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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7:55 957회 0건


민성은 신촌의 한 호프집에 들어갔다. 1학년 때 미팅하느라 한 두번 와보고는 처음인데다가 주말 저녁이라 신촌은 사람들도 북적였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몇 번 묻고서야 재희와 윤진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석재희는 윤진과 민성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윤진과 같은 중학교를 나오고 그때부터 윤진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민성은 대학교 1학년때 서울로 대학을 진한 고등학교 모임에서 재희를 몇 번 본게 전부였다.

-몇분 이십니까?

술집 종업원이 다가와 물었다. 키가 크고 멀대같이 마른 20살 갓 넘은 남자였다.

-두명이요... 아... 아니다, 2명이랑 군인 1명이요 ㅋㅋㅋ

재희는 민성을 보고 쿡쿡거리며 말했다. 종업원은 셋을 자리로 안내했다.

-너 이제 쟤가 우리 서비스 별로 안 줄거 같다.

민성이 자리에 앉아 재희를 나무랐다.

-왜?
-딱보면 모르겠냐? 쟤 군대 안갔잖아. 근데 니가 면전에다가 군인을 비하했으니 당연히 빈정상했겠지. 딱 군대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나이인데. ㅋㅋㅋ 큰일 났다, 이제. ㅋㅋ
-군대를 갔다왔을지 어떻게 알아?
-저건 갔다온 피부가 아니야. 머리도 일본 가수처럼 저렇게 기르려면 전역하고 최소 몇 년인데 쟤가 어딜봐서 최소 스물다섯이겠냐?

재희와 민성이 티격태격 하는 동안 윤진은 조용히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지난번 약속대로 윤진은 서울로 한번 놀러오겠다고 했었는데 겸사겸사 재희도 볼겸 다 같이 모인 것이다. 민성은 모르겠지만 윤진과 재희는 지속적으로 오고가고 했던 모양이었다.

-너 팔꿈치는 왜 그래?

왼쪽 팔꿈치에 큰 거즈를 덧대고 반창고를 붙인 민성을 보고 윤진이 말했다.

-좀 다쳤어.
-말년병장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랬더니만, 낙엽에 맞았구나. ㅋㅋㅋ

재희가 킥킥거렸다.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리던 깜깜한 밤에 민성과 원찬은 빨래 건조대 위에 서 있었다.

-나 소라랑 헤어진거 알지?

원찬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했다. 라이터가 켜질 때 잠시 보인 원찬의 얼굴은 모든 걸 내려놓은 무위의 얼굴이었다.

-응. 그랬대매. 근데 뭐?
-근데 나 니 책 사이에서 이걸 발견했거든?

원찬은 주머니에서 소라의 편지를 꺼내 민성의 눈 앞으로 갖다댔다.

-나 자대 오자마자 온 편지인거 같은데 이거 왜 니가 가지고 있냐?

민성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몸을 약간 틀어 먼 곳을 바라보며 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민성이 말이 없자 원찬이 또 말을 덧붙였다.

-소라랑 잤냐?
-뭐? 뭐라는거야. 병신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갈 생각마라. 나도 다 촉이 있고 감이란게 있는거니깐.
-내가 소라랑 잤다고 뭐가 달라지냐?

민성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해버리자 원찬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루만 더 있으면 다시 밖으로 나갈수 있는데 민성은 이런 일이 생겨버리자 여간 성가신게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언제까지나 원찬을 안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갈 문제인 것은 분명했다.

-내가 소라 진심으로 좋아했던거 알지?
-알아. 그래서 뭐? 빨리 말해 졸려 씨발.

민성의 채근에 원찬은 꽁초가 다 된 담배를 땅바닥에 버려 발로 비벼 껐다. 민성은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담배꽁초를 발로 밟아 끈 원찬은 슬리퍼가 아니라 이 밤에 활동화를 신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민성은 반 보 정도 뒤로 물러나 혹시나 모를 태세를 준비했다.

-너 씨발새끼야, 그날 소라네 집에 있었지? 응?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원찬이 말하며 민성을 노려봤다. 큰소리 내봐야 서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모두에게 있었다.

-언제? 너 휴가 나온날? 응 그래.. 있었지.

민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찬이 민성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181센티미터의 큰 키의 원찬이 174의 민성의 멱살을 잡고 올리니 민성이 꽤 버거웠다.

