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장은 정말 쓰기 어려웠습니다.
재미도 없고... 야한 씬도 없고...
그래도 이 이야기의 분수령이 되는 대목이기 때문에
패스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었습니다.
일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아서 퇴고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못난 글 읽어주시는 것 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선예 부모님댁에 도착하니 이미 공사가 한창이었다.
축사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대충봐도 기술자 여러명이 달라 붙어서 진행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제대로 걸린것 같았다.
선예는 나를 한 남자에게 끌고 갔다.
그는 무릎까지 덮는 두꺼운 오리털 점퍼를 입고 있었고
그녀의 딸이 다가오는 걸 눈치채고는 얼굴에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아빠!"
"아이고 우리 딸 왔는가?"
둘은 마치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하듯 얼싸 않으며 좋아했다.
일하던 인부들이 무슨 일인하고 쳐다보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한다.
"아니 이게 누구여. 미스 형평리 아닌가?"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려 오랜만이구만."
미스 형평리라고?
이 동네에 여자가 별로 없나 보지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고는 쑥 들어가버렸다.
"니 남자친구?"
"네. 정현 오빠에요. 우리 아부지한테 인사드려 오빠."
"처음 뵙겠습니다. 최정현이라고 합니다."
180도 인사를 하고 그가 내민 손을 잡아 악수했다.
"그려 그려. 오느라고 고생 많았네."
정말 고생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 할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다.
그녀의 작은 체구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까맣게 탄 구리빛 피부는 여느 농사꾼과 별반 다를 것 없지만
샤프하게 자른 하얀 머리와 동그란 뿔테 안경은 오히려 사업가 이미지에 가까웠다.
언젠가 아버지가 은퇴하면 농사나 짓고 살아야겠다고 하시자 우리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농사는 아무나 짓는게 아니다. 그것도 엄연히 사업이다. 그냥 텃밭이나 가꾸려면 우리집 마당으로도 충분하다.
아버지는 어머니 말에 여자가 뭘 아냐고 하시면서도 더 이상 농사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으셨다.
"오빠가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일 잘 할꺼야. 맘껏 쓰셔요."
니가 무슨 내 에이전트라도 되냐. 뭘 맘껏 쓰래?
"임마. 니 남자친구면 그게 손님이어야지 어떻게 일부터 시키려고 그래?
일단 추우니까 들어가자."
"네~"
그녀가 나에게 한쪽눈으로 찡긋하더니 내 손을 끌고 그녀의 아버지를 졸졸 따라갔다.
그 때 아까 선예에게 인사하던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형님 사위라도 오셨소? 거 잘생겼네그려~"
"그죠 아저씨? 고마워요."
그녀의 아버지는 그 아저씨 쪽을 웃으면서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집안에 들어서자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반긴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선예와 비슷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고 있긴 했지만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도 반갑게 맞아 주신다.
"어서와요. 선예야 너네 밥은 먹었니?"
"아니. 먹어야 돼. 배고파 밥 좀 줘."
"안그래도 차려놨다. 어서 들어와."
맛깔나게 조리된 닭볶음을 중심으로 열가지가 넘는 반찬이 놓여있었다.
이 얼마만에 먹어보는 진수성찬인가.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요."
"아닙니다. 어머님. 이런 푸짐한 밥상 맞아본지도 되게 오랜만이네요."
내 넉살에 그리 싫지 않은 듯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타지에서 공부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 한참 배고플텐데 어여 들어요."
"내가 우리 마누라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집사람 음식 솜씨가 정말 괜찮아.
내가 식당밥을 못먹는 이유가 괜히 그런게 아니라고?"
어르신의 칭찬에 선예가 그녀의 어머니를 보고 말한다.
"아빠 또 뭐 사고쳤어? 뭔 칭찬이래?"
"말도 마라. 지금 짓는 땅도 어찌 못하면서 땅을 빚내서 또 샀다. 정말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원..."
"아니 이 사람이. 남의 호의를 그렇게 왜곡하면 쓰나?"
"호의고 나발이고 어서 드세요. 당신 때문에 이 친구 수저도 못 들고 있는거 안 보여요?"
차분한 말투지만 할 말 다하시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아버지는 나보고 어서 들라는 시늉을 하시고는 국을 떠 드셨다.
"어 시원하다. 국이 참 좋네."
"ㅋㅋㅋ 아빠도 참. 사고 제대로 쳤고만."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잘 몰라서 가만히 있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와 우리 가족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셨고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 떨어진 싱크대 앞에서 연신 무언가를 하면서도 우리의 대화에 간간히 끼어들었다.
"부친께서 교직에 계신다고?"
"네."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시고?"
"00 고등학교 출신 이십니다."
"아 그래? 내가 거기 졸업했는데?"
"아 그러십니까?"
"그럼. 부친께서 몇년 생이신가?"
"45년 생이십니다."
"허허... 나랑 동갑이고만. 졸업 언제하셨는지 아는가?"
"그건 잘..."
"이거 이거 잘 하면 동창생 아들이랑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만."
그는 선예를 시켜서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아버지 사진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네? 학교를 일찍 들어가셨을까? 이름이 익숙한데 말이지..."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어 나야. 어, 몸은 좀 어때? 아이고... 그러게 내가 뭐랬어. 집에 좀 붙어 있으랬잖아.
그래 그래. 내가 이번주 내로 함 감세. 그건 그렇고 말이지..."
아마도 다른 동창에게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그는 내 아버지에 대해 물었고 곧 답을 었었다.
"아... 그래서 여기 없구만. 자네 부친이 중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셨다는 구만. 모르고 있었나?"
그때서야 나도 떠오르는게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세가 기울면서 할머니 혼자 일곱 형제를 감당할 수 없게되었는데
그 때 아버지는 생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학비가 없는 농고로 학교를 옮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랬구만. 그래도 00중은 나오셨겠네."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 뭐 동창이나 다름 없지. 안 그래도 00중 동창 모임에서도 몇 번 봤었어. 그냥 통성명만 하고 지내던 사이지.
그래도 이렇게 알게 되니 반갑고만. 아버지보고 언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전해줌세."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버지 옆에 붙어서 우리 둘의 대화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지켜보던 선예는
대화가 잘 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까만해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그녀와는 많이 달랐다.
"여보 여기 매실주 좀 내와요. 이 친구랑 술한잔 해야겠어."
"매실주요? 작년에 담근 거 말이에요?"
"응. 그래."
남편의 지시에 그녀는 선예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부엌을 나갔다.
"너네 아버지가 직접 담근 술을 가져 오라니. 기분 좋으신가 보다."
어느새 탁자 위에는 술상이 펼쳐져 있었다.
"자 한 잔 하세."
"네"
그 때 선예가 끼어들었다.
"오빠 술 안마시자나. 괜찮겠어?"
나는 어르신 눈치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 나 원래 술 잘마셔."
"아닐텐데..."
그러자 옆에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술을 안마신다고? 아휴 착실한 청년이네. 그래 술 같은 거 안마셔도 괜찮은 거야.
이 동네 노인네들은 그냥 맨날 술을 물 마시듯 마시는데 거기서 니네 아버지가 1등이다 1등.
아유 얼마나 꼴보기 싫은지 정말."
"이 사람이 내가 무슨 물을 술마시듯 한다는 거야?"
"물을 술 마시듯이 아니고 술을 물 마시듯 마신다고요. 술도 안 들어갔는데 벌써 말귀도 못 알아 들으시는 거에요?"
"거참. 여편네가... 딸래미 남자친구도 왔는데 거 남편 기 좀 살려주지."
"그래서 더 그러는 거에요. 술 안 마신다니까 차나 좀 들어요."
그는 입맛을 다시더니 부탁하듯 아내에게 말했다.
"아 오랜만에 젊은 친구랑 한 잔 하면서 얘기 좀 나눌랬더만... 한 잔만 할께. 응?"
"나도 그래서 술상은 바왔는데 술을 안 먹는다니까 하는 소리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 의사가 술 그만 마시랬자나요. 지방간이면 좀 조심해야지. 그러다 간경화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거 참... 이보게 우리 마누라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지? 참 나도 복 받은 놈이라니까. 껄껄껄."
