박살내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다. 나는 여자의 떨림을 무시했다. 너를 준비해줘, 아무것도 필요없는 너 자신만을. 잠시 후, 창가에 맺혀있던 이슬이 바닥으로 떨어져 고였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방 한 마리가 차의 앞유리에 처박힌 후 터져버렸다. 터져버린 점액은 바람에 맞부딪혀 호수에 던진 돌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더 이상 갈 곳 없이 끝에 도달한 나방의 점액을 나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와이퍼는 푸른 워셔액을 하얀 정액처럼 쏟아내었다. 하얀 거품은 나방의 시체조각과 점액을 뒤덮어버리며 넝마가 되어 앞유리를 치덕거렸다. 와이퍼의 울음 없는 소리가 마치 죽어가는 시체를 기다리는 독수리의 기다림처럼 들려왔다. 와이퍼는 이내 거품과 나방의 몸체를 조각조각 분해하더니 그것들을 가늠할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던져버렸다. 어느 순간, 나방과 점액과 거품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앞 유리의 구석 경계로 밀려나버린 먼지와 온갖 오물들은 내가 손댈 수 없는 것들처럼 완고하게 들러붙어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 와요?
내 성기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여자가 잠시 고개를 들더니 내게 말했다. 나는 핸들을 왼손으로 바꿔 잡은 뒤, 자유를 찾은 오른손으로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차 바닥에는 휴지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엉겨붙은 음모와 정액이 누렇게 변색되어 휴지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던 오른손을 작게 누르며 대답했다.
아니.
여자가 나의 성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나는 입을 벌린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저씨, 나 오줌 마려워요.
국도로 갓 접어든 차는 이내 목적지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목표는 명확했고, 나는 그 명확한 목적지가 두려웠다. 두려움은 가끔 깜빡이도 켜지 않고 내 앞에 불쑥 끼어들어오곤 했는데, 난 항상 급정거를 하며 쏠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어둠을 토해내듯 치달았다. 어둠은 내 앞에서 소멸해갔고, 다시 나의 뒤를 빠르게 뒤쫓아왔다. 늦은 시간, 새해 첫날의 국도를 달리는 차는 거의 없었고, 오직 나와 여자만이 그 속에서 유일한 듯싶었다. 국도는 버림받은 구세대처럼 무력하고 무가치해 보였다. 나는 무력한 것 위를 달리는 또 다른 무가치였다. 창밖으로 어둠이 빠르게 지나갔다. 여자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채, 다리를 꼬았다. 미니스커트가 허벅지 안쪽까지 말려 올라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창문은 뜨거운 히터와 반응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두운 창문에 반사된 여자의 옆모습이 낯설게 보였다.
조금만 참아.
나는 얼마 후 갓길에 차를 정차시켰다. 정리되지 않은 국도 도로변은 무성한 풀들이 성기의 음모처럼 제멋대로 나있었다. 나는 어두운 자궁속으로 들어가는 성기의 무모함처럼 국도 기슭에 차 앞대가리를 밀어 넣었다. 곧 속도가 생명을 잃었다. 부릉거리는 엔진만이 고요한 암흑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빨리 해결해.
난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여자가 사라진 쪽의 어둠을 잠시 쳐다본 후 밖으로 나갔다. 사각거리는 풀밭의 결이 느껴졌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나의 온 몸을 부숴버릴 듯 밀려왔다. 나는 무방비했다. 적막한 공간에 엔진소리만이 애처롭게 들려왔다. 그것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한 인간의 비명소리 같았다. 작은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은 절대적 심연이었다. 라이터를 켜자 암흑 속에서 낯선 남자의 손이 보였다. 나는 불을 켠 채 라이터를 들고 그 손을 쳐다보았다. 너는 구원도 없이 나를 따라다니는구나. 나는 영원히 널 쫓아다닐거야. 네가 죽을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영원히. 낯선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를 끄자 낯선 남자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후, 하고 나는 담배 연기를 깊숙한 폐의 안쪽으로부터 끌어내린 후, 다시 토해냈다. 나는 어둠의 구석에서 배설하고 있는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여자는 가까운 곳에서 더 이상 걷어올릴 것도 없어보이는 미니스커트를 올린 채 자신의 배설물을 푸른 잡초밭에 쏟아내고 있었다. 익명의 잡초밭은 그녀의 심장에서 나오는 체액들을 받아먹고 있었다. 여자의 보지를 향해 뻗은 잡초들이 남자의 자지같이 뻗어있었다. 그 광경은 하나의 여자를 향해 달려드는 남자들의 성기 같았다. 곧 여자는 볼일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치마를 올린 후 속옷을 끌어올리려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돌아봐.
여자는 나의 말에 응?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찰칵. 나는 아직 추켜올리지 못한 속옷을 무릎에 걸치고 있는 한 여자의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치마와 속옷은 여자의 성기와 음모를 날것 그대로 내 핸드폰에 담겨주었다. 찰칵. 나는 다시 핸드폰으로 여자의 모습을 찍었다. 여자가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요의尿意를 느꼈다.
이리와봐.
나는 바지의 허리띠를 풀었고, 여자는 내게로 다가왔다. 여자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여자의 입에 페니스를 물린 후 나의 배설물들을 쏟아내었다. 내 몸안의 모든 수액을 배출할 것처럼. 오줌이 여자의 입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후. 꿀꺽, 하는 힘겨운 소리가 아래로부터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는 안도했다. 한참 후, 어둠에 묻혀있던 차 한 대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넌 꿈이 뭐니?
시커먼 어둠은 끝도 없는 우주같았다. 여자와 나는 한계조차 불분명한 우주 공간을 떠도는 미아처럼 암흑 속을 부유해야 했다. 공기조차 희미한 캡슐 속에서 영원히 떠돌아야 하는 죽음의 관처럼. 언젠가 영화에서 죽은 시체를 작은 캡슐에 넣어 우주선 밖으로 쏘아 보내던 장면을 떠올리던 나는, 며칠 전 친구가 나에게 물었던 질문이 생각나 여자에게 물었다.
꿈이요?
창밖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여자는 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어느새 차는 자갈이 깔린 시골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바퀴에 짖이겨지는 자갈 소리가 뼈를 갉아대는 소리 같았다. 나는 헤드라이트를 상향으로 조절했다. 머리 위로 목적지와 나의 간격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빠르게 지나갔다.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 달려오던 차가 경적을 울렸다. 차는 다급하게 사라졌고, 이내 나에게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차 안에 흐르고 있던 음악이 Creep으로 바뀌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여자가 말했다.
그런 거 없어요.
차는 곧 호텔에 도착했다. 어둠에 잠긴 바닷가가 철썩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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