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지현
장교가 병사의 여자 친구를 가로챈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해보았다. 연애는 개인의 자유영역이지만, 그것이 군대 안에서의 문제라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아무리 신사적인 게임을 한다고 한들 계급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이 정당하게 비춰질지 의문이었다.
나는 죽은 김상택의 인간됨을 생각해보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남자로서의 매력을 생각해보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허우대에 평범하게 창백한 얼굴. 모난 곳은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정을 붙이지 힘든 얄미운 상이었다. 그는 성격이 매우 예민했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어서 조그만 일에도 후임들을 들들볶던 위인이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큰 존재감이 없었지만 후임들에게는 군림하려 들었다. 여자에게도 딱히 남자로서의 매력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강현택 중위의 인간됨과 남자로서의 매력을 생각해보았다. 그는 타인을 압도하는 훤칠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렷한 이목구비로 누가 봐도 미남자였다. 무엇보다 위로 뻗치지도, 아래로 꺼지지도 않은 눈썹과 입술의 평행은 꽤나 믿음직한 인상을 자아냈다. 표정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언제나 은은하게 뿜어내는 선한 인상 덕분에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상이었다. 성격 또한 온화하고 정직해서 병사와 다른 간부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두터웠다. 무엇보다 그는 능력이 있었다.
당연히 남자 대 남자로서의 비교만큼이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비교 역시 압도적으로 강 중위의 승리였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김상택이 죽기 전에 강 중위와 지현 씨는 이미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했는데, 과연 김상택이 그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가 궁금해졌다. 강 중위와 지현 씨는 이 사실을 김상택에게 알렸을까? 아니면 김상택은 그 예민한 성격으로 두 사람 간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챘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지현 씨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김상택 보다 연상이라는 것(김상택은 연상의 애인을 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다)과 하얀 얼굴과 검고 또렷한 눈동자를 가졌다는 것, 그리고 반듯한 치아가 매력적이라는 것 정도. 그녀는 김상택을 보러 자주 면회 왔지만(이쯤 되니 헷갈린다. 그녀가 김상택을 보러 온 건지 강 중위를 보러 온 건지) 나와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썅년’일 거라 단정 지었다. 내가 여자라도 김상택 보다는 강 중위를 선택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군대에서의 이별은 모든 군인에게나 가혹한 것이다. 그것도 고무신을 거꾸로 갈아 신는다는 것은 가중처벌 대상이다. 게다가 그 갈아 신은 고무신이 남자친구의 직속상관이라니....... 나는 이 팩트만 가지고 그녀를 썅년이라 쉽게 단정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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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중위의 채근에 외출을 얻어 함께 춘천 시내로 들어간 것은 그 해 가을이었다.
“지현 씨한테 네 이야기를 했더니 궁금하다고 그러더라.”
강 중위는 이렇게 말했지만 내막은 달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지현 씨는 강 중위와의 밀당의 수단으로 나를 끌어들인 것이다. ‘우리는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아직은 아니에요’라는 사인으로 제3자를 데이트에 끌어들였고, 내가 당첨된 것이다.
강 중위의 사복차림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183에 가까운 훤칠한 체격에 어깨까지 넓게 벌어져 있어 가벼운 재킷만 걸쳐도 태가 나는 몸매였다. 나는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강 중위는 나를 자신의 BOQ로 불러들여 “나한테 좀 작으니까 너한테 맞을 거야.”라며 나에게 사복을 입혔다. 나는 군인복무규율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행 지난 그의 옷을 받아 입었다. 어쨌건 군인 티를 내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니까.
사복으로 차려입은 우리는 지현 씨가 도착하기로 한 시각에 맞춰 터미널로 나갔고, 나는 처음으로 ‘우지현’이라는 여자를 오롯이 볼 수 있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은 두 가지인데, 한 가지는 ‘김상택 따위에게 이런 여자 친구가 있었다니!’라는 감탄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까지 사진 기술이 실물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구나!’라는 한탄이었다.
사진이 아닌 실물로 걸어 다니는 그녀는 꽤나 미인이었다. 사진이 안 받은 것도 있지만 그녀가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가 그런 매력을 자아냈다. 상당히 순수한 이미지의 미인이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서슬 퍼런 날카로운 매력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마치 예쁘장한 어린 여자아이가 몸만 성장하고 얼굴은 어린 시절 그대로 성장한 느낌이랄까. 전체적으로 어려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키가 크고 체형이 늘씬하여 얼굴의 앳됨과 몸매의 시원함이 동시에 공존했다.
