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캐릭터는 실존 인물이며, 모든 에피소드는 실제 사건입니다. 단, 등장인물의 신상보호를 위해 시간과 공간을 흐릿하게 처리했습니다.
<2부 - 애인>
확실히 그날의 식사 이후 형님과 나는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비록 서로의 집이 서울 끝에서 끝이었지만(일산과 잠실), 비가 오는 날이면 성북동의 고급 술집이나 철거 직전의 피맛골에서 잔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성북동과 피맛골의 간극처럼 그는 상당히 롤러코스터 같은 사람이었다. 어떨 때는 청국장도 못 먹을 거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떨 때는 번데기 탕에 숟가락을 텀벙텀벙 담구며 소주잔을 돌려 마시기도 했다.
나는 형님이 좋았다. 그는 나를 진심어린 호감으로 대했고,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 “내가 진짜 좋아하는 동생인데”라는 말로 나를 소개해주었다. 덕분에 평소 내 지갑사정으로는 엄두도 못 낼 성북동의 요정이나 이태원 고급 술집에 캐주얼한 복장으로 입장해서도 기죽지 않을 수 있었다.
형님은 씀씀이가 매우 컸다. 그리고 항상 현금을 두둑이 가지고 다니며 현금으로 계산하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현금을 고집하는 그를 의심해 볼만도 했지만, 오히려 카드로 그 큰 씀씀이를 채웠다면 법인카드로 기분 내는 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를 만나며 나는 십 원 한 장 써본 일이 없었고, 그는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항상 적당한 핑계를 대며 자기가 계산할 건수를 만들었다.
그러던 2011년 가을, 그는 나에게 큰 비밀을 하나 털어놓으며 그와 동시에 나에게 제안, 아니 부탁을 하게 된다.
그날은 가을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날이었는데, 비 오는 날에는 밀가루를 먹어줘야 한다는 그의 손에 이끌려 총리관저 앞 수제비 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감자의 흙냄새가 멸치육수와 함께 묵직하게 국물에 스며있었다. 수제비 반죽도 수준급이었지만 그 국물이 일품이었다. 비를 핑계로 이 수제비 집으로 나를 이끈 형님의 센스가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삼청동을 가로질러 가회동의 한 민속주점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꽤나 유명한 민속주점으로, 모든 방이 문과 벽으로 막혀있어서 정부 요직의 인물들이 비밀리에 업무를 보는 곳이라는 소문도 돌기도 했던 곳이었다. 우리는 독립된 바깥채에서 과일안주와 발렌타인 한 병을 지켜 스트레이트로 병을 비워가고 있었다.
“동생, 내가 동생 많이 믿는 거 알지?”
믿는? ‘내가 동생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가 아니라 믿는 거 아냐는 형님의 질문에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요. 저도 형님 얼마나 믿는데요.”
형님이 발렌타인을 입에 털고 삼키는 동안 촘촘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참기 위해 역시 잔을 들어 입을 막아 버렸다.
“동생, 내가 진짜 너 믿고 좋아하니까 하는 말인데......” 여기서 다시 뜸을 들이는 형님. “만약 내가 하는 말이....... 얼토당토 안 하다고 생각하면 내 뺨을 후려 갈겨.”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제발 그가 ‘사실 나 게인데 너랑 한 번 해보고 싶어. 한번만 대줘.’라는 말만 안 나오길 기도했다.
“사실, 내가 애인이, 있어.”
아....... 커밍아웃 보다 충격적이진 않아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도 잠깐. 나는 41살 배불뚝이인 그가 20대 초반의 늘씬한 된장녀를 끼고 다니며 지갑을 여는 모습을 상상했다. 진지한 그의 고백과는 다르게, 긴장이 풀려 속으로 피식하고 웃었지만, 다시금 진지한 표정의 마스크를 고쳐 쓰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셨군요.”
내가 그의 빈 잔을 채우는 동안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예를 갖춰 그의 잔을 채웠고, 그가 채워주는 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우린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연이어 한 잔을 더 털어 넣었다. 그가 “캬~”하는 소리를 내며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먹을 때 내가 말했다,
“요즘은 뭐, 흉인가요? 능력 있으면 다들 애인이 있는 거 같던데. 하물며 형님이시면......”
“그게 아니야.”
그는 사과를 오물거리며 말을 잘랐다.
“내가 올해 딱 결혼 11년차인 건 알지?”
“네, 들었어요.”
“애인은, 그보다 더 됐어.”
