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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7:50 842회 0건
운전기사는 움찔했지만, 곧 피식하고 웃더니, 손을 까딱거렸다. 그를 따라 들어간 편의점에서, 운전기사는 내 의사를 묻지 않고는 1400원짜리 병 커피 두 개를 사더니,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취향은 아니었지만, 나와 그는 편의점 벤치에 앉았다.

“이진명이다. 벌어먹고 살려니 어쩔 수가 없네. 미안하다.”
“바람이 찬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잠깐 들어갈래요.”
“그래도 되냐? 괜찮으면 머리 좀 감자. 이틀 째 씻지를 못했다.”
“그러세요. 들어가죠.”

내 방에 들어온, 운전기사 이진명은, 가구가 거의 없고, 두 면의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난 보일러의 온수버튼을 누른 후, 책상에 앉아 침대를 권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눈에 피로가 몰려 있었다. 잔뜩 충혈된 눈의 흰자위가 안쓰러웠다. 괜찮다면 한숨 자고 가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따뜻한 물이 나오려면, 잠깐 기다려야 하니까. 거기 좀 앉으세요.”
“아까 그 여학생이랑 사귀는 거냐? 남승현 학생이랑?”
“저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거죠?”
“학사정보에 있는 것들, 그리고 최근 만나는 사람들 정도다. 네게 오는 우편물들을 훔쳐서 카드 정보 같은 것들도 일정부분은 알고.”
“형이 생각하기에, 왜 그러는 것 같아요?”
“도련님이, 아니 진수가 만나는 그 미진이라는 학생의 아버지가 대전 바른교육 실천연대라는 시민단체의 대표야. 그건 아니?”
“아니요.”
“진수는 그 미진이라는 여자애를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게 아니야. 뭐랄까. 처장님과 진수 두 부자는 뭔가 비틀어져 있지. 그런데, 이 책을 다 본거냐?”
“읽기는 전부 읽었죠. 공부에 관련된 책들이 많아서 다 알지는 못하지만.”
“진수가 너 같았으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한 달에 얼마나 받으세요?”
“왜? 취직이라도 시켜주게?”
“생각이 있으시면요. 좀 힘들긴 하겠지만, 정규직 보장이죠.”
“난 배운 게 짧아서. 전과도 있고.”
“무슨 전과인데요? 폭력?”
“아니, 절도. 씨팔.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어디 시골에 가서 농사라도 짓고 싶다. 진짜.”
“시골에 갈 생각이 있으면, 시골 떡집에서 운전을 해 보는 건 어때요. 우리 부모님이 떡집을 하시거든요. 배달도 많고, 떡집이니까, 힘쓸 사람도 필요해서 그런데, 생각있으면 말을 하세요.”
“그래? 월급은 얼마나 줄 수 있는데. 200만원 줄 수 있냐?”
“지금 200만원도 받지 않고 일하시는 거에요? 이틀씩 밤을 새가면서 나를 감시하는데, 200만원도 주지 않는 건가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벌어먹고 살려면 도리가 없잖냐. 참, 한심하지. 나도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진짜.”
“형, 일단 씻고 와서 한 잠 자고 일어나서 이야기하죠. 그래야 될 것 같은데.”

이진명은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더니, 곧 김진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남승현과 함께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며, 승현이와 내가 함께 있는 사진은 찍어둔 게 있다는 보고를 했고, 김진수는 내가 돌아오면, 그것을 확인하고 퇴근해도 좋다는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이라는 말로 전화를 끊는 이진명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회한이 가득했다.