그녀는 손을 흔드는 강 중위를 향해 살짝 목례를 하며 다가와 “이 분이 그.......”라며 나를 아는 체 했다. 그 아는 체에 나는 괜사리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다가오자 강 중위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다는 그녀와 함께 우린 닭갈비 골목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강 중위도 이곳은 처음이라면서 지난 밤 인터넷 블로그를 검색해 맛집을 찾았다며 유난을 떨었다. 매사 침착하고 어른스럽던 그가 그런 유난을 떨었을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닭갈비에서는 카레 향이 났다. 알바생은 닭갈비의 붉은 양념을 뒤집으며 강황(카레의 원료) 가루가 들어갔다고 설명해주었다. 쫄면이나 떡과 같은 사리는 서울에서 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닭 살코기는 왜 춘천이 닭갈비의 고장인지를 증명해주었다. 닭살의 미끈한 껍질은 씹을 때마다 쫀쫀한 즙을 뿜어냈고, 결 따라 씹히는 살코기는 부위를 막론하고 부드러웠다. 양념의 매콤함은 단순히 고추의 캡사이신이 아닌, 강황이 주는 얼얼함이었다.
지현 씨가 맛나다며 수줍게 웃는 얼굴을 보이자 강 중위는 “다행이네. 네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싶었는데.”라며 좋아했다. 나는 속으로 ‘내 입맛은?’이라고 농담하고 싶었지만 처음 보는 강 중위의 귀여운 면모에 참기로 했다.
지현 씨는 닭갈비를 먹으며 부지런히 동치미 국물을 떠먹었는데, 밥공기 반 정도 되는 동치미 국물이 바닥을 드러내자 강 중위가 무섭게 일어나 동치미 국물을 하나 더 떠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이 둘의 주도권은 지현 씨에게 있었다.
기회를 봐서 그녀의 나이를 물어보니 그녀는 강 중위보다 두 살 아래였다.(나보다는 한 살 위였다)
아마도 그녀에게 주도권이 쥐어진 것은 그녀의 매력이 한 몫 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확실히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질 좋은 비단 망토처럼 두르고 있었다. 검고 또렷한 눈망울에서는 청순함이, 웃을 때 마다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에서는 화사함이 뿜어져 나왔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춘천 호반을 따라 한 시간 정도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알맞게 짧은 머리칼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기분 좋은 날씨였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란히 걷기 어색하여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뒤 따랐는데, 그럴 때 마다 지현 씨는 자신의 걸음을 멈추며 나를 기다려주었다. 때문에 나는 원하지 않게 두 사람 옆에서 나란히 걸어야 했다.
지현 씨는 나에게 여자 친구가 있냐고 물어봤다.
“있었는데, 헤어졌어요.”
“왜요? 지승 씨는 여자 친구 있을 거 같은데.”
“고무신 거꾸로 신었어요. 내가 일병 때.......”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지현 씨 역시 김상택에서 강 중위로 고무신을 바꿔 신은 것 아닌가?
하지만 지현 씨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그럼 다음번에는 내 친구를 데려와서 넷이 같이 만나야겠는데요?”라고 말했다.
“넷이?”
듣고 있던 강 중위가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반대야. 내 소대원이 연애를 시작하면 신경 써줘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외박 외출도 자주 보내줘야 하고, 애인과 잘 지내는지도 체크해야 하고. 무엇보다 사귀다가 헤어지는 소대원이 있으면 소대장 입장에서는 완전 긴장상태라고.”
나는 강 중위의 말을 진담으로 받아 들였는데 지현 씨는 농담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현 씨는 꺄르르 웃으며 강 중위의 굵은 팔을 자신의 두 손으로 끌어안으며 자신의 몸을 기댔다.
가볍게 산책을 마친 우리들은 강 중위가 예매해둔 영화를 보러 다시 시내에 들어왔다. 황정민 배우와 전도연 배우가 주연을 맡은 멜로 영화인데, 지방을 전전하며 생각 없이 젊음을 탕진하던 다방 레지가 건실하고 순박한 농촌 총각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였다. 기승전결이 매우 뚜렷했고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였지만, 몇 가지 설정이 조금은 억지스럽다 느껴졌다. 특히 누가 봐도 ‘썅년’인 다방레지가 농촌 총각과 순애보를 펼친다든가, 갑작스럽게 여주인공이 에이즈에 양성판정을 받는다든가 하는 설정이 그랬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지현 씨가 “사람은 절대 안 바뀌어요.”라고 말했다. 나와 강 중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를 보고 나온 우리는 지현 씨가 서울로 돌아갈 차편을 미리 끊은 후 근처 민속 주점에 들어가 가볍게 해물파전과 옥수수 막걸리를 주문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빛이 바랜 주점이었는데 낡았다는 느낌 보다는 ‘고풍스럽다’ 혹은 ‘앤틱하다’라는 정감을 주는 그런 곳이었다.
지현 씨는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다르게 찌그러진 놋쇠 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강 중위가 따라 주는 막걸리를 맛나게 받아마셨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막걸리를 삼킬 때마다 그녀의 턱 아래로 하얀 목선이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탐스럽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렇게 몇 순배가 돌고 셋이서 주전자 두 개를 비워낼 때까지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현 씨의 차 시간이 가까워지고 나의 복귀 시간 역시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요의를 느껴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생각했다.
김상택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
어쩌면 우리 셋의 연결고리였던 김상택은 여덟 시간에 가까운 우리들의 만남 속에서 단 한 번도 수면 위로 올라온 적이 없었다.