그 보다 더 되었다....... 무슨 말인지 계산은 되었지만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조강지처라고 하잖아, 어려운 시기를 같이 보내준 여자를. 사실 애인이 나랑 힘든 시기 다 같이 겪었지. 내가 실패할 때도 항상 옆에 있어 줬고. 아, 물론 지금의 와이프는 현모양처야. 아직 아이가 없어서 현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처인 건 확실해.”
역시 그의 이야기에는 사람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어떠한 힘이 있는 게 분명했다. 사과를 오물거리며 말을 씹었지만, 적절한 비유를 함께하는 그의 말에 물어보고 싶고, 대답 듣고 싶은 것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애인이 왜 조강지처인지, 왜 현모양처인 형수님을 두고도 애인을 만나는지, 등등. 그는 그런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내가 듣고 싶은 것들을 차례로 풀어놓았다.
“내가 사업 한참 실패하고 다닐 때부터 데리고 있던 직원인데, 참으로 착하고 예쁜 애야. 고등학교 막 마치고 서울 올라온 애를 취직시켜 준다고 데리고 다녔는데, 일도 참 잘하고 센스도 있었지. 그런데 사업은 자꾸만 망해가고, 나중에는 부모님한테도 손 벌리게 되고....... 결국 다 접을 생각으로 직원들 퇴직금조로 돈 쥐어 주고 나가라는데도 끝까지 남았던 애야.”
형님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진지한 얼굴로, 하지만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덕분인지 다시 사업에 성공하고,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해졌을 때, 지금 와이프랑 결혼한 거야. 뭐,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이상하겠지만, 말하자면 천일야화를 써야할 일들이 많았으니 그냥 ‘부모님이 원하는 결혼을 했다’라고만 생각하라고.”
“그랬군요.”
“처음엔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결혼 후에도 계속 눈앞에 보이니까 미치겠는 거지. 애인도 마음 많이 안 좋았을 거야. 어려울 때 항상 옆에 있어줬는데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해버려서.”
그는 다시 한 잔을 채우며 나에게 술을 권했다.
“뭐 결론적으로, 와이프를 두고 애인이랑 바람피우는 게 아니라, 애인 두고 와이프랑 살림 차린 격이 되어 버린 거지.”
그는 헛헛하게 웃으며 내가 따라주는 잔을 받았다.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왜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형님은 아직까지는 술기운을 누를 수 있는 맨정신이 붙어 있어 보였다.
“애인이, 아직도 우리 직원인데, 동생 보고 참 잘생겼다고 하대?”
“아, 그랬어요?”
나는 민망한 마음에 살짝 웃었다. 그리고 그 애인이라는 사람이 언제 나를 봤을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지난 번 형님의 회사를 방문했을 때였으리라.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내 볼에서는 살짝 열기가 느껴졌다. 술기운을 누르기 위해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시큼함을 느끼며 오물거리며 생각해보았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보통 이야기가 아니었다. 최소 12년 넘게 애인을 두고 그 사이에 결혼을 했으며, 심지어 지금까지 직원으로 데리고 있다는 것. 그가 어려울 때도 유일하게 곁에 남아 줬다는 말을 근거로 생각해보면, 그 애인이라는 사람은 어리지 않은 나이에, 회사에서 꽤나 높은 직함을 갖고 있을 것.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인데, 정말이지 내가 하는 말이 이상하면 뺨을 갈기고 나가도 돼.”
“에이, 제가 어떻게 형님한테......”
이렇게 말은 했지만, 혹시라도 그가 동성애 커밍아웃을 한다면 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버릴 생각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한 번 들어줘.”
“네, 일단 말씀부터 하세요.”
형님은 손사래 치는 내 모습과 진지하게 들어주는 내 반응에 힘이 났는지 대화의 여백 없이 그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뱉었다.
“동생, 혹시 쓰리섬 어떻게 생각해?”
나는 그의 뺨을 후려치진 않았지만 너무 황당한 나머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벌러덩 넘어질 뻔 했다.
“이상한가? 아무래도?”
뭐라 말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잠시 어버버 거리는 사이, 아까보다 더욱 촘촘한 정적이 우리 둘 사이를 쓸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 듯 드는 궁금증이 있어 있는 그대로 형님에게 물었다.
“형님, 쓰리섬이라 하면 셋이 하는 건데....... 혹시 저랑?”
내가 엄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궁금한 것들을 연달아 물었다.
“저랑 쓰리섬을 한다는 건, 형님이랑 저랑....... 그리고 누구......? 형수님? 아니면 애인......?”
이딴 걸 질문이라고 하는 나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에 말끝을 흐리다 보니 하고픈 질문이 또 생겨 연달아 하나 더 던졌다.
“그런 게 아니면, 혹시 형님이랑 형수님이랑 애인 분 셋이 하려는......? 그런 거예요?”