-놓고말해 미친새끼야. 너 여기서 나 때리면 영창에서 안 끝나.
-좆까. 영창이든 뭐든. 너 죽이고 육군교도소 간다.

씩씩거리는 원찬은 멱살을 내려놓는 듯 싶더니 주먹으로 민성의 가슴팍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것과 더불어 얼굴은 때리지 않겠다는 것이 둘 사이의 암묵적 합의였다. 민성의 가슴팍에 날라든 원찬의 주먹을 민성은 가볍게 몸을 틀어 빗겨 맞았다. 그리고 그대로 민성은 자신의 주먹을 원찬의 명치에 꽂았다.

-으억... 컥..

명치를 움켜잡고 허리를 숙인 원찬은 구역질을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왜? 내가 소라랑 자서 니가 헤어졌을까봐? 좆까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그 전부터 이미 소라는 너랑 헤어질 준비하고 있었어. 걔가 맺고 끊는 걸 못해서 흐지부지 하는걸 니가 눈치 못챘던 거 뿐이지. 또 하나 말해줄까? 니가 군대가서 헤어졌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아쉽지만 그것도 아니야. 걔는 너 군대 안갔어도 헤어지려고 했었대.

원찬은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알게되자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민성은 조금 더 말을 붙여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너 군대 운전병 지원하고 몇 달을 밀렸다면서? 그 전에 소라는 너랑 헤어질려고 이미 마음 먹었는데 니가 계속 군대 미뤄지니깐 그냥 입대할때까지만 만나보자 뭐 이런 마인드였던거지. 그것도 모르고 눈치없이 나댄 니 잘못이지. 안그래?

민성의 속사포같은 공격에 망연자실했던 원찬이 멍하니 있다가 순간 웃음을 지었다.

-후훗... 웃기네.. 너 윤진이 때문에 이러냐? 너 내가 한 말을 다 믿고 있던거야? ㅋㅋㅋ 그치, 윤진이가 맛있기는 했지. 이 새끼 복수치고는 졸라 쪼잔하네.

원찬이 윤진을 언급하자 이번에는 민성이 원찬의 갈비를 주먹으로 세게 후려쳤다. 이번에도 원찬의 갈비에 정확히 꽂혔다. 한 대 맞은 원찬은 민성에게 달려들었지만 힘에서 민성의 상대가 안되었다. 잔챙이 공격들이 민성에게 몇 대 먹혔지만 원찬의 내상은 심각했다. 원찬의 고관절이 민성의 무릎에 찍히자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윤진이 일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래 .. 니 말대로 복수라고 하면 복수라고 할 수 있지. 니가 예전에 좆같이 살았던거 내가 좀 알려주려고 응?

민성은 이번에는 발로 원찬의 갈비를 걷어찼다. 아까 주먹으로 때린 그 부위였다. 이번엔 제대로 꽂혔는지 원찬이 둘사이의 금기를 깨고 둔탁한 비명을 크게 질렀다.

-악!!... 아....

두 무릎을 땅에 대고 한쪽 손으로 갈비를 움켜잡았다. 제대로 힘이 실린 발길질 이었기 때문에 많이 아팠다.

-그니깐 너보다 약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착하게 살아 씹새끼야.. 응? 알겠냐? 너 여기서 좆같이 해놔서 선임되도 애들 하나 갈구지 못할거야. 니 새끼 한달 선임까지 다 너 지켜보고 전역할테니까 알아서 해라. 알겠냐? 너 전역해서도.. ㅋㅋㅋ ..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ㅋㅋ 나 보면 지금 내가 가르쳐 준거 잊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캬~ 퉤

민성은 원찬의 뒤통수에다 대고 가래침을 켁 하고 뱉었다. 그래도 뒷목에 민성의 가래가 와서 묻었다. 민성은 건조대의 비닐 문을 열고 나갈려고 하였다. 그때 원찬이 건조대에 걸려있던 수건을 둘둘 말아 뒤에서 민성의 목을 졸라 당겼다. 민성은 뒤로 넘어가면서 아무 것이나 손에 잡히는 것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러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민성이 뒤로 쿵 하고 넘어지며 팔꿈치가 땅에 땋아 깨지고 말았다. 갈비를 움켜쥔 원찬이 일어나서 신나게 민성을 밟았다.