나와 강 중위는 지현 씨의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가는 것까지 본 후 대합실로 나와 캔커피를 하나 씩 사서 나눠먹었다.
“중위님이랑 같이 술 마신 건 처음 같습니다.”
“지난 번 회식 때 너 없었나?”
“그때 저 일병 정기 휴가 나갔지 말입니다.”
“아, 그랬나?”
그의 얼굴에는 벌겋게 꽃이 피어 있었다. 반면 나는 복귀를 위해 술을 가려가며 마셨기에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어떤 거 같냐? 지현 씨.”
“매력 있습니다.”
“또?”
그는 부족하다는 듯 구체적인 감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순수하신 거 같습니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사실은 아니었다. 순수해 보이는 얼굴 뒤 쪽으로는 어쩔 수 없이 썅년이 아닐까 싶은 냄새도 풍겨 나온다는 게 나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게다가 지현 씨는 필요 이상으로 말을 아끼며 조신하게 굴었기에 내가 그녀를 가늠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나의 거짓말이 어설퍼서였을까, 아니면 강 중위 역시 그녀의 이면(裏面)을 본 걸까.
“순수하긴, 개뿔.”
항상 신사다운 언행을 보였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가만히 짚어보니 복귀 시간이 촉박했다. 그의 BOQ에 벗어놓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부대로 들어가려면 부지런을 떨어야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조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좀처럼 시내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이제 들어가야지 말입니다?”라며 눈치를 줘보기도 하고 “오늘 당직사관 윤 중사(강 중위와 친한 부사관이었다)인데, 저 외박으로 바꿔주시는 겁니까?”라고 농담을 해보기도 했다.
어찌된 것이 시간이 지나고 밤공기가 차가워질수록 그의 얼굴은 벌개져만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미 그는 눈물이 그렁거릴 정도로 취한 상태였다. 결국 힘들게 그를 BOQ까지 끌고 갔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제 시각에 부대복귀는 힘들게 되었다. 결국 나는 부대에 전화를 걸어 외출을 외박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소중한 외박을 뜻하지 않게 날려버렸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부대복귀를 위해 절제했던 술을 보충하고 싶었다. 강 중위에게 슬쩍 술을 더 마시겠냐고 묻자 그는 화통하게 웃으며 그러자고 했고, 깐풍기와 소주 두 병을 배달시키며 자신이 호기롭게 계산했다.
하지만 몰랐다. 그가 이미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3. 손가락의 방향성
당시 우리 부대에는 신병들을 괴롭히는 짓궂은 통과의례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부대원들에게 자신의 성경험을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풀어놓는 것이었다. 만약 없다고 답한다면 총각딱지 땔 때까지 신병을 놀려댔고, 경험을 야하게 풀어내지 않으면 심심한 놈이라고 괄시했다.
강 중위도 우리들 사이에 그런 관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뜬금없이 “지승이 너는 언제 처음 해봤냐?”라고 물었다. 우리 둘이 소주 한 병을 비웠을 무렵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평상시 그의 행실을 보면 절대 남을 곤란하게 할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가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져 얄궂게 군다는 생각에, 그리고 나 역시 술기운에 정신을 살짝 놓으며 답했다.
“고3 때 처음 해봤습니다.”
그는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놀랍다는 듯이 “이 녀석! 완전 빨랐네!”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글쎄, 고3이 빠른 건가, 싶었다. 늦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빠른 것도 아니었다.
누구랑 했냐는 질문에 나는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와 했다고 답했다. 사실은 거짓이었다. 나의 첫경험 상대는 여섯 살 연상의 여자였다. 그는 계속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했고, 나는 그가 믿을 법한 적당한 거짓을 버무려 답을 했다.
술이 더 들어가자 그는 더욱 짓궂게 나의 섹스 경험을 듣고자 했다. 특히 군대에서 헤어진 여자 친구의 몸매라든가, 그곳의 생김이라든가, 삽입했을 때의 감도, 좋아하던 체위, 심지어 오르가슴을 느낄 때 신음소리는 어땠는지를 물었다.
도저히 평상시 그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취기에 젖어가고 있었기에 가볍게 웃어넘기며 답을 했다.
키는 작지만 비율이 좋았고 특히 가슴이 예뻐서 좋았습니다, 거기에 털이 많지도 않았고 음모도 가늘어서 그곳이 상당히 예뻐보였습니다, 들어가면 적당히 조여 주는 것은 좋았지만 애액이 많이 나오지 않아 러브젤을 사용했습니다, 주로 정상위나 후배위를 했고 가끔 여자 친구가 흥에 겨울 때 여성상위를 했습니다, 신음소리는 특별한 거 없이 제 이름을 자꾸 불러대는 정도였습니다, 라고.
우린 지저분하게 웃으며 서로의 술잔을 채워주고 비워내기를 반복했다. 금세 두 병이 바닥을 보였고 우린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나가서 소주 두 병과 과자를 두 봉지 사들고 들어왔다, 들어오는 길에는 술 깨자면서 하드를 하나 씩 사 물었다.
