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쉬, 조금 더 진한 그레이 -11부-
내 말 듣고 있니? 릴리가 되고 싶다는 너의 꿈은 이제 사라져버렸어. 결과적으로 나는 류가 아니었던 거야. 그래. 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기억나니? 우리가 함께 여행가기로 했던 그때. 넌 정말 행복해 보였고, 또 그만큼 아파보였지. 그 사이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 그랬지.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여행을 좀 더 근사하게 다녀오는 것 뿐이었어. 그래서 난 국내를 벗어나기로 했지. 사람이란, 아무래도 바다 건너에서 조금 더 긴장을 완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래,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해외로 나가려고 했지. 유럽으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와 독일을 건너, 스페인과 이탈리아까지. 난 로마에서 너를 위한, 나만의 미사를 드리고도 싶었어. 모든 축복이 너에게 가득하기 바랬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계획이 그 뜻대로 이루어졌다면, 절망이란 단어가 생겨났을까? 우리도 마찬가지였지.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던 거야. 기억나지? 우리 회사에 재난에 이르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로인해 나의 휴가가 끝장나 버렸던거. 그 기간동안 넌 혼자였고, 난 회사에 구속되어버렸지. 보름이었던가. 회사가 겨우 정상화의 언저리에 걸터앉았을때 난 몇날며칠의 밤샘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넌 절망의 가장자리에서 날 쳐다보고 있었지. 이미 여행은 끝장났었지. 그 서로의 끝장에서 넌 말했지.
난 괜찮아.
그래. 괜찮다고, 넌 말했지. 무엇이 괜찮았는지 지금의 난 모르겠어. 여행을 갈 수 없었던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아픈 위로의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잠시나마 내가 너를 방치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시간들의 공백 속에서 지내온 너의 지옥을 향해 던진 말이었니? 너는 지옥의 위로를 받았던거야.
기억해? 우리, 그래도 제주도로 떠났었잖아. 사실 그마저도 며칠을 미뤄야만 했지. 그 사이에 넌 더욱 우울감에 시달렸고, 난 시달리던 너의 안쪽에서 무너져야 했지. 난 너에게 동아리 모임을 권했었지. 글사랑. 왜 그랬을까? 아마 그것이 우리가 겪은 절망의 시발점이었을거야. 악몽의 시간표는 그때부터 착실히 우리에게 지옥의 칸을 메워주었던거지. 난 병원을 가라고 줄기차게 말했었지. 넌 차라리 동아리 활동을 하겠다고 했어. 난 그 말의 의미를 몰랐었지. 지금은 알아. 넌 병원이 싫다고 했어. 왜 그랬니. 아니, 지금의 나는 알지. 너무도, 잘. 그때 난, 차라리 너의 회복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보라고, 동아리 모임이라도 가보라고 했지. 난 그것을 구원이라 믿고 싶었어. 그래, 구원은 구원이었지. 너만의 구원. 너는 그렇게 말하는 나에게 마지막 말인듯 말했지.
괜찮아. 난 여행가고 싶어. 동아리도 아니고 병원도 아닌 여행. 자기와 함께가는 여행.
한참 후, 우린 겨우 떠났어.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자고. 그냥 떠나버리자고. 그렇게 우린 제주도로 향했지. 모든 것을 외면한채. 마치 스틱스 강변에 서있는 사람들을 모두 무시하는 것처럼. 우리를 환영하는 그들을 비참하고도 매몰차게 외면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게 끝장나있었어.
내 말 듣고 있니?
그때부터 모든 것은 끝장나 있었다. 그 끝장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이미 절망의 시간표는 그전부터 작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때의 나는 이미 절망의 열차에 올라탄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도 지나고 나서야 알았지. 나는 악몽에 무임승차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있던 진실은 오직 나만을 외면하고 있었고, 먼 곳에 있건 허상만이 나를 유린하고 있었다. 나는 희망으로 내벽을 덧칠한 절망의 우리에 갇혀있던 맹인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더듬지 못했던, 맹인이었다. 나는 그때 어떻게 해야 했던 것일까? 정답은 과연 존재했던 것이었던가? 그것을 알수 있는 누군가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녀는 나와의 여행에서 자신도 알 수 없는 구원을 바랐던 걸까? 그것조차, 그 이상의 그 무엇도 지금에 와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진실은 무엇이었는지, 진실을 압도할 수 있는 선택이란 과연 존재했던 것인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여자와 바닷가를 걸었다. 바다는 갯강구처럼 기어와 나의 발을 집어삼키려 했고, 나의 몸은 모래에 파묻히지 않으며 간신히 걸음을 유지했다. 바다의 경계는 한없이 멀었고, 나는 그 경계의 끝자락에서 겨우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나의 몸체는 바닷가를 걷고 있었지만 나의 생각은 걷지못하고 저 먼곳에 뒤쳐져 있었다. 나의 본질은 실존에 앞서지 못했다. 이 순간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나라는 명확한 사실이 아니라, 전혀 존재하지 않는 기억의 부산물이었다. 나는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듯 했다. 그것을 제외한 그 어떤것도 나에게 필요하지 않아보였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아무런 대답도 구하지 못했다. 야상곡이란 단어를 떠올린 순간부터 나의 육체는 이미 무기력에 좌초된 조난선이었다. 나는 나의 판단으로 나를 만들어가지 못하는 부존의 주체였다. 패배는 명확했다. 야상곡이란 곡은 절망을 배달하는 전령사처럼 나를 기억에 가둔채 현실에 머물게 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세요?