-야 이 좆만한 새끼야... 좆밥 등신 새끼를 병장이라고 좀 고분고분 해주니깐 아주 눈에 뵈는게 없지? 넌 예전부터 나한테 벌레만도 못한 새끼였어. 지가 병신같아서 지 좋아하는 여자 뺏겨놓고 어디서 남의 여친을 건드려? 내가 그때 애들을 왜 괴롭혔냐고? 병신들이라 괴롭힐만 하니깐 괴롭혔다. 개새끼야.

원찬의 발길질에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뒤 원찬이 숨을 고를때 원찬의 다리 한쪽으로 잡고 끌어당겨 원찬을 넘어뜨렸다. 원찬이 억~ 하고 넘어지면서 건조대 살에 옆구리가 살짝 찢겨나갔다. 건조대 일부분이 녹이 슬어 떨어져 나간 부분을 용접하지 않고 뾰쪽한 상태로 두었기 때문이다. 원찬을 눕힌 다음 그 위에 민성이 다시 올라탔다. 얼굴은 때리지 못하고 민성도 원찬의 목을 졸랐다.

-넌 씨발아,, 사람은 안변한다는거 알고 있었다. 넌 그렇게 살아라. 응? 병신같아서 좋아하는 여자 뺏겼다고? 그건 지금 너한테 하는 소리냐? 응? ㅋㅋㅋ 지가 결론 내렸네. 너도 니가 병신같아서 뺏긴거지, 난 아무 것도 한거 없다. 소라가 진짜 탱탱하긴 하더라. 넣자마자 나도 쌀뻔했다. 여보라고 신음 지르면서 요분질 해대는데... 왜 맛있는거 너만 먹냐? 내가 그년 걸레로 만든 다음 아무나 다 먹는 창녀로 만들거다.

민성은 원찬에게 들으라는 듯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하면서 소라를 욕보였다. 원찬은 반격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였지만 민성의 우악스러운 손이 목을 너무 강하게 누르고 있어 점차 온몸에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원찬의 눈에 흰자만 뜨기 시작했다.

-민성아. 그만해라. 너 군생활 할거 다하고 인생 좆될래?

어느순간 뒤에 와 있는 두식이 민성을 팔로 감아 들어 올렸다. 민성이 아무리 운동을 해서 힘이 좋다고 해도 타고난 장사 체질인 두식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두식은 민성을 뒤로 들어 털썩 주저 앉혔다.

-나도 니네 둘 이야기 어느정도 알아서 하는 소린데.. 다 부질 없다. 그리고 싸울거면 나가서 싸워. 나 분대장 위로 휴가 짤리면 니네 둘은 나한테 죽는다. ㅋㅋㅋㅋ

두식은 농담을 섞어가며 민성을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콜록콜록 하던 원찬은 모로 누워 숨을 크게 한번 쉬고 자신의 목을 잡고 헛구역질을 하였다. 두식은 민규를 불러 원찬은 컨테이너로 데려갔다. 민성은 재빨리 피가 나는 옆구리 부분을 닦고 활동복을 갈아입혔다. 민성은 당직사관에게 원찬이 열이 갑자기 오른다고 데려갔다. 당직사관이 보기에 땀을 뻘뻘 흘리고 안색이 창백한 것으로 보아 고열이라고 판단하고 급히 의무중대로 데려가라고 했다. 한밤중에 두식과 민성이 원찬을 의무중대로 데려갔다. 아직 군생활을 몇 달 더 해야 하는 민규는 배려하는 차원에서 이번일에서 빠지라고 하였다. 의무중대에 원찬을 데려가니 의무당직병과 불침번이 원찬을 침대에 눕혔다. 운전병과 의무병은 사격훈련이나 행군 등 다른 중대 행사 때마다 항상 붙어 다니고 훈련때도 항상 옆에 막사를 쳤기 때문에 친했다. 의무당직병 이성훈은 민성에게 물었다.

-뭐야, 얘?
-성훈이형. 잠깐 나랑 이야기좀 하자.

민성은 성훈에게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다시 돌아와 원찬의 가슴을 만져보니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성훈은 민성에게 속삭였다.

-야, 얘 이거 갈비 나간거 아니야?
-설마 주먹이랑 발로 때렸다고 사람 뼈가 부러지겠어?
-니가 그랬지? 두식이처럼 진짜 조폭은 사람 안때리거든 ㅋㅋㅋ

성훈이가 두식으로 보며 농담하자 두식도 맞받아쳤다.

