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을 준비한다. 귀국이다. 이십년간의 미국 생활. 활주로를 경쾌하기 달리는 비행기의 작은 창 밖으로 멀어져 가는 풍경처럼 이십년 세월이 스쳐 지나간다. 강준이 지긋이 눈을 감는다.
“어떤 음료를 드릴까요?”
회상에 젖었던 강준이 눈을 뜬다.
“와인 부탁합니다. 혹시 멜로우 있나요?”
“네. 캘리포니아산 멜로우입니다. 괜찮으신지요?”
“감사합니다.”
강준이 다시 눈을 감는다. 열아홉에 떠난 한국. 그리고 이십년 만의 귀국. 강준은 이제 다가올 한국 생활을 그려본다. 그가 계획했던 모든 것들… 강준은 이제 그가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을 실천할 생각에 잠긴다. 내 그리운 나라에서…
“와인과 치즈입니다.”
승무원이 돌아왔다. 강준은 고개를 돌려 승무원을 쳐다본다. 김. 연. 희. 봉긋한 가슴 위의 명찰.
“감사합니다. 김연희씨. 앞으로 열네시간 잘 부탁 드립니다.”
강준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그녀의 체취가 여운으로 남는다. 달콤쌉쌀한 멜로우.
강준은 아이패드를 켰다. 동영상 속에서 아들 녀석이 즐겁게 놀고 있다. 이제 열살. 아직은 아빠가 필요한 나이다. 미안하다, 아들…
비행기가 캐나다 상공을 지나고 있다. 그 사이 강준은 첫 기내식을 마쳤고 와인 한 잔을 더 마셨다. 기내는 조용하다. 강준의 비즈니스석 옆자리는 비어 있다. 방해 받지 않아 편안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이강준 선생님. 혹시 뭐 잊어 버리신 것 없나요?”
조용히 다가온 김연희. 한쪽 무릎을 꿇고 강준의 눈 높이에 시선을 맞춘다. 하지만 강준의 시선은 그녀의 살짝 드러난 무릎 위 허벅지에 잠시 머문다. 살색 스타킹이 터질 듯 하다.
“네?”
“기내 화장실에서 손님 지갑을 찾았습니다.”
강준은 뒷주머니를 살핀다. 지갑이 없다.
“아…. 고마워요. 제가 화장실에 떨어뜨렸나 봅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신분을 확인할 여권 있으신지요? 절차상 필요해서요.”
강준이 서류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건낸다. 은근한 멜로우 향 넘어 약간은 짙은 화장 속으로 잔주름이 얼핏 비친다.
“지갑 여기 있습니다. 제가 발견해서 다행입니다. 혹시 분실물이 없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
여권과 지갑을 돌려주는 그녀. 가늘고 긴 그녀의 손가락과 약간은 거친 강준의 손가락이 순간 얽힌다. 짜릿하다.
“다행히 모두 무사하네요. 하하…. 너무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천만에요. 저희들이 할 일인걸요. 혹시 모르니 소지품을 잘 관리해 주세요. 그럼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강준의 시선이 그녀의 굴곡진 유니폼 뒷태에 머문다.
비행기가 캄차카 반도에 들어설 때까지 강준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대신 유난히 승무원 유니폼 치마를 짧게 입은 은 승무원이 강준에게 와인 두 잔과 식사를 서빙했다. 그녀는 강준이 아이패드로 보고 있는 동영상에 관심을 보였다.
“아드님이 넘 귀여워요. ㅎㅎㅎ. 근데 여기 어디죠? 수영장이 너무 좋네요. 집이신가요? 강아지도 키우세요? 래브라도죠? 저도 래브라도 좋아하는데… ㅎㅎㅎ”
강준이 그저 살짝 웃어보인다. 강준은 그녀의 명찰을 확인하지 않았다.
“저, 혹시 사무장이신가요?”
강준이 기내 복도를 지나는 남자 승무원을 불러 세운다.