그의 넉살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 담다가 사리가 걸리고 말았다.
선예가 얼른 물을 떠왔다.
"그러지 말고 술은 저녁식사나 하고 드셔요. 이 친구 일하러 왔는데 대낮부터 술마시는 건 아니지."
"아니 딸래미 손님을 어떻게 일을 시켜? 그냥 말이 그랬던 거지. 안 그냐 선예야?"
"뭐 알아서 하세요. 내가 일하나? ㅎㅎㅎ"
"지 손님 지가 챙겨야지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때 그녀의 아버지가 무릎을 탁 치더니 내게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 그렇지. 자네 컴퓨터 좀 볼줄 아는가? 얼마전에 글이나 쓰려고 구입했는데 한달 전 부터 제대로 켜지지도 않고.
사람을 불렀는데 멀다고 안오고 참 답답했거든?"
"잘은 못하지만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 서재로 가세."
컴퓨터를 켜보니 윈도우95가 깔려있긴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팅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바이러스 문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옆에 모아져 있는 디스켓을 뒤져 보았다.
다행이 백신 프로그램이 있었고 부팅 디스켓으로 재구동 한 후 치료를 시도해보았다.
드득 드득 소리가 나더니 잠시후 치료가 끝났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재부팅을 해보니 마침내 정상적으로 윈도우가 실행되었다.
"오호... 이것 참. 이렇게 간단한건가?"
"이런게 다 그렇죠. 알면 아무것도 아닌데 모를 땐 정말 사람 답답하게 만들죠."
그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작업의 순서 하나 하나 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곰꼼히 메모하는 거였다.
이해안 가는 것이 나와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떻게든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많은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한두번 설명하면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았고 내가 쓰는 용어가 뭔지를 몰라서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었다.
그는 알고 싶은 것들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을 켜고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나는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설명을 드렸다. 학교 다니면서 친구들이랑 같이 딴 워드 프로세서 자격증이 큰 도움이 되었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컴퓨터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것들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좀 점수를 따볼 요량으로 그를 금단의 땅에 밀어 넣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pc통신이었다.
당시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시기긴 하지만 시골 구석까지 닿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pc통신이라면 전화선과 모뎀만 있으면 되니까 그걸 추천했다.
다행히 모뎀이 장착된 나름 최신 컴퓨터였고 나는 전화걸어서 통신망에 연결하는 방법과
pc통신 서비스 업체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시골 촌부지만 그의 습득력은 왠만한 젊은이들 못지 않았다.
서재에 설치된 전화기에서 전화선을 뽑아 컴퓨터에 연결하고 전화번호를 입력해 연결했다.
"삐이 삐이이 캬아아아아"
워드와 지뢰찾기의 용도로만 쓰던 그의 컴퓨터가 피씨통신과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은 마치 처음 게임기를 접해 보는 어린 아이마냥 반짝 거렸다.
나는 그에게 본격적으로 피씨통신을 사용법을 가르치기 전에 엄격한 주의를 주었다.
"아버님 이건 전화선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장시간 이용하게 되면 상당한 전화요금이 부과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서비스에 따라서는 용량이나 여러가지 이유로 상당한 액수의 과금이 되는 것들이 있는데
무턱대고 하시면 안되고 반드시 사전에 꼼꼼히 확인하셔야 요금 폭탄을 피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그깟 전화요금 열배가 나와도 괜찮다며 어서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
그 때만 해도 나의 이런 배려가 어떤 사단을 내게 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피씨 통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두어 번 간식이나 마실 것을 들고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 왔으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아예 인식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선예에게 전해 듣기로는 남편이 고장난 컴퓨터 때문에 하도 툴툴데서 스트레스 받고 있었는데
내가 왔다 간 다음 부터는 조용해져서 너무 좋았다고 한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훗날 나와 그녀의 아버지는 한동안 그녀의 어머니로 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어느덧 저녁 때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피씨 통신에 몰두하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엌에서 큰 다툼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모녀간에 벌어지는 사소한 말다툼 정도로 생각했으나
시간이 갈 수록 언성이 높아지고 나중에는 둘의 다툼 소리가 우리에게 들릴 정도였다.
"안돼 죽어도 안돼. 니들이 여행가서 뭘 하겠어. 엉? 니들이 신혼 부부도 아니고 무슨 얼어죽을 여행이야?"
아무래도 선예가 여행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멘탈 금가는 소리가 들렸다.
수 시간 동안 애써 쌓아온 아버님과의 소중한 교감들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지금 선예 어미가 여행이라고 했어? 이게 무슨 수리야?"
"..."
말다툼은 계속되었고 급기야 그녀의 어머니가 서재로 쳐들어왔다.
"자네 나 좀 보세!"
그녀는 싸늘한 그 한마디를 서재에 던져두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마냥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그녀를 따라갔다.
"자네 선예랑 둘이서 여행 간다는 것이 사실인가?"
"네..."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
"죄송합니다."
"누가 가자고 했나?"
선예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엄마. 내가 가자고 했다니까. 원래는 오빠 혼자 군대가기 전에 여행 간댔는데 내가 따라 간다고 그랬어."
"넌 가만히 있어. 말해 보게 누가 먼저 가자고 했나?"
그녀의 아버지도 한자리 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리고 여행은 또 다 무슨 소리야?"
어머니는 예의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거 참..."
어머니는 다시 나를 주시하며 어서 대답할 것을 재촉했다.
정말 난감했다.
하지만 남자로서 총대를 메는 것이 상황을 덜 악화 시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가자고 했습니다. 선예가 많이 힘들어하길래..."
"힘들어 하면 안힘들게 해야지 왜 여행을 데리고 가? 이 사람 하는 짓이 이쁘고 건전한거 같아서 좋게 봤는데...
이렇게 사람 실망시킬텐가!"
"엄마. 아니야. 내가 먼저 가자고 했어."
"이것들이 어른을 가운데에 놓고 놀려? 누가 먼저 가자고 했든 그게 할짓이냐고 그게!"
아마도 선예는 좋은 분위기를 타고 이 기회에 자신의 여행 계획을 부모에게 알리고 공식화할 작정이었나 보다.
평소 같았으면 만만한 아버지에게 먼저 말을 꺼냈겠지만 내가 아버지와 잘 있는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어 어머니를 설득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 없었던 일로 안하면 자네들 못 만날 줄 알아."
나와 선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던진 한마디는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때는 그 말에 어떤 복선이 깔려있는지 우리는 몰랐다.
"젊은 애들이 사귀다 보면 좀 깊이 사귈 수도 있고 말이지... 그리고 꼭 여행을 가야 무슨 일을 저지르나?
요즘 애들이 하지 말란다고 안해? 다 큰 애들인데 지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끊어야 했다. 그의 아내가 그를 잡아 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자신의 눈길을 피하자 그녀는 냉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여튼 이 양반은 정말...
여기가 무슨 미국인 줄 알아요? 여긴 한국이에요 한국.
남녀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아직도 유효한 곳이에요.
게다가 당신이랑 이 친구 아버지랑 동창이라면서요.
만약에 둘이 여행이라도 갔다가 저쪽 집안 어르신들이 알게되면 무슨 낯으로 보려고 그러시는 거에요.
당신이 그렇게 단호하게 안하고 물렁하게 하니까 이 아이가 더 고생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미국이 좋으면 진작에 미국에서 눌러 살 것이지.
왜 한국에 와서 마누라 생고생 시키고 딸아이 시집 못가게 만들고 그러는 거에요?"
아내의 논리정연한 일침에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서재로 돌아갔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그녀는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나에게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네.
자네들 나이에 연애도 하고 서로 사랑도 하고 그럴 수 있는 거 당연한 거지.
난 오히려 우리 선예가 자기의 젊은 청춘을 마음껏 즐기고 만끽하길 바란다네.
하지만 우리 선예는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큰 실수를 저질렀어.
우리 아이가 솔직한 아이라 이미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아이가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두고 두고 꼬리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나를 너무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정말 우리 아이가 좋다면 곁에서 잘 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게 도리지 않은가?"