나름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던진 질문인데, 형님은 마지막 내 질문을 듣자 호탕하게 웃으면서 “하하하! 그건 생각 못 해봤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그건 진짜 생각 못했어!!”라고 술상을 탕탕 두 번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나는 혹시라도 우리의 대화가 문 밖으로 세어 나가는 건 아닌가 싶어 매우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사이에 가릴 거 없으니까 그냥 이야기 다 할게. 동생이 내 애인을 한 번 만나줬으면 좋겠어. 우린 15년 가까이 만나오다 보니 뭐랄까....... 그런 거 있잖아, 긴장감? 그런 게 이젠 많이 느슨해졌거든. 그래서 사실은 예전부터 다양한 거 많이 해봤어. 야외에서도 해보고, 기구를 써보기도 하고, 설정이나 이벤트도 해보고.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잖아? 처음엔 애인도 변태 같다면서 싫다고 질겁하더니 나중에는 자기도 그 맛을 알았나봐. 이젠 화도 안 내고 내가 하는 건 다 따라오거든.”
처음 말을 꺼낼 때는 잔뜩 긴장한 형님이었는데, 정작 말을 뱉고 난 후로는 호탕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아 신나게 말을 푸는 그였다. 오히려 내가 더 긴장한 상태에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애인이 다른 남자랑 하는 걸 보고 싶은데 그건 절대 못하겠대. 싸우고 어르고 달래고 별 짓 다 했는데도 그건 죽어도 못하겠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2년 전인가? 그때 이렇게 말했지. ‘일단 한 번 해보고 정 안 되겠으면 못하겠다고 그래라. 그럼 나도 포기 하겠다’라고. 그런데 그것도 안 되겠다고 징징거려서, 설득에만 오랜 시간이 걸렸지.”
그는 자신의 수고를 알아 달라는 듯 나에게 술잔을 권했다. 우린 쭈욱 한 잔 들이켰다. 속을 든든히 채우고 신선한 과일안주와 함께 발렌타인을 마셨지만, 갑자기 빨라진 잔 도는 속도에 술이 확 오르는 듯 했다. 나는 시큼한 파인애플 하나를 입에 넣어 알코올 향을 묻으려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드디어 넘어 오더군!”
역시 그는 이야기로 사람의 관심을 끄는 능력이 있다.
“한 번 해보고 싫으면 정말 다시는 조르지 말라면서 오케이한 거야.”
설마하니 그래서 나에게 부탁하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친구랑 자리를 만들었는데.......”
아....... 쪼지 말고 빨리 말해! 그래서 나한테 애인이랑 자 달라는 거야!! 라고 외칠 뻔 했다.
“잘 안 됐어. 하긴 했는데 애인이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 그런데 참 묘한 게, 싫지도 좋지도 않았대. 눈물은 나는데 서러운 마음은 안 들고, 쾌락은 느껴지는데 몸이 안 열리는 그런 기분이었다고 하더군요.”
“허~”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인의 표정과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애인 눈치 살피며 며칠을 기다렸지. 과연 좋았는지 안 좋았는지. 직접 물어보자니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거 같아서 한참을 망설였지.”
“형님은요? 형님은 그거 보니까 좋았어요?”
“나는, (여기서 그는 한참동안 사과를 오물거리며 말을 끌었다) 내가 좋자고 그런 거 한 거 아니었어. 이렇게 말하면 앞뒤가 안 맞겠지만, 처음 이야기 꺼낸 것도 애인 좋으라고 그런 거야. 나는 결혼해서 와이프가 있는데 애인은 지금까지 결혼도 안 하고 있거든. 뭔가 애인 옆에 남자를 붙여줘야 공평해질 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나는 다른 여자 경험이 있는데, 아 맞다, 사실 애인은 나 포함해서 남자 경험이 딱 세 명 뿐이거든. 아까 그 친구를 포함해서.”
나는 그 애인이라는 사람의 나이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었다.
“여튼, 그런데 얼마 전에 말이야, 동생이 우리 회사 왔을 때, 기억나?”
왜 안 나겠는가.
“그 다음 날 애인이 먼저 말을 꺼내더라고. 어제 온 그 동생 누구냐고.”
“저를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응. 그랬던 적은 처음이야. 내가 이렇게 아저씨가 될 때까지 나만 사랑해주던 아이였는데 먼저 다른 남자 이야기를 꺼낸 건.”
“하....... 거 참.......”
“내가 애인을 1,2년 보나? 감이 딱 오더라고. 그래서 물어봤지. 혹시 그 동생이라면 내가 원하는 거 해줄 수 있냐고.”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는 그 꼴깍 소리를 들었는지 천천히 사과 한 개를 집어 입에 넣으면서 뜸을 들였다. 다행히 그게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었다. 오물거리는 소리가 끝나 갈 즈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애인이 말하길, 어차피 오빠가 원하는 걸 해줘야 한다면 자기가 남자를 고르고 싶다고 하더군.”