바Bar에서 쇼팽의 야상곡에 매립된채 기억에만 잠겨있던 나를 여자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여자의 말에 갑자기 잡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서둘러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운전을 오래해서 그런지 좀 피곤한가봐. 바다보고 싶다고 했지? 가자, 지금. 바다 보러.
지금요?
그래, 지금.
이 음악 더 듣고 싶은데.
지금 가. 지금 가고 싶어.
알았어요.
나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여자는 아직 채 끝나지 않은 피아노 연주를 아쉬운 듯 쳐다보았다. 여자는 곧 일어서 나를 따라 나왔다.
나는 여자와 바닷가를 걸으면서도 생각은 온통 그녀에게 다가가 있었다. 기억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저편에 머물러 있었지만, 나는 끈덕지게 그것들을 불러냈다. 그래, 결국 그녀를 부른 것은 나였다. 바다는 여전히 육지의 경계에서 출렁거리며 나를 집어삼키려 쫓아왔고, 나는 애써 그것들을 외면한 채 아무것에도 잡아먹히지 않겠다는 듯 걸음만 재촉했다. 내가 멍하니 걸음만 걷자 여자가 내 앞으로 살짝 뛰쳐나오며 말했다.
아저씨. 근데 아저씨는 소원이 뭐예요?
자기는 소원이 뭐야? 나는 여자의 말에서 참담하게도 제주도 어느 바닷가를 함께 걷고 있던 한 남자와 그 남자가 자신의 심장만큼이나 사랑하던 한 여자를 떠올렸다. 남자에게 여행은 축복이었고, 밀려진 일따위는 고려할 가치도 없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때의 그 여자는 신발을 벗은 채 맨발로 바다의 모래를 걷고 있었고, 그 남자는 여자가 밟던 모래가 고개를 숙여 갈기를 세우지 않기를 바랬다. 그 남자와 그 남자가 사랑했던 한 여자는 제주도의 어느 바닷가를 함께 걷고 있었다. 달빛조차 차가웠던 그날의 밤. 그러나 남자에겐 따스했고, 그 남자는 자신의 여자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창백한 달빛에 빌었다. 남자는 몸이 좋지 않아 한없이 걸음이 느렸던 여자를 위해 조금 속도를 늦춰주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걸으며 애썼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조금씩 빛을 잃으며 바다로 추락했고, 남자는 별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 남자에겐 오직, 웃음조차 제대로 짓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여자, 그 여자의 웃음만이 빛이었고, 별들이 바글대며 다시 일어서는 바다였다. 여자는 웃지 않았다. 한참을 걷던 한 여자와 그 남자는 잠시 모래 위에 앉았고, 까끌거리는 모래는 남자의 몸 아래에서 숨을 죽였다. 남자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그 여자가 얼마 후 그에게 물었다. 자기는 소원이 뭐야?
소원이라니?
너와 결혼하는거. 그 날의 남자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물음에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여자는 웃지 않았다. 죽지 못한 달은 고요한 바다에 앉아 한쌍의 남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남자는 그 달에 기도했다. 너와 결혼하는거야. 너의 병도 고쳐주고, 네가 다시 웃기위해 노력할거야. 여자는 곧, 그래, 라고 말하고는 다시 일어서 모래위를 천천히 걸었다.
소원요, 소원. 꿈이나 바라는 거. 뭐 아무거나요. 새해도 되었는데 소원 하나쯤은 빌어도 되잖아요. 희망을 꿈꾸면서
자기는? 잠시 후 남자는 여자를 따라 일어선 후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여자에게 물었다.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이제 달빛조차 사라져버려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심연같았다. 남자는 여자의 대답에서 희망을 찾고 싶었다. 바닷물을 바라보던 한 여자는 천천히, 그리고 끝없이 아득한 곳을 더듬듯 나직하게 말했다.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나 역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여자의 물음에 천천히,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작게 대답했다.
나도 알 수 없는 때,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법으로,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어느 순간,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거.
죽어버리는 거.