돌아오는 길 문득 그를 사회에서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에서 그는 나의 직속상관이자 은인이지만 만약 사회에서 만났다면? 아마 사회에서 만났더라도 나는 그에게 많은 부분 의지하고 그를 따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술기운이 울컥 올라와서일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재채기를 참지 못하고 내뱉는 것처럼 그에게 말했다.
“중위님.”
“왜, 인마?”
“저는 형이 없지만, 만약 형이 있다면.......”
“나도 그래, 인마.”
그는 그렇게 내 말을 잘라 먹고선 민망한 듯 큭큭 거리며 웃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동하여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꼬옥 끌어 않으며 “형!”이라고 불렀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대학 선배 자취방에 놀러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역시 격의 없게 런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술을 마셨다.
그러나 한 병을 채 비우기도 전에, 강 중위는 더 이상은 못 마시겠다며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는 닦고 자라며 그를 흔들었지만 그는 모든 게 귀찮다는 듯 나를 밀어냈다. 결국 나는 방의 불을 끄고 화장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우리의 술자리를 정리했고, 간단한 세안과 양치만이라도 할 생각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 한 가지. 독신 장교의 화장실에 칫솔이 세 개. 마모가 적당히 진행된 한 개의 칫솔과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칫솔 두 개가 각기 다른 색상으로 꽂혀있었다. 술에 취한 나는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거울 안 쪽 찬장을 뒤져 새로운 칫솔을 꺼내 물고 양치를 하고 세안을 했다.
침대 밑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누우려니 강 중위가 말을 걸어왔다.
“지승아, 자냐?”
내가 아니라고 답하자 그는 잠꼬대 같이 무언가 중얼거리며 키득 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의 술주정이라고 생각하고 잠을 청하려 들었는데 가만 들어보니 그건 강 중위의 섹스 경험이었다.
“처음엔 그냥 우연인줄 알았는데 나중엔 노골적으로 툭툭 치더라고.”
나는 솔깃한 마음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주기로 했다.
“어디를 말입니까?”
“어디긴, 인마. 거기....... 고추.”
“누가 말입니까?”
“누구긴, 인마. 걔 여자 친구가 그랬다는 거지.......”
강 중위 자신도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거의 얼굴을 살피니, 그는 술기운에 괴로워하면서도 입거품을 물며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나는 직감적으로 평범한 섹스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고 년이 자꾸 지 남친을 재우려는 거야. 자꾸 술을 먹이더라고. 그래서 나는 이게 뭔지 싶어서....... 가만~히 구경만 했지. 아주 무섭게 먹이더라. 내가 그렇게 먹었다면 죽었을 거야. 죽어 완전. 그런데 그 남자, 빙신 새끼도 주는 술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 헤헤 거리는데, 그거 보면서 내가 생각했지. 고 년 참 요물이구나....... 지승아, 자냐? 안 자지? 그래서 말이야,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아, 결국 고놈이 술이 나자빠져 떨어지니까 고 년 분위기가 싸악 달라지는 거야. 완전 다른 사람 같았지. 얼굴색이 싸악 바뀌어선 내 옆에서 조신조신 거리더라고.”
그리고선 그는 뭐가 좋은지 한참을 키득거렸다.
“이게 유혹인가 싶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싶지도 하고, 그래도 주는 술 다 받아먹으면 안 될 거 같아서 나 술 잘 못한다고 하니까 자기가, 그 뭐더라....... 아! 흑장미! 그거 하겠다고 내 답도 안 듣고 훌쩍 마셔버리데? 아오~ 독한 거....... 그러면서 ‘오빠, 흑장미 했으니까 소원 들어줘야줘’ 그러는 거야.”
아마도 강 중위가 대학 다니던 시절 MT 이야기거나 그 당시 만났던 여자 신입생 이야기 같았다. 나는 혼자 술주정처럼 떠들어대는 그의 흥을 맞춰주기 위해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쩌긴, 인마. 예쁘장한 게 애교 떠는데, 당연히 들어준다고 했지.”
“소원이 뭐였습니까?”
“뽀뽀해달라고 하더라고. 가만히 자기 입술을 손가락을 가리키며 톡톡 치는데, 그걸 거부 못하겠더라고. 나도 적당히 취했겠다, 고것도 술 좀 된 거 같겠다. 그리고 뽀뽀 정도야 뭐, 옆에서 자는 남자 녀석이 어떻게 알겠어. 아, 그런데 나 너한테 이 이야기, 해도 되는가 모르겠다.”
“다들 그런 일 있지 말입니다. 저도 술게임 하다가 그런 일 많이 봤습니다.”
우리 둘 다 키득거리며 남자들의 지저분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하셨습니까?”
“했지, 인마!”
“헐....... 설마 술자리에서 하신 건 아니지 말입니다?”
그러자 그는 뭐가 웃긴지 혼자 키득거리다가 내 쪽으로 손가락을 뻗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손가락이 나를 향한다고 생각해 무슨 뜻일까 의아했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의 방향성이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내 뒤쪽, 화장실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장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중위님, 화장실 가고 싶으십니까?”
