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어김없이 수업시간이 되었고 초인종 소리에 나가 보니 은주가 서있다.
방으로 들어와 자연스레 컴퓨터 앞에 앉는 은주.
"저기 어제는.."
"수업 어디까지 했었지? 내부 명령어 하다 말았던 것 같은데 책 줘봐.."
거식이 어제의 상황에 대해 물어 보려 하는데 자리에 앉자 마자 수업 이야기를 하는 은주이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이야기를 해야 겠다 생각하고 수업을 진행해 나간다.
어제도 예뻤지만 오늘은 더 예쁜 은주이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노란쪼기를 입은 모습은 영락없는 봄처녀이다.
유난히 붉은 립스틱이 시선을 끌어 온다.
얼굴을 잡고 마구 빨아대고 싶은 욕망을 어렵게 눌러 본다.
타자를 치는 은주의 긴 손가락 그리고 손가락 끝에 칠해진 하얀 메니큐어가 거식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다시 한번 지난 밤의 은주를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은주의 옆으로 움직인 거식이 살며시 은주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치워.."
"......"
작지만 단호한 한마디.
이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손을 치울 수 밖에 없는 거식이었다.
차거운 윤주의 시선이 눈에 들어온다.
그 후 몇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윤주는 수업 받는 것 외에 특별한 말을 허락조차 하지 않았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주말이 되어 경아가 집으로 왔다.
대학교에 다니는 경아는 레포트 위주의 수업이 필요하다고 했고 컴퓨터의 기본 명령어 수업에 이어 바로 아래한글 수업을 시작했다.
기본적인 자판을 알고 있어 어렵지 않게 도표그리기 선그리기 및 각종 도형 넣기 조판부호 넣기 등을 가르쳐 나갔다.
대학생 답게 알아 듣는 것 또한 매우 빨랐다.
두시간의 수업이 정신없이 흘러간다.
겨우 수업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는 거식.
쉬지 않고 1:1로 강의 하는 것은 역시 버겁게 느껴진다.
“수고했어요. 저녁에 시간 돼요?”
“네? 저녁이요?”
“네. 이따 맥주 한잔 하러 오세요. 제가 살께요.”
“네... 그런데 후배가 오기로 했는데 같이 가도 돼요?”
경아는 괜찮다며 이따 가게로 오라 말하고 이내 집을 나선다.
경아를 보낸 거식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틀전 클리퍼로 프로그래밍중 오류 부분에 대해 살펴 본다.
for 문의 오류.
다름 아닌 창의 활성화와 비 활성화에 대한 구현방식이었다.
엔터가 아닌 스페이스로 키보드 입력을 변환하고 탭키로 제품에 대한 리스트들을 보여주는 창을 열게 만드는 조금은 색다른 방식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하고 있었다.
그렇게 코드를 수정하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돌아보니 은주가 서 있다.
“어..? 왠일이야?...”
“바빠? 할말 있는데...”
은주가 문에 서서 고개를 숙인채 말을 건넨다.
이내 들어오라 손짓을 하는 거식.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고 거식 역시 의자에서 내려와 앉는다.
“무슨 일이야? 그 동안 아는 척도 안하더니..”
“저기.. 그 날 일은 잊어 줬으면 좋겠어..”
“.......”
“사실은 내가 생리전에 좀 그런 상태가 돼...”
“그런 상태라니?”
“그냥.. 남자랑 자고 싶고.. 하고 싶은 상태... ”
“그런 것도 있어?”
“응. 이해 되지 않겠지만 매번 생리 할 때가 되면 신경질이 나고 짜증도 나고 그러면서 왠지 모르게 섹스 하는 상상을 하게 돼. 그 전에는 나이트를 가서 미친 듯 취하고 술마시고 그랬는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그래서 그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응. 어차피 너랑 나랑 사귈 것도 아니고 그냥 실수 했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굳이 해명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은주의 싸늘한 모습에 그냥 쿨하게 잊어 버린 상태였던 거식이었다.
은주를 돌려 보낸 거식은 조금은 아쉬움이 들었다.
거식의 품안에 쏙 들어오는 은주는 여체로서는 괜찮은 몸매와 섹스상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밀려 온다.
어느덧 10시가 되고 후배인 기범이 찾아 온다.
“형 잘지냈어?.”
“그냥 그렇지 뭐. 요즘은 애들 가르치는 재미로 산다.”
요즘 하고 있는 과외에 대해 말을 해주는 거식.
기범은 재미있겠다는 말을 한다.
“너도 해볼래? 고등학생 3명하고 일반인 2명이니까 니가 고등학생 1명이랑 일반인 1명 맡아서 해봐.. 돈은 내가 나눠 줄테니”
“요즘 놀고 있는데 한번 해볼까?”
기범의 말에 거식은 잘생각했다며 집에서 함께 지내기로 한다.
천천히 기범을 데리고 호프집으로 향하는 거식.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아가 친구인 듯 보이는 여인과 앉아 있다가 거식을 맞이한다.
주말인데도 손님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준비한 맥주와 안주가 나오고 경아가 거식의 옆자리에 앉는다.
“늦었네요? 기다렸는데...이제 조금 있으면 문닫아야 하는데..”
“아.. 이야기좀 하느라고요. 얼른 먹고 갈께요.”
함께 건배를 하며 맥주를 들이킨다.
“저도 같이 마셔도 돼요?”
순간 경아와 함께 앉아 있던 여인이 다가오더니 합석을 요구한다.
뻐드렁이가 매력적인 약간은 통통한 체구의 여인.
“제 친구예요. 심은지라고 같은 과예요.”
“안녕하세요. 나거식입니다. 이쪽은 후배 이기범이고 현재 휴학중에 있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컴퓨터 가르치신다고..”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하핫...”
“그럼 저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아.. 그럼 여기 기범이 한테 배우세요.. 기범이도 잘 가르쳐요. 이녀석이 저보다 실력은 낫을껍니다.”
거식의 말에 기범이 웃음을 띄운다.
그렇게 각각 3명씩 과외를 하기로 합의한다.
몇잔의 술이 들어가고 어느덧 12시를 향해 가고 있다.
“좀 아쉬운데 노래방 가실래요?”
은지가 기범에게 이야기 하자 경아는 은지의 옆구리를 친다.
그러나 상관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는 은지.
주말이고 아직은 술을 더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거절하지 않는 두 사람이다.
문을 닫고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네사람.
대부분 문을 닫은 시간. 이동하는 내내 어둠이 내려 앉는다.
도착했다며 내리는 은지.
따라내린 거식과 기범이 둘러 보아도 불켜진 노래방은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불꺼진 노래방앞에 서더니 이내 셔터문을 강하게 두드린다.
“아저씨 저 왔어요...”
신호인 듯 은지가 말을 하고 나서 이내 셔터문이 열린다.
“헤.. 방 있죠? 4명이예요..”
은지는 자주와 본 듯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간다.
맥주와 안주를 시키는 은지.
한 두번 와본 솜씨가 아닌 듯 싶다.
작은 방안에서 술과 함께 노래가 시작된다.
거식은 경아와 기범은 은지와 함께 앉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은지는 춤은 이렇게 추는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격렬하게 허리와 엉덩이를 흔들어 댔고 나중엔 기범까지 일으켜 세우더니 진한 스킨십과 함께 춤을 춘다.
정신없이 시간이 흐른다.
거식도 술을 마시며 노래에 몸을 맡기고 온몸을 흔들어 댔다.
그렇게 한참 놀던 네사람.
기범이 화장실을 간다며 나가자 은지 역시 화장실을 간다며 나간다.
경아와 함께 조용한 노래 서너곡을 불렀는데도 두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
과거를 묻는 경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니 10여분이 흘렀다.
경아가 다시금 노래를 시작하자 거식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화장실로 가봤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가보니 주인 아저씨만 웅크린채 담배를 피고 계셨다.
“여기 혹시 두사람 안나왔어요?”
“아니.. 안나왔는데? 화장실 간거 아냐?”
땅으로 꺼졌는가? 하늘로 솟았는가?
거식은 다시금 노래방으로 들어와 선팅이 짙은 방안을 억지로 보려 애를 쓴다.
음악소리가 나오는 방을 제쳐둔채 조용한 방을 어떻게든 확인하려는 거식.
문제의 세 번째 방.
조금은 찢어진 선팅으로 인해 방안의 모습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기범이와 은지가 있다.
은지는 소파에 드러 누운채 기범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신음을 토해내는 듯 싶다.
기범은 연신 허리를 들썩이며 은지의 몸속 깊은 곳에 자신의 분신을 쑤셔 넣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거식은 당황스러웠다.
만난지 첫날...
자신은 몇일전 은주와 관계를 맺고 기범은 은지와 관계를 맺는다.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전개 될지도 궁금해지는 거식이었다.
거식이 다시 경아가 노래를 부르는 곳으로 향하고 10여분이 다시 흐른뒤 두사람이 들어온다.
거식은 두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알지만 모른척 시치미 떼며 약을 올린다.
“뭔 화장실을 그렇게 오래걸려? 땀은 왜 그렇게 흘리고?”
“잠깐 밖에서 이야기좀 했어... ”
은지가 대신 답변을 한다.
그날 이후 기범은 혜은이와 은주 그리고 은지를 가르쳤고 거식은 수애, 수현 그리고 경아를 가르쳤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
어머니께서 거식을 부른다.