순간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그리고 형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알았다. 형님은 내가 자신의 오래된 애인과 동침하기를 원하는 것, 그리고 그걸 자기가 보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정상적인 기호와 성적취향을 가진 남자다. 다만 내가 거절하는 사유를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반대급부로 그가 비정상적인 기호와 성적취향을 가진 변태가 되는 것. 나는 최대한 완만하게 돌려서 거절하고자 했다.
“형님, 죄송한데....... 저는 그 애인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동생은 내 애인의 얼굴이 궁금하겠지?”
“아, 그런 건 아니고.......” 나는 당황했다. “아무리 형님 부탁이라고 해도 제가 어떻게 형님 애인이랑 몸을 섞어요? 그것도 형님이 보는 앞에서.......”
“괜찮아. 우리 둘 다 바라는 거야. 게다가 애인이 너를 콕 찝었다니까?”
“그리고 저는 그런 거 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어요.......”
“아, 내가 너무 부담을 줬나?”
형님은 대화 주제와는 맞지 않을 정도로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냥 애인이랑 셋이 한 번 만나는 거야. 만나서 그냥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아. 정말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
“아니면 그냥 와서 우리 커플이 하는 거라도 봐준다면, 우리 커플에겐 정말 새로운 자극이 될 거야.”
“......”
“동생도 조금은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아직 스물여덟이면 이것저것 궁금하지 않아?”
부정할 수 없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다만 무언가를 대답하기에는 아직 내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 수 없었다. 여자와 몸을 섞는 것은 (그가 언급한 그대로) 스물여덟 젊은이에게 상당한 자극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알지도 못하는 여자라는 것, 그리고 그나마 알고 있는 배경이 형님의 여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도무지 needs가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형님이 원하는 것은 내가 단순히 ‘관전’하는 것을 넘어, 셋이 뒤엉켜 몸을 섞고 타액을 교환하는 것.
오, 맙소사!
내 표정을 읽은 형님은 다시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셋이 만나 인사하는 정도다’라고 짓이긴 사과 파편을 튀어가며 설명했지만, 내 머리 속에는 예전 일본AV에서 봤던 여자 배우 한 명과 남자 배우 두 명의 황갈색 정사만 동동 떠다녔다. 여자 배우의 입과 꽃잎를 두 남자 배우가 틀어막은 후 차례로 꽃잎 안에 사정하는 영상이었다.
순간 뜨겁고 시큼한 역류가 기도로 차오는 것 같았다.
“형님, 죄송한데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이렇게 말하면 분위기가 싸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얼굴 근육 하나 비틀지 않고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하하! 결국 동생이 거절할 줄 알았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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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어느 밤. 나는 형님이 일러준 모텔을 찾아 신촌의 어느 골목길을 서성였다.
형님의 부탁이 있고 사나흘 정도 지났을까? 늦은 밤 뜬금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잘 준비를 다 하고 누웠기도 하고, 발신자가 뜨지 않은 전화가 조금 망설여졌지만 혹시나 업무상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받아 들었다.
수화기에서는 형님의 인사가 튀어나왔다. 곧이어 “잠깐만, 누구 좀 바꿔줄게,”라는 말과 함께 수화기 멀리서 한 여자의 민망함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형님의 애인이리라!
한참을 남자와 여자의 실랑이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여보세요?”라는 다소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여보세요?”라고 대답해버렸다.
특별한 말들이 오간 건 아니다. 사실 지금은 그 내용도 잘 생각나질 않는다. 다만 여자가 지난 번(사무실에 왔을 때) 나를 보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형님에게서 전해들은 내 이야기 등을 수줍게 읊조렸고, 나는 ‘네, 네’하며 대답해준 게 전부였다.
다시 수화기를 건네받은 형님은 “사실 지금 애인이랑 같이 있는데, 동생 목소리 궁금하다고 그래서....... 혹시 자고 있었어?”라고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형님은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거라며 긴 텍스트메시지를 보내왔다.