“아니고, 인마.”
나는 조금 생각하다 알게 되었다.
---
[IN THE CLUB]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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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은 김상택의 인간됨을 생각해보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남자로서의 매력을 생각해보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허우대에 평범하게 창백한 얼굴. 모난 곳은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정을 붙이지 힘든 얄미운 상이었다. 그는 성격이 매우 예민했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어서 조그만 일에도 후임들을 들들볶던 위인이었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큰 존재감이 없었지만 후임들에게는 군림하려 들었다. 여자에게도 딱히 남자로서의 매력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강현택 중위의 인간됨과 남자로서의 매력을 생각해보았다. 그는 타인을 압도하는 훤칠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렷한 이목구비로 누가 봐도 미남자였다. 무엇보다 위로 뻗치지도, 아래로 꺼지지도 않은 눈썹과 입술의 평행은 꽤나 믿음직한 인상을 자아냈다. 표정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언제나 은은하게 뿜어내는 선한 인상 덕분에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상이었다. 성격 또한 온화하고 정직해서 병사와 다른 간부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두터웠다. 무엇보다 그는 능력이 있었다.
당연히 남자 대 남자로서의 비교만큼이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비교 역시 압도적으로 강 중위의 승리였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김상택이 죽기 전에 강 중위와 지현 씨는 이미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했는데, 과연 김상택이 그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가 궁금해졌다. 강 중위와 지현 씨는 이 사실을 김상택에게 알렸을까? 아니면 김상택은 그 예민한 성격으로 두 사람 간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챘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지현 씨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김상택 보다 연상이라는 것(김상택은 연상의 애인을 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다)과 하얀 얼굴과 검고 또렷한 눈동자를 가졌다는 것, 그리고 반듯한 치아가 매력적이라는 것 정도. 그녀는 김상택을 보러 자주 면회 왔지만(이쯤 되니 헷갈린다. 그녀가 김상택을 보러 온 건지 강 중위를 보러 온 건지) 나와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썅년’일 거라 단정 지었다. 내가 여자라도 김상택 보다는 강 중위를 선택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군대에서의 이별은 모든 군인에게나 가혹한 것이다. 그것도 고무신을 거꾸로 갈아 신는다는 것은 가중처벌 대상이다. 게다가 그 갈아 신은 고무신이 남자친구의 직속상관이라니....... 나는 이 팩트만 가지고 그녀를 썅년이라 쉽게 단정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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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중위의 채근에 외출을 얻어 함께 춘천 시내로 들어간 것은 그 해 가을이었다.
“지현 씨한테 네 이야기를 했더니 궁금하다고 그러더라.”
강 중위는 이렇게 말했지만 내막은 달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지현 씨는 강 중위와의 밀당의 수단으로 나를 끌어들인 것이다. ‘우리는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아직은 아니에요’라는 사인으로 제3자를 데이트에 끌어들였고, 내가 당첨된 것이다.
강 중위의 사복차림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183에 가까운 훤칠한 체격에 어깨까지 넓게 벌어져 있어 가벼운 재킷만 걸쳐도 태가 나는 몸매였다. 나는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강 중위는 나를 자신의 BOQ로 불러들여 “나한테 좀 작으니까 너한테 맞을 거야.”라며 나에게 사복을 입혔다. 나는 군인복무규율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행 지난 그의 옷을 받아 입었다. 어쨌건 군인 티를 내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니까.
사복으로 차려입은 우리는 지현 씨가 도착하기로 한 시각에 맞춰 터미널로 나갔고, 나는 처음으로 ‘우지현’이라는 여자를 오롯이 볼 수 있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은 두 가지인데, 한 가지는 ‘김상택 따위에게 이런 여자 친구가 있었다니!’라는 감탄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까지 사진 기술이 실물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구나!’라는 한탄이었다.
사진이 아닌 실물로 걸어 다니는 그녀는 꽤나 미인이었다. 사진이 안 받은 것도 있지만 그녀가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가 그런 매력을 자아냈다. 상당히 순수한 이미지의 미인이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서슬 퍼런 날카로운 매력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마치 예쁘장한 어린 여자아이가 몸만 성장하고 얼굴은 어린 시절 그대로 성장한 느낌이랄까. 전체적으로 어려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키가 크고 체형이 늘씬하여 얼굴의 앳됨과 몸매의 시원함이 동시에 공존했다.
그녀는 손을 흔드는 강 중위를 향해 살짝 목례를 하며 다가와 “이 분이 그.......”라며 나를 아는 체 했다. 그 아는 체에 나는 괜사리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다가오자 강 중위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다는 그녀와 함께 우린 닭갈비 골목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강 중위도 이곳은 처음이라면서 지난 밤 인터넷 블로그를 검색해 맛집을 찾았다며 유난을 떨었다. 매사 침착하고 어른스럽던 그가 그런 유난을 떨었을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닭갈비에서는 카레 향이 났다. 알바생은 닭갈비의 붉은 양념을 뒤집으며 강황(카레의 원료) 가루가 들어갔다고 설명해주었다. 쫄면이나 떡과 같은 사리는 서울에서 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닭 살코기는 왜 춘천이 닭갈비의 고장인지를 증명해주었다. 닭살의 미끈한 껍질은 씹을 때마다 쫀쫀한 즙을 뿜어냈고, 결 따라 씹히는 살코기는 부위를 막론하고 부드러웠다. 양념의 매콤함은 단순히 고추의 캡사이신이 아닌, 강황이 주는 얼얼함이었다.