“네. 고객님.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저 혹시 기내 서비스 고객 평가 용지가 있나요? 제가 칭찬해 드리고 싶은 승무원이 있어서요.”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가 다가온다. 강준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그를 향해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둘의 시선이 부딛친다. 옅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퍼진다. 눈망울이 깊고 촉촉하다.
“고객님, 너무 감사해요. 평가서를 너무 잘 써 주셔서….”
“천만에요. 제가 연희씨 덕분에 지갑을 찾았는데,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그리고 지갑에 대단히 중요한 게 있었는데 잊어버리면 정말 큰 일 날 뻔 했어요.”
“그래두요… 평가서 써 주시는 고객님이 드물거든요. 덕분에 인사고과 점수가 좀 오를꺼에요. ㅎㅎㅎ”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살짝 들떠 있었다.
어느새 비행기가 일본 상공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두 시간 뒤면 인천이다. 강준은 지갑에서 명함 한장을 꺼내고 펜을 들었다.
“이강준 고객님, 멜로우 한 잔 더 드릴까요?”
그녀가 아니다. 짧은 치마 승무원이다. 그녀의 긴 다리가 맵시있게 뻗어있다. 강준이 이제야 그녀의 명찰을 본다. 허. 지. 은.
“감사합니다. 한 잔만 더 부탁할께요. 마지막으로, 하하… 이제 그만 괴롭혀 드려야죠. “
“별 말씀을 다 하세요. 이 선생님…. ㅎㅎㅎ 손님처럼 매너 있는 분들은 언제나 환영이죠. 연희 언니한테 얘기 들었어요. ㅎㅎㅎ”
콧소리를 남긴 그녀가 엉덩이를 씰룩이며 멀어져간다. 색스럽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ㅎㅎ”
“제가 아까 칠칠치 못하게 지갑을 화장실에 두고 왔는데 다른 승무원 분이 찾아 주신 거 아시죠?”
“그럼요. “
“제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지갑 찾아주신 분께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ㅎㅎㅎ, 어떻게요?”
“제가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 혹 내일이나 모레 시간이 괜찮으신지?”
“제가 찾아드린 것도 아닌데, 연희 언니 한테 여쭤 보시지 그러세요?”
“하하, 그 분이 안보이셔서… 혹시 저 대신 여쭤봐 주시겠어요? 오늘 와인 서빙 하신다고 지은씨도 수고 많으셨는데 두 분께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네요.”
“저두요? ㅎㅎㅎ 저희들이 내일 오프이긴 한데…. ㅎㅎㅎ”
“그래요? 잘 됐네요. 그럼 피곤하지 않으시면 부담 없이 점심 식사 어떠세요?”
“전 감사한데 언니한테 한번 물어볼께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정말 소중한 게 지갑에 있었거든요. 제가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가 죄송하네요.”
비행기 창으로 동해가 보인다. 기내가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승객들로 부산스럽다.
“이 선생님, 식사까지 대접 안해주셔도 됩니다.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화장실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사무적이다.
“아니에요. 연희씨는 할 일을 하셨지만 연희씨가 찾아주신 지갑에 정말 소중한 게 있었죠. 꼭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으시면 다른 날에라도… 허지은씨도 함께 했으면 좋겠네요. 허지은씨도 수고가 많으셨는데…”
그녀가 잠시 망설인다.
“이건 제 명함이구요. 내일 12시반에 이 식당에서 뵙죠. 지은씨와 꼭 함께 나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일 뵐께요.”
강준이 뒷면에 식당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그녀에게 건넨다. 둘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얽힌다. 따사롭다.
인천이다. 열네시간 반을 비행한 비행기가 활주로에 안착했다. 서류 가방을 든 강준이 비즈니스 승객 전용 출구를 향한다. 출구에 나란히 서 있는 연희와 지은. 강준의 시선이 지은과 만났다. 지은이 손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린다. 강준이 시선을 돌려 연희를 본다.
“감사했습니다. 내일 뵐께요.”