“사촌 형 있잖아?.. 그 형이 네 이야기를 했더니 학원을 소개 시켜주던데 한번 가봐..”
“저 애들 가르치고 있잖아요.. 그런데 왠 학원을...”
“애들 가르쳐 봐야 얼마나 된다고.. 그것도 기범이랑 같이 가르친다며.. 그러면 한달에 15만원 밖에 더 돼니? 그러지 말고 가봐..”
어머니의 채근에 할 수 없이 면접 아닌 면접을 보러 가게 된다.
시내 중심가에 예전엔 예식장으로 쓰던 곳을 리뉴얼한 컴퓨터학원.
사무실로 들어가니 원장과 남편으로 보이는 분이 계신다.
“저.. 나거식이라고 합니다.”
“아.. 앉아.. 형한테 이야기 들었어. 전에도 강의해봤다고?”
“네.. XX컴퓨터학원에서 했었습니다.”
“음.. 이력서 가지고 왔지? 줘봐.”
이력서를 내밀자 한참을 보던 원장과 남편.
“다 좋은데 말야.. 그 머리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머리만 자르면 오케이인데...”
거식의 머리는 뒷머리를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길어져 있었다.
평상시엔 스포츠 머리를 즐겨 하던 거식이었는데 최근 1년가까이 자른적이 없는 머리였다.
“네.. 고민해보고 연락드릴께요..”
거식은 집으로 돌아와 기범이와 상의를 했다.
기범은 좋은 기회라며 당장 내일부터라도 학원에 가라고 했다.
하지만 거식은 수애와 수현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결국 그날밤 수애와 수현 그리고 혜은에게 말을 꺼낸다.
“나 티쳐. 그러니까 학원에서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거네. 그럼 우리는 배운거 또 배울거 아냐?”
“그건 내가 주말에 다시 가르쳐 줄게. 너희들도 그냥 학원등록을 하자. 학원수강과는 별도로 내가 주말에 3시간씩 강의해줄게.”
결국 주말에 3시간씩 강의를 별도로 해주기로 하고 학원으로 가기로 한다.
학원 사장에게 전화를 걸고 이내 학생3명을 등록시키겠다고 하자 일주일 뒤부터 워드프로세서시험을 위한 자격증반을 개설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거식에게 맡아 보라고 한다.
그렇게 거식은 학원강사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
1994년 4월4일 월요일..
9자가 2개.. 4자가 3세 들어가는 날..
어느덧 학원으로 출근한지 일주일이 넘어 가고 있었다.
몇일간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거식은 이내 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좌가 열릴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거식은 원장의 남편과 함께 S여자상업고등학교에 12인승 봉고차를 타고 온 것이다.
오후 4시30분 조금 이른 시간인 듯 싶었지만 어느새 수업이 끝난 여고생들이 밀려나온다.
봉고차 한쪽에 붙은 사랑컴퓨터 학원이라는 노란 스티커가 유난히 촌스럽게 느껴졌다.
교문앞에 서서 밀려 나오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며 이미 예약이 되어 있기에 차로 다가오는 학생을 기다려 보지만 그저 바쁜 듯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거식은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웃는 것 같은 착각에 얼굴마저 붉어지고 눈 둘곳을 찾아 헤멘다.
순간 수 많은 여학생들 무리에서 거식을 보며 정신없이 달려오는 여학생이 보였다. 키는 150Cm정도? 조금은 통통하면서도 단발머리에 동그란 얼굴을 한 여학생이 정신없이 거식앞에까지 뛰어 온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송숙경이라고 해요.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세요. 이 차인가요? 에이 차가 조금 골았다. 그럼 먼저 탈께요..”
정신없이 혼자 이야기 하고 혼자 웃고 이내 차를 타는 숙경.
차에 타서도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학원을 간다고 자랑을 한다.
한참을 기다리자 수애와 수현까지 모두 12명의 여학생이 차에 오르고 이내 학원으로 출발한다.
“나티쳐.. 오늘부터 꽃밭에서 놀겠다.”
“수애야.. 너 자꾸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라. 까불면 아빠한테 이른다.”
“어? 나티쳐 벌써 배신 때리기야? 이러면 곤란해. 하늘이 보고 땅이 듣고 있어..”
“쓰..쓸데 없는 말 그만해..”
수애는 거식을 놀려 댄다.
수현도 그런 수애의 말을 거들며 거식을 놀려댔다.
학원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정신없이 강의실로 뛰어간다.
나머지 10여명은 버스로 도착을 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후.........
크게 심호흡을 하는 거식.
강의를 해본 적은 있었지만 20명이 넘는 여학생(?)을 상대한다는 것이 더욱 거식을 떨리게 만들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여학생들의 떠드는 소리가 정신을 없게 만든다.
강단에 서서 주위를 둘러 보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이야기에 정신없는 여학생들.
거식을 바라보던 수애가 일어난다.
“야!! 선생님 들어오셨잖아 조용히좀 해!!!”
수애가 소리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수애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거식.
두눈에 숙경이 아이들을 돌아보는 모습이 보인다.
“수업 해야 할 것 아냐!.. 언제까지 떠들고 있을 거야?”
마치 선생이 학생을 타이르듯 하는 숙경의 모습.
의외로 아이들은 숙경의 말에 일순간에 조용해지는 모습이다.
1-2명 약간 건달(?)끼가 보이는 아이들을 제외하곤 모두 거식을 바라본다.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거식.
“안녕하세요... 나...거..식입니다.”
“큭큭.. 거식이래.. ”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오늘부터 두달간 여러분과 EDPS 및 DOS 그리고 아래한글을 가르칠 강사입니다. 보통 컴퓨터 학원에서는 1시간 강의인데 여러분들은 워드프로세서 2급 자격증 특강으로 매일 2시간씩 강의를 받을 것이며 주말에도 필요시에는 보강학습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네? 주말에도요?.. 에이.. 그건 아닌데...”
“어차피 비싼 돈 내고 다니는거 확실하게 붙어야죠. 시간도 아깝고 돈도 아깝지 않겠습니까? 자 그럼 EDPS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 EDPS는 음담패설이라고 했는데 첫시간부터 음담패설로 시작하는건가요? 큭큭..”
-꺄르르르르..
아이들에게 휘둘리는 거식.
“야!! 농담 그만하고 수업하자!!”
다시금 숙경이 소리를 지른다.
컴퓨터의 유래부터 시작된 1시간 강의. 식은땀이 줄줄 흐르듯 새어 나온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게 50여분이 마치 몇일을 밤샌 것 같은 피곤이 몰려 왔다.
겨우 시간을 마치고 주어진 휴식시간.
도망가듯 강의실을 나온 거식은 이내 학원을 빠져나와 담배를 입에 문다.
-후.......
걱정이다.
앞으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아이들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심장이 정신없이 뛴다.
강의를 한 것인지 발표를 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온몸에 힘이 빠져 나갔다.
10분의 쉬는 시간이 왜 이리 짧은지. 강의시간은 길고 쉬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다.
다시금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거식.
순간 숙경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강단 탁자위에 음료수를 내려 놓는 숙경.
어린 여학생 이제 고2인 여학생이지만 마음 씀씀이가 고맙게 느껴진다.
이번시간은 DOS시간.
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다 보니 기본적인 명령어는 알고 있었다.
DIR, CLS, DATE, TIME, COPY, DEL 명령까지.. 그리고 FORMAT과 XCOPY, COMPRESS등 외부 명령어들..
거식은 QSHELL(HEX EDITER)을 이용하여 도스의 내부명령어를 바꿔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아이들의 디스켓은 MS-DOS의 내부명령어가 아닌 각자가 새롭게 저장한 명령어도 바뀌었다.
어떤 친구는 DIR대신 자신의 이니셜을 따서 KSH로 만들기도 했으며 어떤친구는 COPY대신 SEXY로 만들기도 했다.
SEXY A.TXT B.TXT <== 이렇게 치면 A.TXT파일이 B.TXT로 복사된다.
아이들은 그제야 신기하다는 눈치이다.
IO.SYS 파일을 편집하면 내부 명령어를 수정할 수 있었고 그것은 아이들에게 생소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DIR만 알고 있던 친구들은 이렇게 약속된 명령어를 수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명령어가 수행되려면 그 전에 기본적으로 부팅이라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자 쉽게 알아 듣는다.
수업은 아이들의 관심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모든 것이 지난 일주일동안 예행연습해온 결과였다.
M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여주며 유틸리티의 장단점을 설명하자 아이들의 눈이 빛이 난다.
그리고 수업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선생님.. 언제 끝나요?”
“응?.. 이것 하나만 더 배우면 되는데 왜?”
“벌써 이번 수업만 1시간 30분이 넘었거든요.. 집에 가야죠..”
“어? 그..그래??”
정신없이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EDPS시간까지 합쳐서 2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러 간 것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학교로 돌아갈 친구들은 학원 앞에 봉고차가 있으니 타고 나머지는 내일 봅시다.”
“큭큭.. 선생님.. 존댓말 했다 반말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해요? 수업할때는 괜찮으시더니..”
- 꺄르르르르..
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결국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거식.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기범이 거식을 보며 웃음을 보인다.
“형 어때 할만해?”
“우아.. 죽겠다.. 이건 전부 나를 죽일 듯 쳐다 보는 것 같고.. 심장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
“무슨 수업을 2시간 30분이나 하냐.. 하여튼 형은 알아준다니까..”