그녀는 힘이 들었는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당신의 딸의 머리를 정돈해주면서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녀석이 그런 말도 안되는 결정을 했는지 엄마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잘못한 건지, 아빠가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니가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안될 일이었는지..."
선예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거의 울것 같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이름이 정현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
"우리 딸 이쁘게 봐줘서 고맙네. 선예가 자네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구만.
나도 보니까 좋은 부모 밑에서 잘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예의도 바르고..."
"아닙니다. 많이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겸손할 줄도 알고...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야.
제발 부탁인데 사귀는 동안 우리 딸 좀 잘 지켜주게."
"알겠습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 나와 약속했네."
"알겠습니다"
"아무리 자네나 선예가 나이가 어리고 또 세상이 바꼈다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야.
그걸 지키지 않았을 때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후회할 일들이 생길 수가 있어.
막말로 자네 우리 딸이랑 결혼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엄마 내가 나이가 몇 갠데 결혼 얘기를 해?"
하지만 그녀는 딸을 무시하고 나에게 말했다.
"어디 한 번 말해보게. 보아하니 선예가 이것 저것 다 말해준 것 같은데. 그렇지?"
"네... 어느 정도는..."
"자네 부모라면 이런 여식이 며느리로 들어오면 받아줄 것 같은가?"
나는 선예를 바라봤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테이블보에 인쇄된 장미 그림을 손으로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아마도 저희 부모님은 아마 제 결정을 지지해주실 것 같습니다."
"전적으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당신들이 원하시는 며느리상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 어머니 같은 경우는...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자면,
아무리 연애를 한다고 해도 늘 결혼을 염두해두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어머니 생각에 동의하고요.
그건 당연히 선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얘기해 본 적은 없고...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선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그녀와 잠깐 눈을 맞추고는 고개를 숙였다.
왠지 쑥스러웠다.
"그랬구먼. 좋은 이야기야. 아무리 가볍게 사귄다고 해도 사람의 인연은 때로는 무서운 거거든."
그녀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언젠가 부터 부엌에 걸린 시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침울했지만 그렇다고 절망적이진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선예가 어디가 좋은가? 듣고 싶네. 우리 딸이 어떤지."
"엄마... 지금 뭐하는 거야. 무슨 취조하는 것도 아니고..."
"왜 너랑 결혼할 생각도 있다는데. 나도 아무한테나 내 딸 줄 수 없잖아.
니 친구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엄마가 알면 안돼?"
"그 말이 아니잖아. 그냥 그런 마음으로 만나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결혼 생각해 본 적 없어."
"마음이 있고 없고는 정말 중요한 거야. 그리고 그게 너랑 다른 점이지."
"나는 이런 얘기 듣고 싶지 않다고. 나 나갈래."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부엌에서 뛰쳐 나갔다.
곧 쾅 닫히는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해보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선예는... 뭐랄까...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게 무슨 변덕 그런건 아닌 것 같고요.
약간 충동적일 수는 있긴 하지만...
선예는... 그러니까... 어떤 순간이나 상황에 충실하는 것 같습니다.
순간에 충실하면 그게 충동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요."
"너무 좋게 얘기하려고 하지 마. 그 아이가 너무 충동적으로 뭔가를 결정하는 건 나도 잘 아니까."
"만난지 얼마 안 됐는데 제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냥 느끼는 대로 말씀드리는 거에요."
나는 새벽같이 도서관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과 나를 위해 옷을 사고 요리해주던 기억을 떠올렸다.
"순간이든 상황이든 사람이든 간에
선예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 그냥 지나치는 것 같지 않았어요.
저 같으면 이익이 되지 않거나 특별한 의미가 없으니
무시하고 그냥 넘어갈만한 것들을 선예는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그걸 살펴보고 의미를 부여하죠.
자기 삶에 충실한 건 당연한 거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선예가 저에게 관심을 가졌을리가 없어요.
보시다시피 저는 그렇게 외모가 준수하지도 않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거나 하진 않거든요.
선예가 나를 좋게 봐주니까 좋게 보이는 거지...
그런게 너무 고마웠어요."
그녀의 표정이 아까와는 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표현했다.
좋은 것만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쁜 것은 그녀도 그녀의 어머니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테니
내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오늘 아침 집을 나서는 그녀를 떠올렸다.
새벽에 그렇게 강렬한 섹스를 나누고도 그녀는 일찍 도서관에 나가 공부에 몰두했다.
도서관에서 본 그녀의 뒷모습이 나에겐 참 인상적이었다.
나와 자기 삶에 몰두하고 전념하는 그녀의 작은 등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머니가 시킨 일이긴 하지만
나는 선예를 그리는 일에 너무 몰두하고 있었다.
단지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나는 선예에게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선예의 어머니는 다정한 모습으로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어 너무 긴장을 풀어버렸나보다.
나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녀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요. 상당히 피곤했을텐데...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내 입에서 그 말이 뱉어지는 순간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 몸에서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짙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있었지만
얼굴이 빨개지고 식은땀이 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 그러니까... 제 말씀은..."
그녀는 턱을 괴고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머님.... 꿀꺽... 그러니까..."
내 생애에 이렇게 멍청하고 병신 같은 실수를 해 본적이 또 있던가?
있다. 많다. 이건 그냥 내가 평생 저지른 수천개의 실수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잃는 것은...
평생 내가 잃었던 것들 중 가장 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내 머리는 하얗게 변해버렸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고 있었다.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아~ 정말~
요~ 괫씸한 청춘들을 어떻게 하지?"
그녀의 빈정거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ㅜ_ㅜ"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아 그러니까 제가 선예랑... 부모님께 어떠한 허락도 없이... 그러니까..."
그녀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한 편의 재밌는 꽁트를 보고 있는 사람마냥 그녀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 소리를 듣고 그녀의 남편과 딸이 부엌으로 되돌아 왔다.
"무슨 일이야 당신.
아니 언제 둘이 그렇게 사이가 좋아진거야?
뭐가 그렇게 재밌어?"
"엄마 왜 그래? 오빠가 뭐라고 했어?"
"직접 물어봐요. 당신 딸래미 남자친구한테.
이렇게 재밌는 친구 정말 오랜만이네."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웃었다.
심지어 웃음 때문에 눈물이 나는지 눈가를 닦기 까지 했다.
두 부녀는 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왜그래? 오빠가 엄마 웃겼어? 우리 엄마 썰렁한 개그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녀는 애써 웃음을 참고 옆에 서있는 남편의 허리춤을 잡고 일어섰다.
"왜 그러는 거야 당신? 말 좀 해봐."
"당신 내가 어제 한 이야기 기억나요?"
"응? 무슨 얘기?
아... 그거? 당신 이 친구한테 얘기한거야?"
이해할 수 없는 부부의 대화와는 관계 없이 나는 이미 빨간 얼굴의 마신이 되어 있었다.
"이 친구가 글쎄 이실직고를 했어요. 호호호"
"이실직고라니? 제 입으로 실토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엄마 뭐? 왜 그러는데. 왜 나만 모르는 거냐고."
한참을 웃던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고는 부엌을 떠났다.
"나는 이제 이 바퀴벌레들이 뭘 하든 상관 안할꺼야.
지들 인생 지들이 알아서 살라고 해.
여행을 가든 결혼을 하든 난 몰라."
선예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아빠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고
선예 아버지는 무척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번주에 엄마가 네 원룸을 두번인가 찾아 갔었어."
"뭐? 엄마가? 그래서? 뭘 보기라도 한거야?"
"집 밖에서 볼 수 있는 건 다 본 것 같던데?"
선예는 경악을 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너네 엄마는 말이다. 이미 너희들이 어떤 사이인지 대충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너네들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었던 거지."
"아니 왜 알면서 아무 말 안한 거야?"
"일단 지켜보기로 한거지.
그러다가 일단 집으로 소환해서 이것들을 잡아먹을건지 씹어먹을건지 결정하자고 한 것도 너네 엄마였어."
나는 고개를 숙인채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뭘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도 몰랐다.
그저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두시간 후
나와 선예는 그녀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이것 저것 캐물었지만 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원룸에 도착하자 작은 쇼파에 앉아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는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어 묻기도 하고 화도 내고 협박도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었다.