내 말 듣고 있니? 릴리가 되고 싶다는 너의 꿈은 이제 사라져버렸어. 결과적으로 나는 류가 아니었던 거야. 그래. 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기억나니? 우리가 함께 여행가기로 했던 그때. 넌 정말 행복해 보였고, 또 그만큼 아파보였지. 그 사이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 그랬지.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여행을 좀 더 근사하게 다녀오는 것 뿐이었어. 그래서 난 국내를 벗어나기로 했지. 사람이란, 아무래도 바다 건너에서 조금 더 긴장을 완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래,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해외로 나가려고 했지. 유럽으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와 독일을 건너, 스페인과 이탈리아까지. 난 로마에서 너를 위한, 나만의 미사를 드리고도 싶었어. 모든 축복이 너에게 가득하기 바랬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계획이 그 뜻대로 이루어졌다면, 절망이란 단어가 생겨났을까? 우리도 마찬가지였지.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던 거야. 기억나지? 우리 회사에 재난에 이르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로인해 나의 휴가가 끝장나 버렸던거. 그 기간동안 넌 혼자였고, 난 회사에 구속되어버렸지. 보름이었던가. 회사가 겨우 정상화의 언저리에 걸터앉았을때 난 몇날며칠의 밤샘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넌 절망의 가장자리에서 날 쳐다보고 있었지. 이미 여행은 끝장났었지. 그 서로의 끝장에서 넌 말했지.
난 괜찮아.
그래. 괜찮다고, 넌 말했지. 무엇이 괜찮았는지 지금의 난 모르겠어. 여행을 갈 수 없었던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아픈 위로의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잠시나마 내가 너를 방치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시간들의 공백 속에서 지내온 너의 지옥을 향해 던진 말이었니? 너는 지옥의 위로를 받았던거야.
기억해? 우리, 그래도 제주도로 떠났었잖아. 사실 그마저도 며칠을 미뤄야만 했지. 그 사이에 넌 더욱 우울감에 시달렸고, 난 시달리던 너의 안쪽에서 무너져야 했지. 난 너에게 동아리 모임을 권했었지. 글사랑. 왜 그랬을까? 아마 그것이 우리가 겪은 절망의 시발점이었을거야. 악몽의 시간표는 그때부터 착실히 우리에게 지옥의 칸을 메워주었던거지. 난 병원을 가라고 줄기차게 말했었지. 넌 차라리 동아리 활동을 하겠다고 했어. 난 그 말의 의미를 몰랐었지. 지금은 알아. 넌 병원이 싫다고 했어. 왜 그랬니. 아니, 지금의 나는 알지. 너무도, 잘. 그때 난, 차라리 너의 회복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보라고, 동아리 모임이라도 가보라고 했지. 난 그것을 구원이라 믿고 싶었어. 그래, 구원은 구원이었지. 너만의 구원. 너는 그렇게 말하는 나에게 마지막 말인듯 말했지.
괜찮아. 난 여행가고 싶어. 동아리도 아니고 병원도 아닌 여행. 자기와 함께가는 여행.
한참 후, 우린 겨우 떠났어.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자고. 그냥 떠나버리자고. 그렇게 우린 제주도로 향했지. 모든 것을 외면한채. 마치 스틱스 강변에 서있는 사람들을 모두 무시하는 것처럼. 우리를 환영하는 그들을 비참하고도 매몰차게 외면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게 끝장나있었어.
내 말 듣고 있니?
그때부터 모든 것은 끝장나 있었다. 그 끝장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이미 절망의 시간표는 그전부터 작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때의 나는 이미 절망의 열차에 올라탄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도 지나고 나서야 알았지. 나는 악몽에 무임승차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있던 진실은 오직 나만을 외면하고 있었고, 먼 곳에 있건 허상만이 나를 유린하고 있었다. 나는 희망으로 내벽을 덧칠한 절망의 우리에 갇혀있던 맹인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더듬지 못했던, 맹인이었다. 나는 그때 어떻게 해야 했던 것일까? 정답은 과연 존재했던 것이었던가? 그것을 알수 있는 누군가는 존재하는 것일까? 그녀는 나와의 여행에서 자신도 알 수 없는 구원을 바랐던 걸까? 그것조차, 그 이상의 그 무엇도 지금에 와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진실은 무엇이었는지, 진실을 압도할 수 있는 선택이란 과연 존재했던 것인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여자와 바닷가를 걸었다. 바다는 갯강구처럼 기어와 나의 발을 집어삼키려 했고, 나의 몸은 모래에 파묻히지 않으며 간신히 걸음을 유지했다. 바다의 경계는 한없이 멀었고, 나는 그 경계의 끝자락에서 겨우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나의 몸체는 바닷가를 걷고 있었지만 나의 생각은 걷지못하고 저 먼곳에 뒤쳐져 있었다. 나의 본질은 실존에 앞서지 못했다. 이 순간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나라는 명확한 사실이 아니라, 전혀 존재하지 않는 기억의 부산물이었다. 나는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듯 했다. 그것을 제외한 그 어떤것도 나에게 필요하지 않아보였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아무런 대답도 구하지 못했다. 야상곡이란 단어를 떠올린 순간부터 나의 육체는 이미 무기력에 좌초된 조난선이었다. 나는 나의 판단으로 나를 만들어가지 못하는 부존의 주체였다. 패배는 명확했다. 야상곡이란 곡은 절망을 배달하는 전령사처럼 나를 기억에 가둔채 현실에 머물게 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세요?