-성훈이 형. 난 소시민은 안때리지만 돌팔이 의무병은 때려 ㅋㅋㅋ

이성훈은 당일 당직 군의관실 앞으로 가 노크를 했다. 두 번 노크를 해서야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무슨일이야?

성훈은 군의관실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말했다.

-감기 환자 들어왔습니다.

당직군의관은 태블릿으로 다운받은 영화를 보고 있었다. 성훈쪽으로 고개한번 돌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몇 도야?
-38.7도입니다.

성훈은 당직군의관이 저렇게 쳐박혀서 영화만 볼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알 짬이었기 때문에 열을 재보지도 않고 임기응변으로 말했다.

-그래? 수액 남은거 있지? 그거 한 대 맞추고 재워.
-네. 알겠습니다.

성훈은 문을 닫고 나와 민성을 보고 끄덕거렸다. 일이 다 되었다는 뜻이었다. 민성은 원찬을 내려다 보았다. 원찬도 민성을 보고 있었다. 노려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렇게 원찬은 의무중대 한켠에 있는 환자실에 들어갔다.
민성은 본부중대로 돌아오면서 그 눈빛을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자신도 괜히 민성에게 맞았다고 일을 크게 만들지 않겠다는 눈빛이었을까. 아니면 오늘의 패배는 확실히 인정하고 다음번을 기약한다는 의미였을까. 윤진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가 허풍이 섞였듯이 민성도 소라에 대한 이야기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는 표정이었을까. 민성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자리가 바뀐 것 같았다.





-자자, 건배하자. 윤진이와 민성이의 재결합을 위하여~!

재희가 소주잔을 들어올리며 건배를 제안했다. 윤진은 입을 손으로 가리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민성도 일단 빙긋 웃으며 건배를 했다.

-야, 무슨 40넘은 재혼커플도 아니고 재결합이냐. 단어 선택하고는 ㅋㅋ

민성이 툴툴댔다.

-너 윤진이 소식 찾으려고 동네방네 쑤시고 다닌거 모를줄 아냐?
-내가 언제?
-너 노홍철이 어떻게 윤진이 번호 알았을거 같애?

재희가 한방 먹이자 민성이 들켰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홍철희가 자신에게 알려준 윤진의 번호가 재희한테 얻은 것이었다는 걸 알았다.

-둘이 뭐 어떻게 할거야? 주말부부로 살거야? 여기 민성이가 방 얻어서 혼자 사니까 영락없이 윤진이 니가 올라와야 겠네. ㅋㅋ

재희가 계속 주책맞게 둘을 놀리자 이번에는 윤진이도 손사래를 쳤다.

-얘는 무슨 ㅋㅋ 자꾸 이럴래?

윤진이 귀여운 표정으로 재희를 말렸다. 민성은 쑥스러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음에도 멈추지 말고 재희가 계속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셋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인 만큼 즐겁게 놀았다. 재희네 집은 오빠와 재희 자신이 둘 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므로 청주의 본가를 전세를 내주고 그 돈을 보태서 서울에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고 했다. 그래서 11시가 넘어가자 재희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민성은 너무 아쉬었다. 그러나 체육교사 였던 재희의 아버지가 살짝 기억났다.

-나 대중교통 아니고 택시로 들어가는 날엔 다음날 변사체로 발견될거다. 그럼 윤진이 서울 안오지.. ㅋㅋ 아직까지는 민성이 너가 아니라 나보러 오는 거니깐.. 앞으로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히히..

재희는 끝까지 윤진과 민성을 놀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성도 아쉽지만 지하철 역까지 윤진과 재희를 바래다 주었다.

-넌 지하철 안타?
-응 난 버스타고 가게. 어차피 지하철 타도 반대반향이고.. 273번 타면 집까지 한번에 가.
-그래. 오늘 즐거웠어. 난 재희네 집에서 신세좀 져야겠다. 앞으로 종종 보자.

윤진과 재희는 카드를 찍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민성도 집으로 돌아왔다. 입대할 때부터 오늘같은 술자리를 그리고 또 그렸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자리보다는 이렇게 친한 사람들끼리 소소하게 자리 만들어서 노는 것을 여름에 타이어 갈때나 겨울에 체인 칠때나 그리고 또 그렸던 소망이었다. 오늘 그것을 완벽하게 이루고 나니 기분이 날아갈듯 했다.







