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조병화 시인의 말처럼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기 때문일까? 비를 좋아하는 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과거라고 부를만 한게 있을까 되물어본다. 누군가 내 과거를 듣는다면 안타까워 할지언정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비를 좋아한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뿌려져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모든 생각을 잊고 그 방울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나도 같이 걷는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걷다가 창틀 아래에서 멈춰 선 물방울이 사랑하는 이에게 이별을 고하듯 잠시 멈춰서 아쉬움을 달래고는 창틀 아래로 사라지면 나는 다시 위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른 빗방울을 찾는다. 그리고 다시 그 방울과 함께 길을 걷는다.
"과제는 다음 주까지 제출하세요"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의자를 뒤로 밀치는 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수업이 끝나는지도 모른채 나는 비오는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방을 챙겨들고 텅빈 강의실을 나왔을 때 건물 중앙에 있는 락커룸에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몇몇의 무리들은 1년에 수십번도 더 오는 비를 핑계삼아 술 마실 궁리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꺼내려고 사물함을 열고 있었다.
"비 맞으러 갈 사람!!"
그 때 한 무리에서 어떤 남자가 갑자기 소리쳤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미친놈 쳐다보듯 그 남자를 쳐다보았고 나도 그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 남자의 옆에 서 있던 한 친구가 그의 뒷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니가 무슨 로맨티스트냐!"
"아무도 없어?"
그는 무리중에 한 귀여운 여자애를 쳐다보면서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무심한 얼굴로 그 눈빛을 피했다.
"정말 없어? 그럼 나 혼자 간다?"
나의 그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다. 비를 즐기려면 온 몸으로 비를 맞아야한다. 나처럼 유리창 너머로 비를 즐기는 것도, 술집 구석에 앉아 비를 예찬하는 것도 비를 즐기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 친구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로맨티스트인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애절하게 따뜻한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피하는 그 여자아이였다.
오기가 생긴 듯 그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나는 우산을 가방에 집어넣고 그를 뒤따랐다.
그는 건물 입구에 서서 구멍이 난 듯 비를 쏟아붓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비를 맞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한숨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옆에 섰다. 같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가 나를 쳐다봤다. 나도 그를 쳐다봤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우산 없으세요?"
"네.."
"빌려 드릴까요?"
"괜찮아요"
내가 빗속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시멘트 바닥에 수많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던 웅덩이의 물이 찰팍거리며 갈라졌다. 일그러진 웅덩이 위로 그도 나를 따라 한 발을 내디뎠다.
그는 구세주를 만난 듯 나를 뒤쫓아왔다.
"근데.. 말 놓으세요. 선배"
"..."
"2학년 김태우라고 합니다."
나는 그가 누군인지 몰랐다. 같은 건물에서 몇 번 본 것같긴 했지만 이름도 몰랐고 몇 학번인지 몰랐다. 그는 나를 알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는 것. 그것은 자위를 하는데 꼭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같은 찝찝한 것이었다.
"선배.. 과에서 유명한거 알죠?"
"왜?"
"여러가지로요..."
멋적게 웃으며 말하며 그의 얼굴에는 빗방울이 하나 흘러내리고 있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빗방울은 꼭 눈물처럼 보였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알아서 좋을게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말이 없다거나 도도하다든지 수녀원에 다녀왔다거나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1년의 휴학을 하고 왔을 때 얼핏 들었던 이야기였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학교 밖으로 나왔다. 그가 갑자기 모퉁이의 조그마한 꽃집을 발견하고는 뛰어가 장미 한송이를 사 왔다.
"이건 오늘 데이트 선물이에요.."
나는 그가 내미는 장미를 보면서 가시돋힌 줄기로 맞아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비를 맞으며 걷는 내내 난 엄지손가락을 장미 가시에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꽃을 좋아하는걸 보면 나도 여자인가보다"
그렇게 데이트는 끝이 났다. 그가 조금만 더 남자다웠다면, 아니 그가 조금만 질척대기만 햇어도 나는 그의 물건을 받아드릴 마음이 있었다.
그는 홀딱 젖은 내가 버스에 오르는 걸 보고는 어디론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이후, 그는 나랑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학부건물에서 나를 보고는 아는 척 인사를 했고 같이 몰려다니는 무리의 남자애들이 그런 그에게 어떻게 저 선배랑 알게 되었냐며 웅성거리며 그의 뒷통수를 때려댔다. 물론 무리중에 그 여자아이가 나를 째려보는 듯한 따끔거림도 느겼다.
"선배!"
누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손을 흔들며 계단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집에 가세요?"
"응. 친구들은?"