가끔씩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승환이의 옷과 속옷의 여벌이 있어서, 그것을 내줬더니, 이진명은 고마워하며 샤워를 했다. 난 그동안 종이가방을 하나 찾아서 그가 벗어놓은 옷들을 개켜서 싸놓고는, 형법각론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저예요.”
“어. 왜?”
“저번에 사람 뽑는 거요. 결정이 됐어요?”
“아니. 하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다들 농사일도 바쁘고, 운전도 잘 해야 해서, 젊은 사람이면 좋겠는데. 별로 사람이 없네.”
“월급은 얼마로 생각하시는데요? 200만원 주실 수 있으세요?”
“아예, 우리 집에 입주를 해서 살면서, 새벽에 일어날 수 있으면, 그 정도는 줘야지. 왜 사람이 있어?”
“아니요.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는데, 한 번 봐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이번에 승환이랑 내려갈 때, 같이 갈게요.”
“네가 아는 사람이니?”
“네. 선배에요. 덩치도 크고, 일도 잘 할 사람이고, 지금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으니까. 엄마 마음에 들면, 한 번 생각해 주세요.”
“딱이네. 우리 아들 생각이면 뽑아서 써야지.”
“알았어요. 엄마. 19일 날 내려갈게요.”
“그래.”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화장실의 문이 열리면서 하얀 증기와 함께 한결 개운해 보이는 이진명이 승환이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승환이가 덩치는 더 컸지만, 다리는 이진명이 더 길어서 바지가 짧았다. 이진명은 뭔가 고민하는 듯 하다가,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아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듯 물기를 닦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너, 나를 어떻게 믿고, 부모님께 내 이야기를 한 거냐. 난 너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인데.”
“승환이를 아시죠?”
“그 빵집의.. 그 아이는 왜?”
“승환이는 자기 부모를 폭행한 죄로 감옥에 갔죠. 화영이는 자기 친부모를 증오해서,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하고 있어요. 위선일지도 모르지만, 난 친구가 없는 사람들의 단 하나 뿐인 믿음직한 사람이 되는 게 좋아요. 예전부터 그랬죠. 모두의 친구가 되기보다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단 하나의 온전한 사랑을 받고 싶었죠. 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죠. 형 눈에서 가득한 외로움을 봤어요.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그런 눈이었죠. 내 말이 틀린가요?”

이진명은 내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난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인기스타가 될 것도 아니고, 사는 게 그렇잖아요. 서로 진득하게 믿는, 사람들 서넛만 있어도, 살기가 팍팍하지 않잖아요. 예전부터 그런 사람들을 찾고 있었어요. 행복은 성공이 아니라 만족이니까. 형, 내가 내민 손을 잡아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난 손을 내밀었고, 이진명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숙인채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악력이 좋아서, 꽉 쥐어진 손아귀가 아플 정도였다. 난 이진명의 손을 다른 손으로 덮어 잡으면서 말했다.

“이제 형은 김진수의 아빠 운전기사가 아니라, 우리 편인 거예요. 그렇죠?”
“응. 그래야지. 아무 걱정 하지 마.”
“그럼, 전화를 거세요. 내일부터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요.”
“내가 지금 이렇게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또 그 일을 하게 될 텐데.”
“형은 이제 내 편이잖아요. 난 내 편에게는 힘든 일, 거짓말, 싫은 일을 하게 하지 않아요. 지금 형 눈이 어떤지 아세요. 가서 좀 주무세요. 알람을 끄고 11시도 좋고, 오후 한 시도 좋고. 그렇게 자요. 아,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지금 밖에 나가서 차를 몰고, 김진수네 집에 가져다 놓고, 택시를 타고 돌아와서 전화를 끄고 주무세요. 그리고 일어나면, 나한테 전화를 주세요.”
“괜찮을까?”
“약점을 잡힌 게 있으세요?”
“아니. 특별히 뭐 그런 건 없는데.”
“그럼 그렇게 하세요. 약속드릴게요. 적어도 지금 사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뒤는 제가 정리해 드릴게요.”
“고맙다. 진심이야.”
“차비는 있으세요?”
“그럼.”
“내일 전화를 주세요.”

이진명이 몇 번이고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고, 나는 이진명이 한 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꼬인 부자관계라.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상형의 여자라 스스로를 속여 가며 미진이를 꼬여낸 아들이라는 간극에 대해서 생각을 골몰한 결과, 하나의 단어가 머릿속을 채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단어는 욕망이었다.

