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김순애 편 1부
토요일 오후다. 늘 걸렸던 당직도 아니다. 면회도 없다.
놈은 오랜만에 편한 상태가 되어 츄리닝을 걸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반장님”
하침 당번이 조용히 다가와서 부른다.
“왜?”
“저, 위병소에 좀 가보셔야...”
“왜? 무슨 사고야?”
“아니...누가 반장님을 찾아왔다고...”
“누가?”
“여자랍니다”
“여자? 면회시간 끝난 지가 언젠데...”
“저...이웃집에 산다고...”
“이웃집?”
놈이 고개를 갸웃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웃집에서 자기를 찾아 올 여자는 없다.
이웃집은 천리 먼 길이다. 놈의 고향 자체가 그렇다. 부대에서 고향까지 최소 10시간 거리다.
거기다 이웃집은 ‘아짐’들이 아니면 여자라곤 없다.
“나 찾아 온 사람이 아닐 거야”
“맞답니다”
“맞다고?”
“네.”
“누가 연락했어”
“저...지금 근무자가...”
“누구야?”
“조수병님입니다”
“누구? 조용옥이?”
“네...”
느긋하던 놈이 일어나더니 상황실로 간다. 위병소 왓찌는 상황실과 연결되어 있다.
놈이 상황실에 들어서자 상황근무 중이던 대원들이 벌떡 일어나 경례를 붙인다.
“필승”
“응...오늘 당직 누구야?”
“오영식 선임하사님이십니다”
“근데, 어디갔어?”
“예, 토요일이라 잠깐 순찰 도신다고...”
“당직 사관은?”
“예, 본부중대장님이신데 부관님과 같이 나가셨습니다”
“알았어, 왓찌 위병소 연결해 봐”
“네”
상황병이 전화기 옆구리를 힘차게 돌린다.
“예, 여기 상황실입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상황병이 전화기를 놈에게 넘겨 준다.
“누구야?”
“....”
“조용욱이 바꿔 봐”
“....”
“나야. 누가 나 찾아왔어?”
“....”
“어디서 왔데?”
“....”
“뭐? 청주?”
“....”
“이름이 뭐야?”
“....”
“그래서 어떻게 했어?”
“....”
“알았어. 잠깐 나가보지 뭐”
말은 그렇게 하고 상황실을 나왔으나 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순애....청주...
청주라면 형이 사는 곳이다.
말이 청주이지 청주시에서 보면 변두리다.
일찍이 고향을 떠난 형이 어떻게 된 일인지 그곳 여자와 결혼하고 자리를 잡았다.
놈은 입대 후 한두 번 형이 사는 곳이라서 들러 하룻밤 자고 왔을 뿐이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 필요도 없고 만나보지도 못했으니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여자가, 그것도 처녀가 분명하게 내 이름을 대고 찾아왔단다.
하침으로 돌아 온 놈이 츄리닝을 벗고 주섬주섬 복장을 갖춘다.
어차피 위병소 밖으로 나가려면 외출증은 필요했다.
마침 당직사관이 놈이 소속된 본부중대장이라니 그건 또 그런데로 수월케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면회왔다고?”
“그랬다는데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뭘...하도 많이 찾아오니까 기억이 안 나는 것은 아니고?”
“아닙니다. 정말 모르는 여자입니다”
“그럼 안 나가도 되잖아?”
“형이 청주에 사는데 아마도 형이 사는 옆집 여자인 것 같아서...”
“그래?”
“네, 형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그래서 심부름을 온 것은 어닌지...암튼 잠깐이면 됩니다”
“알았어. 다녀 와”
흔쾌하게 허락한 중대장이 외출증에다 도장을 찍어 준다.
전방이지만 토요일이라 헌병들이나 보안대가 자주 순찰을 돈다.
면회객을 따라 무단 외출자를 단속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외출증은 필수다.
외출증 도장을 받은 놈이 휘적휘적 위병소로 갔다.