“그렇게 된 줄도 몰랐어 임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넌 어땠냐?”
“큭큭.. 난 한메타자교사 40분 하고 테트리스 20분 시키고 뭐 그렇지..”
기범은 초등학교 신입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자판부터 익히기 위한 수업.
그런 기범이 조금 부러워진 거식이다.
“선생님.. 이거 드세요..”
순간 들려오는 소리.
돌아보니 숙경이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있다.
“어?.. 그..그래..고마워요...”
“말 편히 놓으세요. 오늘 수고 하셨어요..”
밝게 웃는 숙경이 예뻐 보인다.
기범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학원을 나서자 아이들이 차에 탄채 환호성을 지른다.
“야.. 너 벌써 선생님한테 아부 하는거야?? 누가 학생회장아니랄까봐...벌써 시작하네..”
“선생님. 재 조심하세요. 학교에도 선생님들 킬러에요..크크크큭..”
거식의 옆에서 걷는 숙경을 보며 아이들이 장난을 친다.
숙경은 얼굴이 빨개진채로 빠르게 차에 오르고 거식도 운전석 옆자리에 자리 잡는다.
학교로 가는 봉고차.
아이들중 일부는 다시 학교로 가서 자율학습을 할 것이라고 한다.
거식은 6년전 고등학교때가 생각이 나 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어느덧 차가 학교에 도착하고 아이들은 인사와 함께 헤어진다.
숙경은 제일 끝에 남아 거식에게 90도로 머리 숙여 인사를 한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뵐께요..”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숙경이 웃으며 헐레벌떡 뛰어 오는 모습이 스쳐지나가고 웃음을 보이는 거식이다.
다음날.
아카시아 향이 조금씩 그려지려는 완연한 봄.
학교앞에서 수강생들을 기다리는 거식의 마음에 설레임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설레임은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멀리서 뛰어오는 숙경.
이내 거식이 바로 앞에와서 90도로 인사를 하며 웃음을 보이는 숙경.
볼수록 예쁘고 귀엽고 착한 아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식이다.
수업 이틀째.
여전히 EDPS수업을 마치고 DOS에 대해 수업을 하기 시작할때였다.
순간 거식의 눈에 일부 여학생들의 독수리 타법이 보인다.
“동작..그만...지금부터 타이핑 테스트를 하겠습니다. 전부 프롬포트에서 HTT라고 입력하세요.”
아이들은 느닷없는 거식의 말에 웅성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재차 이야기 하자 그제야 하나둘 타이핑을 하고 이내 모든 컴퓨터가 한메타자교사를 실행된다.
“장문연습의 소나기를 클릭하고 타이핑 합니다. 한페이지가 끝나면 그대로 멈춰 주세요.”
강의실에 타자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시작된다.
천천히 강의실을 돌아보며 여학생들이 타자치는 모습을 바라보는 거식.
수애와 혜은의 타자 실력은 출중하다.
역시 애제자(?)는 다른 것 같다.
나름 숙경도 타자 실력이 괜찮은 듯 싶었다.
그러나 조금 불량(?)스러운 초란이라는 학생은 여전히 독수리 타법으로 분당 50타도 채 안나오는 듯 싶다.
모든 타자연습이 끝이 나자 거식이 하나씩 확인한다.
100타 이하가 5명 200타 이하가 5명 200타 이상이 12명이었다.
“200타 이하는 수업이 끝나면 30분간 타자연습하고 가세요.”
“네?.. 그런게 어디있어요.. 집에가서 할께요...”
“안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워드프로세서 실기는 어떻게 할려고 하세요. 오늘부터 특별 연습입니다.”
수업을 마친 거식은 10명의 학생을 따로 불러 눈을 감게 하고 타자 연습을 시킨다.
“qwert q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위로 올리면 있습니다. 그다음 약지가 w 중지는 e 이런식으로 하나 하나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면서 치세요.”
“선생님 그러면 너무 느린데요..”
“느린 것 같지만 빠른겁니다. 이렇게 보름만 지나보세요. 200타 치는 사람보다 더 빠르게 칠 수 있습니다. 한글도 마찬가지로 연습을 하세요. 키보드를 머릿속으로 그려서 치세요.”
의외로 아이들은 거식의 말을 잘 들었다.
그런데 그 10명의 아이들과 별도로 숙경의 모습이 보인다.
“송숙경.. 너는 200타 넘어서 연습 안해도 되는데..”
“아까 보니까 수애는 300타를 넘던데요.. 저도 더 잘 하고 싶어서요..”
그랬다. 숙경은 착하고 예쁘고 또 승부욕도 넘치는 아이였다.
자신이 연습을 하며 아이들도 봐주는 숙경의 활약(?)에 조금은 짐을 덜은 거식이다.
보충수업을 마치고 사무실의 책상으로 돌아왔는데 책상위에 꽃이 놓여져 있다.
붉은 장미와 안개꽃으로 수 놓은 꽃다발.
원장님과 남편은 아이들을 태워주려 나갔고 기범은 다른 방에서 수업중이라 누가 가져다 놓은것인지 알 수 없었다.
꽃을 들어 향기를 맡는다.
짙은 장미향이 피곤한 거식의 마음을 녹여 버리는 듯 싶다.
다음날 점심때가 되자 봄비가 내린다.
조금씩 흩뿌리는 듯 내리던 비가 오후가 되자 거세진다.
여전히 학교앞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는 거식.
검은 우산을 받쳐 든채 아이들을 기다린다.
오늘도 숙경은 1등으로 뛰어 나온다.
비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은채 뛰어오는 숙경.
거식은 그런 숙경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학생들 사이로 뛰어나가 우산을 씌워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우.. 다 젖었다.. 큭큭..”
숙경의 말에 모습을 보니 머리는 말할것도 없고 상의도 잔뜩 젖어 있었다.
순간 숙경의 젖은 옷속에 비치는 브래지어가 살짝 드러나 보여 고개를 돌리며 다른 학생이 오지 않는지 바라보는 거식.
-흠..흠...
괜히 헛기침이 나온다.
순간적으로 섹시(?)하다는 느낌을 받은 거식. 죄라도 진것 같은 느낌이다.
도둑질이라도 한듯한 느낌이 든다.
“안녕하세요...”
“나티쳐.. 머야.. 숙경이만 우산씌워주고...”
민혜가 인사를 하고 이내 수애가 혀를 뻬꼼 내밀며 인사를 한다.
수애도 거식의 우산속으로 파고든다.
“야.. 넌.. 우산 있잖아..”
“큭큭.. 분위기 깨려고..”
“분위기는.. 무슨 .... ”
말을 하다 마는 거식. 우산속의 둘은 조금 무안하게 느껴진 거식이었다.
그런 무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숙경은 오른쪽에서 수애는 오른쪽에서 거식의 팔짱을 껸다.
젖은 머리카락 그리고 숙경과 수애의 향기가 거식을 스친다.
비가 온 날이라 그런지 강의실 안이 시끌벅적하다.
수업전까지 아이들은 뛰어 다니며 18살의 여고생을 마음껏 뽐낸다.
시간이 되어 수업에 들어가는 거식.
강의실 안은 온통 물에 젖은 생쥐.. 아니 여고생들이다.
온몸이 젖은 아이들.. 하얀교복 사이로 브래지어가 다들 조금씩 비치는 모습이다.
도저히 아이들을 바라 보는것이 민망한 거식.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거식에게 장난을 걸어온다.
“선생님 비오는데 이야기좀 해주세요.”
“이야기? 무슨 이야기?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옛날 이야기?”
“선생님 애인 있어요?”
“애인? 글쎄.... 있을 것 같아 없을 것 같아?”
“생긴 것 봐선 없을것 같고 하는 것 봐선 있을 것 같애요..”
“뭐야??.. 허허.. 녀석..”
역시 불량스러운 초란이 농담을 던진다.
“애인이랑 사랑한 이야기좀 해주세요.”
“사랑 이야기?.. 어허.. 학생이 무슨 사랑이야..”
“우리도 알거 다 알거든요.. 그러지 말고.. 해주세요. 어떻게 만나셨어요?”
“음.. 그게.. 2년 전인데.. 학원에서 만났어.. 같은 수강생이었는데... 만난지 3일만에 청혼을 했지..”
“우아.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
“어떻게 되긴.. 아직은 내가 총각이다.. 그러면 답 나왔지?”
“에이..그럼 헤어진거에요? ”
“아니 아직은 ing중이야..”
“그럼 어디까지 해보셨어요? 키스는 해봤을것 같고.. 설마... 그것까지? 큭큭큭...”
“이녀석들이... 자.. 그만하고 수업하자..”
“에이.. 말씀해주세요..”
아이들의 채근이 시작된다.
처음엔 작게 한두명의 채근으로 시작되는 듯 싶더니 이내 모든 수강생들이 채근을 하는듯 목소리가 커져간다.
“키스까지만 해봤다.. 이제 그만..”
“우아........... 키스.... 어땠을까?”
여학생들은 저마다 입술을 잔뜩 내민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탕탕...
책을 살짝 내리치는 거식.
수업을 시작하려 하지만 이미 들떠버린 분위기로 어수선했다.
“야.. 이제 수업하자!.. ”
또 다시 나서는 숙경.
작은 꼬마 같은 녀석이 수업의 분위기를 이끌어 준다.
순간 고마움이 드는 거식이다.
오늘은 EDPS 순서도를 강의를 한다.