그녀도 그런 나를 보고 포기했는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아버지와 통화한 그녀는 내게 등을 보인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더니 큭큭 소리를 낸다.
처음엔 그냥 큭큭 소리였지만 곧 그녀는 아까 그녀의 어머니처럼 하하하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힘 없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오빠는 정말 대단해.
도대체 엄마에게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아빠가 여행 잘 다녀오래.
엄마도 가지 말란 말은 안하나봐.
대신 피임이나 잘하라고 했다던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말해주며 안돼? 응? 도대체 어떻게 한거야?
나 궁금해죽겠단 말야."
나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고 좀비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따라 나오려는 그녀에게 한마디를 던지자 그녀는 원룸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다.
"따라 오지마. 혼자 있고 싶어."
나는 원룸을 나와 가까운 놀이터로 가서 차가운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았다.
점퍼는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금방 몸은 식어 버리고 덜덜덜 떨면서도 그냥 앉아 있었다.
나는 오늘 너무 큰 죄를 지었다.
그녀의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지켜달라는 말.
그것은 선을 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눈을 보고 다짐했다.
즉, 그녀의 눈을 보고 거짓말을 한 셈이다.
자기 딸이 저지른 실수 하나로 그녀의 부모는 작아져 있었다.
누구에게 내놔도 남 부럽지 않을 그런 사랑스러운 딸인데
그 딸은 자기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았고
그 딸을 사랑하는 부모는 기꺼이 그 딸을 따라 바닥에 내려 앉았다.
나는 오늘 그 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그 분들 앞에서 당당히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의 딸을 나에게 내주었다.
단지 딸이 원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똑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를까봐 그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나와 선예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젊은 날의 불장난으로 끝날 테지만
만약 그 때처럼 둘 사이를 반대한다면
그녀의 딸은 나에 대한 의리로 나를 지키고 사수하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그 아저씨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리 엄격하고 평판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는 한 사람의 아내로서 그런 자신을 여러번 버렸다.
미국에서 살기위해 미국에서 공부를 했지만 미국을 떠나야겠고
그나마 대기업 임원의 아내로서 살아가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지만 그마저도 버려야했다.
온갖 고생 끝에 다행히도 명성과 부를 얻는 듯 했지만
아버지를 닮은 그녀의 딸로 인해 다시한번 그녀는 자신을 버려야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쯤 어떤 기분으로 당신의 남편과 마주 앉아 있을까?
남편의 무심함을 탓하고 있을까?
딸의 무사안일을 기원하고 있을까?
추웠지만 추운줄도 모르고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을 때
선예가 다가왔다.
추위로 벌벌 떠는 내 어깨에 내 오리털 파카를 걸쳐주고는 내 옆에 앉았다.
"미안해 오빠. 내가 너무 철 없이 굴었지?
오빠랑 같이 여행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
"..."
"우리 여행 가지 말자.
오빠 혼자 다녀와.
원래 혼자 가기로 했잖아."
그래... 이게 너구나.
자기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포기도 잘 하는 것 같다.
"나도 안 갈래.
그냥 그 돈으로 데이트나 신나게 하자."
"그래도 돼?"
"그럼. 여행을 버리고 너를 얻었는데 나한텐 이루 말할 수 없는 이득이지."
그녀가 내게 기대왔다.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자 잊고 있던 추위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머, 오빠 벌벌 떨고 있잖아. 어서 들어가자.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어, 그래... 내가 여기서 뭔 객기를 부리고 있었나 모르겠다."
집에 들어오자 마자 그녀는 내게 따뜻한 커피를 타주고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빠 엄마 좀 바꿔줘요. 응. 엄마한테 할 말 있어.
엄마, 우리 여행 안가기로 했어. 응?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니야... 오빠도 가기 싫데. 응...
오빠 바꿔주라고? 알았어. 잠깐만."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았는지 아니면 심장이 떨려서인지 전화를 받는 내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여... 여보세요."
"자네 어디 안좋은가? 목소리가 왜 그래?"
"그.. 그런건 아니고요. 밖에 좀 있었는데 추... 추워서 그런가 봅니다."
"왜 안간다는 거야? 재밌게 다녀오지. 선예가 무척 기대한 모양인데."
"저 그게..."
"왜...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그 말과 함께 난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선예가 한마디 한다.
"아... 또 운다...
완전 여자라니까 여자.
꼬추 달린 여자."
터져나오는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나온다.
"자네가 왜 나한테 사과해. 그럴 필요 없어.
어이, 지금 자네 우는가?"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어머니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
"으흐흑... 거짓말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으흐흐흑..."
"그래... 사실 좀 괘씸하긴 했어.
그래도 나중에라도 알고 반성을하니...
오히려 내가 고맙고만."
"아닙니다 어머니... 으허허헝.
제가 너무... 나쁜놈 입니다. 으흐흐흑.."
"아니야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우리도 손해볼 수만은 없어서...
금방 선예 아버지하고도 얘기를 했네만...
우리 집에 아들이 없잖아.
그래서 그냥 자네 아들 삼기로 했어.
오늘 선예 아버지가 그러는데 자네가 컴퓨터 가르쳐 줘서 참 재밌었다고 그러더라고."
"고맙습니다 어머니... 으흐흐흑... 으허허헝..."
"이건 자네가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싫어도 자네가 우리 선예 데리고 가는 것처럼
자네가 싫어도 우리가 자네 아들로 삼을 생각이네.
선예랑 사귀는 동안엔 힘좀 써야 될 꺼야.
응? 뭐라고요?
잠깐만
아... 곧 군대 간다고?
하... 이 사람 정말 쓸모가 없구만 이거..."
"...."
"여튼 여행이나 잘 다녀오게"
"네..."
"그럼 이만 전화 끊겠네."
"네... 안녕히 주무십시오...."
전화를 끊자 그녀가 물어온다.
"엄마가 뭐래? 응?"
"여행 다녀오래..."
그녀의 표정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진짜루? 와~ 만세~"
그녀는 만세를 외치며 신나했다.
하지만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보더니 다시 묻는다.
"근데 왜 그렇게 시무룩해? 엄마가 뭐라고 했어?"
"나를 너네 집 아들 삼겠데..."
"뭐? 정말? ㅋㅋㅋㅋㅋㅋ 진짜 우리 엄마도 참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여튼 손해보고는 못 살아요.
근데 왜 시무룩해. 좋아해야지. 왜 오빠는 울 부모님 아들 되는 거 싫어?"
"나 곧 군대 가잖아."
"하긴 그러네. ㅎㅎㅎ"
일이 잘 해결되긴 한 것 같은데 뭔가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선예가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오빠."
"왜..."
"고마워."
"얘가 갑자기 왜..."
"오빠가 없었으면 지금쯤 난 그 아저씨 밑에 깔려서 고통과 쾌락에 신음하고 있거나
아니면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우울한 마음으로 공부나 하고 있었을 껄?"
"하긴... 나도 너 없었으면 대학 농구 코트에서 농구나 하고 겜방 가서 게임이나 하고 있었겠지..."
"그럼 우리 좋아진 거잖아..."
"그래..."
그녀가 이마를 맛대오며 말했다.
"우리 작은 것 부터 만족해보자.
나는 있잖아.지금이 너무 행복해.
앞이 좀 안 보인다고 실망하기 보다는 그냥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으로 행복하면 그걸로 족해."
그래... 이게 너구나. 너라서 참 좋다.
"고맙다. 내가 너한테 배운다."
"그렇지? 자 그럼 오늘 오빠 고생 많았으니까 내가 서비스 만땅 해드릴께요."
"아이... 뭐야 갑자기..."
"이것 봐. 이럴 땐 꼭 여자 같다니까? 아이라니... 자기라고 하질 않나..."
"야... 너... 아까도 무슨 꼬추 달린 여자라고 하질 않나... 좋아 오낼 내가 남성다움이 뭔지 보여주겠어."
"어머 정말? 기대해도 돼?"
"그... 그럼. 기대하라구."
"좋아 그럼 나 씻고 올께. 아냐 같이 씻을까?
"어 나도 그 생각했는데."