“필승”
위병 근무자의 경례소리가 크고 경쾌하다.
그놈들은 놈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또 여자 하나가 작살나는 군 하고 생각한 것 같다.
놈이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위병소 안으로 들어가서 위병일지를 훑는다.
“얘야?”
“네”
오늘 선임 근무자인 조용욱이가 부동자세로 대답한다.
“이거 말고 뭐 별다른 것은 없어?”
“없습니다”
“뭐라 그래? 뭐 심부름 왔데?”
“그런 말 없었습니다”
“그럼 무슨 말을 했어?”
“그냥...여기 이 부대에 반장님이 근무하시냐고...”
“그리곤?”
“잠깐 만나 뵐 수 있느냐고...”
“그 외엔 없어?”
“예,”
“그래서 지금 어디있는데?”
“버스 끊어졌으니까 아마 버스 정류장 근처 식당이나 다방에 있지 않을까요?”
대원의 말을 들은 놈은 몸을 일으켜 위병소를 나갔다.
그리곤 다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버스 정류장 근처를 향했다.
전방이지만 군부대가 있어서 버스 정류장 근처엔 선술집을 겸한 식당이 서너 곳 있다.
그리고 다방이 하나 여인숙이 하나가 있다. 면회객이나 군인들이 주 손님이다.
그래도 군인들은 이곳보다는 귀찮더라도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간다.
이 좁은 바닥에선 술을 한 잔 해도 금방 상급자를 만나므로 편하지가 않다.
여인숙은 또 방음장치도 없어서 여자와 떡을 한 판 치더라도 제대로 칠 수가 없다.
하지만 놈은 이번에는 떡을 칠 상대가 아니므로 별 상관이 없다.
“저기...”
정류장 근처에서 서성이던 여자가 놈을 보더니 먼저 말을 걸었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감으로 봤을 때 이쁘다.
도수 높은 안경을 끼었는데 그 안경이 전혀 핸디캡이 아니다.
키도 훤칠하다. 놈의 키가 170cm인데 여자라서 굽이 높은 신을 신었겠지만 거의 비슷하다.
가슴도 그런대로 빵빵하다. 놈은 일단 빙긋이 웃음을 짓는다.
“저를 찾아오셨어요?”
“네에...”
여자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것 같다.
그렇더라도 여자가 놈을 찾아 왔다는 의사표시는 확실하게 했다.
“저를 어떻게 알고...”
“선주 삼촌이시죠?”
“선주요?”
“네”
선주는 형의 딸이다. 그러니 놈이 선주 삼촌인 것은 확실하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
“저번에 휴가 오셨을 때...”
“휴가요?”
“예, 그때 입으셨던 옷에서 부대마크를 봤어요”
“이 부대마크는 민간인이 알아볼 마크가 아닌데요?”
“제가 아는 사람이 비숫한 마크를....”
“누구 우리 부대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여긴 아니고...저쪽...”
“아...3대대?”
“그런가 봐요.”
“그럼 그 사람 찾아오셨어요?”
“네...”
“그런데?”
“만나지 못했어요. 그런데다 차도 끊어지고...또...”
“???”
“혹시...돈을 조금 빌릴까 해서...”
“네?”
“오는 길에 소매치기를 당했는지 지갑을 분실했거든요”
“아하!!”
“그래도 그 사람 만나기만 했으면 사정을 말하고 집에 갈 차비를 빌렸을 건데...”
“그런데요?”
“어제 휴가 나가서 부대에 없다고...”
대충 짐작이 갔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이유는 분명해졌다.
부대에서 청주까지 차비라야 얼마 안 된다. 하룻밤 여인숙비를 겸해도 그렇다.
선주를 알고 있는 것으로 봐서 형의 옆집인 것은 확실할 것이다.
부대 위병일지에 기재 된 주민등록상 주소지도 형이 사는 동네가 확실했었다.