어려워 하는 녀석들.
다시금 예제를 드는 거식.
“컴퓨터는 0과 1밖에 몰라. NO 아니면 YES. 순서도에서는 질문인 조건문이 나오고 그 조건에 부합하는지 안하는지에 따라서 다음명령을 실행해. 남녀 관계처럼 생각해 볼게 라는거는 존재 하지 않아. 좋으면 좋은것이고 싫으면 싫은것 단순 명료하지.”
“큭큭. 그렇게 설명하니까 좀 알것 같네요.”
강의실 안에 습기가 차는 듯 싶다.
여학생들의 젖은 옷이 체온에 의해 마르면서 증기를 뿜어내는 것 같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쓰는 거식.
다시 DOS시간이 되고 명령어 실습을 하며 여학생의 뒷자리에 서성이던 거식은 오늘 만큼은 확인도 하지 않은채 멍하니 교단에 서있다.
숙경의 뒤에서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내 옷위로 보이는 브래지어의 투영으로 인해 부끄러움이 찾아온 거식이었기 때문이다.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 지나고 수업이 끝이 난다.
여전히 비는 거세게 내리고 있고 학교로 돌아갈 아이들은 타자연습을 하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의실을 나와 사무실로 들어가니 어제 꽂아둔 꽃이 보이지 않고 새로운 꽃이 꽂혀 있다.
- 늘 저희를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덩그러이 놓여져 있는 쪽지.
예쁜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것 같은 느낌.
향기펜을 썼는지 은은한 향기가 베어 나온다.
학원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오늘은 거식도 사무실에 남아 필기 문제를 준비한다.
몇일 뒤 예비 시험 볼 문제들을 타이핑한다.
EDPS와 DOS문제를 출제하는 거식.
정신없이 타이핑하는데 사무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숙경이 서있다.
“어.. 무슨일이야?”
“저 선생님.. 혹시.. 우산좀 씌워 주실 수 있으세요?”
“응? 우산??”
“네.. 버스 정거장까지 가야 하는데.. 비 때문에..”
“그럼 그러지 말고 우산을 가지고 가. 내일 주면 되잖아.”
“아뇨.. 그러면 선생님도 비 맞으면서 집에 가셔야 하잖아요.”
“난 괜찮아.. 비 맞으면서 걷는걸 좋아하거든...”
“아뇨.. 그럼.. 그냥 갈께요...”
숙경이 돌아서 나가자 거식이 우산을 챙겨 뛰쳐나간다.
“어휴.. 고집불통.. 자.. 쓰고 가자..”
“네.. 헤헤... 고마워요...”
천천히 학원을 나오는 두사람.
조심스레 숙경이 거식의 팔짱을 껸다.
거절할까 하다가 왠지 무안해 할까봐 거절조차 하지 못하는 거식.
숙경은 지금 상황이 마냥 좋은지 웃으며 깡충깡충 뛰듯이 걷는다.
천천히 지하상가로 내려가려는 두 사람.
순간 거식이 내려가다 말고 그대로 멈춘다.
거식의 눈이 한 여인에게 향하고 그 여인은 거식을 뚫어질듯 바라본다.
천천히 팔짱을 떼어내는 숙경.
“서..선생님.. 누..구..세요?”
“응?.. 아.. 치..친구... 지현아.. 인사해.. 여긴 숙경이라고 내 제자야.”
“안녕하세요.. 전 송숙경입니다. 언니 예쁘시네요.”
“네.”
짧게 인사하는 지현..
이비인후과 간호사인 지현이다.
거식과 2년 동안 사귄 여인.
2년이라는 시간동안 겨우 키스와 몇 번의 애무행위까지 밖에 하지 못한 여인.
결혼까지 생각하지만 늘 허락하지 않는 지연으로 인해 힘들어 한 거식이었다.
물론 자신의 여성 집착(?)증으로 인해 성적으로 만나는 여인들은 만났지만 지현과 결혼한다면 칼로 두부를 베듯 단칼에 모든 것을 정리 한 채 지현만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지현은 매번 거식에게 일정하게 거리를 두었고 늘 그로 인해 더욱 힘들어 한 거식이었다.
몇일전 학원에서 강의하게 되었다는 말에 지현은 잘됐다면서 시간 되면 한번 찾아 온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말 한마디 없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군다나 여학생의 팔짱을 받은채 걷는 거식을 봤으니 그녀가 화가 나는것이 어쩌면 당연한듯 싶었다.
“선생님.. 저.. 먼저 가볼께요... 언니.. 안녕히 계세요..”
숙경이 인사를 하고는 이내 빗속을 뛰어간다.
지현이 숙경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숙경이 사라지자 휑하니 고개를 돌리는 지현.
“좋아 보인다. 여학생과 데이트라...여학생이라 그런지 활기차 보이고..”
“그게 아니라.. 우산을 씌워 달라고 해서... 나온거야.. 다른 생각 하지마..”
“누가 뭐래?.. 갈게..”
“야.. 어디가.. 여기까지 나 보러 왔으면 학원구경도 하고 그래야지..”
“됐어.. 얼굴 봤으니까 갈래.”
“지현아..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냥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우산씌워 주러 온거야.. 버스 정거장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해서 그런거야..”
거식은 연신 변명아닌 변명을 해댔다.
지현의 손을 잡은채 미안하다며 계속 사과하는 거식.
그제야 지현이 웃음을 살짝 보이며 입을 삐죽 내민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보면 오해하기 십상이야. 애들이 팔짱낀다고 그걸 받아 주고 있냐? 이 늑대야. 응큼한 늑대야 하여튼..”
“넵.. 알겠습니다... 앞으론 절대로 안그러겠습니다..”
“앞으로 안그러고 뒤로 몰래 할려고 그러지?”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위로도 아래로도 절대로 안그러겠습니다...”
거식이 다시금 사과하자 겨우 웃음을 보이는 지현.
지현을 데리고 학원을 구경시켜 준다.
강의실에 앉은 지현.
거식은 자신의 강의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는듯 천천히 강의내용을 칠판에 적어가며 설명을 한다.
사실 지현이도 워드까지 배우기는 했지만 많이 부족했다.
여자친구는 못 가르쳐 주면서도 학원에서 강의를 하는 거식이다.
“이건 누가 준거야? 싱싱한게 얼마 안된것 같은데?”
“어?.. 아.. 어제.. 내가... 책상이 허전한 것 같아서 사다 놨어...”
“그래?.. 그래도 센스 있네... 그렇다고 이런걸 직접 사서 갔다 놓냐? 여자도 아니고..”
“그...그지?”
“나 잠깐 화장실좀 갔다 올게.. 화장실 어디야?”
“어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있어...”
지현이 사무실을 나가자 거식은 정신없이 흔적들을 지운다.
책상 아래 있던 쓰레기통속에 박힌 꽃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 거식.
그리고 이내 메모쪽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짠~!”
“어... 뭐야.. 그..그건...”
지현이 꽃과 화분 하나를 들고 들어온다.
화장실을 간다고 하더니 그새 꽃을 사온것이다.
결국 여학생중 누군가 준 꽃은 꽂힌지 하루도 채 안되어 쓰레기통속으로 쑤셔 박힌다.
“이거 오래 오래 죽이지 말고 잘 키워. 나라고 생각하고..”
“헉.. 그러면 집에 가지고 가야 하는데.. 품에 안고.. 입맞추고.. 목욕할때도 같이....”
“어휴.. 이 변태.... 하여튼 머릿속에 늘 그생각만 들어 있냐?”
“큭큭.. 그러니까 니가 한번 주면 되잖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주기는 뭘 줘.. 내가 물건이냐.. 자꾸 달라고 하게..”
“야.. 아무리 그래도 벌써 2년이나 됐어. 우리 사귄게 2년이야.. 2년이면 애를 낳아도 둘은 낳을 수 있는 시간이거든.. 그런데 우린 겨우 키스 밖에 못해봤어..”
“그거야.. 나중에.. 결혼 한다음에 한다고 했잖아... 넌 나를 사랑한다면서 그정도도 못해줘?”
“사랑하지.. 세상에 너를 나만큼 사랑하는 사람 당연히 없지.. 그런데 나도 남자잖아. 진짜 너를 책임지고 싶고 너 하나만 바라보면서 살고 싶어.. 그러니까 결혼하자..”
“돈은? 돈 많이 벌어 놨어? 결혼하자마자 월세 살거야? 난 그런거 싫어. 그리고 동생이 아직 중학생이야. 적어도 동생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시키고 결혼 하든지 할래. 아직 준비가 안됐어. 내가 준비가 돼면 꼭 말할게.. 기다려줘.”
“후.. 또.. 기다려 달란다.... 벌써 2년째 그말 하고 있는거 알지?”
“미안해.. 대신 내가 오늘 술한잔 살게.. 축하턱.. ”
“술만으로 안돼.. 노래방까지.. 오케이?”
“씨... 또 노래방 가서 덤벼들려고 그러지? 넌 노래방만 가면 나 자꾸 만지려고 하고 그러잖아.”
“그거야. 니가 예쁘니까 그렇지.. 누가 그렇게 예쁘게 생기래?”
“치.. 여학생들에 둘러 싸여서 정신 못차리면서.. 내가 이쁘긴...”
“아냐.. 세상에서 지현이가 제일 이뻐~”
지현이 거식의 팔짱을 끼고 학원을 나선다.