[동생, 어제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동생 잠 깨운 거 같네~ 미안. 그런데 그냥 한 번만 만나본다고 생각하고 셋이 노는 건 어때? 간단하게 술 먹고 인사한다고 생각하면 돼. 물론 동생이 싫다는 거 안 하고 애인이 싫다는 것도 안 할 거야. 이번 일요일 어때? 신촌에서 만날 생각인데. 문자 하나만 부탁해~]
덕분에 하루 종일 뭘 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나는 이 형님의 이름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
3부에서 계속
<2부 - 애인>
확실히 그날의 식사 이후 형님과 나는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비록 서로의 집이 서울 끝에서 끝이었지만(일산과 잠실), 비가 오는 날이면 성북동의 고급 술집이나 철거 직전의 피맛골에서 잔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성북동과 피맛골의 간극처럼 그는 상당히 롤러코스터 같은 사람이었다. 어떨 때는 청국장도 못 먹을 거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떨 때는 번데기 탕에 숟가락을 텀벙텀벙 담구며 소주잔을 돌려 마시기도 했다.
나는 형님이 좋았다. 그는 나를 진심어린 호감으로 대했고,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 “내가 진짜 좋아하는 동생인데”라는 말로 나를 소개해주었다. 덕분에 평소 내 지갑사정으로는 엄두도 못 낼 성북동의 요정이나 이태원 고급 술집에 캐주얼한 복장으로 입장해서도 기죽지 않을 수 있었다.
형님은 씀씀이가 매우 컸다. 그리고 항상 현금을 두둑이 가지고 다니며 현금으로 계산하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현금을 고집하는 그를 의심해 볼만도 했지만, 오히려 카드로 그 큰 씀씀이를 채웠다면 법인카드로 기분 내는 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를 만나며 나는 십 원 한 장 써본 일이 없었고, 그는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항상 적당한 핑계를 대며 자기가 계산할 건수를 만들었다.
그러던 2011년 가을, 그는 나에게 큰 비밀을 하나 털어놓으며 그와 동시에 나에게 제안, 아니 부탁을 하게 된다.
그날은 가을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날이었는데, 비 오는 날에는 밀가루를 먹어줘야 한다는 그의 손에 이끌려 총리관저 앞 수제비 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감자의 흙냄새가 멸치육수와 함께 묵직하게 국물에 스며있었다. 수제비 반죽도 수준급이었지만 그 국물이 일품이었다. 비를 핑계로 이 수제비 집으로 나를 이끈 형님의 센스가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삼청동을 가로질러 가회동의 한 민속주점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꽤나 유명한 민속주점으로, 모든 방이 문과 벽으로 막혀있어서 정부 요직의 인물들이 비밀리에 업무를 보는 곳이라는 소문도 돌기도 했던 곳이었다. 우리는 독립된 바깥채에서 과일안주와 발렌타인 한 병을 지켜 스트레이트로 병을 비워가고 있었다.
“동생, 내가 동생 많이 믿는 거 알지?”
믿는? ‘내가 동생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가 아니라 믿는 거 아냐는 형님의 질문에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요. 저도 형님 얼마나 믿는데요.”
형님이 발렌타인을 입에 털고 삼키는 동안 촘촘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참기 위해 역시 잔을 들어 입을 막아 버렸다.
“동생, 내가 진짜 너 믿고 좋아하니까 하는 말인데......” 여기서 다시 뜸을 들이는 형님. “만약 내가 하는 말이....... 얼토당토 안 하다고 생각하면 내 뺨을 후려 갈겨.”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제발 그가 ‘사실 나 게인데 너랑 한 번 해보고 싶어. 한번만 대줘.’라는 말만 안 나오길 기도했다.
“사실, 내가 애인이, 있어.”
아....... 커밍아웃 보다 충격적이진 않아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도 잠깐. 나는 41살 배불뚝이인 그가 20대 초반의 늘씬한 된장녀를 끼고 다니며 지갑을 여는 모습을 상상했다. 진지한 그의 고백과는 다르게, 긴장이 풀려 속으로 피식하고 웃었지만, 다시금 진지한 표정의 마스크를 고쳐 쓰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셨군요.”
내가 그의 빈 잔을 채우는 동안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예를 갖춰 그의 잔을 채웠고, 그가 채워주는 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우린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연이어 한 잔을 더 털어 넣었다. 그가 “캬~”하는 소리를 내며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먹을 때 내가 말했다,
“요즘은 뭐, 흉인가요? 능력 있으면 다들 애인이 있는 거 같던데. 하물며 형님이시면......”
“그게 아니야.”
그는 사과를 오물거리며 말을 잘랐다.
“내가 올해 딱 결혼 11년차인 건 알지?”
“네, 들었어요.”
“애인은, 그보다 더 됐어.”
그 보다 더 되었다....... 무슨 말인지 계산은 되었지만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조강지처라고 하잖아, 어려운 시기를 같이 보내준 여자를. 사실 애인이 나랑 힘든 시기 다 같이 겪었지. 내가 실패할 때도 항상 옆에 있어 줬고. 아, 물론 지금의 와이프는 현모양처야. 아직 아이가 없어서 현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처인 건 확실해.”