그렇다고 나중에 휴가를 가서 이 여자를 찾아 빌려준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여자가 양심적이어서 돌아간 다음 바로 형수에게 돈을 주지 않는 한 그렇다.
그렇지만 어쩌랴.
놈은 그래도 스스로 생각해서 신사다.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쉽게 할 말이 아닌데...
얼마나 난감했으면 찾아와서 이 어려운 부탁을 할까?
놈은 이런 생각을 하며 그까짓 얼마 안 되는 돈 그냥 주기로 결심한다.
“알았습니다. 근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드셨겠네?”
“네에”
“갑시다. 난 부대에서 저녁을 먹었지만 아가씨 덕분에 소주나 한 잔 하지요 뭐”
말을 마친 놈이 앞장서서 걸었다.
여자가 뒤를 따르는데 놈의 코에 느껴지는 여자의 냄새가 좋다.
진한 향수를 뿌린 것인지 아니면 화장품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여자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싫지 않다.
이미 저녁 시간이 끝나가고 있는지 길거리엔 군인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이 시간이면 보이는 전방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토요일이지만 많은 면회객들은 다 읍내로 나갔을 것이므로 이곳의 선술집도 한가할 것이다.
“아줌마!”
고향식당이란 간판이 붙은 집의 미닫이를 드르륵 연 놈이 안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 시간에 뭔 일이랴?”
앞치마를 두른 뚱뚱한 중년 여인이 놈을 보고서 아는 체를 한다.
“식당에 밥 먹으러 오지 뭔 일은 무신...”
“누구? 애인?”
“아녀”
“근데?”
“아따...궁금한 것두 많네. 그냥 여기 두루치기 하나하고 밥 한공기, 소주 하나 줘요”
“알았어”
의자를 끌어내서 여자에게 앉으라고 권한 놈이 여자의 건너편이 앉아 담배를 꺼내 문다.
“돼지고기 괜찮죠?”
“네. 좋아해요”
“여긴 전방이라 그냥 밥은 비빔밥, 술안주는 돼지고가 두루치기가 젤 안전해요”
“???”
“뭘 잘하는지 모른 곳이라도 고추장 맛 참기름 맛 돼지고기 맛은 같거든요”
“아~네”
“제가 그쪽 분 식성을 모르니까 내 맘대로 시켜도 같이 먹을 수 있는 것...”
“고맙습니다”
“고맙긴요...근데...”
“네”
“형하고 이웃에 살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정식으로 인사나 합시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놈이 느긋하게 말했다.
어차피 외출증의 한계시간은 자정이다.
자정까지는 누구도 터치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시간에는 이제 순찰도 없다.
앞에 앉은 여자, 자세히 보니 글레머다.
놈은 유방 집착증이 있다. 유난히 유방에 더 집착한다.
아마도 지난 2년 간 최선자가 남겼던 잔영 때문일 것이다.
최선자...
우연히 잡아먹은 여자였지만 좋은 여자였다.
배움이 짧아서 스스로 놈의 짝으로 맞지 않다고 느꼈는지 어느 날 결혼한다고 말했다.
상대는 같은 공장에 다니는 남자라고 했다.
2년 동안 거의 매월은 아니라도 두 달에 한 번은 면회를 왔다.
외박 때면 그녀의 방에서 지냈다. 겪어 본 여자 중 가장 헌신적이었다.
고향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언니와 오빠들이 많았어도 혼자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사는 것이 고만고만하여 서로를 돌아 볼 여유가 없는 때문이었다.
산업체 특례 여상을 많은 나이임에도 다니며 자기계발도 열심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 날 면회를 와서 결혼할 남자가 생겼다고 고백했다.
“난...당신의 짝이 아니예요”
“왜?”
“당신은 꿈이 크고...난 거기에 맞지 않아요”
“그런 말이 어딨어?”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짚신의 짝은 짚신이란 말이죠”
“그럼 난 나막신인가?”
“당신은 가죽구두...”