어김없이 수업시간이 되었고 초인종 소리에 나가 보니 은주가 서있다.
방으로 들어와 자연스레 컴퓨터 앞에 앉는 은주.
"저기 어제는.."
"수업 어디까지 했었지? 내부 명령어 하다 말았던 것 같은데 책 줘봐.."
거식이 어제의 상황에 대해 물어 보려 하는데 자리에 앉자 마자 수업 이야기를 하는 은주이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이야기를 해야 겠다 생각하고 수업을 진행해 나간다.
어제도 예뻤지만 오늘은 더 예쁜 은주이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노란쪼기를 입은 모습은 영락없는 봄처녀이다.
유난히 붉은 립스틱이 시선을 끌어 온다.
얼굴을 잡고 마구 빨아대고 싶은 욕망을 어렵게 눌러 본다.
타자를 치는 은주의 긴 손가락 그리고 손가락 끝에 칠해진 하얀 메니큐어가 거식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다시 한번 지난 밤의 은주를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은주의 옆으로 움직인 거식이 살며시 은주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치워.."
"......"
작지만 단호한 한마디.
이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손을 치울 수 밖에 없는 거식이었다.
차거운 윤주의 시선이 눈에 들어온다.
그 후 몇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윤주는 수업 받는 것 외에 특별한 말을 허락조차 하지 않았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주말이 되어 경아가 집으로 왔다.
대학교에 다니는 경아는 레포트 위주의 수업이 필요하다고 했고 컴퓨터의 기본 명령어 수업에 이어 바로 아래한글 수업을 시작했다.
기본적인 자판을 알고 있어 어렵지 않게 도표그리기 선그리기 및 각종 도형 넣기 조판부호 넣기 등을 가르쳐 나갔다.
대학생 답게 알아 듣는 것 또한 매우 빨랐다.
두시간의 수업이 정신없이 흘러간다.
겨우 수업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는 거식.
쉬지 않고 1:1로 강의 하는 것은 역시 버겁게 느껴진다.
“수고했어요. 저녁에 시간 돼요?”
“네? 저녁이요?”
“네. 이따 맥주 한잔 하러 오세요. 제가 살께요.”
“네... 그런데 후배가 오기로 했는데 같이 가도 돼요?”
경아는 괜찮다며 이따 가게로 오라 말하고 이내 집을 나선다.
경아를 보낸 거식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틀전 클리퍼로 프로그래밍중 오류 부분에 대해 살펴 본다.
for 문의 오류.
다름 아닌 창의 활성화와 비 활성화에 대한 구현방식이었다.
엔터가 아닌 스페이스로 키보드 입력을 변환하고 탭키로 제품에 대한 리스트들을 보여주는 창을 열게 만드는 조금은 색다른 방식의 인터페이스를 구현하고 있었다.
그렇게 코드를 수정하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돌아보니 은주가 서 있다.
“어..? 왠일이야?...”
“바빠? 할말 있는데...”
은주가 문에 서서 고개를 숙인채 말을 건넨다.
이내 들어오라 손짓을 하는 거식.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고 거식 역시 의자에서 내려와 앉는다.
“무슨 일이야? 그 동안 아는 척도 안하더니..”
“저기.. 그 날 일은 잊어 줬으면 좋겠어..”
“.......”
“사실은 내가 생리전에 좀 그런 상태가 돼...”
“그런 상태라니?”
“그냥.. 남자랑 자고 싶고.. 하고 싶은 상태... ”
“그런 것도 있어?”
“응. 이해 되지 않겠지만 매번 생리 할 때가 되면 신경질이 나고 짜증도 나고 그러면서 왠지 모르게 섹스 하는 상상을 하게 돼. 그 전에는 나이트를 가서 미친 듯 취하고 술마시고 그랬는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그래서 그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응. 어차피 너랑 나랑 사귈 것도 아니고 그냥 실수 했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굳이 해명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은주의 싸늘한 모습에 그냥 쿨하게 잊어 버린 상태였던 거식이었다.
은주를 돌려 보낸 거식은 조금은 아쉬움이 들었다.
거식의 품안에 쏙 들어오는 은주는 여체로서는 괜찮은 몸매와 섹스상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밀려 온다.
어느덧 10시가 되고 후배인 기범이 찾아 온다.
“형 잘지냈어?.”
“그냥 그렇지 뭐. 요즘은 애들 가르치는 재미로 산다.”
요즘 하고 있는 과외에 대해 말을 해주는 거식.
기범은 재미있겠다는 말을 한다.
“너도 해볼래? 고등학생 3명하고 일반인 2명이니까 니가 고등학생 1명이랑 일반인 1명 맡아서 해봐.. 돈은 내가 나눠 줄테니”
“요즘 놀고 있는데 한번 해볼까?”
기범의 말에 거식은 잘생각했다며 집에서 함께 지내기로 한다.
천천히 기범을 데리고 호프집으로 향하는 거식.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아가 친구인 듯 보이는 여인과 앉아 있다가 거식을 맞이한다.
주말인데도 손님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준비한 맥주와 안주가 나오고 경아가 거식의 옆자리에 앉는다.
“늦었네요? 기다렸는데...이제 조금 있으면 문닫아야 하는데..”
“아.. 이야기좀 하느라고요. 얼른 먹고 갈께요.”
함께 건배를 하며 맥주를 들이킨다.
“저도 같이 마셔도 돼요?”
순간 경아와 함께 앉아 있던 여인이 다가오더니 합석을 요구한다.
뻐드렁이가 매력적인 약간은 통통한 체구의 여인.
“제 친구예요. 심은지라고 같은 과예요.”
“안녕하세요. 나거식입니다. 이쪽은 후배 이기범이고 현재 휴학중에 있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컴퓨터 가르치신다고..”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하핫...”
“그럼 저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아.. 그럼 여기 기범이 한테 배우세요.. 기범이도 잘 가르쳐요. 이녀석이 저보다 실력은 낫을껍니다.”
거식의 말에 기범이 웃음을 띄운다.
그렇게 각각 3명씩 과외를 하기로 합의한다.
몇잔의 술이 들어가고 어느덧 12시를 향해 가고 있다.
“좀 아쉬운데 노래방 가실래요?”
은지가 기범에게 이야기 하자 경아는 은지의 옆구리를 친다.
그러나 상관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는 은지.
주말이고 아직은 술을 더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거절하지 않는 두 사람이다.
문을 닫고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네사람.
대부분 문을 닫은 시간. 이동하는 내내 어둠이 내려 앉는다.
도착했다며 내리는 은지.
따라내린 거식과 기범이 둘러 보아도 불켜진 노래방은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불꺼진 노래방앞에 서더니 이내 셔터문을 강하게 두드린다.
“아저씨 저 왔어요...”
신호인 듯 은지가 말을 하고 나서 이내 셔터문이 열린다.
“헤.. 방 있죠? 4명이예요..”
은지는 자주와 본 듯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간다.
맥주와 안주를 시키는 은지.
한 두번 와본 솜씨가 아닌 듯 싶다.
작은 방안에서 술과 함께 노래가 시작된다.
거식은 경아와 기범은 은지와 함께 앉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은지는 춤은 이렇게 추는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격렬하게 허리와 엉덩이를 흔들어 댔고 나중엔 기범까지 일으켜 세우더니 진한 스킨십과 함께 춤을 춘다.
정신없이 시간이 흐른다.
거식도 술을 마시며 노래에 몸을 맡기고 온몸을 흔들어 댔다.
그렇게 한참 놀던 네사람.
기범이 화장실을 간다며 나가자 은지 역시 화장실을 간다며 나간다.
경아와 함께 조용한 노래 서너곡을 불렀는데도 두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
과거를 묻는 경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니 10여분이 흘렀다.
경아가 다시금 노래를 시작하자 거식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화장실로 가봤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가보니 주인 아저씨만 웅크린채 담배를 피고 계셨다.
“여기 혹시 두사람 안나왔어요?”
“아니.. 안나왔는데? 화장실 간거 아냐?”
땅으로 꺼졌는가? 하늘로 솟았는가?
거식은 다시금 노래방으로 들어와 선팅이 짙은 방안을 억지로 보려 애를 쓴다.
음악소리가 나오는 방을 제쳐둔채 조용한 방을 어떻게든 확인하려는 거식.
문제의 세 번째 방.
조금은 찢어진 선팅으로 인해 방안의 모습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기범이와 은지가 있다.
은지는 소파에 드러 누운채 기범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신음을 토해내는 듯 싶다.
기범은 연신 허리를 들썩이며 은지의 몸속 깊은 곳에 자신의 분신을 쑤셔 넣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거식은 당황스러웠다.
만난지 첫날...
자신은 몇일전 은주와 관계를 맺고 기범은 은지와 관계를 맺는다.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전개 될지도 궁금해지는 거식이었다.
거식이 다시 경아가 노래를 부르는 곳으로 향하고 10여분이 다시 흐른뒤 두사람이 들어온다.
거식은 두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알지만 모른척 시치미 떼며 약을 올린다.
“뭔 화장실을 그렇게 오래걸려? 땀은 왜 그렇게 흘리고?”
“잠깐 밖에서 이야기좀 했어... ”
은지가 대신 답변을 한다.
그날 이후 기범은 혜은이와 은주 그리고 은지를 가르쳤고 거식은 수애, 수현 그리고 경아를 가르쳤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
어머니께서 거식을 부른다.