재미도 없고... 야한 씬도 없고...
그래도 이 이야기의 분수령이 되는 대목이기 때문에
패스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었습니다.
일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아서 퇴고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못난 글 읽어주시는 것 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선예 부모님댁에 도착하니 이미 공사가 한창이었다.
축사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대충봐도 기술자 여러명이 달라 붙어서 진행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제대로 걸린것 같았다.
선예는 나를 한 남자에게 끌고 갔다.
그는 무릎까지 덮는 두꺼운 오리털 점퍼를 입고 있었고
그녀의 딸이 다가오는 걸 눈치채고는 얼굴에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아빠!"
"아이고 우리 딸 왔는가?"
둘은 마치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하듯 얼싸 않으며 좋아했다.
일하던 인부들이 무슨 일인하고 쳐다보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한다.
"아니 이게 누구여. 미스 형평리 아닌가?"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려 오랜만이구만."
미스 형평리라고?
이 동네에 여자가 별로 없나 보지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고는 쑥 들어가버렸다.
"니 남자친구?"
"네. 정현 오빠에요. 우리 아부지한테 인사드려 오빠."
"처음 뵙겠습니다. 최정현이라고 합니다."
180도 인사를 하고 그가 내민 손을 잡아 악수했다.
"그려 그려. 오느라고 고생 많았네."
정말 고생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 할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다.
그녀의 작은 체구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까맣게 탄 구리빛 피부는 여느 농사꾼과 별반 다를 것 없지만
샤프하게 자른 하얀 머리와 동그란 뿔테 안경은 오히려 사업가 이미지에 가까웠다.
언젠가 아버지가 은퇴하면 농사나 짓고 살아야겠다고 하시자 우리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농사는 아무나 짓는게 아니다. 그것도 엄연히 사업이다. 그냥 텃밭이나 가꾸려면 우리집 마당으로도 충분하다.
아버지는 어머니 말에 여자가 뭘 아냐고 하시면서도 더 이상 농사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으셨다.
"오빠가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래서 일 잘 할꺼야. 맘껏 쓰셔요."
니가 무슨 내 에이전트라도 되냐. 뭘 맘껏 쓰래?
"임마. 니 남자친구면 그게 손님이어야지 어떻게 일부터 시키려고 그래?
일단 추우니까 들어가자."
"네~"
그녀가 나에게 한쪽눈으로 찡긋하더니 내 손을 끌고 그녀의 아버지를 졸졸 따라갔다.
그 때 아까 선예에게 인사하던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형님 사위라도 오셨소? 거 잘생겼네그려~"
"그죠 아저씨? 고마워요."
그녀의 아버지는 그 아저씨 쪽을 웃으면서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집안에 들어서자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반긴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선예와 비슷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고 있긴 했지만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도 반갑게 맞아 주신다.
"어서와요. 선예야 너네 밥은 먹었니?"
"아니. 먹어야 돼. 배고파 밥 좀 줘."
"안그래도 차려놨다. 어서 들어와."
맛깔나게 조리된 닭볶음을 중심으로 열가지가 넘는 반찬이 놓여있었다.
이 얼마만에 먹어보는 진수성찬인가.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요."
"아닙니다. 어머님. 이런 푸짐한 밥상 맞아본지도 되게 오랜만이네요."
내 넉살에 그리 싫지 않은 듯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타지에서 공부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 한참 배고플텐데 어여 들어요."
"내가 우리 마누라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집사람 음식 솜씨가 정말 괜찮아.
내가 식당밥을 못먹는 이유가 괜히 그런게 아니라고?"
어르신의 칭찬에 선예가 그녀의 어머니를 보고 말한다.
"아빠 또 뭐 사고쳤어? 뭔 칭찬이래?"
"말도 마라. 지금 짓는 땅도 어찌 못하면서 땅을 빚내서 또 샀다. 정말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원..."
"아니 이 사람이. 남의 호의를 그렇게 왜곡하면 쓰나?"
"호의고 나발이고 어서 드세요. 당신 때문에 이 친구 수저도 못 들고 있는거 안 보여요?"
차분한 말투지만 할 말 다하시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아버지는 나보고 어서 들라는 시늉을 하시고는 국을 떠 드셨다.
"어 시원하다. 국이 참 좋네."
"ㅋㅋㅋ 아빠도 참. 사고 제대로 쳤고만."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잘 몰라서 가만히 있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와 우리 가족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셨고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 떨어진 싱크대 앞에서 연신 무언가를 하면서도 우리의 대화에 간간히 끼어들었다.
"부친께서 교직에 계신다고?"
"네."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시고?"
"00 고등학교 출신 이십니다."
"아 그래? 내가 거기 졸업했는데?"
"아 그러십니까?"
"그럼. 부친께서 몇년 생이신가?"
"45년 생이십니다."
"허허... 나랑 동갑이고만. 졸업 언제하셨는지 아는가?"
"그건 잘..."
"이거 이거 잘 하면 동창생 아들이랑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만."
그는 선예를 시켜서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아버지 사진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네? 학교를 일찍 들어가셨을까? 이름이 익숙한데 말이지..."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어 나야. 어, 몸은 좀 어때? 아이고... 그러게 내가 뭐랬어. 집에 좀 붙어 있으랬잖아.
그래 그래. 내가 이번주 내로 함 감세. 그건 그렇고 말이지..."
아마도 다른 동창에게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그는 내 아버지에 대해 물었고 곧 답을 었었다.
"아... 그래서 여기 없구만. 자네 부친이 중간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셨다는 구만. 모르고 있었나?"
그때서야 나도 떠오르는게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세가 기울면서 할머니 혼자 일곱 형제를 감당할 수 없게되었는데
그 때 아버지는 생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학비가 없는 농고로 학교를 옮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랬구만. 그래도 00중은 나오셨겠네."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 뭐 동창이나 다름 없지. 안 그래도 00중 동창 모임에서도 몇 번 봤었어. 그냥 통성명만 하고 지내던 사이지.
그래도 이렇게 알게 되니 반갑고만. 아버지보고 언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전해줌세."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버지 옆에 붙어서 우리 둘의 대화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지켜보던 선예는
대화가 잘 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까만해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그녀와는 많이 달랐다.
"여보 여기 매실주 좀 내와요. 이 친구랑 술한잔 해야겠어."
"매실주요? 작년에 담근 거 말이에요?"
"응. 그래."
남편의 지시에 그녀는 선예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부엌을 나갔다.
"너네 아버지가 직접 담근 술을 가져 오라니. 기분 좋으신가 보다."
어느새 탁자 위에는 술상이 펼쳐져 있었다.
"자 한 잔 하세."
"네"
그 때 선예가 끼어들었다.
"오빠 술 안마시자나. 괜찮겠어?"
나는 어르신 눈치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 나 원래 술 잘마셔."
"아닐텐데..."
그러자 옆에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술을 안마신다고? 아휴 착실한 청년이네. 그래 술 같은 거 안마셔도 괜찮은 거야.
이 동네 노인네들은 그냥 맨날 술을 물 마시듯 마시는데 거기서 니네 아버지가 1등이다 1등.
아유 얼마나 꼴보기 싫은지 정말."
"이 사람이 내가 무슨 물을 술마시듯 한다는 거야?"
"물을 술 마시듯이 아니고 술을 물 마시듯 마신다고요. 술도 안 들어갔는데 벌써 말귀도 못 알아 들으시는 거에요?"
"거참. 여편네가... 딸래미 남자친구도 왔는데 거 남편 기 좀 살려주지."
"그래서 더 그러는 거에요. 술 안 마신다니까 차나 좀 들어요."
그는 입맛을 다시더니 부탁하듯 아내에게 말했다.
"아 오랜만에 젊은 친구랑 한 잔 하면서 얘기 좀 나눌랬더만... 한 잔만 할께. 응?"
"나도 그래서 술상은 바왔는데 술을 안 먹는다니까 하는 소리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 의사가 술 그만 마시랬자나요. 지방간이면 좀 조심해야지. 그러다 간경화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거 참... 이보게 우리 마누라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지? 참 나도 복 받은 놈이라니까. 껄껄껄."