“허허허”
“한쪽은 가죽구두인데 한쪽은 짚신...이거는 말이 안 되죠”
그날 최선자는 정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를 했다.
놈은 그녀의 그 서비스가 그녀의 눈물어린 몸부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좋은 남자...그런데 떠나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
우연히 만났지만 지난 2년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 준 남자에 대한 여자로서의 마지막 인사...
놈의 인식은 거기까지였다.
놈 스스로도 자신의 짝으로 최선자를 단 한 번도 상정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놈은 그 시간 동안 최선자에게 부끄럼 없이 대했다.
그녀의 처지와 현실을 알고난 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도 이유였다.
사랑...
그렇다.
사랑의 종류는 참 여러 가지다.
에로스 아가페 이런 사랑의 분류법은 사실 사랑이란 글자 앞에서 너무 허접하다.
좃정, 씹정...씹정도 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情은 사랑이 동반한 단어다.
놈의 최선자에 대한 사랑이 씹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놈은 그보다는 한 수 위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만나는 시간 놈은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줄 수 잇는 것이 몸뿐이었을지라도 놈은 그것으로도 그녀가 소중했다.
단지 군대생활의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든 정은 알 수 없는 정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그렇게 떠난 뒤, 놈은 6개월이 넘도록 다른 여자를 생각할 수 없었다.
술에 취하여 술집 여자는 물론 골목길 여자도 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앞에 있는 여자의 가슴이 최선자를 생각나게 했다.
놈의 유방 집착증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내 이름은 명찰. 그쪽 이름은 이미 면회객 명부에서 봤으니...생략하고, 몇 살이세요?”
“거기 주민등록 번호 그대로에요”
“아~항, 그러면 나보다 많이 어리네?”
“선주 삼촌은 몇 살이신데요?”
“나? 선주 아빠보다 한 살 아래...”
“연년생이 거예요?‘
“그렇지”
놈의 입에서 지연스럽게 만발이 나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유방이 준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유방이 최선자의 유방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토요일 오후다. 늘 걸렸던 당직도 아니다. 면회도 없다.
놈은 오랜만에 편한 상태가 되어 츄리닝을 걸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반장님”
하침 당번이 조용히 다가와서 부른다.
“왜?”
“저, 위병소에 좀 가보셔야...”
“왜? 무슨 사고야?”
“아니...누가 반장님을 찾아왔다고...”
“누가?”
“여자랍니다”
“여자? 면회시간 끝난 지가 언젠데...”
“저...이웃집에 산다고...”
“이웃집?”
놈이 고개를 갸웃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웃집에서 자기를 찾아 올 여자는 없다.
이웃집은 천리 먼 길이다. 놈의 고향 자체가 그렇다. 부대에서 고향까지 최소 10시간 거리다.
거기다 이웃집은 ‘아짐’들이 아니면 여자라곤 없다.
“나 찾아 온 사람이 아닐 거야”
“맞답니다”
“맞다고?”
“네.”
“누가 연락했어”
“저...지금 근무자가...”
“누구야?”
“조수병님입니다”
“누구? 조용옥이?”
“네...”
느긋하던 놈이 일어나더니 상황실로 간다. 위병소 왓찌는 상황실과 연결되어 있다.
놈이 상황실에 들어서자 상황근무 중이던 대원들이 벌떡 일어나 경례를 붙인다.
“필승”
“응...오늘 당직 누구야?”
“오영식 선임하사님이십니다”
“근데, 어디갔어?”
“예, 토요일이라 잠깐 순찰 도신다고...”
“당직 사관은?”
“예, 본부중대장님이신데 부관님과 같이 나가셨습니다”
“알았어, 왓찌 위병소 연결해 봐”
“네”
상황병이 전화기 옆구리를 힘차게 돌린다.
“예, 여기 상황실입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상황병이 전화기를 놈에게 넘겨 준다.
“누구야?”
“....”
“조용욱이 바꿔 봐”
“....”