마지막 휴가를 복귀한 민성은 점호를 하러 중대 생활관으로 다 모였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뭔지 모를 기분이 휩싸였다. 원찬의 밑으로 운전병이 한명 더 들어왔다. 오토로는 좀 몰아봤다고 한다.

-사회에서 뭐했어?
-예 학교다녔습니다.
-여자친구는 있어?
-없습니다.

민성은 신병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바라본 신병은 자신의 후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처음 자대에 왔을때 저런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오늘 온 신병도 이곳에서 많은 경험과 추억과 좆같음을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아련해졌다.

-나 내일 집에 가거든. 나보다 한 살어리네. 그냥 오늘 형이라고 불러. ㅋㅋ
-아니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신병의 말 실수에 분대원 전원이 웃었다. 원찬이 신병에게 뭐라고 주의를 주는 모양이었다. 원찬도 이제 맞선임으로서 일을 하는 듯 보였다. 민성은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다른 애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점호준비에 잡담에 갈굼에 한창이었다. 원찬은 앞에서 각을 잡고 앉아 있었다. 다행히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오늘 당직사관은 행정보급관 이찬휘 원사였다. 행정보급관이 점호를 서면 정식대로 하지 않고 줄창 잡담만 하다가 9시 45분이 되면 복무신조를 하고 칼같이 점호를 끝낸다. 그래서 중대 인원들이 당직사관으로서는 가장 좋아하는 간부였다.

-내일 두명 집에 가지? 앞으로 나와봐.

이찬휘 원사가 생활관 끝 쪽으로 박경철과 최민성을 불렀다. 박경철이 어기적거리면서 나왔다. 그 뒤로 최민성이 이었다.

-경철이 이 새끼 살찐거봐.. 너 군대가 편했지?
-안편했습니다. 이게 다 스트레스 때문에 찐겁니다. ㅋㅋㅋ
-한마디씩 해봐.

행정보급관이 경철의 배를 인원현황판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경철은 행정보급관의 팔을 잡으면서 장난을 쳤다. 자리를 마련해주고 보급관은 생활관에서 빠져나갔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경철이 말을 이었다.

-안녕. 난 내일 집에 간다. ㅋㅋㅋ 음.. 할말을 생각해보지 않아서... 음... 난 배차계 일을 봤기 때문에 중대 인원들 하고 다 친하게 지낸거 같아. 참모부 계원들 하고도 친했지. 특히 군수과랑 작전과. 항상 차 문제로 말들 많았잖아. ㅋㅋ 매번 행정반에만 있다보니까 행정병들하고도 친했고. 수송부애들이랑은 뭐 말할것도 없고. 좆같은 배차 매번 군소리 않고 나가줘서 고마웠다. 처음에 자대 왔을때 졸라 추웠는데, 배차계원 하면 위병소 근무 빼주고 불침번만 선다길래 얼씨구나 하고 덥썩 물었지. 진짜 지난 세월동안 스트레스 때문에 쪄 죽는줄 알았어. 새로 뽑은 배차계 부사수한테는 미안하지만.. 너도 좀 좆되바라. ㅋㅋㅋ 그래도 많은 보람 느꼈고 ㅋ 내친김에 말년에 엑셀 자격증도 따고... 군대 참 좆같지만 그래도 몸 건강히 있다가 나가게 돼서 다행이다. 너희들도 건강하게 있다가 나와. 그거면 됐지. 전역하면 페이0북 친구 하고 알겠지? 고생 많았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민성은 경철의 말을 듣고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다. 동기로 와서 온갖 고생 다 했던 사이였다. 둘이 한겨울에 익지 않은 컵라면을 세탁실 안에서 몰래 씹어먹던 기억도 새록새록 돋았다. 민성이 이등병일때 민성을 믿고 1호차 최종후보에 추천해주었던 것도 경철이었다.
민성이 한마디 하려 일어났을때 경철 때문에 울컥한 기분을 참느라 애를 썼다. 겉으로는 환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1호차를 1년 넘게 해가지고 중대 인원들하고는 그다지 교류를 못했는데 병장때 다시 1호떼고 친해지려고 노력 많이 했어. 우리 다 힘들게 지금 있는거잖아. 난 그래서 군생활 재미있게 있다가 가려고 했지. 혹시라도 나 때문에 서운했거나 불만있었던 사람들은 언제라도 이야기 해줘.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을거야. 그리고 난 성격이나 몸이 입대전에는 지금과는 되게 달랐거든. 내 자신이 별로 마음에 안들었어. 그래서 군대와서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달라지려고 노력 많이 했지. 책도 많이 읽어서 독서노트도 만들고 운동도 진짜 열심히 했어. 여기 좆같은거 너무나도 잘알지만 그래도 다 놔버리지 말고 목표한가지씩 삼고 매진하면 남는것도 있고 시간도 빨리 갈거야. 마지막으로 서로 싸우지 말고 선임 후임 예의만 딱 지켜가면서 재미있게 지내. 우리 다 또래잖아. 경철이 말한대로 그렇게 다치지말고 건강히 나와서 사회에서 소주한잔 하자.