“사촌 형 있잖아?.. 그 형이 네 이야기를 했더니 학원을 소개 시켜주던데 한번 가봐..”
“저 애들 가르치고 있잖아요.. 그런데 왠 학원을...”
“애들 가르쳐 봐야 얼마나 된다고.. 그것도 기범이랑 같이 가르친다며.. 그러면 한달에 15만원 밖에 더 돼니? 그러지 말고 가봐..”
어머니의 채근에 할 수 없이 면접 아닌 면접을 보러 가게 된다.
시내 중심가에 예전엔 예식장으로 쓰던 곳을 리뉴얼한 컴퓨터학원.
사무실로 들어가니 원장과 남편으로 보이는 분이 계신다.
“저.. 나거식이라고 합니다.”
“아.. 앉아.. 형한테 이야기 들었어. 전에도 강의해봤다고?”
“네.. XX컴퓨터학원에서 했었습니다.”
“음.. 이력서 가지고 왔지? 줘봐.”
이력서를 내밀자 한참을 보던 원장과 남편.
“다 좋은데 말야.. 그 머리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머리만 자르면 오케이인데...”
거식의 머리는 뒷머리를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길어져 있었다.
평상시엔 스포츠 머리를 즐겨 하던 거식이었는데 최근 1년가까이 자른적이 없는 머리였다.
“네.. 고민해보고 연락드릴께요..”
거식은 집으로 돌아와 기범이와 상의를 했다.
기범은 좋은 기회라며 당장 내일부터라도 학원에 가라고 했다.
하지만 거식은 수애와 수현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결국 그날밤 수애와 수현 그리고 혜은에게 말을 꺼낸다.
“나 티쳐. 그러니까 학원에서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거네. 그럼 우리는 배운거 또 배울거 아냐?”
“그건 내가 주말에 다시 가르쳐 줄게. 너희들도 그냥 학원등록을 하자. 학원수강과는 별도로 내가 주말에 3시간씩 강의해줄게.”
결국 주말에 3시간씩 강의를 별도로 해주기로 하고 학원으로 가기로 한다.
학원 사장에게 전화를 걸고 이내 학생3명을 등록시키겠다고 하자 일주일 뒤부터 워드프로세서시험을 위한 자격증반을 개설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거식에게 맡아 보라고 한다.
그렇게 거식은 학원강사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
1994년 4월4일 월요일..
9자가 2개.. 4자가 3세 들어가는 날..
어느덧 학원으로 출근한지 일주일이 넘어 가고 있었다.
몇일간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거식은 이내 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좌가 열릴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거식은 원장의 남편과 함께 S여자상업고등학교에 12인승 봉고차를 타고 온 것이다.
오후 4시30분 조금 이른 시간인 듯 싶었지만 어느새 수업이 끝난 여고생들이 밀려나온다.
봉고차 한쪽에 붙은 사랑컴퓨터 학원이라는 노란 스티커가 유난히 촌스럽게 느껴졌다.
교문앞에 서서 밀려 나오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며 이미 예약이 되어 있기에 차로 다가오는 학생을 기다려 보지만 그저 바쁜 듯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거식은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웃는 것 같은 착각에 얼굴마저 붉어지고 눈 둘곳을 찾아 헤멘다.
순간 수 많은 여학생들 무리에서 거식을 보며 정신없이 달려오는 여학생이 보였다. 키는 150Cm정도? 조금은 통통하면서도 단발머리에 동그란 얼굴을 한 여학생이 정신없이 거식앞에까지 뛰어 온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송숙경이라고 해요.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세요. 이 차인가요? 에이 차가 조금 골았다. 그럼 먼저 탈께요..”
정신없이 혼자 이야기 하고 혼자 웃고 이내 차를 타는 숙경.
차에 타서도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학원을 간다고 자랑을 한다.
한참을 기다리자 수애와 수현까지 모두 12명의 여학생이 차에 오르고 이내 학원으로 출발한다.
“나티쳐.. 오늘부터 꽃밭에서 놀겠다.”
“수애야.. 너 자꾸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라. 까불면 아빠한테 이른다.”
“어? 나티쳐 벌써 배신 때리기야? 이러면 곤란해. 하늘이 보고 땅이 듣고 있어..”
“쓰..쓸데 없는 말 그만해..”
수애는 거식을 놀려 댄다.
수현도 그런 수애의 말을 거들며 거식을 놀려댔다.
학원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정신없이 강의실로 뛰어간다.
나머지 10여명은 버스로 도착을 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후.........
크게 심호흡을 하는 거식.
강의를 해본 적은 있었지만 20명이 넘는 여학생(?)을 상대한다는 것이 더욱 거식을 떨리게 만들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여학생들의 떠드는 소리가 정신을 없게 만든다.
강단에 서서 주위를 둘러 보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이야기에 정신없는 여학생들.
거식을 바라보던 수애가 일어난다.
“야!! 선생님 들어오셨잖아 조용히좀 해!!!”
수애가 소리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수애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거식.
두눈에 숙경이 아이들을 돌아보는 모습이 보인다.
“수업 해야 할 것 아냐!.. 언제까지 떠들고 있을 거야?”
마치 선생이 학생을 타이르듯 하는 숙경의 모습.
의외로 아이들은 숙경의 말에 일순간에 조용해지는 모습이다.
1-2명 약간 건달(?)끼가 보이는 아이들을 제외하곤 모두 거식을 바라본다.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거식.
“안녕하세요... 나...거..식입니다.”
“큭큭.. 거식이래.. ”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오늘부터 두달간 여러분과 EDPS 및 DOS 그리고 아래한글을 가르칠 강사입니다. 보통 컴퓨터 학원에서는 1시간 강의인데 여러분들은 워드프로세서 2급 자격증 특강으로 매일 2시간씩 강의를 받을 것이며 주말에도 필요시에는 보강학습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네? 주말에도요?.. 에이.. 그건 아닌데...”
“어차피 비싼 돈 내고 다니는거 확실하게 붙어야죠. 시간도 아깝고 돈도 아깝지 않겠습니까? 자 그럼 EDPS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 EDPS는 음담패설이라고 했는데 첫시간부터 음담패설로 시작하는건가요? 큭큭..”
-꺄르르르르..
아이들에게 휘둘리는 거식.
“야!! 농담 그만하고 수업하자!!”
다시금 숙경이 소리를 지른다.
컴퓨터의 유래부터 시작된 1시간 강의. 식은땀이 줄줄 흐르듯 새어 나온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게 50여분이 마치 몇일을 밤샌 것 같은 피곤이 몰려 왔다.
겨우 시간을 마치고 주어진 휴식시간.
도망가듯 강의실을 나온 거식은 이내 학원을 빠져나와 담배를 입에 문다.
-후.......
걱정이다.
앞으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아이들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심장이 정신없이 뛴다.
강의를 한 것인지 발표를 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온몸에 힘이 빠져 나갔다.
10분의 쉬는 시간이 왜 이리 짧은지. 강의시간은 길고 쉬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다.
다시금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거식.
순간 숙경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강단 탁자위에 음료수를 내려 놓는 숙경.
어린 여학생 이제 고2인 여학생이지만 마음 씀씀이가 고맙게 느껴진다.
이번시간은 DOS시간.
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다 보니 기본적인 명령어는 알고 있었다.
DIR, CLS, DATE, TIME, COPY, DEL 명령까지.. 그리고 FORMAT과 XCOPY, COMPRESS등 외부 명령어들..
거식은 QSHELL(HEX EDITER)을 이용하여 도스의 내부명령어를 바꿔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아이들의 디스켓은 MS-DOS의 내부명령어가 아닌 각자가 새롭게 저장한 명령어도 바뀌었다.
어떤 친구는 DIR대신 자신의 이니셜을 따서 KSH로 만들기도 했으며 어떤친구는 COPY대신 SEXY로 만들기도 했다.
SEXY A.TXT B.TXT <== 이렇게 치면 A.TXT파일이 B.TXT로 복사된다.
아이들은 그제야 신기하다는 눈치이다.
IO.SYS 파일을 편집하면 내부 명령어를 수정할 수 있었고 그것은 아이들에게 생소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DIR만 알고 있던 친구들은 이렇게 약속된 명령어를 수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명령어가 수행되려면 그 전에 기본적으로 부팅이라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자 쉽게 알아 듣는다.
수업은 아이들의 관심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모든 것이 지난 일주일동안 예행연습해온 결과였다.
M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여주며 유틸리티의 장단점을 설명하자 아이들의 눈이 빛이 난다.
그리고 수업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선생님.. 언제 끝나요?”
“응?.. 이것 하나만 더 배우면 되는데 왜?”
“벌써 이번 수업만 1시간 30분이 넘었거든요.. 집에 가야죠..”
“어? 그..그래??”
정신없이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EDPS시간까지 합쳐서 2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러 간 것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학교로 돌아갈 친구들은 학원 앞에 봉고차가 있으니 타고 나머지는 내일 봅시다.”
“큭큭.. 선생님.. 존댓말 했다 반말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해요? 수업할때는 괜찮으시더니..”
- 꺄르르르르..
다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결국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거식.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기범이 거식을 보며 웃음을 보인다.
“형 어때 할만해?”
“우아.. 죽겠다.. 이건 전부 나를 죽일 듯 쳐다 보는 것 같고.. 심장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
“무슨 수업을 2시간 30분이나 하냐.. 하여튼 형은 알아준다니까..”