지현 씨가 맛나다며 수줍게 웃는 얼굴을 보이자 강 중위는 “다행이네. 네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나 싶었는데.”라며 좋아했다. 나는 속으로 ‘내 입맛은?’이라고 농담하고 싶었지만 처음 보는 강 중위의 귀여운 면모에 참기로 했다.
지현 씨는 닭갈비를 먹으며 부지런히 동치미 국물을 떠먹었는데, 밥공기 반 정도 되는 동치미 국물이 바닥을 드러내자 강 중위가 무섭게 일어나 동치미 국물을 하나 더 떠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이 둘의 주도권은 지현 씨에게 있었다.
기회를 봐서 그녀의 나이를 물어보니 그녀는 강 중위보다 두 살 아래였다.(나보다는 한 살 위였다)
아마도 그녀에게 주도권이 쥐어진 것은 그녀의 매력이 한 몫 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확실히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질 좋은 비단 망토처럼 두르고 있었다. 검고 또렷한 눈망울에서는 청순함이, 웃을 때 마다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에서는 화사함이 뿜어져 나왔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춘천 호반을 따라 한 시간 정도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알맞게 짧은 머리칼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기분 좋은 날씨였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란히 걷기 어색하여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뒤 따랐는데, 그럴 때 마다 지현 씨는 자신의 걸음을 멈추며 나를 기다려주었다. 때문에 나는 원하지 않게 두 사람 옆에서 나란히 걸어야 했다.
지현 씨는 나에게 여자 친구가 있냐고 물어봤다.
“있었는데, 헤어졌어요.”
“왜요? 지승 씨는 여자 친구 있을 거 같은데.”
“고무신 거꾸로 신었어요. 내가 일병 때.......”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지현 씨 역시 김상택에서 강 중위로 고무신을 바꿔 신은 것 아닌가?
하지만 지현 씨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그럼 다음번에는 내 친구를 데려와서 넷이 같이 만나야겠는데요?”라고 말했다.
“넷이?”
듣고 있던 강 중위가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반대야. 내 소대원이 연애를 시작하면 신경 써줘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외박 외출도 자주 보내줘야 하고, 애인과 잘 지내는지도 체크해야 하고. 무엇보다 사귀다가 헤어지는 소대원이 있으면 소대장 입장에서는 완전 긴장상태라고.”
나는 강 중위의 말을 진담으로 받아 들였는데 지현 씨는 농담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현 씨는 꺄르르 웃으며 강 중위의 굵은 팔을 자신의 두 손으로 끌어안으며 자신의 몸을 기댔다.
가볍게 산책을 마친 우리들은 강 중위가 예매해둔 영화를 보러 다시 시내에 들어왔다. 황정민 배우와 전도연 배우가 주연을 맡은 멜로 영화인데, 지방을 전전하며 생각 없이 젊음을 탕진하던 다방 레지가 건실하고 순박한 농촌 총각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였다. 기승전결이 매우 뚜렷했고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였지만, 몇 가지 설정이 조금은 억지스럽다 느껴졌다. 특히 누가 봐도 ‘썅년’인 다방레지가 농촌 총각과 순애보를 펼친다든가, 갑작스럽게 여주인공이 에이즈에 양성판정을 받는다든가 하는 설정이 그랬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지현 씨가 “사람은 절대 안 바뀌어요.”라고 말했다. 나와 강 중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를 보고 나온 우리는 지현 씨가 서울로 돌아갈 차편을 미리 끊은 후 근처 민속 주점에 들어가 가볍게 해물파전과 옥수수 막걸리를 주문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빛이 바랜 주점이었는데 낡았다는 느낌 보다는 ‘고풍스럽다’ 혹은 ‘앤틱하다’라는 정감을 주는 그런 곳이었다.
지현 씨는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다르게 찌그러진 놋쇠 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강 중위가 따라 주는 막걸리를 맛나게 받아마셨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막걸리를 삼킬 때마다 그녀의 턱 아래로 하얀 목선이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탐스럽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렇게 몇 순배가 돌고 셋이서 주전자 두 개를 비워낼 때까지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현 씨의 차 시간이 가까워지고 나의 복귀 시간 역시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요의를 느껴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생각했다.
김상택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
어쩌면 우리 셋의 연결고리였던 김상택은 여덟 시간에 가까운 우리들의 만남 속에서 단 한 번도 수면 위로 올라온 적이 없었다.
나와 강 중위는 지현 씨의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가는 것까지 본 후 대합실로 나와 캔커피를 하나 씩 사서 나눠먹었다.