역시 그의 이야기에는 사람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어떠한 힘이 있는 게 분명했다. 사과를 오물거리며 말을 씹었지만, 적절한 비유를 함께하는 그의 말에 물어보고 싶고, 대답 듣고 싶은 것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애인이 왜 조강지처인지, 왜 현모양처인 형수님을 두고도 애인을 만나는지, 등등. 그는 그런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내가 듣고 싶은 것들을 차례로 풀어놓았다.
“내가 사업 한참 실패하고 다닐 때부터 데리고 있던 직원인데, 참으로 착하고 예쁜 애야. 고등학교 막 마치고 서울 올라온 애를 취직시켜 준다고 데리고 다녔는데, 일도 참 잘하고 센스도 있었지. 그런데 사업은 자꾸만 망해가고, 나중에는 부모님한테도 손 벌리게 되고....... 결국 다 접을 생각으로 직원들 퇴직금조로 돈 쥐어 주고 나가라는데도 끝까지 남았던 애야.”
형님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진지한 얼굴로, 하지만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덕분인지 다시 사업에 성공하고,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해졌을 때, 지금 와이프랑 결혼한 거야. 뭐,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이상하겠지만, 말하자면 천일야화를 써야할 일들이 많았으니 그냥 ‘부모님이 원하는 결혼을 했다’라고만 생각하라고.”
“그랬군요.”
“처음엔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결혼 후에도 계속 눈앞에 보이니까 미치겠는 거지. 애인도 마음 많이 안 좋았을 거야. 어려울 때 항상 옆에 있어줬는데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해버려서.”
그는 다시 한 잔을 채우며 나에게 술을 권했다.
“뭐 결론적으로, 와이프를 두고 애인이랑 바람피우는 게 아니라, 애인 두고 와이프랑 살림 차린 격이 되어 버린 거지.”
그는 헛헛하게 웃으며 내가 따라주는 잔을 받았다.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왜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형님은 아직까지는 술기운을 누를 수 있는 맨정신이 붙어 있어 보였다.
“애인이, 아직도 우리 직원인데, 동생 보고 참 잘생겼다고 하대?”
“아, 그랬어요?”
나는 민망한 마음에 살짝 웃었다. 그리고 그 애인이라는 사람이 언제 나를 봤을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지난 번 형님의 회사를 방문했을 때였으리라.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내 볼에서는 살짝 열기가 느껴졌다. 술기운을 누르기 위해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시큼함을 느끼며 오물거리며 생각해보았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보통 이야기가 아니었다. 최소 12년 넘게 애인을 두고 그 사이에 결혼을 했으며, 심지어 지금까지 직원으로 데리고 있다는 것. 그가 어려울 때도 유일하게 곁에 남아 줬다는 말을 근거로 생각해보면, 그 애인이라는 사람은 어리지 않은 나이에, 회사에서 꽤나 높은 직함을 갖고 있을 것.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인데, 정말이지 내가 하는 말이 이상하면 뺨을 갈기고 나가도 돼.”
“에이, 제가 어떻게 형님한테......”
이렇게 말은 했지만, 혹시라도 그가 동성애 커밍아웃을 한다면 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버릴 생각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한 번 들어줘.”
“네, 일단 말씀부터 하세요.”
형님은 손사래 치는 내 모습과 진지하게 들어주는 내 반응에 힘이 났는지 대화의 여백 없이 그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뱉었다.
“동생, 혹시 쓰리섬 어떻게 생각해?”
나는 그의 뺨을 후려치진 않았지만 너무 황당한 나머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벌러덩 넘어질 뻔 했다.
“이상한가? 아무래도?”
뭐라 말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잠시 어버버 거리는 사이, 아까보다 더욱 촘촘한 정적이 우리 둘 사이를 쓸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 듯 드는 궁금증이 있어 있는 그대로 형님에게 물었다.
“형님, 쓰리섬이라 하면 셋이 하는 건데....... 혹시 저랑?”
내가 엄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궁금한 것들을 연달아 물었다.
“저랑 쓰리섬을 한다는 건, 형님이랑 저랑....... 그리고 누구......? 형수님? 아니면 애인......?”
이딴 걸 질문이라고 하는 나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에 말끝을 흐리다 보니 하고픈 질문이 또 생겨 연달아 하나 더 던졌다.
“그런 게 아니면, 혹시 형님이랑 형수님이랑 애인 분 셋이 하려는......? 그런 거예요?”
나름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던진 질문인데, 형님은 마지막 내 질문을 듣자 호탕하게 웃으면서 “하하하! 그건 생각 못 해봤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그건 진짜 생각 못했어!!”라고 술상을 탕탕 두 번 손바닥으로 치며 말했다.