“그렇게 된 줄도 몰랐어 임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넌 어땠냐?”
“큭큭.. 난 한메타자교사 40분 하고 테트리스 20분 시키고 뭐 그렇지..”
기범은 초등학교 신입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자판부터 익히기 위한 수업.
그런 기범이 조금 부러워진 거식이다.
“선생님.. 이거 드세요..”
순간 들려오는 소리.
돌아보니 숙경이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있다.
“어?.. 그..그래..고마워요...”
“말 편히 놓으세요. 오늘 수고 하셨어요..”
밝게 웃는 숙경이 예뻐 보인다.
기범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학원을 나서자 아이들이 차에 탄채 환호성을 지른다.
“야.. 너 벌써 선생님한테 아부 하는거야?? 누가 학생회장아니랄까봐...벌써 시작하네..”
“선생님. 재 조심하세요. 학교에도 선생님들 킬러에요..크크크큭..”
거식의 옆에서 걷는 숙경을 보며 아이들이 장난을 친다.
숙경은 얼굴이 빨개진채로 빠르게 차에 오르고 거식도 운전석 옆자리에 자리 잡는다.
학교로 가는 봉고차.
아이들중 일부는 다시 학교로 가서 자율학습을 할 것이라고 한다.
거식은 6년전 고등학교때가 생각이 나 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어느덧 차가 학교에 도착하고 아이들은 인사와 함께 헤어진다.
숙경은 제일 끝에 남아 거식에게 90도로 머리 숙여 인사를 한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뵐께요..”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숙경이 웃으며 헐레벌떡 뛰어 오는 모습이 스쳐지나가고 웃음을 보이는 거식이다.
다음날.
아카시아 향이 조금씩 그려지려는 완연한 봄.
학교앞에서 수강생들을 기다리는 거식의 마음에 설레임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설레임은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멀리서 뛰어오는 숙경.
이내 거식이 바로 앞에와서 90도로 인사를 하며 웃음을 보이는 숙경.
볼수록 예쁘고 귀엽고 착한 아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식이다.
수업 이틀째.
여전히 EDPS수업을 마치고 DOS에 대해 수업을 하기 시작할때였다.
순간 거식의 눈에 일부 여학생들의 독수리 타법이 보인다.
“동작..그만...지금부터 타이핑 테스트를 하겠습니다. 전부 프롬포트에서 HTT라고 입력하세요.”
아이들은 느닷없는 거식의 말에 웅성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재차 이야기 하자 그제야 하나둘 타이핑을 하고 이내 모든 컴퓨터가 한메타자교사를 실행된다.
“장문연습의 소나기를 클릭하고 타이핑 합니다. 한페이지가 끝나면 그대로 멈춰 주세요.”
강의실에 타자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시작된다.
천천히 강의실을 돌아보며 여학생들이 타자치는 모습을 바라보는 거식.
수애와 혜은의 타자 실력은 출중하다.
역시 애제자(?)는 다른 것 같다.
나름 숙경도 타자 실력이 괜찮은 듯 싶었다.
그러나 조금 불량(?)스러운 초란이라는 학생은 여전히 독수리 타법으로 분당 50타도 채 안나오는 듯 싶다.
모든 타자연습이 끝이 나자 거식이 하나씩 확인한다.
100타 이하가 5명 200타 이하가 5명 200타 이상이 12명이었다.
“200타 이하는 수업이 끝나면 30분간 타자연습하고 가세요.”
“네?.. 그런게 어디있어요.. 집에가서 할께요...”
“안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워드프로세서 실기는 어떻게 할려고 하세요. 오늘부터 특별 연습입니다.”
수업을 마친 거식은 10명의 학생을 따로 불러 눈을 감게 하고 타자 연습을 시킨다.
“qwert q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위로 올리면 있습니다. 그다음 약지가 w 중지는 e 이런식으로 하나 하나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면서 치세요.”
“선생님 그러면 너무 느린데요..”
“느린 것 같지만 빠른겁니다. 이렇게 보름만 지나보세요. 200타 치는 사람보다 더 빠르게 칠 수 있습니다. 한글도 마찬가지로 연습을 하세요. 키보드를 머릿속으로 그려서 치세요.”
의외로 아이들은 거식의 말을 잘 들었다.
그런데 그 10명의 아이들과 별도로 숙경의 모습이 보인다.
“송숙경.. 너는 200타 넘어서 연습 안해도 되는데..”
“아까 보니까 수애는 300타를 넘던데요.. 저도 더 잘 하고 싶어서요..”
그랬다. 숙경은 착하고 예쁘고 또 승부욕도 넘치는 아이였다.
자신이 연습을 하며 아이들도 봐주는 숙경의 활약(?)에 조금은 짐을 덜은 거식이다.
보충수업을 마치고 사무실의 책상으로 돌아왔는데 책상위에 꽃이 놓여져 있다.
붉은 장미와 안개꽃으로 수 놓은 꽃다발.
원장님과 남편은 아이들을 태워주려 나갔고 기범은 다른 방에서 수업중이라 누가 가져다 놓은것인지 알 수 없었다.
꽃을 들어 향기를 맡는다.
짙은 장미향이 피곤한 거식의 마음을 녹여 버리는 듯 싶다.
다음날 점심때가 되자 봄비가 내린다.
조금씩 흩뿌리는 듯 내리던 비가 오후가 되자 거세진다.
여전히 학교앞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는 거식.
검은 우산을 받쳐 든채 아이들을 기다린다.
오늘도 숙경은 1등으로 뛰어 나온다.
비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은채 뛰어오는 숙경.
거식은 그런 숙경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학생들 사이로 뛰어나가 우산을 씌워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우.. 다 젖었다.. 큭큭..”
숙경의 말에 모습을 보니 머리는 말할것도 없고 상의도 잔뜩 젖어 있었다.
순간 숙경의 젖은 옷속에 비치는 브래지어가 살짝 드러나 보여 고개를 돌리며 다른 학생이 오지 않는지 바라보는 거식.
-흠..흠...
괜히 헛기침이 나온다.
순간적으로 섹시(?)하다는 느낌을 받은 거식. 죄라도 진것 같은 느낌이다.
도둑질이라도 한듯한 느낌이 든다.
“안녕하세요...”
“나티쳐.. 머야.. 숙경이만 우산씌워주고...”
민혜가 인사를 하고 이내 수애가 혀를 뻬꼼 내밀며 인사를 한다.
수애도 거식의 우산속으로 파고든다.
“야.. 넌.. 우산 있잖아..”
“큭큭.. 분위기 깨려고..”
“분위기는.. 무슨 .... ”
말을 하다 마는 거식. 우산속의 둘은 조금 무안하게 느껴진 거식이었다.
그런 무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숙경은 오른쪽에서 수애는 오른쪽에서 거식의 팔짱을 껸다.
젖은 머리카락 그리고 숙경과 수애의 향기가 거식을 스친다.
비가 온 날이라 그런지 강의실 안이 시끌벅적하다.
수업전까지 아이들은 뛰어 다니며 18살의 여고생을 마음껏 뽐낸다.
시간이 되어 수업에 들어가는 거식.
강의실 안은 온통 물에 젖은 생쥐.. 아니 여고생들이다.
온몸이 젖은 아이들.. 하얀교복 사이로 브래지어가 다들 조금씩 비치는 모습이다.
도저히 아이들을 바라 보는것이 민망한 거식.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거식에게 장난을 걸어온다.
“선생님 비오는데 이야기좀 해주세요.”
“이야기? 무슨 이야기?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옛날 이야기?”
“선생님 애인 있어요?”
“애인? 글쎄.... 있을 것 같아 없을 것 같아?”
“생긴 것 봐선 없을것 같고 하는 것 봐선 있을 것 같애요..”
“뭐야??.. 허허.. 녀석..”
역시 불량스러운 초란이 농담을 던진다.
“애인이랑 사랑한 이야기좀 해주세요.”
“사랑 이야기?.. 어허.. 학생이 무슨 사랑이야..”
“우리도 알거 다 알거든요.. 그러지 말고.. 해주세요. 어떻게 만나셨어요?”
“음.. 그게.. 2년 전인데.. 학원에서 만났어.. 같은 수강생이었는데... 만난지 3일만에 청혼을 했지..”
“우아.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
“어떻게 되긴.. 아직은 내가 총각이다.. 그러면 답 나왔지?”
“에이..그럼 헤어진거에요? ”
“아니 아직은 ing중이야..”
“그럼 어디까지 해보셨어요? 키스는 해봤을것 같고.. 설마... 그것까지? 큭큭큭...”
“이녀석들이... 자.. 그만하고 수업하자..”
“에이.. 말씀해주세요..”
아이들의 채근이 시작된다.
처음엔 작게 한두명의 채근으로 시작되는 듯 싶더니 이내 모든 수강생들이 채근을 하는듯 목소리가 커져간다.
“키스까지만 해봤다.. 이제 그만..”
“우아........... 키스.... 어땠을까?”
여학생들은 저마다 입술을 잔뜩 내민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탕탕...
책을 살짝 내리치는 거식.
수업을 시작하려 하지만 이미 들떠버린 분위기로 어수선했다.
“야.. 이제 수업하자!.. ”
또 다시 나서는 숙경.
작은 꼬마 같은 녀석이 수업의 분위기를 이끌어 준다.
순간 고마움이 드는 거식이다.