연희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녀의 무릎이 살짝 꼬인다.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을 준비한다. 귀국이다. 이십년간의 미국 생활. 활주로를 경쾌하기 달리는 비행기의 작은 창 밖으로 멀어져 가는 풍경처럼 이십년 세월이 스쳐 지나간다. 강준이 지긋이 눈을 감는다.
“어떤 음료를 드릴까요?”
회상에 젖었던 강준이 눈을 뜬다.
“와인 부탁합니다. 혹시 멜로우 있나요?”
“네. 캘리포니아산 멜로우입니다. 괜찮으신지요?”
“감사합니다.”
강준이 다시 눈을 감는다. 열아홉에 떠난 한국. 그리고 이십년 만의 귀국. 강준은 이제 다가올 한국 생활을 그려본다. 그가 계획했던 모든 것들… 강준은 이제 그가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을 실천할 생각에 잠긴다. 내 그리운 나라에서…
“와인과 치즈입니다.”
승무원이 돌아왔다. 강준은 고개를 돌려 승무원을 쳐다본다. 김. 연. 희. 봉긋한 가슴 위의 명찰.
“감사합니다. 김연희씨. 앞으로 열네시간 잘 부탁 드립니다.”
강준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그녀의 체취가 여운으로 남는다. 달콤쌉쌀한 멜로우.
강준은 아이패드를 켰다. 동영상 속에서 아들 녀석이 즐겁게 놀고 있다. 이제 열살. 아직은 아빠가 필요한 나이다. 미안하다, 아들…
비행기가 캐나다 상공을 지나고 있다. 그 사이 강준은 첫 기내식을 마쳤고 와인 한 잔을 더 마셨다. 기내는 조용하다. 강준의 비즈니스석 옆자리는 비어 있다. 방해 받지 않아 편안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이강준 선생님. 혹시 뭐 잊어 버리신 것 없나요?”
조용히 다가온 김연희. 한쪽 무릎을 꿇고 강준의 눈 높이에 시선을 맞춘다. 하지만 강준의 시선은 그녀의 살짝 드러난 무릎 위 허벅지에 잠시 머문다. 살색 스타킹이 터질 듯 하다.
“네?”
“기내 화장실에서 손님 지갑을 찾았습니다.”
강준은 뒷주머니를 살핀다. 지갑이 없다.
“아…. 고마워요. 제가 화장실에 떨어뜨렸나 봅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신분을 확인할 여권 있으신지요? 절차상 필요해서요.”
강준이 서류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건낸다. 은근한 멜로우 향 넘어 약간은 짙은 화장 속으로 잔주름이 얼핏 비친다.
“지갑 여기 있습니다. 제가 발견해서 다행입니다. 혹시 분실물이 없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
여권과 지갑을 돌려주는 그녀. 가늘고 긴 그녀의 손가락과 약간은 거친 강준의 손가락이 순간 얽힌다. 짜릿하다.
“다행히 모두 무사하네요. 하하…. 너무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천만에요. 저희들이 할 일인걸요. 혹시 모르니 소지품을 잘 관리해 주세요. 그럼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강준의 시선이 그녀의 굴곡진 유니폼 뒷태에 머문다.
비행기가 캄차카 반도에 들어설 때까지 강준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대신 유난히 승무원 유니폼 치마를 짧게 입은 은 승무원이 강준에게 와인 두 잔과 식사를 서빙했다. 그녀는 강준이 아이패드로 보고 있는 동영상에 관심을 보였다.
“아드님이 넘 귀여워요. ㅎㅎㅎ. 근데 여기 어디죠? 수영장이 너무 좋네요. 집이신가요? 강아지도 키우세요? 래브라도죠? 저도 래브라도 좋아하는데… ㅎㅎㅎ”
강준이 그저 살짝 웃어보인다. 강준은 그녀의 명찰을 확인하지 않았다.
“저, 혹시 사무장이신가요?”
강준이 기내 복도를 지나는 남자 승무원을 불러 세운다.