“중위님이랑 같이 술 마신 건 처음 같습니다.”
“지난 번 회식 때 너 없었나?”
“그때 저 일병 정기 휴가 나갔지 말입니다.”
“아, 그랬나?”
그의 얼굴에는 벌겋게 꽃이 피어 있었다. 반면 나는 복귀를 위해 술을 가려가며 마셨기에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어떤 거 같냐? 지현 씨.”
“매력 있습니다.”
“또?”
그는 부족하다는 듯 구체적인 감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순수하신 거 같습니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사실은 아니었다. 순수해 보이는 얼굴 뒤 쪽으로는 어쩔 수 없이 썅년이 아닐까 싶은 냄새도 풍겨 나온다는 게 나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게다가 지현 씨는 필요 이상으로 말을 아끼며 조신하게 굴었기에 내가 그녀를 가늠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나의 거짓말이 어설퍼서였을까, 아니면 강 중위 역시 그녀의 이면(裏面)을 본 걸까.
“순수하긴, 개뿔.”
항상 신사다운 언행을 보였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가만히 짚어보니 복귀 시간이 촉박했다. 그의 BOQ에 벗어놓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부대로 들어가려면 부지런을 떨어야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조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좀처럼 시내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이제 들어가야지 말입니다?”라며 눈치를 줘보기도 하고 “오늘 당직사관 윤 중사(강 중위와 친한 부사관이었다)인데, 저 외박으로 바꿔주시는 겁니까?”라고 농담을 해보기도 했다.
어찌된 것이 시간이 지나고 밤공기가 차가워질수록 그의 얼굴은 벌개져만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미 그는 눈물이 그렁거릴 정도로 취한 상태였다. 결국 힘들게 그를 BOQ까지 끌고 갔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제 시각에 부대복귀는 힘들게 되었다. 결국 나는 부대에 전화를 걸어 외출을 외박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소중한 외박을 뜻하지 않게 날려버렸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부대복귀를 위해 절제했던 술을 보충하고 싶었다. 강 중위에게 슬쩍 술을 더 마시겠냐고 묻자 그는 화통하게 웃으며 그러자고 했고, 깐풍기와 소주 두 병을 배달시키며 자신이 호기롭게 계산했다.
하지만 몰랐다. 그가 이미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3. 손가락의 방향성
당시 우리 부대에는 신병들을 괴롭히는 짓궂은 통과의례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부대원들에게 자신의 성경험을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풀어놓는 것이었다. 만약 없다고 답한다면 총각딱지 땔 때까지 신병을 놀려댔고, 경험을 야하게 풀어내지 않으면 심심한 놈이라고 괄시했다.
강 중위도 우리들 사이에 그런 관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뜬금없이 “지승이 너는 언제 처음 해봤냐?”라고 물었다. 우리 둘이 소주 한 병을 비웠을 무렵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평상시 그의 행실을 보면 절대 남을 곤란하게 할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가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져 얄궂게 군다는 생각에, 그리고 나 역시 술기운에 정신을 살짝 놓으며 답했다.
“고3 때 처음 해봤습니다.”
그는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놀랍다는 듯이 “이 녀석! 완전 빨랐네!”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글쎄, 고3이 빠른 건가, 싶었다. 늦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빠른 것도 아니었다.
누구랑 했냐는 질문에 나는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와 했다고 답했다. 사실은 거짓이었다. 나의 첫경험 상대는 여섯 살 연상의 여자였다. 그는 계속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했고, 나는 그가 믿을 법한 적당한 거짓을 버무려 답을 했다.
술이 더 들어가자 그는 더욱 짓궂게 나의 섹스 경험을 듣고자 했다. 특히 군대에서 헤어진 여자 친구의 몸매라든가, 그곳의 생김이라든가, 삽입했을 때의 감도, 좋아하던 체위, 심지어 오르가슴을 느낄 때 신음소리는 어땠는지를 물었다.
도저히 평상시 그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취기에 젖어가고 있었기에 가볍게 웃어넘기며 답을 했다.
키는 작지만 비율이 좋았고 특히 가슴이 예뻐서 좋았습니다, 거기에 털이 많지도 않았고 음모도 가늘어서 그곳이 상당히 예뻐보였습니다, 들어가면 적당히 조여 주는 것은 좋았지만 애액이 많이 나오지 않아 러브젤을 사용했습니다, 주로 정상위나 후배위를 했고 가끔 여자 친구가 흥에 겨울 때 여성상위를 했습니다, 신음소리는 특별한 거 없이 제 이름을 자꾸 불러대는 정도였습니다, 라고.
우린 지저분하게 웃으며 서로의 술잔을 채워주고 비워내기를 반복했다. 금세 두 병이 바닥을 보였고 우린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나가서 소주 두 병과 과자를 두 봉지 사들고 들어왔다, 들어오는 길에는 술 깨자면서 하드를 하나 씩 사 물었다.