그의 주위에 늘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없다는게 이상했다. 그는 두 명은 일이 있어서 일찍 집에 가고, 둘은 같이 어디갔다고 했다. 왜 그 둘이랑 같이 가지 않냐는 물었을 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는 교문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없이 걷기만 했다. 나는 그에게 딱히 이야기 할 것이 없었고 그도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선배.. 술 사주세요!"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지갑을 꺼내들자 그는 그렇게 말했다. 살갑게 대하는 그가 싫지 않았다. 늘 혼자인게 익숙해서 누군가 다가오면 오면 부담스럽고 긴장되긴 했지만 그건 익숙함일 뿐이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그는 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둘이 사귀는거 같애요. 오늘 둘이 따로 노는거 같아서 따라가기도 눈치보이고..."
아마도 그 무리중에 유일한 여자애와 다른 남자애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여자애는 그의 뜨거운 눈빛을 외면하던 그 여자애가 분명했다.
"친구라 더 어려워요.. 그 놈이 친구만 아니면 어떻게든 해 볼텐데 저 때문에 모임 분위기 망칠 수도 없고.."
내가 해 줄 말은 없었다. 그의 잔이 비면 술을 따라주고 그의 말이 멈추면 잔을 부딪혀 줄 뿐이었다.
비는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왜 사람들은 같은 비를 이슬비라고도, 보슬비라고 부르고 또 가랑비라고 부를까? 보지와 씹 그리고 구멍 정도의 차이일까? 그 날 지하 술집 계단을 걸어올라오면서 맡은 냄새는 단비의 냄새였다. 꼭 필요할 때 내려주는 달달한 꿀맛같은 비였다.
우리 둘은 계단 입구에서 비오는 어둑한 거리를 쳐다보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빗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학교앞 가게 문을 곧 닫으려는 꽃집에서 다시 장미 한 송이를 사 나에게 주었다. 수줍은 봉오리를 하고 막 피어라려는 장미는 제 값을 받지만, 이미 피어버린 장미는 아무도 사가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달랑 하나 남아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한, 활짝 피어 내 벌어진 보지처럼 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장미를 샀다.
말없이 뚜벅뚜벅 걷기만 했다.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고도 두개의 버스정류장을 더 지나치고 있었다.
"집이 어디에요?"
"좀 멀어.."
"어떻게 집에 갈려구요?"
"그냥 가면 돼.."
"그러다 감기걸려요.."
장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장미 한송이 값이 얼마정도일까 생각해보면서 나는 서로 만족할만한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학부의 후배라는게 나에게는 조금 위험한 거래였지만 나는 그의 애절하게 끓어오르던 그 눈빛을 믿었다.
"너는 집이 어디야?"
"저기.."
그는 한 원룸 건물을 가리켰다.
"그럼 옷이라도 좀 말리고 가까?"
"그래요!"
그를 따라 들어선 원룸은 꽤 지저분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방가운데 놓여있던 소주병이 올려진 밥상을 치웠고 나는 빗물을 뚝뚝 흘리며 가만히 문앞에 서 있었다.
"먼저 좀 씻으세요."
"수건 좀 줘.."
수건으로 받아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젖은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아직도 문 너머로 분주하게 뭔가를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입을만한 거 없어?"
나는 살짝 문을 열고 그에게 부탁했고 문틈 사이로 그가 건낸 티셔츠와 운동복을 받아들었다. 팬티와 브라는 조금 젖긴 했지만 입을만했다. 나는 샤워기를 틀어 팬티와 브라를 물에 적셨다.
젖은 옷가지들을 들고 나왔을 때 그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나를 한번 밑에서 위로 ?어올리다가 티셔츠 아래의 도드라진 유두위에 잠시 멈춰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언제 갈아입었는지 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내 눈길을 피하며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들고 욕실안으로 들어갔다.
옷걸이 하나를 찾아 팬티와 브라, 그리고 민소매티를 걸고는 구석에 놓인 선풍기를 켜고는 그 위에 걸었다. 낮선 여자 속옷을 처음 본 듯한 선풍기는 곧 사정할 것 같이 헐떡거리며 붕붕거리는 소리를 냈다. 드라이기를 찾아 머리를 대충 말리고는 청바지 사이로 밀어넣었다. 스위치를 켜자 드라이기는 웅웅거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청바지는 발기된 물건처럼 금새 부풀어 올라 하얀 증기를 품어냈다.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에 부풀어오른 청바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한쪽 구석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를 보더니 그는 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눈 둘 만한 곳을 찾았다. 그는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TV를 켰다.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에 TV 소리를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그는 멍하니 계속 TV만 바라보았다.