바Bar에서 쇼팽의 야상곡에 매립된채 기억에만 잠겨있던 나를 여자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여자의 말에 갑자기 잡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서둘러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운전을 오래해서 그런지 좀 피곤한가봐. 바다보고 싶다고 했지? 가자, 지금. 바다 보러.
지금요?
그래, 지금.
이 음악 더 듣고 싶은데.
지금 가. 지금 가고 싶어.
알았어요.
나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여자는 아직 채 끝나지 않은 피아노 연주를 아쉬운 듯 쳐다보았다. 여자는 곧 일어서 나를 따라 나왔다.
나는 여자와 바닷가를 걸으면서도 생각은 온통 그녀에게 다가가 있었다. 기억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저편에 머물러 있었지만, 나는 끈덕지게 그것들을 불러냈다. 그래, 결국 그녀를 부른 것은 나였다. 바다는 여전히 육지의 경계에서 출렁거리며 나를 집어삼키려 쫓아왔고, 나는 애써 그것들을 외면한 채 아무것에도 잡아먹히지 않겠다는 듯 걸음만 재촉했다. 내가 멍하니 걸음만 걷자 여자가 내 앞으로 살짝 뛰쳐나오며 말했다.
아저씨. 근데 아저씨는 소원이 뭐예요?
자기는 소원이 뭐야? 나는 여자의 말에서 참담하게도 제주도 어느 바닷가를 함께 걷고 있던 한 남자와 그 남자가 자신의 심장만큼이나 사랑하던 한 여자를 떠올렸다. 남자에게 여행은 축복이었고, 밀려진 일따위는 고려할 가치도 없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때의 그 여자는 신발을 벗은 채 맨발로 바다의 모래를 걷고 있었고, 그 남자는 여자가 밟던 모래가 고개를 숙여 갈기를 세우지 않기를 바랬다. 그 남자와 그 남자가 사랑했던 한 여자는 제주도의 어느 바닷가를 함께 걷고 있었다. 달빛조차 차가웠던 그날의 밤. 그러나 남자에겐 따스했고, 그 남자는 자신의 여자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창백한 달빛에 빌었다. 남자는 몸이 좋지 않아 한없이 걸음이 느렸던 여자를 위해 조금 속도를 늦춰주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걸으며 애썼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조금씩 빛을 잃으며 바다로 추락했고, 남자는 별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 남자에겐 오직, 웃음조차 제대로 짓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여자, 그 여자의 웃음만이 빛이었고, 별들이 바글대며 다시 일어서는 바다였다. 여자는 웃지 않았다. 한참을 걷던 한 여자와 그 남자는 잠시 모래 위에 앉았고, 까끌거리는 모래는 남자의 몸 아래에서 숨을 죽였다. 남자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그 여자가 얼마 후 그에게 물었다. 자기는 소원이 뭐야?
소원이라니?
너와 결혼하는거. 그 날의 남자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물음에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여자는 웃지 않았다. 죽지 못한 달은 고요한 바다에 앉아 한쌍의 남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남자는 그 달에 기도했다. 너와 결혼하는거야. 너의 병도 고쳐주고, 네가 다시 웃기위해 노력할거야. 여자는 곧, 그래, 라고 말하고는 다시 일어서 모래위를 천천히 걸었다.
소원요, 소원. 꿈이나 바라는 거. 뭐 아무거나요. 새해도 되었는데 소원 하나쯤은 빌어도 되잖아요. 희망을 꿈꾸면서
자기는? 잠시 후 남자는 여자를 따라 일어선 후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여자에게 물었다.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이제 달빛조차 사라져버려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심연같았다. 남자는 여자의 대답에서 희망을 찾고 싶었다. 바닷물을 바라보던 한 여자는 천천히, 그리고 끝없이 아득한 곳을 더듬듯 나직하게 말했다.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나 역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여자의 물음에 천천히,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며 작게 대답했다.
나도 알 수 없는 때,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법으로,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어느 순간,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거.
죽어버리는 거.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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