“네. 고객님.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저 혹시 기내 서비스 고객 평가 용지가 있나요? 제가 칭찬해 드리고 싶은 승무원이 있어서요.”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가 다가온다. 강준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그를 향해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둘의 시선이 부딛친다. 옅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퍼진다. 눈망울이 깊고 촉촉하다.
“고객님, 너무 감사해요. 평가서를 너무 잘 써 주셔서….”
“천만에요. 제가 연희씨 덕분에 지갑을 찾았는데,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그리고 지갑에 대단히 중요한 게 있었는데 잊어버리면 정말 큰 일 날 뻔 했어요.”
“그래두요… 평가서 써 주시는 고객님이 드물거든요. 덕분에 인사고과 점수가 좀 오를꺼에요. ㅎㅎㅎ”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살짝 들떠 있었다.
어느새 비행기가 일본 상공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두 시간 뒤면 인천이다. 강준은 지갑에서 명함 한장을 꺼내고 펜을 들었다.
“이강준 고객님, 멜로우 한 잔 더 드릴까요?”
그녀가 아니다. 짧은 치마 승무원이다. 그녀의 긴 다리가 맵시있게 뻗어있다. 강준이 이제야 그녀의 명찰을 본다. 허. 지. 은.
“감사합니다. 한 잔만 더 부탁할께요. 마지막으로, 하하… 이제 그만 괴롭혀 드려야죠. “
“별 말씀을 다 하세요. 이 선생님…. ㅎㅎㅎ 손님처럼 매너 있는 분들은 언제나 환영이죠. 연희 언니한테 얘기 들었어요. ㅎㅎㅎ”
콧소리를 남긴 그녀가 엉덩이를 씰룩이며 멀어져간다. 색스럽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ㅎㅎ”
“제가 아까 칠칠치 못하게 지갑을 화장실에 두고 왔는데 다른 승무원 분이 찾아 주신 거 아시죠?”
“그럼요. “
“제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지갑 찾아주신 분께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ㅎㅎㅎ, 어떻게요?”
“제가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 혹 내일이나 모레 시간이 괜찮으신지?”
“제가 찾아드린 것도 아닌데, 연희 언니 한테 여쭤 보시지 그러세요?”
“하하, 그 분이 안보이셔서… 혹시 저 대신 여쭤봐 주시겠어요? 오늘 와인 서빙 하신다고 지은씨도 수고 많으셨는데 두 분께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네요.”
“저두요? ㅎㅎㅎ 저희들이 내일 오프이긴 한데…. ㅎㅎㅎ”
“그래요? 잘 됐네요. 그럼 피곤하지 않으시면 부담 없이 점심 식사 어떠세요?”
“전 감사한데 언니한테 한번 물어볼께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정말 소중한 게 지갑에 있었거든요. 제가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가 죄송하네요.”
비행기 창으로 동해가 보인다. 기내가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승객들로 부산스럽다.
“이 선생님, 식사까지 대접 안해주셔도 됩니다.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화장실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사무적이다.
“아니에요. 연희씨는 할 일을 하셨지만 연희씨가 찾아주신 지갑에 정말 소중한 게 있었죠. 꼭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으시면 다른 날에라도… 허지은씨도 함께 했으면 좋겠네요. 허지은씨도 수고가 많으셨는데…”
그녀가 잠시 망설인다.
“이건 제 명함이구요. 내일 12시반에 이 식당에서 뵙죠. 지은씨와 꼭 함께 나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일 뵐께요.”
강준이 뒷면에 식당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그녀에게 건넨다. 둘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얽힌다. 따사롭다.
인천이다. 열네시간 반을 비행한 비행기가 활주로에 안착했다. 서류 가방을 든 강준이 비즈니스 승객 전용 출구를 향한다. 출구에 나란히 서 있는 연희와 지은. 강준의 시선이 지은과 만났다. 지은이 손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린다. 강준이 시선을 돌려 연희를 본다.
“감사했습니다. 내일 뵐께요.”
연희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녀의 무릎이 살짝 꼬인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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