돌아오는 길 문득 그를 사회에서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에서 그는 나의 직속상관이자 은인이지만 만약 사회에서 만났다면? 아마 사회에서 만났더라도 나는 그에게 많은 부분 의지하고 그를 따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술기운이 울컥 올라와서일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재채기를 참지 못하고 내뱉는 것처럼 그에게 말했다.
“중위님.”
“왜, 인마?”
“저는 형이 없지만, 만약 형이 있다면.......”
“나도 그래, 인마.”
그는 그렇게 내 말을 잘라 먹고선 민망한 듯 큭큭 거리며 웃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동하여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꼬옥 끌어 않으며 “형!”이라고 불렀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대학 선배 자취방에 놀러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역시 격의 없게 런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술을 마셨다.
그러나 한 병을 채 비우기도 전에, 강 중위는 더 이상은 못 마시겠다며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는 닦고 자라며 그를 흔들었지만 그는 모든 게 귀찮다는 듯 나를 밀어냈다. 결국 나는 방의 불을 끄고 화장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우리의 술자리를 정리했고, 간단한 세안과 양치만이라도 할 생각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 한 가지. 독신 장교의 화장실에 칫솔이 세 개. 마모가 적당히 진행된 한 개의 칫솔과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칫솔 두 개가 각기 다른 색상으로 꽂혀있었다. 술에 취한 나는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거울 안 쪽 찬장을 뒤져 새로운 칫솔을 꺼내 물고 양치를 하고 세안을 했다.
침대 밑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누우려니 강 중위가 말을 걸어왔다.
“지승아, 자냐?”
내가 아니라고 답하자 그는 잠꼬대 같이 무언가 중얼거리며 키득 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의 술주정이라고 생각하고 잠을 청하려 들었는데 가만 들어보니 그건 강 중위의 섹스 경험이었다.
“처음엔 그냥 우연인줄 알았는데 나중엔 노골적으로 툭툭 치더라고.”
나는 솔깃한 마음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주기로 했다.
“어디를 말입니까?”
“어디긴, 인마. 거기....... 고추.”
“누가 말입니까?”
“누구긴, 인마. 걔 여자 친구가 그랬다는 거지.......”
강 중위 자신도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거의 얼굴을 살피니, 그는 술기운에 괴로워하면서도 입거품을 물며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나는 직감적으로 평범한 섹스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고 년이 자꾸 지 남친을 재우려는 거야. 자꾸 술을 먹이더라고. 그래서 나는 이게 뭔지 싶어서....... 가만~히 구경만 했지. 아주 무섭게 먹이더라. 내가 그렇게 먹었다면 죽었을 거야. 죽어 완전. 그런데 그 남자, 빙신 새끼도 주는 술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 헤헤 거리는데, 그거 보면서 내가 생각했지. 고 년 참 요물이구나....... 지승아, 자냐? 안 자지? 그래서 말이야,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아, 결국 고놈이 술이 나자빠져 떨어지니까 고 년 분위기가 싸악 달라지는 거야. 완전 다른 사람 같았지. 얼굴색이 싸악 바뀌어선 내 옆에서 조신조신 거리더라고.”
그리고선 그는 뭐가 좋은지 한참을 키득거렸다.
“이게 유혹인가 싶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싶지도 하고, 그래도 주는 술 다 받아먹으면 안 될 거 같아서 나 술 잘 못한다고 하니까 자기가, 그 뭐더라....... 아! 흑장미! 그거 하겠다고 내 답도 안 듣고 훌쩍 마셔버리데? 아오~ 독한 거....... 그러면서 ‘오빠, 흑장미 했으니까 소원 들어줘야줘’ 그러는 거야.”
아마도 강 중위가 대학 다니던 시절 MT 이야기거나 그 당시 만났던 여자 신입생 이야기 같았다. 나는 혼자 술주정처럼 떠들어대는 그의 흥을 맞춰주기 위해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쩌긴, 인마. 예쁘장한 게 애교 떠는데, 당연히 들어준다고 했지.”
“소원이 뭐였습니까?”
“뽀뽀해달라고 하더라고. 가만히 자기 입술을 손가락을 가리키며 톡톡 치는데, 그걸 거부 못하겠더라고. 나도 적당히 취했겠다, 고것도 술 좀 된 거 같겠다. 그리고 뽀뽀 정도야 뭐, 옆에서 자는 남자 녀석이 어떻게 알겠어. 아, 그런데 나 너한테 이 이야기, 해도 되는가 모르겠다.”
“다들 그런 일 있지 말입니다. 저도 술게임 하다가 그런 일 많이 봤습니다.”
우리 둘 다 키득거리며 남자들의 지저분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하셨습니까?”
“했지, 인마!”
“헐....... 설마 술자리에서 하신 건 아니지 말입니다?”
그러자 그는 뭐가 웃긴지 혼자 키득거리다가 내 쪽으로 손가락을 뻗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손가락이 나를 향한다고 생각해 무슨 뜻일까 의아했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의 방향성이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내 뒤쪽, 화장실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장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중위님, 화장실 가고 싶으십니까?”
“아니고, 인마.”
나는 조금 생각하다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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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CLUB]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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