“나야. 누가 나 찾아왔어?”
“....”
“어디서 왔데?”
“....”
“뭐? 청주?”
“....”
“이름이 뭐야?”
“....”
“그래서 어떻게 했어?”
“....”
“알았어. 잠깐 나가보지 뭐”
말은 그렇게 하고 상황실을 나왔으나 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순애....청주...
청주라면 형이 사는 곳이다.
말이 청주이지 청주시에서 보면 변두리다.
일찍이 고향을 떠난 형이 어떻게 된 일인지 그곳 여자와 결혼하고 자리를 잡았다.
놈은 입대 후 한두 번 형이 사는 곳이라서 들러 하룻밤 자고 왔을 뿐이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 필요도 없고 만나보지도 못했으니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여자가, 그것도 처녀가 분명하게 내 이름을 대고 찾아왔단다.
하침으로 돌아 온 놈이 츄리닝을 벗고 주섬주섬 복장을 갖춘다.
어차피 위병소 밖으로 나가려면 외출증은 필요했다.
마침 당직사관이 놈이 소속된 본부중대장이라니 그건 또 그런데로 수월케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면회왔다고?”
“그랬다는데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뭘...하도 많이 찾아오니까 기억이 안 나는 것은 아니고?”
“아닙니다. 정말 모르는 여자입니다”
“그럼 안 나가도 되잖아?”
“형이 청주에 사는데 아마도 형이 사는 옆집 여자인 것 같아서...”
“그래?”
“네, 형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그래서 심부름을 온 것은 어닌지...암튼 잠깐이면 됩니다”
“알았어. 다녀 와”
흔쾌하게 허락한 중대장이 외출증에다 도장을 찍어 준다.
전방이지만 토요일이라 헌병들이나 보안대가 자주 순찰을 돈다.
면회객을 따라 무단 외출자를 단속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외출증은 필수다.
외출증 도장을 받은 놈이 휘적휘적 위병소로 갔다.
“필승”
위병 근무자의 경례소리가 크고 경쾌하다.
그놈들은 놈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또 여자 하나가 작살나는 군 하고 생각한 것 같다.
놈이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위병소 안으로 들어가서 위병일지를 훑는다.
“얘야?”
“네”
오늘 선임 근무자인 조용욱이가 부동자세로 대답한다.
“이거 말고 뭐 별다른 것은 없어?”
“없습니다”
“뭐라 그래? 뭐 심부름 왔데?”
“그런 말 없었습니다”
“그럼 무슨 말을 했어?”
“그냥...여기 이 부대에 반장님이 근무하시냐고...”
“그리곤?”
“잠깐 만나 뵐 수 있느냐고...”
“그 외엔 없어?”
“예,”
“그래서 지금 어디있는데?”
“버스 끊어졌으니까 아마 버스 정류장 근처 식당이나 다방에 있지 않을까요?”
대원의 말을 들은 놈은 몸을 일으켜 위병소를 나갔다.
그리곤 다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버스 정류장 근처를 향했다.
전방이지만 군부대가 있어서 버스 정류장 근처엔 선술집을 겸한 식당이 서너 곳 있다.
그리고 다방이 하나 여인숙이 하나가 있다. 면회객이나 군인들이 주 손님이다.
그래도 군인들은 이곳보다는 귀찮더라도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간다.
이 좁은 바닥에선 술을 한 잔 해도 금방 상급자를 만나므로 편하지가 않다.
여인숙은 또 방음장치도 없어서 여자와 떡을 한 판 치더라도 제대로 칠 수가 없다.
하지만 놈은 이번에는 떡을 칠 상대가 아니므로 별 상관이 없다.
“저기...”
정류장 근처에서 서성이던 여자가 놈을 보더니 먼저 말을 걸었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감으로 봤을 때 이쁘다.
도수 높은 안경을 끼었는데 그 안경이 전혀 핸디캡이 아니다.