그의 넉살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 담다가 사리가 걸리고 말았다.
선예가 얼른 물을 떠왔다.
"그러지 말고 술은 저녁식사나 하고 드셔요. 이 친구 일하러 왔는데 대낮부터 술마시는 건 아니지."
"아니 딸래미 손님을 어떻게 일을 시켜? 그냥 말이 그랬던 거지. 안 그냐 선예야?"
"뭐 알아서 하세요. 내가 일하나? ㅎㅎㅎ"
"지 손님 지가 챙겨야지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때 그녀의 아버지가 무릎을 탁 치더니 내게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 그렇지. 자네 컴퓨터 좀 볼줄 아는가? 얼마전에 글이나 쓰려고 구입했는데 한달 전 부터 제대로 켜지지도 않고.
사람을 불렀는데 멀다고 안오고 참 답답했거든?"
"잘은 못하지만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 서재로 가세."
컴퓨터를 켜보니 윈도우95가 깔려있긴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팅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바이러스 문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옆에 모아져 있는 디스켓을 뒤져 보았다.
다행이 백신 프로그램이 있었고 부팅 디스켓으로 재구동 한 후 치료를 시도해보았다.
드득 드득 소리가 나더니 잠시후 치료가 끝났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재부팅을 해보니 마침내 정상적으로 윈도우가 실행되었다.
"오호... 이것 참. 이렇게 간단한건가?"
"이런게 다 그렇죠. 알면 아무것도 아닌데 모를 땐 정말 사람 답답하게 만들죠."
그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작업의 순서 하나 하나 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곰꼼히 메모하는 거였다.
이해안 가는 것이 나와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떻게든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많은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한두번 설명하면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았고 내가 쓰는 용어가 뭔지를 몰라서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었다.
그는 알고 싶은 것들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을 켜고서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나는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설명을 드렸다. 학교 다니면서 친구들이랑 같이 딴 워드 프로세서 자격증이 큰 도움이 되었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컴퓨터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것들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좀 점수를 따볼 요량으로 그를 금단의 땅에 밀어 넣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pc통신이었다.
당시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시기긴 하지만 시골 구석까지 닿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pc통신이라면 전화선과 모뎀만 있으면 되니까 그걸 추천했다.
다행히 모뎀이 장착된 나름 최신 컴퓨터였고 나는 전화걸어서 통신망에 연결하는 방법과
pc통신 서비스 업체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시골 촌부지만 그의 습득력은 왠만한 젊은이들 못지 않았다.
서재에 설치된 전화기에서 전화선을 뽑아 컴퓨터에 연결하고 전화번호를 입력해 연결했다.
"삐이 삐이이 캬아아아아"
워드와 지뢰찾기의 용도로만 쓰던 그의 컴퓨터가 피씨통신과 연결되는 순간
그의 표정은 마치 처음 게임기를 접해 보는 어린 아이마냥 반짝 거렸다.
나는 그에게 본격적으로 피씨통신을 사용법을 가르치기 전에 엄격한 주의를 주었다.
"아버님 이건 전화선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장시간 이용하게 되면 상당한 전화요금이 부과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서비스에 따라서는 용량이나 여러가지 이유로 상당한 액수의 과금이 되는 것들이 있는데
무턱대고 하시면 안되고 반드시 사전에 꼼꼼히 확인하셔야 요금 폭탄을 피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그깟 전화요금 열배가 나와도 괜찮다며 어서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
그 때만 해도 나의 이런 배려가 어떤 사단을 내게 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피씨 통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두어 번 간식이나 마실 것을 들고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 왔으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아예 인식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선예에게 전해 듣기로는 남편이 고장난 컴퓨터 때문에 하도 툴툴데서 스트레스 받고 있었는데
내가 왔다 간 다음 부터는 조용해져서 너무 좋았다고 한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훗날 나와 그녀의 아버지는 한동안 그녀의 어머니로 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어느덧 저녁 때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피씨 통신에 몰두하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엌에서 큰 다툼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모녀간에 벌어지는 사소한 말다툼 정도로 생각했으나
시간이 갈 수록 언성이 높아지고 나중에는 둘의 다툼 소리가 우리에게 들릴 정도였다.
"안돼 죽어도 안돼. 니들이 여행가서 뭘 하겠어. 엉? 니들이 신혼 부부도 아니고 무슨 얼어죽을 여행이야?"
아무래도 선예가 여행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멘탈 금가는 소리가 들렸다.
수 시간 동안 애써 쌓아온 아버님과의 소중한 교감들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지금 선예 어미가 여행이라고 했어? 이게 무슨 수리야?"
"..."
말다툼은 계속되었고 급기야 그녀의 어머니가 서재로 쳐들어왔다.
"자네 나 좀 보세!"
그녀는 싸늘한 그 한마디를 서재에 던져두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마냥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그녀를 따라갔다.
"자네 선예랑 둘이서 여행 간다는 것이 사실인가?"
"네..."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
"죄송합니다."
"누가 가자고 했나?"
선예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엄마. 내가 가자고 했다니까. 원래는 오빠 혼자 군대가기 전에 여행 간댔는데 내가 따라 간다고 그랬어."
"넌 가만히 있어. 말해 보게 누가 먼저 가자고 했나?"
그녀의 아버지도 한자리 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리고 여행은 또 다 무슨 소리야?"
어머니는 예의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거 참..."
어머니는 다시 나를 주시하며 어서 대답할 것을 재촉했다.
정말 난감했다.
하지만 남자로서 총대를 메는 것이 상황을 덜 악화 시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가자고 했습니다. 선예가 많이 힘들어하길래..."
"힘들어 하면 안힘들게 해야지 왜 여행을 데리고 가? 이 사람 하는 짓이 이쁘고 건전한거 같아서 좋게 봤는데...
이렇게 사람 실망시킬텐가!"
"엄마. 아니야. 내가 먼저 가자고 했어."
"이것들이 어른을 가운데에 놓고 놀려? 누가 먼저 가자고 했든 그게 할짓이냐고 그게!"
아마도 선예는 좋은 분위기를 타고 이 기회에 자신의 여행 계획을 부모에게 알리고 공식화할 작정이었나 보다.
평소 같았으면 만만한 아버지에게 먼저 말을 꺼냈겠지만 내가 아버지와 잘 있는 것을 보고
자신감을 얻어 어머니를 설득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 없었던 일로 안하면 자네들 못 만날 줄 알아."
나와 선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던진 한마디는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 때는 그 말에 어떤 복선이 깔려있는지 우리는 몰랐다.
"젊은 애들이 사귀다 보면 좀 깊이 사귈 수도 있고 말이지... 그리고 꼭 여행을 가야 무슨 일을 저지르나?
요즘 애들이 하지 말란다고 안해? 다 큰 애들인데 지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끊어야 했다. 그의 아내가 그를 잡아 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자신의 눈길을 피하자 그녀는 냉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여튼 이 양반은 정말...
여기가 무슨 미국인 줄 알아요? 여긴 한국이에요 한국.
남녀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아직도 유효한 곳이에요.
게다가 당신이랑 이 친구 아버지랑 동창이라면서요.
만약에 둘이 여행이라도 갔다가 저쪽 집안 어르신들이 알게되면 무슨 낯으로 보려고 그러시는 거에요.
당신이 그렇게 단호하게 안하고 물렁하게 하니까 이 아이가 더 고생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미국이 좋으면 진작에 미국에서 눌러 살 것이지.
왜 한국에 와서 마누라 생고생 시키고 딸아이 시집 못가게 만들고 그러는 거에요?"
아내의 논리정연한 일침에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서재로 돌아갔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그녀는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나에게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네.
자네들 나이에 연애도 하고 서로 사랑도 하고 그럴 수 있는 거 당연한 거지.
난 오히려 우리 선예가 자기의 젊은 청춘을 마음껏 즐기고 만끽하길 바란다네.
하지만 우리 선예는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큰 실수를 저질렀어.
우리 아이가 솔직한 아이라 이미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아이가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두고 두고 꼬리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나를 너무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정말 우리 아이가 좋다면 곁에서 잘 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게 도리지 않은가?"