나는 혹시라도 우리의 대화가 문 밖으로 세어 나가는 건 아닌가 싶어 매우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사이에 가릴 거 없으니까 그냥 이야기 다 할게. 동생이 내 애인을 한 번 만나줬으면 좋겠어. 우린 15년 가까이 만나오다 보니 뭐랄까....... 그런 거 있잖아, 긴장감? 그런 게 이젠 많이 느슨해졌거든. 그래서 사실은 예전부터 다양한 거 많이 해봤어. 야외에서도 해보고, 기구를 써보기도 하고, 설정이나 이벤트도 해보고.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잖아? 처음엔 애인도 변태 같다면서 싫다고 질겁하더니 나중에는 자기도 그 맛을 알았나봐. 이젠 화도 안 내고 내가 하는 건 다 따라오거든.”
처음 말을 꺼낼 때는 잔뜩 긴장한 형님이었는데, 정작 말을 뱉고 난 후로는 호탕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아 신나게 말을 푸는 그였다. 오히려 내가 더 긴장한 상태에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애인이 다른 남자랑 하는 걸 보고 싶은데 그건 절대 못하겠대. 싸우고 어르고 달래고 별 짓 다 했는데도 그건 죽어도 못하겠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2년 전인가? 그때 이렇게 말했지. ‘일단 한 번 해보고 정 안 되겠으면 못하겠다고 그래라. 그럼 나도 포기 하겠다’라고. 그런데 그것도 안 되겠다고 징징거려서, 설득에만 오랜 시간이 걸렸지.”
그는 자신의 수고를 알아 달라는 듯 나에게 술잔을 권했다. 우린 쭈욱 한 잔 들이켰다. 속을 든든히 채우고 신선한 과일안주와 함께 발렌타인을 마셨지만, 갑자기 빨라진 잔 도는 속도에 술이 확 오르는 듯 했다. 나는 시큼한 파인애플 하나를 입에 넣어 알코올 향을 묻으려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드디어 넘어 오더군!”
역시 그는 이야기로 사람의 관심을 끄는 능력이 있다.
“한 번 해보고 싫으면 정말 다시는 조르지 말라면서 오케이한 거야.”
설마하니 그래서 나에게 부탁하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친구랑 자리를 만들었는데.......”
아....... 쪼지 말고 빨리 말해! 그래서 나한테 애인이랑 자 달라는 거야!! 라고 외칠 뻔 했다.
“잘 안 됐어. 하긴 했는데 애인이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 그런데 참 묘한 게, 싫지도 좋지도 않았대. 눈물은 나는데 서러운 마음은 안 들고, 쾌락은 느껴지는데 몸이 안 열리는 그런 기분이었다고 하더군요.”
“허~”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인의 표정과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애인 눈치 살피며 며칠을 기다렸지. 과연 좋았는지 안 좋았는지. 직접 물어보자니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거 같아서 한참을 망설였지.”
“형님은요? 형님은 그거 보니까 좋았어요?”
“나는, (여기서 그는 한참동안 사과를 오물거리며 말을 끌었다) 내가 좋자고 그런 거 한 거 아니었어. 이렇게 말하면 앞뒤가 안 맞겠지만, 처음 이야기 꺼낸 것도 애인 좋으라고 그런 거야. 나는 결혼해서 와이프가 있는데 애인은 지금까지 결혼도 안 하고 있거든. 뭔가 애인 옆에 남자를 붙여줘야 공평해질 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나는 다른 여자 경험이 있는데, 아 맞다, 사실 애인은 나 포함해서 남자 경험이 딱 세 명 뿐이거든. 아까 그 친구를 포함해서.”
나는 그 애인이라는 사람의 나이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었다.
“여튼, 그런데 얼마 전에 말이야, 동생이 우리 회사 왔을 때, 기억나?”
왜 안 나겠는가.
“그 다음 날 애인이 먼저 말을 꺼내더라고. 어제 온 그 동생 누구냐고.”
“저를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응. 그랬던 적은 처음이야. 내가 이렇게 아저씨가 될 때까지 나만 사랑해주던 아이였는데 먼저 다른 남자 이야기를 꺼낸 건.”
“하....... 거 참.......”
“내가 애인을 1,2년 보나? 감이 딱 오더라고. 그래서 물어봤지. 혹시 그 동생이라면 내가 원하는 거 해줄 수 있냐고.”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는 그 꼴깍 소리를 들었는지 천천히 사과 한 개를 집어 입에 넣으면서 뜸을 들였다. 다행히 그게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었다. 오물거리는 소리가 끝나 갈 즈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애인이 말하길, 어차피 오빠가 원하는 걸 해줘야 한다면 자기가 남자를 고르고 싶다고 하더군.”