키도 훤칠하다. 놈의 키가 170cm인데 여자라서 굽이 높은 신을 신었겠지만 거의 비슷하다.
가슴도 그런대로 빵빵하다. 놈은 일단 빙긋이 웃음을 짓는다.
“저를 찾아오셨어요?”
“네에...”
여자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것 같다.
그렇더라도 여자가 놈을 찾아 왔다는 의사표시는 확실하게 했다.
“저를 어떻게 알고...”
“선주 삼촌이시죠?”
“선주요?”
“네”
선주는 형의 딸이다. 그러니 놈이 선주 삼촌인 것은 확실하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
“저번에 휴가 오셨을 때...”
“휴가요?”
“예, 그때 입으셨던 옷에서 부대마크를 봤어요”
“이 부대마크는 민간인이 알아볼 마크가 아닌데요?”
“제가 아는 사람이 비숫한 마크를....”
“누구 우리 부대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여긴 아니고...저쪽...”
“아...3대대?”
“그런가 봐요.”
“그럼 그 사람 찾아오셨어요?”
“네...”
“그런데?”
“만나지 못했어요. 그런데다 차도 끊어지고...또...”
“???”
“혹시...돈을 조금 빌릴까 해서...”
“네?”
“오는 길에 소매치기를 당했는지 지갑을 분실했거든요”
“아하!!”
“그래도 그 사람 만나기만 했으면 사정을 말하고 집에 갈 차비를 빌렸을 건데...”
“그런데요?”
“어제 휴가 나가서 부대에 없다고...”
대충 짐작이 갔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이유는 분명해졌다.
부대에서 청주까지 차비라야 얼마 안 된다. 하룻밤 여인숙비를 겸해도 그렇다.
선주를 알고 있는 것으로 봐서 형의 옆집인 것은 확실할 것이다.
부대 위병일지에 기재 된 주민등록상 주소지도 형이 사는 동네가 확실했었다.
그렇다고 나중에 휴가를 가서 이 여자를 찾아 빌려준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여자가 양심적이어서 돌아간 다음 바로 형수에게 돈을 주지 않는 한 그렇다.
그렇지만 어쩌랴.
놈은 그래도 스스로 생각해서 신사다.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쉽게 할 말이 아닌데...
얼마나 난감했으면 찾아와서 이 어려운 부탁을 할까?
놈은 이런 생각을 하며 그까짓 얼마 안 되는 돈 그냥 주기로 결심한다.
“알았습니다. 근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드셨겠네?”
“네에”
“갑시다. 난 부대에서 저녁을 먹었지만 아가씨 덕분에 소주나 한 잔 하지요 뭐”
말을 마친 놈이 앞장서서 걸었다.
여자가 뒤를 따르는데 놈의 코에 느껴지는 여자의 냄새가 좋다.
진한 향수를 뿌린 것인지 아니면 화장품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여자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싫지 않다.
이미 저녁 시간이 끝나가고 있는지 길거리엔 군인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이 시간이면 보이는 전방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토요일이지만 많은 면회객들은 다 읍내로 나갔을 것이므로 이곳의 선술집도 한가할 것이다.
“아줌마!”
고향식당이란 간판이 붙은 집의 미닫이를 드르륵 연 놈이 안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 시간에 뭔 일이랴?”
앞치마를 두른 뚱뚱한 중년 여인이 놈을 보고서 아는 체를 한다.
“식당에 밥 먹으러 오지 뭔 일은 무신...”
“누구? 애인?”
“아녀”
“근데?”
“아따...궁금한 것두 많네. 그냥 여기 두루치기 하나하고 밥 한공기, 소주 하나 줘요”
“알았어”
의자를 끌어내서 여자에게 앉으라고 권한 놈이 여자의 건너편이 앉아 담배를 꺼내 문다.
“돼지고기 괜찮죠?”
“네. 좋아해요”
“여긴 전방이라 그냥 밥은 비빔밥, 술안주는 돼지고가 두루치기가 젤 안전해요”
“???”