이번에도 박수가 흘러나왔다. 경철이 준 감동 때문에 민성은 자신이 뭐라고 이야기 한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한 기분이었다. 점호는 그렇게 마치고 모두 돌아가 취침을 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에서 모든 분대 인원이 가는 민성을 축하반 부러움 반으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신아, 1호차 힘들지? 애들은 다 꿀이라고 해도 해본 사람들은 다 알지? 운전 잘하는 거보다 연대장님이랑 친해지는게 더 필요해. 요행같지만 결국 모든게 다 사람이 하는 일이거든. 사람을 얻어야 되는거야.
-씨발 무슨 노인네 말하는 거 같다. ㅋㅋ

두식이 중간에 끼어들어 킥킥 댔다. 민성이 휴가 복귀하기 전 피엑스에 사온 과자와 음료수를 까놓고 삥 둘러앉아 먹기 시작했다. 원찬과 신병은 자리에 누워 있었다. 민성은 민규에게 눈짓을 해 그들도 여기에 끼도록 했다. 원찬은 말없이 과자를 먹고 있었다.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고 11시가 넘은 시각 민성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복귀하는 도중에 기차와 지하철에서 딥슬립을 한 탓도 있었겠지만 마지막 밤이라 잠이 오지 않은 것이었다.
민성은 조용히 컨테이너에 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마침 불침번 사수가 정일이었다. 이제 상병을 달았는지 이것저것 부사수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민성은 정일에게 잠깐 주차장에 가겠다고 알렸다.
1호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조용히 앉았다. 앞 유리 밖으로 까만 산과 짙은 푸른색의 하늘, 그리고 깨알같이 박힌 수많은 별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민성은 클러치를 한번 밟아보았다. 슬리퍼를 신고 밟아 느낌이 영 어색했다. 민성이 신고 다니던 전투화의 왼쪽 굽이 한쪽만 닳아있었는데 클러치를 얼마나 밟았는지 실감이 났다. 전출을 간 강진후 대령도 생각났다. 내일 전역하면 통화 한번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가지 않을 것 같았던 군생활이 끝이 났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핸들에 팔을 두르고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고무냄새과 손때 냄새가 엉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다시는 맡지 못할 거 같아 민성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Y군에서 보낸 마지막 밤 하늘을 머릿속에 담아두고는 차에서 내렸다.

다음날 아침 중대장에게 전역신고를 하고 중대 간부와 참모부 간부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드리고 위병소를 빠져나왔다. 아침에 위병소를 걸어서 나오는 기분을 만끽했다. 경철과 돈을 합쳐 택시를 타고 J읍 버스 터미널까지 나왔다. 민성은 경철과 서울역까지 와서 헤어졌다. 민성은 청주에 있는 집으로 갔다. 부모님이 수고했다고 격려해주었다. 전투복 상의를 풀어헤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게 달라졌을 것이다. 민성은 가장 먼저 그녀가 보고 싶었다.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응 나야. 지금 전역했어. 조만간 볼까?
-제대한거 축하해. 정말 수고 많았어. 곧 보자. 꼭

그녀는 진심으로 민성의 전역을 축하해주었다. 통화가 끝나고 민성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개운해졌다. 인생의 새로운 막이 다시 열리는 기분이었다. 민성은 창문을 열고 싶었다. 민성은 천천히, 그러나 힘차게 일어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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