그녀는 힘이 들었는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당신의 딸의 머리를 정돈해주면서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녀석이 그런 말도 안되는 결정을 했는지 엄마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잘못한 건지, 아빠가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니가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안될 일이었는지..."
선예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거의 울것 같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이름이 정현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
"우리 딸 이쁘게 봐줘서 고맙네. 선예가 자네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구만.
나도 보니까 좋은 부모 밑에서 잘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예의도 바르고..."
"아닙니다. 많이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겸손할 줄도 알고...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야.
제발 부탁인데 사귀는 동안 우리 딸 좀 잘 지켜주게."
"알겠습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 나와 약속했네."
"알겠습니다"
"아무리 자네나 선예가 나이가 어리고 또 세상이 바꼈다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야.
그걸 지키지 않았을 때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후회할 일들이 생길 수가 있어.
막말로 자네 우리 딸이랑 결혼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엄마 내가 나이가 몇 갠데 결혼 얘기를 해?"
하지만 그녀는 딸을 무시하고 나에게 말했다.
"어디 한 번 말해보게. 보아하니 선예가 이것 저것 다 말해준 것 같은데. 그렇지?"
"네... 어느 정도는..."
"자네 부모라면 이런 여식이 며느리로 들어오면 받아줄 것 같은가?"
나는 선예를 바라봤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테이블보에 인쇄된 장미 그림을 손으로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아마도 저희 부모님은 아마 제 결정을 지지해주실 것 같습니다."
"전적으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당신들이 원하시는 며느리상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 어머니 같은 경우는...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자면,
아무리 연애를 한다고 해도 늘 결혼을 염두해두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어머니 생각에 동의하고요.
그건 당연히 선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얘기해 본 적은 없고...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선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그녀와 잠깐 눈을 맞추고는 고개를 숙였다.
왠지 쑥스러웠다.
"그랬구먼. 좋은 이야기야. 아무리 가볍게 사귄다고 해도 사람의 인연은 때로는 무서운 거거든."
그녀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언젠가 부터 부엌에 걸린 시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침울했지만 그렇다고 절망적이진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선예가 어디가 좋은가? 듣고 싶네. 우리 딸이 어떤지."
"엄마... 지금 뭐하는 거야. 무슨 취조하는 것도 아니고..."
"왜 너랑 결혼할 생각도 있다는데. 나도 아무한테나 내 딸 줄 수 없잖아.
니 친구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엄마가 알면 안돼?"
"그 말이 아니잖아. 그냥 그런 마음으로 만나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결혼 생각해 본 적 없어."
"마음이 있고 없고는 정말 중요한 거야. 그리고 그게 너랑 다른 점이지."
"나는 이런 얘기 듣고 싶지 않다고. 나 나갈래."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부엌에서 뛰쳐 나갔다.
곧 쾅 닫히는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해보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선예는... 뭐랄까...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게 무슨 변덕 그런건 아닌 것 같고요.
약간 충동적일 수는 있긴 하지만...
선예는... 그러니까... 어떤 순간이나 상황에 충실하는 것 같습니다.
순간에 충실하면 그게 충동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요."
"너무 좋게 얘기하려고 하지 마. 그 아이가 너무 충동적으로 뭔가를 결정하는 건 나도 잘 아니까."
"만난지 얼마 안 됐는데 제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냥 느끼는 대로 말씀드리는 거에요."
나는 새벽같이 도서관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과 나를 위해 옷을 사고 요리해주던 기억을 떠올렸다.
"순간이든 상황이든 사람이든 간에
선예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 그냥 지나치는 것 같지 않았어요.
저 같으면 이익이 되지 않거나 특별한 의미가 없으니
무시하고 그냥 넘어갈만한 것들을 선예는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그걸 살펴보고 의미를 부여하죠.
자기 삶에 충실한 건 당연한 거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선예가 저에게 관심을 가졌을리가 없어요.
보시다시피 저는 그렇게 외모가 준수하지도 않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거나 하진 않거든요.
선예가 나를 좋게 봐주니까 좋게 보이는 거지...
그런게 너무 고마웠어요."
그녀의 표정이 아까와는 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표현했다.
좋은 것만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쁜 것은 그녀도 그녀의 어머니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테니
내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오늘 아침 집을 나서는 그녀를 떠올렸다.
새벽에 그렇게 강렬한 섹스를 나누고도 그녀는 일찍 도서관에 나가 공부에 몰두했다.
도서관에서 본 그녀의 뒷모습이 나에겐 참 인상적이었다.
나와 자기 삶에 몰두하고 전념하는 그녀의 작은 등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머니가 시킨 일이긴 하지만
나는 선예를 그리는 일에 너무 몰두하고 있었다.
단지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나는 선예에게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선예의 어머니는 다정한 모습으로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어 너무 긴장을 풀어버렸나보다.
나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녀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요. 상당히 피곤했을텐데...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내 입에서 그 말이 뱉어지는 순간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 몸에서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짙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있었지만
얼굴이 빨개지고 식은땀이 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 그러니까... 제 말씀은..."
그녀는 턱을 괴고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머님.... 꿀꺽... 그러니까..."
내 생애에 이렇게 멍청하고 병신 같은 실수를 해 본적이 또 있던가?
있다. 많다. 이건 그냥 내가 평생 저지른 수천개의 실수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잃는 것은...
평생 내가 잃었던 것들 중 가장 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내 머리는 하얗게 변해버렸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리고 있었다.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아~ 정말~
요~ 괫씸한 청춘들을 어떻게 하지?"
그녀의 빈정거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ㅜ_ㅜ"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아 그러니까 제가 선예랑... 부모님께 어떠한 허락도 없이... 그러니까..."
그녀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한 편의 재밌는 꽁트를 보고 있는 사람마냥 그녀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 소리를 듣고 그녀의 남편과 딸이 부엌으로 되돌아 왔다.
"무슨 일이야 당신.
아니 언제 둘이 그렇게 사이가 좋아진거야?
뭐가 그렇게 재밌어?"
"엄마 왜 그래? 오빠가 뭐라고 했어?"
"직접 물어봐요. 당신 딸래미 남자친구한테.
이렇게 재밌는 친구 정말 오랜만이네."
그녀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웃었다.
심지어 웃음 때문에 눈물이 나는지 눈가를 닦기 까지 했다.
두 부녀는 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왜그래? 오빠가 엄마 웃겼어? 우리 엄마 썰렁한 개그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녀는 애써 웃음을 참고 옆에 서있는 남편의 허리춤을 잡고 일어섰다.
"왜 그러는 거야 당신? 말 좀 해봐."
"당신 내가 어제 한 이야기 기억나요?"
"응? 무슨 얘기?
아... 그거? 당신 이 친구한테 얘기한거야?"
이해할 수 없는 부부의 대화와는 관계 없이 나는 이미 빨간 얼굴의 마신이 되어 있었다.
"이 친구가 글쎄 이실직고를 했어요. 호호호"
"이실직고라니? 제 입으로 실토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엄마 뭐? 왜 그러는데. 왜 나만 모르는 거냐고."
한참을 웃던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고는 부엌을 떠났다.
"나는 이제 이 바퀴벌레들이 뭘 하든 상관 안할꺼야.
지들 인생 지들이 알아서 살라고 해.
여행을 가든 결혼을 하든 난 몰라."
선예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아빠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고
선예 아버지는 무척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번주에 엄마가 네 원룸을 두번인가 찾아 갔었어."
"뭐? 엄마가? 그래서? 뭘 보기라도 한거야?"
"집 밖에서 볼 수 있는 건 다 본 것 같던데?"
선예는 경악을 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너네 엄마는 말이다. 이미 너희들이 어떤 사이인지 대충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너네들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었던 거지."
"아니 왜 알면서 아무 말 안한 거야?"
"일단 지켜보기로 한거지.
그러다가 일단 집으로 소환해서 이것들을 잡아먹을건지 씹어먹을건지 결정하자고 한 것도 너네 엄마였어."
나는 고개를 숙인채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뭘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도 몰랐다.
그저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두시간 후
나와 선예는 그녀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이것 저것 캐물었지만 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원룸에 도착하자 작은 쇼파에 앉아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는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어 묻기도 하고 화도 내고 협박도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었다.