“뭘 잘하는지 모른 곳이라도 고추장 맛 참기름 맛 돼지고기 맛은 같거든요”
“아~네”
“제가 그쪽 분 식성을 모르니까 내 맘대로 시켜도 같이 먹을 수 있는 것...”
“고맙습니다”
“고맙긴요...근데...”
“네”
“형하고 이웃에 살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정식으로 인사나 합시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놈이 느긋하게 말했다.
어차피 외출증의 한계시간은 자정이다.
자정까지는 누구도 터치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시간에는 이제 순찰도 없다.
앞에 앉은 여자, 자세히 보니 글레머다.
놈은 유방 집착증이 있다. 유난히 유방에 더 집착한다.
아마도 지난 2년 간 최선자가 남겼던 잔영 때문일 것이다.
최선자...
우연히 잡아먹은 여자였지만 좋은 여자였다.
배움이 짧아서 스스로 놈의 짝으로 맞지 않다고 느꼈는지 어느 날 결혼한다고 말했다.
상대는 같은 공장에 다니는 남자라고 했다.
2년 동안 거의 매월은 아니라도 두 달에 한 번은 면회를 왔다.
외박 때면 그녀의 방에서 지냈다. 겪어 본 여자 중 가장 헌신적이었다.
고향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언니와 오빠들이 많았어도 혼자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사는 것이 고만고만하여 서로를 돌아 볼 여유가 없는 때문이었다.
산업체 특례 여상을 많은 나이임에도 다니며 자기계발도 열심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 날 면회를 와서 결혼할 남자가 생겼다고 고백했다.
“난...당신의 짝이 아니예요”
“왜?”
“당신은 꿈이 크고...난 거기에 맞지 않아요”
“그런 말이 어딨어?”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짚신의 짝은 짚신이란 말이죠”
“그럼 난 나막신인가?”
“당신은 가죽구두...”
“허허허”
“한쪽은 가죽구두인데 한쪽은 짚신...이거는 말이 안 되죠”
그날 최선자는 정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를 했다.
놈은 그녀의 그 서비스가 그녀의 눈물어린 몸부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좋은 남자...그런데 떠나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
우연히 만났지만 지난 2년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 준 남자에 대한 여자로서의 마지막 인사...
놈의 인식은 거기까지였다.
놈 스스로도 자신의 짝으로 최선자를 단 한 번도 상정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놈은 그 시간 동안 최선자에게 부끄럼 없이 대했다.
그녀의 처지와 현실을 알고난 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도 이유였다.
사랑...
그렇다.
사랑의 종류는 참 여러 가지다.
에로스 아가페 이런 사랑의 분류법은 사실 사랑이란 글자 앞에서 너무 허접하다.
좃정, 씹정...씹정도 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情은 사랑이 동반한 단어다.
놈의 최선자에 대한 사랑이 씹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놈은 그보다는 한 수 위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만나는 시간 놈은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줄 수 잇는 것이 몸뿐이었을지라도 놈은 그것으로도 그녀가 소중했다.
단지 군대생활의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든 정은 알 수 없는 정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그렇게 떠난 뒤, 놈은 6개월이 넘도록 다른 여자를 생각할 수 없었다.
술에 취하여 술집 여자는 물론 골목길 여자도 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앞에 있는 여자의 가슴이 최선자를 생각나게 했다.
놈의 유방 집착증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내 이름은 명찰. 그쪽 이름은 이미 면회객 명부에서 봤으니...생략하고, 몇 살이세요?”
“거기 주민등록 번호 그대로에요”
“아~항, 그러면 나보다 많이 어리네?”
“선주 삼촌은 몇 살이신데요?”
“나? 선주 아빠보다 한 살 아래...”
“연년생이 거예요?‘
“그렇지”
놈의 입에서 지연스럽게 만발이 나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유방이 준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유방이 최선자의 유방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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