오늘은 EDPS 순서도를 강의를 한다.
어려워 하는 녀석들.
다시금 예제를 드는 거식.
“컴퓨터는 0과 1밖에 몰라. NO 아니면 YES. 순서도에서는 질문인 조건문이 나오고 그 조건에 부합하는지 안하는지에 따라서 다음명령을 실행해. 남녀 관계처럼 생각해 볼게 라는거는 존재 하지 않아. 좋으면 좋은것이고 싫으면 싫은것 단순 명료하지.”
“큭큭. 그렇게 설명하니까 좀 알것 같네요.”
강의실 안에 습기가 차는 듯 싶다.
여학생들의 젖은 옷이 체온에 의해 마르면서 증기를 뿜어내는 것 같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쓰는 거식.
다시 DOS시간이 되고 명령어 실습을 하며 여학생의 뒷자리에 서성이던 거식은 오늘 만큼은 확인도 하지 않은채 멍하니 교단에 서있다.
숙경의 뒤에서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내 옷위로 보이는 브래지어의 투영으로 인해 부끄러움이 찾아온 거식이었기 때문이다.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 지나고 수업이 끝이 난다.
여전히 비는 거세게 내리고 있고 학교로 돌아갈 아이들은 타자연습을 하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의실을 나와 사무실로 들어가니 어제 꽂아둔 꽃이 보이지 않고 새로운 꽃이 꽂혀 있다.
- 늘 저희를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덩그러이 놓여져 있는 쪽지.
예쁜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것 같은 느낌.
향기펜을 썼는지 은은한 향기가 베어 나온다.
학원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오늘은 거식도 사무실에 남아 필기 문제를 준비한다.
몇일 뒤 예비 시험 볼 문제들을 타이핑한다.
EDPS와 DOS문제를 출제하는 거식.
정신없이 타이핑하는데 사무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숙경이 서있다.
“어.. 무슨일이야?”
“저 선생님.. 혹시.. 우산좀 씌워 주실 수 있으세요?”
“응? 우산??”
“네.. 버스 정거장까지 가야 하는데.. 비 때문에..”
“그럼 그러지 말고 우산을 가지고 가. 내일 주면 되잖아.”
“아뇨.. 그러면 선생님도 비 맞으면서 집에 가셔야 하잖아요.”
“난 괜찮아.. 비 맞으면서 걷는걸 좋아하거든...”
“아뇨.. 그럼.. 그냥 갈께요...”
숙경이 돌아서 나가자 거식이 우산을 챙겨 뛰쳐나간다.
“어휴.. 고집불통.. 자.. 쓰고 가자..”
“네.. 헤헤... 고마워요...”
천천히 학원을 나오는 두사람.
조심스레 숙경이 거식의 팔짱을 껸다.
거절할까 하다가 왠지 무안해 할까봐 거절조차 하지 못하는 거식.
숙경은 지금 상황이 마냥 좋은지 웃으며 깡충깡충 뛰듯이 걷는다.
천천히 지하상가로 내려가려는 두 사람.
순간 거식이 내려가다 말고 그대로 멈춘다.
거식의 눈이 한 여인에게 향하고 그 여인은 거식을 뚫어질듯 바라본다.
천천히 팔짱을 떼어내는 숙경.
“서..선생님.. 누..구..세요?”
“응?.. 아.. 치..친구... 지현아.. 인사해.. 여긴 숙경이라고 내 제자야.”
“안녕하세요.. 전 송숙경입니다. 언니 예쁘시네요.”
“네.”
짧게 인사하는 지현..
이비인후과 간호사인 지현이다.
거식과 2년 동안 사귄 여인.
2년이라는 시간동안 겨우 키스와 몇 번의 애무행위까지 밖에 하지 못한 여인.
결혼까지 생각하지만 늘 허락하지 않는 지연으로 인해 힘들어 한 거식이었다.
물론 자신의 여성 집착(?)증으로 인해 성적으로 만나는 여인들은 만났지만 지현과 결혼한다면 칼로 두부를 베듯 단칼에 모든 것을 정리 한 채 지현만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지현은 매번 거식에게 일정하게 거리를 두었고 늘 그로 인해 더욱 힘들어 한 거식이었다.
몇일전 학원에서 강의하게 되었다는 말에 지현은 잘됐다면서 시간 되면 한번 찾아 온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말 한마디 없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군다나 여학생의 팔짱을 받은채 걷는 거식을 봤으니 그녀가 화가 나는것이 어쩌면 당연한듯 싶었다.
“선생님.. 저.. 먼저 가볼께요... 언니.. 안녕히 계세요..”
숙경이 인사를 하고는 이내 빗속을 뛰어간다.
지현이 숙경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숙경이 사라지자 휑하니 고개를 돌리는 지현.
“좋아 보인다. 여학생과 데이트라...여학생이라 그런지 활기차 보이고..”
“그게 아니라.. 우산을 씌워 달라고 해서... 나온거야.. 다른 생각 하지마..”
“누가 뭐래?.. 갈게..”
“야.. 어디가.. 여기까지 나 보러 왔으면 학원구경도 하고 그래야지..”
“됐어.. 얼굴 봤으니까 갈래.”
“지현아..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냥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우산씌워 주러 온거야.. 버스 정거장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해서 그런거야..”
거식은 연신 변명아닌 변명을 해댔다.
지현의 손을 잡은채 미안하다며 계속 사과하는 거식.
그제야 지현이 웃음을 살짝 보이며 입을 삐죽 내민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보면 오해하기 십상이야. 애들이 팔짱낀다고 그걸 받아 주고 있냐? 이 늑대야. 응큼한 늑대야 하여튼..”
“넵.. 알겠습니다... 앞으론 절대로 안그러겠습니다..”
“앞으로 안그러고 뒤로 몰래 할려고 그러지?”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위로도 아래로도 절대로 안그러겠습니다...”
거식이 다시금 사과하자 겨우 웃음을 보이는 지현.
지현을 데리고 학원을 구경시켜 준다.
강의실에 앉은 지현.
거식은 자신의 강의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는듯 천천히 강의내용을 칠판에 적어가며 설명을 한다.
사실 지현이도 워드까지 배우기는 했지만 많이 부족했다.
여자친구는 못 가르쳐 주면서도 학원에서 강의를 하는 거식이다.
“이건 누가 준거야? 싱싱한게 얼마 안된것 같은데?”
“어?.. 아.. 어제.. 내가... 책상이 허전한 것 같아서 사다 놨어...”
“그래?.. 그래도 센스 있네... 그렇다고 이런걸 직접 사서 갔다 놓냐? 여자도 아니고..”
“그...그지?”
“나 잠깐 화장실좀 갔다 올게.. 화장실 어디야?”
“어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있어...”
지현이 사무실을 나가자 거식은 정신없이 흔적들을 지운다.
책상 아래 있던 쓰레기통속에 박힌 꽃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 거식.
그리고 이내 메모쪽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짠~!”
“어... 뭐야.. 그..그건...”
지현이 꽃과 화분 하나를 들고 들어온다.
화장실을 간다고 하더니 그새 꽃을 사온것이다.
결국 여학생중 누군가 준 꽃은 꽂힌지 하루도 채 안되어 쓰레기통속으로 쑤셔 박힌다.
“이거 오래 오래 죽이지 말고 잘 키워. 나라고 생각하고..”
“헉.. 그러면 집에 가지고 가야 하는데.. 품에 안고.. 입맞추고.. 목욕할때도 같이....”
“어휴.. 이 변태.... 하여튼 머릿속에 늘 그생각만 들어 있냐?”
“큭큭.. 그러니까 니가 한번 주면 되잖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주기는 뭘 줘.. 내가 물건이냐.. 자꾸 달라고 하게..”
“야.. 아무리 그래도 벌써 2년이나 됐어. 우리 사귄게 2년이야.. 2년이면 애를 낳아도 둘은 낳을 수 있는 시간이거든.. 그런데 우린 겨우 키스 밖에 못해봤어..”
“그거야.. 나중에.. 결혼 한다음에 한다고 했잖아... 넌 나를 사랑한다면서 그정도도 못해줘?”
“사랑하지.. 세상에 너를 나만큼 사랑하는 사람 당연히 없지.. 그런데 나도 남자잖아. 진짜 너를 책임지고 싶고 너 하나만 바라보면서 살고 싶어.. 그러니까 결혼하자..”
“돈은? 돈 많이 벌어 놨어? 결혼하자마자 월세 살거야? 난 그런거 싫어. 그리고 동생이 아직 중학생이야. 적어도 동생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시키고 결혼 하든지 할래. 아직 준비가 안됐어. 내가 준비가 돼면 꼭 말할게.. 기다려줘.”
“후.. 또.. 기다려 달란다.... 벌써 2년째 그말 하고 있는거 알지?”
“미안해.. 대신 내가 오늘 술한잔 살게.. 축하턱.. ”
“술만으로 안돼.. 노래방까지.. 오케이?”
“씨... 또 노래방 가서 덤벼들려고 그러지? 넌 노래방만 가면 나 자꾸 만지려고 하고 그러잖아.”
“그거야. 니가 예쁘니까 그렇지.. 누가 그렇게 예쁘게 생기래?”
“치.. 여학생들에 둘러 싸여서 정신 못차리면서.. 내가 이쁘긴...”
“아냐.. 세상에서 지현이가 제일 이뻐~”
지현이 거식의 팔짱을 끼고 학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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