나는 청바지를 대충 말리고는 난 후, 블라우스 단추를 꼭꼭 닫아걸고는 그 안으로 드라이기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 때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조병화 시인의 말처럼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기 때문일까? 비를 좋아하는 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과거라고 부를만 한게 있을까 되물어본다. 누군가 내 과거를 듣는다면 안타까워 할지언정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비를 좋아한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뿌려져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모든 생각을 잊고 그 방울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나도 같이 걷는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걷다가 창틀 아래에서 멈춰 선 물방울이 사랑하는 이에게 이별을 고하듯 잠시 멈춰서 아쉬움을 달래고는 창틀 아래로 사라지면 나는 다시 위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른 빗방울을 찾는다. 그리고 다시 그 방울과 함께 길을 걷는다.
"과제는 다음 주까지 제출하세요"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의자를 뒤로 밀치는 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수업이 끝나는지도 모른채 나는 비오는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방을 챙겨들고 텅빈 강의실을 나왔을 때 건물 중앙에 있는 락커룸에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몇몇의 무리들은 1년에 수십번도 더 오는 비를 핑계삼아 술 마실 궁리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꺼내려고 사물함을 열고 있었다.
"비 맞으러 갈 사람!!"
그 때 한 무리에서 어떤 남자가 갑자기 소리쳤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미친놈 쳐다보듯 그 남자를 쳐다보았고 나도 그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 남자의 옆에 서 있던 한 친구가 그의 뒷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니가 무슨 로맨티스트냐!"
"아무도 없어?"
그는 무리중에 한 귀여운 여자애를 쳐다보면서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무심한 얼굴로 그 눈빛을 피했다.
"정말 없어? 그럼 나 혼자 간다?"
나의 그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다. 비를 즐기려면 온 몸으로 비를 맞아야한다. 나처럼 유리창 너머로 비를 즐기는 것도, 술집 구석에 앉아 비를 예찬하는 것도 비를 즐기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 친구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로맨티스트인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애절하게 따뜻한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피하는 그 여자아이였다.
오기가 생긴 듯 그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나는 우산을 가방에 집어넣고 그를 뒤따랐다.
그는 건물 입구에 서서 구멍이 난 듯 비를 쏟아붓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비를 맞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한숨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옆에 섰다. 같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가 나를 쳐다봤다. 나도 그를 쳐다봤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우산 없으세요?"
"네.."
"빌려 드릴까요?"
"괜찮아요"
내가 빗속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시멘트 바닥에 수많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던 웅덩이의 물이 찰팍거리며 갈라졌다. 일그러진 웅덩이 위로 그도 나를 따라 한 발을 내디뎠다.
그는 구세주를 만난 듯 나를 뒤쫓아왔다.
"근데.. 말 놓으세요. 선배"
"..."
"2학년 김태우라고 합니다."
나는 그가 누군인지 몰랐다. 같은 건물에서 몇 번 본 것같긴 했지만 이름도 몰랐고 몇 학번인지 몰랐다. 그는 나를 알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는 것. 그것은 자위를 하는데 꼭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같은 찝찝한 것이었다.
"선배.. 과에서 유명한거 알죠?"
"왜?"
"여러가지로요..."
멋적게 웃으며 말하며 그의 얼굴에는 빗방울이 하나 흘러내리고 있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빗방울은 꼭 눈물처럼 보였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알아서 좋을게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말이 없다거나 도도하다든지 수녀원에 다녀왔다거나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1년의 휴학을 하고 왔을 때 얼핏 들었던 이야기였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학교 밖으로 나왔다. 그가 갑자기 모퉁이의 조그마한 꽃집을 발견하고는 뛰어가 장미 한송이를 사 왔다.
"이건 오늘 데이트 선물이에요.."
나는 그가 내미는 장미를 보면서 가시돋힌 줄기로 맞아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비를 맞으며 걷는 내내 난 엄지손가락을 장미 가시에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꽃을 좋아하는걸 보면 나도 여자인가보다"
그렇게 데이트는 끝이 났다. 그가 조금만 더 남자다웠다면, 아니 그가 조금만 질척대기만 햇어도 나는 그의 물건을 받아드릴 마음이 있었다.
그는 홀딱 젖은 내가 버스에 오르는 걸 보고는 어디론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이후, 그는 나랑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학부건물에서 나를 보고는 아는 척 인사를 했고 같이 몰려다니는 무리의 남자애들이 그런 그에게 어떻게 저 선배랑 알게 되었냐며 웅성거리며 그의 뒷통수를 때려댔다. 물론 무리중에 그 여자아이가 나를 째려보는 듯한 따끔거림도 느겼다.
"선배!"
누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손을 흔들며 계단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집에 가세요?"
"응. 친구들은?"