그녀도 그런 나를 보고 포기했는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아버지와 통화한 그녀는 내게 등을 보인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더니 큭큭 소리를 낸다.
처음엔 그냥 큭큭 소리였지만 곧 그녀는 아까 그녀의 어머니처럼 하하하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힘 없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오빠는 정말 대단해.
도대체 엄마에게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아빠가 여행 잘 다녀오래.
엄마도 가지 말란 말은 안하나봐.
대신 피임이나 잘하라고 했다던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말해주며 안돼? 응? 도대체 어떻게 한거야?
나 궁금해죽겠단 말야."
나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고 좀비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따라 나오려는 그녀에게 한마디를 던지자 그녀는 원룸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다.
"따라 오지마. 혼자 있고 싶어."
나는 원룸을 나와 가까운 놀이터로 가서 차가운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았다.
점퍼는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금방 몸은 식어 버리고 덜덜덜 떨면서도 그냥 앉아 있었다.
나는 오늘 너무 큰 죄를 지었다.
그녀의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지켜달라는 말.
그것은 선을 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눈을 보고 다짐했다.
즉, 그녀의 눈을 보고 거짓말을 한 셈이다.
자기 딸이 저지른 실수 하나로 그녀의 부모는 작아져 있었다.
누구에게 내놔도 남 부럽지 않을 그런 사랑스러운 딸인데
그 딸은 자기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았고
그 딸을 사랑하는 부모는 기꺼이 그 딸을 따라 바닥에 내려 앉았다.
나는 오늘 그 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그 분들 앞에서 당당히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의 딸을 나에게 내주었다.
단지 딸이 원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똑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를까봐 그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나와 선예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젊은 날의 불장난으로 끝날 테지만
만약 그 때처럼 둘 사이를 반대한다면
그녀의 딸은 나에 대한 의리로 나를 지키고 사수하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그 아저씨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리 엄격하고 평판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는 한 사람의 아내로서 그런 자신을 여러번 버렸다.
미국에서 살기위해 미국에서 공부를 했지만 미국을 떠나야겠고
그나마 대기업 임원의 아내로서 살아가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지만 그마저도 버려야했다.
온갖 고생 끝에 다행히도 명성과 부를 얻는 듯 했지만
아버지를 닮은 그녀의 딸로 인해 다시한번 그녀는 자신을 버려야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쯤 어떤 기분으로 당신의 남편과 마주 앉아 있을까?
남편의 무심함을 탓하고 있을까?
딸의 무사안일을 기원하고 있을까?
추웠지만 추운줄도 모르고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을 때
선예가 다가왔다.
추위로 벌벌 떠는 내 어깨에 내 오리털 파카를 걸쳐주고는 내 옆에 앉았다.
"미안해 오빠. 내가 너무 철 없이 굴었지?
오빠랑 같이 여행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
"..."
"우리 여행 가지 말자.
오빠 혼자 다녀와.
원래 혼자 가기로 했잖아."
그래... 이게 너구나.
자기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포기도 잘 하는 것 같다.
"나도 안 갈래.
그냥 그 돈으로 데이트나 신나게 하자."
"그래도 돼?"
"그럼. 여행을 버리고 너를 얻었는데 나한텐 이루 말할 수 없는 이득이지."
그녀가 내게 기대왔다.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자 잊고 있던 추위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머, 오빠 벌벌 떨고 있잖아. 어서 들어가자.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어, 그래... 내가 여기서 뭔 객기를 부리고 있었나 모르겠다."
집에 들어오자 마자 그녀는 내게 따뜻한 커피를 타주고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빠 엄마 좀 바꿔줘요. 응. 엄마한테 할 말 있어.
엄마, 우리 여행 안가기로 했어. 응?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니야... 오빠도 가기 싫데. 응...
오빠 바꿔주라고? 알았어. 잠깐만."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았는지 아니면 심장이 떨려서인지 전화를 받는 내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여... 여보세요."
"자네 어디 안좋은가? 목소리가 왜 그래?"
"그.. 그런건 아니고요. 밖에 좀 있었는데 추... 추워서 그런가 봅니다."
"왜 안간다는 거야? 재밌게 다녀오지. 선예가 무척 기대한 모양인데."
"저 그게..."
"왜...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그 말과 함께 난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선예가 한마디 한다.
"아... 또 운다...
완전 여자라니까 여자.
꼬추 달린 여자."
터져나오는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나온다.
"자네가 왜 나한테 사과해. 그럴 필요 없어.
어이, 지금 자네 우는가?"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어머니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
"으흐흑... 거짓말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으흐흐흑..."
"그래... 사실 좀 괘씸하긴 했어.
그래도 나중에라도 알고 반성을하니...
오히려 내가 고맙고만."
"아닙니다 어머니... 으허허헝.
제가 너무... 나쁜놈 입니다. 으흐흐흑.."
"아니야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우리도 손해볼 수만은 없어서...
금방 선예 아버지하고도 얘기를 했네만...
우리 집에 아들이 없잖아.
그래서 그냥 자네 아들 삼기로 했어.
오늘 선예 아버지가 그러는데 자네가 컴퓨터 가르쳐 줘서 참 재밌었다고 그러더라고."
"고맙습니다 어머니... 으흐흐흑... 으허허헝..."
"이건 자네가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싫어도 자네가 우리 선예 데리고 가는 것처럼
자네가 싫어도 우리가 자네 아들로 삼을 생각이네.
선예랑 사귀는 동안엔 힘좀 써야 될 꺼야.
응? 뭐라고요?
잠깐만
아... 곧 군대 간다고?
하... 이 사람 정말 쓸모가 없구만 이거..."
"...."
"여튼 여행이나 잘 다녀오게"
"네..."
"그럼 이만 전화 끊겠네."
"네... 안녕히 주무십시오...."
전화를 끊자 그녀가 물어온다.
"엄마가 뭐래? 응?"
"여행 다녀오래..."
그녀의 표정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진짜루? 와~ 만세~"
그녀는 만세를 외치며 신나했다.
하지만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보더니 다시 묻는다.
"근데 왜 그렇게 시무룩해? 엄마가 뭐라고 했어?"
"나를 너네 집 아들 삼겠데..."
"뭐? 정말? ㅋㅋㅋㅋㅋㅋ 진짜 우리 엄마도 참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여튼 손해보고는 못 살아요.
근데 왜 시무룩해. 좋아해야지. 왜 오빠는 울 부모님 아들 되는 거 싫어?"
"나 곧 군대 가잖아."
"하긴 그러네. ㅎㅎㅎ"
일이 잘 해결되긴 한 것 같은데 뭔가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선예가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오빠."
"왜..."
"고마워."
"얘가 갑자기 왜..."
"오빠가 없었으면 지금쯤 난 그 아저씨 밑에 깔려서 고통과 쾌락에 신음하고 있거나
아니면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우울한 마음으로 공부나 하고 있었을 껄?"
"하긴... 나도 너 없었으면 대학 농구 코트에서 농구나 하고 겜방 가서 게임이나 하고 있었겠지..."
"그럼 우리 좋아진 거잖아..."
"그래..."
그녀가 이마를 맛대오며 말했다.
"우리 작은 것 부터 만족해보자.
나는 있잖아.지금이 너무 행복해.
앞이 좀 안 보인다고 실망하기 보다는 그냥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으로 행복하면 그걸로 족해."
그래... 이게 너구나. 너라서 참 좋다.
"고맙다. 내가 너한테 배운다."
"그렇지? 자 그럼 오늘 오빠 고생 많았으니까 내가 서비스 만땅 해드릴께요."
"아이... 뭐야 갑자기..."
"이것 봐. 이럴 땐 꼭 여자 같다니까? 아이라니... 자기라고 하질 않나..."
"야... 너... 아까도 무슨 꼬추 달린 여자라고 하질 않나... 좋아 오낼 내가 남성다움이 뭔지 보여주겠어."
"어머 정말? 기대해도 돼?"
"그... 그럼. 기대하라구."
"좋아 그럼 나 씻고 올께. 아냐 같이 씻을까?
"어 나도 그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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