다음 날이 되어, 난 김진수의 전화를 받았지만, 통화를 하지는 않았다. 이진명은 차에 키를 끼워둔 채로 지급받았던 핸드폰이며, 현금카드까지 모두 차 속에 넣어둔 채로, 이따위 짓은 못하겠다면서, 만약 자신을 다시 찾는다면, 그동안에 했던 모든 불법행위들을 경찰서에 신고한 후 자수하겠다는 말로 관계를 끊었다고 했다. 생각보다는 처신이 훌륭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했다. 난 만약 김진수 쪽에서 무슨 일을 하면, 승현이가 찍어뒀던 상처의 사진과 이진명의 증언으로 김진수의 아버지 쪽을 엮어 넣으려고 했었다.

점심나절에 잠깐 이진명과 통화를 한 것을 제외하면, 난 누구와 마주치지 않고, 온전히 공부에 집중을 하며 저녁이 다 될 때까지, 책상과 침대를 반복하면서 공부를 계속했는데, 과제도서실의 숨 막히는 공기보다는 역시, 아무도 없는 내 집의 일정한 내 공간 안에서의 공부가 더 집중도가 높았다.

하루나 이틀 정도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겠다 생각하다가 배가 고파져서,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역시나 냉장고에 있는 것은 생수가 유일했다. 뭘 시켜 먹을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나 아는 전화번호가 없었다. 시계를 확인했더니, 학교의 식당운영시간이 지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밥을 사먹어야 해서, 승현이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지 전화가 꺼져 있었다.

집 근처의 백반집에서 간단하게 먹어야지 하며,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는데, 집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미진이였다. 오래 울었는지, 눈두덩과 뺨이 부어 있었다.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서, 몸을 돌려 뛰어가는 미진이를 굳이 잡지 않았다. 이진명과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였다. 내가 이진명에게 한 말에 거짓은 없었다. 어렵고 아쉬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내가 믿는만큼 신뢰를 보상받고 싶었다. 하나하나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부모님, 승환이, 승현이, 화영이... 모두 믿을 수 있었다. 미진이를 생각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미진이는 믿을 수 없었다. 배신감에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래 좋아했던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보다 미진이를 잘 알았다. 쏟아부은 내 사랑만큼, 미진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난 미진이에게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잡지 않았다. 미진이는 그렇게 멀어져갔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서, 그냥 방으로 올라가서 책을 펴들었지만,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진이가 지금 하고 있을 일은 뻔했다. 집 멀리서, 아마도 내 눈이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내 방을 보면서 쭈그려 앉아서 울고 있을 것이다. 괜히 눈물이 났다. 배가 고프고, 눈도 시큰거리고, 기분이 더러웠다.

냉장고의 문을 열고, 찬물을 들이켰다. 말랐던 입 속이 물로 씻겨내려가는 듯 했다. 물을 삼키고는, 내 마음을 확인했다.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미진이를 알고 있는 만큼, 답답했다. 언제나 나는 내 본위의 삶을 살아왔었다. 미진이와의 결별 이후로, 난 휴학을 해야 했고, 전이라면 몹시도 기뻐했을 로또 2등에 당첨되고 나서도 기쁘기는커녕, 쓰레기같이 살아왔다. 만약 이진명과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이진명이 내 삶의 이유를 묻고, 내가 그를 도와주려는 마음을 갖지 못했다면, 내 삶은 계속해서 미진이에게 휘둘렸을 것이었다. 빌어먹을 기분이 나쁜, 김진수가 내 삶에 끼어들어서 바보같은 일을 하는 것 역시 미진이와 나의 남은 감정들 때문이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만약, 미진이가 아니라면, 난 미친 놈처럼 다른 여자들에게 상처를 입힐 일도 없었고, 하나 상관없는 인생들인, 김진수나 김진수의 아버지에게 복수를 해야겠다 생각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나는 미진이와 헤어질 것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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