그의 주위에 늘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없다는게 이상했다. 그는 두 명은 일이 있어서 일찍 집에 가고, 둘은 같이 어디갔다고 했다. 왜 그 둘이랑 같이 가지 않냐는 물었을 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는 교문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없이 걷기만 했다. 나는 그에게 딱히 이야기 할 것이 없었고 그도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선배.. 술 사주세요!"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지갑을 꺼내들자 그는 그렇게 말했다. 살갑게 대하는 그가 싫지 않았다. 늘 혼자인게 익숙해서 누군가 다가오면 오면 부담스럽고 긴장되긴 했지만 그건 익숙함일 뿐이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그는 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둘이 사귀는거 같애요. 오늘 둘이 따로 노는거 같아서 따라가기도 눈치보이고..."
아마도 그 무리중에 유일한 여자애와 다른 남자애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여자애는 그의 뜨거운 눈빛을 외면하던 그 여자애가 분명했다.
"친구라 더 어려워요.. 그 놈이 친구만 아니면 어떻게든 해 볼텐데 저 때문에 모임 분위기 망칠 수도 없고.."
내가 해 줄 말은 없었다. 그의 잔이 비면 술을 따라주고 그의 말이 멈추면 잔을 부딪혀 줄 뿐이었다.
비는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왜 사람들은 같은 비를 이슬비라고도, 보슬비라고 부르고 또 가랑비라고 부를까? 보지와 씹 그리고 구멍 정도의 차이일까? 그 날 지하 술집 계단을 걸어올라오면서 맡은 냄새는 단비의 냄새였다. 꼭 필요할 때 내려주는 달달한 꿀맛같은 비였다.
우리 둘은 계단 입구에서 비오는 어둑한 거리를 쳐다보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빗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학교앞 가게 문을 곧 닫으려는 꽃집에서 다시 장미 한 송이를 사 나에게 주었다. 수줍은 봉오리를 하고 막 피어라려는 장미는 제 값을 받지만, 이미 피어버린 장미는 아무도 사가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달랑 하나 남아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한, 활짝 피어 내 벌어진 보지처럼 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장미를 샀다.
말없이 뚜벅뚜벅 걷기만 했다.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고도 두개의 버스정류장을 더 지나치고 있었다.
"집이 어디에요?"
"좀 멀어.."
"어떻게 집에 갈려구요?"
"그냥 가면 돼.."
"그러다 감기걸려요.."
장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장미 한송이 값이 얼마정도일까 생각해보면서 나는 서로 만족할만한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학부의 후배라는게 나에게는 조금 위험한 거래였지만 나는 그의 애절하게 끓어오르던 그 눈빛을 믿었다.
"너는 집이 어디야?"
"저기.."
그는 한 원룸 건물을 가리켰다.
"그럼 옷이라도 좀 말리고 가까?"
"그래요!"
그를 따라 들어선 원룸은 꽤 지저분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방가운데 놓여있던 소주병이 올려진 밥상을 치웠고 나는 빗물을 뚝뚝 흘리며 가만히 문앞에 서 있었다.
"먼저 좀 씻으세요."
"수건 좀 줘.."
수건으로 받아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젖은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아직도 문 너머로 분주하게 뭔가를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입을만한 거 없어?"
나는 살짝 문을 열고 그에게 부탁했고 문틈 사이로 그가 건낸 티셔츠와 운동복을 받아들었다. 팬티와 브라는 조금 젖긴 했지만 입을만했다. 나는 샤워기를 틀어 팬티와 브라를 물에 적셨다.
젖은 옷가지들을 들고 나왔을 때 그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길은 나를 한번 밑에서 위로 ?어올리다가 티셔츠 아래의 도드라진 유두위에 잠시 멈춰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언제 갈아입었는지 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내 눈길을 피하며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들고 욕실안으로 들어갔다.
옷걸이 하나를 찾아 팬티와 브라, 그리고 민소매티를 걸고는 구석에 놓인 선풍기를 켜고는 그 위에 걸었다. 낮선 여자 속옷을 처음 본 듯한 선풍기는 곧 사정할 것 같이 헐떡거리며 붕붕거리는 소리를 냈다. 드라이기를 찾아 머리를 대충 말리고는 청바지 사이로 밀어넣었다. 스위치를 켜자 드라이기는 웅웅거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청바지는 발기된 물건처럼 금새 부풀어 올라 하얀 증기를 품어냈다.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에 부풀어오른 청바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한쪽 구석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를 보더니 그는 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눈 둘 만한 곳을 찾았다. 그는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TV를 켰다.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에 TV 소리를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그는 멍하니 계속 TV만 바라보았다.
나는 청바지를 대충 말리고는 난 후, 블라우스 단추를 꼭꼭 닫아걸고는 그 안으로 드라이기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 때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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