순간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그리고 형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알았다. 형님은 내가 자신의 오래된 애인과 동침하기를 원하는 것, 그리고 그걸 자기가 보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정상적인 기호와 성적취향을 가진 남자다. 다만 내가 거절하는 사유를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반대급부로 그가 비정상적인 기호와 성적취향을 가진 변태가 되는 것. 나는 최대한 완만하게 돌려서 거절하고자 했다.
“형님, 죄송한데....... 저는 그 애인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동생은 내 애인의 얼굴이 궁금하겠지?”
“아, 그런 건 아니고.......” 나는 당황했다. “아무리 형님 부탁이라고 해도 제가 어떻게 형님 애인이랑 몸을 섞어요? 그것도 형님이 보는 앞에서.......”
“괜찮아. 우리 둘 다 바라는 거야. 게다가 애인이 너를 콕 찝었다니까?”
“그리고 저는 그런 거 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어요.......”
“아, 내가 너무 부담을 줬나?”
형님은 대화 주제와는 맞지 않을 정도로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냥 애인이랑 셋이 한 번 만나는 거야. 만나서 그냥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아. 정말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
“아니면 그냥 와서 우리 커플이 하는 거라도 봐준다면, 우리 커플에겐 정말 새로운 자극이 될 거야.”
“......”
“동생도 조금은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아직 스물여덟이면 이것저것 궁금하지 않아?”
부정할 수 없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다만 무언가를 대답하기에는 아직 내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 수 없었다. 여자와 몸을 섞는 것은 (그가 언급한 그대로) 스물여덟 젊은이에게 상당한 자극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알지도 못하는 여자라는 것, 그리고 그나마 알고 있는 배경이 형님의 여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도무지 needs가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형님이 원하는 것은 내가 단순히 ‘관전’하는 것을 넘어, 셋이 뒤엉켜 몸을 섞고 타액을 교환하는 것.
오, 맙소사!
내 표정을 읽은 형님은 다시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셋이 만나 인사하는 정도다’라고 짓이긴 사과 파편을 튀어가며 설명했지만, 내 머리 속에는 예전 일본AV에서 봤던 여자 배우 한 명과 남자 배우 두 명의 황갈색 정사만 동동 떠다녔다. 여자 배우의 입과 꽃잎를 두 남자 배우가 틀어막은 후 차례로 꽃잎 안에 사정하는 영상이었다.
순간 뜨겁고 시큼한 역류가 기도로 차오는 것 같았다.
“형님, 죄송한데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이렇게 말하면 분위기가 싸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얼굴 근육 하나 비틀지 않고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하하! 결국 동생이 거절할 줄 알았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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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어느 밤. 나는 형님이 일러준 모텔을 찾아 신촌의 어느 골목길을 서성였다.
형님의 부탁이 있고 사나흘 정도 지났을까? 늦은 밤 뜬금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잘 준비를 다 하고 누웠기도 하고, 발신자가 뜨지 않은 전화가 조금 망설여졌지만 혹시나 업무상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받아 들었다.
수화기에서는 형님의 인사가 튀어나왔다. 곧이어 “잠깐만, 누구 좀 바꿔줄게,”라는 말과 함께 수화기 멀리서 한 여자의 민망함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형님의 애인이리라!
한참을 남자와 여자의 실랑이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여보세요?”라는 다소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여보세요?”라고 대답해버렸다.
특별한 말들이 오간 건 아니다. 사실 지금은 그 내용도 잘 생각나질 않는다. 다만 여자가 지난 번(사무실에 왔을 때) 나를 보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형님에게서 전해들은 내 이야기 등을 수줍게 읊조렸고, 나는 ‘네, 네’하며 대답해준 게 전부였다.
다시 수화기를 건네받은 형님은 “사실 지금 애인이랑 같이 있는데, 동생 목소리 궁금하다고 그래서....... 혹시 자고 있었어?”라고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형님은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거라며 긴 텍스트메시지를 보내왔다.
[동생, 어제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동생 잠 깨운 거 같네~ 미안. 그런데 그냥 한 번만 만나본다고 생각하고 셋이 노는 건 어때? 간단하게 술 먹고 인사한다고 생각하면 돼. 물론 동생이 싫다는 거 안 하고 애인이 싫다는 것도 안 할 거야. 이번 일요일 어때? 신촌에서 만날 생각인데. 문자 하나만 부탁해~]
덕분에 하루 종일 뭘 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나는 이 형님의 이름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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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 계속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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